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엄니의 남자 / 이정록
엄니와 밤늦게 뽕짝을 듣는다
얼마나 감돌았는지 끊일 듯 에일 듯 신파연명조다
마른 젖 보채듯 엄니 일으켜 블루스라는 걸 춘다
허리께에 닿는 삼베 뭉치 머리칼, 선산에 짜다 만 수의라도 있는가
엄니의 궁둥이와 산도가 선산 쪽으로 쏠린다
이태 전만 해도 젖가슴이 착 붙어서
이게 모자(母子)다 싶었는데 가오리연만한 허공이 생긴다
어색할 땐 호통이 제일이라, 아버지한테 배운 대로 헛기침 놓는다
"엄니 저한티 남자를 느껴유? 워째 자꾸 엉치를 뺀대유?"
"미친놈, 남정네는 무슨? 허리가 꼬부라져서 그런 겨"
자개농 쪽으로 팔베개 당겼다 놓았다 썰물 키질소리
"가상키는 허다만, 큰 애 니가 암만 힘써도
아버지 자리는 어림도 읎어야?
신파연명조로 온통 풀벌레 운다.
사랑 / 이정록
연초록 껍질에
촘촘 가시를 달고 있는
장미꽃을 한 아름 산다.
네가 나에게 꽃인 동안
내 몸에도 가시 돋는다.
한 다발이 된다는 것은
가시로 서로를 껴안는다는 것
꽃망울에게 싱긋
윙크를 하자
눈물 한 방울 떨어진다.
그래, 사랑의 가시라는 거
한낱 모가 난 껍질일 뿐
꽃잎이 진 자리와
가시가 떨어져 나간 자리, 모두
눈물 마른자리 동그랗다.
우리 사랑도, 분명
희고 둥근 방을 가질 것이다
희망의 거처 / 이정록
옥수숫대는
땅바닥에서 서너 마디까지
뿌리를 내딛는다
땅에 닿지 못할 헛발일지라도
길게 발가락을 들이민다
허방으로 내딛는 저 곁뿌리처럼
마디마디 맨발의 근성을 키우는 것이다
목 울대까지 울컥울컥
부젓가락 같은 뿌리를 내미는 것이다
옥수수밭 두둑의
저 버드나무는, 또한
제 흠집에서 뿌리를 내려 제 흠집에 박는다
상처의 지붕에서 상처의 주춧돌로
스스로 기둥을 세운다
생이란,
자신의 상처에서 자신의 버팀목을
꺼내는 것이라고
버드나무와 옥수수
푸른 이파리들 눈을 맞춘다
열매를 꿈꾸는 새 / 이정록
외발로 서있는 두루미며 백로들은
끝내 나무가 되라는 유언을 들은 게 분명하다
날갯짓마다 나뭇가지 비비는 소리 서걱거린다
외발로 서 있는 그들의 몸통은
무슨 단 하나의 필사적인 열매 같다
아직은 솜털도 못 벗은 풋것이라고
꽃잎 같은 부리를 열어 피라미며 미꾸라지
닥치는 대로 집어넣는다
열매를 흉내내기 전에는 한 송이 꽃봉오리였다는 듯이
벌 나비 수도 없이 들락거렸다는 듯이
노을 받은 커다란 열매들은
제 꽃잎으로 강물을 찍어 올려 닦고 또 닦는다
겨드랑이에 꽃잎을 묻은 채, 강물에
가느다란 밑둥치와 실 뿌리를 담그고 있는 아름다운 열매들
간혹 꽃 이파리를 물 속에 집어넣어
뿌리근처에 붙여보기도 하는
저 횃불 같은 열매들
끝내 숲이 되리라
울음소리에서 장작 타는 냄새 피어오른다
강 안개 속에는, 후두둑 후두두둑
열매 떨어지는 소리 그득하다
혈거시대 / 이정록
- 1993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1
어쩌다 집이 허물어지면
눈이 부신 듯 벌레들은
꿈틀 돌아눕는다
똥오줌은 어디에다 버릴까
집안 가득 꼴이 아닐텐데
입구 쪽으로 꼭꼭 다져 넣으며
알맞게 방을 넓혀간다
고추에는 고추벌레가
복숭아 여린 살 속에는 복숭아 벌레가
처음부터 자기 집이었으므로
대물림의 필연을 증명이라도 하듯
잘 어울리는 옷으로 갈아입으며
집 한 채씩 갖고 산다
벌레들의 방은 참 아늑하다
2
PVC 파이프 대림점 옥상엔
수많은 관들이 층층을 이루고 있다.
아직은 자유로운 입으로 휘파람 불고
둥우리를 튼 새들 관악기를 분다
아귀에 걸린 지푸라기나 보온 덮개 쪼가리가
빌딩 너머 먼 들녘을 향해 흔들린다
때론 도둑고양이가 올라와
피묻은 깃털만 남기고 가는
문명과 원시의 옥상으로
통이 큰 주인아줌마가 사다리를 타고 오른다
또 몇 개의 관이 땅 속이나 콘크리트 사이에서
우리들의 쓰레기나 소음으로 배를 채울 것이다
그리하여 관을 타고 온 것에는
새끼 잃은 어미 새 소리가 있고
회오리치는 바람 소리가 있고
도둑고양이 이빨 가는 소리가 뛰쳐나온다
피묻은 둥우리, 숨통을 막는
보온덮개의 질긴 터럭이
우리들 가슴에 탯줄을 늘이고,
PVC 파이프 그 어두운 총신들이
퀭한 눈으로 꼬아보고 있다
3
우리들의 가슴속에도
제 집인양 덩치를 키워온
수많은 벌레들 으쓱거린다
햇살 반대편으로 응큼 돌아눕는
그들과 우리는 낯설지 않다
코를 풀고 눈곱을 떼내며 아침마다
우리는 벌레의 집을 청소한다
그들의 방으로 채널을 돌리고 보약을 넣고
벌레의 집은 참 아늑하다
이정록 시인 /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198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와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림책 『똥방패』 『달팽이 학교』 『황소바람』 『나무 고아원』 『아니야!』 『어서 오세요 만리장성입니다』, 동시집 『콧구멍만 바쁘다』 『저 많이 컸죠』 『지구의 맛』, 청소년시집 『까짓것』 『아직 오지 않은 나에게』, 동화책 『십 원짜리 똥탑』 『미술왕』 『대단한 단추들』 『아들과 아버지』, 시집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동심언어사전』 『그럴 때가 있다』 등을 썼습니다.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박재삼문학상, 한성기문학상 등을 받았다.
**파주문화원 시낭송 수업시 (매주 화요일 15:00 - 1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