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이야기 1010-9]
<우리가 잊고 있는 대마도 6: 조선통신사와 얽힌 이야기>
조선의 외교정책은 事大交隣으로 중국은 사대(事大)의 대상이고, 일본은 교린(交隣)의 대상이었다. 사대는 큰 나라를 섬김으로서 나라의 존립을 보장받고, 교린은 이웃과 평화를 유지함으로써 국방상의 문제점을 해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절단의 구상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이 역사적 통론이다. 조선통신사가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9년 만에 조ㆍ일 국교회복에 따른 조치였다.
1607년(선조 40년)부터 1811년(순조11년)까지 11차례 파견된 조선통신사는 300~500명으로 구성되었다. 국왕의 외교문서인 서계(書啓)를 휴대한 통신사의 정사(正使)는 보통 참의급(현 차관보)을 선발하여 파견했으나 일본에서는 수상과 같은 급의 대우를 받았다. 조선통신사의 행렬은 대마도-이키섬-시모노세끼-효고를 거쳐 오사카까지는 뱃길로, 오사카-교토-나고야-시즈오카-에도까지는 육로로, 양국의 80여 개 지역을 왕복하는 약 1만 1,420리(4,568km)의 대장정이었다. 평균10개월~1년이 소요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조선통신사의 출발일이 결정되면 임금은 삼사(정사, 부사, 종사관)를 궁으로 불러 어주를 내렸고, 그날 밤에는 영의정이 남대문 밖에서 송별연을 열어 주었다. 부산에 도착하면 영가대에서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해신제를 지냈다.
1617년(광해군 9년)부터 6척 가랑의 배에 나눠 타고 대마도를 떠났다. 대마도 도번(藩) 파견한 환영선의 안내로 대마도에 도착한 후 도번의 경호 아래 애도(동경)까지 왕래했다. 일본 수행인력까지 합하면 총 2,000명이 넘는 인사이기에 당시로는 보기 드문 대규모 행렬이었다. 통신사가 지나가는 각지의 다이묘(일본 헤이안 시대 이후 지방의 권력자, 수호)들은 경쟁 하듯이 통신사를 접대했다.
당시의 조선은 일본이 부러워하는 예와 범절,그리고 학문을 숭상하는 선비의 나라였다 통신사 객사는 제일 좋은 곳으로 선정했고, 객사에는 조선의 학문과 예술을 전수받으려는 일본의 문인과 유학자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일본은 불교를 국교로 삼아 육류섭취를 금했으나 통신사들에게는 돼지고기를 대접하기 위해 고기를 들이는 별도의 출입문이 있었다. 히로시마현에서는 통신사들에게 진상한 <국 3가지, 요리 15가지> 반찬상까지 전시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통신사가 2년 연속 오면 나라가 망할 것"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조선통신사 접대 경비는 현재의 화폐가치로는 약 500억 엔(4900억 원)에 이른다. 1800년대에는 가믐과 기근으로 재정난과 정치적 혼란이 겹쳐 파견요청을 미루어 오다가 1811년(순조 11년)12번째 마지막 통신사를 조선통신사를 맞았다. 규모는 2사(정사 김이교, 부사 이면구)를 포함해서 336명으로 줄었다. 장소도 애도(동경) 대신 대마도로 변경되었다. 이후 일본은 더 이상 조선통신사를 청하지 않았다.
그후 일본은 64년이 지난 1875년 (고종 12년) 9월 20일 조선통신사 대신 철포로 무장한 운요호(雲楊號)를 강화도로 보냈다. 운양호 사건은 1876년 결국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의 굴종과 양보를 끌어낸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첫째 조선의 부산과 인천을 20개 월 이내 개항 할 것, 둘째 일본인의 치외법귄 인정, 즉 일본인이 조선에서 저지른 범죄는 일본법에 의하여 처리할 것, 셋째 일본의 조선연안 측량 자유화, 네째 조선과 일본의 외교사절단은 수시 교류하고, 일본화폐 통용과 무관세 등으로 사실상 굴욕적인 개방을 승락했다.
조선통신사는 1811년 (순조 11년) 12화로 끝이났지만, 조선통신사와는 달리 예조참의 명의로 실시된 '조선사신단'은 1636년(인조 14년)이래 1860년 까지 평균 4~5년에 한 번씩 총 54회나 파견되었다. 이는 두 나라의 현안문제를 해결하고 외교정책을 수립하는데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했다. 이 '조신사'는 대마도를 중심으로 한 것으로 <문위행>이라 불리며, 군사적ㆍ경제적 목적을 지닌 대일외교의 창구였다. 대마도는 그때까지도 조선영토로 인식되었다.
1868년(고종 5년) 1월 3일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붕괴되고 왕위체제가 복귀되는 메이지 정부의 明治維新이 일어났다. 근대적 행정구역을 만드는 과정에서 1877년 대마도가 나가사키현에 속하면서 정식으로 일본령에 속하게 된다. 1905년 러 ㆍ일 전쟁이 대마도 해전에서 일본이 승리로 끝나면서 미국의 루즈벨트는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청 ㆍ일전쟁, 러ㆍ일 전쟁에서 미국은 모두 일본편이었고, 미국의 금융자본은 일본의 전쟁 자금의 돈 줄이었다. 이들 전쟁으로 미국은 일본의 조선반도 지배권을 인정해 주었다. 미국은 일본을 통해서 돈벌이하고, 군수장사로 이익 챙기기에 바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 독립투사들의 목숨건 피와 눈물의 저항이 없었다면 조선의 독립 역시 요원한 꿈이었을 것이다.
일본은 러ㆍ일 전쟁 전승의 댓가로 사할린 남쪽 절반을 할양받았고, 청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러시아로부터 중국의 대련과 여순 조치권을 이양받았다. 또한 장춘간 지선 조치권도 양도 받았다. 청나라의 귀띰이 있었지만, 결과는 일본의 <한반도의 강점>으로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대마도와 큐슈의 이키섬은 일본에게 석기ㆍ청동기 문화, 벼농사, 불교, 한자문화를 전해주는 창구였다. 고구마는 1763년(영조 39년) 예조참의 조엄이 일본 제 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 취임 축하 사신 정사로 갔다 오는 길에 대마도에서 갖고 온 것이다. 일본인들은 고구마를 '고귀위마(古貴爲麻)'라고 부른다. 대마도에는 아직도 한국식 유적과 역사ㆍ문화적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송천상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