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배우.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대배우이자 영화 역사상 최고의 배우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명배우이며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 3회, 노미네이트 21회라는 대기록을 갖고 있는 전설적인 인물. 세계의 모든 메이저 시상식에서 받은 후보 지명은 400번이 넘고 그중 받은 상은 약 200개로 역대 모든 배우 중 가장 많은 후보 지명 기록과 수상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70년대부터 명연기로 주목받아 약 50년 동안 정체기 없이 꾸준한 연기력으로 현재까지도 자주 시상식에 노미네이트가 되는 등 미국 영화계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1980년대에 7번, 90년대에 3번, 2000년대에 4번, 2010년대에 6번[7]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으며, 영화 개봉연도 기준으로 80년대 이래 모든 년대에 그 10년 동안 가장 많이 연기상(주·조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된 배우다.[8][9] 또한 통산 21회 노미네이션을 달성해 역대 가장 많은 후보 지명을 받은 배우가 됐다.[10][11] 골든 글로브에서도 후보 지명 34회, 8회 수상이라는 범접할 수 없는 기록을 세우며 역대 배우 중 가장 많은 후보 지명 기록과 수상 기록을 남겼다.
데뷔 전
1949년 미국 뉴저지 주 서밋의 제약회사 임원인 아버지와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했다. 성악가를 목표로 12살 때 부터 성악 트레이닝을 받았다가 진로를 배우로 결정한 그녀는 바사 칼리지(Vassar College)를 졸업하고[12] 예일 대학교 연극대학원(Yale School of Drama)에 진학한다.[13]
고등학생 때는 치어리더를 하며 교내 최고 인기 여학생을 뽑는 홈커밍퀸에 뽑혔었다. 날씬하고 예쁜 외모와 상냥한 성격으로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매우 많았다고.
1969년 바사 칼리지 2학년 재학 중, 드라마 입문 수업에서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한 대목을 실감나게 읽는 것을 눈여겨 본 클린트 앳킨슨 교수가 그녀를 바사 칼리지에서 제작하는 연극 《줄리 아씨》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것으로 연기에 발을 들인다. 그러다 메릴 스트립이 예일대학교 연극대학원 재학 시절 당시 Yale School of Drama에서 로버트 루이스(Robert Lewis)[14]에게서 메소드 연기 교육을 받았다.
1970년대: 주목받는 신예 배우
1971년에 《세비야의 플레이보이》라는 작품으로 데뷔했고 1976년 《면이 가득 든 27개의 수레》에서의 연기로 토니상 후보에 오른다. 1977년에는 TV 스포츠 드라마인 《치명적인 계절》과 영화《줄리아》에 출연하며 대중 매체로 들어섰다.
스트립의 필모그래피에 중요한 초석이 된 작품은 1978년에 나온 영화 《디어 헌터》로, 이를 통해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에 최초로 지명되었다. 《디어 헌터》이후 NBC의 4부작 미니시리즈 《홀로코스트》에 출연하며 에미상 미니시리즈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18] 이때를 기점으로 대중적 인지도를 얻게 된다.
1979년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는 스트립의 초기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더스틴 호프먼과의 열연으로 그녀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북미 박스오피스 연간 1위를 했으며 전세계적으로 약 2억 달러(1979년 기준)를 벌어 블록버스터가 차지하던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가족 영화가 차지한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그 뒤로 스트립은 스타덤에 올라 주연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한다.
1980년대: 본격적인 도약
| 1980년대의 메릴 스트립 | |
1981년에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로 영국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처음으로 오스카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다. 1981년에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홍보하며 9월호 타임즈 표지를 장식했는데 이는 1980년대에 거의 유일하게 여배우가 표지를 장식한 경우였다. 1982년에는 영화 《소피의 선택》으로 생애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소피의 선택》에서의 그녀의 연기는 현재까지도 영화 역사상 최고의 연기로 꼽히고 있다. 스트립의 소피의 선택에서의 연기는 '연기'라는 개념을 다시 정의한 사례였다는 평가를 받기도.[20] 이를 통해 스트립은 영화 데뷔 5년 만에 이 연기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존경 받는 배우 중 하나가 되었다.
《소피의 선택》을 보고 선배 명배우들도 찬사와 존경을 보냈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할리우드 황금기의 전설적인 대배우인 베티 데이비스와 말론 브란도, 오드리 헵번 등이 있다. 1990년 인터뷰에서 말론 브란도는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인간으로써 할 수 있는 최고의 연기가 아니라 신의 경지라고 말해도 부족하다” 고 말했다.# 베티 데이비스는 메릴의 연기를 보며 자신을 이을 전설적인 후계자가 나왔음을 자랑스러워하며 죽기 직전 메릴에게 손편지를 써서 보냈다. 오드리 헵번은 셰어, 미셸 파이퍼와 함께# 따라할 수조차 없는 후세대 배우로 메릴 스트립을 꼽으며 “메릴 스트립이 하는 연기를 저는 절대로 못합니다. 그녀는 드라마틱하고 존경할 수밖에 없는 배우입니다” 라고 했다.
1983년 《실크우드》에서 실존인물인 사회운동가 캐런 실크우드를 연기하며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된다.
1985년, 《프렌티》를 촬영하던 중 죽다 살아난 일화가 있다. 튀니지에서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던 비행기가 3만 피트 상공에서 엔진 한 쪽이 터져 버리고 다른 하나는 멈춰버린 것. 다행히 비행기는 프랑스 니스에 비상 착륙에 성공했다.
또한 그 유명한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출연하여 당시 할리우드 최고의 주가를 자랑했던 로버트 레드포드와 호흡을 맞추기도 하였다. 이 영화로 5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그때까지 메릴이 출연한 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 수를 기록하며 상업적 초대박을 쳐 그 해 박스오피스를 꽉 주름잡은 것도 모자라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도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해 무려 7개 부문을 수상했다.
1986년과 1987년에는 또 다른 명배우 잭 니콜슨과 《제2의 연인》, 《엉겅퀴꽃》에 같이 나와 아카데미 후보에 나란히 올랐다. 잭 니콜슨은 이 시기 메릴을 짝사랑했는데 메릴은 이때 남편과 두 아이가 있었고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고 스태프들이 회상했다. 니콜슨은 저녁을 같이 먹자고 데이트를 신청하고 호텔로 찾아가기도 했지만 스트립은 거절하고 잭을 돌려보냈다. 그 이후로 할리우드에서는 스트립이 잭 니콜슨과 영화를 같이 찍는 일은 다시는 없을 거라는 말을 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으나, 소문과는 달리 그 뒤로 둘은 같이 영화를 찍었으며 서로 헌정사를 해 주는 등 지금까지도 상당한 친분이 있다.
1988년에는 《어둠 속의 외침》에서 딩고 사건의 실존인물 린디 체임벌린을 연기하며 호주의 아카데미상 격인 AACTA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에도 노미네이트된다.
1989년, 40살이 된 스트립은 그간 쌓아온 진중한 이미지의 캐릭터와 달리 밝고 유쾌한 코미디 영화 《그녀는 악마》와 《헐리웃 스토리》에 연달아 출연했다. 1990년 메릴 스트립은 《헐리웃 스토리》에서 연기한 '수전 베일'이 자신의 본래 모습과 목소리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1980년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를 한 명만 꼽으라 하면 단연 메릴 스트립이 꼽힌다. 매년 모든 잡지의 커버를 장식했으며, 평단의 극찬과 대중의 사랑을 동시에,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받은 유일한 배우였다. 당연히 영화계에서는 스트립을 끌어내리려고 하는 동료 여배우들과 일부 세력들이 생기기도 했지만 스트립은 오히려 겸손하고 소탈한 생활을 하며 스타보다는 배우의 길을 지향했다. 이렇게 엄청난 경력과 대중적 인지도를 쌓으며 10년 동안 아카데미상 후보 7번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