禹夏永의 實學思想 硏究
제1장 序論
Ⅰ.硏究視覺과 基本方向
우리는 조선시대의 實學者하면 흔히 정약용, 이익, 이수광 등의 대표적인 실학자만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들 이외에도 재야에서 홀로 연구하고 그것을 높은 사상으로 이끌어내는 실학자들도 많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近畿地方에서 연구하던 우하영의 업적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수 없다.
우하영은 18세기 중엽 근기 지방에서의 水原 농촌에서의 몰락한 南人家門에서 태어나 72세를 일기로 별세하기까지 이곳 鄕村을 중심으로 小農을 하며 학문과 사색을 영위 하였다.
그는 광범한 사회 변동 특히 농민 분화가 진행되던 중세 후기 사회를 배경으로 극심한 窮乏과 싸우며 불우하고 苦惱에 찬 생애를 보내는 가운데서도, 자기 시대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문제해결을 위하여 ‘千一論’이란 百科全書的인 방대한 저술을 남기었다. 그는 星湖로 대표되는 近畿學派의 經世致用界의 학자 가운데 商工業 및 鑛業 문제 인식에 있어 매우 특이하고 선진적인 존재 였다. 그는 향촌 사회의 개발 및 行政改編문제에 있어서도 거의 독보적이라 할만큼 매우 전문적이고 선진적이었다. 그리고 우하영은 무엇보다도 18세기 후반 새로운 농법의 개발과 농업기술의 진보, 그리고 경작지의 확대로 농업생산력의 장족의 발전을 이루고 당시의 양반들의 土地集積과 廣作의 확대로 인해 小農民, 貧農民의 遊離現象의 교차하는 시대적 배경하에서 농업이론가로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었다.
Ⅱ.硏究史的 檢査
우하영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은 우하영에 대하여 많은 시각으로 보고 있다. 그중에 정창렬은 최초로 ‘천일록’과 우하영에 사상 전반에 걸친 개략적 考察을 시도하였다. 그에 따르면 우하영의 사회의식의 기반은 농민대중의 위치에 서서 농가 경제를 再建하고 사회경제적 질서를 바로 잡는 것을 그의 사상적 사회적 과제로 삼았다고 전제 하고 농가 경제 재건을 위해서 농업생산을 증대 시켜야 하는데, 우하영은 생산의 증대의 중요한 요소로서 인간의 노동을 중시 하였다고 규정하였다고 한다. 또,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정당한 이윤 추구에 행위에 근거한 사회 정치 경제 신분으로 부터에 자율성에 대한 명백한 의식, 근대적 자연법 사상이 우하영의 사회 경제 사상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다른 학자인 박화진은 주로 농업 기술 측면에서 17세기말에서 18세기 초 홍만선의 農書인 ‘山林經濟’와 비교하여 ‘천일록’에 농업론을 분석하였다. 그는 종래의 대부분 ‘農事直設’이나 ‘農歌集成’의 내용을 그대로 踏襲․祖述하고 있는데 반해 우하영의 ‘農家總攬’은 18세기 이래의 새로운 농법을 채택하여 전기 농서의 결함을 극복하려는 것으로, 새로운 체계를 갖춘 것으로 평가하였다. 또, 그는 ‘천일록’에 농업론을 주로 농업기술의 측면에서 그 진보성을 밝히려 했는데, 그것은 다른 농서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노동력을 중시하는 集積的農法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또한 우하영의 소농의 입장에서 토지에 유리된 無田農民에 생활 안정을 도모하려 했다고 규정하고 같은 맥락에서 상업적 농업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가진 것이라고 보았다.
기존 연구 가운데서 김용섭의 논문은 ‘천일록’의 농업론에 대하여 가장 포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는 우선 천일론에 자체가 전체적으로 ‘농가집성’에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을 평가하였다. 그는 또, ‘천일록’의 단계에 광작이 널리 존재하였으며, 우하영은 광작의 폐해를 들어 농민이 아닌 지주적 입장에서의 농촌 경제 방안이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농가총람’을 비롯하여 ‘田制’등 천일록 가운데 농업관계 저술들이 담고 있는 주장은 실현 불가능한 이상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어디 까지나 경험적이고 실천 가능한 현실 가능한 農業改革論이라고 진술하였다.
제2장 醉石室의 生涯
우하영은 여타의 역사적 인물들과는 달리 同時代의 다른 학자 사상가들과의 교류나 그에 대한 제 삼자의 기록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데다가 그 서술 태도 역시 지극히 추상적이어서 그에 생애 전체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불안전하고 미흡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애에 대한 自敍傳과 제한적이지만 일부 저작물에 나타난 그 자신의 행적, 수원 지방의 현지 鄕村人과 직계 族人들의 證言, 그리고 그가 출생에서 성장했던 향촌에 대한 現場 踏査를 통하여 상당 부분을 구체적으로 밝힐수 있게 되었다. 현재 추전하는 그에 저작물 ‘천일록’과 향토사등을 포함하여 각종 기록물 그리고 현지 답사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 해 볼 때 편의상 그에 생애와 학문적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1단계는 출생과 성장․修學의 시기로서, 우하영은 18세기 중엽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祖父에게서 한문 교육을 받으면서 과거 시험을 준비하던 소년기에서 청년기에 이르는 시기가 이에 해당된다.
2단계는 조선 후기 科擧制의 制度的 矛盾과 운영상의 부조리로 인해 13회의 걸친 과거에 실패한 이후 士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학문관이나 이론 그 자체와 형식적이고 空疎한 性理學의 흐름에서 과감히 벗어나 經世致用․利用厚生․實事求是를 위한 經世學, 곧 實用學 硏究에 힘쓰던 시기이다. 그는 이후 오랫동안 전국 각 지방을 직접 踏査․遊覽하였다. 그리하여 산천․풍토․물산의 실태를 조사하고, 그러던 중 경세학만이 자기가 탐구해야할 학문적 목표임을 깊히 인식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우하영은 향촌에서 소농이지만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경세치용․이용후생을 위한 학문에 경도 되어 晝耕夜讀의 세월을 보냈다.
제 3단계는 학문적 완성기로서 정조 13년(1789)이 이에 해당된다. 18세기말 봉건적 사회 현실이 당면한 국가적 지방적 사회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깊은 사상과 견해를 담은 대작 ‘천일록’ 執筆에 전념하여다. 특히, 그의 나이 56세가되던 정조 20년은 우하영의 개인사에 있어 획기적인 시기 였으니 이해 4월 국왕의 구언하교에 대하여 응지할 때 별도로 시무책 ‘水原儒生禹夏永經論’를 곁들여 올림으로서 그에 명성이 중앙 정계에 알려지는 단서가 되었다.
끝으로 4단계는 정조 20년 ‘丙辰四月應旨疏’ 이후 그의 저작 ‘천일록’ 집필에 한층 拍車 를 가하면서 노년기를 맞아 자신의 삶과 학문을 마무리 하는데 힘을 기울인 시기이다. 그리 고 순조 12년 10월, 72세를 일기로 鄕里인 수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제3장 農致觀과 農業改革論
우하영의 農致觀과 農業改革論과 18세기 후반의 사회 현실과 발전된 농업생산력을 기반으로 그 시대의 농업문제 전반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깊은 省察에서 비록되었다. 조선왕조의 財政的 기반은 전적으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는데다가 그 자신이 근기지방 농촌에서 소농에 종사하고 있었던만큼 저작 ‘천일록’에서 그가 농업문제에 주력하며 그 改革策을 모색하려 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조선후기 사회에서는 지주제의 전개와 社會身分制가 동요되는 가운데 지주제의 土地分割과 부농제와 광작으로 인해 소농민과 빈농민에 생활이 더욱 악화되 그들의 遊離現想이 과속화 되었다. 이러한 농민제현상은 소농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던 우하영에게는 일대위기적 현실로 파악되었고 마침내 ‘농가총람’․‘전제’ 등 농업 관계의 저술을 통하여 농업생산력의 증진을 위한 농제문제와 함께, 대다수의 소농의 입장을 대변하는 농업개혁론을 農業政策, 農業技術, 農業經營 등 세부분에 걸쳐 전개했는데 특히 그가 관심을 쏟은 부분은 ‘농가총람’으로 대표되는 農業技術論이다.
Ⅰ.農業政策 改革論
농업정책 개혁론에서 우하영은 농업이야말로 사회적 생산력에 기본요건이라는 農本主義的 인 입장을 表明하며 정부의 농업 정책을 둘러싼 제도적 운영상의 여러 문제점을 검토하고 農業振興을 위한 농업책의 기본방향을 제시 하였다.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농업정책의 개혁안은 대략 다음 몇가지로 요약할수 있다.
첫째, 위기에 직면한 농민경제를 안정시키고, 국가제정의 안전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농업생산력의 증진이 필요하다고 보고, 이를 위해서는 농민에 농작 의욕을 북돋는 관농정책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둘째, 농촌사회를 구성하는 非生産的인 요소를 제거하고 국가적 차원에서의 농촌 통제의 必要性을 강조하였다.
셋째, 농업진흥은 농업정책을 담당한 地方官의 역할여하에 달려 있다고 보고 그 업적에 대해 그 지방관을 평가할 것을 제안 하였다.
이와 같은 농업정책 개혁안 들은 당시 부농의 토지 집적과 광작농의 확대로 피해를 본 소농민과 빈농민을 걱정한데에서 연유하였다고 볼수 있다.
Ⅱ.農業技術 改革論
농업기술 개혁론은 우하영의 농업론 가운데서도 주요 핵심을 이루는 부분으로서 그 중 크게 주목되는 점은 그의 풍부한 農事 體驗과 전국 각 지방을 답사한 농업지리적 관찰을 바탕으로 農業理論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농사직설’․‘농가집성’ 등 前時代에 농서를 면밀히 檢査하고 자신이 각 지방에서 관찰한 농사 기술 및 체험을 바탕로 실용적 과학적인 새로은 농서를 編纂하려 했으니 이것이 바로 그의 농업기술론이 집약되어 있는 ‘농가총람’인 것이다. 우하영은 ‘농가총람’에서 勤農이 농작의 기본 조건임을 전제하고 그것을 달성할수 있도록 여러 농법과 그 개혁책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勤農․精農에 기초한 集積農法의 농업기술론이 담긴 ‘농가총람’의 서술 체계가 ‘농가집성’에 수록된 ‘농사직설’을 중심으로 전시대 농서를 비판하고 그 방법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Ⅲ.農業經營 改革論
우하영은 앞에서 말한 농업정책론․농업기술론의 개혁안을 바탕으로 소농중심의 농업경영 개혁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농가총람’을 비롯하여 ‘건도부산천풍토관액’․‘전제’․‘수원유생우하영경륜’․‘어초문답’ 등의 저술에서 광작의 폐단을 신랄이 비판한 바 있다. 이것은 바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토지 集積과 광작의 확대로 야기되는 농민분화현상을 적극 인식한 결과 였으며, 그 위기적 현실을 處方․解決하는 방안으로 집적적 小農經營論을 주장한 것이었다.
‘천일록’에는 소작인을 불안정하게 하는 지주소유제의 토지소유문제, 곧 토지개혁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은 찾아 볼 수 없다. 그 대신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개혁론을 통해 제도에 矛盾을 是正․改選․提案한 것으로 보아 당시 다른 학자들이 내세운 토지 개혁론보다는 더 합리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아무튼, 우하영이 목표로 삼았던 ‘集積的小農經營論’은 소농의 입장에서 농민 경제에 안정을 기하고 이를 통한 농업생산력의 증진으로 국력 신장에 큰 보탬이 되자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상품화폐경제의 추세에 따른 그의 진보적인 관점과 아울러 소농의 입장에서 농민경제의 안정을 고려하여 제안된 것이었다.
제4장 産業振興論
우하영의 산업진흥론은 전 분야에 걸쳐 民生之方을 마련한다는 것이 그 立論의 전제가 되고 있다. 그의 상업론에서는 도시빈민에 대한 資生地方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산업진흥책이 전개되고 있으며, 鑛山開發論에서는 토지에서 유리된 무토지농민들을 광산개발에 종사케 하고자 하였다. 그가 상업론이나 광산개발론에서, 토지에서 이탈된 농민의 생활지방을 마련코자 한 것은, 토지 수탈과 공작의 확대, 가혹한 수취체제와 身․戶役의 가중, 상품화폐경제 발달등으로 農民層分解現想이 한층 촉진되어 토지에 유리된 소외 농민층으로 대표되는 비농업 인구가 증가하는 후기사회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우하영이 물가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도 앞에서 언급한 소민층의 생활 안정을 염려한 까닭이었다. 그는 貨幣論에서 通貨量을 억제할 것을, 稅制想에서는 관리들로 인해 불합리하게 농민들이 아픔을 겪게 된다는 것을 염려하여, 민생의 안정이란 측면에서 그 改革策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는 산업진흥론에서 먼저 현재의 여러 폐단을 지적하고, 각 문제에 대응하여 그 개혁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지적한 폐단은 대부분 제도의 모순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는 각각의 산업에 합당한 제도가 마련되지 못하여, 제도 자체가 오히려 산업 발전에 침해 요인으로 작용된다는 견해를 披瀝하였다. 예컨대, ‘平時署’ 관리의 상인 침탈, ‘鑛山開發論’에 있어서 지방관의 개발침해, ‘漁場收稅說’에서 수세제의 모순 등이 모두 산업본래의 고유한 성격과 背馳되는 제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각기 그 산업 본래의 고우한 성격에 맞추어 제도를 유연하게하고 운영의 묘를 살릴 것을 제안하였다. 광산개발론에서는 設店하는 바에 따라 사실에 기초하여 수세하며, 어장도 그 설치하는 것에 따라 稅金을 징수 하되 그 설치와 폐지는 어민의 편의에 맡기게 하라는 것이다. 즉, 각 산업이 고유한 성격에 따라 자율적으로 발전하게 하고 그에 따라서 합리적으로 제도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우하영의 산업진흥책은 각 분야별로 서로 有機的인 聯關을 맺고 있으며, 시종 소민중심의 민본주의적 시각이 반영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농민층이 분해․유리되어 상업과 광업으로 전화되는 현상이 그의 농업론․상업론․광산개발론에 상호불가분의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나타나 있으며, 또 소농․빈농․도시빈민 등 소농층에 대한 생활대책마련이라는 그의 입장이 산업발전론 각 분야에서 기본관점으로 관류되고 있다. 그의 비롯된 것이었으며, 또한 이것은 ‘천일록’ 도처에서 펼친 그의 경세론이 시대적 과제에 대한 時務策으로서 뚜렷한 문제 의식에 입각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우하영의 산업진흥론은 地方的特性이 짙게 나타나 있으며, 그 지방적 특성이 바로 입론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그의 농업을 비롯하여 사업․어업에 관한 개혁론은 당시 수원부를 중심으로 그가 살던 고장의 지역적 특성은 그의 산업진흥론이 현실적 체험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실천성을 갖는 장점이 있는 반면, 지역적 시각에 제약되는 한계성도 동시에 지적될수 있는 것이다.
제5장 政治․社會制度 改革論
우하영이 ‘천일록’에서 披瀝한 정치․사회제도 에 대한 비판과 개혁론은 몇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科擧制에서 우하영이 주장한 科薦制란 과거제와 薦擧制를 절차상으로 연결시킨 科薦合一論이었으며, 그 내용은 현행제도 의 맨 첫 단계에서 천거제의 절차를 추가하고, 會試에서 面試를 통해 無資格者가 적발되면 薦主와 擧子를 함께 처분하는 連坐制를 제시하는 것이 었다. 그의 과거제 개혁론은 당시에 그 자신이 직접 뼈저리게 체험하고 그 대처 방안으로 제시한 것이었으나, 제도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보다는 좀더 현실적은 개혁을 목표로 운영상의 폐단을 제거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둘째, 우하영의 軍制 및 軍政改革論은 기본적으로 壬․丙兩亂의 참혹한 전과와 패배한 대한 반성에서 출발, 유사시에 효율적인 대비하기위해 군사제도와 국방문제에 대한 개혁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특히 군제와 군정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탐구가 청․일 양국의 병제를 검토하고 그 대책을 강구하려한 것도 그에 군사국방론에서 특기 할만한 점이었다.
셋째, 신분제 개혁론에서 우하영은 먼저 ‘四民論’에 주목하였다. 그는 士․農․工․商의 사민은 신분상의 수직적인 貴賤의 문제가 아닌 각기 종사하는 業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職能相의 분화일 뿐이라는 근대적인 직업관을 개진하였다. 그러한 관점에서 관명된 그는 선비의 유의식하는 형태의 봉건적인 행위를 비판하였다. 그는 당시 농업경제사회에서 농업이 차지한는 중 을 강조하여 本末의 표현을 썻으나 이는 결코, 조선후기의 固着된 성리학적 본말관을 표명한 것이다.
넷째, 우하영의 田制 및 田政 改革論은 제도적으로 농업을 장려하고 현재의 토지 조건으로 개혁안을 마련함으로서 파탄직전에 놓인 농민경제의 回生과 국가재정의 안정을 기하려는 목표아래 한층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의 논의는 토지 제도 자체에 대한 現狀論的개혁의 측면보다는 좀 더 現實論的인 관점에서 실현가능한 개혁론을 실행함으로서 불합리한 토지 제도를 시정하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농민층분화시기 아래서 더욱 큰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다.
다섯째, 還第改革論에서 법이 당초 취지와는 달리 농민 수탈의 방편으로 활용․왜곡되는 현실에 비추어 환제의 각가지 폐단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본래 환곡은 貧農을 구제하기 위하여 나타났으나 조선후기에는 농민수탈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됨으로서 빈곤한 농민만이 피해를 보게 되었다.
제6장 地域社會開發 및 行政改革論
우하영의 저술은 국왕을 비롯하여 나라 안에 관심이 水原城(華城)建設에 집중되고, 付 자체가 역사적으로 前代未聞의 發展的 변화가 겪던 분위기가 바로 그 執筆동기가 되었다. 따라서 이 著作이 지역사정에 通達하고 이 고장 향촌에 거주하던 재야 실학자 손에 의하여 집필되었다는 점에서, 18세기말 수원의 사회적 실상과 문제점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역사 사료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더욱이 이 저술은 지역사회에 정통하고 付 발전을 도모하려는 향토애와 개혁적욕구와 경세치용적인 문화 유산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이 시대의 향촌사회사 연구를 위한 자료로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아직까지 이 시대 수원지방의 대한 종합적이고도 전문적인 연구서나 文獻資料가 미흡한 현실에 비해 ‘觀水漫錄’이야 말로 조선후기 수원의 三政문제를 비롯하여 農業․商工業․行政․軍士․地理․風俗 등 여러 가지 당면 문제와 改善策을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데 크게 주목되어야 마땅하리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 저술은 봉건적인 조선후기의 사회 현실과 그 모순에 대한 인식력, 그리고 제도와 운영의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현실개혁의 의지를 도처에 표출해 놓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저술은 지방사적인 측면에서 뿐만아니라 조선후기의 농업사․사회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제7장 결론
지금 까지 우리는 우하영의 사상에 대하여 폭넓게 살펴 보았다. 우하영의 저작 가운데 크게 돋보이는 부분은 첫째, 小農의 입장에서 농업정책․농업기술․농업경영 등 개혁적인 농업론을 모색하려한 점, 둘째, 과거제․군제 및 군정․ 신분제․전제 및 전정․환정 등 정치․사회제도상의 개혁론을 개진하려했고, 셋째 정조대 현안의 역사적 과제로 추진된 신도시건설과 성곽 축조 등으로 空前의 변화에 직면했던 자신의 향촌인 화성지방의 발전을 위한 지역개발론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화성을 중심으로 한 그의 향촌사회발전론은 정조 중엽에서 말엽에 걸쳐 추진된 국왕주도하의 對華城 경영 문제와 결부되어 18세기 말 화성 향촌민의 입장과 향촌사회의 변화와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데 크게 주목되는 부분이다. 18세기 말의 신도시 화성경영은 정조가 집권 중반 이후 말엽에 이르는 11년간의 걸쳐그의 정치적 이상이 담긴 역사적인 사업으로 주려했던 만큼, 국왕의 對華城정책에 대한 향촌지식인의 반응과 지방사적 측면에서 사회경제적 실효 여부를 가늠하는데도 하나의 지표를 제공해 주리라고 생각한다. 18세기 말 화성 신도시 건설은 개혁정치와 왕권강화, 문운의 융성을 아울러 추구하던 정조의 정치력과 문화의식을 그대로 표상하는 것이지만, 이 시대를 살았던 향촌지식인의 對華城觀이나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한 時務論은 당시 향초민의 입장이나 향촌사회 각 부분의 문제접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는데 매우 유용하리라고 생각된다.이상론의 연구를 통해 ‘천일록’을 저술한 ‘취석실 우하영’은 사상적으로 ‘要谷’․‘重峰’ 등 16세기 畿湖學派의 時務論的 경향과 ‘芝峰’․‘星湖’ 등 조선후기 근기학파의 실학적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실학자․농학사상가 였음을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농업을 비롯하여 사회 문제를 인식․성찰함에 있어서도 경험주의적 관점과 함께 살았던 지방적 환경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신도시 건설과 수원성 축조란 18세기말 국가적 공사로 인해 여러면으로 급속한 변모를 격고 있더 역사적 현실에 조응한 결과이고, 따라서 ‘천일록’ 속에는 수원 지방에 관한 인식과 서술이 많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경우 1964년 『천일록』이 민족고전으로 국역되고, 1983년에 완간된 『조선신사』 중세편에서는 『천일록』의 농업기술론을 비롯한 농업문제의 선진성을 높이 평가하는 등 조선후기 사회에서의 우하영의 사상과 저작의 사료적 가치에 크게 주목하였다.농업정책․농업기술․농업경영을 포괄하는 『천일록』의 농업론은 경기지역, 그중에서도 수원을 중심으로 한 그 지역적 사정을 짙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이것이 자신의 향촌사회가 지니고 있는 지리적 특성과 함께 변화를 거듭하고 있던 18세기 말 신도시 화성의 도시적 번영과 발전을 위해서는 상업진흥과 장시육성이 핈요건임을 인식한 결과라고 할수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1960년대 초 북한사회에서 일기 시작한 농촌경제의 자력갱생 내지 노동생산력 제고를 위한 千里馬작업반운동 등과 직․간접적인 관련을 갖고 이루어진 점도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그러나 천일록의 근대적 사상이나 학문적 특성도 사회 변동기로 특정짓는 18세기말 19세기 초라는 역사적 조건의 반응형태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나친 현실론적 지방적 관점으로 인해 봉건적인 구체제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척결하여 새로운 그대 사회를 여는 이론적 근거로는 다소 미흡하고, 또 아직도 전통적 양반사회의 관념에서 탈피하지 못한 일정한 한계를 지닌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한 사상적 한계와 적지 않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천일록은 이 시대 향촌 사회에서 불우한 삶을 이뤄가는 가운데 모순에 가득찬 부대적 현실에 대한 한 양심적인 농촌 지식인의 역사적 省察이자 민중적 차원의 개혁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1) 崔洪奎 著. 禹夏永의 實學思想 硏究 ; 1995.11 一志社
2) 韓國史硏究會 著. 韓國史學史의 硏究 ;1985.8 乙西文化社
3) 김헌선 著. 韓國傳統文化 理解의 길잡이 ; 1998.2 知識産業社
제1장 序論
Ⅰ.硏究視覺과 基本方向
우리는 조선시대의 實學者하면 흔히 정약용, 이익, 이수광 등의 대표적인 실학자만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들 이외에도 재야에서 홀로 연구하고 그것을 높은 사상으로 이끌어내는 실학자들도 많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近畿地方에서 연구하던 우하영의 업적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수 없다.
우하영은 18세기 중엽 근기 지방에서의 水原 농촌에서의 몰락한 南人家門에서 태어나 72세를 일기로 별세하기까지 이곳 鄕村을 중심으로 小農을 하며 학문과 사색을 영위 하였다.
그는 광범한 사회 변동 특히 농민 분화가 진행되던 중세 후기 사회를 배경으로 극심한 窮乏과 싸우며 불우하고 苦惱에 찬 생애를 보내는 가운데서도, 자기 시대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문제해결을 위하여 ‘千一論’이란 百科全書的인 방대한 저술을 남기었다. 그는 星湖로 대표되는 近畿學派의 經世致用界의 학자 가운데 商工業 및 鑛業 문제 인식에 있어 매우 특이하고 선진적인 존재 였다. 그는 향촌 사회의 개발 및 行政改編문제에 있어서도 거의 독보적이라 할만큼 매우 전문적이고 선진적이었다. 그리고 우하영은 무엇보다도 18세기 후반 새로운 농법의 개발과 농업기술의 진보, 그리고 경작지의 확대로 농업생산력의 장족의 발전을 이루고 당시의 양반들의 土地集積과 廣作의 확대로 인해 小農民, 貧農民의 遊離現象의 교차하는 시대적 배경하에서 농업이론가로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었다.
Ⅱ.硏究史的 檢査
우하영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은 우하영에 대하여 많은 시각으로 보고 있다. 그중에 정창렬은 최초로 ‘천일록’과 우하영에 사상 전반에 걸친 개략적 考察을 시도하였다. 그에 따르면 우하영의 사회의식의 기반은 농민대중의 위치에 서서 농가 경제를 再建하고 사회경제적 질서를 바로 잡는 것을 그의 사상적 사회적 과제로 삼았다고 전제 하고 농가 경제 재건을 위해서 농업생산을 증대 시켜야 하는데, 우하영은 생산의 증대의 중요한 요소로서 인간의 노동을 중시 하였다고 규정하였다고 한다. 또,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정당한 이윤 추구에 행위에 근거한 사회 정치 경제 신분으로 부터에 자율성에 대한 명백한 의식, 근대적 자연법 사상이 우하영의 사회 경제 사상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다른 학자인 박화진은 주로 농업 기술 측면에서 17세기말에서 18세기 초 홍만선의 農書인 ‘山林經濟’와 비교하여 ‘천일록’에 농업론을 분석하였다. 그는 종래의 대부분 ‘農事直設’이나 ‘農歌集成’의 내용을 그대로 踏襲․祖述하고 있는데 반해 우하영의 ‘農家總攬’은 18세기 이래의 새로운 농법을 채택하여 전기 농서의 결함을 극복하려는 것으로, 새로운 체계를 갖춘 것으로 평가하였다. 또, 그는 ‘천일록’에 농업론을 주로 농업기술의 측면에서 그 진보성을 밝히려 했는데, 그것은 다른 농서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노동력을 중시하는 集積的農法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또한 우하영의 소농의 입장에서 토지에 유리된 無田農民에 생활 안정을 도모하려 했다고 규정하고 같은 맥락에서 상업적 농업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가진 것이라고 보았다.
기존 연구 가운데서 김용섭의 논문은 ‘천일록’의 농업론에 대하여 가장 포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는 우선 천일론에 자체가 전체적으로 ‘농가집성’에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을 평가하였다. 그는 또, ‘천일록’의 단계에 광작이 널리 존재하였으며, 우하영은 광작의 폐해를 들어 농민이 아닌 지주적 입장에서의 농촌 경제 방안이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농가총람’을 비롯하여 ‘田制’등 천일록 가운데 농업관계 저술들이 담고 있는 주장은 실현 불가능한 이상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어디 까지나 경험적이고 실천 가능한 현실 가능한 農業改革論이라고 진술하였다.
제2장 醉石室의 生涯
우하영은 여타의 역사적 인물들과는 달리 同時代의 다른 학자 사상가들과의 교류나 그에 대한 제 삼자의 기록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데다가 그 서술 태도 역시 지극히 추상적이어서 그에 생애 전체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불안전하고 미흡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애에 대한 自敍傳과 제한적이지만 일부 저작물에 나타난 그 자신의 행적, 수원 지방의 현지 鄕村人과 직계 族人들의 證言, 그리고 그가 출생에서 성장했던 향촌에 대한 現場 踏査를 통하여 상당 부분을 구체적으로 밝힐수 있게 되었다. 현재 추전하는 그에 저작물 ‘천일록’과 향토사등을 포함하여 각종 기록물 그리고 현지 답사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 해 볼 때 편의상 그에 생애와 학문적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1단계는 출생과 성장․修學의 시기로서, 우하영은 18세기 중엽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祖父에게서 한문 교육을 받으면서 과거 시험을 준비하던 소년기에서 청년기에 이르는 시기가 이에 해당된다.
2단계는 조선 후기 科擧制의 制度的 矛盾과 운영상의 부조리로 인해 13회의 걸친 과거에 실패한 이후 士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학문관이나 이론 그 자체와 형식적이고 空疎한 性理學의 흐름에서 과감히 벗어나 經世致用․利用厚生․實事求是를 위한 經世學, 곧 實用學 硏究에 힘쓰던 시기이다. 그는 이후 오랫동안 전국 각 지방을 직접 踏査․遊覽하였다. 그리하여 산천․풍토․물산의 실태를 조사하고, 그러던 중 경세학만이 자기가 탐구해야할 학문적 목표임을 깊히 인식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우하영은 향촌에서 소농이지만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경세치용․이용후생을 위한 학문에 경도 되어 晝耕夜讀의 세월을 보냈다.
제 3단계는 학문적 완성기로서 정조 13년(1789)이 이에 해당된다. 18세기말 봉건적 사회 현실이 당면한 국가적 지방적 사회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깊은 사상과 견해를 담은 대작 ‘천일록’ 執筆에 전념하여다. 특히, 그의 나이 56세가되던 정조 20년은 우하영의 개인사에 있어 획기적인 시기 였으니 이해 4월 국왕의 구언하교에 대하여 응지할 때 별도로 시무책 ‘水原儒生禹夏永經論’를 곁들여 올림으로서 그에 명성이 중앙 정계에 알려지는 단서가 되었다.
끝으로 4단계는 정조 20년 ‘丙辰四月應旨疏’ 이후 그의 저작 ‘천일록’ 집필에 한층 拍車 를 가하면서 노년기를 맞아 자신의 삶과 학문을 마무리 하는데 힘을 기울인 시기이다. 그리 고 순조 12년 10월, 72세를 일기로 鄕里인 수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제3장 農致觀과 農業改革論
우하영의 農致觀과 農業改革論과 18세기 후반의 사회 현실과 발전된 농업생산력을 기반으로 그 시대의 농업문제 전반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깊은 省察에서 비록되었다. 조선왕조의 財政的 기반은 전적으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는데다가 그 자신이 근기지방 농촌에서 소농에 종사하고 있었던만큼 저작 ‘천일록’에서 그가 농업문제에 주력하며 그 改革策을 모색하려 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조선후기 사회에서는 지주제의 전개와 社會身分制가 동요되는 가운데 지주제의 土地分割과 부농제와 광작으로 인해 소농민과 빈농민에 생활이 더욱 악화되 그들의 遊離現想이 과속화 되었다. 이러한 농민제현상은 소농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던 우하영에게는 일대위기적 현실로 파악되었고 마침내 ‘농가총람’․‘전제’ 등 농업 관계의 저술을 통하여 농업생산력의 증진을 위한 농제문제와 함께, 대다수의 소농의 입장을 대변하는 농업개혁론을 農業政策, 農業技術, 農業經營 등 세부분에 걸쳐 전개했는데 특히 그가 관심을 쏟은 부분은 ‘농가총람’으로 대표되는 農業技術論이다.
Ⅰ.農業政策 改革論
농업정책 개혁론에서 우하영은 농업이야말로 사회적 생산력에 기본요건이라는 農本主義的 인 입장을 表明하며 정부의 농업 정책을 둘러싼 제도적 운영상의 여러 문제점을 검토하고 農業振興을 위한 농업책의 기본방향을 제시 하였다.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농업정책의 개혁안은 대략 다음 몇가지로 요약할수 있다.
첫째, 위기에 직면한 농민경제를 안정시키고, 국가제정의 안전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농업생산력의 증진이 필요하다고 보고, 이를 위해서는 농민에 농작 의욕을 북돋는 관농정책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둘째, 농촌사회를 구성하는 非生産的인 요소를 제거하고 국가적 차원에서의 농촌 통제의 必要性을 강조하였다.
셋째, 농업진흥은 농업정책을 담당한 地方官의 역할여하에 달려 있다고 보고 그 업적에 대해 그 지방관을 평가할 것을 제안 하였다.
이와 같은 농업정책 개혁안 들은 당시 부농의 토지 집적과 광작농의 확대로 피해를 본 소농민과 빈농민을 걱정한데에서 연유하였다고 볼수 있다.
Ⅱ.農業技術 改革論
농업기술 개혁론은 우하영의 농업론 가운데서도 주요 핵심을 이루는 부분으로서 그 중 크게 주목되는 점은 그의 풍부한 農事 體驗과 전국 각 지방을 답사한 농업지리적 관찰을 바탕으로 農業理論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농사직설’․‘농가집성’ 등 前時代에 농서를 면밀히 檢査하고 자신이 각 지방에서 관찰한 농사 기술 및 체험을 바탕로 실용적 과학적인 새로은 농서를 編纂하려 했으니 이것이 바로 그의 농업기술론이 집약되어 있는 ‘농가총람’인 것이다. 우하영은 ‘농가총람’에서 勤農이 농작의 기본 조건임을 전제하고 그것을 달성할수 있도록 여러 농법과 그 개혁책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勤農․精農에 기초한 集積農法의 농업기술론이 담긴 ‘농가총람’의 서술 체계가 ‘농가집성’에 수록된 ‘농사직설’을 중심으로 전시대 농서를 비판하고 그 방법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Ⅲ.農業經營 改革論
우하영은 앞에서 말한 농업정책론․농업기술론의 개혁안을 바탕으로 소농중심의 농업경영 개혁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농가총람’을 비롯하여 ‘건도부산천풍토관액’․‘전제’․‘수원유생우하영경륜’․‘어초문답’ 등의 저술에서 광작의 폐단을 신랄이 비판한 바 있다. 이것은 바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토지 集積과 광작의 확대로 야기되는 농민분화현상을 적극 인식한 결과 였으며, 그 위기적 현실을 處方․解決하는 방안으로 집적적 小農經營論을 주장한 것이었다.
‘천일록’에는 소작인을 불안정하게 하는 지주소유제의 토지소유문제, 곧 토지개혁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은 찾아 볼 수 없다. 그 대신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개혁론을 통해 제도에 矛盾을 是正․改選․提案한 것으로 보아 당시 다른 학자들이 내세운 토지 개혁론보다는 더 합리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아무튼, 우하영이 목표로 삼았던 ‘集積的小農經營論’은 소농의 입장에서 농민 경제에 안정을 기하고 이를 통한 농업생산력의 증진으로 국력 신장에 큰 보탬이 되자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상품화폐경제의 추세에 따른 그의 진보적인 관점과 아울러 소농의 입장에서 농민경제의 안정을 고려하여 제안된 것이었다.
제4장 産業振興論
우하영의 산업진흥론은 전 분야에 걸쳐 民生之方을 마련한다는 것이 그 立論의 전제가 되고 있다. 그의 상업론에서는 도시빈민에 대한 資生地方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산업진흥책이 전개되고 있으며, 鑛山開發論에서는 토지에서 유리된 무토지농민들을 광산개발에 종사케 하고자 하였다. 그가 상업론이나 광산개발론에서, 토지에서 이탈된 농민의 생활지방을 마련코자 한 것은, 토지 수탈과 공작의 확대, 가혹한 수취체제와 身․戶役의 가중, 상품화폐경제 발달등으로 農民層分解現想이 한층 촉진되어 토지에 유리된 소외 농민층으로 대표되는 비농업 인구가 증가하는 후기사회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우하영이 물가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도 앞에서 언급한 소민층의 생활 안정을 염려한 까닭이었다. 그는 貨幣論에서 通貨量을 억제할 것을, 稅制想에서는 관리들로 인해 불합리하게 농민들이 아픔을 겪게 된다는 것을 염려하여, 민생의 안정이란 측면에서 그 改革策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는 산업진흥론에서 먼저 현재의 여러 폐단을 지적하고, 각 문제에 대응하여 그 개혁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지적한 폐단은 대부분 제도의 모순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는 각각의 산업에 합당한 제도가 마련되지 못하여, 제도 자체가 오히려 산업 발전에 침해 요인으로 작용된다는 견해를 披瀝하였다. 예컨대, ‘平時署’ 관리의 상인 침탈, ‘鑛山開發論’에 있어서 지방관의 개발침해, ‘漁場收稅說’에서 수세제의 모순 등이 모두 산업본래의 고유한 성격과 背馳되는 제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각기 그 산업 본래의 고우한 성격에 맞추어 제도를 유연하게하고 운영의 묘를 살릴 것을 제안하였다. 광산개발론에서는 設店하는 바에 따라 사실에 기초하여 수세하며, 어장도 그 설치하는 것에 따라 稅金을 징수 하되 그 설치와 폐지는 어민의 편의에 맡기게 하라는 것이다. 즉, 각 산업이 고유한 성격에 따라 자율적으로 발전하게 하고 그에 따라서 합리적으로 제도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우하영의 산업진흥책은 각 분야별로 서로 有機的인 聯關을 맺고 있으며, 시종 소민중심의 민본주의적 시각이 반영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농민층이 분해․유리되어 상업과 광업으로 전화되는 현상이 그의 농업론․상업론․광산개발론에 상호불가분의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나타나 있으며, 또 소농․빈농․도시빈민 등 소농층에 대한 생활대책마련이라는 그의 입장이 산업발전론 각 분야에서 기본관점으로 관류되고 있다. 그의 비롯된 것이었으며, 또한 이것은 ‘천일록’ 도처에서 펼친 그의 경세론이 시대적 과제에 대한 時務策으로서 뚜렷한 문제 의식에 입각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우하영의 산업진흥론은 地方的特性이 짙게 나타나 있으며, 그 지방적 특성이 바로 입론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그의 농업을 비롯하여 사업․어업에 관한 개혁론은 당시 수원부를 중심으로 그가 살던 고장의 지역적 특성은 그의 산업진흥론이 현실적 체험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실천성을 갖는 장점이 있는 반면, 지역적 시각에 제약되는 한계성도 동시에 지적될수 있는 것이다.
제5장 政治․社會制度 改革論
우하영이 ‘천일록’에서 披瀝한 정치․사회제도 에 대한 비판과 개혁론은 몇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科擧制에서 우하영이 주장한 科薦制란 과거제와 薦擧制를 절차상으로 연결시킨 科薦合一論이었으며, 그 내용은 현행제도 의 맨 첫 단계에서 천거제의 절차를 추가하고, 會試에서 面試를 통해 無資格者가 적발되면 薦主와 擧子를 함께 처분하는 連坐制를 제시하는 것이 었다. 그의 과거제 개혁론은 당시에 그 자신이 직접 뼈저리게 체험하고 그 대처 방안으로 제시한 것이었으나, 제도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보다는 좀더 현실적은 개혁을 목표로 운영상의 폐단을 제거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둘째, 우하영의 軍制 및 軍政改革論은 기본적으로 壬․丙兩亂의 참혹한 전과와 패배한 대한 반성에서 출발, 유사시에 효율적인 대비하기위해 군사제도와 국방문제에 대한 개혁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특히 군제와 군정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탐구가 청․일 양국의 병제를 검토하고 그 대책을 강구하려한 것도 그에 군사국방론에서 특기 할만한 점이었다.
셋째, 신분제 개혁론에서 우하영은 먼저 ‘四民論’에 주목하였다. 그는 士․農․工․商의 사민은 신분상의 수직적인 貴賤의 문제가 아닌 각기 종사하는 業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職能相의 분화일 뿐이라는 근대적인 직업관을 개진하였다. 그러한 관점에서 관명된 그는 선비의 유의식하는 형태의 봉건적인 행위를 비판하였다. 그는 당시 농업경제사회에서 농업이 차지한는 중 을 강조하여 本末의 표현을 썻으나 이는 결코, 조선후기의 固着된 성리학적 본말관을 표명한 것이다.
넷째, 우하영의 田制 및 田政 改革論은 제도적으로 농업을 장려하고 현재의 토지 조건으로 개혁안을 마련함으로서 파탄직전에 놓인 농민경제의 回生과 국가재정의 안정을 기하려는 목표아래 한층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의 논의는 토지 제도 자체에 대한 現狀論的개혁의 측면보다는 좀 더 現實論的인 관점에서 실현가능한 개혁론을 실행함으로서 불합리한 토지 제도를 시정하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농민층분화시기 아래서 더욱 큰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다.
다섯째, 還第改革論에서 법이 당초 취지와는 달리 농민 수탈의 방편으로 활용․왜곡되는 현실에 비추어 환제의 각가지 폐단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본래 환곡은 貧農을 구제하기 위하여 나타났으나 조선후기에는 농민수탈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됨으로서 빈곤한 농민만이 피해를 보게 되었다.
제6장 地域社會開發 및 行政改革論
우하영의 저술은 국왕을 비롯하여 나라 안에 관심이 水原城(華城)建設에 집중되고, 付 자체가 역사적으로 前代未聞의 發展的 변화가 겪던 분위기가 바로 그 執筆동기가 되었다. 따라서 이 著作이 지역사정에 通達하고 이 고장 향촌에 거주하던 재야 실학자 손에 의하여 집필되었다는 점에서, 18세기말 수원의 사회적 실상과 문제점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역사 사료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더욱이 이 저술은 지역사회에 정통하고 付 발전을 도모하려는 향토애와 개혁적욕구와 경세치용적인 문화 유산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이 시대의 향촌사회사 연구를 위한 자료로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아직까지 이 시대 수원지방의 대한 종합적이고도 전문적인 연구서나 文獻資料가 미흡한 현실에 비해 ‘觀水漫錄’이야 말로 조선후기 수원의 三政문제를 비롯하여 農業․商工業․行政․軍士․地理․風俗 등 여러 가지 당면 문제와 改善策을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데 크게 주목되어야 마땅하리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 저술은 봉건적인 조선후기의 사회 현실과 그 모순에 대한 인식력, 그리고 제도와 운영의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현실개혁의 의지를 도처에 표출해 놓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저술은 지방사적인 측면에서 뿐만아니라 조선후기의 농업사․사회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제7장 결론
지금 까지 우리는 우하영의 사상에 대하여 폭넓게 살펴 보았다. 우하영의 저작 가운데 크게 돋보이는 부분은 첫째, 小農의 입장에서 농업정책․농업기술․농업경영 등 개혁적인 농업론을 모색하려한 점, 둘째, 과거제․군제 및 군정․ 신분제․전제 및 전정․환정 등 정치․사회제도상의 개혁론을 개진하려했고, 셋째 정조대 현안의 역사적 과제로 추진된 신도시건설과 성곽 축조 등으로 空前의 변화에 직면했던 자신의 향촌인 화성지방의 발전을 위한 지역개발론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화성을 중심으로 한 그의 향촌사회발전론은 정조 중엽에서 말엽에 걸쳐 추진된 국왕주도하의 對華城 경영 문제와 결부되어 18세기 말 화성 향촌민의 입장과 향촌사회의 변화와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데 크게 주목되는 부분이다. 18세기 말의 신도시 화성경영은 정조가 집권 중반 이후 말엽에 이르는 11년간의 걸쳐그의 정치적 이상이 담긴 역사적인 사업으로 주려했던 만큼, 국왕의 對華城정책에 대한 향촌지식인의 반응과 지방사적 측면에서 사회경제적 실효 여부를 가늠하는데도 하나의 지표를 제공해 주리라고 생각한다. 18세기 말 화성 신도시 건설은 개혁정치와 왕권강화, 문운의 융성을 아울러 추구하던 정조의 정치력과 문화의식을 그대로 표상하는 것이지만, 이 시대를 살았던 향촌지식인의 對華城觀이나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한 時務論은 당시 향초민의 입장이나 향촌사회 각 부분의 문제접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는데 매우 유용하리라고 생각된다.이상론의 연구를 통해 ‘천일록’을 저술한 ‘취석실 우하영’은 사상적으로 ‘要谷’․‘重峰’ 등 16세기 畿湖學派의 時務論的 경향과 ‘芝峰’․‘星湖’ 등 조선후기 근기학파의 실학적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실학자․농학사상가 였음을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농업을 비롯하여 사회 문제를 인식․성찰함에 있어서도 경험주의적 관점과 함께 살았던 지방적 환경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신도시 건설과 수원성 축조란 18세기말 국가적 공사로 인해 여러면으로 급속한 변모를 격고 있더 역사적 현실에 조응한 결과이고, 따라서 ‘천일록’ 속에는 수원 지방에 관한 인식과 서술이 많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경우 1964년 『천일록』이 민족고전으로 국역되고, 1983년에 완간된 『조선신사』 중세편에서는 『천일록』의 농업기술론을 비롯한 농업문제의 선진성을 높이 평가하는 등 조선후기 사회에서의 우하영의 사상과 저작의 사료적 가치에 크게 주목하였다.농업정책․농업기술․농업경영을 포괄하는 『천일록』의 농업론은 경기지역, 그중에서도 수원을 중심으로 한 그 지역적 사정을 짙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이것이 자신의 향촌사회가 지니고 있는 지리적 특성과 함께 변화를 거듭하고 있던 18세기 말 신도시 화성의 도시적 번영과 발전을 위해서는 상업진흥과 장시육성이 핈요건임을 인식한 결과라고 할수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1960년대 초 북한사회에서 일기 시작한 농촌경제의 자력갱생 내지 노동생산력 제고를 위한 千里馬작업반운동 등과 직․간접적인 관련을 갖고 이루어진 점도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그러나 천일록의 근대적 사상이나 학문적 특성도 사회 변동기로 특정짓는 18세기말 19세기 초라는 역사적 조건의 반응형태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나친 현실론적 지방적 관점으로 인해 봉건적인 구체제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척결하여 새로운 그대 사회를 여는 이론적 근거로는 다소 미흡하고, 또 아직도 전통적 양반사회의 관념에서 탈피하지 못한 일정한 한계를 지닌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한 사상적 한계와 적지 않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천일록은 이 시대 향촌 사회에서 불우한 삶을 이뤄가는 가운데 모순에 가득찬 부대적 현실에 대한 한 양심적인 농촌 지식인의 역사적 省察이자 민중적 차원의 개혁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1) 崔洪奎 著. 禹夏永의 實學思想 硏究 ; 1995.11 一志社
2) 韓國史硏究會 著. 韓國史學史의 硏究 ;1985.8 乙西文化社
3) 김헌선 著. 韓國傳統文化 理解의 길잡이 ; 1998.2 知識産業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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