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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설교

**빌립보서 4장 4절("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과

작성자우승호|작성시간26.06.16|조회수43 목록 댓글 0

**빌립보서 4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5("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의 말씀이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왜 5절의 '관용'을 행하는 것이 더 어려운지를 논리적으로 해설하고 있습니다.

 

1. 사도 바울의 권면을 보는 관점

바울이 생각나는 대로 이 특별한 권면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기쁨을 빼앗는 요인: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가지는 **'관계상의 문제와 갈등'**은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격은 주 안에서 참된 기쁨을 소유하려면 반드시 이 관용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4(기쁨)보다 5(관용)의 권면이 더 어려울까?"

4("항상 기뻐하라")을 실천하는 것보다 5("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을 실천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고 말하며, 그 이유를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4(기쁨): 내가 방 안에 홀로 앉아 성경을 읽고 주님을 묵상할 때, 주님이 주시는 논증과 은혜를 통해 혼자서도 충분히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론을 받아들이는 단계)

 

5(관용): 동료들을 만나거나, 곤경과 어려움에 직면할 때 계속해서 관용을 베푸는 것은 훨씬 어렵습니다. 관용은 반드시 '타인과의 관계'라는 실제적인 적용의 영역에서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4(기쁨): 본질적으로 주님을 바라보라는 권면입니다.

5(관용):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권면을 받을 때는 반드시 **'자제(자신을 억제함)의 요소'**가 개입됩니다.

나를 표현하는 것보다 나를 자제하는 것이 언제나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순히 주님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주님과 같이 되라'**는 권면이기에 더 무겁고 어렵습니다.

 

홀로 주님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것(4)'보다, 실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를 자제하며 주님을 닮은 '관용을 베푸는 것(5)'이 그리스도인의 인격 형성에 훨씬 더 성숙하고 어려운 단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관용'의 참된 의미(소극적·적극적 측면)**를 깊이 있게 해설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단순히 행실만을 요구하지 않고,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교리(이유와 능력의 근원)**를 반드시 함께 제공합니다.

4절의 교리: 단순히 "기뻐하라"가 아니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5절의 교리: 단순히 "관용을 알게 하라"가 아니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강력한 교리를 덧붙입니다.

교리의 목적: 우리에게 올라가야 할 높은 기준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의 근원을 지적해 주는 것입니다.

 

참된 관용을 베푸는 사람들은 오히려 대가를 치르더라도 "주 안에 굳게 서는" 당당하고 위엄 있는 사람들입니다.

 

관용은 본질적으로 내면을 다스리는 **'능동적인 제어'**이자 타인을 향한 **'적극적인 관심'**입니다.

 

권리 주장하지 않기: 모든 상황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권리를 고집하지 않고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이익 추구하지 않기: 때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타인을 위해, 무엇보다 주님을 위해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보다 더 적게 가질 자세를 가집니다.

인내와 자제: 인내하며 쉽게 성내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 늘 쉽게 성을 냈던 유오디아와 순두게와 대비되는 그리스도인의 고귀한 특질)

 

관용은 타인의 영혼에 대한 깊은 고려로 나아가는 단계적인 성격을 띱니다.

1단계: 자신의 몫보다 더 적은 것을 소유하려 합니다.

 

2단계 (충격 흡수기): 성가시고 다루기 힘든 사람들과 접촉할 때, 그들의 날카로움을 받아내는 일종의 충격 흡수기 역할을 스스로 자처합니다.

 

3단계 (적극적 변호):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을 위해 능동적으로 변명거리를 찾아주고 행동 방식을 이해해 주려고 노력합니다.

 

: "글쎄요, 결국 그들은 힘든 때를 보내고 있지요",

"그 사람은 다루기 힘든 기질을 갖고 태어났다고 믿습니다"라며 상대를 품어줍니다.

 

참된 관용은 우유부단한 타협이나 무관심이 아니라, **"주 안에 굳게 선 위엄"**을 바탕으로 내 권리와 이익을 스스로 자제(자제·극기)하고, 나아가 다루기 힘든 이웃의 허물까지 능동적으로 감싸 안아주는 그리스도인의 고귀한 성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지나치게 침체되지 않습니다.

기쁨을 아는 것처럼 비애와 슬픔도 깊이 아는 사람이지만, 그것이 그의 삶을 지배하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언제나 평정과 조화를 유지하며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인격을 가집니다.

 

빌립보서 45절 왜 우리가 관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장 강력한 근거인 **"주께서 가까우시니라"**의 참된 의미를 알기 쉽게 정리해 드립니다.

관용은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관용의 대상: 부유하든 가난하든, 사랑스럽고 온유하든, 혹은 잔인하고 거칠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의 적용: 좁은 율법주의나 가혹함을 버리고, 직장이나 사업 등 일상적인 거래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관용해야 합니다. (, 부당한 처우를 무조건 참는 법적인 무기력함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글래드스턴(영국의 위대한 정치가): 타고난 기질은 충동적이고 참을성이 없었으나, 20대 때부터 치열하게 노력하고 **'열심히 기도함'**으로써 놀라운 자제력과 온건함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장 큰 모범):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벧전 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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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의 강력한 원동력: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이 강력한 교리는 우리가 세상에서 억울하고 힘든 일을 당할 때도 관용할 수 있게 만드는 핵심 근거입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① 시간적 의미: 주님의 재림 (종말론적 안목)

세상 삶은 예비학교일 뿐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나그네와 행인의 길이며, 영원에 비하면 60, 70, 80년의 삶은 매우 짧습니다.

영광스러운 상급이 기다립니다: 주님이 곧 다시 오셔서 온 원수를 정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실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고 상상치도 못할 영광이 보장되어 있음을 기억한다면, 지금 이 땅에서 겪는 불친절과 잔인함, 잔소리 등은 기꺼이 견뎌낼 수 있습니다.

 

​② 심판자로서의 주님: 보복과 판단을 맡김

우리는 심판자가 아닙니다: 남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고 싶어질 때, 진짜 심판자는 주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곧 오셔서 우리의 삶과 행동의 전말을 보고받으실 것입니다.

보응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보복하거나 원수를 갚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12:19). 오히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을 생각하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고통을 겪게 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③ 공간적 의미: 항상 곁에 계시는 주님

주님이 시간적으로만 가까이 계실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삶 속에 아주 가까이 임재해 계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늘 내 곁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내면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 최종 요약 (결론)

참된 관용은 내 힘이나 좋은 성품으로 억지로 참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곧 오시며, 지금도 내 곁에 계시고, 모든 것을 공정하게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온전히 신뢰할 때, 비로소 세상의 거친 환경과 사람들을 넉넉히 품어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위대한 자제력이자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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