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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독립운동가 우덕순 - 기독교인

작성자단양우씨™|작성시간12.02.10|조회수415 목록 댓글 0

안중근 의사와 의거준비를 하면서 의거 3일전인 1909년 10월 23일 중국인 사진관에서 기념촬영. 좌로부터 안중근,우덕순,유동하

 

 

서울신광교회 설립의 주역 우덕순(禹德淳) 장로

 

흔히들 서울 신광교회는 이북에서 월남한 교인들이 모여서 설립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사실은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광교회가 꼭 이북에서 출생한 사람들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 충청북도 제천의 우덕순(禹德淳) 장로는 서울 신광교회 설립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그는 1879년 2월 우시영의 자녀로 태어났다.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한 우덕순은 일찍이 제천에 있는 한문사숙(漢文私塾)에서 천자문은 물론 한자로 된 명심보감 등 모든 서적을 통달하였다. 그리고 한양에 일본인들이 설립했다는 경성학당(京城學堂)에 입학하여 새로운 학문을 터득하였다.

 

이 일로 그는 당시 일본에서 밀려들어온 각종 일본서적은 물론 서울에서 발행하는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문, 대동공부 등을 보면서 시대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즈음 서울 남대문로에 있는 상동감리교회에서 상동청년회가 활발하게 청년 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우덕순은 상동감리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목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으면서 더불어 그 마음에 애국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바로 1905년 을사늑약조약이 발표가 되자 대한문 앞에서 독기를 들고 땅을 치면서 취소해 달라고 고종황제를 부르며 울부짖던 전덕기 목사의 모습에 우덕순은 큰 자극을 받은 것이다.

 

을사늑약조약이 체결된 지 얼마 안된 어느 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1906년 서울 남산에 경무통감부를 설치하고 경무총감(警務總監)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곧바로 한국인 가운데 불량자들 4천여 명을 모집하여 훈련시킨 후 헌병보조원으로 채용하고 각 지방에 스파이 임무를 맡긴 후 국민과 국민 사이에 이간질을 시켰다. 여기에 소위 토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토지 신고를 하고 토지의 소유주를 확인하는 작업도 하였다. 이들은 3년 이하의 징역과 금고 구류, 1백원 이하의 벌금 및 과태료를 재결하는 권한도 가졌다.

 

이런 소식을 들은 우덕순은 조선에 머물러 있다가는 자신의 생명에도 위협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함경북도에서 두만강을 건넜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순간이었다.

 

“하나님, 고국을 떠나면 나는 갈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저 모든 길을 주께서 인도해 주신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간도에 간다는 젊은 친구를 만났다. 많은 조선 사람들이 개나리 봇짐을 지고 간도로 향하는 것을 보고 우덕순은 그렇게 반갑고 기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간도에서 지내고 얼마 후 일본인 병사들이 간도지방 용정을 드나드는 모습을 보고 혹시 일이 잘못되면 이들이 고통 당할까봐 아예 일본인 병사들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낮에는 행상을 하고 밤에는 조선 청년들과 독립운동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지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하루가 다르게 조선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증가했고 어느 새 조선 청년 1천여 명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독립군을 모집한다는 말을 들은 우덕순은 친구와 함께 이범윤 의병대장이 이끄는 부대 의병으로 선발되었다. 이범윤 의병 대장은 조선에서 온 의병들을 모아 놓고 매일 같이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때 우덕순은 진실한 교인이었기에 손을 번쩍 들고 이범윤 의병대장에게 건의하였다.

 

“의병대장님, 저는 서울에 있는 남대문교회에서 민족 지도자인 전덕기 목사님께 신앙 훈련받았습니다. 전덕기 목사님께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주일이 되면 혼자서라도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면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뭐, 남대문 교회 전덕기 목사 밑에서 신앙 훈련을 받았다고? 나도 전덕기 목사의 지도력을 잘 알지.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남을 인사지. 한일늑약조약이 체결되자 도끼를 들고 덕수궁 입구에 있는 대한문 앞에서 철회를 해 달라고 청원했던 분이지”

 

“네, 맞습니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20여 명이 한쪽으로 나가자 우덕순은 이들을 인솔하여 한적한 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여러 병사들은 우덕순에게 작은 예수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우덕순은 이토히로부미 암살 사건에 연류되었다 하여 일본 헌병에게 체포당하였고, 안중근 의사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일로 우덕순은 5년간의 형을 받고 대련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였다. 출감 후 다시 의병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였다. 그리고 의병운동을 하던 중 일제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해방의 기쁨을 만난 우덕순은 하루 빨리 고국에 돌아가 국가 재건에 힘을 쏟아야 한다면서 독자적으로 월남하였다. 하지만 막상 월남하여도 그를 반가이 맞이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 당시 중구 묵정동 공창지대인 공창 건물 하나를 접수하여 그 건물에 황해도에서 피난 나왔던 인사들이 항해학우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신광교회를 설립했다.

 

우덕순 장로는 그곳에 생활 근거지를 두고 신광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1947년 김창덕 목사가 인도하던 공동의회에서 초대 장로로 선임됐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6·25전쟁시 인민군에게 납북되어 북한 땅에서 고향 하늘을 바라보면서 순교하고 말았다.

 

(2009.9.5.한국장로신문/김수진 목사 한국교회역사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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