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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이야기

성 룡(배우)

작성자고수|작성시간26.06.18|조회수42 목록 댓글 0

 

. 유년 시절

태어날 때부터 엄청난 덩치로 태어나서 신문에 기사가 실리는 등, 화제가 되었다. 당시 신문에서 언급된 성룡의 체중은 13파운드(거의 6킬로그램)였다.

학교에 입학한 이후 계속 짓궂은 장난을 치다가 초등학교 1학년 무렵 퇴학을 당한 성룡은 양친이 모두 돈을 벌기 위해 호주로 떠나자[12] 혼자 남겨진 채 우점원() 희극학교(경극학교)에 들어가 10년 동안 연기와 무술 훈련을 받았다.

입학 초기에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는데, 희극학교에 입학할 당시 성룡의 아버지와 우점원 사이에 계약을 하는 과정에서 1, 3, 10년간 희극학교의 소속으로 사망하더라도 학교측에서 일체의 배상책임이 없다는 계약을 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의 훈련이 어찌나 혹독했던지 일찍이 고문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영화 《패왕별희》를 보면 경극학교에서의 교육이 얼마나 혹독한지 알 수 있다.

당시 우점원 희극학교 4년 선배 홍금보와 4년 후배 원표가 있었는데, 이들은 훗날 1988년에 제작된 유가위 감독에 홍금보가 주연한 영화로 이름을 떨친 칠소복()이 바로 해당 시절을 그려낸 영화다. 우점원(于占元)의 이름 끝 글자 원(元)을 성으로 삼아 이름을 만들었으며, 이 시절 홍금보는 '원룡', 성룡은 '원루'란 이름으로 불렸으나 이후 독립하면서 각자의 이름을 만들게 된다. 홍금보나 성룡과는 달리 원표, 원덕, 원태 등은 그 시절 그대로의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무명 시절[편집]

희극 학교를 졸업한 성룡은 1971년 겨우 17살[13] 나이에 난데없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엄청난 허접 영화였으며 2년이나 개봉도 못한 광동소노호(廣東小老虎, 1971)의 주연으로 나왔다.[14][15] 이후 선배인 홍금보의 추천을 받고 귀노천(1971)에서 남주한테 한 방에 맞고 죽은 홍금보의 부하 스턴트맨으로 출연했다.

이후 이소룡이 주연으로 나온 정무문과 용쟁호투에서도 스턴트맨으로 활동했다. 정무문에서는 이소룡의 발차기에 맞고 날아가서 죽은 최종보스인 일본인 관장 스즈키 히로시의 스턴트[16]를 했고, 용쟁호투에서는 이소룡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목이 꺾이고, 엘리베이터에서 다시 나온 뒤 장봉에 맞아 쓰러지고 마지막에 달려들어와 쌍절곤에 맞고 물에 빠지는 역할을 맡았다.[17]

이후, 성룡은 홍콩과 한국을 오가면서 여러 편의 무협영화에서 엑스트라로 연기하면서 연기자의 길에 나서게 된다. 이때 성룡은 그야말로 온갖 엑스트라 및 조연을 맡았는데, 심지어 에로틱 영화인 《금병매》(1974), 《花飛滿城春(화비만성춘)》(1975)에 조연으로 출연하여 베드씬을 찍기도 했다. 이 당시에 출연한 《여경찰(女警察:영어 제목은 Police Woman)》 같은 경우는 훗날 국내에서 《성룡의 영 타이거》라는 제목을 붙여 비디오로 출시되었는데, 이 제목은 일본에서 토에이가 《ジャッキー・チェンのヤングタイガー》라는 제목으로 비디오 발매한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미국에서는 《Rumble in Hong Kong》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18] 이외에도 The Heroine, Here Come Big Brother 등 여러 제목으로 개봉하였다.출처: HKMDB 여경찰 정보

성룡이 스턴트맨으로 한국에 머문 1972년 당시 출연료는 15,000원이었다고 한다.# 소비자물가지수에 기반해 2024년 가치로 환산하면 약 29만 원이다.

제목도 그렇고 마치 성룡이 주연인 양 포장된 탓에 멋모르고 빌려보던 이들이 성룡이 얼굴에 점을 붙이고 찌질이 악당 졸개로 나와 주인공인 택시기사(배우는 대만 출신 배우인 진상림(秦祥林, 친샹린) 1948~)에게 맞아 뻗는 모습에 놀라는 추억을 겪기도 했다. 우습게도 10년도 안 가 영화 오복성에서 진상림과 성룡은 또 같이 나오게 된다. 이 영화에서 둘이 대화도 없지만 말이다.

성룡이 찌질이 악당 졸개로 나오는 《성룡의 영 타이거》(1973) 국내 비디오 표지.[20]

그나마 엑스트라 치고는 의외로 비중이 높기는 하지만, 주인공에게 맞다가 애원하며 빌고, 주인공이 그냥 가자 뒤에서 비겁하게 반격하다가 맞아 나가떨어지며 퇴장한다.

여담으로 이 영화는 2016년에《성룡의 폴리스맨》이라는 더 이상한 제목으로 재개봉하였고, IPTV에 이 제목으로 유통되고 있다. 다음 영화 정보도 엉터리인 게 이 영화 감독이 오마(午馬, 1942~2014)라고 나왔는데, 천녀유혼에서 도사로 나오고 성룡의 미라클에서 조직 중간 보스로 나온 배우이다. 이 영타이거 감독은 주목(朱牧, 1938-2007)이다.


미국 발매판 DVD도 성룡을 주연인 양 세우고, 전혀 다른 사진을 갖다붙였으니 다를 거 없다.

사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에는 흥행에 실패해서 묻혔는데 비디오 시장에 내놓는 시점에서 성룡이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 중 최고로 유명해서 이렇게 된 것이다. 주연이고 나발이고 제일 유명한 사람의 이름값에 묻어가려는 심보가 역력하다.[21]

영 타이거 장면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왼쪽 턱 근처에 큼직한 점을 붙이고 나오는데, 정말 악당 그 자체로서 나와 여자도 가차없이 죽인다.

성룡이 쌍꺼풀 수술을 하기 전이기 때문에 얼굴의 느낌이 뭔가 낯설다. 아래의 사진은 주인공에게 맞아서 뻗고 빌면서 애원하는 장면인데, 나중에 자주 보여주는 익살스런 표정이 저 사진에도 보이기는 한다.

결국, 배우로서 성공할 가망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한 성룡은 일을 접고 부모님이 살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가게 된다. 그러나 1년이 채 안 되어, 이소룡의 홍콩 영화 데뷔작인 《당산대형》과 《정무문》의 감독 나유(, 뤄웨이) 감독이 《정무문》 촬영 중, 이소룡과 불화가 생긴 이래로 이소룡을 대체할 만한 배우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스턴트맨이 아닌 주연으로 영화에 출연할 수 있다는 생각에 홍콩으로 돌아온다.

오디션에 합격한 성룡[22]은 나유와 함께 《신정무문》부터 전형적인 이소룡식의 비장미와 천편일률적인 내용의 작품에 줄기차게 출연하기 시작한다. 성룡이란 예명도 새끼 용(소룡)을 뛰어넘는 어른 용(성룡)이 되라는 뜻으로 나유가 지어준 것.

1977년작, 《풍우쌍류성》(한국 제목 : 유성검의 대결) 때부터는 쌍꺼풀 수술을 한 뒤라 외모도 배우로서 손색없는 호남형으로 바뀐다.[23]

그러나 당시 쿵후 영화는 그야말로 '마구 찍어낸 공장제 쌈마이 영화'였고, 특히 나유와 노예계약에 가까운 조건으로 고만고만한 영화를 찍던 성룡은 회의를 품으면서 점차 나유와 사이가 벌어진다.

쌍꺼풀 수술 전《신정무문》에서의 성룡

묘하게 나 추성훈과 닮았다. 헤어스타일 때문에 각도에 따라서는 축구 선수 박주영과도 꽤 닮았다.

쌍꺼풀 수술 후 《풍우쌍류성(유성검의 대결)》에서의 달라진 모습의 성룡.[24]

아무튼 성룡은 쌍꺼풀 수술의 성공적인 사례 중 하나다.

 

 전성기 시절

그러던 와중에 성룡의 커리어를 역전시킨 일이 발생한다. 1978년 당시 액션 연기뿐만 아니라 서구형의 외모에 개구쟁이 + 훈남 인상으로 홍콩에서 대스타였던 배우 부성()[25]이 스케줄 문제로 원화평 감독의 《사형도수》(1978) 주연에서 하차하자, 나유가 원화평과 오사원에 대한 의리로 사원영화사에 성룡을 잠시 대여해 준 것이다.

사형도수》(1978)가 히트하자 원화평은 곧장 《취권》(1978)의 제작에 들어갔고, 이 작품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성룡의 인지도는 수직상승하게 된다.

하지만 이대로 나유와 계속 영화를 찍다가는 평생 소모품으로 살다가 끝나리란 절망감에 빠져있던 성룡은 《취권》이 성공하자 몰래 대한민국으로 야반도주를 하려다가 나유의 부인 유량화에게 들키게 된다. 자초지종을 들은 유량화가 '그럼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냐?'고 성룡에게 물었고, 성룡은 이에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를 직접 감독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나유는 성룡의 요청을 흔쾌히 허락했고, 마침내 성룡의 첫 감독작인 《소권괴초》(1979)가 제작된다. 《소권괴초》에서 그는 《취권》과 마찬가지로 코믹을 가미한 액션을 내세웠고, 괜찮은 흥행 성적을 올린다.

그러나 이때, 성룡은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젊은 나이여서 그랬는지 큰 실수를 저지른다. 나유 감독과의 계약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다른 영화사의 계약서에 서명을 해버린 것이다. 비록 몰랐다고는 해도 분명히 잘못이기는 했다. 이에 두 영화사는 성룡을 사이에 놓고 대립했고, 관련된 삼합회까지 개입하면서 일이 커진다. 이에 나유 감독은 성룡을 데리고 외국으로 도망가버린다. 이것이 이른바 “성룡 납치사건”으로, 당시 홍콩의 연예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다. 이때 삼합회에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을뿐더러 홍콩의 액션배우나 무술배우들도 눈치를 보던 왕우(王羽)가 개입하여 이를 해결해 줬고,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성룡은 왕우가 제작하거나 관계한 영화들에 한하여 배역을 가리지 않고 출연하는 것으로 답례를 했다. 《미니 특공대》[29], 《화소도》 등이 그 예이다.

덕분에 성룡은 골든하베스트로 이적하게 되고, 여기에서 내놓은 첫 작품이 바로 《사제출마》(1980)다. 《사제출마》는 이전까지의 홍콩 영화의 액션 연출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며,[30] 홍콩의 영화 흥행 기록도 경신하는 대성공을 거둔다. 이 영화에 등장한 최종 보스이자 무시무시하게까지 보이는 악역이 바로 우리나라의 합기도 원로 황인식이다.

사제출마의 성공 이후 성룡은 이소룡처럼 할리우드에 진출하려는 야망을 품게 되고, 때마침 골든하베스트사에서도 해외 진출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배틀 크리크》(1980)를 첫 작품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 성룡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이었고,[31] 워낙에 완벽주의와 자유로운 스타일을 중시하는 그에게 할리우드의 액션 영화의 제작과정[32]은 원칙에 치중하고 제약이 심해 답답한 방식이었다. 결국, 성룡의 첫 번째 할리우드 진출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34] 다만, 배틀 크리크는 미국 흥행은 실패했지만, 해외 흥행으로 제작비 3.5배 정도로 꽤 흥행했다.

첫 번째 할리우드 진출 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에 성룡은 1982년 개봉한 《용소야》의 감독과 주연을 맡음으로서 홍콩으로 복귀했고 이듬해 홍금보 감독의 《오복성》(1983)에 출연하면서 골든하베스트의 흥행 삼총사 가화삼보의 일원이 되어 성공적으로 재기했다. 이후 《프로젝트 A》(1984)부터는 스스로 감독과 주연을 맡아, 할리우드 체류(滯留) 시절 주변에서 자신과 비슷한 면이 있다며 권하기에 접했던 버스터 키튼의 영향을 받은, 과격한 아크로바틱 묘기와 좋은 유머 감각을 결합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성룡이 홍콩으로 복귀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찍은 영화는 《프로텍터》(1984)라는 작품으로, 홍콩 자본에 미국인 감독 제임스 글릭켄하우스[35]가 감독한 작품이다. 참고로 성룡은 역동적이지 못한 액션에 선정적인 장면까지 삽입된 미국 편집판을 보고 경악해서[36][37] 드라마 부분을 보강하고 성룡이 자비로 배우들을 다시불러 주요 액션 장면들을 재촬영하고, 편집한 홍콩판 버전인 위룡맹탐을 따로 만들어서 2개월가량 먼저 개봉했다. 아니나 다를까 후에 게봉된 미국판은 악평과 함께 본고장인 미국에서까지 외면받으면 성룡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된다. 당연히 재편집판의 평이 압도적으로 좋은 편이다.

이 당시의 성룡은 경극학교 시절부터 사형제지간이었던 홍금보원표와 같은 영화에 출연한 경우가 굉장히 많다. 때문에 당시 이 세 명을 합쳐서 가화삼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다만, 이들의 영화를 그저 '세 명의 합작품'으로 도매금 취급해버리는 것은 좀 부당한 대우라고 봐야 한다. 물론, 어릴 적부터 절친한 사이였으니 서로가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을 수는 있지만, 1980년대 초중반 가화삼보의 전성기에도 이들 셋은 연출과 액션에 대해 추구하던 방향성이 꽤나 달랐다. 특히, 각자 자신이 주연 내지는 감독을 맡은 작품의 경우는 각자의 색이 매우 뚜렷했다. 가령 똑같이 가화삼보가 출연한 프로젝트 A(성룡 감독)와 오복성(홍금보 감독)을 비교해 봐도 색이 굉장히 다르다는 게 눈에 띈다. 홍금보의 스턴트팀 홍가반은 개개인의 특성을 살린 다이나믹하고 현실적인 액션을 중시한 반면, 성룡의 스턴트팀 성가반은 구성원이 똘똘 뭉쳐 아크로바틱한 모션을 바탕으로 치밀하게 합을 짜서,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위험한 장면을 연출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외에도 액션의 리듬감이라든가 구성 등 작은 디테일에서도 둘은 꽤 차이가 나오는 편. 성룡 액션과 홍금보 액션의 차이

항상 과격한 스턴트와 액션을 선보였기 때문에 이제까지 수많은 영화를 촬영하면서 온몸에 부상을 입지 않은 곳이 없고 몇 번은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고 한다. 《프로젝트 A》(1984)부터 성룡은 고소공포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시계탑에서 떨어지는 스턴트를 했다. 게다가 작 중 이 낙하장면을 여러 번 보여주는데 매 장면마다 다르다. 즉, 높은 시계탑에서 떨어지는 걸 여러 번 반복해서 찍었다는 것이다.[38]

NG 장면의 추락씬을 보면 머리부터 거꾸로 추락하는 바람에 성룡이 매우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성룡은 심각한 허리 부상을 당했으며, 무릎팍도사에서 밝히길 성룡은 이 장면을 찍고 1년 내내 후유증으로 머리가 아팠다고 한다. 시계탑 장면은 성룡과 성가반의 스턴트 배우인 화성과 주윤견도 참여했는데 이 둘도 성룡만큼 여러 번 떨어졌다. 영화에서 사용된 장면은 주윤견과 성룡의 순서로 그리고, NG컷에서 사용된 장면은 화성이다.

이후 《폴리스 스토리》(1985) 한 편을 찍으면서 척추 골절, 무릎 부상, 고관절 탈구라는 중상을 입었으며 1986년 유고슬라비아에서 《용형호제》를 촬영하던 도중에는 성벽을 점프해서 건너가는 장면에서, 붙잡았던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추락, 두개골이 함몰되고 말았다. 성룡은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인해 우측의 청력을 잃었고, 머리부분만 35바늘을 꿰매는 바람에 큰 흉터가 생겼다.

이 사고 장면은 《용형호제》의 엔딩 크레딧에서 여과없이 나온다.[39] 부상을 치료한 후에 성룡은 영화의 나머지 부분을 촬영하여 영화를 완성시켰는데, 부상 부위를 가리기 위해 머리를 길게 기르고 카메라 앞에 나섰다. 덕분에 영화 도입부에는 데뷔부터 고수해오던 장발을 버리고 짧게 깎은 머리를 선보였는데, 부상 이후 그 부위를 가리려다보니 영화 도입부 이후에는 다시 장발로 돌아간다. 이후 골든 하베스트의 추문회 사장은 성룡의 헤어스타일을 장발로 유지하라는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예전처럼 장발보다는 단정한 커트 스타일을 유지 중. 1994년 《홍번구》를 촬영할 때 교각에서 운행 중인 호버크래프트로 뛰어내리는 장면에서 착지를 잘못하는 바람에 우측 발목이 90도로 꺾이면서 골절상을 입었다. 깁스 자국을 가려야 했기에 운동화 모양을 본떠서 만든 특수 양말을 신고서 촬영을 마쳤다. 이 역시 엔딩 크레딧에서 확인 가능하다.

성룡의 작품에서는 스턴트 중의 사고, NG 등을 모아서 엔딩 크레딧에 올리는 전통이 있다. (이는 서구권에서 촬영된 영화에도 남아 있다.) 엔딩 크레딧의 NG 영상을 보면 성룡이 NG를 내면서 촬영 스태프들과 함께 웃고 즐기는 화기애애한 장면이 나오다가, 성룡이 스턴트를 하다가 다쳐서 고통스러워하거나 촬영 스태프가 다치거나 심지어는 사망자가 아닌가 싶은 사람이 실려 나가는(실제로 사망하지는 않았다.) 아찔한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성룡은 이를 통해서 실생활에서는 위험하니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을 함부로 따라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40]

성룡이 대역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영화 마케팅 측면에서의 과장된 수사일 뿐,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성룡이 잠시 다치기라도 하면 영화 촬영 스케줄 자체가 밀려버리는데, 이는 영화사의 입장에서 엄청난 손해이며, 출연 중인 다른 배우들에게도 엄청난 피해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장면에서 대역을 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비룡맹장》(1988) 일부 고난도 장면은, 극장에서 보던 관객이라도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식겁할 정도로 대역이라는 것이 티가 났다. 문제는 그 범위가 엄청나게 넓다는 것이다.[41] 다만, 이 스턴트들은 성룡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스턴트였고 워낙 바쁜 성룡의 스케줄 때문에 대역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한, 성룡 영화에서 대역을 쓴 장면들 중 대다수는 성룡 자신을 포함한 성가반 멤버들과 수차례 촬영한 후 그 중에서 가장 멋있게 나온 결과물을 영화에 담은 것이다. 즉, 일부러 대역을 쓰는 것은 결코 아니며 대역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온전히 대역에게 스턴트를 맡기는 것이 아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설령 그랬다고 할지언정, 그 스턴트 팀의 수장이 바로 성룡 본인이니 대역 여부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성룡은 자서전에서 보험회사가 자신의 보험가입을 기피하는 것에 대해 '어차피 보험가입을 해도 내가 죽거나 다치면 보험금을 쓰지도 못하니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가 러시 아워 에서 나무를 타고 올라가 2층 창문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찍을 때, 제작진이 '보험회사와 변호사들과 상의한 후 찍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위험하지도 않은 쉬운 장면을 찍는데, 왜 그런 절차가 필요하냐? 걔들이 영화에 대해 뭘 아냐?'고 불만을 표시했다. 실제로 기네스북에도 현재 살아 있는 연기자 중 가장 스턴트 액션을 많이 한 사람(Most stunts by a living actor)라는 제목으로 등재되어 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신종 스포츠 파쿠르의 창시자인 세바스찬 푸캉, 다비드 벨 등이 인터뷰에서 성룡의 독창적인 액션 시퀀스에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 물론 파쿠르에는 성룡식의 액션 스턴트 외에도 다양한 동작과 기술이 포함되어 있고, 무엇보다 파쿠르의 창시자인 세바스찬 푸캉, 다비드 벨 등은 직업적으로 파쿠르를 연습하고 행하는 전문가들이니 일반인은 따라하지 않는 것이 좋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폐막식에서 배우 유덕화와 함께 노래했다.

2012년 말에는 무려 22년 만에 나온 《용형호제》 3편 격의 《차이니즈 조디악》(중국명은 십이생초)에 출연했다. 제목이 《용형호제 3》가 아닌 이유는 1, 2편의 제작판권을 가진 골든하베스트 영화사가 문을 닫았고 영화 판권이 미국 워너 브라더스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참고로 권상우가 조연으로 같이 나왔다. 이미 나이 예순이 다 되어가는 나이라 그런지 성룡이 영화 촬영 중 무척 힘들어하는데, 이 때문에 이 영화가 사실상 성룡의 마지막 액션 코미디물이라는 말이 많았다. 이에 성룡은 스케일이 큰 '초대형' 액션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의미일 뿐, 액션 연기 자체를 그만두는 것은 아니라고 본인이 직접 해명했다.

2013년 2월에 개봉한 영화 《차이니즈 조디악》의 프로모션을 위해 한국을 찾아 《무릎팍 도사》와 《런닝맨》에 출연해서 아직 녹슬지 않은 그만의 재치와 인생이야기를 보여주었다. 특히, 《무릎팍도사》에서 강호동이 "왜 그렇게까지 몸을 사리지 않고 연기하느냐"고 질문하자 성룡의 답변이 예술이었다. "예전에는 돈이 없어서 몸으로 때우려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위험한 연기를 해야만 했었지만, 이제는 어떻게 하면 팬들을 즐겁게 해주느냐가 관건이다."라고 한다. "물론 죽는 게 무서운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팬들이 즐거워하면 되니까 그냥 한다고"

결국 2015년 2월 22일 스턴트를 가장 많이 한 배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이와 동시에 가장 많은 액션 영화를 제작과 동시에 주연을 담당한 기록으로 하나 더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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