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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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거이
백낙천(白樂天), 白居易
당나라 중기를 대표하는 시인.
부패한 사회상을 풍자·비판하고, 서민적이고 쉬운 필치로 문학의 폭을 확대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한가〉, 〈비파행〉, 〈진중음(秦中吟)〉, 〈신악부(新樂府)〉, 〈두릉의 노인〉등이 있다.
출생 772년
사망 846년
서민적인 필치로 사회를 풍자하다
‘시선(詩仙)’이라 일컬어지는 당나라 최고의 시인 이백은 시를 쓸 때 한 잔 술에 막힘없이 한 번에 써 내려갔다고 하며,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시인 두보는 열 번의 손질을 했다고 한다. 또 한 사람의 위대한 당나라 시인은 시를 탈고할 때마다 글을 모르는 노파에게 먼저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는 노파가 알아들었는지를 묻고, 만약 모르겠다고 하면 그녀가 뜻을 알 때까지 몇 번이고 고친 후에야 비로소 붓을 놓았다고 한다. 그가 바로 당나라 중기를 대표하는 대시인 백거이다. 그의 시는 쉬운 어휘로 이루어져 있으며, 통속적이면서도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다. 그는 문장은 시대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것에 맞춰 써야 하며, 문장은 문장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의 변화를 선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백거이의 자는 낙천(樂天)이며,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또는 취음선생(醉吟先生)이다. 그는 낙양 부근 신정(新鄭)의 하층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과 숙부들은 모두 관직 생활을 했으나 그가 태어날 즈음에는 가세가 기울어 넉넉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매우 총명했다고 하는데,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갈 지(之)’ 자와 ‘없을 무(無)’ 자 두 자를 구분할 수 있었고, 다섯 살에는 시 짓는 방법을 배웠다고 전한다. 또한 그는 열여섯 살 무렵 이미 시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백거이는 지방의 하층 사대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가 출세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합격해야만 했다. 755년에 일어난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기존의 계층 구조가 흔들려 당나라 중기에는 하층 사대부들도 과거를 통해서 중앙의 고위 관리로 등용될 수 있었다. 이에 선주(宣州)의 지방시험에서 합격한 백거이도 수도 장안에 가서 과거를 준비했다. 800년 스물아홉 살의 백거이는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803년 비서성 교서랑에 임명되었다. 그는 동료 원진(元縝)과 함께 당시 정세를 진단하고, 각종 폐단들을 고해 올렸다. 또한 민생 안정을 위해 감세 정책과 극형 폐지 등을 주장했으나 권세가들의 반감을 사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교서랑의 임기를 마친 백거이는 806년 장안에서 가까운 현의 현위로 파견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당시의 유명한 처사 진홍(陳鴻), 왕질부(王質夫)와 친분을 쌓고 그들과 함께 마외파를 유람하고, 양귀비의 묘를 찾았다. 백거이는 왕질부의 제의로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담은 장편시 〈장한가〉를 썼다.
808년 백거이는 조정의 부름을 받아 황제에게 직접 간언할 수 있는 좌습유에 임명되었다. 비록 높은 관직은 아니었으나 그는 황제에게 위민 정책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직접 진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시대의 병폐를 지적하고 황제와 관리들의 잘못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시들을 지었다. 그러나 이런 개혁적인 정치적 성향과 비판적 견해는 권문세가들의 미움을 샀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불편함을 느꼈던 당 현종은 결국 그를 경조부의 호조참군으로 강등시켰다. 811년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812년 딸까지 병으로 죽자 그는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머물렀다.
814년 백거이는 다시 임용되어 좌찬선대부가 되었고, 동궁의 태자를 보필했다. 이듬해 백거이는 재상 무원형(武元衡) 암살 사건의 범인을 잡아 처형할 것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암살범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범인을 처벌하지 않는 상황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소신 있는 행동은 결국 화를 자초했다. 당나라의 정치 관례상 태자부의 관리는 조정의 정사에 관여해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백거이는 이런 관례를 무시하고 상소를 올려 정사를 논했고, 이에 대해 당시 주화파와 주전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던 두 파는 단결하여 그를 공격했다.
조정의 대신들은 백거이를 질책하는 상소와 함께 그를 참소하는 유언비어를 유포했다. 유언비어는 ‘백거이의 어머니는 꽃을 보려다가 우물에 빠져 숨을 거뒀다. 이는 백거이가 부모를 잘 모시지 못해서다. 그럼에도 백거이는 시 〈상화(賞花)〉와 〈신정(新井)〉을 지었다. 이는 불효의 극치다’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백거이는 강서성 강주의 사마로 좌천되었다. 혹독한 정치적 모함과 비판을 받은 백거이는 이후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언급을 자제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