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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 생각(思友) - 작사 / 이은상, 작곡 / 박태준

작성자이우성|작성시간21.09.18|조회수2,809 목록 댓글 0

대구 청라언덕과 선교사 주택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1922년 탄생한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이다.
대구 출신의 작곡가 박태준이 곡을 짓고
시인 이은상이 가사를 붙였다.

대구 지역 의료 선교사들이 살았던 청라언덕의 스윗즈 주택(1910년경 건축)
이 곡의 무대는 대구 중구 동산동에 있는 청라언덕이다. 경상감영에서 멀지 않은 곳, 대구 근대 거리의 한 복판이다. 박태준은 1910년대 계성학교 학창 시절, 청라언덕 인근 신명여자학교의 한 학생을 좋아했다.

그 학생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지은 곡이 바로 ‘동무생각’이다.

청라(靑蘿)는 푸른 담쟁이를 말한다. 100여 년 전 이곳엔 푸른 담쟁이가 많이 자랐다. 그래서 청라언덕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 담쟁이를 심은 건 대구 지역의 의료 선교사들이었다. 청라언덕엔 근대기 선교사들이 살았던 주택 세 채가 남아 있다. 블레어 주택, 챔니스 주택, 스윗즈 주택. 선교사의 이름을 따서 이렇게 부른다.

 

모두 1910년경 붉은 벽돌로 지은 2층 집이다. 당시 미국에서 유행했던 주택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특히 스윗즈 주택이 더욱 눈길을 끈다. 붉은 벽돌 벽체에 기와지붕을 올렸기 때문이다. 서양식 가옥과 한옥을 절충한 것이다. 벽돌 사이 스테인드글라스도 인상적이다. 햇살이 비치면 색색으로 빛나는 유리창. 청라언덕은 이국적이고 단정하다.

여기 살았던 선교사들은 의료 활동에 헌신했다. 바로 옆 동산의료원 118년의 역사를 함께하며 대구 지역 근대 의료를 개척한 사람들이다. 주택의 정원엔 선교사와 가족들이 묻혀 있다. 1948년부터 1993년까지 45년 동안 동산의료원장을 지냈던 미국인 하워드 모펫도 이곳에서 영면 중이다. 그는 1993년 고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매년 한 차례 대구를 찾아 챔니스 주택에서 며칠씩 묵었다고 한다. 그러곤 2013년 세상을 떠나 청라언덕으로 영원히 돌아왔다.

고즈넉한 청라언덕. 대도시의 한복판에 이렇게 한적하고 아름다운 곳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그 아름다움의 뿌리는 그리움일 것이다. 이국땅에서 무수한 생명을 구했던 의료 선교사들의 헌신, 작곡가 박태준의 풋풋한 청춘. 청라언덕을 걷노라면 선교사들의 흔적에 고개 숙여지고, ‘동무생각’을 절로 흥얼거리게 된다. 머지않아 백합이 활짝 핀다. 청라언덕은 이 봄에 참 잘 어울리는 곳이다.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 자를 써서 '푸른 담쟁이덩굴'이란 뜻을 가진 청라언덕은 당시 박태준이 다니던 대구 계성학교의 아담스관과 맥퍼슨관, 그리고 언덕에 위치한 동산의료원 선교사 사택들이 푸른 담쟁이덩굴로 휘감겨 있는 모습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동무생각’의 배경이 된 대구 동산동의 ‘청라언덕’은 대구 근대문화의 중심지다.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 치료로 유명한 대구의 계명대 동산 병원이 바로 이곳 동산의료원이다.

 

박태준은 우리나라 현대음악의 선구자로서 1920년 동요 ‘기럭기럭 기럭이...’ 라는 ‘기러기’, 1925년 ‘24세의 나이에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의 ‘오빠 생각’ , 새나라의 어린이 등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를 작곡했고 1922년 그가 작곡한 우리나라 첫 가곡인 ‘동무생각(思友)’의 노랫말이 바로 이 언덕 위의 돌비에 새겨져 있다.

 

마산 창신학교 설립자의 아들이자, 창신학교 국어교사로 있던 노산 이은상은 1년전 이 학교로 부임한 태준이 지은 동요를 좋아했다 태준은 은상과 함께 노비산 언덕에서 바라보는 월포의 일몰을 좋아했고, 노마산에서 구마산으로 가는 다리 위에서 삶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은상은 푸른 담쟁이 가득한 청라언덕과 좁고 긴 90계단이 아름다운 태준의 고향 이야기를 좋아했다. 태준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은상은 꿈결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하곤 했다.

“박 선생님의 이야기는 언제나 고운 시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날도 태준은 은상과 함께 노비산 언덕에 앉아 있었다. 암울한 조국의 현실이 둘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였다. 침울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문득 은상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그런데 박 선생님, 선생님의 첫사랑은 어떤 분이셨나요?”라고 물었다. 은상의 뜬금없는 질문에 태준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첫사랑은 뭐, 한번 제대로 이야기도 못했는걸요.“

“첫사랑이 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영영 가슴속에 박제되는 사랑이고요.”

“제가 다니던 계성학교 가까이에 있는 신명여고의 여학생이었어요. 함께 교회에 다녔는데, 한번은 그 여학생이 자두를 한 바구니 가져와 교회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전 그 자두가 저 한테까지 올까 하며 가슴을 졸이며 있었지요. 그러다가 결국 화장실로 달아나 버렸어요. 혹시 자두를 못 받게 된다면 내가 자리에 없었으니 주지 못했을 거라 위안하려고요.

 

그 후 돌아오니 오르간 위에 자두 두 알이 놓여 있었어요. 깨끗한 손수건이 자두 위에 덮여 있었지요. 그 자두를 한참 책상 위에 두고 날마다 바라보았어요. 더는 둘 수 없을 만큼 썩고 말라버렸을 땐 꼭지를 따서 그 꼭지를 습자지에 싸서 보관했지요.”

"교회로 가려면 청라언덕을 지나가야 했어요. 여학생은 저녁 예배를 드리러 그 길을 지나곤 했는데 전 오르간 연습을 하다가도 그 시간이 되면 언덕으로 가 그 여학생이 지나는 걸 바라보았어요. 손수건을 전해주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언젠가는 다가 올 그 시간을 아껴두고 싶었거든요. 어느 날 굳은 결심을 하고 그녀를 기다렸어요.

 

'자두 고마웠어요'라는 말을 수백 번도 더 연습했지요. 라일락 이파리가 잔뜩 두꺼워진 칠월 하순이었는데, 그즈음 그런 말이 유행하고 있었어요. ‘사랑의 맛을 알려면 라일락 이파리를 씹어보라’는. 하지만 라일락 이파리가 어떤 맛인지는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문득 저는 그 맛이 궁금해졌어요. 사랑의 맛이 궁금해졌던 거지요.

 

손을 뻗어 연한 잎 하나를 떼서 입안에 넣었는데. 아, 그 맛이란! 그건 먹어보지 않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맛이었어요. 정말이지 죽을 것 같은 맛이었는데 뱉어버릴 수가 없었어요. 그러면 그 기다림이 허사가 되고 말 것 같았거든요.

 

그때였어요. 멀리 그녀의 모습이 보였어요. 기다림은 그렇게 길었는데 그녀의 걸음은 어찌나 빨랐던지 내가 이파리를 다 씹어 삼키기도 전에 그녀는 내 코앞에 마주 있었지요. 아직도 입안에 가득한 그 맛 때문에 혀가 얼얼하고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지요. 그때 제가 어떻게 한 줄 아세요?

바보 같게도 '라일락 고마웠어요'라고 말하고 말았어요. 어휴, 그렇게 골백번 연습한 말을 두고 라일락이 고맙다니요.”

순진한 아이처럼 귓불이 붉어진 태준을 바라보며 은상은 배를 잡고 웃었다.

“아이고, 도대체 그 이파리 맛이 어땠게요?” “그건 이 선생님이 직접 맛보셔야 해요. 사랑의 맛이 그런 것이라는 걸 절감하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태준은 얼굴을 활짝 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어떻게 한 줄 아세요? 절 보며 웃었어요. 제게 눈을 맞추고 소리 없이 빙그레 웃었답니다.“ 그 후 그녀는 말 한마디 없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버렸어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은상이 갑자기 생각난 듯 수첩을 꺼내 무언가 끼적이기 시작했다.

“박 선생님, 선생님 곡에다가 그 여학생의 이야기를 담으세요, 그러면 그 소녀와의 사랑을 노래 속에서나마 이룰 수 있지 않겠어요? 제가 가사를 써드릴 테니 곡을 붙여보시겠어요?”

잠시 후 은상은 태준의 고향 추억과 눈앞에 펼쳐진 월포 바닷가의 풍경을 담은 시를 건네주었다. 수첩을 받아든 태준의 눈동자가 따스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촉촉이 젖어들었다.

“정말 아름다운 노랫말이군요.”

“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더운 백사장에 밀려 들오는 저녁 조수 위에 흰 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태준은 며칠 전에 작곡한 곡을 떠올렸다. 그 음률 속에서 푸르던 청라언덕과, 언덕의 붉은 벽돌담과 붉은 담을 휘감은 푸른 담쟁이와, 그 길을 장난치며 오르던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일본 유학 중 폐결핵에 걸려 돌아와 24살의 나이로 그 아름답던 생을 마감했던 형이었다. 그리고 창포물을 들인 듯 윤기 나던 소녀의 검은 눈썹과, 그 눈썹 아래 싱그럽던 소녀의 미소가 태준의 뺨을 조용히 만지고 지나갔다. 멀리 파도 속으로 백합 같은 소녀의 희디흰 얼굴과 저녁 조수처럼 떠난 흰 새 같은 형의 얼굴이 썰물처럼 밀려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어느 시인이 쓴 이 사연을 읽고 나는 그날 내내 가슴이 아프고 슬펐다. 선율 속에 담겨진 그의 풍부한 서정성은 당시 우리 민족의 가슴에 맺힌 한을 위로해 주었고 그리움과 애잔함을 달래 주었다 한다.

이 땅의 연인들이여, “사랑의 맛을 알려면 라일락 이파리를 씹어보세오. 박태준이 말하길, “아 그 맛이란 정말 죽을 것 같은 맛이었어요!”

(이 이야기는 “가곡은 사람의 영혼을 울리고 싶다”라는 인터넷 가곡 이야기에서 읽은 글이다. 최창일 시인이 2009-12-08일 자 서울신문에 기고한 칼럼을 인용한 글이다. 박태준, 그는 민족정서를 표현해 낸 우리나라 현대음악 개척의 선구자이다. “박태준 선생님의 첫사랑은 '동무생각'에서 영원히 숨 쉬고 있다. 나는 왜 그리도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마음이 쓰이고 가슴이 아픈 걸까? 사랑! 여느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아름다움이겠지만 나는 아니다. 아프고도 슬프다” 박애란 동년 기자가 말했다.)

박태준은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숭실학교를 거쳐 미국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합창지휘를 전공.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연세대 종교음악과를 설립하고 음대 초대 학장을 지냈다.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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