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께서 당부하신 말씀을 만약 모든 사람이 실천할 수 있다면 전쟁은 즉시 사라질 것이고, 우리 가정이나 우리 공동체 내의 작은 다툼까지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요?!
프랑스의 위대한 문호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사회가 언제나 죄로 물들어 있으며, 그 안에 수많은 성인들이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범죄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회는 결코 변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든 성 빈첸시오 드 폴이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인물이 존재하여, 말이 아니라 희생의 삶으로써 이를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성인들에 의해 크게 바뀌지 않았다. 성인들은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에 작용했지만, 역사는 여전히 죄로 얼룩져 있다…."
개인과 사회를 이렇게 뚜렷하게 구분하거나 심지어 대립시키는 것은 옳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인은 사회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리아크가 말한 것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변의 영향을 아무런 분별 없이 받아들이지만, 어떤 이들은 같은 영향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며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같은 환경 속에서 나태한 사람 혹은 이기적인 사람이 나오기도 하고 예언자요 주님의 참 제자, 즉 적극적으로 선과 사랑을 향해 도전해 가는 사람도 함께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후자의 사람들이 우리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구현해 가는 사람들이고, 성령을 통해 하시는 하느님의 일에 동업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이제벨이라는 사람은 참으로 잔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나봇을 죽이도록 음모를 꾸며 그의 포도밭을 남편 아합 왕의 채소밭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사실 아합은 왕으로서 수많은 밭을 가질 수 있었지만, 단지 편리하다는 이유로 나봇의 밭을 탐냈던 것입니다. 결국 이제벨은 자기와 남편 아합 임금의 에고를 위해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볼 때,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악할 수 있는가 하고 놀라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안에도 작은 '이제벨'이 숨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라면 우리도 이런 이기적인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벨을 바라보며, 우리 자신의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먼저 빼내야 합니다(마태 7,5).
사회는 서로에게 잘못된 것을 "개선하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결코 나아지지 않습니다. 일전에도 한 번 언급해 드렸습니다만, CAC(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활동과 관상을 위한 센터')의 7가지 모토 중 하나가 "나쁜 것에 대한 최선의 대응은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님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선과 사랑을 행하기보다는 어떤 것에 대한 대응, 혹은 반응(반작용)을 하는 데 많는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며 살아간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맞는 말일 겁니다. 이렇게 자기 방어를 하는 주체는 참 자아가 아닌 가짜 자아, 즉 에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에고는 "옳음과 그름"이라는 이원론적 계산에 민감하기에 과거의 잘잘못에 집착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러나 참 자아는 무엇이 옳거나 그르냐의 문제에 자신의 존재성을 두지 않고, 존재의 위대한 연결 고리 안에서 자신의 존재성을 두고자 합니다. 그래서 참 자아는 존재의 위대한 사슬의 원천, 즉 모든 관계성의 원천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고, 그렇기에 나아가서 다른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위대한 자아를 바라보려는 경향을 지닙니다. 물론 우리는 에고를 지니고 살아가기에 자기 방어에 신경을 쓸 때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이런 상황에 빠지게 될 때마다 이것이 참 자아의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인식하며 우리와 일치하고자 하시는 관계성과 사랑의 하느님께 연결되어 있는 참 자아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에고의 잘못된 방향을 늘 깨어 의식하며 더 큰 선과 사랑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언젠가 읽었던 글에서 CAC의 모토와 비슷한 조언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비판하는 데 힘을 쓰지 말고, 우리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그것이 어떻게든 참으로 선한 것이라면, 악을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제가 그 내용을 글자 그대로 기억할 수는 없지만 대략 이러한 내용의 조언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어떤 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모든 분야에 적용되는 진리가 아닐까 합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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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마리향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5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
수백 년 동안, 그분의 가르침은 대부분
초대 교회 안에서 충실히 지켜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제국의 가장 낮은 자리와
변두리에 머물며, 배척당하고
배신당하신 주님의 처지를 함께 나눌 때,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더욱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평화의 삶,
단순한 생활, 모든 이를 포용하는 공동체성,
원수까지 사랑하는 복음적 가치들은
신자들이 지하 카타콤에서 은밀히 모일 때
더욱 선명하게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 문헌은 초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단순함과 관대함의 가르침에 충실했음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서기 90년경에 편찬된 『디다케』는 이렇게 전합니다.
"여러분의 형제와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그것이 여러분의 것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썩지 않을 것을 함께 나누는 이들이라면,
썩어 없어질 것들은 더욱 나누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시 그리스도교는 여전히 순수하고 단순하며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고, 제국의 영향이나 합리화
타협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