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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외 / 도종환 시인의 시모음

작성자이서윤|작성시간26.06.11|조회수27 목록 댓글 0

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흔들리며 피는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곱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부드러운 시간

 

 

새로운 것은 유연하다

 

우듬지 제일 높은 곳에서

한 뼘 더 올라가는 잎은

강한 잎이 아니라

몸이 부드러워진 잎이다

 

내가 좋아하는 겨울 백양나무도

부드러운 이면을 지니고 있다

 

사나운 짐승들도 부드러운 시간에

서로 사랑한다

 

외피가 돌처럼 딱딱한 벚나무도

연분홍 꽃을 피울 때는 제 안에서

연한 마음을 꺼낸다

 

그대가 가만히 열리는 시간도

부드러운 시간이지 않은가

 

 

 

현자

 

누구에게나 배우는 자

그가 현자다

길에 핀 꽃에게서

초저녁 별에게서 배우는 자

어린 스승에게 배우는 자

 

 

 

바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건

이렇게 끝없이 물결치는 것

저 혼자 밀물이었다가

저 혼자 썰물이었다가

 

 

 

달팽이

 

우리도 달팽이처럼 카르마의 집 한 채 지고

아침마다 문을 나선다

등짐 때문에 하루가 휘청거리기도 하지만

짐에 기대 잠시 쉬기도 하고

이 짐 아니었으면 얼마나 허전할까 생각하면서

우리도 겨우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애벌레

 

꿈틀대던 애벌레의 날을 지나

몸부림치던 날을 지나

유연하게 날갯짓하며 날아가는

한 마리 나비 보아라

 

몸부림치는 동안만 희망이다

몸부림쳤기 때문에 희망이다

 

 

 

 

낙화

 

속수무책으로 꽃이 집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닙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그렇게 계시면 됩니다

이렇게 나지막하게 전하는

젖은 꽃잎의 말을

당신은 알아들었는지요

 

당신의 전인격이 배어 있는 자리

여기까지 당신의 생애를 절실하게 밀고 온

그 자리

 

 

 

파도

 

파도가 되어 밀어 올리고

물방울이 되어 흩어지자

소흑산도쯤으로 내려가서

수평선이 되자

그리도 우린 바다 아닌가

 

파도가 되어 한 시대를 밀어 올린 뒤

흔적 없이 사라지자

 

그 흔적 없음과 고요까지도

바다

바다 아닌가

 

 

 

벚꽃

 

오늘은 핑계 대고 조퇴하자

벚꽃이 십 리 가득 피었는데

이렇게 의자에 앉아 있는 건

내 인생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벗 하나 있었으면

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 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
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게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 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ㅡ강서구민회관(강서청소년회관) / 시낭송 수업시 매주 화요일 10:00 -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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