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墓碑銘)
김광규
한 줄의 시(詩)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꿋꿋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詩人)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김광규 시선집 『안개의 나라』 ( 2018. 1 )에서
김광규 / 1941년 서울 출생. 서울대 및 동대학원 독문과 졸업. 1975년 계간 《문학과 지성》을 통해 등단.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에서 최근 『오른손이 아픈 날』까지 11권의 시집을 펴냄. 시선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누군가를 위하여』 외. 현재 한양대 명예교수(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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