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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Ewald von Kleist) 독일육군원수

작성자Jung Won Suk|작성시간06.01.18|조회수651 목록 댓글 3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Ewald von Kleist) 독일육군원수

 

1881년 전통적인 기병장교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때에 기병장교로써 서부전선에서 근무하였고 종전 후에도 베르사유조약에따라 10만명 이상 군대를 보유할수없었던 상황에서도 육군 참모본부에 남았던 인물입니다.

 

클라이스트는 바이크스와 함께 기병병과 출신의 육군원수로써 초창기 구데리안상급대장의 기갑이론전술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는 의견을 내새우는 독일육군내 대표적인 보수파인사였습니다.

 

하지만 이 후 기갑전술의 이론의 우수성을 깨닫고 독일군내에서 가장 큰규모의 기갑집단군을 지휘하게 됩니다.

 

 1936년 기병 대장으로 승진하였고 폴란드전에는 남부집단군의 제14군휘하 제22기갑군단을 이끌고 참전하였습니다.

 

1940년 5월 프랑스침공시엔 A집단군 소속으로 자신의 이름을 붙인 클라이스트기갑군 (비터스하임의 제14차량화보병군단, 구데리안의 제19기갑군단, 라인하르트의 제41기갑군단) 을 지휘하여 프랑스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됩니다.

 

이 중요한 역할을 위해서 프랑스침공에 참가한 독일의 모든 기갑사단중 반 이상이 클라이스트기갑군에 할당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임무를 왜 하필 기병병과출신의 클라이스트가 맡게됐는지는 의문이 아닐수가 없는데?......

 

 사실 만슈타인의 아른덴 통과계획에 대해 B, C집단군의 보크와 레프는 회의적인 반응이었고 심지어 황색계획을 비판한 핵심적인 주공의 역할인 A집단군의 룬트슈테트도 아르덴 통과방안에 대해 심히 우려를 나타내고 있었고 할더를 비롯하여 육군최고사령부는 일개 중장에 불과한 만슈타인의 계획을 상식이하의 생각으로 받아들였고...

 

 당연히 히틀러의 승인을 받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히틀러는 자신이 구상중인 생각과 일치한다하여  적극찬성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그동안 할더와 육군최고사령부가 공들여 작성한 황색계획이 묻혀버리는 사태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원래 독일은 프로이센시절부터 재정독일제국까지 전통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건 군부였고 특히 육군에 대해서는 비록 황제라 할지라도 모든 작전지휘권에 있어서 간섭을 할수 없었던게 전통이었고 제1차세계대전시에도 빌헬름2세또한 모든 작전지휘권을 모두 육군총사령관에게 일임하는 전통을 쭉 지켜왔습니다.

 

 그리고 독일 최후의 보루는 육군이라는 인식과 함께 잘못된 국가정치권력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라고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가난한 미술학도 출신의 상병.
그것도 순수독일이 아닌 오스트리아출신의 히틀러는 독일육군 전통장교집단이나 고급지휘관들이 보기엔 대단히 위험하고 거북스러운 존재였고,

 제1차대전때에도 섣불리 건들지 못한 유럽의 강대국인 프랑스를 상대로 말도안되는 일개중장의 계획을 받아들여 모험을 한다는 건 전혀 상식 밖의 일이라고 일축해버립니다.

 

 반면 히틀러의 입장은 전쟁전부터 자기말에 고분고분 하지 않고 계속된 쿠데타모의와 신변위협의 불안감은 여전히 느끼고 있었고...

일례로 프랑스전이 끝난뒤 1940년 7월 히틀러는 무려 12명이나 원수로 진급시키는데 "원수"라는 군 최고계급을 부여함으로써 육군내의 반발을 어느정도 무마시키려는 성격이 있었습니다.

하여간에 히틀러가 제아무리 정치적 기반을 등에 업고 권력을 쥐고 있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뿌리깊게 박혀있는 육군의 전통과 파워앞에 모든 결정사항을 정하는데 있어 육군의 눈치를 보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육군에서 공들여 작성한 황색계획에 대해 히틀러의 엄청난 수정이 가해지자 육군내에서 일종의 보복형식으로 클라이스트 임명한겁니다.

 

클라이스트는 당시 보수적인 전술방식에 사로잡혀 구데리안의 기갑전술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휘하 구데리안의 제19기갑군단에게 후속보병과의 공백차이가 너무크고 측면의 방어를 고려해 몇 번씩이나 진격정지명령을 내려 구데리안과 상당한 마찰을 빚었고  참지못한 구데리안은 클라이스트의 결정에 따를수 없다하여 자신을 보직해임시켜줄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여기에 격분한 클라이스트는 항공기로 구데리안의 제19기갑군단사령부로 직접 날아와 그 자리에서 구데리안을 해임시키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되자 프랑스침공 전체작전의 성공여부조차 불투명하게 만들어 버릴 상황에서 제12군사령관이었던 리스트의 중재로 간신히 해임은 면할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구데리안은 룬트슈테트에게 직접 자유재량권을 부여받고 프랑스항복에 결정적인 공헌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그의 직속상관인 클라이스트는 프랑스침공의 결정적역활을 하게된 명성을 얻게 됩니다.


 프랑스전 이 후  클라이스트는 기갑전술에 눈뜨기 시작했고 이후 소련과의 전쟁에서 대활약을 하게되는 계기가 됩니다.

 

1941년 4월엔 제1기갑군을 지휘하여 루마니아 서부국경에서부터 유고슬라비아 남부지방으로 침공을 개시하여 세르비아지방을 순식간에 석권하고 베오그라드를 점령하여 유고슬라비아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일조합니다.

 

1941년 6월 납부집단군 예하 제1기갑군의 사령관으로 소련침공에 참전하여 그 유명한 키예프 대포위전에 참가하였고, 42년 하계공세때 블라우작전에서는 코카서스지방까지 진격하기이릅니다.

 

 42년 9월 리스트원수의 후임으로 A집단군(막켄젠의 제1기갑군, 루오프의 제17군) 을 맡았으며 43년 1월말  겨울동안 제6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하기 일주일전에 소련군이 코카서스지방으로 물밑듯이 밀려들어오자 자칫 전멸위기 일보직전에 치밀한 퇴각전을 전개하여 가까스로 탈출하는데 성공하고 이 탈출에 대한 공로로 히틀러는 그에게 육군원수 계급장을 수여합니다.

 

이 후 우크라이나에서 절묘한 반격과 함께 43년 9월에는 쿠반반도에서 방어전을 전개하여 대규모의 소련군을 묶었고,  10월에는 크림반도에서  방어전과 동시에 퇴각전을 전개하면서 반격을 가해 소련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혀 몇 번의 위기사태를 간신히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클라이스트는 히틀러의 퇴각금지명령에 대해 퇴각할 때 마다 심한격론을 주고받았으며 특히 치타델작전 실패이후 히틀러는 더 이상 기동전을 수행하는 장군들보다는 고정된 거점방어전을 수행하는 장군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결국에는 1944년 3월말 만슈타인원수와 함께 클라이스트원수를 파면시킵니다.

 

 그리고 1945년 3월 고향의 자택에서 미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전후 소련군에게 인도되었고
유고슬라비아에서 저지른 전쟁범죄로 인해서 독일의 땅을 밟지 못한채 1954년 10월 소련의 형무소에서 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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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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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파괴질서 | 작성시간 05.09.21 백작의 작위를 가진 독일 육군 원수. 근데 이 클라이스트란 가문은 매우 대단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는데,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원수의 선조엔 18명의 장군이 있었고, 2명의 원수가 있었을만큼 전통있는 가문이었죠.
  • 작성자파괴질서 | 작성시간 05.09.21 현대의 독일사람들도 클라이스트란 성이 지닌 사람을 보면, 옛 위인이 많이 배출됐던 유명한 귀족집안의 자제란걸 많이 안다고 합니다. 물론 현대의 독일인들에겐 귀족 신분이 사라진지 오래지만,
  • 작성자Jung Won Suk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5.09.22 음...약20명의 장성이라...대단한 가문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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