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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 날부터 정확히 6개월 되는 날입니다.
6개월 전 즉 1909년 10월 26일 그는 하얼빈역에서
조국의 원수인 이또 히로부미를 미제 브로우닝 권총 3발로 절명 시켰습니다.
이 거사는 당시 세계 만방에
조선이 쉽게 일본에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한 사건이며
동아시아 전역에 반일 감정을 드높였으며
중국 주은래가 <갑오중일전쟁후 본세기 초에
두 나라 인민의 일제에 반대하는 공동 투쟁은
이때로 부터 시작되었다> 라고 평가했듯이 한-중 공동 투쟁을 촉발한 기폭제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커다란 사건의 당시 상황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아마 ‘
무엇보다도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은 이등박문 저격 사건에서
단순한 관련자가 아니라 저격 계획을 같이 세우고 실행한 다른 애국 동지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909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해 한국을 완전히 병합하고 중국 침략을 더욱 가속화 시키기 위해
이또 히로부미를 하얼빈으로 보내 러시아 재정대신 코코부체브와의 회담을 계획 하였습니다.
한국통감이었던 이또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은
만주와 블라디보스톡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일본의 조선 침략의 만행을 세계에 널리 폭로 할 수 있는 하늘의 주신 기회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당시 하얼빈은 동청 철도의 종착지이자 만주의 정치 사회 중심지였습니다.
잡화상을 경영하다가 1904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담배 판매상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안중근이 의병부대 창설의 준비 단체로 조직한 동의회(同義會)에 가입하여,
1908년
함경북도
그는 회령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징역 7년 형을 선고 받았으나 탈옥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 대동공보 <大東共報>의 모금인으로 활동하던 중
1902년 러시아의 국경지대인 보그라니츠나야로 이주하여 러시아인 철도고등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아버지
1909년
‘7인 동맹’에 가입하여 이또를 저격하고 독립 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했던 당찬 동지인데
러시아어를 잘하고 또 하얼빈 한인회장인
10월21일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한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한 것은 10월 22일.
그 열차에는 조선 애국 청년 3명이 있었습니다.
3명의 청년들은 포장마차를 타고 이동하여
도리구 삼림가에 있는 하얼빈 한인회장
10월 23일 세 청년은 하얼빈역을 돌아보고
하얼빈역은 경계가 삼엄하여 거사가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하얼빈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채가구역에서 거사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채가구역은 이또 히로부미가 하얼빈으로 오기 위해
특별 열차로 갈아타기로 한 역이기에 채가구역을 거사의 장소로 삼은 것입니다.
그날 또 한 명의 애국동지가 합류했는데 그 동지가 바로 조도선 동지입니다.
채가구역과 채가구역 지하실 입구 조도선(曺道先)은 함경남도 홍원(洪原) 사람으로
1895년 고향을 떠나 러시아 이르크츠크 등지에 체재하면서 세탁업과
러시아어(語) 통역에 종사하다가 1909년 8월에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만주 하얼빈으로 왔습니다.
그 때
참여를 요청하자 흔쾌히 수락하여 거사에 참여하였던 것입니다.
그날 밤
한편의 시를 썼으니 그것이 유명한 [장부가(丈夫歌)]입니다.
장부가(丈夫歌), 한국어- 중국어 모두 안응칠은 안중근의 어릴적 이름으로 태어날때 배와 가슴에 일곱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아 태어났다는 의미로 응칠이라 지었다.
장부가 세상에 남에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만들고 영웅이 때를 만드는구나
천하를 굽어보니 어느 날에 뜻을 이루고 동풍이 점점 차가우나 장사의 뜻이 뜨겁다
분함은 한번 갔으니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도적 이또여 어찌 목숨을 비길고 어찌 이에 이를 줄을 헤아렸으리오
모든 일은 본디부터 그러하도다 동포 동포여 속히 큰 뜻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독립이로다 만세 만만세여 대한 동포로다
안의사의 장부가를 읽고 끓어오르는 마음으로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너를 만났도다 너를한번 만나고자 일평생에 원했지만
10월 24일 만일에 대비해
채가구역으로 이동하여 채가구역 지하에 잠입하여 거사를 준비하였습니다.
이또 히로부미는
근데 마지막으로 계획을 점검하던 중 한가지 문제점을 발견 했습니다.
만일 이또 히로부미가 플랫폼으로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며
채가구 도착시간이
만약 그렇다면 거사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청년들은 상의 끝에 채가구역과 하얼빈 역 두 곳에서 거사를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만약 그것이 실패할 것을 대비하여
10월 25일
그리고 여관방에서 거사를 준비했습니다.
한 밤이 되어도 다음날 새벽 거사를 앞두었기에 쉽게 잠은 오지 않고
오히려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다는 기대에 가슴은 요동쳤습니다.
과연 동지들이 채가구 역에서 거사를 성공 시킬 것인가?
아니면 결국 내가 이또 히로부미를 죽일 영광을 얻을 것인가?
일자별 이동경로
10월 26일
채가구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이 예방 차원에서 채가 구역의;
모든 문을 봉쇄하는 바람에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 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모든 거사의 성패는
환영 인파의 함성과 군악대의 연주 속에 이또 히로부미가 기차에 내려 러시아 대신과 인산하며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환영 답례를 하고자 모자를 벗고 있는 사람이 이또 히로부미.
이또 히로부미는
가장 유력해 보이는 사람을 향해 3발을 쏘았고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을 향해 3발을 쏘았습니다.
이또 히로부미는 먼저 쏜 3발에
가슴과 복부에 총알이 명중 되어 절명했고 그 뒤를 따르던
하얼빈 일본 총영사 가와가미, 비서관 모리, 만주 철도이사 다나까 등도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 후
세 번 외쳤고 그 함성 위로 러시아 군인들이
이처럼 이또 히로부미 저격은
한 곳에서 실패할 것을 우려해 하얼빈역과 채가구역 두 곳에서 치밀한 계획 속에 진행된 거사였습니다.
만약 채가 구역에서 여건이 허락되었다면
역사는
이처럼 실패를 염두해 둔 비상작전 계획을 보면서
그들이 얼마나 이또 히로부미를 반드시 저격하겠다는 필살의 의지가 드높았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거사에 조국과 자신들의 모든 운명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 후 그 일행들은 모두 체포되었고
사진자료:<안중근과 할빈> 흑룡강 조선민족출판사 87P
예전 탈옥 사건이 추가되어 7년을 복역하고
나와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며 수 차례 옥고를 치렀고 해방 후
1948년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이 되었으나 남북전쟁 중 북한군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일제에 모진 탄압에도 살아남았는데 동포의 손에 죽임을 당하다니
분단의 고통이란 것이 이처럼 모진 것인가 봅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습니다
혹시 알고 계신 분이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러시아에 머물다가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하여
러시아를 지배하자 조선 독립 운동을 지원받기 위하여
애국 청년들과 함께 볼셰비키 혁명군에 가담하여
백 러시아군의 축출활동을 하고 있을 때 독립군으로 가장한 일본군에 의하여
11명의 애국 청년들과 함께 체포되어 싸말리야 강으로 끌려가서 총살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4명의 동지들 중 유일하게 유해가 국립묘지에 안장 된 분은
이처럼 당시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투쟁했던
수많은 애국열사들의 유해는 소수를 제외하고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말 그대로 낯선 들판에 이름없는 들꽃으로 산하 해 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중에는 독립유공자로 등록 조차 되지 못한 분들도 부지기수 일 것입니다.
국립묘지 애국열사 59호 우덕순 묘
얼마 전 언론에서는 우리나라 평균 국민 소득이 2만 달러가 넘었다고 합니다.
2만 달러가 얼마나 잘 사는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최소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밥이 없어 굶어 죽는 비참한 시대는 아닐 것입니다.
개발도 중요하고 선진국으로 나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있도록
거름이 되어준 애국 열사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그 어떤 선진국도 대의와 정의를 위해
자기 한 몸 던진 애국자 없이 선진국이 된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과거를 위해서도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도
애국 열사들의 발 자취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미래의 길을 과거로 부터 찾는 지혜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