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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소식지

[스크랩] [낙동·백두를 가다] 예천, 그 곳엔 스토리가 있다

작성자수락대|작성시간09.09.28|조회수44 목록 댓글 0

[낙동·백두를 가다] 예천, 그 곳엔 스토리가 있다
 

용문사  

          

 
석송령(위)과 석송령 후계목
 

 

 

 

 

 

 

 

 

 

 

 

예천은  드넓은 들과 깨끗한 물, 수려한 자연 자산을

  가진 예천은 옛날 임금님에게 진상할 만큼의 좋은 쌀을 생산하고 있다.

 

감천면 천향 1리 석평마을에 가면 집채만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꽤 유명하다.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다. 바로 '석송령(천연기념물 제294호)'이다. '부자나무', '땅을 소유한 나무', '세금을 내는 나무' 등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석송령은 '참 잘생겼다'. 석송령은 '반송(盤松)'이다. 위로보다는 옆으로 펑퍼짐하게 자라는 소나무이다. 그래서 꼭 거대한 우산처럼 생겼고, 정원수 같았다.
 
키는 10m이지만 몸집은 동서로 32m, 남북으로 22m나 된다. 나이는 웬만한 가문의 '중시조'다. 문헌상에는 600살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대부터 600살이라 했으니 지금은 족히 700살은 된다고 했다. 실제로 석송령은 돌기둥과 철제 파이프가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가지를 떠받치고 있었다. 이 노거수는 사람이 가지고 있을 법한 땅 5천259㎡를 소유하고 있다. 등기일은 1927년 8월 10일이다. 거의 백년 전이다. 재산세는 1년에 4만~5만원 정도. 백년 동안 꼬박 세금을 냈다면 모범납세자로 상을 여러 번 받았을 법하다.
 

석송령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85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500만원의 하사금을 내리면서부터이다. 당시 권정달 민정당 사무총장과 김성배 건설부장관이 직접 석송령을 방문해 전달했다. 석평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석송계를 운영하며 석송령에서 발생한 소작료와 하사금 이자 등으로 세금을 내고 있고, '석송령 장학금'도 지역의 학생들에게 주고 있다고 한다. 나무가 세금도 내고, 마을의 안녕은 물론 교육에도 힘쓰고 있으니 웬만한 사람보다도 낫지 않겠는가.

 

석송령은 요즘 명성을 하나 더 얻었다. '영험있는 나무'로도 통하고 있다. 일행도 참 신령스럽게 생겼다는 인상부터 받았으니 말이다. 매년 정월 대보름이 되면 군수가 직접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동신제를 지내고 있고, 어느 때부턴가 외지인들이 남몰래 석송령을 찾아 제사상을 차려놓고, 제를 올리고 있다. 사업 운이 트이고, 건강을 되찾았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니 이해가 됐다.

 

일행은 '석송령 집안'을 뒤로 하고 용문면 금곡리의 금당실마을로 향했다. 닭울음고개를 넘어 있는 마을 입구는 그 분위기가 남달랐다. '예향의 고을'이라는 표지석이 방문객들의 마음가짐부터 다잡게 했다. 금당실은 명신과 학자를 배출한 영남의 명가이다. 300여 호가 촌락을 이루고 있어 경북도내 면 단위에서는 그 규모가 가장 크다.

 

명가에는 풍수적으로 그 이유가 있었다. 정감록에서 말하는 조선팔도 열 곳의 길지(십승지) 중 한 곳이 바로 금당실이다. 마을 앞은 넓은 들이 자리해 주민들에게 농경의 풍요로움을 주고, 마을 서편에는 금계천이 흐른다. 마을의 진산인 오미봉은 외부와 차단된 산간지대로 난리 때에는 마을은 피난처로 제격이다. 금당실은 안동의 하회마을처럼 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型)의 명당이기도 하다. 마을이 자리한 터가 바로 연못이고, 오미봉은 연못에 떠 있는 봉우리이다. 연화부수형은 열려 있는 전면을 막아 줘야하는 형국이어서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서편을 소나무 숲으로 비보했다고 한다.

 

일행은 금당실 인근의 '맛질(대제리의 큰 맛질과 제곡리의 작은 맛질)'로 향했다. 맛질이라는 마을 이름은 음식의 맛에서 유래된 것 같아 우리나라 전통음식의 숨은 이야기를 찾기 위해서다. 일행은 얼마 전 영양의 음식디미방의 저자인 정부인 장씨(장계향 선생)를 소개한 적이 있다. 음식디미방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조리서로 한국 전통음식을 집대성한 책이다. 음식디미방의 146가지 음식 중 16가지 음식에는 '맛질방문'이라고 쓰여 있다. 이 맛질방문이 바로 예천의 작은 맛질이다. 작은 맛질은 정부인 장씨의 외가이다. 정부인은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 와 음식 만드는 법을 배웠으니 예천의 작은 맛질이 음식디미방이라는 명저의 큰 토대로 여겨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금당실과 맛질은 '금당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금당 맛질 반서울'이라는 말이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금당과 맛질을 합하면 서울과 흡사하나 큰 냇물이 없어 아쉽다'는 풍수지리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금당실과 맛질은 큰 마을을 이뤄 인물이 나고, 풍요로움이 수백년을 이어가고 있으니 바로 한 나라의 수도인 서울과 비견된다는 뜻이 아닐까.

 

예천은 그 옛날 불법도 흥했다. 용문면에는 용문사라는 절이 있다. 용문사라는 이름의 절은 전국에 3개가 있다.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 경남 남해의 용문사와 바로 예천의 용문사이다. 조동윤 '예천기행'의 저자는 "사문(沙門)에서는 북쪽으로부터 용의 머리, 허리, 꼬리로 구분되는데 양평은 용의 머리요, 에천은 허리이며, 남해는 꼬리"라고 설명했다. 각기 이름난 절이지만 용이 가장 힘을 쓰는 곳이 허리라 예천의 용문사이며 불법이 널리 떨쳤다고 유추하는 것이다. 조동윤 저자는 "용문사는 지장도량이다. 양산 통도사의 불보도량, 합천 해인사의 법보도량, 전남 송광사의 승보도량, 양양 낙산사의 관음도량과 함께 5대 도량에 속한다"고 설명했다.

 

예천 용문사는 한때 고려의 대표 사찰이었다. 용문사라는 절 이름은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의 '작품'이다. 왕이 쌀을 하사하고, 칙명으로 절을 중수했을 뿐아니라 태자의 태(胎)도 보관했다고 한다. 예천은 수많은 인재와 문학의 향기가 내성천을 따라 흐르고, 삼강이라는 낙동강의 명소도 있다. 여기에 21세기 '문화컨텐츠'인 스토리도 가졌다. 이제 예천은 이러한 역사·문화·자연자산을 잘 보존하고, 활용해 널리 알리는 일만 남은 것 같다.

 

[낙동·백두를 가다] 보문면 앙고개길 '무명 열녀비'

 

보문면 독양리에는 앙고개가 있고, 고갯마루에는 무명 열녀비가 있다. 예천 사람들은 '앙고개 열부비'라고도 부르고 있다. 그 옛날 초가단칸에 살던 부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서린 곳이다. 조선시대 대개의 열부·열녀비는 아무개의 부인, 딸 '누구'로 기록돼 그 이름이 분명했고, 양반가의 여인네가 많았다. 이름도 없고 번듯한 가문의 여인도 아닌, 가난한 아낙네의 사연이 얼마나 애틋했을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다.

 

고갯마루에 앞도 보지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남편과 불구의 남편을 섬기는 착한 부인이 살았다. 남편의 몸이 불구이니 살림살이도 가난할 수밖에. 부인은 걸을 수 없는 남편을 늘 등에 업고 구걸을 하며 힘든 세월을 이겨내야 했다. 가난하나 부인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부부의 금슬만큼은 이 세상에서 제일이었다. 자기를 업고 구걸을 하는 부인이 너무나 고맙고 한편으로 가엾은 남편은 부인에게 업힌 채 늘 부인의 가슴을 만지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더니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부인은 사랑하는 남편이 죽자 "남편이 늘 만지던 자기의 젖가슴을 어이 잊을 수 있겠느냐"며 유방을 베어 관 속에 넣고 장사를 지냈다. 젖을 벤 부인의 상처는 심한 출혈을 일으켰고, 부인 역시 남편의 뒤를 따라 가버리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착한 부인의 절개와 부부의 애절한 사랑을 조정에 알렸고, 조정은 정려를 내렸다. 이에 지역 유림에서 고갯마루에다 열녀비를 세우고 고개 이름을 '안고개'라 했다고 한다. 지금의 앙고개는 안고개를 쉽게 부르다 보니 발음 그대로 '앙고개'로 변한 것으로 예천의 향토사 전문가들은 해석하고 있다. 또 안고개의 안자는 기러기 안(雁)자로 역시 부부의 사연과 기막히게 맞아 떨어지고 있다. 비록 무명의 아낙네이지만 조선 500년 여성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 중 한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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