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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기관목인(機關木人)을 불러 붙들고 물어보라. 부처 구하고 공(功) 베풂을 조만간 이루리로다.
喚取機關木人問하라 求佛施功早晩成이로다 환 취 기 관 목 인 문 구 불 시 공 조 만 성 기관목인(機關木人)이란 나무로 사람을 만들어 그 속에 들어 가서 인형극 하듯이 나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기관목인(機關木人)에게 물어보라'는 것은 곧 '나무 장승에게 물어 보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부처 구하고 공을 베품이 조만간에 이룬다'하는 것을 흔히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나무 장승에게 물어보면 부처를 구해 공을 베푼들 어느 때 이루리오'라고 합니다. 결국 무생물인 장승에게 물어 가지고는 영원토록 성불하지 못하고 만다는 말인데 그리되면 쌍차(雙遮)는 표현이 되지만, 앞 구절의 '약실무생무불생(若實無生無不生)'과 서로 연관시켜 보면 그와는 뜻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나는 것이 없으면 나지 않음이 없다'고 해석하니 만큼 그렇게 되면 나무 장승이 말을 해야 합니다. 나무 장승이 말을 하지 못하면, 나는 것이 없다면 나는 것이 없는 것 뿐이지 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안 되버리고 맙니다.
예전 스님네는 '나무 장승이 노래 부르고 돌 여자가 일어나 춤 춘다[木人放歌石女起舞]라고 했습니다. 결국은 참으로 나는 것이 없으면 곧 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나지 않는 것이 나는 것이고, 나는 것이 나지 않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쌍차(雙遮)가 곧 쌍조(雙照)며 쌍조(雙照)가 곧 쌍차(雙遮)하여 차조동시(遮照同時)가 표현됩니다.
나무 장승 이대로가 산 사람이며 산 사람 이대로가 나무 장승이 되어야만, 참으로 쌍차(雙遮)한 데서 쌍조(雙照)가 되고 쌍조(雙照)한 데서 쌍차(雙遮)가 되어 차조동시(遮照同時)인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구경법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나지 않는 것[無生]과 나는 것[生]을 분리하여 보면 변견(邊見)이 되어 버리는 것이어서, 그것은 중도정견(中道正見)이 아니고 사견(邪見)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잘못 해석하여 나무 장승이 본래 말을 못하니 부처를 성취하지 못한다고 하면 나는 것[生]과 나지 않는 것[無生]을 분리해서 보는 변견에 떨어지게 되므로, '나지 아니하면 나지 아니하는 것이 없다'는 뜻과는 정반대가 되어 버립니다.
전체적으로 종합하면 '나무 장승에게 물어보라. 나무 장승은 언제든지 대답하고 있고, 돌로 만든 여자는 언제든지 춤을 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처를 구하여 공을 베품이 조만간에 이루어지리로다'한 것입니다. 곧 '참으로 나무 장승이 노래 부르고 돌 여자가 춤을 출 때, 그 때가 불법을 완전히 성취한 때이다'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정말로 나무 장승이 노래하고 돌 여자가 춤을 출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이지만, 중생이란 것은 생멸의 변(邊)에서 사량분별을 근본 생명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량분별이 다 떨어져 버리면 무정물(無情物)인 나무 장승과 돌 여자처럼 되어 영영 대무심(大無心)이 되어 버립니다. 대무심이 되면 그 때 비로소 참으로 진여(眞如)의 무진묘용(無盡妙用)이 거기서 살아나게 됩니다. 그것이 나무 장승이 말을 하고 돌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는 경계의 소식이나 진여가 대용전창(大用全彰)한 시절로 보아야 합니다.
또한 그것은 죽음 가운데서 삶을 얻고[死中得活], 크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大死却活]을 말합니다. 크게 죽었다고 하는 것은 나무 장승과 같고 송장과 같다는 말인데, 거기서 다시 살아 날 것 같으면 이것이 진여묘용(眞如妙用)이 현전한 것입니다.
나무 장승이 노래하고 돌 여자가 춤 춘다고 하는 것은 크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소식을 비유해서 말 한 것이며, '나는 것이 없으면 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대원경지(大圓鏡智)의 경계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니 그 뜻을 잘 알아야만 '나무 장승에게 물어보라'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의 뜻을 대강 짐작 할 수 있을 것입니다. _(())_
<출처 : 성철 스님의 증도가(證道歌) 강설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