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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할아버지 다음으로 역학(易學)에 명망이 높았던 치암 박충좌 선생

작성자단양우씨™|작성시간13.02.02|조회수382 목록 댓글 0

치암 박충좌(恥庵 朴忠佐) 선생

 

高麗 忠烈王(1287) ~ 高麗 忠穆王(1349)

 

정주학(程朱學) 수입계승과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실천한

 

대학자이며 불의(不義)에 굽히지 않는 올곧은 선비이며 경상(卿相)

 

이 되어도 평민(平民)처럼 온후검소(溫厚儉素)한 생활을 하였다.

 

 

1. 들머리

 

우리 역사가 문자로 기록되어 전해지기는 삼국시대부터라고 하나 고려시대부터

 

쓰여진 것이 전해지고 있다 하겠으며 실상은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은 조선시대

 

부터라고 할 수 있겠다.

 

즉 고려사 자체도 고려시대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쓰여졌기 때문이며 역시

 

자세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이성계(李成桂)가 고려를 탈취한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쓰여졌기 때문에 누락된 것, 첨가된 것, 왜곡된 점도 많으리라고 믿어진다.

 

 

 

 

즉 고려사를 보면 우왕과 창왕을 왕으로 취급하지 않고 신우(辛禑), 신창(辛昌)으로

 

표현 했다든지 이성계(李成桂)를 우리 태조로 표현하였으며 고려사를 써서 몇 번씩 수정

 

하였다든지 세종대왕은 고려사가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리만큼 신임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고 하겠다.

 

 

 

 

따라서 우리 고장에도 고려시대에 많은 인물이 있었지만 고장의 인물에 대한 기록도

 

극히 적으며 그것도 자세히 알 수 없어 답답할 따름이다.

 

즉, 박충좌(朴忠佐), 선국충(宣國忠), 정복주(鄭復周), 조승숙(趙承肅) 등 고려말기의 인물

 

십여명이 거론되어 있을 뿐 그 이전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는 이름조차 알기

 

어렵다.

 

 

 

 

그 중의 한분이 박충좌인데 유일하게 함양의 인물로 고려사 열전에 나오고 있으며

 

그나마도 기록되어있는 자료가 빈약하여 다른 인물들처럼 자세하고 풍부하게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함양의 토성인 박(朴) 여(呂) 오(吳)씨 중에서도 유일하게 그 행적을 대략이나마

 

알 수 있어 다행스럽다.

 

그 외에는 시조조차도 그 행적을 고찰하기가 심히 어렵고 기록보다도 전설적인 이야기에

 

의존하고 있는 점이 많다고 하겠다.

 

우리나라 유학이 신라시대에 최치원 등을 통해 수입되었다고 하겠으나 고려가

 

불교국가로써 유학이 발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고려 말기에 와서 정주학(程朱學)이 수입되면서 유학이 점차 정치와 일반의 실

 

생활에 응용되어 그 폭이 넓어져간 시기라 하겠다.

 

이 즈음의 유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치암(恥庵) 박충좌(朴忠佐)라 할 것이다.

 

 

 

 

치암 박충좌는 백이정(白頤正)의 제자로서 익재 이제현과 동시대에 백이정의

 

같은 문하생이면서 같은 유학자로 활동하여 나라의 양 기둥 역할을 하였다.

 

치암은 학문적으로는 안향(安珦)에 의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던 정주학(程朱學)을 계승하고

 

관로에서는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정신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로 인해 부패하고 타락한 고려말의 정치판에서 불의에 굽히지 않고 선비정신을

 

발휘하고 의로운 삶을 살려하다가 일찍부터 귀양살이를 하는 등 실천적인 지행합일의

 

사표로 돋보이는 인물이다.

 

 

 

 

특히 이 시기는 유학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 정주학(程朱學)이 도입되고 고려에 불교의

 

타락과 더불어 유학이 일어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특히 중국 연경(燕京)에 들어가 십년 동안을 체류하면서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고

 

고려로 돌아온 스승 백이정(白頤正)이 남해에 유배되었을 때 같은 문하생인

 

이제현(李齊賢)과 같이 적소(適所)에서 스승과 함께 지내면서 스승과 제자간의 도리를 다한 것은

 

사제간의 도의가 땅에 떨어진 오늘날의 이 사회에 더욱 귀감이 되고 있다.

 

 

 

 

따라서 선생에 대한 자료는 비록 부족하다 할지라도 그의 정신과 생활은 누구보다도

 

올곧은 것을 우리는 알고 배워야 하리라 사료되며 후세인들의 삶의 길잡이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2. 생애와 관로

 

 

○ 치암의 가계

 

박충좌(朴忠佐)는 고려말의 유학자로서 성리학 도입 초기에 중요한 기초작업을 담당하고

 

자신의 지식을 행동에 실천하여 지행합일의 모범을 보였으며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실생활에

 

구체화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에 한 시대의 변혁기를 맞아 중요한 인물이라 하겠다.

 

 

 

 

자(字)는 자화(子華)요 호(號)는 치암(恥庵)이며 시호(諡號)는 문제공(文齊公)이라 하고 본관은 함양으로 되어있다.

 

함양박씨(咸陽朴氏)의 시조(始祖) 언신(彦信)은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29세손 경명왕의 제3자라고 한다.

 

그러나 그 세계(世系)는 확실하지 않아 도중에 어떻게 흘러내려왔는지 문헌상으로는 알아보기 어렵다.

 

그가 속함대군(速含大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였다고 전하나 문헌이

 

실전되어 고증할 길이 없어 누대(累代)가 실휘(失諱)됨으로써 소목계통(昭穆系統)을 밝히지 못하였다.

 

 

 

 

신라시대에는 왕족들을 제외하면 가문마다 거의가 그 조상의 계보를 잘 아는 종중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함양박씨는 고려때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선(善)을 중시조(中始祖)로 삼고 그를

 

기세조(紀世祖)로 하여 일세(一世)로 삼아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본관(本貫)은 속함(速含)이 뒤에 함양(咸陽)으로 개칭됨에 따라서 함양으로 하였다.

 

중시조(中始祖)의 묘소는 지금 함양군 함양읍 사금동(賜琴洞) 지금의 남산 갑좌(甲坐)에 있다.

 

중시조의 6세손인 지량(之亮)은 6형제중 셋째 아들로 태어나 원종(元宗) 충렬왕때

 

무용(武勇)이 뛰어난 무장이었다.

 

1274년(충렬왕 원년)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때 연합군의 고려군 도독사(高麗軍都督使)

 

김방경(金方慶)의 휘하(麾下)에서 지중군병마사로 출전하여 대마도와 일기도(壹岐島)를 쳐서 무찔렀다.

 

그 공으로 원(元)나라로부터 무덕장군의 벼슬을 받고 금패인(金牌印)을 하사받았다.

 

그 후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좌익만호(左翼萬戶)를 거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

 

 

 

 

치암(恥庵)은 고려 예부상서 선(善)의 8세손으로 증조부는 추밀원사(樞密院事) 응천군(凝川君)이요,

 

응천군 신유(臣蕤)의 여섯 아들중 둘째요, 지량(之亮)의 둘째형인 문과에 급제한

 

위위윤(衛尉尹) 문원공(文元公) 지빈(之彬)의 장손이며 군부총랑(軍部摠郞) 장(莊)의 아들로서

 

선비(先妣)는 고성이씨 우상시존비(右常侍尊庇)의 여식이다.

 

치암은 서기 1287년(충렬왕13연)에 경상남도 안의(安義)에서 출생(出生)하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항상 용모가 단정하며 예의(禮儀)바른 아이로 알려졌었다.

 

15세때인 1300년에 문과급제하였으니 구차하게 여러 말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의 재능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 치암의 성품

 

전라도 안렴사(按廉使)로 부임하여 재임하고 있을 때에 왕의 총애(寵愛)를 받고 있던

 

폐인(嬖人) 박연(朴連)이 왕의 내지(內旨)를 가지고 와서 전했다.

 

그 내용인즉 박연(朴連)이 왕에게 간언(姦言)해서 양민을 노예(奴隸)라고 인정하여 무고한

 

양민을 끌고가서 노예로 삼고자 함이었다.

 

이렇게 고려 말기는 무법천지요 부패하고 타락하고 무질서하였다.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무고한 자기 백성을 노예(奴隸)로 삼게 하는 그 왕은 왕이라

 

할 수 없다.

 

얼마나 썩어빠진 패륜아이며 그 신하라는 자가 나라를 좀먹는 쓰레기더미의 구더기와 같은

 

존재인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정의(正義)에 살고 정도(正道)를 걷고자 하는 치암(恥庵)으로서는 아무리 왕명(王命)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당연히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충좌가 고집하고 허락하지 아니하자 타락하고 간사스런 박연(朴連)이 그냥 있을 리가 없다.

 

 

 

 

왕에게 참소(讒訴)하기를 안렴(按廉)이 왕의 교지(敎旨)를 공경(恭敬)하지 아니하고

 

폐지(弊紙)와 같이 버렸다고 왕에게 고해바쳤다.

 

그러자 왕이 노(怒)하여 박충좌를 불러들여 매를 쳐서 해도(海島)로 유배시켰다고 하였다.

 

얼마 후에 적소에 있는 충좌에게 다시 소환(召還)하여 감찰지평(監察持平)을 제수하였으나

 

상서하여 이르되 병을 핑계로 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그러자 예문응교(藝文應敎)로 고쳐 다시 발령을 내려 경상도의 염세(鹽稅)를 감독하게 하였으나

 

충좌는 또 취임하지 아니하였다.

 

이어서 다시 내서사인(內書舍人)으로 발령을 내렸기 때문에 끝끝내 왕명을 거부할 수 없었기에

 

거기에 옮겼으며 누전(累轉)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 개성윤(開城尹)이 되었다.

 

 

이렇게 그는 아무리 어려운 시대라 하더라도 바로 살기를 원했고 의(義)와 예(禮)를 벗어나는

 

생활은 결코 할 수 없다는 의지는 확고하였다.

 

부패한 관리들의 비행(非行)을 막으려다가 오히려 참소(讒訴)를 당해 욕을 보기도 하였으나

 

아무리 타락(墮落)한 시대일 지라도 자신의 신념을 굳게 지켜 나갔던 인물이다.

 

 

 

 

○ 군사부일체의 실천

 

스승인 백이정이 해남 적소(適所)에 있을 때에도 사실의 기록이 제대로 전하진 않지만

 

그 당시 유배되어 있던 스승을 위한 취암의 정성이 얼마나 간절(懇切)했던 것인가는

 

남해의 유림들에게 구전되어오고 또는 후손들에게 전해오는 여러 이야기로 짐작해 볼 때 과히

 

그 적극적이고 곧은 성품을 알 수 있다.

 

 

 

 

치암(恥庵)은 스승이 귀양살이에서 병약해지자 산천을 누비며 약초를 구해다가 탕약으로 지어 올렸고

 

아침저녁으로 문안은 물론 조악(粗惡)한 소찬이나마 스승이 식음을 거를때는 자신도 끼니를

 

때우지 않는 등 군사부일체의 도를 다했다.

 

그의 행동거지를 일일이 표현하지는 않았을 지라도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참으로

 

스승을 하늘처럼 받들어 섬겼다고 할 수 있겠다.

 

치암 박충좌의 이 같은 행적은 수백년이 지났지만 누대(累代)에 걸쳐 남해에 전해져

 

내려와서 조선조 중기에는 남해 난곡서원(蘭谷書院)이 유림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해

 

건립되었고 백이정(白頤正)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이 서원에 봉안(奉安)되어 해마다

 

춘추로 향사(享祠)되고 있다.

 

 

 

 

고려사 제109권 열전 제19 백문절(白文節) 항에 보면 백이정(白頤正)과 박충좌(朴忠佐)와의 관계가 쓰여 있다.

 

즉 백이정은 천성이 순박하고 근후(謹厚)하여 재상으로서의 기질(器質)이 있었다.

 

충선왕(忠宣王)을 섬겨서 올바르게 보좌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어리석은 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

 

충신(忠臣)들은 왕을 바르게 섬기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왕들은 충신을 멀리하고

 

간신배(奸臣輩)들을 가까히 하여 달콤한 말에 기를 기울였으니 얼마나 안타까웠겠는가.

 

나라가 쇠퇴(衰退)해 갈 때에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는 여러 관직을 거쳐 첨의 평리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로 되었고 그 후 상당군(上黨君)으로 책봉되었다.

 

 

 

 

고려사에 보면 당시 정주(程朱)의 학문이 중국에서 처음으로 보급하기 시작하여 고려에까지 미치지 못하였었는데

 

백이정이 원나라에 가 있으면서 이것을 배워왔다.

 

즉, 우리나라에 정주학을 백이정이 수입하여 제자들에게 보급하였다.

 

이제현(李齊賢), 박충좌(朴忠佐)가 맨 처음으로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운 제자들이었다고 쓰여 있다.

 

 

 

 

○ 관로에 서서

 

고려사 제37 세가 제37의 1344년에 보면 함양군 박충좌(朴忠佐), 양천군(楊川君)

 

허백(許伯)을 판전민도감사(判田民都監事)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4월에 다시 김륜 권겸 박충좌를 찬성사로 임명하였다.

 

6월에는 서연(書筵)을 설치하고 좌우정승(左右政丞)과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제현(李齊賢)

 

찬성사(贊成事) 박충좌(朴忠佐) 등으로 하여금 날마다 교대하면서 왕의 글공부를 시독(侍讀)하게 하였다.

 

1345년 정월 다시 정방(政房)을 설치하고 찬성사 박충좌(朴忠佐)와 김영후 참리 신예(辛裔) 지신사

 

이공수(李公遂) 등을 제조관(提調官)으로 임명하였다.

 

그해 4월에는 김영후를 좌정승(左政丞)으로, 박충좌(朴忠佐)를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전사의, 손수경, 안축 등을 찬성사로 임명하였다.

 

즉, 박충좌는 충숙왕 때 무고(誣告)를 당하여 억울한 귀양살이를 한 후 왕이 불러도 일체 관직에

 

나아가지 않다가 여러번 거절할 수 없어 나아갔으며 충혜왕 때에야 지공거(知貢擧) 즉 과거

 

시험관을 지내고 충목왕 때에 찬성사(贊成事)가 되고 돌아가기 4년전에 마지막

 

벼슬인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치암(恥庵) 선생의 유학사적 의미는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성리학의 수용 대목에 잘 설명되어 있다.

 

 

 

 

충선왕은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중국의 전복(關復), 원명선(元明善), 조맹부

 

(趙孟頫)와 고려의 이제현(李齊賢) 등 양국의 문인들을 교류시켰다.

 

그 후 고려 문인들은 원에 자주 왕래하여 원대(元代)의 중국문화와 밀접(密接)한

 

교류(交流)를 가졌다.

 

이 성리학은 먼저 충열왕 때 안향(安珦)이 소개하기 시작하였고 그 뒤 백이정(白頤正),

 

박충좌(朴忠佐) 등이 원에서 직접 수입하였다.

 

그 당시의 고려국 학자들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새로운

 

학문과 기술을 배워오는 것 이상으로 중국을 왕래하며 새로운 학문을 수입하고 새로운 사상이나

 

문물(文物)을 수입할 뿐만아니라 그들과 교류한 것으로써 중국과 밀착되어 있었던 것이다.

 

 

 

 

충목왕 때에 선비로서는 최고의 선망(羨望)이 되는 시경연(侍經筵)에 들어가고 한종유

 

(韓宗愈), 이제현(李齊賢) 등 당대의 거유들과 돌아가며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론하였다.

 

정관정요(貞觀政要)란 당태종이 현신(賢臣)과 더불어 정치강론(政治講論)을 한 요지(要旨)를 모은 책으로

 

말하자면 왕을 가르치는 스승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이제현과는 동문수학하였을 뿐 아니라 스승의 유배지에도 같이 가서 같이 모셨고

 

관직에서도 항상 선후로 가깝게 지냈으며 상소도 같이 올리는 등 뜻을

 

같이 했음으로 서로를 잘 알고 있었음을 이제현이 치암을 찬양한 시(詩)에서 알 수 있다.

 

 

 

 

治家崇儉約 집을 다스리는데는 검소와 절약을 숭상하고

 

爲學尙程朱 학문을 하는데는 정자와 주자를 존중하누나

 

千古鯷岑上 천고에 제잠(鯷岑→ 韓國의 別名) 우에

 

風聲激懦夫 풍도와 명성은 게으런 사람을 격동시키도다.

 

 

물론 치암이 관직이 탐이 나거나 권력을 원하고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바라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의 인격이 누구나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이기에 아무리 어리석은 왕이나 간신들이라 할지라도 그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의 인격과 학문과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중요한 위치에 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치암은 돌아가기 일년전인 충목왕 4년(1348년) 간신 강윤충(康允忠) 사건으로

 

마지막 선비정신을 발휘하게 된다.

 

강윤충은 어떤 사람이며 치암의 상소내용(上疏內容)은 어떤 것인지 고려사에 나오는 것을 여기에 이기해 본다.

 

「고려사 권 제124 열전 37 폐행2 강윤충란」강윤충(康允忠)은 근본이 천예(賤隸)였다.

 

충숙왕을 섬기어 호군(護軍) 벼슬을 하였다.

 

이 때 량장(良將) 백유(白儒)의 처(妻)를 강간(强姦)하였으므로 감찰사(監察事)가 국문하여

 

자백을 받고 처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감찰 첨의 전법이 각각 서면으로 격렬(激烈)히 논죄(論罪)했으나 왕은 그 글을 깔아두고

 

결재하지 않았으므로 감찰사가 여러 날 집무하지 않았다.

 

그제야 장형(杖刑)을 가하여 섬으로 귀양 보냈다.

 

참으로 답답한 것은 왕이라는 자가 나라와 백성들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안일(安逸)과

 

간신들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적(曺頔)의 난 때에 충혜왕을 시종(侍從)하면서 수고했다 하여 1등공으로 등록했으며

 

밀직부사(密直副事) 벼슬을 주었다.

 

그 때 왕이 네가지 부류의 노비(四件奴婢)를 대단히 급박하게 요구하고 그 일을 강윤충과 민환(閔渙)에게 주관시켰다.

 

강윤충이 첨의 평리로 임명되었으며 양광 전라 경상 3도문민질고사(三道問民疾苦使)가

 

되어 나갔는데 민환이 각도에 불량배를 파송하여 토색하기를 마지않았는데 이렇게 나라가 문란하고 법질서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강윤충이 이들 불량배를 잡아다가 순군에 가두었다.

 

충목왕(忠穆王) 때에 찬성사(贊成事)로 되었다.

 

이에 앞서서 조득구(趙得球)가 왕후(王煦)를 따라서 원나라로 가서 왕후와 조득구가 정치

 

사업(整治事業)에 대하여 의논하였을 때 조득구가 말하기를 「윤충이 어린 임금 곁에

 

있으면서 임금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고 있으니 정치사업을 하려면 우선 그를 제거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강윤충이 그 말을 듣고 그들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 후에 왕후와 김영돈(金永旽)이 기삼만(奇三萬)의 옥사로 인하여 정치를 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원나라로 돌아가서 황제에게 보고하려고 하였다.

 

이 때 강윤충은 조득구가 자기에 대하여 획책하는 바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왕을 꾀어서

 

조득구를 탐라(耽羅)로 강직(降職)시켜 보냈다.

 

당시 덕령공주(德寧公主)가 젊은 몸으로 궁중에 있었는데 강윤충과 배전(裵佺)이 궁중에 출입하면서

 

공주의 총애(寵愛)를 받으며 정권을 장악하고 세도(勢道)를 부렸다.

 

강윤충과 공주 사이에 음란한 소문이 돌았다.

 

어떤 사람이 익명(匿名)으로 된 공개장을 감행령(監行領)에 그러한 사실을 써서 붙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찬성사(贊成事) 강윤충(康允忠)은 내시(內侍) 한 명과 시녀(侍女) 한 명을

 

중매삼아 임금의 어머니와 통하여 음란한 행동을 마음대로 하고 있다.

 

이리하여 내전의 총애를 얻어 가지고 하유원(河有源)과 함께 정치도감(整治都監) 사업을

 

저해하고 있으니 만약 이 두명을 죽이면 나라의 우환(憂患)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썼다.

 

 

밀직인 인당(印璫)과 찬성인 권겸(權謙), 이수산(李壽山)이 원사(院使) 고룡보(高龍普)에게 말하기를

 

「강윤충이 군모(君母)와 간통한 죄는 천하에 용서 못할 일인데 이제 강윤충이 원사가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임금에게 고룡보가 선왕(先王)을 모함하여 악양(岳陽)에서 죽게 하였는데 이제 죄를 지고 오는

 

룡보를 전하께서는 하필 후대(厚待)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고룡보가 듣고 앙심을 품고 있다가 강윤충에게 말하기를

 

「네가 궁내에서 일하는 신하로서 무례한 행동을 마음대로 하니 무슨 짓이냐! 지금부터는

 

궁내에 체통 없이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였다.

 

강윤충은 두려워서 수일 병이라 핑게하고 출근하지 않으면서 고룡보의 어미에게 뇌물을 주고

 

고룡보에게 좋게 말해 달라고 청했다.

 

 

 

 

하루는 고룡보가 강윤충을 앞에 두고 인당 등에게 말하기를

 

「이제 찬성사에 대하여 밝히겠으니 그대들은 전일에 한 말을 숨기지 말라!」라고 하니

 

인당 등은 서로 바라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고룡보는 겉으로 힐난하는 척 하면서 강윤충을 돌아다보고 말하기를

 

「당신은 다시 일을 보아도 좋소!」라고 하였다. 때마침 왕이 백관을 영솔하고 조서(詔書)를 영접하였는데

 

강윤충도 드디어 호종하였다.

 

그래서 김륜(金倫) 이제현(李齊賢) 박충좌(朴忠佐) 등이 왕에게 상소(上疏)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왕에게 올린 상소문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불인(不仁)한 자와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 위태로운 것을 보고 기뻐하여 그 재해에서 이익을 얻어내어 망하는 원인으로 되는 것을 즐겨하는 자는

 

불인한 자인데 이런 자와도 서로 말할 수 있다면 세상에 어찌 망국이나 패가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아가서 만약 임금과 백성을 기만하고 천하의 공론도 꺼리지 않으며 천하의 법도도 두렵게 여기지 않는 자가 있다면

 

이는 불인당 중에서 크게 불인한 자이니 이런 자와는 서로 말도 할 수 없거늘 어찌 그를 믿고 일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강윤충(康允忠)은 천예(賤隸)출신으로 선왕(先王)에게 총애를 받게 되자 간사(奸邪)한 말로 아첨하였고 또 음란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미 장형(杖刑)까지 받았으니 법을 두려워하고 물러나가서 피신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과오를 숨기고 다시 영화(榮華)를 탐(貪)내어 무모하게 나서고 있으며

 

또 모든 면에서 욕심을 부리어 그 흉악함은 당대에 유례가 없습니다.

 

선왕이 황제(皇帝)에게서 죄를 받고 물러가서 끝끝내 악양(岳陽)으로부터 반장(反葬)하여 오게 된 원인을 살피건대

 

강윤충이 실상은 악질놈의 원흉이며 민환 외의 9명은 한낱 졸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강윤충은 쌓이고 쌓인 허물을 모조리 임금께 둘러씌워놓고 교활한 꾀를 써서 제 홀로

 

빠져나왔으니 이에 대하여는 온 나라가 분개한 바이며 미워한 바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선왕에 대하여 충성하려는 뜻을 가슴에 품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제압하지 못하여 삼가

 

그 죄상을 열거하여 전하께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강윤충이란 자는 김남보의 처를 강간했고 또 백유의 처를 간통하여 누차 장형을 당하고 몸에는 매 맞은 흠집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분별하게도 정동 원외(征東員外)의 벼슬을 받고 더 나아가 첨의 찬성 벼슬을 겸해가지고 의기양양하여

 

사람을 모멸하고 법을 준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 현재 본처가 있는데도 아직 상복도 벗지 못한 고인(故人) 밀직 조석견(趙石堅)의 처에게 장가들어

 

조석견의 유산을 횡령 착취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지정(至正) 6년에 천자가 왕탈환(王脫歡)과 김나해(金那海)를 시켜 우리나라의

 

문란한 정치를 바로 잡아 다스리게 하였던 바 왕탈환은 이와 관련하여 말하기를 전대(前代)의 일을 말하면

 

실로 강윤충이 화근이었습니다.

 

우선 그를 몰아내야만 능히 정치(整治)할 수 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강윤충은 두려워서 뒤로 흉계를 꾸며 김나해를 속여 왕탈환을 억제하도록 함으로써 정치(整治)사업을 그르쳤습니다.

 

또 지정 7년에 천자가 다시 왕탈환 등에게 정치할 것을 명령하였을 때 전하께서는

 

왕탈환 등과 재상들 그리고 기로(耆老)들을 소집하여 천자의 명령을 집행할 방도를 의논

 

하였습니다. 그 때 기로들은 모두 전민(田民)에 관한 송사를 판결하는 것은 정치(整治)

 

사업의 한 부분에 불과하며 반드시 먼저 관리임용제도(官吏任用制度)를 정치(整治)하여 중앙(中央)과

 

외방(外方)의 관원을 모두 적임자로 임명하고 감찰(監察)을 시켜 비행(非行)과

 

위법(違法)을 적발하여 탄핵(彈劾)케 하여야 능히 천자의 뜻을 옳게 집행할 수 있다고

 

인정하였습니다.

 

이 때 강윤충은 바야흐로 정방제조(政房提調)로 되었는데 자기에게 불리할까봐 염려하였고

 

또 왕탈환(王脫歡)이 전자의 말에 대하여 앙심(怏心)을 품고 있었으므로 낮빛을 붉히며 벌떡 일어나

 

나갔으며 여러 사람의 이런 주장을 왕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 얼마 안가서 자기의 친한 안자유(安子由) 등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전혀 모르는 자들을

 

정치도감(整治都監)으로 임명하고 왕탈환은 승진시켜 영도첨의(領都僉議)로 임명하였습니다.

 

이것은 실제에 있어서 그 실권을 박탈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어찌 정치(整治)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왕탈환이 그 사업을 성과 있게 수행하지 못한 것은 사실에 있어서 강윤충의 방해 때문이었습니다.

 

또 종묘(宗廟)의 일은 나라의 대사인데 안자유(安子由)가 태묘(太廟)를 관할하면서 자의로 희생(犧牲)으로

 

쓸 소를 원당(願堂) 중에게 주어서 제사의 혈식(血食)이 구비되지 못하게

 

하였던바 이 죄에 대하여 감찰(監察)이 규탄(糾彈)하였으나 안자유의 사위 이읍(李浥)이

 

강윤충의 문객(門客)이었으므로 강윤충은 별 꾀를 다 써서 그를 구출해 내고는 도리어

 

승진시켜서 찬성사로 임명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간관(諫官) 송천봉(宋天鳳) 이방실(李房實) 안원룡(安元龍)이 고신에 서명치 않았으르로

 

안자유는 사퇴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때 윤충이 왕명(王命)이라고 거짓말하고 이방실 등에게 강압(强壓)을 가하여 휴가를 청원(請願)하게 하고

 

얼마 후에 그들의 관직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강윤충은 본시 역관(驛官)의 노예이니 무슨 인품의 고하와 청탁을 알겠습니까?

 

그런데도 정방제조(政房提調)로 되어 전선(銓選)의 권한을 제 손에 쥐고 벼슬을 주고 빼앗는 것을

 

제 마음대로 하면서 공공연히 뇌물을 받아들이어 문전이 저자거리처럼 되었습니다.

 

나라의 정권을 독점하여 만백성에게 해독을 끼쳤고 심지어는 선왕(先王)으로 하여금 살아나서는

 

견책을 받고 죽어서는 시호도 제때에 올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만약에 이놈의 죄악을 규정치 않는다면 원나라에 대한 선왕(先王)의 충성을 구명할 수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이 글을 원나라에 보내어 전대(前代)의 일이 선왕의 허물이 아니며 모두 강윤충의

 

소위임을 밝히며 이놈을 궁문 밖에서 극형에 처함으로써 선왕의 만대의 치욕을 씻게

 

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 부패한 정국

 

왕과 대비가 깨닫고 이 글을 원(元)나라에 보냈다. 그리고 그를 파직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버릇을 못고치고 다시 복직되어 못된 행위는 계속되었다.

 

강윤충은 공민왕 3년에 다시 찬성사로 되고 얼마 후에 판삼사사(判三司事)까지 승진되었었다.

 

5년에 호군 임중보(林仲甫)가 충혜왕의 서자 석기(釋器)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는 반역음모를 하다가

 

순군에 투옥되어 국문 당하였는데 강윤충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동래 현령(東來縣令)으로 좌천하였다가 8년에 죽었다.

 

고려사 권제110 열전 제23 김륜(金倫)란에는 이제현(李齊賢) 박충좌(朴忠佐) 등 늙은 신하

 

들과 함께 상소하여 강윤충의 죄악을 역설하기를 「성무황제가 북방에서 건국할 때에

 

충헌왕이 누구보다도 먼저 자진하여 복종하였고 세조황제가 강남에서 회군할 때 충경왕이 험난을 무릅쓰고 친히 입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자손에게 미쳐서는 대대로 인척(姻戚)관계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강윤충은 보잘 것 없는 소인으로서 나라의 권세를 독점하고 백성에게 해독을 끼친 나머지

 

선왕을 견책 받게 한 결과 시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이 역적의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선왕의 충성을 밝힐 수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억울한 사정을 자세히 살피어 저승에 있는 선왕의 원한을 풀어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왕과 대비가 깨닫고 그 상소를 원나라에 전달함과 동시에 다시 정삭을 개정한 데 대한 축하의

 

표문과 시호를 청하는 표문 두 통을 김륜에게 주어 원나라에 보내기로 하였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려가 망할 때는 부패할 대로 부패하여 졌고 타락할 대로

 

타락하여 왕은 어리석은 천치와 같고 법은 허물어지고 관리들은 사욕에만 급급한 것을

 

볼 수 있다.

 

비단 고려뿐만 아니라 나라가 망할 때에는 신라가 그러하였고 조선조도 그러하였다.

 

그러고서 어찌 나라가 지탱할 수 있었겠는가.

 

밖으로는 계속되는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고 안으로는 내란이 일어나는가 하면 모반을

 

일삼고 부패하고 타락하여 그야말로 한가지도 제대로 바로 선 것이 없으니 어찌 나라의

 

기둥이 지탱할 수 있었으랴.

 

그러한 가운데서도 치암과 같은 인물이 있었기에 그나마 역사가 이어져온 것이 아니겠는가.

 

 

 

 

○ 생활과 인품

 

치암은 글재주가 탁월할 뿐더러 일찍부터 글읽기를 즐겨했고 천성이 온후(溫厚)하고 검소하여

 

경상(卿相)이 되어서도 거실과 의복 등이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면서 역학(易學)을 꾸준히 연구하고 조예(造詣)가 깊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그의 학문 연구와 서정적(敍情的)인 정서 표현의 글이 많이 있었으리라 짐작되지만

 

지금까지 전하지 못하였음이 아쉬울 뿐이다.

 

그의 천성이 온후하다는 것은 그의 마음에 조금도 악의를 품을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경상(卿相)이 되어서도 거실과 의복이 평소와 같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검소한 생활을 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또한 성품)이 강직함을 말해주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높은 지위나 권력을 잡으면 그에 걸맞는 사치스런 생활을 하게 마련이다.

 

아첨하는 자들이 그냥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고장 사람들은 욕심이 없다.

 

조선시대에도 보면 많은 선비들이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지만 거의가 다 검소한 생활을 하고 만년에 끼니도 잇기 어려운 선비가 많았다.

 

그리고 청백리안에 오른 사람들도 많이 있고 심지어 운명할 때 장사(葬事) 치를 비용도

 

없을 정도의 청빈한 선비들도 있었음을 상기(想起)할 수 있다.

 

먼저 된 치암(恥庵)과 같은 선인(先人)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가 사회나 공직에서 그러한 것처럼 가정생활도 바르고 엄격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온화하면서도 절도있는 그의 가정분위기(家庭雰圍氣) 조성은 자녀를 반듯하게 길렀다.

 

그의 다섯 아들중

 

장남은 일찍 사별한 것으로 사료되나 네 아들이 한결같이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둘째는 찬성(贊成)으로 함양군에 봉해졌고,

 

셋째는 판서를 지냈으며,

 

넷째는 지평(持平)의 벼슬을 하였고 그리고 다섯째는 지신사(知申事)로 함양군에 봉해져서 가문이 크게 일어났다.

 

그는 슬하(膝下)에 오남이녀(五男二女)를 두었는데 장남은 소(玿)이다.

 

그리고 차남(次男)은 정(珽)인데 문과급제하여 찬성(贊成)으로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짐으로써 그 후손은 왕성하여

 

이천 수원 평산 봉산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셋째는 경(瓊)인데 문과급제하여 판서(判書)로서 그 후손이 번창(繁昌)하여 옥천(沃川) 청주(淸州) 진천(鎭川)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넷째는 번(璠)인데 문과급제하여 지평(持平)을 지냈고 그 후손은 순천(順天) 구리(九里) 등지에 살고 있다.

 

다섯째는 처음 이름은 여(璵)였으나 개명하여 전(琠)으로 하였는데 문과급제하여 지신사(知申事)에 올라 함양군에 봉작되었다.

 

역시 후손은 번창(繁昌)하여 예천(醴泉) 상주(尙州) 칠곡(漆谷) 영해(寧海) 진주(晋州) 하동(河東) 함양(咸陽) 등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장녀는 적중랑(適中郞) 최자경(崔自敬)에게 출가(出嫁)하였고 차녀는 적찬성(適贊成) 홍유룡(洪有龍)에게 출가(出嫁)하였다.

 

 

 

 

고려사에 보면 치암은 서기 1349년(충정왕 원년) 윤칠월 정축일에 졸하였다.

 

이에 이재(彛齋) 백이정(白頤正)선생의 문하에서 정주학(程朱學)을, 동문수학(同門修學)하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선생이

 

같은 스승을 섬기며 공부하고 나라에 몸 바쳐 함께 일하다가 사별했기 때문에 한쪽 날개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섭섭함을 금치 못하여 다음과 같이 만시(輓詩)를 지어 보냈다.

 

 

 

 

眼昏猶翫伏羲書 눈이 어두워도 오직 주역을 읽었고

 

身貴能安葛亮廬 몸이 귀해져도 제갈량의 초려에 거처하도다

 

怊悵桑君池上水 아 가득차는 못의 물을

 

一杯曾不乞相如 한잔도 린상여(藺相如)께 구걸치 않았노라

 

 

同承顧問侍經筵 함께 고문의 명을 받아 경연에 모시어

 

雨散雲飜白髮年 만고 풍상 겪어가며 백발토록 지냈네

 

得見先生眞大幸 선생 만나 배웠음이 참으로 다행이었는데

 

送君何事獨留連 그대 보내고 어찌 나 홀로 남아있을고

 

 

그리고 치암공의 명승시(名勝詩.萬景樓) 한편이 전해지고 있다.

 

白蓮名社勝 백연사는 경치가 좋아 일경이요

 

萬德一山淸 만덕산은 물이 맑기로 첫째이로다

 

門靜鎖松影 문은 고요히 소나무 그늘에 닫혀있는데

 

客來聞磬聲 나그네는 찾아와서 풍경소리만 듣노라

 

帆從海上去 범선은 바다 위를 따라서 떠가고

 

鳥向花間鳴 새는 꽃 속에서 지저귀고 있노라.

 

坐久忘歸路 오랫동안 앉아보니 집생각 잊었는가

 

殊無塵世情 속세에는 다시 나가고 싶지 않구나.

 

 

 

 

1570년 퇴계 이황 선생이 후세에 귀감이 될 수있는 인물로 우탁(禹倬)과 치암공(恥庵公)을 추천(推薦)하여

 

예안(禮安) 역동서원(易東書院)에 봉향하였다.

 

아마도 치암을 추천한 것은 치암의 그 곧고 바른 선비정신과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그의 생활자세를 높이 평가했으리라 사료된다.

 

그 고장 사람도 아니요 그곳과 깊은 연관이 있어서도 아니다.

 

다만 이분을 모시고 후학(後學)들을 가르치는데 감동과 큰 교훈을 주고자 추천하였으리라 사료된다.

 

지금은 치암(恥庵)의 행적이 거의 사라져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퇴계 선생 당시는 참으로

 

존경(尊敬)스런 인물이었으리라 여겨진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이 서원도 훼철(毁撤)되었던 것이다.

 

그 후 복원(復元)하여 당시 일부의 사론(士論) 및 성손(姓孫)들이 열향(列享)보다 독향(獨享)을 건립하여야 한다는

 

의론(議論)이 채택(採擇)되어 경상북도 예천군(禮泉郡) 용문면(龍門面) 상금곡리(上金谷里) 오미봉(五美峰) 아래에

 

금곡서원(金谷書院)을 신축하여 봉향하고 있으며 경상남도 남해군(南海郡) 이동면(二東面) 난음리(蘭陰里)

 

난곡사(蘭谷祠)에 백이재(白彛齋)

 

선생을 주벽(主壁)으로 이익재(李益齋)와 치암공(恥庵公)을 배향하고 있다.

 

고려사 권 제109 열전 제22 제7면 박충좌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박충좌(朴忠佐)

 

 

 

 

박충좌의 자(字)는 자화(子華)이니 함양사람이다.

 

할아버지는 박지빈(朴之彬)이니 위위윤(衛尉尹) 벼슬을 지냈고 네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맏 아들 박장(朴莊)은 벼슬이 군부총랑(軍簿摠郞)에 이르렀는데 그의 아들이 박충좌이다.

 

박충좌는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하였으며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숙왕조(忠肅王朝)에 전라도 안렴사(全羅道安廉使)로 있을 때에 왕(王)의 측근자(側近者)

 

박련(朴連)이 왕의 편지를 전해왔는데 그것은 양민(良民)을 노예(奴隸)로 하는 것을

 

용인(容認)하여 주라는 것이었다.

 

박충좌가 허락(許諾)하지 않으니 박련이 참소(讒訴)하여 말하기를

 

「안렴사(安廉使)가 무례(無禮)하게도 왕의 편지를 헌 종이와 같이 버렸다.」라고 하였으므로 왕이 노하여

 

매를 쳐서 섬으로 귀양 보냈다.

 

소환(召還)하여 감찰지평(監察持平)을 시켰는데 병을 빙자하고 나오지 않으므로 다시 예문응교(藝文應敎) 벼슬을 주었다.

 

후에 경상도 염세별감(慶尙道鹽稅別監)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또 가지 않았다.

 

얼마 안가서 내서사인(內書舍人)이 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밀직제학(密直提學) 개성윤(開城尹)으로 전직하였다.

 

충목왕 때에 찬성사(贊成事)로 임명되었다.

 

서연(書筵)에 들어가 당나라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론(講論)하면서 연(燕)나라 소왕(昭王)이 황금대(黃金臺)를 짓고

 

곽외(郭隗)를 맞은 이야기를 하였다.

 

왕이 그에게 지폐(紙幣) 50정(錠)을 주었다.

 

얼마 안가서 판삼사사(判三司事)로 되어 순성보덕협찬공신(純誠輔德協贊功臣)의 칭호를 받고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의 봉호를 받았다.

 

충정왕 원년에 죽으니 나이 63세였다.

 

박충좌는 성질(性質)이 온후(溫厚)하고 검약(儉約)을 숭상(崇尙)하였다.

 

그는 대신(大臣)이 되어서도 거처와 의복을 평민으로 있을 때와 같이 하였고 주역(易學)

 

읽기를 좋아하여 늙어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의 아들은 박소(朴玿), 박정(朴珽), 박경(朴瓊), 박번(朴璠), 박여(朴璵)이다.

 

 

 

 

朴忠佐

 

朴忠佐字子華咸陽人祖之彬衛尉尹生四子皆登第長曰莊仕至軍簿摠郞生忠佐自幼嗜學登第忠肅朝按全羅嬖人

 

朴連傳內旨認良民爲隸忠佐執不許連譖曰按廉不敬王旨奔如獘紙王怒杖流海島召還除監察持平移病不出改藝

 

文應敎命監慶尙鹽稅又不就尋遷內書舍人累轉密直提學開城尹忠穆時拜贊成事入侍書筵講貞觀政要因言燕昭王

 

築黃金臺迎郭隗事賜鈔五十錠尋判三司事賜純誠輔德協贊功臣號封咸陽府院君忠定元年卒六十三性溫厚儉約

 

雖爲鄕相居室衣服如布衣時好讀易老不輟子玿珽瓊璠璵

 

 

 

 

 

 

 

3. 치암의 사적

 

○ 서원과 사우

 

치암(恥庵)의 사적(事跡)은 그의 고향인 함양에는 거의 없다. 묘소는 안음 서쪽 50리 되는 서상면 노천(蘆川)에 있다.

 

1979년에 제단비를 세웠고 1994년 신도비를 세웠다. (제단비음기와 신도비명은 마지막에 기록해 둔다.)

 

함양에는 치암의 위패를 모신 재실이나 서원이 없다.

 

함양박씨(咸陽朴氏)의 시조의 사적(事跡)은 있지만 치암의 서원은 경북쪽에 있다.

 

즉 치암의 위패(位牌)가 모셔진 경북 예천군(禮泉郡) 용문면(龍門面) 상금곡동(上金谷洞)에 금곡서원(金谷書院)이 있다.

 

고향이라고는 하지만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서울(開京)에 가서 학문을 닦고 관료생활

 

(官僚生活)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고향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만년에도 고향으로 내려와 살지 않은 것으로 사료된다.

 

따라서 그의 생활 근거지가 아니며 사망하여 묻힌 곳은 고향이지만 고향이라고 해서 사적이 많이 있을 리가 없다.

 

 

 

 

치암 외에도 조선 시대의 인물 중에는 그런 분이 여럿이 있다.

 

상금곡동의 오미봉(五美峰) 기슭에 2천여평(二千餘坪)의 대지(垈地)에 총 30간의 건물로

 

자리잡은 이 서원은 대원군때 훼철(毁撤)된 안동(安東)의 역동서원(易東書院)이 1966년

 

후손들에 의해 복원될 때 독립할 것을 계획하여 지난 80년부터 후손들과 지방(地方),

 

사림(士林)에 의해 신축키로 결정된 후 1982년 착공하여 2년만인 84년 봄에 준공(竣工)을

 

보게 되었고 4월 13일 위패를 봉안하고 게판(揭板)하였다.

 

 

 

 

치암의 위패는 지금까지 역동서원(易東書院)에 모셔져 있었는데 선조 3년(1570)에 고향

 

으로 돌아온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발의로 선생이 강학하던 예안부포(禮安浮浦)에 역동

 

서원이 창건되었으나 고종 8년(1871)에 훼철되고 말았다.

 

이 서원은 퇴계 선생이 후세교육에 몰두하면서 문하생들에게 교훈을 주고 귀감(龜鑑)이

 

될 수 있는 가장 큰 인물을 떠올리던 중 역동(易東) 우탁(禹卓)과 치암(恥庵) 박충좌(朴忠佐)를 모시기로 하고 지었던 서원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가 관직의 높은 자리에 있을 때에도 그의 의복과 생활이 검소하여 평민으로

 

있을 때와 같았다고 하였으니 그러한 점에 교훈을 받고자 하였으리라 사료된다.

 

올 곧은 정신과 검소한 생활이 남다르고 고명한 유학자요 학문에 몰두하는 자세를 거울삼아 당쟁으로 어지러운 시대에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싶었으리라 생각된다.

 

 

금곡서원(金谷書院)을 건립하기 위하여 4천여가구가 자금(資金)을 염출했고 특별찬조금을 합쳐 총액 일억삼천여만원을 들여 지었다.

 

이 마을 4백여호 되는 후손들은 목재를 나르고 정지작업(整地作業)을 하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동원(勞力動員)까지 하여

 

후손들의 정성(精誠)이 모아진 서원이기에 더욱 값어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 서원은 묘우(廟宇)인 숭덕사(崇德祠)와 강당인 상교당(尙敎堂)이 있고 강당의 동편에 독역재(讀易齋)가 있고 서편에는

 

격치재(格致齋)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숭덕사에는 중앙에 문제공(文齊公) 치암(恥庵) 박(朴)선생의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고 오른쪽에는

 

지금까지 상주(尙州) 함창(咸昌) 청암서원(淸巖書院)에 모셔져 있던 선생의

 

7대손인 박눌(朴訥) 그리고 왼쪽에는 예천 용문 회산서원(晦山書院)에 모셔져있던 16대손

 

박손경(朴孫慶)이 모셔져 있다.

 

즉 선조와 후손이 한 지붕아래 나란히 모시게 된 것이다.

 

 

 

 

박눌(朴訥)은 세종조(1448)에 태어나서 중종조(1528)에 사망한 인물로 安東金氏 正憲公 寶白堂 係行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창락도찰방(昌樂道察訪)을 지냈으며 사후 병조참판(兵曹參判)의 증직(贈職)이 내려졌으며

 

중종께서는 묘에 사제(賜祭)하였다.

 

그리고 또 박손경(朴孫慶)은 숙종조(1731)에 태어나서 정조조(1782)에 사망한 인물로

 

일생동안 학업에만 전념한 선비로 죽기 3년전 동몽교관에 제수되었으나 이것마저 받지

 

않았다.

 

9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祠)를 지내고 매월 초하루 보름에는 분향을 한다.

 

박눌(朴訥)의 다섯 아들은 거인(巨鱗) 형인(亨鱗) 홍인(洪鱗) 붕인(鵬鱗) 종인(從鱗)인데

 

인자(鱗字)돌림으로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높은 벼슬을 하였다.

 

이러한 것을 기리는 말로 향오인(鄕五鱗)이라는 신화가 이곳 아이들과 후손들에게 깊이

 

뿌리박혀 있는데 시골에서 공부를 해도 나라를 위해 큰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슴

 

속에 심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서원이 후손들은 관리(管理)만 하고 유림(儒林)으로 이양(移讓)되어야 하리라

 

사료된다.

 

자기 선조(先祖)들만 모시고 그 후손들이 모든 일을 맡아 추진(推進)한다면 이것은 서원의 구실은 하지 못하고

 

자기 가문의 사당이나 재실 역할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서원은 유림에서 운영하고 모든 행사도 유림에서 주관해야만 서원의 구실을 할 수 있고

 

인정을 받을 수 있지않나 여겨진다.

 

 

 

 

고려사 제37권 세가 제37 충정왕 원년 1349년 윤7월 정축일에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

 

박충좌(朴忠佐)가 죽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향년(享年) 63세로 왕이 슬프게 여겨 문제공(文齋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려사에 보면 그의 이름은 이제현(李齊賢) 이가정(李稼亭) 등과 함께 개성 남문루(南門樓) 대종에 새겨져 있다고하나 고증할 길이 없다.

 

치암의 시문(詩文)과 그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와 동문선(東文選) 등에 전하지만 대부분의 글들이 산실(散失)되어 전하지 않으며

 

치암의 편린(片鱗)만을 살피게 할 따름이다.

 

 

 

 

치암의 문적에 우헌허옹(迂軒許邕)에게 보내는 글이 있다.

 

 

 

 

寄許迂軒- 우헌 허옹(許邕)에게 보낸다.

 

水在山中可濯沿 물 맑고 산 아름다운데 귀를 씻으니

 

或因高士得流傳 뜻 높은 선비정신 전하여 오도다

 

自從許子休官去 허자가 벼슬을 버리고 떠나려 하니

 

人道丹溪似潁川 인간 도리로서는 영천의 허유와 같다.

 

 

 

 

送洪義軒濯賀天壽節- 원왕의 천수절에 사신을 보내면서

 

家世東韓第一人 가문은 삼한에서 일인자인데

 

氷壺秋月絶纖塵 달 속 얼음처럼 결백해 부정과 인연없네

 

論才猶歉候審相 재주를 말한다면 정승감이요

 

丞寵當爲帝室臣 사랑을 받는 것은 원나라 조정이로다

 

革衣柱頭殘照遠 가죽띠 사모관대 멀리서 빛이 나고

 

屛風山下晩花新 용상앞에 내리는 어사화가 새롭더라

 

紫庭稽首呈金鏡 원의 궁전 머리 조아리고 폐물 바칠적에

 

萬國衣冠識鳳麟 여러나라 의관문물 각양각색이더라.

 

 

 

 

門下侍中李衍宗文蹟-謝朴恥庵惠茶

 

치암선생에게서 차를 받고 사의를 표한 글

 

山中故人無信使 산중에 계신 옛 벗이 소식이 없는데

 

何況當時卿相門 하물며 당시 경상의 가문이랴

 

肯記踈視分內賜 학문즐겨 인륜밝혀 인정을 배푸는건

 

恥庵相國獨不忘 치암상국만이 홀로 잊지 않더라.

 

 

 

 

함양군지에 보면 함양박씨의 후손인 박자안(朴子安)과 그의 아들 실(實)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박자안은 고려말 왜구를 여러번 격퇴한 공으로 경기연해절제사(京畿沿海節制使)가 되고 1389년(창왕1) 원수(元帥)로서

 

박위(朴葳)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하여 적선 300여척을 불사르고 붙잡혀간 고려인 일백여 명을 데려왔다.

 

1393년 (태조2연) 좌도수군도절제사(左道水軍都節制使), 이듬해 전라도도절제사(全羅道都節制使) 이어

 

경상전라도안무사(慶尙.全羅道按撫使)를 거쳐 1400년(정종2)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고 1408년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로서 전라충청경기도수군 도체찰사(全羅忠淸京畿道水軍都體察使)를 겸직했다.

 

태조 때에 자안(子安)이 경상전라도안무사(慶尙全羅道按撫使)로 있을 때 군기(軍機)를 실오(失誤)한 죄(罪)로

 

조정에서 관(官)에 글을 보내 자안을 참(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때에 실(實)은 정안군(靖安君. 太宗)에게 찾아가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소(哀訴)하며

 

통곡하였다.

 

정안군이 이를 가련하게 여겨 태조에게 참(斬)할 것을 거두시게 하고 심구수(沈龜壽)로 하여금 빨리 달려가서 구해주라고 하였다.

 

구수(龜壽)가 말을 달려가다가 중로(中路)에서 낙마(落馬)하여 다리가 부러져 가지 못하고

 

역리에게 글을 주어 대신해서 보냈다.

 

역리가 미처 이르기 전에 관(官)은 자안의 얼굴에 옻칠을 하고 옷을 갈아입혀 칼을

 

갖추어 춤을 추며 형(刑)을 집행하려는 순간이었다.

 

역리가 들판에서 삿갓을 휘두르며 달려오거늘 이를 바라본 관이 참(斬)하지 않고 기다렸으므로 자안은 죽음을 면했던 것이다.

 

실(實)은 본래 학술과 무예가 없었으나 태종이 그 아버지를 살려냄을 기특(奇特)하게 여겨 금여(禁旅)를 맡겨 등용하였다.

 

박실(朴實)은 1402년에 전농시정(典農寺正)이 되고 1410년(태종10)에 병마사가 되었으며 1414년

 

예조참의(禮曹參議) 1417년에는 공조판서(工曹判書) 1418년에는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에 올랐다.

 

세종때 중군총제(中軍摠制)가 되고 전라도수군처치사(全羅道水軍處置使). 도총제(都摠制)등을 지냈다.

 

태종이 실(實)이라고 사명(賜名)하였다고 전한다.

 

그 외에도 함양박씨 후손 중에는 고려말에 재상으로 있다가 이성계가 정권을 탈취하자

 

관직을 버리고 함양 백전에 은거하여 절개(節槪)를 지킨 박흥택(朴興澤)이라든지 중종때의 좌찬성 박대립(朴大立)

 

명종 때의 판서 박소립(朴素立) 등등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 參考文獻

 

高麗史(北韓飜譯本)

 

咸陽朴氏族譜

 

韓國歷代人物傳集成第二卷

 

高麗名臣傳

 

韓國人의 族譜

 

含城儒行錄

 

安義縣誌

 

함양군 홈페이지 "함양군의 인물"에서 차용하였습니다.

 

 

 

출처 : 함양박씨 종사자료 뿌리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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