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뛰는 삶을 위하여/
그대는 삶을 위하여 얼마나 시간을 할애하는가?
하루에 몇 시간 씩 일하고, 얼마를 벌고,
어떤 야망을 이루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그 모든 일을 한다 하더라도,
삶은 언제까지나 저쪽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그대의 인생 시계는 몇 시인가?
삶은 시간이 지배합니다.
우리는 시간에 의해 살고,
또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시간 속에서 생을 마칩니다.
우리는 시간을 쓰고 아끼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 달린 일이라고 믿습니다.
시간을 돈으로 살 수는 없지만
시간을 쓰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쓰는 계산하며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시간은 쓸모 있는 측정 수단이지만,
우리가 부여하는 만큼의 가치만을 지닙니다.
웹스터 사전은 시간을 ‘연속선상의 두 지점
사이의 간격’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흔히 탄생을 삶의 시작으로,
죽음을 삶의 끝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탄생과 죽음은
연속선상의 두 지점일 뿐입니다.
시간이 흘러가면 모든 것들이 변합니다.
안도 변하고 바깥도 변합니다.
우리의 외모도 내면의 자아도 변합니다.
삶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우리는
대개 변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조차 그것에 저항합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주위
세상은 빠르게 변화합니다.
그것은 위리와 속도를 맞춰 주지 않습니다.
변화란 언제나 너무 빨리 오거나
너무 늦게 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변화는 늘 우리와 함께 있지만
우리는 변화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변화에 겁을 먹기도 합니다.
그 대신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 변화를 선호합니다.
예기치 않은 변화가 생기면 불안해하고,
혹시 삶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까 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환영하든
거부하든 변화는 일어납니다.
삶의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변화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어나는 것일 뿐입니다.
변화는 지금까지의 익숙한
상황에 작별을 고하고,
새롭고 낯선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그 상황의 낯설음이나 익숙함이 아니라,
그 중간에 존재하는 시간입니다.
유방암을 두 차례나 이겨낸 작가 로니 카예는
“삶에서 하나의 문이 닫히면
언제나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그 사이의 복도는
매우 좁고 길다.“ 라고 말했습니다.
변화는 대개 지금까지의
문이 닫히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그 문들의 이름은 끝,
완성, 이별, 죽음 등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불안정한
시기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 시기는 닫혀진 문을 보고 슬퍼하면서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가 가장 힘이 드는 때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느끼는
바로 그 때 새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만일 그대가 변화에 맞서 싸운다면
평생 싸움만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를 껴안는 방법,
아니면 적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현재 모습을 잘 모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대개 자신의 실재 모습보다는
과거나 미래의 모습을 봅니다.
어제의 내가 반드시 지금의 나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크나큰 자유가 있습니다.
그때 어 이상 과거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일어나 샤워를 하며
어제의 때를 씻어 내지만,
어제 느낀 감정의 찌꺼기는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지 않는다면,
상대방과 자신을 진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살지 않으면,
행복을 발견할 수도 없습니다.
과거의 문을 닫지 말고 가끔씩 그 문을
들여다보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모든 두려움은 죽음의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죽음과 관계된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삶의 다른 일들에 훨씬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바로 그 궁극적인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과 마주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깨닫습니다.
죽음이 자신을 파괴하지도 못하며,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도 못하리라는 것을,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두려움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우리에게
두려움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다면
삶이 얼마나 달라질까요?
만일 아무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꿈을 추구한다면,
그대의 삶은 틀림없이
지금과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을 앞둔
사람이 얻는 배움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최악의
두려움과 맞서게 합니다.
그것은 가능한 또 다른 삶을 보여주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남은 두려움을 사라지게 합니다.
불행하게도 그런 두려움이 사라질 무렵이면,
우리는 우리가 꿈 꾸어온 것들을 실천하기엔
너무 늙었거나 병에 걸려 있을 것입니다.
숨겨 둔 열정을 펼치거나, 자신에게 진짜 맞는 일을
찾거나, 원하는 사람이 되기도 전에 우리는
나이가 들고 병에 걸리고 나이가 든다 해도
후회로 가득 차지는 않을 것입니다.
절반도 살아 보지 못한 채 생을
끝낸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한 가지 배움이 분명해집니다.
꿈꾸는 일들을 아직 행동에 옮길 수 있을 때,
두려움을 이겨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다른 감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감정입니다.
행복, 불안, 기쁨, 분노 등 우리가 평생 겪는
많은 감정들에는 다양한 이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은 오직 두 가지 뿐입니다.
사랑과 두려움이 그것입니다.
모든 긍정적인 감정은 사랑으로부터 나오며,
모든 부정적인 감정은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사랑으로부터는 행복, 만족, 평화, 기쁨이,
두려움으로부터는 분노, 미움,
걱정 그리고 죄의식이 나옵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사랑과 두려움이라는
두 가지 근원적인 감정이 자리잡고 있지만,
사실은 사랑 또는 두려움만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느끼는 동시에
두려움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반대되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있는 곳에 사랑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두려움이 차지할 자리는 없습니다.
사랑을 하면서 동시에 두려웠던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둘 중 어느 쪽 편에 설 것인지 결정해야만 합니다.
그곳에 중립지대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의 감정을 선택하지 않으면
그대는 자신 안에서 두려움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감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순간은 우리에게 사랑과 두려움 중
어느 한 쪽을 선택할 권한을 줍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힘든 상황에서는 두려움 대신
사랑을 선택하기가 특히 어렵습니다.
사랑을 선택했다고 해서 다시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사랑을 선택하고 나면 많은 두려움들이
치유되기를 바라며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이것은 늘 진행되는 과정입니다.
음식을 먹은 후 다시 배고픔을 느끼는 것처럼,
사랑을 선택한 후에 그대는 다시 두려움을 느낍니다.
몸에 필요한 영양을 공급하고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음식물을 먹어야 하듯이,
영혼을 성장시키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사랑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들어 낸 두려움들은 과거나 미래
중 어느 하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랑만이 현재의 감정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유일한
순간은 지금 이 순간뿐이며,
사랑만이 유일하게 실재하는 감정입니다.
현재 일어나는 감정은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항상 과거에 일어난 어떤
경험이나 일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미래에 일어나리라고 여겨지는
어떤 일들을 걱정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산다는 것은 두려움이
아닌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사는 것,
그것이 인간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지만,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더 이상
가능성이 아니라 확실성입니다.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 그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들은 더 대담해집니다. 더 잘, 자신들이 더 이상
두려워 할 것이 없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뒤 무한한 행복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이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분노, 방어, 자만심 등
여러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두려움을 지혜로 바꿔야 합니다.
매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들을 작은 것
부터 하나씩 실천해야 합니다.
그대의 두려움은 도전 받지 않을
때에만 힘을 갖습니다.
두려움을 이겨 내기 위해 사랑과
친절의 힘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두려움 속에 살 때 그대는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가 어떤 생각을 갖는가에 따라
두려움이 커지거나
사랑의 마음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두려움 역시 더 많은 두려움을 불러오는데,
특히 그것이 감추어져 있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에서 어떤 행동을
할 때 더 많은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진정한 자유는 가장 두려운 일들을
대담하게 행할 때 성취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흔들리지 않고
크게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그대는 삶을 잃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게 됩니다.
두려움, 걱정,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겉으로만 안정된 삶을 사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그대 삶의 변함 없는
일부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두려움을 걷어 버리거나 이겨 내야
역설적이게도 삶의 가장 안전한
장소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망설임 없이 사랑하고,
솔직하게 마음속 말을 하고,
자기 방어를 하지 않고도
자신을 지키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일단 두려움을 뛰어넘으면
새로운 삶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궁극적으로는
두려움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헨렌켈러는 말했습니다.
“삶은 하나의 보험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두려움이 주는 이런 배움들을
자신의 것으로 할 수만,
우리는 경이롭고 놀라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없는, 우리가 꿈꾸던 삶을,
----------------------------------
서정호 목사(010-5617-7475)
sjpc8574@hanmail.net
서정호 목사 온라인 자료실(sjpc7474.com)
-로그인없이 4천 기가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