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소설가 이문열 선생의 "건국전쟁" 을 보고난 감상문입니다.
이제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아닌 멋진 드라마를 만들어 국민들 가슴에 감명을 주어야 할 차례입니다.
과거 정주영 선생님의 드라마에서 이명박 역으로 나온 유인촌 씨가 드라마가 큰 반향을 일으켜 이명박 대통령 과 유인촌 장관이 현실화된 것 처럼 멋진 드라마가 나와 대중의 가슴을 계몽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문화전쟁에서도 이겨야 합니다.
최근 넥스플렉스에 "2144억원의 스시" (?)가 뜨기 시작한다네요~!?
<건국전쟁(The Birth of Korea)을 보기 전에..>
이 감상문은 “선구자,선각자,예언자,애국자,불출세의 영웅,대붕,위인”이라고 불러야 할 사람을 이제까지 무지의 소치로 “독재자,미국의 앞잡이,친일파,런(run)승만,양민 학살의 주범,부정선거 방조자,하와이 망명자,막대한 비자금 조성자,플레이보이”라는 수식어의 포로가 되어 무관심이나 폄하의 대열에 동조해 왔던 통절한 반성에서 쓰여졌다.
명실공히 평생 국학을 전공했던 나는 교육과정에서 “이승만 (1875~1965) 대통령은 3·15 부정선거에 따른 4·19 의거로 하야한 초대 대통령 정도”로만 배웠을 뿐,이승만 위상 지우기를 자행해온 과거정권과 좌익이 주도해 온 민주화 투쟁기에 젊은 시절을 살아왔기에 현실적으로 더 이상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한마디로 대한민국의 건국과 이승만의 생애에 대한 학교교육이 전무했었다.
그러다 나는 첫째,뜬금없이 작년 6월 초대 대통령 '이승만기념관' 건립 캠페인이 벌어질 때,왜 이 시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재평가가 논의되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둘째,최근 재야문화사가인 몽아(夢兒) 김태선 사장께서 이승만·박정희·백선엽 관련 자료를 집대성하여 발간하는『후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의 추천사를 의뢰받으면서 일대기를 정독하게 되었다.
셋째,지난 2월 1일 이승만 대통령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개봉 소식을 듣고 바로 당일에 영화감상 후 내 마음의 바위에 부딪치는 감동의 파도를 잠재울 수 없었다.그동안 <길 위에 김대중>· <변호인>·<문재인입니다>·<기생충>· <그대가 조국>·<서울의 봄> 등의 영화감상에는 떼를 지어 세를 과시하더니,역사 바로 알기를 다룬 <건국전쟁>은 상영관도 제한되어 있고 사회지도층과 보수층까지도 무관심하니 영화관에는 시니어 수십 명만이 로얄석을 채울 뿐 빈자리가 더 많아 아쉬움을 느낄 수 있었다.뜻있는 재력가의 후원으로 젊은 세대에게 무료감상하는 기회라도 주어져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나도 몇몇 친목모임의 영화감상을 후원하려고 한다.
<다음은 전기와 영화에서 소개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의 주요 행적이다.>
1)1875년 3월 26일 전주이씨 후손으로 황해도 평산군에서 출생
2)1895년 구한말에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 수학하던 중 독립협회에 참여, 1898년 무능하고 부패한 고종의 하야를 외치다가(갑신정변)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 조선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알렌,언더우드,아펜젤러 등의 집요한 구명운동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 1904년 6년 만에 석방. 20대 청년 이승만은 옥중에서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집필하였는데,여기에서 5천 년 동안 지속되어온 우리나라 왕정(王政)을 민주공화정(共和政)으로 탈바꿈시키고 세계화와 선진화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을 제시함.
3)1904년 미국으로 유학 길을 떠나 6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프린스턴대 박사과정 이수.이때 맥아더 장군과 민족자결주의 선언으로 식민지 국가의 큰 희망이 되었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을 만남.
4)1910년 일시 귀국하여 YMCA 간사를 하다가 다시 도미.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폭력적 항거보다 외교를 통한 방법을 지속적으로 모색함과 동시에 국민들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이주민이 가장 많았던 하와이에 정착하여 육영사업에 매진.
5)1919년 3·1 운동 직후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질 때 초대 대통령으로 옹립.1922년 도미.1930년 미국에서 한국독립을 위한 적극적 외교활동.1942년 얄타회담에서 미쏘의 한반도 통치방안 비판.1945년 해방 후 40년간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 좌우익 내전상태와 공산주의의 위협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건국.
6)1948년 초대 대통령 당선되어 3대 대통령인 1960년까지 재임
- 1948년 스위스나 프랑스에 앞서 여성투표권을 부여.
- 토지개혁으로 사회안정과 경제발전을 도모.
- 국가보안법제정,여순반란진압,5천여 명의 간첩색출, 33만 명의 남로당원 숙청을 하여 대한민국 공산화저지.당시 남로당 숙청이 없이 1950년 6·25가 발발하였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임.
- 2만 7천여 명의 반공포로들을 석방하는 강수를 두며 미국에 압력을 가하여 기적적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전쟁 극복과 1953년 휴전 이후 대북 전쟁 억제와 안정적인 안보 환경을 보장.
- 교육입국 정책을 수립하여 문맹률 퇴치,원자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56년 한미 원자력 협정을 이끌어 내고 126명을 원자력 전문가로 육성하기 위해 해외유학 적극 추진.
- 4·19 의거 발생시 “불의를 보고 침묵하지 않는 학생들이 있으니 나는 성공한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1주일 뒤 자진 하야.
- 이화장 집무실의 소박한 의자와 책상과 다른 방에 있던 기워 입은 그의 옷그리고 하와이 망명시절에 뜻있는 해외교포의 후원으로 주택과 생활비를 해결해야 했던 생활에서 검소·청렴한 삶을 엿볼 수 있음.
7)1960년 4·19 의거 후 하야 후 1주일 뒤 하와이로 출국,5년 뒤인 1965년(90세) 해외에서 영면한 후 국립묘지에 안장됨.1960년 하야 직후 하와이로 갑자기 떠나 1965년 죽어서 돌아온 것은 당시 정권으로부터 귀국이 봉쇄된 것임.
이런 생애를 바탕으로 김활란(金活蘭) 여사는 “이승만은 미국의 조지 워싱턴,토머스 제퍼슨 그리고 에이브러햄 링컨을 모두 합친 만큼의 위인"이라고 하였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통일부 장관이었던 이인영은 '우리의 국부는 이승만이 아니라 김구다(대한민국이 건국되더라도 결국 북한에 의해 통일이 될 겁니다.나는 그때를 기다리기에 이승만 박사 주도의 건국에 참여할 수 없다라고 말한)라고 국회에 나와 증언할 정도로 오랜 기간 '이승만 죽이기' 정권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향한 미국인의 사랑과 관심은 시대를 초월해 뜨겁다. 기념관과 동상은 물론 그에 대한 전기·영화·TV 드라마가 넘친다.일본에선 봉건제를 허물고 근대국가를 세운 메이지 일왕과 혁명가들의, 중국에선 마오쩌둥의 영화와 드라마가 만들어졌다.그런데 우리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하여 그동안 정치역학의 희생물로 제대로 된 평가와 미화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만시지탄의 감이 있다.
다행히 2023년 6월 28일,전직 대통령 5명의 아들들이 한 자리에 모여 초대 대통령 '이승만 기념관' 건립의 필요성에 동감했다.이런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의 정적(그 政敵) 이라 불렸던 ‘죽산 조봉암(1898~1959) 기념사업회'의 주대환 부회장을 비롯해 4·19 혁명을 주도한 이영일 3선 국회의원,전직 운동권,진보 정치인 출신 등 다양한 정파와 배경의 인사들의 협조로 사단법인을 설립할 수 있었고, 이승만 기념관의 건립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으니 다행이라 하겠다.
그리고 국가보훈부가 2024년 1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이승만 대통령을 늦게나마 선정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 남과 북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기초한 경제 번영의 선진국”과 “자유를 억압하고 인권을 탄압하는 공산주의 독재”의 길로
갈라섰다. 지난 분단의 역사 속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고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희생과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김덕용 감독의 <건국전쟁>은 사실을 찾아 열거하면서 20여 명의 시사평론가가 등장하여 그 진실성을 논평해 주고 있다. 사장된 현대사를 재구하여 영원히 역사박물관에 보관될 <사기> 같은 기록물을 만든 감독에게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우리 모두 가족 동반 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