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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범선(範善)할아버지

작성자단양우씨™|작성시간18.05.31|조회수141 목록 댓글 0


🐝우정(禹鼎) 그는 우범선(禹範善)이었을까 ?


(1) 윤효정(尹孝定) 풍운한말비사(風雲韓末秘史, 1946)에는 우범선(禹範善)에 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무인(1878년), 기묘년(1879년) 간에 일본병식을 가르치기 위하여 교련소(별기군)를 설치허고 명문 자제들을 사관생도로 선택하고 교련소를 전담 감독하는 자는 정령관 한성근, 우부령관 윤웅렬(윤치호 부친), 좌부령관 김노완이었다. 이들은 군사를 통제하는 일이 서툴렀다. 윤웅렬이 송촌 지석영에게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였더니 지석영은 당시 무위영 집사 우범선이 구세군교가(九世軍敎家)에 병학이 출중한 인물로 추천을 하였다. 그래서 윤웅렬은 그 사실을 임금에게 아뢰고 우범선에 교련소 군관을 차하하여 그에게 모든 영군 업무를 일체 위임하였다. 그는 능숙하게 그 일을 해결해나갔다.

이런 가운데 사관생도들은 그들의 신분을 내세워 우범선에 대하여 고의로 대우치 아니하고 우범선에게 자네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하루는 우범선이 그 분함을 참지 못하고 모두를 불러모아 이르기를 '나는 구세장교하던 가정의 적장손 되는 우범선이니 ...금일은 내가 여러 생도들의 교수하는 자리에 섰고 또 관직이 참령관 인즉 생도가 되어 교수를 대하든지, 조정체면으로 관직을 대하든지 평일 영문 집사의 대우는 결코 만만부당하다... 이것은 실로 남자가 참을 일이 아니다.' 우범선은 그후 출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萬里秋濤白 三山夜月蒼(만리추도백 삼산야월창--만리 가을 파도는 하얗고, 삼산 밤에 뜬 달은 푸르다) 라며 현해탄을 건넜다.

우범선은 일본에 건너 간 뒤 신호, 대판과 서경 강호와 구주 사국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강산풍월을 시구로 음영하며 지사, 문인과 교류하며 세월이 가는 줄 깨닫지 못하다가 임오군란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그는 경성으로 돌아왔다. 이때 시국이 혼란하여 유죄무죄를 불문하고 잡아들였고 마침내 우범선은 좌변포도대장 李敎獻(이교헌: 전의 이씨 대사성공파 신암 이준민의 11세손,1892년 한성판윤을 거쳐 1896년 중추원1등의관, 1899년 궁내부특진관을 역임)에게 구인을 당하여 심문을 받았는데 무슨일로 일본에 갔느냐는 질문에 사관생도들의 무례를 분개하여 교편의 직임을 면하기 위하여 그리하였다고 했다. 일본에서 무엇을 하였으며 누구를 만났냐는 질문에 하루 세 끼의 밥과 세 되의 술을 마셨을 뿐이라 하였다. 화가 난 포장은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혹형을 가하겠다고 하였으나 계속 임금에게 여쭤봐 주시고 만일 사실이 아니면 스스로 목을 베겠다고 정색으로 버티어서, 포장은 심문을 중지하고 입궐 상주하였더니, 왕은 그러하다 하며 우범선은 실로 이의가 없다고 하고 충애가 있는 자이니 즉시 석방하라고 하셨다.

(2) 이때 우범선이 일본에 갔다온 기록이 없었는데 우연찮게 보던 재일 사학자 금병동의 「김옥균과 일본(金玉均と日本)」이란 책에 우정(禹鼎)에 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조선 개화당의 유명인 김옥균은 이번에 왕명을 받들어 일본에 다녀오기 위해 지난 날 경성을 떠나 부산의 여관에 머무르고 있었다.
김옥균은 1882년 3월 17일 출범하는 천년환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조선신보 3월 17일 자) 그 당시 부산-장기(나가사키) 사이에 배는 2주일에 한 번 왕래하였다.

서해신문에서 보면, 김옥균은 4월 20일 장기를 발항아여 동상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4월 중 동경(도쿄)에 들어왔다는 보도는 없었다.

장기에서 김옥균의 동행자를 신문면에서 본바 禹鼎(우정), 金東檍(김동억), 姜瑋(강위), 邊燧(변수), 朴義之(박의지-김옥균 수행 통역) 등이 있었고 徐光範(서광범)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시사(時事)」는 4월 21일자에 조선국의 김옥균은 지난 번 장기에 왔는데 아직 그곳에 체재하고 있다. 용건은 해외의 사정을 시찰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또 그와 같은 배로 장기까지 와서 그곳에서 바로 동경에 온 동국 신사 우정(25), 김동억(35) 양 씨는 육군 수업목적 때문이었다. 도착후 아직 1개월이 되지 않았음에도, 두 사람은 삭발하고 양복을 입어 순수 일본인과 다름이 없었지만 오직 이야기할 때 말을 통해서 처음으로 외국인임을 깨달을 정도의 풍채였다.


동경일일신문 6월 23일 지난 21일 축지의 수미옥에서 개최된 흥아회원의 친목회에는 회원 하본무양(하본은 그해 2월에 회장이 되었다.), 부도종신, 도변홍기, 이등준길, 관신오 등 제씨를 시작으로 청국흠차대사 여서창과 수원 도문동 및 왕금인, 장자방의 제씨 등과 관신아객 50여명, 또 손님으로 조선통훈태부경연시독관 김옥균, 승정원기주관 서광범, 수원 선공감 강위, 유길준의 4씨외에 3명과 함께 와 탁상배주를 마시고 웅담쾌변으로 서로 마음 속 까지 토로하고 시를 지어 서로 글로 다투고, 청한의 제객은 휘호도 하였다.

이리하여 김옥균 일행은 제1차 방일의 일정을 마치고, 신호(고베)에서 품천환에 탑승 귀국의 길에 올랐으나 이때 생각지도 않았던 사변을 만나 하관(시모노세키)에 체류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공사 화방은, 임오군란으로 서울에서 도망해 장기에 도착해 정부에 전보로 보고하였고 정부의 훈령에 의해 하관으로 왔다. 이곳에서 정상외상에게서 대책을 받은 후 다수의 병력을 이끌고 명치환으로 다시 조선 인천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이때 하관에 있던 김옥균, 서광범은 연명으로 외무대보 길전청성에게 명치환을 타고 조선에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화방공사는 8월 16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어쨌던 군함-금강, 일진, 부상, 청휘의 4척에 1500여 일본병사가 전투태세를 완전히 정비하여 타고 있었다. 1개대대와 2개중대였다. 육군소장 고도병지조, 해군소장 인례경범이 각각 파견 육해군의 지휘관이었다.

우리 명치환에는 한국인 김옥균, 서광범, 우정, 오함, 탁정식, 박의병, 등이 탔고, 청국군함에는 어윤중이 타고 있었다. 때때로 서로 왕래하였다. 영종현령 모씨는 조선선을 타고 와서 우리 명치환에 있는 김, 서 두 사람을 면회하였다. 어떤 말도 없었지만, 김씨는 곧 현령의 배를 빌려 홀로 예전에 떠났던 한강을 거슬러 경성에 나아가길 위해 17일 밤에 인천만을 출발하였다고 하였다.(朝野 8월 29일 자)

박의병의 이야기에 의하면 동행한 우정이 경성에서 완고당에게 포박당하는 것을 보았고, 틀림없이 그날밤 무참하게 살해당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3)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 1882년 8월 30일 자에 다음의 기사가 있다.

경성에서 조선개화당의 우정 살해의 풍문, 하관의 궁본 외무대서기관이 부정(不正)

(4) 이 당시는 신사유람단(1876년 제1차 수신사 김기수,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 1882년 제3차 수신사 박영효) 등이 일본을 왕래할 뿐 일반인이 다닐 입장이 아니었다. 이들 자료를 종합해 보면 그 시기와 나이 등등으로 미루어 우정은 다름 아닌 우범선인 것으로 추정된다. 육군 수업 목적으로 같이 일본에 간 김동억이란 인물 역시 가명이어서 인지 누군지 알 수가 없다.

우범선은 우정이란 가명으로 일본을 다녀왔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 당시 그 외에 많은 이도 일본을 오고 갈 때 가명을 사용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의암 손병희 선생을 들 수있다. 그는 이상헌(李祥憲)이란 가명을 사용했다.

어쨌던 이상의 사실은 추정일 따름이다.


#우범선
#우정
#우장춘
#예안군파
#광리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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