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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역사관

[스크랩] 제천전투후 죽령을 넘어 다시 배점리 위의 비로사에서 달밭골을 거쳐 민백이재를 넘어 단양 가곡면 어의곡리로 넘어가는 제천의병진

작성자범털과개털|작성시간14.06.20|조회수38 목록 댓글 0

제천전투후 죽령을 넘어 다시 배점리 위의 비로사에서 달밭골을 거쳐 민백이재를 넘어 단양 가곡면 어의곡리로 넘어가는 제천의병진(호좌의진)

 

을미의병의 제천의병진(의암 유인석 의진,호좌의진)

 

민비시해사건과 단발령으로 촉발된 유생들과 선비들은 의병을 논의했고...

1896년 음력 12월(을미년) 지평의병(포군이 주축)이 관군을 피해 원주 안창에서 창의하여 제천으로 이동하였고...

그 후 장기렴의 관군이 청풍방면으로 쳐들어오니까 제천의병진은 지평의 포군들을 인솔하여 장회협으로 이동하여 전투에서 이겻으나(장회협전투) 간첩과 내부분열책동으로, 전투에서는 이겼는데도...포수병들이 흩어져버렸다.

그뒤 흩어진 의병들과 이춘영의병장,서상렬영남소모장등은 죽령을 넘어 풍기와 순흥을 거쳐서 부석 소천장터를 거쳐 '마구령'을 넘어 남대리천변 계곡을 타고엎어지며 미끌어지며 간신히 단양 영춘 의풍리에 도착하였다.

⑤그뒤 제천에 남았던 안승우 의병진과 이춘영의병진을 영월서 합진했으며 민회를 열며 모든 유생들과 백성들을 불러모아  본격적으로 의암 유인석 선생이 창의장으로 추대되었다.(호좌의진 명칭 사용))

⑥그후 다시 제천을 점령하고 몇달간을  유지하였다.이때 예천의 궁공(弓工) 4명을 동원하여 활(목궁과 쇠뇌)을 만들어서 무기를 보충하였다고한다...

그후 충주성을 공격했고 점령하여 약 보름간을 지탱하였다 충주관찰사인 김규식을 처단했고 가흥창과 수안보쪽의 왜놈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그뒤 왜놈들의 공격을 받았고.. 왜놈들의 신식무기(화승총은 비오면  사용불능)를 못당하였고..그래서 다시 제천으로물러섰다.

 

⑦-1:이무렵이 문경출신 이강년의병장이 제천의진의 유격장이 되어 문경과 수안보를 공격하던 즈음이었고...서상렬 영남소모사가 안동,예안,풍기,순흥,영주(당시는 영천),봉화,예천 7읍진을 모아서 예천회맹(예천읍 한천냇가에서 백마를 잡아서 피를 받아 마시며 뱅세하는 의식)을 하고서 함창 태봉의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했다가 실패하고....안동부가 민간 가옥 1천호가  불태워진 때이고...퇴계종택택등이 불태워 질 때이다..학봉종택의 김하락 포대장과 서산 김흥락 선생이 고초를 겪을 무렵도 이즈음이다.3대 선성의병장이던 온계종택의 12대종손 지암 이인화 선생이 의병소를 온계종택에 세웠다가 왜놈들이 불지른 때도 이때이다

 

가흥창을 공격하다가 실패한 김백선(평민의병장, 포수대장)이 유인석의병장 앞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고 항명죄로 처단되었다.그 직후 제천 천남전투와 남산전투에서 중군장 안승우가 전사하는등 의병의 전투력이 크게 떨어졋고...제천에서 크게 패하였다.

...

 4월 15일경의 제천전투에서 크게 패한 유인석의병진(제천의병진,호좌의진))은 영남으로 향한다.죽령을 넘어 풍기로.....(아래참고)

 

위의 안동 관찰사 이남규는 학봉종택의 물품등을 빼앗기고 서산 김흥락 선생이 체포될려고 할때 힘을 좀 발휘했던 것 같다.빼앗긴 물품도 되찾아 주는 등의 역할을 했다고한다.1907년 정미의병때는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예산으로가서 의병을 창의한다.

 

제천의병진은 죽령을 넘고 풍기로 왔고...장기렴의 관군이 들어오자 비로사에서 군사점검을 한뒤 민백이재(영주 순흥 배점리  달밭골에서 단양 가곡 어의곡리로 넘어 가는 고개 를 넘어 )영춘 의골로 넘어간다......의골에서 아침밥을 해먹었다는 것은 관군의 추격을 뿌리치기위해 밤새워 행군을 햇다는 뜻이다.

 

제천의병진(호좌의진)은 단양-영월-평창-정선-원주를 거쳐 서북(만주)를 향해 간다...결국 유인석의병진은 만주에 당도햇지만 지방관군의 협박을 받았고....무장해제당햇다...그 직후 유인석의병장은 한많은 만주에서 의병을 해산하고 망명길에 오른다...

 

120년전~!! 우리 고향의 선조들은 의병항쟁에 나섰고 국권회복을 위해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그 정신....오늘에 한번 새겨 본다....

 

고종의 의병해산칙유와 아관파천등으로 정세가 뒤숭숭햇지만 대다수는 의병을 해산했고....다시 을사보호조약(1905년)으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재기한다.(중기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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