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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보면 소식

한나라 고조 유방

작성자성인봉 (지보)|작성시간24.02.03|조회수202 목록 댓글 0

이른바 ‘오호십육국 시대’, 한왕조가 멸망하고 북방민족들이 중국에 들어와 여기 저기서 왕조를 세우던 혼란기. 그 중 하나인 후조(後趙)를 세운 석륵(石勒)은 어느 날 신하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역대 인물 중에서 짐과 비교할 만한 사람이 누구겠느냐?” “폐하, 누가 감히 폐하의 위대하심에 견주겠습니까. 한고조나 위무제(조조)도 비교되지 않습니다. 이 화하(중국)를 세우신 황제(黃帝) 정도라야 비교가 될 듯합니다.” 석륵은 껄껄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아첨일랑 집어치워라. 짐이 만약 한고조와 동시대 사람이라면, 짐은 그의 신하가 되겠다. 광무제라면, 한 번 겨루어 보겠다. 조조나 사마의 따위는 이야기할 가치도 없다. 어린 황제를 볼모로 나라를 빼앗은 간신배들이니 말이다.”

한고조 유방. 그 스스로는 황제의 자리에 올라 축하연을 벌이는 자리에서 자신의 역량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장량(張良)처럼 교묘한 책략을 쓸 줄 모른다. 소하(蕭何)처럼 행정을 잘 살피고 군량을 제 때 보급할 줄도 모른다. 그렇다고 병사들을 이끌고 싸움에서 이기는 일을 잘 하느냐 하면, 한신(韓信)을 따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세 사람을 제대로 기용할 줄 안다. 반면 항우(項羽)는 단 한 사람, 범증(范增)조차 제대로 기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천하를 얻고, 항우는 얻지 못한 것이다.”

당시에나 지금에나 대부분 그런 평가에 동의한다. 유방은 정녕 사람을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명성은 약 5백 년 뒤의 풍운아가 “그의 신하가 되고 싶다”고 할 만큼 오래도록 빛을 발했다. 단지 그 끝은 다소 잔인했지만.

기원전 210년, 진시황제 영정(嬴政)이 사망했다. 영원하리라 장담하던 제국은 곧바로 불안과 혼란에 휩싸였다. 호해는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의 도움으로 형 부소를 없애고 2세 황제가 된다. 이후 조고는 이사마저 없애고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든 채 사실상 나라를 마음대로 다스렸다고 하는데, 그 폐단과 부패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하나의 테두리 안에 묶인 지 겨우 십여년에 불과한 중국 대륙은 여기 저기서 들끓기 시작했다.

천하대란의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진승(陳勝)이라고 한다. 머슴 출신인 그는 병력 소집에 따라 집결지로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린 비로 기한에 맞춰 도착하기 불가능해지고, 진나라의 법에 따르면 그것은 곧 죽음이므로 “어차피 죽을 바에는 되든 안 되든 한 번 일어서 보자! 왕후장상에 어찌 따로 씨가 있겠는가?” 하며 중국 최초의 농민반란이라는 ‘진승-오광의 난’을 일으켰다. 그는 비록 6개월 만에 패망했으나, 전국 각지에서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면서 진시황의 통일대업은 허무하게 스러져 버렸다.

왕후장상의 야심을 품은 군웅들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항우였다. 초나라 귀족의 혈통인 그는 스스로 “힘은 산을 잡아 뽑는다(力拔山)”고 했을 만치 초인적인 무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진나라가 몰살시킨 초나라 왕실의 후예로 살아남은 미심(芈心)을 찾아내 그를 ‘초회왕’으로 받듦으로써 명분에서도 다른 어중이떠중이 반군 지도자에 앞섰다. 그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초회왕을 다른 진나라 타도 세력의 맹주로 내세워 진시황 이후 중국에서 가장 유력한 인물이 되었다.

한편 패현 출신의 유방은 어머니가 교룡과 교합하여 태어났다느니, 망탕산에서 흰 뱀(오행설에서 진나라를 상징한다)을 베어 죽였다느니 하는 말이 있지만 나중에 덧붙여진 전설로 보이고, 실체는 전혀 보잘것없는 출신의 백수건달이었다.

그러나 술 마시고 싸움질하는 나날 속에서도 왕도와 패도를 논하는 등 남다른 데가 있어서, 믿고 따르는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도 진시황이 일찍 죽지 않고 진나라의 지배체제가 안정되었다면 그의 이름은 역사 속에 영원히 묻혔으리라. 진승이 봉기했을 때 그는 이미 마흔이 가까웠으며, 고향 패현의 장관을 죽이고 봉기하여 패공(沛公)이라 불렸다. 그는 수천 명의 병력을 모은 뒤 항우에게 찾아가 합류했다.

항우는 교만하고 포악한 기질을 숨기지 않았기에 주변 사람들이 받들면서도 두려워했다. 초회왕도 그랬던지, 유방을 은근히 중용하며 항우를 견제했다. 그리하여 “누구든 먼저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 입성하는 자에게 그 땅을 준다”는 선언에 따라 먼저 함양을 차지한 쪽은 유방이었다. 반면 항우는 거록에서 진나라 최후의 저항을 분쇄하느라 늦었는데, 뒤늦게 도착해 보니 유방은 “살인죄는 사형, 상해죄와 절도죄는 징역이다”는 ‘약법삼장’을 내세워 통치를 행하고 있었다.

항우는 초회왕의 선언을 무시하고 그 땅을 차지하고는 진나라에서 내세운 3세 황제 자영을 죽이고, 궁궐을 불태우며, 황릉을 파헤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유방은 부드러움으로, 항우는 매서움으로 민심을 장악하려 한 셈이다. 이로써 진나라가 망하자 항우는 스스로 초패왕(楚覇王)이라 칭하고 여러 동료들에게 제후를 봉했는데, 유방은 서쪽 변방지대인 촉 땅을 주며 한왕(漢王)이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자신이 받들었던 의제(초회왕)를 죽이고 사실상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유방은 촉 땅에 들어가며 중원과의 통로인 잔도를 불살라 결코 항우의 중원을 넘보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다. 그러나 그 해가 가기 전에(기원전 206년) 예전에 사용했던 잔도를 보수하고서 중원 침공을 개시했다. 여러 문학작품을 낳았고, 장기판에도 흔적을 남긴 ‘초-한 대전’의 시작이었다.

https://namu.wiki/w/%EA%B3%A0%EC%A0%9C(%EC%A0%84%ED%95%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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