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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래기, 정(情)을 살찌우다.

작성자박철우|작성시간23.07.21|조회수11 목록 댓글 0

 

 

시래기, 정(情)을 살찌우다 

 

 

 

 

소 눈망울같이 순한 집들이 옹기종기 하얀 눈을 덮고 있다. 시간이 멈춘 듯 수묵 깊은 처마 아래 무청 시래기가 익어간다. 겨우내 얼고 녹고, 정한(情恨)도 맺고 풀며 달빛 향기 층층이 내려앉는다. 고드름에 숙성하고 된바람에 건조한다. 털어내야 가벼워진다지, 제 욕심 비워낸 자리마다 푸른 숨결 영혼으로 살찐다. 늙은 어머니 손처럼 오그라들어 서걱거리는 속살에 “댕그랑” 풍경소리가 들릴 것 같다.

 

무서리가 내리고 찬 바람이 불어오면 처마 밑이 분주해진다. 드높은 가을하늘 아래 푸르게 자란 무, 살이 통통하게 오른 무를 수확하고 나면 그 줄기와 이파리가 시래기로 탈바꿈하는 시간이다. 굴비 두름처럼 볏짚으로 엮어 바람이 잘 통하는 응달에 줄줄이 매달아 놓으면 보는 것만으로도 한해가 풍요롭고 풍성하다. 푸른 풀물 다 마르려면 삼동 눈꽃 무수히 피우고 져야 할 모양이다. 허물을 벗듯 시래기의 온몸이 바삭바삭 부서져 내려야 제대로 겨울 풍경이 완성된다.

 

예전에는 처마마다 시래기 없는 집이 없었다. 김장김치와 함께 중요한 겨울 양식의 하나였다. 긴 긴 엄동설한에 허기진 배를 달래야 하는 구황식품인 줄만 알고 지냈지만 먹을 것 많은 세상이 된 지금에도 섬유질과 무기질이 많은 건강식품으로 여전히 주목받고 있다. 항암 작용과 면역력 강화, 골다공증과 빈혈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니 그리움만 먹고사는 음식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겨울은 정(情)이 살찌는 계절이다. ‘둥지’나 ‘보금자리’라는 말이 이때만큼 더 가깝고 정겹게 느껴지는 계절도 없다. 군불 땐 구들장은 밤낮으로 뜨끈하고, 들썩이는 식구들 숨소리가 울타리 안에서 온종일 떠날 줄을 모른다. 멀리서 들려오는 강 얼음 쩡쩡 갈라지는 소리, 얼어붙은 허공을 가르는 까치 날갯짓이 아니라면 모두 동면 속에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날은 추워도 마음만은 따뜻했다.

 

때가 되면 먹어야 할 일이다. 하루의 가장 큰 일과이고 행사이다. 특별히 기대할 것도 없는 밥상이지만 식구들은 행여나 놓칠세라 두리반 주위로 모여든다. 가마니를 짜다가 온 아버지 어깨 위에 팃검불이 나풀대고 아랫목에서 잠깐 낮잠에 들었던 막대의 입꼬리에 멀건 하품이 남아있지만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렇게 온 식구가 모여앉은 밥상은 반찬이 없어도 그 가족이라는 느낌만으로도 넉넉하고 풍요로웠다.

 

그 배경에 시래기가 있었다. 온 세상은 하얀 눈으로 뒤덮이고 문고리에 손이 쩍쩍 얼어붙는 추운 겨울, 어머니가 끓여준 뜨끈한 시래깃국에 밥 한 그릇을 땀이 후줄근하도록 말아먹던 그 시간을 잊을 수 없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마른 논에 물들어 가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이지만 형제 많은 집안의 밥상은 언제나 모자라게 마련이다. 밥투정이나 편식은커녕 시래기 국물이라도 실컷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렇게 겨울부터 봄까지 시래기 밥, 시래기죽, 시래기나물, 시래기 볶음으로 번갈아 가며 허기진 식구들의 배를 채워주었다. 끼니를 때우기 위한 구뜰한 음식이었지만 산천초목이 얼어붙은 겨울에 그나마 굶주림을 면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먹을거리였다.

 

시래기가 숨을 쉰다. 말라비틀어져 소멸할 것처럼 있다가도 물에 불리면 다시 제 모습으로 살아나는 것이 마술을 부리는 것 같다. 푸르른 날들을 기억하는 그리움과 몸의 온기가 유전인자처럼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마치 무더위 햇빛에 지쳐 오므라들었던 이끼가 소낙비를 만나 빗물체로 살아나는 듯하다.

 

그냥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질긴 무청이 부드러운 시래기가 되기 위해 숱한 고난의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덕장에 명태 말라가듯 맨몸으로 눈보라를 맞아내고 한기를 참아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고기 맛 한번 보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바람과 햇살이 주는 영양분도 골고루 받아들여야 한다. 허기진 사람들의 따뜻한 한 끼가 된다는 것이 희생과 헌신 없이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위에 시래기가 되어 생의 겨울을 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 돌아볼 일이다.

 

시래기 본래의 맛은 슴슴하고 담백하다. 우물처럼 고요하고 순수한 맛이라고 할까. 사람으로 치면 요란하게 나서는 법도 없이 남의 배경 역할을 하는 묵묵한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결코 뛰어나지는 않지만 꼭 필요한,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신만의 맛을 가진 그런 사람이다. 순하고 향긋한 맛을 주는 시래기처럼 세상살이도 품이 넉넉하고 온기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일이다.

 

지금도 어머니는 고기반찬보다 시래기가 더 맛있다고 한다. 가난한 시절 신산고초를 다 겪어낸 어머니를 볼 때마다 푸석푸석해진 시래기를 대하듯 비릿한 슬픔이 느껴진다. 자식들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도마에 칼질 소리 요란하고, 구수한 된장 시래기 냄새가 손길보다 먼저 달려든다. 쪼글쪼글 마르고 주름진 시래기, 자식들 감싸 안고 굵은 실핏줄을 남긴 채 늙어 버린 어머니 모습이 따로 없다. 구멍 숭숭 뚫린 마른 잎 사이로 한평생 자식의 분신으로 살아온 생의 마디며 삶의 곡절이 담겨 있는 듯하다.

 

인간의 감각 중에서 미각과 후각은 특별히 어린 시절에 겪었던 맛의 경험과 깊은 관계에 놓인다고 한다. 익숙한 음식은 평생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삶에 영향을 미친다. 세상살이가 허전해서 무언가 기대어 위로받고 싶을 때, 간혹 자신이 누구인가를 되돌아 확인시켜주는 것이 어릴 때부터 먹던 음식이다. 시래기가 있는 그리운 밥상도 바로 ‘영혼의 음식’이 아닐까 한다.

 

접속만 있고 접촉이 없는 시대다. 시래기를 보면 내 곁에 고향이 있고, 어린 시절이 있고, 어머니가 있고, 가족이 되살아난다. 이재무 시인의 글처럼 ‘까닭 없이 서럽고 울적한 날 먹는다’는 음식이고, ‘추억의 자궁 같은 음식’이 시래기 국밥이다. 그 구수한 국물이 목구멍을 뜨겁게 넘어가면서 생을 잘 살아내었다는 안도감, 가난을 정으로 살찌우던 그 시절의 그리움이 울컥거린다.

 

 

- 허정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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