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斷想) [경전 이야기] ♡ 다만 내 몸이 있나 없나를 묻습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남의 심부름으로 멀리 가다가 빈 집 안에서 혼자 잤다. 밤중에 어떤 귀신이 죽은 사람 의 시체를 메고 와서 그 앞에 두었다. 그 뒤에 또 어떤 귀신이 쫓아와서 앞에 온 귀신을 꾸짖었다. "이 시체는 내게 있었는데 왜 네가 메고 왔는가?" 두 귀신은 각기 한 팔씩 잡고 서로 다투었다. 앞의 귀신이 말하였다. "여기 사람이 있다. 물어보자." "이 시체를 누가 메고 왔습니까?" 그는 생각하였다. '이 두 귀신은 모두 힘이 세다. 바른말을 하여도 죽을 것이요, 거짓말을 하여도 죽을 것이다. 아무래도 죽을 바에야 왜 거짓말을 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였다. "앞의 귀신이 메고 왔다." 뒤의 귀신은 매우 화를 내어 그의 팔을 뽑아 땅에 던졌다. 앞의 귀신은 곧 죽은 사람의 한 팔을 뽑아 보 충시켜 주었다. 이와 같이 두 다리 · 머리 · 옆구리 등이 모두 뽑히자, 곧 죽은 사람의 그것들로 붙여 주어 본래와 같이 되 었다. 이리하여 두 귀신은 바뀐 사람의 몸을 같이 먹고 입을 닦으며 떠났다. 그 사람은 생각하였다. '우리 부모가 내 몸을 낳았는데, 나는 지금 내 눈으로 저 두 귀신이 내 몸을 다 먹고 가는 것을 보았다. 지금 내 몸은 모두 다른 사람의 몸이다. 지금 내게는 과연 몸이 있는가. 없는가? 만일 몸이 있다면 그것 은 모두 남의 몸이요, 없다면 지금 이와 같은 현재의 이 몸은 무엇인가?' 이와 같이 생각하자, 그 마음이 헷갈리고 어지러워 마치 미친 사람 같았다. 이튿날 아침에 길을 찾아 앞의 나라로 가서, 부처님 탑과 스님들이 있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다른 일은 묻지 않겠습니다. 다만 내 몸이 있나 없나를 묻습니다." 비구들은 물었다. "그대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대답하였다. "내가 사람인가 사람이 아닌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는 스님들을 위하여 위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비구들은 말하였다. "이 사람은 나 없음[無我]을 안다. 쉽게 제도될 수 있다." 그리하여 그에게 말하였다. "그대 몸에는 본래부터 언제나 나[我]가 없다. 지금만이 아니다. 다만 사대(四大)가 모였기 때문에 내 몸이라고 헤아리는 것이다." 그는 곧 제도되어 도를 닦아 모든 번뇌를 끊고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이것을 가리켜 능히 나 없음을 헤아릴 줄 알면 머지않아 도를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중경찬잡비유경(衆經撰雜譬喩經)》 上 ---------------------------------------------------------------------------------------------------------------- 이 비유는 겉으로는 기괴한 귀신 이야기 같지만, 불교의 핵심 교리인 "무아(無我)"를 매우 생생하게 드러 내는 유명한 비유입니다. 이야기가 좀 기괴하지만 요지를 살펴봅니다. 한 사람이 귀신들의 다툼에 휘말려 자기 몸의 모든 부분이 차례차례 뽑혀 나가고, 대신 죽은 사람의 몸으 로 바뀌게 됩니다. 그는 그 과정을 자신의 눈으로 모두 지켜보았습니다. 그래서 깊은 의문이 생겼습니다. "원래 내 몸은 귀신들이 먹어 버렸다. 지금 남아 있는 몸은 다른 사람의 몸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누구인가? 내 몸은 있는가, 없는가?" 이 의문은 단순한 혼란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향한 물음이었습니다. 그가 스님들을 찾아가자 스님들은 말합니다. "지금만 나가 없는 것이 아니다. 본래부터 네 몸에는 고정된 '나'가 없었다. 다만 사대(四大)가 잠시 모여 몸이라고 불렸을 뿐이다." 그는 이 가르침을 듣고 무아의 이치를 깨달아 아라한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는 "몸이 곧 나"라는 생각은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 몸, 내 얼굴, 내 손, 내 건강'이라고 말하며 몸을 곧 자기 자신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생각 해 보면 몸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어린 시절의 몸과 지금의 몸은 전혀 다르고, 오늘의 몸도 수많은 세포 가 죽고 새로 생겨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 "이것이 나"라고 집착합니다. 이 비유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묻습니다. "몸의 모든 부품이 바뀌어도 그대는 여전히 그대인가?" 이를 통해 몸 자체가 참된 자아가 아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둘째는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뜻은 "변하지 않는 독립적 실체로서의 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몸을 살펴보아도 나가 없고, 느낌을 살펴보아도 나가 없고, 생각을 살펴보아도 나가 없고, 의식을 살펴보 아도 나가 없습니다. 그저 여러 인연이 잠시 모여 "나"라고 불릴 뿐입니다. 마치 수레는 바퀴 · 축 · 몸체의 모임이고, 집은 기둥 · 벽 · 지붕의 모임인 것처럼 사람도 오온(五蘊)의 화합일 뿐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셋째는 큰 의심이 큰 깨달음의 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단순히 겁에 질린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는 진지하게 물었습 니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이 물음은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의심과도 통합니다. 자신을 당연하게 여기던 생각이 무너지자 존재의 근본을 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비구들이 "이 사람은 무아를 안다. 쉽게 제도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미 그의 집착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우리에게 묻습니다. "몸이 늙는 것을 왜 그토록 두려워하는가?" "몸이 아름답고 추한 것을 왜 그토록 따지는가?" "칭찬받는 나, 비난받는 나에 왜 그토록 집착하는가?" 몸도 마음도 끊임없이 변하는 인연의 흐름인데, 거기에 "이것이 영원한 나다"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 움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무아를 안다는 것은 "나는 없다."라고 허무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집착할 고정된 나가 없으니 더 자 유롭고 더 넓게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끝으로 이 비유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잠시 모인 것이며, 그 몸을 '나' 라고 집착할 때 괴로움이 생긴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이 몸은 내 것인가? 잠시 머무는 인연이요, 이 마음은 나인가? 기멸(起滅)하는 물결일세. 나라는 집착 놓으면 괴로움은 사라지리. 무아에 대한 이야기는 수도 없이 고구정녕(苦口叮嚀)하게 들었어도 돌아서면 몸뚱이를 붙잡고 나라고 집착하고 있으니, 우리의 습이란 여간해서는 떨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몸은 내 것이라 하나 잠시 머무는 인연이요, 마음은 나라 하나 찰나마다 변하는 흐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착하면 괴로움만 생길 따름입니다. 때문에 집착을 놓으면 괴로움은 사라지고 지혜의 빛은 더욱 밝아지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도 불보살님의 은은한 가피 속에 심신의 안정과 건강과 안전을 생각하며, 자애와 연민, 복과 지혜를 닦아 통찰지를 갖추고 정리를 따라 정심정행하며 모든 집착을 내려놓고 맑고 향기로운 만행일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_()_ _(())_ 향기로운 불교 _(())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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