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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면 소식

'두문불출과 황희 정승' 이야기

작성자박철우|작성시간23.05.25|조회수5 목록 댓글 0

반구정

淑雨 박철우

 

내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도다

 

매사를 항상

중용의 道로 간파하신

옛 황희 정승 말씀의 참뜻을

어찌 오늘의 우리가 모르랴마는

 

갈매기 떼와 벗하여 노니시던 반구정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건재하건만,

 

본디 한 몸이던 이 땅이

어쩌다 남북으로 두 토막 났냐고

임진강 너머를 물끄러미 굽어보시며

분단의 오늘을 마냥 꾸짖으시는가?

 

* 반구정(半鷗亭)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당동리에 위치한 정자로서, 조선시대에 영의정을 두 번씩이나 지낸 명재상 황희 선생이 말년에 낙향하시어 갈매기와 더불어 노니시던 곳임.

 

- 자작시 중에서 -

 

 

 

 

'두문불출과 황희 정승' 이야기

 

황희
조선왕조 5백년 동안 가장 어질고 슬기로우며 청렴결백한 재상으로 꼽히는 이가 황희(黃喜, 1363~1452)이다.
고려 말에 태어나 역성혁명으로 개국된 나라에서 관리를 지낼 수 없다 하여 70여 명의 고려조 신하들과 두문동에

은둔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을 탄생케 했던 황희. 그가 태종과 세종시대를 찬란히 빛나게 했던 명재상이다.

 


황희의 인품됨은 유명한 두 가지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젊은 날 들길을 가다가 밭 가는 농부가 귀엣말로 들려준
 “아무리 짐승이라도 제 잘못을 이야기하는데 좋아할 리 있습니까? 굳이 잘못을 탓하여 불쾌하게 할 것이야 없지요”
하는 말을 듣고 평생 언행에 조심했다는 일화와, 두 계집종이 말다툼을 하다가 옮고 그름을 따지기 위해 황희를

찾아왔는데,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 하여 서로의 입장을 편견 없이 보았다는 유명한 일화이다.
 황희는 그렇게 사사로운 일에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는 온화한 성품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무에서는 공사가 칼같이 분명하고 날카로웠다.

 


개성에서 태어나 14세에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된 황희의 어렸을 때 이름은 수로(壽老),

호는 방촌(尨村),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그의 20대, 기울어져가는 고려 말에 사마시·진사시·문과에 급제하였으나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묻혀 은거했다. 나라가 망했으니 새 왕조에 협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조선을 개창하는 과정에서 고려의 명신들을 모두 제거한 태조는

어느 날 측근을 불러 인품 좋고 유능한 인사를 발탁하고자 하는 뜻을 두문동에 전하게 했다.
이에 두문동에 은거하던 옛 신하들은 회의를 거쳐
 “역성혁명으로 나라를 빼앗은 태조는 밉지만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할 수는 없다”는 데 합의했고,
 황희가 추천되어 조선의 정사에 합류하게 된다.

황희에게 시련은 빨리 왔다. 황희가 당초 이씨왕조를 등졌다는 데서 마뜩찮게 여기던 사람들이 많았고,

이성계마저 점점 의심의 눈길을 던졌던 것이었다.
황희는 태조와 정종을 거치는 사이 별 잘못 없이 쫓겨났다가 복권되고 좌천되기 여러 번이었다.
태종이 왕이 되고서 그는 형조·예조·병조·이조 정랑을 차례로 거쳤다.
 당시 조정의 기밀을 전담하고 왕명출납을 맡던 으뜸 벼슬자리 지신사(知申事)로 오랫동안 있던

박석명(朴錫命)은 황희를 그 자리에 앉힌다는 조건부로 사임했다. 이때 황희의 나이 43세. 지신사는

뒷날 도승지(都承旨)로 명칭이 바뀌었다.
 태종은 황희를 사나흘만 안 봐도 불러들여 정사를 묻곤 할 정도로 두터이 신임했다.

황희는 목인해의 변란사건을 슬기롭게 처리한 공로로 지의정부사, 공조·병조·예조·이조 판서 등을 56세까지

두루 역임하게 된다.
 태종과 함께한 10년 동안 농사개량·뽕나무 재배로 의생활을 개선하고 예법을 고쳤다.
 법률집 『경제육전』을 다듬어 고쳤으며, 유사시에 대비토록 각 도에 군수물자를 조사·공급하는 등 각 부문에 걸쳐

공과가 많았다.

그러나 황희는 왕세자 폐출문제로 태종과 금이 가 변방으로 좌천되기도 한다.

이미 세자로 책봉된 태종의 맏아들 양녕대군이 왕이 될 재목이 못 된다 하여 후에 세종이 된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하자  황희는 “그것은 도리가 아니다”며 반대했던 것이다.
그뒤 황희가 반대했던 충녕대군이 세종이 되었을 때 황희는 관직을 빼앗기고 서인이 되어 교하(交河, 지금의 파주)로,
 다시 남원으로 귀양갔다. 세종 4년(1422) 왕위를 물려준 태종이 황희를 불러 세종에게 후히 대접하라고 부탁함으로써
18년간의 세종과 황희의 시대가 열린다.

세종과의 사이에서도 사사로운 오해와 난관이 없지 않았다.

그때 좌의정 직책을 내놓고 파주의 임진강변 반구정으로 내려와 만사를 잊고 자연과 갈매기를 벗하며 지냈다.
 이 무렵에 지은 그의 시가 “대초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듯드르며 / 벼 벤 그루에 게는 어이 내리는고 / 술 익자 체장사

지나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하는 시였다.
지금은 그 시에 묻어나는 정취를 맛볼 수 없이 변해버린 반구정 주변의 옛 풍정을 그렸던 것이다.


큰 인물은 오래 쉬지 못하는 법인지 그는 다시 세종의 부름을 받고 나가 영의정으로 국정을 살피다가

87세가 되어서야 오랜 관직에서 물러난다. 세종과 함께한 지 18년,
 세종대왕의 빛나는 업적 뒤엔 황희라는 지혜롭고 청렴한 명재상이 있었다.

황희는 조정에서 물러난 지 3년 뒤 세상을 떠났으니 90의 천수를 누리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한 삶이었다.

 

- 옮겨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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