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제(本貫制)
고려 왕조 때부터 본관·성씨 보편화
대한민국 국민은 대부분 본관과 성을 갖는다. 본관은 시조의 거주지나 근거지 지명을 따서 만들어진다. 성은 시조의 혈통을 표시하거나 같은 혈통을 다른 혈통과 구별하기 위해 붙인 호칭이다. 대를 내려가 수십촌으로 촌수가 멀어져도 같은 본관과 성을 가진 사람은 여전히 동족(同族)으로서의 유대의식을 갖는다. 본관과 성을 갖는 전통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김행의 경우와 같이 삼국의 왕족과 지배층은 일찍이 중국과 교류하면서 성씨를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본관과 성이 일반인 차원에서 보편화된 건 고려왕조 때부터다.
약 540가문의 계보를 싣고 있는 『씨족원류(氏族原流)』(조종운(1607~1683) 편찬)에서 이씨(李氏)를 예로 들면, 이씨의 본관은 60개가량 된다. 그 가운데 지금의 경북 성주지역을 본관으로 한 이씨는 경산(京山)ㆍ벽진(碧珍)ㆍ광평(廣平)ㆍ성산(星山)ㆍ성주(星州) 등 5개다. 성주는 신라 경덕왕 때 성산으로 불렸다가 그뒤 벽진으로 바뀌었고, 고려 태조 23년(940) 때 경산, 경종 6년(981) 때 광평, 충렬왕 34년(1308) 때 성주라 각각 불렸다. 성주 지역을 상징하는 이씨 5개 본관은 모두 고려 때 정해진 군현 명칭을 따르고 있다. 이 가운데 신라 경덕왕이나 고려 초기 때 정해진 명칭을 본관으로 사용한 경우가 가장 이른 시기의 본관이다.
전체 약 60개의 이씨 본관 가운데 절반이 철성(鐵城*철원)·재령(載寧)·전의(全義*연기군 전의면)·우계(羽溪*강릉 옥계면)·조종(朝宗*가평) 등 고려 때 군현이었다가 없어진 경우다. 지금도 남아 있는 경주·전주·광주 등의 본관도 고려 때 처음 정해진 군현 명칭이다. 『씨족원류(氏族原流)』에 나온 다른 성들의 본관 명칭도 이런 경향을 따르고 있다.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ㆍ1690~1752)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신라가 말기에 중국과 교류하면서 처음 성씨를 만들었으나, 벼슬을 한 사족(士族) 정도만 성씨를 가졌고 일반 백성은 갖지 않았다. 고려 때 비로소 중국의 씨족제도를 모방하여 성씨를 반포하면서 일반 사람들도 성을 가지게 되었다.”(『택리지(擇里志)』 ‘총론’)
정곡을 찌른 얘기다. 본관은 이같이 고려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는데, 태조 왕건 때 제도화됐다. 왕건은 후삼국 통합전쟁 도중 고려왕조에 협력한 지방 유력 계층에게 성씨와 함께 그들의 거주지를 본관으로 주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940년(태조23)에는 이를 전국으로 확대해 실시한다. 이 정책을 ‘토성분정(土姓分定)’이라 한다. ‘토’는 지역·지연의 뜻을 가진 본관을 뜻하고 ‘성’은 혈연의 뜻을 가진 성씨를 각각 뜻하는데 고려 때 본관과 성씨를 합쳐 토성이라 한 것이다. 토성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했다. “토성을 (나누어) 주는 것은 일정한 토지를 주어 나라를 세우게 하고, 성을 주어 종족을 세우게 하는 것”(『서경』 우공조)이라는 얘기다. 토성은 천자가 제후에게 행하는 의례인데, 이때 성은 제후의 출생지나 나라 이름을 따라 정해진다(이수건, 『한국의 성씨와 족보』). 예컨대 춘추시대 정(鄭)·송(宋)·오(吳)는 나라의 이름이면서 제후의 성이 된다.
태조는 ‘토성분정’을 시행한 940년에 전국의 군현 명칭을 개정한다. 이 조치는 본관과 성을 정한 토성분정 정책을 보완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런 예를 잘 보여주는 것이 당시 경주에 대한 군현 개편이다.
“태조 18년(935)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가 와서 항복하자, 나라를 없애고 그곳을 경주(慶州)라 하였다. (태조) 23년 경주의 관격(官格)을 대도독부로 삼았다. 또한 경주 6부의 이름을 고쳤다.”(『고려사』 권57 지리2 경주조)
935년 신라 경순왕의 항복에 고무된 왕건은 신라 수도 계림을 ‘경사스러운 고을’이라는 뜻의 경주(慶州)로 명칭을 바꾼다. 940년(태조23)에는 경주를 대도독부로 격상시킨 뒤 6부의 명칭을 고치고 각각 토성을 분정했다. 중흥부(*李)ㆍ남산부(*鄭)ㆍ통선부(*崔)ㆍ임천부(*薛)ㆍ가덕부(*裵)ㆍ장복부(*孫)가 그것이다.
경주의 예와 같이 940년 군현 명칭 개정은 해당 지역 유력층의 비중과 전략적 중요성, 교통·생산의 중요성 등을 고려해 경·목·도호(도독)부·군·현·향·부곡과 같이 군현의 격(본관)을 정했다. 따라서 본관이 어느 지역인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사회적 위상이 결정됐다. 왕건이 발해 세자 대광현에게 고려 왕족의 성인 왕씨를 준 것은 그만큼 대광현의 위상을 높여주기 위해서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각 군현마다 토성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940년(태조23)에 확정된 본관과 성씨의 기록이다. 안동의 경우 앞에서 언급한 권(權)·김(金)·장(張) 외에 강(姜)·조(曹)·고(高)·이(李) 등 모두 7개 성씨가 안동을 본관으로 한 토성이다. 토성이 기록된 곳은 대체로 대동강에서 원산만을 잇는 선의 이남 지역, 즉 통일신라와 고려 초기의 영역 내 군현이다. 고려 때 토성이 제정된 것임을 뒷받침한다.
시행 100년 지나며 일반 양인으로 확산
왜 왕건은 이런 정책을 시행했을까? 그의 독창적인 정책은 아니다. 중국 당나라 제도를 참고해 만든 것이다. 중국 위진 남북조 때 구품중정법(九品中正法)이 시행됐다. 중앙에서 파견된 중정(中正)이란 관리가 지방 인물의 재능과 덕행을 보고 1품에서 9품의 향품(鄕品)을 정해 추천하면, 그에 해당하는 중앙 관직이 지방 인물에게 주어졌다. 대체로 영향력 있는 유력자의 자제가 높은 향품을 받게 된다. 자제는 이를 바탕으로 지역(郡) 내 유망한 족속이라는 뜻의 ‘군망(郡望)’으로 행세하면서 문벌을 형성한다. 천하를 통일한 당나라는 기득권층이 된 문벌의 군망을 줄이고, 통일에 협조한 신흥세력에 성씨를 주어 권위를 높인다. 또한 전국 유력세력과 그들의 성씨를 기록한 『씨족지(氏族志)』와 『군망표(郡望表)』를 편찬한다. 문벌을 억제하고, 천하 통일에 협조한 신흥세력의 도움을 얻어 황제체제를 강화하려는 정책이다.
토성분정 정책은 이 같은 당나라 제도를 모델로 했다. 왕건은 박씨와 김씨가 성골과 진골이 되어 정치·경제를 독점한 통일신라의 폐쇄적인 골품제를 무너뜨리고, 소외된 지방 유력층에 토성을 줌으로써 새 지배층에 편입시켜 신왕조 질서 수립에 도움을 얻고자 했다.
이 정책은 단순히 지방세력에 본관과 성씨를 부여하는 친족제도가 아니라, 반세기에 가까운 내란으로 분열된 지역과 민심을 통합하려는 고려판 사회통합정책이다. 학계에서는 이 정책을 ‘본관제(本貫制)’라 부른다.
초기에 토성을 받은 계층은 지방 유력층으로 백성(百姓)층이라 한다. ‘백성’은 보통 사람들이란 지금의 뜻과 다르게 성씨를 받아 지배질서에 참여할 수 있는 계층이라는 뜻이다. 이들을 당시 ‘유망한 족속’이라는 뜻의 망족(望族)으로 불렀다. 중국의 군망(郡望)과 같은 뜻이다. 당나라 제도를 수용한 증거가 이러한 용어에도 반영되어 있다.
958년(광종9) 과거제 시행은 본관과 성씨 사용이 일반인 계층까지 확산된 계기가 되었다. 1055년(문종9) ‘씨족록(氏族錄)’에 실려 있지 않은 사람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氏族不付者 勿令赴擧; 『고려사』 권73 선거 과거)가 내려졌다. 초기에는 과거 응시 자격이 지방 유력층인 향리층 이상에게만 주어졌지만 과거가 시행된 지 100년이 지나면서 씨족록에 성씨와 본관이 등록된 일반인에게도 응시가 허용됐다. 그러면서 성씨와 본관이 확산되기 시작한다. 대체로 11세기와 12세기를 거치면서 노비를 제외한 일반 양인들이 지금과 같이 성씨와 본관을 갖는 게 보편화된다.
세종실록지리지의 성씨본관은 어떤 의미이고 현대의 성씨본관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조사를 해보려고 합니다.
성씨본관에 대한 포스팅은 항상 조심스럽습니다. 잘알지도 못하는 남의 성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해서 다른 분들께 본의아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반대로 진실을 말했다가 악의적인 비난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알기 위해서 성씨본관에 대한 지식탐구는 반드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잘못이나 비난이 두려워서 모두가 이것을 회피한다면, 아무런 진전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해방 이후 우리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너무나 어렵고 고된 시기를 보냈기 때문에, 망국과 일제와, 전쟁과 이념에 갈기갈기 찢긴 심사에서, 모든 주장은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의 공분을 샀고 시비거리가 되었습니다. 또 우리의 역사가 위대하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조급증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해방후 70년이 되고 부강한 나라가 되자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역사를 돌아보려는 노력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잘된 것도 있고 잘못된 것도 있는 것이 역사이며, 진실입니다. 조급하게 조상의 위대함을 찾지도 않고, 성급하게 퇴행론에 침잔하지도 않고 사실을 찾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이해해나가는 첩경일 것입니다.
성씨본관에 대한 부분도 이런 여유로움과 관대함을 가지고 보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잘못된 사실이 있으면 지적하고 바로잡아 주시되, 이 포스트가 어떤 악의나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음은 이해해주시고 사소한 오류를 근거로 하는 비난은 적당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 세종실록지리지 성씨조사의 신뢰성 ]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온 성씨본관에 대한 기술은 앞선 포스트에 쓴 것처럼, 성씨에 붙은 지명이 본관을 뜻하는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성씨 옆에 쓰인 지명이 본관(本貫)을 나타내는 것인지, 혹은 본적(本籍)이나 원적(元籍)을 나타내는 것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그리고 지리지가 나눠놓은 성씨의 구분 (토성, 차성, 속성, 래성, 래접성, 촌락성, 외촌성, 사성, 입진성, 백성성)등이 어떤 의미인지도 명확치 않습니다.
그러나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온 성씨는 본적으로 볼 수도 있는 반면, 본관으로 볼 수 있는 근거도 충분합니다. 제 생각에는 일부는 본적으로 일부는 본관과 같은 의미로 쓰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씨본관 체제가 만들어져 가는 과정에 있는 과도기적 상황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지리지의 지명이 본관이냐, 본적이냐 하는 양단간의 결론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명을 어떻게 이용해야하느냐는 문제가 남는데 그것은 그 내용을 탐구해보고 어느 정도로 본관으로 이용할 수 있는지, 어느 정도로 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재량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성씨본관 기술은, 해당 시점에서 전국적인 조사를 따로 실시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고, 각 군현에 이미 존재하던 인명관련 문적들을 모아서 다시 정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용어의 정의나 조사의 범위, 성씨본관의 개념 등이 지역에 따라 다르고, 누락과 오기도 상당수 존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 지리지가 당시 성씨본관의 전체적인 모습을 완벽하게 기술하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씨본관의 조사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에, 자료의 가치를 폄하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90% 이상의 신뢰도로 자료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참고로 2000년 인구센서스 성씨본관 조사도 세종실록지리지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성씨본관의 조사는 거주자 면접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응답자 중 5000명 이상이 자신의 본관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많은 응답 중에 잘못된 응답도 많았습니다. 조사원들 역시 응답자보다 수준이 높지 못해 제대로 인터뷰하지 못한 경우가 많이 보입니다. 최종적으로 통계청의 집계에서도 전문성의 한계가 엿보입니다. 2000년 인구센서스 조사와 세종실록지리지의 성씨 조사는 비슷한 수준의 정확도를 보여주고 있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그만큼 현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성씨본관에 관심이 없습니다.)
[ 현존 성씨본관과 세종실록지리지 ]
2000년 인구센서스 자료에 따르면 4,700개 정도의 본관이 나오는데 이중 기타,미상,없음을 제외하면 4,100개 정도의 성씨본관이 나옵니다. 이것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왔다는 3,900여개와 큰 차이가 없는 숫자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갯수는 의미가 없기에 현재에 존재하는 주요 성씨본관이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와 있는가를 살펴 보았습니다.
조사대상은 2000년 인구센서스 조사 인구 10,000명이 넘는 362개 성씨본관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362개 현존 성씨본관 중 92%에 해당하는 332개 성씨본관이 세종실록지리지에 등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92%는 매우 높은 수치입니다. (물론 현존 본관 중 인구 1만명 이상이라는 점이 있으나 이 성씨의 인구는 4,200만으로 당시 인구 4,500만의 93%를 포괄하기 때문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92% 일치라는 결과는 현존 성씨본관이 세종실록지리지에 등재된 성씨의 기초 위에서 출발했음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현존 성씨본관의 골격과 구분은 이미 세종시대에 만들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리지에 나온 성씨 옆에 붙은 지명은 (당시에는 본적이든, 본관이든 관게없이) 이미 본관이었거나 이후에 본관이 되었다는 것이 틀립없는 사실이라고 보여집니다.
세종시대에 본관의 골격이 이미 만들어져 있다면, 대부분의 성씨는 적어도 주력 가문에서 만큼은 조선초기의 전승을 그대로 이어왔을 것이라고 봅니다. 현재 인구 4백만~수십만에 이르는 성씨의 경우 그 이후 과정에서 복잡한 사연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대체로 인구 10만~1만의 성씨본관은 어느 정도 세종시대 이후 혈통적 연원을 지켜왔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이는 인구 10만~1만 성씨본관의 부계하플로를 조사해 볼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박종기 국민대 교수 j9922@kookmin.ac.kr | 제322호 | 20130512 최초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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