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選考: 주요관서의 官員錄>을 찾다.
고려사〉에는 청백리로 유석(庾碩)·왕해(王諧)·김육석(金六錫)·최석(崔碩)·정운(鄭云)·윤해(尹諧)·최영(崔塋) 등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청선고 淸選考〉에 186명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청백리는 유교적 지도이념과 주자학적 실천수행의 도에 철저했던 인물들이었다. 1695년(숙종 21)에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청백리 초선(抄選)을 하면서 살아 있는 경우에는 '염근리', 죽은 후에는 '청백리'라고 호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청백리들이 지켰던 공직윤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며, 청렴·근검·도덕·경효·인의 등을 매우 중요시했다
지난번 국회도서관에서 찾지 못했던 <청선고> 기록을 오늘 드디어 찾아 여러분들의 선조(先祖) 기록도 함께 올리며,
제주목사 김수문과 돌격대장 김직손의 활약상도 [새로쓰는 제주도사]를 통해 알아 본다.
저자 이영권은 南齋와의 통화에서 "제주도가 생긴 이래 두 차례 왜군을 물리친 기록이 있으며,
이 두 차례 모두 김수문 목사의 큰 업적이며, 그 때 제주도가 왜적을 물리치지 못했다면 오늘의
제주도가 어떨헤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고 하였다.
淸選考(청선고) 中 淸選考 七(청선고 7) 366면에 기재된 김수문(金秀文) 기록
[각 문중의 청백리 기록을 보실 수 있게 6면 모두 올립니다]
[김수문 제주목사의 새로쓰는 제주사 자료 ]
[새로쓰는 제주사-139쪽]
왜구가 성 안을 한 눈에 바라보며 공격해 오자 당황했던 것은 제주읍성의 군졸들이었다.
이에 제주목사 김수문(金秀文)은 별동대 70명을 조직하여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불리한 조건 속에 계속 밀리면서 읍성 방어를 고집하느니, 차라리 성문을 열고 별동대로 하여금
적을 치게 하는 것이 오히려 더욱 효과적인 방책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의 작전은 적중했다.
무엇보다 김직손(본관: 高靈) 김성조, 이희준, 문시봉 4인 돌격대의 과감한 적진 돌파가 전세
역전의 개기가 되었다.
결국 왜주는 배9척을 빼앗기고 수백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도주할 수 밖에 없었다.
제주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여기서 4인 돌격대 중 문시봉의 직책이 보인(保人)이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보인은 본래 현역 군인이 아니라 현역을 돕는 예비병력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보인이 나서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것은 일반인들도 이 전투에 적극 참여했음을 말해준다.
사건이 마무리 된 후 명종은 제주목사 김수문에게 비단 옷을 내리고 품계도 한 등급 높여 정2품 가의대부 품계를 내렸다.
[새로쓰는 제주사-140쪽]
또 돌격대 김성조에게는 비단 옷과 종3품 무관 품계인 건공장군을 내려 주었다.
이 후 왜구는 그 다음해인 병진년(1556년)에도 또 다시 제주도를 넘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김수문 목사는 도민들을 독려하며 적선 5척을 불태우고 왜구 126명을 죽였다.
이로써 제주도를 해상 근거지로 삼으려던 왜구들의 의도는 완전히 꺾일 수 밖에 없었다.
[주] 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 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이희준(李希俊), 보인(保人)1734) 문시봉(文時鳳)
새로쓰는 제주사 표지
[새로쓰는 제주사-139쪽]
[새로쓰는 제주사-140쪽]
작가 이영권 소개
탐라순력도중 제주전최(濟州殿最) [가장 큰 누각 망경루(望京樓)]
제주목관아지의 가장 중추적이고 특징적인 2층 누각 망경루는 명종 11년(1566)
제주목사 김수문이 창건했고 2층 누각으로 총 30칸에 이루는
건물인데 한일합방이 이루어져 3년이 지난 1913년 가을에 일제가 헐어버렸어나,
2007년 2월 4일(立春) 복원 준공하다
[조선왕조 실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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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목사 김수문이 왜적이 침공한 것에 대해 장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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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州牧使金秀文狀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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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月二十七日, 倭賊無慮千餘人, 下陸結陣。 臣抄率驍勇軍七十人, 突入陣前, 相距三十步。 倭人中箭者甚多, 而尙未退兵, 定虜衛金直孫、甲士金成祖ㆍ李希俊、保人文時鳳四人, 馳馬突擊, 賊軍潰散。 有一倭將, 着紅毛頭具, 【盔也。】自恃其能射, 獨不退北, 正兵金夢根射中其背, 卽顚仆。 我軍乘勝追擊, 斬獲甚衆。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