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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역사관

[스크랩] 단양팔경 사인암 그 역사의 흔적(호좌의진의 이강년,서상렬 의병장의 투혼)

작성자범털과개털|작성시간14.07.24|조회수57 목록 댓글 0

 

 

7.11  의당 박세화선생의 학문세계와 제천 병산영당 학술세미나(제천 문화원과 제천시가 후원하고  병산영당 주최)를 단양의 향토사학자인 지성룡선생과 윤수경선생님과 동행하여 참석한뒤....단양의 찜질방에서 잔뒤...사인암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사인암에 도착했다.비가 적게 와서 계곡의 물도  말랐다.

 

사인암은 고려 말의 학자 우탁(1263~1343년) 선생이 정4품 ‘사인재관’ 벼슬에 있을 때 휴양하던 곳이라 해서 사인암이라 불리게 되었다. 기암절벽 위에 서 있는 노송이 멋스러우며 우탁 선생이 직접 새긴 ‘뛰어난 것은 무리에 비유할 것이 없으며 확실하게 빼지 못한다. 혼자서도 두려운 것이 없으며 세상에 은둔해도 근심함이 없다’는 뜻의 글씨가 암벽에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인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2010.1.15, 마로니에북스)

 

우탁  선생은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하여 부왕인 충렬왕의 후궁이었던 숙창원비를 범간하는 패륜을 자행했을 때 도끼를 들고 임금 앞에 나가 직언했다 한다. 나의 말이 잘못되었을 때는 목을 쳐도 좋다는 '지부 상소(持斧上疏)'를 한 것이다. 그의 충의와 기개에 근신들은 몸을 떨었고 군왕은 부끄러운 빛을 감추지 못했다는 통렬한 역사의 인물이다.그래서 구한말 최익현선생도 지부상소를 한 것이리라... 선생은 특히 주역에 대한 식견이 높았다 한다. 중국의 학자 정관이 ‘주역은 이미 동쪽에 있었다’고 말할 정도였는데, 선생의 호 ‘역동’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사인암 옆에 청련암이란 암자가 있는데 그 옆에 사인암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계단 앞 바위에 우탁 선생의 시조 ‘탄로가(백발가)’가 새겨져 있다. ‘한손에 막대 잡고 / 또 한손에 가시 쥐고 / 늙는 길 가시로 막고 /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 백발이 제 먼저 알고 / 지름길로 오더라.’ 계단 위 삼성각의 오른쪽 석벽에는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다’는 글귀가 있다.

 

사인암은 명산대천을 사랑하던 옛사람들의 국토사랑에 많이 등장하는 곳이다.조선시대 김홍도가 그린 '단원화첩'에도 빼다 박은 그림이 있다.2008년에 명승 48호로 지정돼었다.

 

그러나 ,나는 사인암에 명승을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다.국운이 기울어가던 을미의병때, 호좌의진에서 영남으로 파견됐던 영남소토사 경암 서상렬  선생이 이곳에서 국권수호를 위해 전투를 했던 전적지이고,1907년 정미의병때 을미의병의 호좌의진을 계승한 운강 이강년의병장이 사인암에 몇번이나 주둔하고 거쳐 간 곳이 바로 이곳 사인암이다.그 때의 전적지 현장에서  '충효'와 '위정척사(衛定斥邪)'를 실천했던 선인들의 정신을 새겨 보고싶은 것이다.

 

과연 지역민들은 의병전쟁을 알고나 있을까?모른다면 내가 할일은 무엇이 있을까?

 

지역민들과 면사무소에 알려주고 안내판을 세우고..지역의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향토역사를 일께워줘야 하는 것이다.내지역 역사도 모르면서 일본놈들이 역사부정하고 중국놈들이 역사부정하는 것을 규탄해봤자 외국인들은 우리를 비웃을 뿐이다.

 

 

 

 

 

 

사인암앞에 수퍼(구멍가게)와 민박집들.식당이 몇곳 있다...그중에 이지역 토박이인 수퍼주인장이신 김영배어르신을 만나 몇가지  물어봤다.물론 의병전쟁을 잘모르신다.향토사학자나,역사학자들이 조사를 해도 행정기관이나 각급교육기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질 않는 것이다.도한 단양군과 문화원에서 단양독립운동사자료집을 내었지만 사인암 전투를현장을 깊이있게 다루질 못했다..

 

 

 

 

KBS 1박2일 촬영팀이 다녀간 사인암이다.그런데...1박2일이 국내여행 활성화에 상당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인데,아쉽게도 역사를 다루는데는 한계가 있었다.가장 안타까운 것이 그 지역의 의병장 이름을 퀴즈로 내지 못한 것이다.그러면 일반인들도 보고..또한 지역민들도 ..교사들도 지역의 의병전쟁에 대해 좀더 알수 있는 계기가 돼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다.구한말 의병전쟁기에 10여만명이 사망했다.그중에 우리가 이름을 아는 분이 과연 몇분이나 돼는가?

 

의병전쟁에 헌신하신 분들이 '미친놈'이 아니지 않는가?

 

 

 

 

영주 동산교회팀들도 계곡에 놀러를 왔다.목사님께 명함도주고 의병전쟁 답사회도 검색해보라고 했는데....과연...

계곡에 놀러온 가족들이 텐트를 쳤다.

 

 

 

 

2014.7.13 소백산 그랑폰도 자전거 일주대회가 열린다는 현수막이다.저수령과 그 넘어 명봉사와 도촌,그리고 올산과 사인암,그리고 죽령고개와 죽령 바로 아래 매바위(응암-鷹巖)은 의병전쟁 전적지인데....영주시자전거연합회 회원은 과연 몇분이나 알고 있을까?

 

올산 바로밑에 오니 대만으로 수출하는 컨테이너에 배추를 적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그런데 날이 가물어서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대만 현지의 마트직원들이 한국까지 와서 배추를 컨테이너에 싣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올산마을 사랑비

이웃한 저수령넘어 예천 상리면 지역(도촌등)과 마을 화합친선체육행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도촌이란 지명은 바로 역동 우탁선생이 '도(道)'를 성취한 곳이란 뜻에서 따왔다고 한다.

 

 

올산마을 풍경

 

 

올산리에서 약 1KM이상 올라와서 올산을 찍은 것.

 

 

 

저수령풍경이다.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나서 저수령을 통과하는 차량이 현저하게 줄었다.백두대간 종주하는 산악회원들이 저수령을 많이 찾는다.그러나 그냥한번 휙둘러보고 갈뿐 내가 100년전에 의병전쟁을 조금 설명할렸더니....듣지도 않고 그냥 가버린다.아래는 이날 만난 경기하나산악회 표식.

 

최고의 산행은 안전이다.그러나 (But~!!)최고의 애국애족은 역사교육이고 역사답사다.

 

역사를 싫어하고 관심없어 하면서 친일파를 욕하지 마랏~!!!

 

 

 

 

 

아래와 위사진은 을미의병(1896년)기의 제천의병(호좌의진,의암 류인석 대장) 자료이다.구완회교수의 '한말의 제천의병'p184-185

 

안동,선성,영주,풍기,순흥,봉화,영양,예천의병진이 예천 한천냇가에서 서상렬(호좌의진의 영남소토사)의 활약으로 '예천회맹'을 한뒤 상주함창 태봉의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했는데 (유인석 제천의병진은 충주를 공격했고, 유격장으로 임명된 이강년의병진은 수안보와 새재를 공격하였으며 예천의병진의 장부장은 문경 적성-당시에는 예천 적성을 수비하였다) 태봉 공격이 돈좌되고  뒤따라온 왜놈들의 방화로 안동부가 1천여호가 불탔다.그 직후 서상렬영남소토사는 명봉사에 몇일 유진하며 방어하다가 1주일뒤에 고개를 넘어 단양 사인암지역에서 방어하는 중인 것이다.

 

온계 이해종택(삼백당=퇴계 형님댁)은 을미의병때 선성(예안)의진 3대 의병장을 하신 12대손 지암 이인화가 종택을 의병소로 쓰자  관군과 왜놈들이  방화해 터만 남아 있던 것을 2011년 복원했고,이때 퇴계종택도 함께 방화되었고 1925년 전국 450여 문중의 십시일반의  도움으로 복구되었다.

삼백당은 요기참고  http://blog.naver.com/gaetuel/20197291385

퇴계종택은 요기참고 http://blog.naver.com/gaetuel/20202287677

 

 

 

위 아래 사진-정미의병(후기의병)기의 이강년 호좌의진이 단양 사인암(올산지역포함)과 죽령지역의 전투상황황이다.

 

 

위 형광색칠 부분의 사인암과 올산.사진에서 청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바로 저수령이다.남쪽은 예천 상리면 도촌이다.

 

겨울 설산을 국권회복을 위해 거의했던 의병들이 왜놈들과 부왜인에게 쫒겨서  도솔봉과 묘적령의 울 설산을 엎어지고 자빠지고 미끄러지면서 밤새도록 행군하여 아침을 사동에서 해먹였다.밤잠 못자고 추위에 떨면서 행군해야하는 의병들의 투혼을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단한번이라도 생각해보았는가?의병이 미친놈이고 의병전쟁이 미친놈의 전쟁인가?

 

역사에 무관심한 사람(백두대간 종주하는 분들 포함)들이 친일파보다 나은 것은 무엇인가?

 

 

아래 위사진-사인암전투와 죽령전투(운강 이강년 창의일록)

구인회 교수의 '한말의 제천의병'책과 창의일록을 비교하면 창의일록은 조금 상세하나 과장이 좀 있다는 부분이다.

 

 

 

 

저수령을 넘어서 명봉사가는 삼거리길까지 걸어왔다.군수송덕비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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