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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이야기

이연걸(배우)

작성자고수|작성시간26.06.21|조회수49 목록 댓글 0

싱가포르 국적의 중국계 액션 배우.



원래 중국 본토 출신으로 중국 국적이었으나 1989년 중국을 떠나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으며 이후에 다시 싱가포르 국적을 취득하여 현재는 단독 싱가포르 국적이다.[9] 이연걸 입장에서는 21세기 이후부터는 중국에서만 거주하고 중국이 주 활동무대인데 굳이 세금을 더 내면서 미국 국적을 유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1963년 베이징의 노동자 가정에서 3남 2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2세 때 아버지가 사망했다. 1971년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이후 베이징에서 이름난 무술가였던 오빈(吳彬)의 눈에 띄어 베이징 스차하이체육운동학교(北京市什刹海体育运动学校)에 전학하게 된다.

12세 이후 우슈 선수로 뛰며 대회에서 우승, 이후 5년 연속 우승을 이룬다. 워낙 실력이 뛰어나 베이징 우슈 시범단에 소속되어 중국에서 열리던 국제대회 개막식에서 시연을 하기도 하고,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직접 상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무협소설에 익숙한 팬들은 그가 무림에서 무술을 단련한 것으로 오해하지만, 이미 무림 같은 곳은 중국 건국 이후 모두 없어지고, 제도권의 체육학교 및 무술학교로 흡수되었다. 이연걸이 나온 베이징 스차하이체육운동학교는 한국으로 치면 체육영재학교 같은 곳이다.

일단 당시 중국 무술 전수 상황을 먼저 살펴보자면, 중국 공산당이 집권한 이후 사사로운 무술 전수는 금지되고, 오직 정부 통제하의 무술학교나 체육학교에서만 무술을 익힐 수 있었다. 1982년이 되어서야 이 금지는 풀리고, 이후에 무술전수나 무술학원 설립이 자유화되었다. 일부에서는 이렇게 정부에 의해 무술전수가 금지되고 무림이 없어졌다고 해서 (여기에 문화대혁명의 영향까지 더해서) 중국무술이 단절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국공내전 이후 각종 유파가 통합되어 무술이 표준화, 제도화되어 체육학교로 흡수되었다. 이렇게 무술 전수의 경로를 정부 통제하에 둔 이유는 이념상의 문제가 아니라 치안 문제 때문이다. 이 당시 중국의 무림이나 도장은 거의 조폭급의 행태를 보였다. 20세기 중반 중화인민공화국 집권기의 엽문의 일생을 다룬 엽문 2나 일대종사를 보면 이들의 조폭이나 다름 없는 행태를 볼 수 있다. 원래 이런 무술 전수 금지는 공산당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만주족이 대륙을 장악한 청나라 시기부터이다. 소수인 만주족이 한족이 무술을 익혀 반란세력이 될까 두려워하여, 사사로운 무술전수를 금지한 것이다. 그런데 아편전쟁 이후 청조의 힘이 약화되면서 이런 금지령도 유명무실되었다. 그리하여 대륙에 우후죽순처럼 무림 및 유협집단이 생겨났다.

이어 마오쩌둥이 1949년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거의 100여 년간 중국 전토를 이런 집단이 할거하면서 공식적인 정부 이외에 또 다른 정부노릇을 했다. 이렇게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무림 같은 곳은 쉽게 유협집단, 즉 우리말로 하면 조폭 소굴, 더 나아가 반란 세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새로 집권한 공산당 정부가 철저히 규제한 것이다. 이러다보니 제도권으로 편입되지 않은 무술들이 소실되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부 소실된 것은 아니며, 그 제도권에서 키워진 무술가들의 실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런 제도권 무술가들이 투로나 동작만 강조하여 수련을 쌓다 보니, 실전능력은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MMA와 같이 전문적으로 실전만 단련한 선수끼리의 대결에서는 당연히 그럴지 몰라도, 이렇게 동작 및 투로만을 수련한 무술가들조차도 일반인에 비해서는 넘사벽의 격투기 능력을 가진다. 게다가 그런 투로를 연습한다는 무술인들조차도 실전을 겸비하기 위해 격투기인 우슈 산타를 익히는 경우도 아주 흔하다. 다만 영화 출연에는 뽀대나는 동작을 보여주는 것은 투로 위주의 전통권이 더 낫기도 하기 때문에 이연걸이 영화배우가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중국 무술은 문화대혁명보다는 무림이 한족부흥을 내세운 반란세력이 될 것을 우려한 청조 때 대부분 유실되거나 실전되었다.신해혁명 이전에 공산당과 무술단체들은 청조라는 공통된 적이 있어서 크게 대립하지 않았지만, 청조가 무너지고 나니 공산당은 자신들이 얻은 대륙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무술단체들을 규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원장의 난이 진행된 과정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다시 이연걸의 얘기로 돌아와서, 이연걸은 우슈 대회에서 투로만 우승한 게 아닌 격투부문도 3연속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에 실전 능력도 겸비했다. 우슈를 하는 이들 가운데서 산타를 익히는 이들도 의외로 많으며, 동문인 견자단 역시 산타를 익혔다. 의외로 중국정부 내에서 강건한 기풍을 장려하기 위해 무술인들을 많이 양성했는데, 이연걸과 견자단 외에도 남권 챔피언이었던 구건국 등이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김연아나 차범근과 같이 실제로 워낙 뛰어난 인재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가장 내로라하는 5인에게 일일이 그들의 비전을 전수받기도 했다. 일례로 가장 유명한 게 견자단의 스승이기도 한 오빈 사부 밑에서 이연걸이 동문수학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연걸은 대륙의 엘리트 체육학교에서 우슈 장권을 비롯해 번자권, 진식태극권, 금나술, 솔각 그리고 팔극권사 왕식권으로부터 팔극권을 배우는 등 우슈와 다양한 전통권을 체계적으로 배웠으며 투로 및 실전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갖춘 무도가임은 부인할 수 없다. 지금도 우슈계에서 이연걸은 전설적인 인물로 통하고 있다.

1979년 전국운동회(중국판 전국체전)에서 금메달 5개를 딴 이후 무술계를 은퇴한다.***

 


소림사 시절의 이연걸 이연걸의 영화 《소림사》 출연시의 무술 시범 모습

1982년 제작된 중국・홍콩 영화 《소림사》에서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이 작품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 이후 당시 기지개를 펴던 대륙-홍콩 합작 영화로 대륙이 무대와 배우를 제공하고 홍콩의 스탭이 제작하는 방식이었다. 소림사 시리즈도 배우들은 모두 대륙인이지만, 제작사는 홍콩의 대 스튜디오인 쇼브라더스였고, 감독 및 제작자도 홍콩인이었다. 홍콩에서 1982년 1월21일 개봉했으며 한국에서는 1983년 신정특선프로로서 서울 명보극장, 부산 동명극장, 대구 대구극장, 광주 제일극장에서 개봉되었다. 당시 죽의 장막 뒤에 가려 있던 실제 소림사를 만천하에 공개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끈다. 그 이전만 해도 홍콩영화는 북중국을 배경으로 한 사찰신은 한국에서 로케를 할 정도였는데, 이 작품은 실제 소림사를 배경으로 찍었기 때문에 당연히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전작의 흥행에 힘입어 1983년 《소림사 2》(원제 소림소자)에 출연했고, 1986년 《소림사 3》(원제 남북소림)가 나온다. 이 소림사 3은 대한극장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는 한국에서 그동안 베일에 가렸던 만리장성이 나온다고 화제가 되었다.

이 소림사 시리즈는 연작 같지만 배경이 소림사이고 이연걸이 주연, 호견강(胡堅强)[15]이 동료, 우해(于海)[16]가 사부로 나오는 것 외에는 그다지 연관성도 없다. 이연걸이 맡은 주인공의 이름도 1, 2, 3편 모두 모두 각원(覺遠), 삼룡(三龍), 지명(智明)으로 다 다르다. 세 작품을 별개 작품으로 보는 게 속편하다.

소림사 시리즈는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는데 플롯은 너무 단순했다. 이연걸의 화려한 액션[17]뿐만 아니라, 배경으로 진짜 소림사와 만리장성, 자금성이 나오고 수많은 엑스트라급 무술연기자의 집단 전투신 등, 이전의 홍콩 무협영화들보다 볼거리는 훨씬 풍부했지만 "권선징악 및 복수"라는 무협영화의 클리셰를 그대로 반복했기 때문에 영화사적으로 이연걸의 데뷔작이라는 것 이외에는 크게 의미를 두기 어렵다. 그만큼 세 시리즈에서 이연걸의 비중은 압도적이었다.

한편《소림사 3》를 감독한 유가량(1934-2013)은 홍콩의 유명감독인데 그의 아버지 유심은 유명한 황비홍의 제자인 임세영의 제자였고 의동생인 유가휘도《소림 36방》의 주연으로 활약하는 등 무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수많은 액션영화에서 무술을 지도하거나 직접 출연해서 뛰어난 무술실력을 선보이기도 하며 홍콩영화계에서 무술감독으로서의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유가량이 무술지도를 맡고 직접 출연까지 한 마지막 작품은 서극의 칠검(2007)이었다.

2.3. 1980년대 말: 거듭된 실패[편집]

소림사 시리즈로 이름이 알려진 이연걸은 영화감독으로도 성공해 보겠다는 야심을 품고 1986년에 영화《중화영웅》에서 주인공과 감독을 겸직하는 무리수를 던졌다.

이 영화는 중일전쟁 후 막노동으로 연명하던 이연걸이 클럽의 불법 시합에 올라 싸운다는 내용인데 형편없는 스토리는 그렇다쳐도 액션장면이라도 멋졌으면 좋았을 텐데 이연걸 답지 않은 어정쩡한 격투씬들로 인해 결국 영화는 망했다. 이때의 실패가 뼈 아팠는지 이연걸은 그 이후로 현재까지 감독을 하지 않았다.

1988년에는 주성치와 공동출연한《용재천애》(龍在天涯)를 찍었지만 이 역시 흥행엔 실패했다. 이 영화에서 미스 홍콩 출신 여배우 리지를 알게 되고,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 이연걸은 무술학교 동문이자 아내였던 황추연[18]에게 "당신에게 느낀 건 사랑이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을 돌봐준 연민이었다"고 고백했고 그 얘기를 들은 황추연은 이혼을 해주었다. 황추연은 이연걸과 이혼 후 영화계를 은퇴했고, 중국웹의 썰에 의하면 이후 미국으로 이민가서 미용실 사업을 하던 중 재혼을 했는데, 그녀의 남편은 한국 화교 출신의 중국계 미국인 왕모씨라고 한다.

1989년 이연걸은 중국을 무단으로 이탈하였고, 서방에서는 이를 망명으로 보도했다. 천안문 사태 때문이라는 설이 있었으나, 본인은 "좀 더 자유롭게 작품활동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금전문제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980년대 초반의 중국은 원리주의적인 사회주의 체제가 지배하던 나라였고, 소림사 시리즈를 찍을 때 배우들은 기본적인 숙식제공에 일당으로 하루 고작 1위안 정도의 푼돈을 받았고, 홍콩영화사와 합작으로 얻은 많은 수익들도 본인이 소속된 국영영화사가 모조리 가져갔다.[19]

만약 이연걸이 이때 홍콩에서 활동했었다면 수백만 위안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국영 영화사에 소속된 배우였기에 푼돈 정도만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을 무단이탈해 홍콩에 갔던 것이다. 1990년대 초 이연걸이 중국에 영화촬영차 다시 입국했을 때 체포되었다는 보도도 나왔지만 어떻게 잘 무마한 듯하며 중국 당국으로부터 별다른 처벌은 받지 않았다.

이 당시만 해도 중화권에서 조금 이름이 알려진 배우였을 뿐 월드 스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국에서도 소림사 시리즈가 1, 2, 3편 다 극장개봉했으며 중고생 단체관람이 많아 1편은 흥행에는 성공했으나 2, 3편은 그냥저냥한 수준의 흥행성적을 내면서 더욱 이름이 없었다.

1989년에 중국 이탈 후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한국 언론에서는 단신 처리되었을 정도로 굴욕을 당했다. 당시 홍콩 영화의 가장 큰 고객이 한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연걸은 성룡이나 주윤발이 중심이 되어 한국에서 분 홍콩 웨이브와는 무관했으며, 한국에서 흥행한 영화도 거의 없었다.

한편 이연걸이 한국에서 불법에 귀의했다는 설이 있지만 사실무근이다. 어릴 때 불교가정에서 자랐으나, 본인은 한동안 배우를 하면서 너무 부귀영화만 쫓다가 무상함을 깨닫고 1997년부터 다시 불법에 귀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언론에 나온 이연걸의 불교 귀의 경위

2.4. 1990년대 초: 서극과 만남 및 성공[편집]

그러다가 1991년 홍콩의 명제작자인 서극과 정소동을 만나며 재기한다. 이후로 서극의 영화에 계속 출연하게 되는데, 서극이 제작과 감독을 겸직한 《황비홍》이 큰 히트를 치며 이연걸은 다시 한 번 홍콩영화계에서 흥행아이콘으로 떠오른다. 이연걸의 외모나 연기가 황비홍이라는 캐릭터속에 너무나 잘 녹아들었으며 황비홍 1편과 2편은 그를 중화권 액션스타로 만들어주는데 모자람이 없었다.[20]

서극과 정소동은 거칠고 날렵한 액션만을 구사하던 이연걸을 화려하고 우아한 동작을 구사하는 무협소설속 무림고수의 이미지로 재탄생시켰다. 때마침 김용과 고룡 등의 '신무협'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홍콩 무협영화들이 인기를 끌고, 이 무렵부터 이연걸의 인지도가 올라가며, 국내에서도 성룡의 인기를 서서히 따라잡게 된다.

이소룡이 길거리 싸움을 보는 듯한 액션을, 성룡이 코믹하고 기발한 액션을 선보였다면, 이연걸은 무협소설에서 등장하던 무공의 초식들을 멋지게 시전하는 무림고수를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앞의 두 사람과는 달리 이연걸은 배우 이전에 어린 시절부터 배운 전통무술의 동작들을 정확하게 구사하는 능력을 갖추었기에 무술의 예술적인 표현이라는 점에서는 이보다 완벽한 인물도 없었을 것이다.[21]

이후 서극과 정소동이 제작한《동방불패》로 확고한 이미지를 구축했고, 왕정 감독의 소림오조에서는 냉정한 무사역할을 잘 소화해 냈으며, 원규 감독의 코믹액션 방세옥 시리즈, 정무문태극권 등과 현대 액션물인《보디가드》등으로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와 같은 연속적인 성공으로 이연걸은 홍콩 영화계에서 이소룡과 성룡의 계보를 잇는 중화권의 대표적인 액션스타로 등극하게 된다.

다만 이 당시 매년 2~3편 이상의 다작을 했고 과격한 액션장면이 많은 작품들에 연속적으로 캐스팅되어 활동하다 보니 몸이 성할 날이 없었고 훗날 신체적으로 부상후유증을 겪게 된다. 황비홍 1편에서는 찻집에서 사하파 악당들과 싸우는 장면을 찍다가 큰 부상을 당했고, 정소동 감독의 모험왕을 찍을 때는 발목뼈가 부서지는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인력풀이 비교적 좁고 위험천만한 액션장면들이 난무하는 홍콩 영화계의 특성상 스타급 배우라도 쉬지 않고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하다 보니 부상후유증이 심한 편이다. 이런 면에서 데뷔 이후 꾸준한 몸 관리로 최상의 몸상태를 유지하며 활동했던 견자단은 홍콩 영화계 내에서도 매우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홍콩은 아니지만 역시 날렵하고 우아한 액션으로 이름난 여배우 유역비도 시대극에 출연하면서 잦은 와이어 연기로 인해 만성적 요통을 겪고 있다고 한다.

1990년대 초중반은 홍콩영화의 전반적인 침체기로 성룡과 주윤발로 대표되는 기존 배우들은 침체기에 있었지만 이연걸은 그 와중에도 홍콩 및 중화권의 확고한 액션스타로 자리잡았으며 이를 밑천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된다.

2.5. 2000년대 초: 월드 스타로 도약[편집]

1998년 《리썰 웨폰 4》에 캐스팅 되어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하지만 악역으로 허무하게 죽는 배역이라 아시아 팬들은 무척 불쾌해했다. 이때는 영어 구사 능력이 딸렸는지 거의 중국어로만 대사를 했다.[22]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답게 압도적인 무술 실력으로 주인공들을 흠씬 두들겨 패지만 어이없게 AK-47에 벌집이 된다. 마지막에는 철근에 가슴이 꿰뚫린 채로 수장된다.

그러다가 2000년에 주인공으로 나온 《로미오 머스트 다이》가 대박이 난다. 2,500만불의 제작비로 만들어져 9,100만불의 수익을 냈는데 동양계 미국인이 아닌 중국 본토 출신의 배우를 주인공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치고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이 작품을 통해 높은 인지도를 얻은 이연걸은 할리우드에 안착하게 된다.《더 원》 같은 범작영화에 나오기도 했지만 이후로 뤽 베송 감독과 협업으로 《키스 오브 드래곤》과 《더 독》, 그리고 《익스펜더블》 시리즈 같은 액션영화들에 꾸준히 출연했다.

이외에도 홍콩영화 대신 중화권 영화의 맹주자리를 차지한 중국영화에도 꾸준히 나오고 있는데 장이머우 감독과 작업한 영웅(2002)은 화려한 액션이나 미장센은 볼 만했지만, 주제면에서는 진시황을 미화하는 메시지가 강해 서방평론가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미이라 3: 황제의 무덤》과 관련해 국내매거진과 인터뷰 중에는, 진시황이 악당으로 등장하는 것에 대해 이연걸은 의외로 "상관없다"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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