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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글쓰기 게시판

영화평론[번지점프를 하다]

작성자04주지혜|작성시간04.03.31|조회수356 목록 댓글 0
『말』2001.03. 사회적 편견에의 허약한 투항 -「번지점프를 하다」


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그런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그런 영화가 아니라고 부정한다. 고은님 작가가 시나리오를 쓰고, 이병헌과 이은주가 출연하고, 김대승 감독이 데뷔작으로 만든「번지점프를 하다」는 그런 의미에서 이상한 영화이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동성애를 다룬 퀴어영화(Queer Cinema)라고 생각하는데, 만든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니라고 말한다. 김대승 감독은 시사회 자리에서 첫 인사말로 "이 영화는 동성애 영화가 아닙니다"라고 했고, 이병헌은 인터뷰에서 "만일 이 영화가 동성애 영화였다면 출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시나리오를 쓴 고은님 작가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동성애 코드는 있지만 동성애 영화로 보지 말아달라"라고 부정했다. 게다가 영화사 사장은 "동성애 영화로 매도(!)하지 말라"고 강한 불쾌감마저 표시했다. 홍보사에서도 보도자료에 주를 달아 "제발 이 영화를 동성애 영화로 소개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문구를 특별히 달았다.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상) 부정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세 가지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냥 순진하게 정말 이 영화가 퀴어영화가 아니거나, 다소 야비하게 상상해서 그러한 이야기가 흥행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숨기기 위해서이거나, 아니면 좀 복잡해지기는 하지만 그러한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만든 이들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만들었기(그런데 그 역은 아니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흥미있는 것은「번지점프를 하다」가 퀴어영화인가, 아닌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해와 부정 사이의 가면(假面)효과에 대해서이다. 만일 퀴어영화가 아니라면 얼굴을 가면으로 오해한 것이며, 퀴어영화라면 가면을 얼굴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얼굴이건 가면이건 상관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그 가면이 중요해진 것이다. 그 가면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오해헀거나 다른 한족에게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양쪽이 동시에 가면을 사이에 두고 의심하고 있는 셈이다. 가면은 서로 함께 만들어낸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반대 입장처럼 보이는 양쪽 사이에 일종의 합의가 있는 것이다. (어찌됐건 양쪽 모두에게) 동성애는 그 모든 것에 우선하여 차이를 만들어내는 관계이다.

영화「번지점프를 하다」는 두 개의 시간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나누어 놓았다. 1983년 그 해 어느 비오는 날, 국문과에 다니는 인우(이병헌)의 우산 속으로 한 여학생이 뛰어든다. 조소과에 다니는 태희(이은주)에게 한눈에 빠져버린 인우는 수줍어하지만 결국 사랑으 고백한다. 그러나 군입대를 하러 더나는 날 마중 나오던 태희는 교통사고로 죽는다. 그리고 17년 후 2000년 3월. 고등학교 선생님이 된 인우는 자기 반에서 현빈이라는 남학생을 발견한다. 인우는 현빈에게서 태희의 흔적을 발견하고, 점점 그에게 빠져든다. 현빈이 태희의 환생임을 믿는 인우는 결국 남학생 제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 끝에 해임당하고, 집에서는 아내와 이별하고 여관을 전전한다. 그 인우를 현빈이 찾아온다. 현빈이(태희의 목소리로) "이번엔 여자로 태어나야죠?"라고 하자 인우가 말한다. "그래? 그런데 나도 여자로 태어나면 어쩌지." 현빈이 대답한다. "(웃으면서) 또 사랑해야죠" 뛰어내린 두 사람에게 안전벨트가 없다.


***전혀 다른 두 개의 영화***

이 영화의 진술 중 어느 쪽이 진실인가. 이 영화는 보끼에 따라서 전혀 다른 영화가 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정말 하고 싶엇던 이야기는 이 이야기의 전반부일까, 아니면 현빈이와의 사랑을 말하고 싶어서 태희가 필요했던 것일까(이 영화에 플래쉬 백이 있기는 하지만, 전반 40분을 태희와 인우의 사랑 이야기에 할애하고 있다). 순진하게 이야기를 쫓아갈수록 이 질문은 점점 더 미스터리가 된다. 만일 이 영화가 인우의 일인칭 시점 영화라면 현빈은 인우의 강박관념에 가까운 기억의 내부로 이끌려 들어와 그의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 자신의 자아를 상실하고 죽음을 맞이한 셈이다. 그 반대로(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말을 빌려) 소울 메이트(soul mate)에 관한 환생의 이야기라면 이것은 전지적 시점의 이야기여야 한다. 감독-작가는 그들의 환생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으며, 그 환생의 어떤 순간에 개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좀 도식적으로 말해서 이 영화는 공포영화는 아니지만 귀신영화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의도를 의심한다. (그러니까 의심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반대로 이야기를 믿을수록 만드는 사람들의 말이 의심스러워지는 것이다.)

인우는 이 알 수 없는 혼란을 직접 경험하면서 그 사건의 중심 안에 이미 들어서 있다. 그는 사건의 관찰자가 아니라, 사실은 이 모든 사건의 출발이자 귀결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건을 오직 인우의 관점을 통해서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가장 이상한 것은 종종 현빈에게서 태희의모습을 발견하는 인우에게 그 모습은 환각이나 환청의 형태를 띈다는 점이다(직접 나타나지 못하고 기차의 유리에 비치는 태희의 모습, 현빈에게서 메아리처럼 울리는 태희의 목소리), 만일 태희가 현빈으로 환생한 것이라면, 그 사실을 정말 믿었으면 태희는 유령이 아니라 피와 살의 귀환이어야 할 것이다. 이 영혼과 육체의 이분법은 우리를 의심하게 만든다. 또는 좀더 정확하게 사실은 이 영화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도 환생을 별로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자살하기 위하여 마지막 번지점프를 하러 가는 인우가 동반자살하는 현빈에게 이 모든 만남의 과정을 설득하고 고백하는 부분을 완전히 삭제해버렸다. 영화를 곧이곧대로 따라가자면 현빈은 자기의 전생을 듣지 않고 그냥 믿는다. 그런데 사실은 이게 그 반대가 아닐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오히려 그냥 믿는 것은 인우라는 말이 옳은 것 같다. 현빈이 태희라는 인우의 믿음이(또는 오해가) 이야기를 성립시키기 때문이다. 태희는 피와 살을 갖고 있지만, 현빈은 태희에게 영혼을 내어준 육신만의 존재이다. 그런데 그 육신은 주인이 없다. 또는 그 육신은 일종의 상상적 분신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인우에게는 아내와 딸이 있다는 사실이 보여지지만 현빈의 부모는 단 한번도 영화에서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아직 미성년자인 현빈을 외국에 데리고 나가는데도 그의 부모는 결코 나서지 않으며, 게다가 인우와 외국으로 자살하기 위해 떠난 현빈도 부모 걱정을 하지 않는다. 마치 인우의 기억이 빚어낸 상상처럼 홀연히 거기 태희가 현빈의 모습으로 17년 만에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태희가 목소리를 얻어갈수록 현빈은 점점 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간다. 또는 현빈은 인우 자신에게는 정신적 상처이며,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이 모든 게 정신병의 증후이다. 영화 중간에 태희의 얼굴이 그려진 라이터를 보면서 수업시간에 그림을 그리는 현빈의 멱살을 붙잡고 인우가 "너 도대체 누구야"라고 외치는 그 질문에 현빈은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겉으로는 현빈에게 태희는(그 순간까지는) 알 수 없는 존재이며, (좀더 심각한 것은) 속으로는 현빈이 태희임을 인정하는 순간 그는 유령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역설이 있다. 자, 이제 이야기에서 사람 이름에 밑줄을 그으신 다음 이 펒르의 수수께끼 안으로 들어오시라, 인우는 태희가 여자이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라 태희이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다. 그 앞에 현빈이 나타난다. 그런데 사랑하지 못한다. 그가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둘은 서로 헤어지거나 죽어서 다시 만나야 한다. 이 말은 현빈이 돌아온 태희임을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태희가 남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멜로 드라마였던 이야기가 갑자기 사회의 제도와 관습에 부딪친다. 그러나「번지점프를 하다」는 우리 사회의 한계를 넘어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처음부터 비판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동성애에 대한 무의식적 증오***

이 영화는 저 유명한 "야학비판론"이 제기되어 학생운동의 신호탄이 되었던 뒤숭숭한 1983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나는 그해 주인공과 반대로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였기 때문에 그 낯선 풍경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평화롭기 그지없다. 이 탈역사적인 무드는 이 영화가 아무런 사회적 책임과 의문을 제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우는 자신이 통과한 역사로부터 아무 상처도 받지 않았다. 오직 그 시간 동안 죽은 연인만 기억한다. 정말 아무 차이가 없는 17년이 그 사이에 있을 뿐이다. 인우와 태희의 사랑을 막는 것은 운명이지만, 인우와 현빈의 사랑을 막는 것은 다만 학교의 학생들뿐이다(아내도 말리지 않고, 선생님들도 수수방관하며, 현빈의 부모는 등장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 생각에 진짜 문제는 성인이 미성년자와 사랑해도 괜찮은가에 놓여 있는데도 그걸 문제 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더 신기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죽음을 선택한다. 살려는 그 어떤 노력도 없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둘 중의 한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처음부터 죽으려고 작정을 하였거나, 아니면 죽이려고 작정을 한 것 같다. 같은 말이지만 죽으려고 작정을 한 까닭은 그들의 사랑이 현실 속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죽이려고 작정을 한 까닭은 감독 작가가 생각하기에 인우와 태희의 사랑이 그 어디에서도(그들은 남한이 아니라 뉴질랜드에 가서 자살한다) 받아들여질 수 없는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 죽음은 동성애는 이 세상에 존재할 만한 사랑이 아니라는 무의식적인 증오를 멜로 드라마의 비극적인 사랑의 형태로 가장한 것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당신 안에는 당신 아닌 당신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이 영화가 사회적인 것과 자아의 욕망 사이에서 벌어지는 동성애에 관한 편견과 지우고자 하는 실재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영화가 동성애 영화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동성애에 편견을 가지고 그에 관한 흔적과 증거를 숨기고자 할수록 그것은 점점 더 완강하게 저항한다. (조금 말을 비틀자면) 편견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그런데 도대체 저항을 불러올 편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두려워할수록 더 깊은 편견을 갖게 될 것이고, 그것을 끌어안을수록 저항은 무기력해질 것이다. 우리들은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우리 담임선생님과 내 친구가 번지점프 하러 가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글 - 영화평론가 정성일

참고자료 <http://my.dreamwiz.com/dorati1/film-index.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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