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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총정리 북괴군 사망자 430명의 행방 ....지만원

작성자성인봉 (지보)|작성시간24.02.10|조회수82 목록 댓글 0

[지만원메시지(198)] 다시쓰는 5.18~③

5.18 총정리 
1. 박정희 대통령이 제거되자 김일성은 평생소원인 남침을 결심했다. 그가 평생 길러온 김대중은 제2의 박헌영이었다. ①김대중으로 하여금 남한에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내란폭동을 일으키게 하고, ②김대중으로부터 정의의 전쟁에 북이 참전해달라는 긴급요청을 하게하여 ③해주에 마련한 10만 상륙부대와 휴전선 부대로 하여금 한국군을 협공 포위하여 3일 이내에 남한을 접수한다는 시나리오다. [3일전쟁], 이는 당시 군 사회에 회자되던 공포용어이기도 했다. 김대중의 내란폭동에 핵심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김일성은 잠수함과 태백산맥을 이용해 살인기계로 훈련된 만능 맥가이버 600명을 6개월에 걸쳐 광주-전남지역에 침투시켰다. 김대중은 이것을 믿고 감히 5월22일 전민봉기를 일으키겠다는 선전포고를 감히 한 것이다.
 
2. 이 엄청난 계획이 전두환에 의해 일부 좌절됐다. 5월17일 전두환이 김대중과 그 일당을 긴급체포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을 정점으로 하는 전민봉기가 수포로 돌아감에 따라 그 전민봉기 방법을 수정했다. 광주-전라도를 혁명기지로 하여 전국폭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게릴라전과 심리전을 병행하는 방법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 핵심이 국민분노를 자극하는 유언비어와 괴담이었다.
 
계엄군에 환각제를 빼갈에 섞어 마시게 한 다음 양민을 미친 듯이 도륙하고 여성들을 희롱하다 칼로 이리저리 잘라 전봇대에 걸어놓았다는 등의 해괴한 유언비어가 먹혀들었다. 이 유언비어를 믿게하기 위해 600명의 맥가이버들은 계엄군이 배치돼 있지 않은 곳들에서 민간인들을 총으로 몽둥이로 칼로 살해해놓고 이를 계엄군 소행으로 뒤집어 씌우는 모략전을 수행했다. 마치 김대중이 자기 집 앞에 폭탄을 설치해놓고 폭발시켜 이를 박정희 대통령의 소행이라고 뒤집어 씌운 식의 모략전이었다.
 
3. 계엄군이 양민을 대량 학살했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보여주는 것은 “한국은 국가가 양민을 학살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정의구현을 위해 북이 남침한 것”이라는 명분을 얻는 데 필수요건이었다. 그래서 광주시민들이 수백명 단위로 나와 관을 진열해놓고 슬퍼한다는 사진들을 찍어 국제사회에 전파 할 필요가 있었다. 한쪽에서는 관을 붙잡고 통곡하는 모습을 수백명의 남녀노소들이 침울한 표정을 짓고 바라보게 하는 이른바 시체장사 장면들이 쏟아져 나왔고, 사망자 명단을 바라보게 하고 찍은 기획사진들도 나왔다. 이 장면에 탈북자 50여명이 몰려있었다. 이렇게 광주 민간인들로 위장한 남녀노소 1,000여명은 광주시민이 아니라 북한주민들이었다. 이렇게 많은 민간 남녀노소 집단이 어떻게 광주에까지 왔는가? 간첩에는 불가능이 없다. 합참의장 유병현 대장이 5.18직전 전남해안을 경비하던 군을 모두 전라북도 변산반도 북쪽으로 이동시켰다. 6.25 직전의 군을 지휘한 사람도 간첩이었다. 이 10개의 간첩행위를 군번1번 이형근 대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10대 불가사의라는 소제목으로 열거했다. 6.25 발발 전날 병력의 50%를 휴가보내고, 부대를 1주일 전에 이동시키고, 지휘관을 다 교체하는 등의 간첩행위들인 것이다.
 
4. 김일성은 무기를 탈취해 광주시민에 나누어주면 광주시민이 기꺼이 받아 전두환군을 향해 싸울 것으로 보고를 받은 것 같다. 6.25때 박헌영은 남침만 하면 남한의 공산주의자 20-30만이 적극 합세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고 자신감을 갖고 남침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예상을 빗나갔다. 5.18 광주에서는 사정이 다를 것으로 생각하고, 무기를 주었지만 광주시민은 오히려 남한말을 쓰지 않는 북괴군을 의심하면서 받지 않았다. 이에 다급해진 인민군 상장 리을설이 김일성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을 것이다. 김일성은 광주 교도소에 갇혀있는 간첩수 170명과 2,700명의 수용자들을 해방시켜 폭동의 동력으로 삼으라고 지시했다. 이는 계엄군에 무전 도청되었다.
 
5. 당시 광주교도소는 간첩으로 의심받던 정웅장군이 지휘하는 향토 제31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이 무전을 청취하고 교도소 방어임무를 제3 공수여단에 부여했다. 불과 2시간만의 발빠른 조치였다. 아마도 김일성은 교도소를 정웅 사단이 방어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내줄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희성 사령관이 허를 찌른 것이다. 김일성의 명령은 하늘의 명령이다. 특수군은 교도소를 공격하면 공격 도중 다 멸살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영광스럽게 죽어야했다. 야간무장공격을 5회씩이나 시도하다가 475명이 사망했다. 600명 중, 지휘부를 수호하는 100명 정도만 남기고 거의가 다 사망한 것이다. 전투력을 상실한 북괴 지휘부는 5월 24일, 낮에 전격 대형 선박을 타고 유유히 북으로 사라졌다. 이 475명 중 430명이 청주유골이었다. 이 475명은 북한문헌 3개와 조선영화촬영소가 1980년 그 해에 제작한 기록영화 내레이션에 강도 높게 등장한다.
 
6. 2014.5.13. 청주유골 430기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지만 세월호에 묻혀 이슈화되지 못했다. 아시안게임에 대한 홍보가 한창이었지만 북한은 시큰둥했다. 그런데 청주유골이 보도되자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참가하겠다고 대들었다. 미국 Fox뉴스는 이런 북괴의 돌변이 수상하다는 보도를 냈다. 아시안게임을 기화로 김정은 전용기를 보낼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한 것이다. 북괴 대남사업부장 김양건이 김대중 사망 5주기를 추념하기 위해 화환을 보낸다는 구실로 고정간첩으로 의심받는 임동원, 박지원, 김홍걸을 개성으로 불러 접선했다. 바로 이때 430구 유골이 선반식으로 일련번호를 달고 정리돼 있던 컨테이너박스를 실어갈 궁리를 의논했을 것이다. 2014.10.4.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황병서, 최룡해, 김양건 최고권력 3인방이 김정은 전용기를 타고 인천에 와서 하루종일 하품만 하다가 폐막식에 얼굴을 보인 후 돌아갔다. 필자는 이 이상한 현상을 도저히 해석할 수 없었다. 박근혜시대의 김관진 안보실장은 하루종일 북괴권력 3인방에 대한 의전으로 시간을 허비했다. 그러던 어느날 필자는 무릎을 쳤다. 청주시에 법원을 통해 사실확인을 해보니 430구에 대한 화장증명서가 없다. 조달청 나라장터에도 입찰공고가 없다. 430구가 간 곳은 단 한곳, 평양뿐이다. 이와 같은 결론에 무릎을 친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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