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 귄터 폰 클루게 (Hans Gunther von Kluge) 독일육군원수
클루게는 1882년 동프로이센의 포즈난의 귀족가문출신으로 제1차세계대때는 포병장교로 참전하였고 그 유명한 베르됭지옥이라 불리는 베르됭전투에 참가하여 부상을 당하기도 합니다.
34년에 제6사단장, 35년에 제6군단장을 거쳐 37년에 대장진급과 동시에 제6군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이후 제6군이 제4군으로 개칭되어 폴란드전 당시 북부집단군 소속으로 제4군을 지휘하여 폴란드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1940년 5월 프랑스침공전에도 A집단군 예하의 제4군을 지휘하여 클라이스트기갑군과 함께 핵심적인 주공을 맡아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1940년 7월 원수로 진급하였고 소련과의 전쟁에서는 중부집단의 제4군사령관에 임명되어 초기에 민스크포위전, 스몰렌스크 포위전, 비야즈마 포위전등 각종 포위전에 참가하였고 12월 2일에는 휘하의 일부부대가 모스크바교외까지 도달하기도 합니다.
1942년 초에 보크원수가 남부집단군사령관으로 전출되어가자 후임으로 클루게원수가 중부집단군을 맡게 됩니다.
1942년부터 독일은 하계공세의 주공격방향을 남부집단군으로 정했고 중부집단군은 42년 가을까지 수세적입장에서 적절히 전선을 유지하여 방어하였습니다.
1942년 늦가을부터 소련군은 독일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에 대해 대규모공세를 개시하는데 중부지역에서는 마르스작전으로 명명된 르제프돌출부지역에서 남부에서는 우라누스작전으로 명명된 스탈린그라드에 대해서 대규모 공세를 가하기 시작합니다.
엄밀히 짚고 넘어가자면 소련군에게 있어서 최우선순위는 독일중부집단군을 붕괴시켜 모스크바로의 위협요소를 제거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최소한 모스크바를 보다 안전하게 하는게 목표였습니다.
물론 소련의 입장에서본다면 남부지방의 스틸린그라드와 코카서스유전이 무척 중요하긴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언제 모스크바를 향해밀고 들어올지 모르는 독일중부집단군이 여전히 목에 겨눈 칼처럼 버티고 있고 독일공군의 폭격권에 들어있는한 이걸 격퇴시키지 않고는 스탈린은 발뻗고 잘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1942년 11월말 동부전선의 남부상황을 보자면 소련군은 이미 스탈린그라드의 독일B집단군에 대하여 우라누스작전으로 대공세를 개시하였고 독일A집단군또한 고립될 위기에 처한상황이었고,
중부의 상황또한 역시 11월말부터 르제프돌출부지역에 대해 소련군은 마르스작전을 개시하여 독일중부집단군에게 대공세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부터 클루게원수의 지휘력이 빛을 발휘하게 되는데 솔직히 르제프지역의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지역의 소련군보다 오히려 병력면에서는 많았으며 중부집단군은 그동안 계속된 수세적방어로 많이 지쳐있었고 병력또한 남부집단군으로 상당량 차출되어간 상황에서도 르제프지역을 방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소련군은 비록 남부의 스탈린그라드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중부에서는 참담한 패퇴를 겪습니다.
결론은 뭐... 우세한병력을 가진 주코프도 르제프에서 패퇴함으로써 클루게에게 한방먹게 되었죠...
1942년에 르제프 방어의 성공으로 자신을 얻은 클루게원수는 1943년 3월 만슈타인의 남부집단군의 기습반격이 대성공을 거두자 늦봄에 중부와 남부집단군이 협공하여 춘계대공세를 실시할 것을 히틀러에게 건의하고 여기에 자이츨러 참모총장까지 클루게의 주장에 동의하자 결국 히틀러는 하계공세의 일환으로 치타델작전을 승인하게 됩니다.
어쨋거나 1943년 7월 클루게의 중부집단군은 만슈타인의 남부집단군과 협공으로 치타델작전을 개시하여 쿠르스크에서 소련군과 사상최대의 전차전을 벌인 대격전을 치르기도했습니다.
쿠르스크전투는 단일전투로는 역사상 최대규모로 양측의 병력이 약230만 (독일95만, 소련135만) 이었고 전차와 자주포도 양측이 합쳐 6,000대 (독일2,700 소련 3,300) 항공기도 양측이 4,000 (독일1,800 소련 2,200)를 동원한 전투로 단일전투로는 앞으로도 절대 일어날수없는 최대규모였습니다.
하지만 상당한 진전을 보인 남부집단군과는 달리 중부집단군의 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독일군에게 더욱 심각한 사실은 연합군이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으로 상륙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탈리아전선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고 쿠르스크지역에서의 병력을 차출하면서 독일군의 퇴각이 시작되어 결과적으로 전투는 양측이 서로 막대한 피해만 입은채 이렇게 끝이납니다.
독일로써는 쿠르스크전의 전력손실이 이후 동부전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요소로 작용합니다만...
클루게원수는 치타델 작전실패후 1943년 10월 자동차사고로 후방으로 후송되었고
1944년 6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고 브르타뉴반도를 점령하자 히틀러는 룬트슈테트원수에게 책임을 물어 해임시키고 후임으로 클루게원수를 임명합니다.
하지만 이미 서부전선에서 전황은 기울어 졌고 7월에 봘큐레사건이 터졌고 클루게 또한 히틀러의 의심을 사게되고 급기야 8월17일 해임당하고 이틀뒤에 자살합니다.
클루게 원수에 대해 한가지 덧붙이자면 1943년초 클루게는 히틀러암살모의에 대해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인 행동을 취합니다.
독일국방군 내부의 핵심적인 반히틀러파인 헤링 폰 트레스코소장이 그의 참모였는데 클루게는 트레스코가 히틀러 암살계획에 동조하는걸 넌지시 알고는 있었지만 잠자코 있었습니다.
그리고 해가 지나고 1944년초 프랑스점령지구사령관인 스톨프나겔 보병대장은 히틀러암살을 위해 서부전선의 주요지휘관들을 포섭하는과정에서 7월초에 클루게원수가 서부전선총사령관으로 부임해왔고 클루게는 히틀러암살모의에 대해 직접가담하지는 않고 넌지시 방조하는 자세를 취합니다.
클루게의 참모인 블루멘트리트 보병대장 또한 쿠데타 모의에 가담할 정도였으니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그야말로 폭풍전야와도 같다고 해야할까요...
아무튼 7월20일 슈타우펜부르크대령의 주도로 봘큐레작전이 터졌고 베크는 클루게에게 쿠데타에 적극 가담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미 프랑스점령지구사령관인 스톨프나겔 보병대장과 파리점령사령관인 보이네베르크중장은 파리의 1,200여명에 달하는 게쉬타포를 비롯하여 SS무장친위대요원, 친나치인사들을 즉각 체포함과 동시에 서부전선의 독일군을 이끌고 베를린을 향해 진군할 계획이었지만 클루게는 히틀러가 생존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결국 협력을 거부하였고 결국에는 베를린으로의 진격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만약 클루게원수가 쿠데타에 적극 가담했다면 어찌돼었을까요? 물론 그동안 동부전선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운 클루게 원수였지만 새로부임한 서부전선에서 휘하의 참모들이나 부대들을 쉽게 장악하는게 의문이 들긴 합니다만...
좌우지간 제생각은 클루게 휘하의 서부전선의 독일군이 연합군과 함께 베를린으로 진격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물론 연합군이 쿠데타세력과 쉽게 손잡는단 가정이 있어야 되겠지만어쨋든 만약 그랬다면 SS무장친위대 또는 배를린주변의 공군부대들과의 대격전을 각오해야할 상황이 발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쿠데타성공을 위해서는 서부전선의 B집단군사령관 롬멜원수가 협조해야 하는데 롬멜은 7월17일에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중인 상태라...
어쨌든 7월말 봘큐레사건으로 한차례 칼바람이 휘몰아쳐간 가운데 8월초 클루게원수는 히틀러에게 지원병력을 호소하였고 히틀러는 그동안 클루게원수에 의심을 품고 여러 가지 조사를 하여 어느정도 자료를 확보한상태에서 8월15일 전선시찰도중 클루게가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었고 여기에 히틀러는 클루게가 그의 참모진들과함께 북서쪽으로 이동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영,미연합군과 클루게가 독단적으로 항복협상을 하는 것으로 확신하고 즉각 해임과 동시에 체포하여 독일로 송환하라고 지시합니다.
클루게가 행방불명이 된건 아직도 미스터리지만 추측컨대 패튼, 몽고메리와 비밀협상을 계획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8월17일 모델원수가 찾아와 해임통지서와 함께 클루게원수를 체포하였고 이틀 뒤 8월19일 클루게원수는 히틀러에게 한통의 편지를 남기고 프랑스 메츠근방에서 독약으로 자살합니다.
"총통각하! 지금까지 독일국민은 너무나도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제 이 잔혹한 시대를 끝낼때가 왔습니다."
한가지 클루게 원수는 특히 구데리안상급대장과 아주 사이가 나쁜걸로도 유명한데 1939년 폴란드침공때부터 악연이 시작되었는데 당시 구데리안은 제19기갑군단장으로 클루게의 제4군휘하에 있었고 그때부터 사사건건 대립하더니...
1941년 12월 클루게가 중부집단군사령관으로 부임하였고 히틀러의 명령에따라 진지사수명령을 고수하자 퇴각을 적극주장한 당시 제2기갑군사령관이었던 구데리안과 대립하기 시작했고 클루게는 히틀러의 도움을 받아 구데리안을 경질시켜버립니다.
그리고 1943년 초에 구데리안이 기갑총감으로 다시 현역에 복귀하자 치타델작전에 대해 찬성이냐 반대냐를 놓고 또다시 격론을 벌여 서로가 얼굴을 붉힐정도로 감정싸움으로 비화되기까지 합니다.
또 클루게원수는 만슈타인원수와도 잦은 마찰이 있었는데 1942년말부터 남부집단군을 맡은 만슈타인원수는 자신의 남부집단군으로 병력차출을 클루게원수에게 요청했고 클루게원수가 이 요청을 거부하자 만슈타인은 잦은불만과 비판을 했고 클루게원수는 또 나름대로 상대적으로 소련군에 비해 열세한전력으로 겨우겨우 방어전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병력을 차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토로합니다.
클루게원수는 다소 우유부다는 평과 결단력에 있어 부족한면이 있으나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모험을 중시하지 않는 신중론자라고도 할수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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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파괴질서 작성시간 05.10.02 [한스 권터 폰 클루게] 밀리터리매니아사이에선 익히 알려진 인물. 머 클루게의 업적이야 윗글에서 잘 설명되어 있고 하니, 이 클루게의 가문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영리한 한스란 별명을 가진 이 독일 육군 대장의 선조중에도 귀족 출신의 육군 고위 장교들이 꽤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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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파괴질서 작성시간 05.10.02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1차대전 당시 프랑스전 주공을 맡은 클루게 장군과도 권터 폰 클루게 원수랑 친척이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정작 권터 폰 클루게 원수는 중년에 이르러서야 성앞에 폰자를 달수 있었다고 하네요. 그러니 시민계급중에 꽤나 출세한 인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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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파괴질서 작성시간 05.10.02 그리고 윗글에서 하인리히 폰 쉬튈프나겔 장군에 대한 언급이 약간 나와있는데, 이 장군의 가문 또한 선조부터 친인척들까지 많은 장교들을 배출해낸 전통있는 귀족군인가문이죠. 대표적으로 그의 사촌인 오토 폰 쉬튈프나겔 장군을 들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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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파괴질서 작성시간 05.10.02 하인리히 폰 쉬튈프나겔대장이 프랑스로 오기전 그의 사촌인 오토 폰 쉬튈프나겔장군이 이전의 프랑스지구 군정사령관이었는데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처형하라는 히틀러의 명을 거역해서 해임되었었죠. 머 어쨌든 이 가문은 프러시아시절부터 군인출신의 선조들이 많이 배출됐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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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Messerschmitt 작성시간 05.10.02 역시 유유부단한 인물이 아니었어. 그럼. 이 사람이 유유부단한거면.. 몽고메리는..? [그 인간은 지독한 신중론자인가? 결단력이 부족하지는 않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