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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마산자락에는 미풍양속이 잘 보존되어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전통한옥마을인 예천군 감천면 돈산리 산골마을이 자리하고 있는데, 한양조씨 집성촌으로 조선중기 1600년대에 이곳에 터전을 잡고 세대를 이여 내려오고 있다. 마을을 풍수지리학상으로 보면, 주마산이라고 하는 현(玄)은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기상을 주면서 호연지기를 배울 수 있고 산 밑에 펼쳐진 마을은 배가 떠나가는 듯한 행주형(行舟形)이라 자손들이 진취적인 심성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 중심부에 자리한 팔우헌고택은‘양계초려’와 ‘팔우헌’ 그리고 ‘천곡서당’의 공간들은 모두 와우형(臥牛形)지형의 풍수설에 해당한다고 볼수 있는데, 풍수적으로 와우형(臥牛形)의 양택지는 좋은 터라고 한다. 즉 길지(吉地)속에 이 마을이 조성이 되여 있는 것이다.
돈산리 산골마을은 조선 영조 때 한양인(漢陽人) 조보양(趙普陽)이 유동(酉洞)에서 고방산(주마산 : 羅峙山) 동쪽에 터를 잡아 산골(山洞)이란 마을 이름을 지었으며, 동구에 있는 독서동(讀書洞)에 서당을 건립하고 문도(門徒)들을 모아 강학(講學)하였다. 명금간(鳴琴澗)에는 잉어바위가 천연적으로 물고기 모양(天然魚形)으로 누워있으며, 산골마을 중앙에 거북바위(龜岩)와 크고 작은 둥근 바위들이 군데군데 박혀있고, 주마산(走馬山) 동쪽에 반월산(半月山)이 있어 나직한 산들이 마을을 푹 둘러싸고 있다. 이 거북바위는 조보양(趙普陽,팔우헌공)이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하고자 이 곳에 쉬고 있을 때 잠시 꿈을 꾸었는데, 어떤 노인이 나타나서 “나는 이 거북바위의 신령(神靈)으로 만약 그대가 이 곳에다 터를 잡고 살면 자손이 번창하고 가문(家門)이 크게 일어날 테니 여기에서 살아라.” 하면서 “내가 동신(洞神)이 되어 그대의 후손(後孫)을 보살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여 정착(定着)하게 되었다고 한다. 거북바위 신령(神靈)을 모시기 위하여 동네 입구에 있는 버드나무를 동신목(洞神木) 으로 삼아 2년마다 동신제(洞神祭)를 지내고 있다. 인근 아랫마을인 유리(酉里,酉洞)는 마을의 생김새가 닭이 알을 품은 형국인 금계포란형(金鷄抱卵型)이라 하여 유래되었으며, 감천현(甘泉縣)과 역사를 함께 한 오래된 마을로 마을 복판에는 달걀처럼 생긴 바위 계란암(鷄卵岩)이 있으며, 김해(金海) 김씨(金氏)와 경주(慶州) 최씨(崔氏)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범바우 마을 뒷산에는 범같이 생긴 큰 바위가 마을을 바라본다 하여 범바우(虎岩), 또는 안마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 마을 특산품(特産品)인 배(梨)는 관배(官梨)라고 하여 조선시대 진상품(進上品)으로 올려졌다고 한다.
<산골마을의 유동종중 세계표와 정자분포도>
<돈산리로 들어가는 초입부 : 다리건너 좌회전하여 진입하는데, 현재 진입로를 확포장 공사가 진행중이다.>
<주마산자락을 병풍삼아 형성된 유동마을, 예천↔영주간 28번 국도는 현재 자동차전용도로로 확. 포장공사가 공정 80% 정도로 진행중이다. >
<마을 진입로는 의외로 1차선 농로로 되있다. 유리마을에 들어서면 2차선으로 포장>
<예천지역에선 인재가 많이 태어나기로 유명한 조씨문중이라 올해도 인재의 탄생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네요!>
<산골마을로 진입하는 농로길: 저 위의 굴다리 밑으로 하여 마을로 진입>
▲유리(酉里,酉洞)는 마을의 생김새가 닭이 알을 품은 형국인 금계포란형(金鷄抱卵型)이라 하여 유래되었으며, 감천현(甘泉縣)과 역사를 함께 한 오래된 마을로 마을 복판에는 달걀처럼 생긴 바위 계란암(鷄卵岩)이 있으며, 김해(金海) 김씨(金氏)와 경주(慶州) 최씨(崔氏)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달관대의 솟을대문 앞엔 계란바위가 묻혀있다. 조선 영조 때 한양인(漢陽人) 조보양(趙普陽)이 유동(酉洞)에서 살다가 고방산(주마산 : 羅峙山) 동쪽에 터를 잡아 산골(山洞)이란 마을로 이거하게 된다. 유동에 살던 집터에 팔우헌공(조보양)을 기리는 달관대(達觀臺)를 최근에 복원하였다.
▲팔우헌공을 기리기 위하여 산골마을로 이거하시기 전에 살던 집터에 재사인 달관대(達觀臺)를 최근에 완공을 보았다.
▲달관대의 솟을대문
▲이곳 유리(유동)에서 살다가 새 주거지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살피러 가시던 중에 쉬는 중 잠시 꿈을 꾸었는데, 어떤 노인이 나타나서 “나는 이 거북바위의 신령(神靈)으로 만약 그대가 이 곳에다 터를 잡고 살면 자손이 번창하고 가문(家門)이 크게 일어날 테니 여기에서 살아라.” 하면서 “내가 동신(洞神)이 되어 그대의 후손(後孫)을 보살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여 산골마을에 정착(定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앞의 주마산 동편 산골마을에 거북바위 신령이 나타나 터전을 잡을 것을 알려 주어 산골마을로 이거하시게 된다.
<돈산리 마을 이정표지석:왼편으로 진입>
<고개마루를 내려가면서 마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함>
<저곳이 산골마을 이랍니다. 마을이 배가 떠나가는 듯한 행주형(行舟形)이라고 하네요! 그래서 이마을도 역시 영양의 주실마을과 마찬가지로 마을에서 우물 파는 것(배의 밑창에 구멍을 뚫는 것과 마찬가지)을 금기시 하였답니다.>
<마을 제일 아래에 위치한 공동재와 삼산정(이 어르신은 현재 생존해 계시는데, 잘 정비하여 놓았네요>
▲동네 수호신인 동신목(洞神木) : 거북바위 신령(神靈)을 모시기 위하여 동네 입구에 있는 버드나무를 동신목(洞神木) 으로 삼아 2년마다 동신제(洞神祭)를 지내고 있다.
<마을 당숲과 열부경주김씨비각>
▲열부 경주 김씨는 18세에 휘 泰후(태후, 한양조씨 21세)와 혼인하여 부모님을 정성으로 모시어 향리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불행히도 시집오신지 5년만에 夫君이 병을 얻자 내가 대신할 것을 하늘에게 빌며, 백방으로 약을 쓰고 하였으나 끝내 사별하게 되었다. 졸곡 후 3일만에 자결하니, 그 烈行을 嘉尙하여 후손들이 烈女碑閣을 마을 입구에 세웠다.
경북 예천군 감천면 돈산리(산골)에 있는 한양조씨 追遠齊이며 1743년(영조 19)에 건립한 후 1954년에 중수하였다. 처음에는 산곡공 할아버지에 의해 회계공 諱 관(1623∼1649, 진사), 죽림공 諱 명한(1609∼1666, 진사), 진사공 휘봉휘(진사), 유계공 諱 봉징(1657∼1716, 문과, 도사), 3세 4위를 모셨으나 산곡공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산곡공 諱 원익(1688∼1778)을 함께 모시고 있다. 향례는 매년 음력 3월 5일이다.
●한양조씨 13세 諱 貫(관)
●한양조씨 14세 諱 鳴漢(명한)
●한양조씨 15세 諱 鳳徽(봉휘)
●한양조씨 15세 諱 鳳徵(봉징)
●한양조씨 16세 諱 元益(원익)
<17세 몽양제사인 공동재> ●한양조씨17세 諱夢陽(몽양),호:공동제(공동재) 諱 元益의 五子,
▲팔우헌고택입구에 2007년1월 준공을 본 전통한옥생활 체험관
▲팔우헌고택입구에 2007년1월 준공을 본 전통한옥생활 체험관
▲팔우헌고택입구에 2007년1월 문을 연 전통한옥생활 체험관
▲팔우헌고택입구에 2007년1월 문을 연 전통한옥생활 체험관
▲팔우헌고택입구에 2007년1월 문을 연 전통한옥생활 체험관
▲팔우헌고택(이 고택은 대지만 약800여평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그 규모가 엄청났음을 보여준다) 앞에 회화나무고목이 팔우헌가의 흥망성쇠와 함께 그 생명을 다하여 가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스쳐간다. 오른쪽 거북바위가 팔우헌고택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는 듯하다. 왼쪽이 솟을대문, 가운데가 본채, 오른쪽이 천곡서당이 배치되여 있어 와우형(臥牛形)지형을 띄고 있다.
▲팔우헌고택, 천곡서원 앞의 땅속에 묻혀있는 이 거북바위는 조보양(趙普陽,팔우헌공)이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하고자 이 곳에 쉬고 있을 때 잠시 꿈을 꾸었는데, 어떤 노인이 나타나서 “나는 이 거북바위의 신령(神靈)으로 만약 그대가 이 곳에다 터를 잡고 살면 자손이 번창하고 가문(家門)이 크게 일어날 테니 여기에서 살아라.” 하면서 “내가 동신(洞神)이 되어 그대의 후손(後孫)을 보살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여 정착(定着)하게 되었다고 한다.
▲천곡서당은 산곡동(山谷洞)수구(水口) 독서동(讀書洞)에 1754년경에 팔우헌(八友軒) 조보양(趙普陽) 선생이 창건하여 원근학동(遠近學童)을 수학하고 향토사림(鄕土士林) 들의 강학(講學)의 장소이었는데, 1868년 산곡동 강당에 천곡서원을 창설하기 위해 이건 하였으나 1871년 조령(朝令: 毁撤令)에 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3년에 현지로 이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당에는 팔우헌 문집(八友軒 文集)과 학동에게 수업하던 박동록(泊董錄)외의 고서 천 여권이 있다고 전해진다. 천곡서당은 대문채(솟을 대문)에 들어서면 우측(원래는 대문과 마주치는 것으로 추측)에 천곡서당이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남향한 전면3칸에 일자형 누각 건축으로 중앙에 마루를 만들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고 툇마루가 전면 세 칸을 차지하고 있다. 어린이들의 교육공간으로 소규모이긴 하지만 이 건축물이 갖는 의미는 깊다.
자연환경에 지배를 받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마산이라고 하는 현(玄)은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기상을 주면서 호연지기를 배울 수 있고 산 밑에 펼쳐진 마을은 배가 떠나가는 듯한 행주형(行舟形)이라고 하는 것은 진취적인 심성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 자리한 ‘양계초려’와 ‘팔우헌’ 그리고 ‘천곡서당’의 공간들은 모두 와우형(臥牛形)지형의 풍수설에 해당한다고 하지만 그 의미는 물형에 의한 비교를 풍수에서는 물형설(物形說)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풍수적으로 와우형(臥牛形)의 양택지는 좋은 터라고 한다. 즉 길지(吉地)속에 ‘천곡서당’이 있는 셈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천곡서당’은 마을의 학동들에게 꿈을 키워주고 수신(修身)할 수 있는 교육공간으로 터를 잡은 것이다. 그 터 잡기(토지 이용)의 지혜를 풍수설과 역학을 통해서 얻은 셈이다. 그 만큼 이 지역이 유교문화권으로서 유교적 풍수지리사상에 의존하여 입지와 토지이용 그리고 조경(식재)을 조화로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천곡서당의 건축적 구조와 공간적 구획이 교육공간이면서 사랑채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 특히 동서로 길게 자리잡은 대지 위에는 기존의 대문채가 헐려 없어진 채로 새로운 대문이 전통식으로 세워지기는 하였지만 당초의 대문의 위치에는 폐허가 된 담장의 잔해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교육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서당은 작은 누각의 형태로 철학적 교육공간을 느끼게 한다. 뿐만 아니라 기와 잇기와 난간의 조형성은 천곡서당의 특징이기도 하다.
▲"양계초려" 현판이 걸려있는 살림집 안채, 현판에서 보듯이 이 건물은 초기엔 초가집이 있으나, 나중에 기와를 얹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기와집임.
<▲팔우헌정> ▲조보양(趙普陽, 1709~1788)은 예천군 감천면 돈산리 출신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인경(仁卿), 호는 팔우헌(八友軒)이다. 아버지는 정헌대부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팔우헌고택을 유구한 세월동안 지켜낸 담장
<팔우헌공 2子인 잠실헌 晏(안)>
<팔우헌고택을 지키고 가꾸시는 9대종손 조창섭님> 저는(조호영) 한양조씨 24세손, 팔우헌공 7세손 입니다.
▲산골마을 유동종중의 종손댁인 둔암정과 일봉정
▲유동종중의 종손댁인 둔암정
●한양조씨 17세 諱 葵陽(규양) 둔암공, 산곡공의 長子, 1706년 숙종 32년 병술생 - 1776년 영조 52년 병신졸, 6子 一女, 영조20년(1744년)에 성균 생원에 합격하였다. 중제 팔우헌 보양과 二子 석회가 문과에 동방(同榜) 급제하였고, 또 대인공(大人公)이 수작(壽爵)으로 정헌동추 (正憲同 樞)에 올라 삼대추증(三代追贈)을 받았다. 연첩(連疊)영광에 비할바 없건만 공은 浮華 (부화)하지 않고 노부모 봉양과 학문에 진력을 다하였을 뿐이다. 四子史傳과 百家編 朱子書節要 語類 및 性理鑑人集 五經龜賢등을 手抄(수초)하였으며, 저술한 책은 조선 과 중국에서도 이름을 떨쳤다. 둔암집이 있다.
長子 錫範(석범): 유계공 종손, 안동 별감좌수, 묘 마동
▲유동종중의 종손댁인 둔암정과 일봉정
▲유동종중의 종손댁인 둔암정
▲유동종중의 종손댁인 둔암정과 일봉정
▲趙錫晦(조석회): 일봉공, 官 우승지 저서로는 《일봉문집》 3권이 있다.
▲유동종중의 종손댁인 둔암정과 일봉정
▲팔우헌정과 고택 뒷모습
▲팔우헌정과 고택 뒷모습
▲유동종중의 종손댁인 둔암정과 일봉정(현대식건물은 살림집: 종손 조동한님 거주)
▲팔우헌정
▲팔우헌고택을 지키고 가꾸시는 9대종손 조창섭님
▲팔우헌고택을 지키고 가꾸시는 9대종손 조창섭님
▲팔우헌고택입구에 207년1월 준공을 본 전통한옥생활 체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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