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은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_《현대문학》 (1955.9)
꽃을 위한 서시 /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의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 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_<문학예술>)(1957.7)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타령조 기타》(1969)
꽃의 소묘 / 김춘수
1
꽃이여, 네가 입김으로
대낮에 불을 밝히면
환히 금빛으로 열리는 가장자리,
빛깔이며 향기며
화분이며...... 나비며 나비며
축제의 날은 그러나
먼 추억으로서만 온다
나의 추억 위에는 꽃이여,
네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2
사랑의 불 속에서도
나는 외롭고 슬펐다.
사랑도 없이
스스로를 불태우고도
죽지 않는 알몸으로 미소하는
꽃이여,
눈부신 순금의 천의 눈이여,
나는 싸늘하게 굳어서
돌이 되는데,
3
네 미소의 가장자리를
어떤 사랑스런 꿈도 침범할 수 없다.
금술 은술을 늘이운
머리에 칠보화관을 쓰고
그 아가씨도
신부가 되어 울며 떠났다.
꽃이여, 너는
아가씨들의 간을
쪼아 먹는다.
4
너의 미소는 마침내
갈 수 없는 하늘에
별이 되어 박힌다.
멀고 먼 곳에서
너의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나의 추억 위에는 꽃이여,
내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너를 향하여 나는
외로움과 슬픔을
던진다.
_《현대문학》 1959년 8월호
내가 만난 이중섭 / 김춘수
광복동 光復洞 에서 만난 이중섭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_ 《현대문학(現代文學)》 1971년 1월호
김춘수/1922년 11월 25일- 2004년 11월 29일 (향년 82세)경상남도 통영시 동호동에서 출생했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3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학과 3학년에 재학 중 중퇴하였다. 경북대 교수와 영남대 문리대 학장, 제11대 국회의원,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 1945년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으며, 1946년 광복 1주년 기념 시화집 《날개》에 〈애가〉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구 지방에서 발행된 동인지 《죽순》에 시 〈온실〉 외 1편을 발표하였다. 1948년에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내며 문단에 등단한 이후, 〈산악〉, 〈사〉, 〈기(旗)〉, 〈모나리자에게〉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주로 《문학예술》, 《현대문학》, 《사상계》, 《현대시학》 등의 잡지에 작품을 발표하였고, 평론가로도 활동하였다. 초기에는 릴케의 영향을 받아 삶의 비극적 상황과 존재론적 고독을 탐구하였으며,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실을 분명히 지시하는 산문 성격의 시를 써 왔다. 그는 사물의 이면에 내재하는 본질을 파악하는 시를 써 ‘인식의 시인’으로도 일컬어진다. 시집으로 첫 시집 외에 《늪》, 《기》, 《인인(隣人)》, 《꽃의 소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김춘수시선》, 《김춘수전집》, 《처용》, 《남천(南天)》, 《꽃을 위한 서시》, 《너를 향하여 나는》 등이 있으며, 시론집으로 《세계현대시감상》, 《한국현대시형태론》, 《시론》 등이 있다. 이 외에도 《한국의 문제시 명시 해설과 감상》(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ㅡ파주문화원 시낭송반, 6월 16(화)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