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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fore the World War II

공포의 군주 티무르 (1) 차가타이 칸국의 역사

작성자적색경보|작성시간04.04.11|조회수475 목록 댓글 0
13세기 초 칭기스칸의 호레즘원정은 트란스옥시아나 아프가니스탄, 동부 이란을 초토화시켰고 강대국 호레즘은 사실상 지도에서 사라졌다. 한때 서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의 군주로 군림한 무함마드는 섬까지 도망쳐 절망속에 죽었고 그의 아들 잘랄 웃딘은 델리술탄조로 도망쳐 재기를 노려 한때 서부 이란을 중심으로 세력을 회복하지만 그 역시 끝내 몽골 장군 초르마간의 공격을 받고 도망치다 살해되었다.

칭기스칸은 죽기 전 자신이 이룩한 엄청난 업적을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하였다. 그는 사실상 버림받은 맏아들 조치와 그의 자식들에게 이르티쉬강 서쪽의 드넓지만 제국의 중심에서 가장 먼 평원을 주었다. 셋째아들 오고타이는 비교적 적은 영토 발하쉬 호의 동쪽과 동북쪽 지역을 받았지만 그는 대칸으로서 다른 형제들에 비해 훨씬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네번째 아들 톨루이는 전통에 따라 화로의 수호자 즉 옷치긴의 명예를 얻고 툴라, 오논강의 상류, 케룰렌강 상류 사이의 모든 영역들 즉 제국의 고향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다른 세 형제가 거대한 영토를 나누었을 무렵 칭기스칸의 둘째 차가타이에게도 그의 영지가 결정되었다. 한때 맏아들 주치와의 분쟁으로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그에게 칭기스칸은 대칸의 지위를 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몽골의 법, 야삭을 지키는 영광된 임무와 함께 과거 카라키타이의 영역인지역들 즉 일리, 이식쿨, 추 강 상류, 탈라스 초원에 더해 풍요로운 카쉬가리아와 트란스옥시아나의 도시 문명권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대칸은 끝내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아니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번영하는 도시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만큼은 카라코룸의 조정 즉 그의 동생 오고타이이에게 맞겼다.

차가타이의 영역은 트란스옥시아나 일대를 제외하면 전형적인 유목민들의 땅, 즉 초원지대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휘하에 놓인 유목민들의 상당수는 투르크 계통이었으며 이들은 대부분의 유목민이 그러하듯 호전적이고 놀라운 기마술을 갖추고 있었다.

차가타이는 칭기스칸이 그에게 몽골 관습과 야삭의 수호를 맡긴데서 들어나듯이 농경문명을 혐오했고 나아가 이슬람의 관습들에도 적대적이었다. 그와 그의 후손들은 도시생활을 경멸했고 오랜기간 초원에서 머무르는 생활을 계속했다.

1242년 차가타이는 죽음을 앞두고 과거 바미얀 공방전에서 전사하여 칭기스칸의 끔찍한 보복, 즉 대량살육과 파괴를 일으킨 인물인 죽은 맏아들 무투켄의 아들 카라 훌레구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카라 훌레구가 즉위 한지 얼마되지 않아 서서히 몽골제국은 계승을 둘러싼 혼란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1241년 12월 11일 대칸 오고타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계기로 벌어진 계승전쟁은 급기야 오고타이 가문 대 주치, 툴루이 가문간의 대결로 확대되고 차가타이칸국은 이 거대한 대결의 구도 속에서 끊임없이 칸이 죽고 바뀌는 상황이 거듭되었다. 차가타이는 전체적으로 볼때 독립성 면에서 킵차크 칸국이나, 일 칸국에 비해 떨어졌는데 예로 차가타이 칸국은 오고타이 칸국의 계승자 카이두에게조차도 항상 신하의 예를 취해야 했던 것이다. 급기야 금쪽같은 일리와 카쉬가리아마저 카이두에게 빼았긴 차가타이칸국은 4대 칸국 중 최약체로 전락하는 득 보였다.

하지만 카이두가 죽은 뒤 차가타이 칸국의 두와, 그의 아들 케벡과 에센부카는 마침내 카이두에게 행한 모든 종속을 거부한 것은 물론 북경에 있는 대칸에게 명목상의 충성을 맹세하는 한편 빼앗긴 일리와 카쉬가리아까지 회복시켰다. 이 과정에서 사실상 오고타이 가문은 해체되었고 카이두의 아들 차파르는 결국 그의 아버지 카이두의 원수 북경조정으로 달아나고 만다.

이제 모든 것이 홀가분해진 차가타이 칸국은 마침내 밖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서북은 킵차크 칸국, 서남은, 일 칸국, 동쪽은 대원이 가로막은 상황에서 그들이 눈을 돌린것은 남쪽 땅 풍요로운 인도의 북부를 지배하던 거대한 델리술탄 왕국, 서부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던 강인한 산악민족의 나라 케르트가의 아프간-구르조였다. 구르조의 경우 명목상 일 칸국의 신하였고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들의 야망은 자연 인도로 향했다.

1297년 두와의 편자브 침공을 계기로 마침내 몽골세력의 인도 침공이 시작되었다. 1300년에는 두와의 아들 쿠툴룩 호자가 델리의 바로 앞까지 밀고 들어왔고 1303년에는 왕자 투르가이의 12만 대군이 2개월간 델리를 포위하고 델리 술탄왕조의 심장부를 약탈하였다. 1304년에는 4만의 몽골기병이 북부 편자브를 초토화시키고 델리 동쪽에 위치한 함로하까지 밀고 들어왔으나 가까스로 격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정의 결과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델리술탄왕조조차도 마치 바람 앞의 등불 같아보였으며 드디어 몽골이 인도를 정복할 듯이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차가타이왕국 확장의 결과물로 동부 아프가니스탄에 쿠툴룩 호자의 아들 다우드 호자의 영지가 확대되는 것을 중대한 도전이라고 판단한 일 칸국의 울제이투는 1313년 다우드 호자를 공격, 그를 트란스옥시아나로 도망치게 만들었고 이로서 차가타이 칸국의 전진기지가 제거되었다. 하지만 일 칸국의 공격에 격노한 차가타이의 칸 에센 부카는 즉시 아우 케벡과 도망쳐온 조카 다우드 호자에게 군사를 주어 일칸국을 공격 무르갑에서 적을 격파한데 이어 심지어는 헤라트까지 진격해 들어가 호라산 전역을 초토화시켰다.

하지만 이들은 곧 대원에서 파견된 원나라 승상 토가치가 대군을 이끌고 타림으로 진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환해야 했으며 그마저도 쿠차와 이식쿨사이에서 벌어진 격전에서 원나라 군대에 완패하고 말았다.

원나라와 일칸국이 같은 툴루이가 출신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 이 협공은 에센 부카를 격분시켰고 그는 보복으로 일 칸국에서 원으로 돌아가는 대칸의 사절들을 살해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보복으로 토가치의 원나라 군대는 차가타이 칸국 깊숙이 전진하여 에센 부카의 탈라스에 있는 하영지와 이식쿨에 있는 동여지를 파괴했고 에센부카의 목표인 인도정복은 사실상 물건너가고 말았다.

그 뒤에도 차가타이 칸국에서는 내부분규가 계속되었으며 이러한 혼란은 1320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뒤 케벡에 의해 차가타이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고 케벡은 지금까지의 칸들과는 달리 트란스옥시아나의 도시 생활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훗날 '케베키'로 불리는 화폐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후... 너무 길어졌네요. 오늘은 이만 하고 다음에도 계속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편은 차가타이 칸국의 분열과 혼란상입니다. 티무르의 등장은 그 다음으로 갈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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