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가는 심지와 상한 갈대의 회복 - 리챠드 십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마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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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한 후에도 필요한 우리의 상(傷)함
회심 후에도 우리는 상함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한 상함을 통해 갈대는 자신이 참나무가 아니라 갈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갈대조차도 상함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 본성 속에는 교만의 찌끼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비에 의해 산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 상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약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보다 강한 그리스도인들이 흔들리고 상하는 것을 볼 때 너무 심하게 낙심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75절에서 베드로는 심히 통곡할 때 그는 그처럼 상해 있었습니다. 이 갈대는 그가 그렇게 상함을 받기 전까지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과신하고 있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신앙 위인들의 영웅적인 행동보다는 그들의 실패와 상함이 교회에 더 큰 위로를 줍니다.
이와같이 다윗도 상함을 입었습니다. 시편 32편 3-5절에서 다윗은 마침내 거짓 없는 영으로 자유로운 고백에 이를 수 있을 때까지 종일 신음했다고 말합니다. 아니, 시편 51편 8절에 의하면, 그는 그 자신의 감정 안에서 뼈가 꺾이는 정도의 극한 고통을 느끼기까지 슬픔을 겪었다고 말했습니다.
히스기야도 이사야 38장 13절에서 하나님께서 사자처럼 ‘그의 뼈를 꺾으셨다’고 호소하였습니다. 택하신 그릇인 사도 바울도 너무 자고해지지 않도록 그를 괴롭히는 사탄의 사자를 필요로 하였습니다(고후 12:7). p.38-39
-우리의 상함의 유익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함 위에 상함을 역사시키실 때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 가혹한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상함을 받으신’(사 53:5)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상함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을 어떻게 천국으로 데려가시는지에 대해 무지한 불경건한 영혼들은 심령이 상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좌절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롭고도 선한 일을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너무나 강퍅하고 고집스럽기 때문에, 한 사람을 그의 본성으로부터 은혜로 데려가는 것과 은혜로부터 영광으로 데려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p.39-40
-은혜 가운데 섞여 있는 부패, 그것이 그을음을 낸다
은혜와 함께 있는 부패가 연기를 낸다.
은혜는 시작이 미미할 뿐만 아니라 부패와 함께 섞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연기 나는, 꺼져 가는 심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은혜는 죄의 부패를 단번에 완전히 척결하지 않는다는 것과, 은혜가 시작된 후에도 어느 정도의 부패가 남아있어서 그리스도인 안에 갈등을 일으킨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가장 순결한 행동조차 그리스도께서 정결케 해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직무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 기도의 결점을 그리스도께서 용서해 주시도록 다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꺼져 가는 심지의 예(例)
연기 나는, 그리하여 꺼져 가는 심지의 예를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홍해에서 모세는 사면초가의 상황에 빠져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고 어느 쪽으로 나아가야 할지도 몰라 하나님께 신음하듯 기도했습니다. 분명히 이 상황은 모세에게 극심한 갈등의 상황이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에 빠지면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롬 8:26). 상한 심령을 가진 사람이 드릴 수 있는 기도하는 것은 탄식과 신음으로 가득 찬 기도일 뿐입니다.
다윗이 일부러 미친 척 가장하고 가드 왕 앞에 섰을 때(삼상 21:13)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은 다윗 속에도 약간의 불꽃이 남아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경험을 토대로 탁월한 시편 34편을 지었는데, 그는 18절에서 자신의 경험을 기초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또한 다윗은 시편 31편 22절 상반절에서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꺼져 가는 심지의 연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반절에서 “내가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렸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는 불꽃이 있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 8:25)라고 제자들은 다급하게 외쳤습니다. 여기에는 불신앙의 연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기도하도록 그들을 격려한 그런 위대한 믿음의 불꽃도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여기에는 불꽃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믿음 없는 것을 도우소서.”(막 9:24)라는 대목에는 연기를 볼 수 있습니다.
요나서 2장 4절에서 요나는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나이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에는 연기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그러할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에는 불꽃이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고 사도 바울은 자신의 부패함을 느끼며 탄식합니다. 그러나 곧 이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리게 됩니다.
아가서 5장 2절에서 교회는 “나는 잠들었노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어서 “그러나 나의 마음은 깨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계시록 2, 3장을 보면 일곱 교회는 그들이 발하고 있는 빛 때문에 ‘일곱 금촛대’라고 불리지만 그 교회 중에는 거의 대부분은 빛을 발할 뿐만 아니라 연기도 함께 내고 있었습니다.
2. 우리는 왜 꺼져 가는 심지가 되는가
이렇게 그리스도인 안에 불꽃과 연기가 함께 섞여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은혜’와 ‘본성’이라는 두 가지 법이 늘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상황에 두시는 특별한 목적은 우리의 본성이 쉽게 부딪쳐 넘어지기 쉬운 두 가지 암초인 안일함과 교만에서 우리를 지켜 내시고, 우리로 하여금 성화(聖化)가 아니라 칭의(稱義)에서 우리의 안전을 구하도록 만드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화는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오점이 있기 때문입니다.1)
우리의 영적인 불은 우리가 이 땅에서 흔히 보는 보통 불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의불은 그 모든 요소들이 완벽하게 순수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모하는 그 곳, 즉 우리가 거하기에 아주 적당한 하늘 나라에 우리가 들어가게 될 그 때에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은혜도 흠 없고 티 없이 순수해질 것입니다.
<적용 : 은혜만을 보고 교만해서도 안 되고, 부패만을 보고 낙담해서도 안 된다.>
이렇게 은혜와 본성이 서로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판단할 때, 어떤 때는 은혜의 역사를 보게 되고 어떤 때는 부패의 잔재를 보게 되므로 자신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게 됩니다.
부패의 잔재를 보게 될 때 그들은 자신에게는 은혜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의 계명들을 지키고 형제들을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사랑하는데도 감히 자기가 그리스도의 소유라고, 그리스도와 자신의 친밀한 관계를 확신 있게 주장하지 못합니다.
촛대 위에 있는 촛불이 때로는 빛을 발하지만 때로는 빛을 잃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때때로 자기 자신을 잘 이해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스스로 혼란에 빠지기도 합니다. p.6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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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자주 - “칭의는 (신자가) 범죄할 때 위로를 준다. 슬프게도 경건한 자들에게도 얼마나 흠이 많은가! 그들은 의무를 다 준행하지 못한다. 그러나 신자들은 자신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겸손해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절망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들의 의무나 은총으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들의 의무는 죄로 섞여있지만, 그들을 의롭게 하는 의는 완전한 의이기 때문이다.” - 토마스 왓슨의 『신학의 체계』중에서
-사람에 대한 그리스도의 넘치는 자비
만약 그리스도께서 자비하지 않으시다면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시 130:4)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들 위에 펼쳐 놓으신 사랑의 깃발 아래로 기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시 65:2)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지으신 그 영과 혼이 자기 앞에서 곤비하지 않도록’(사 57:16) 관용과 자애로운 돌보심을 베풀어 주십니다. 성경은 기록하기를 그리스도의 마음이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 그들이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마 15:32) 동정으로 가득 찼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우리의 영적인 기갈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시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본성과 인간의 부정한 본성 사이에는 반대 성향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을음이 조금만 나도 그것 때문에 불을 꺼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보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아주 하찮은 시작까지도 소중히 여기시고 지켜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미련한 제자들의 여러 가지 불완전함을 얼마나 잘 참아 주셨던가요?
만약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통렬하게 책망하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하신 것이며, 또 그들이 더욱 밝게 빛을 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구주로 소망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모본 이외에 어디에서 우리가 따라야 할 더 좋은 모본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p.72-73
-여린 초신자들을 다루시는 그리스도의 방법
마태복음 12장, 13장에서 우리의 복되신 구주께서는 연약한 사람들이 실족치 않도록 얼마나 주의하셨던가요! 바리새인들의 악의에 찬 비난에서 자신의 제자들을 어떻게 보호하셨던가요! 새 술을 낡은 부대에 담지 않도록(마 9:17),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하는 것처럼) 종교의 엄격함으로 초신자들을 쫓아내지 않으시려고 얼마나 주의하셨던가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면 그들에게 금식할 때가 올 것이고, 성령께서 그들 위에 임하시면 금식할 능력도 주어질 것이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헛된 일 때문에 여린 초신자들 괴롭히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탁월한 길을 그들에게 보여 주고 적극적인 목표를 가지고 그들을 양육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이렇게 하면 얼마 있지 않아 초신자들도 헛된 일들을 분별해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초신자들의 결점을 감추어 주고 어떤 실패들은 눈감아 주며, 그들의 성취를 칭찬해 주고 그들의 진보를 소중히 여기며, 그들 앞에 놓인 장애물을 제거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종교의 멍에를 훨씬 더 쉽게 짊어지도록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도와주며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즐겁게 섬기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린 초신자들은 그런 일들의 소중함을 깨닫기도 전에 그 일들을 역겨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대부분의 경우 그리스도께서는 여린 초신자들이 더 큰 기쁨으로 신앙을 고백하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우리가 ‘첫사랑’(계 2:4)이라고 부르는 그런 사랑을 초신자들 안에 심어주시며, 그들이 감당할 능력을 얻기 전까지는 절대로 고난을 겪도록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어린 묘목을 기를 때, 그것들이 뿌리를 잘 내릴 때까지 거친 날씨로부터 주의를 기울여 보호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이들을 향한 우리의 자비심이 깊어져서, 우리가 정당하게 누려도 좋은 우리 자신의 자유마저 부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연약한 사람들을 실족시킬 만한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실족하는 사람들은 ‘소자’(마 18:6)들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약한 사람들은 자칫하면 자신들이 무시된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매우 신중해야만 합니다. p.74-75
-목회자들에게 드리는 몇 가지 당부
<목회자들에게 드리는 몇 가지 당부, 여린 초신자를 목회할 대 필요한 부드러움>
1. 근거 없는 까다로운 기준을 만들지 마십시오.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목회자들이 매사에 너무 까다로운 나머지, 많은 탁월한 그리스도인들이 경험에도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은혜의 일반적이고 필수적인 증거로 만듦으로써, 본래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을 구원과 저주의 기초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이렇게 하면 사람들은 별 까닭도 없이,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낙심에 빠지게 됩니다. p.81
2. 애매모호하게 설교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들이 또 주의해야 할 것은 구름 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호하게 말하여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숨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숨기는 것이요, 진리가 제일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자신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진리는 벌거벗은 것과 같이 분명할 때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력한 것입니다.1)
복된 구주께서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입으셨을 뿐 아니라 말씀하실 때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을 사용하셨으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취하신 겸비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식이 많은 사람이었으나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유모같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살전 2:7).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자비의 정신은 그의 종들을 감동시켜 그들 또한 비천한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스스로 겸비해지도록 만듭니다.
세례 요한 이후로 천국이 침노를 당하는 것은(마 11:22) 영혼을 위로하는 진리들이 그렇게 쉽고도 분명한 방식으로 전파되어 사람들이 그것에 깊은 감동을 받고 천국을 얻기 위하여 거룩한 침노를 감행하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3. 헛된 논쟁으로 사람들을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호기심으로 가득 채우거나, 혹은 ‘의심하는 논쟁’(롬 14:1)으로 사람들의 지혜를 괴롭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그들의 주의를 흩트러뜨리게 되고 그들을 지치게 할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아무 일에도 관심을 두지 않도록 만들 것입니다.
기발한 논쟁들이 가장 풍성했던 시대의 교회는 종교적으로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인즉 사람들이 종교를 단지 매듭을 묶고 푸는 식의 지혜의 문제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종교를 이해한 사람들은 대개 가슴보다는 머리가 뜨거워지게 되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중요한 사항들을 의심하는 시대와 장소에 살고 있다면, 우리들은 그런 시대와 장소 속에서 견고하게 서기 위해서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의 사랑을 시험하시고 우리의 지체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의심하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의심을 한 다음에 확신하게 된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논쟁의 시대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영혼들을 견고하게 세울 수 있는 기초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일입니다. 이 때 (천국을 향한 순례길에 놓여진)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천국으로 가는 여정을 순탄하게 해 주는 것은 바로 사랑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쟁을 피한다는 핑계를 내세우며 우리의 반대 세력이 진리를 해치는 것을 묵과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와 인간의 영혼, 두 가지를 다 손쉽게 배신하게 됩니다.
4. 지나친 엄격함은 영혼을 위로하지 못합니다.
지나친 엄격함 때문에 곤경에 빠진 영혼에게 위로를 주지 못하고 돌려보내는 목회자들도 마찬가지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이런 태도를 가지게 되면, 많은 영혼들은 자신들의 슬픔을 토로하고 자신의 영혼을 쉬게 할 만한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을 얻지 못하여 결국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혼자 속병을 앓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푸신 것을 묶으려고 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께서 묶어 놓은 것을 풀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열쇠를 바르게 사용해야 좋은 결과가 생기는 법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위에 임하여 계시지 않는다면 자비와 엄격함의 경계선을 바르게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소망해야 합니다. ‘명철로 주소를 삼는 지혜’(잠 8:2)는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미덕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고, 진리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닙니다.
규칙과 사례는 늘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세밀하게 살펴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한다면 겉으로 보이는 유사한 조건 때문에 우리는 틀림없이 오판을 하게 될 것입니다. p.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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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자주 - “훌륭한 목적을 널리 확산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능한 한 그것을 쉽고도 일반적이며 완전히 이해되도록 전하는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을 내키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빛이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평이하게 전달 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 내용을 제대로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리챠드 백스터의 『참된 목자』 중에서
-권세
권세는 하나님의 위엄의 광채이기 때문에 인간의 위엄을 가장 적게 섞을 때 가장 힘 있게 발휘됩니다. p.92
-그들의 멸망이 우리의 책임이 될 때
생명을 잃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잔인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의 영혼에게도 잔인한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결국에 멸망할 것들을 우리의 행동 자체로는 막을 수는 없지만, 만약 우리가 타인의 영혼을 파멸시키기 쉬운 그런 행위를 했다면 그들의 멸망은 곧 우리의 책임이 될 것입니다. p.94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특별히 선악을 가릴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성급한 비판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p.95
-타인에 대한 우리의 관용
1. 다른 사람들의 약점보다는 장점을 보도록 하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약점을 캐기 위해서 지나친 호기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 속에서 성령께서 언젠가 소멸시키실 약점들을 찾아내어 그 사람과 우리 사이를 이간시키는 것보다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원한 것들을 보려고 애써서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전혀 관대하지 않게 대하는 것을 은혜의 능력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인즉 가장 위대한 사람들은 연약한 사람들의 결점을 기꺼이 용납해 주려고 합니다.
2. 거룩함과 온유와 경건의 뿌리는 그리스도
거룩함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온유함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온유함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과 다른 사람들의 유익에 대한 편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는 완벽한 거룩의 기질과 함께 위대한 온유함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위엄만 나타내시고 우리의 형상을 입으시기까지 겸비해지지 않으셨다면,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보다 더 거룩해지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하신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처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는 불쾌하고 그을음이 나는 영혼 속에 거하시기를 만족해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영혼에도 그와 같이 자비로운 기질을 불어넣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쑥이 아무리 쓰고, 식물이나 약초가 아무리 맛이 없다고 해도, 그것들 속에 있는 몸에 좋은 성분의 효험을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잘 참고 먹습니다.
(몸의 건강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우리가 약간 불쾌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유용한 장점과 은혜를 많이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불쾌하게 생각하는 바로 그 기질 때문에 그 사람들도 슬퍼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3. 육체를 입고 사는 한 완전할 수는 없는 우리 모두들
우리가 이 땅에서 머무는 동안에 은혜는 우리 영혼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은 완전하게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닐뿐더러 여러 가지기질에 매여 있는 육체 속에 거하게 됩니다. 육체의 이 기질들은 영혼으로 하여금 어떤 때는 이런 감정에, 어떤 때는 저런 감정에 휩싸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부처(Martin Buccer ; 스위스의 종교 개혁자)는 깊이 있고 온유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오랜 경험을 토대로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거절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의 이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가장 탁월한 그리스도인조차 순금에 미달하는 조금 가벼운 금과 같기 때문에, 그것이 금으로 유통되기 위해서는 우리 편에서 약간 눈감아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최상의 상태라고 여겨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 속에 결핍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을 우리가 사랑과 자비로 공급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종합 병원과 흡사합니다. 교회에 오는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씩 이런저런 영적인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지혜와 온유의 정신을 발휘해야 합니다. p.96-98
-한 알의 포도만 맺혔어도 포도나무임을 알 수 있음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힘을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보배로운 믿음은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가지고 있으며(벧후 1:1),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붙잡고 입는 것입니다. 연약한 손으로 귀중한 보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나무가 가시나무가 아니요, 포도나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몇 개의 포도알만 있으면 됩니다.
<은혜 언약이 가장 자비롭고 온유한 이유>
은혜를 더 필요로 한다는 것과 은혜가 전혀 없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 것도 스스로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은혜로 거저 주신 것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먼저 주시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기꺼이 열납하십니다.
“그 여인의 힘이 어린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 ......”(레 12:8)
복음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의 것이 됩니다. 그럼으로써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시며 연약하고 결점 많은 우리의 순종을 모두 받아 주십니다.
그렇다면 복음이야말로 가장 자비롭고 온유한 언약이 아닙니까? 우리는 지금 은혜 언약 아래서 사랑과 자비의 방식으로 하늘나라로 이끌어진 것입니다. p.103-104
-거룩한 빛’이 조금만 있어도
어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빛은 마치 번개와 같아서 홀연히 한 번만 번쩍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후에 그 사람들은 더 큰 어둠 속에 남아 있게 됩니다. 그들은 빛이 반짝이면 그 빛을 사랑하지만 그것이 자신들의 실체를 들추어내거나 자신들을 지도하려고 하면 그 빛을 혐오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3장 8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이르신 것처럼 거룩한 빛이 조금만 있어도 말씀을 지킬 수 있고, 종교를 버리지 않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끄지 않으실 심지에는 미약하지만 분별력이 있다.
이 불은 성질이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을 분해하며, 금과 찌끼를 분류하는 것처럼 사물들의 차이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 불은 영과 육을 나누고 자연에서 나온 것과 은혜에서 나온 것을 분별해 냅니다.
악한 행동이라고 해서 그 속에 악한 것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선한 행동이라고 해서 그 속에 선한 것만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광석 속에서 금을 찾아내는 것처럼, 하나님과 그의 성령께서는 광석과도 같은 우리 안에서 금을 찾아내실 수 있습니다.
육적인 사람의 마음은 마치 깜깜한 지하 감옥과도 같아서 아무 것도 알아볼 수 없고 오직 혼돈과 두려움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빛이 우리에게 비취면 우리는 하나님의 순결함과 우리 자신의 부정함을 더욱더 분명하게 보게 되고, 그 결과 분별력을 얻게 되고 겸손하게 되며 다른 사람들 속에서 행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p.112-113
-병은 싫은 것이지만, 그것은 살아 있기에 나는 것
사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그런 불평 자체는 죄를 싫어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 안에 죄를 반대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불평할 수 있습니까?
연기 속에서도 약간의 불씨를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어떤 것들도 그 자체로는 나쁘지만 그 안에서도 약간의 선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몸에 병이 생기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것들은 약해보이지만 겉보기에 선한 것들보다 오히려 더 선합니다.
악을 반대하는 일에 있어서 지나치게 격정적인 것은 비록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마땅히 감정을 느껴야 하는데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냉냉함보다는 훨씬 더 나은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예 흐리지 않는 물보다는 흙탕물이라도 흐르는 시내가 더 나은 법입니다. 겉으로 현명한 체하는 욥의 친구들보다는 오히려 온 몸에 병든 욥이 더 많은 은혜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약간의 약점 때문에 흠집이 난 행동들이 보속행위(complemental preformances)보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더 많이 입습니다. p.116-117
-우리 죄가 제거될 때까지 손을 거두지 않으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성화시키실 때, 비록 그가 우리 안에 이루신 일을 사랑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사랑하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서 죄를 제거하실 때까지, 심지어는 우리의 본성에서 그 죄의 존재를 제거하실 때까지 결코 자신의 손을 우리에게서 거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그 복된 몸을 성결하게 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매우 거룩한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합당하도록 우리를 점진적으로 정화시키십니다. 또 우리의 본성에서 죄를 소멸시키는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자비를 받아 누리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판단력과 정서를 자기 자신의 것과 일치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p.121
-위로를 가로막는 양심의 가책들을 제거하라
연약한 영혼들로 하여금 더 풍성한 위로를 얻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이 스스로를 공격하여 마음을 사로잡고 자신들을 침체시킬 수 있는 몇 가지 평범한 반론들과 은밀스러운 생각들을 극복해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익들을 몇 가지 더 다루고자 합니다.
적용 1 : 완전한 확신이 없다 하여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100퍼센트의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자신들에게는 믿음이 전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이 아무리 흠이 없다고 해도 그것은 어느 정도 연기를 내뿜기 마련입니다. 이와 같이 가장 선한 행동이라도 거기에는 연기 냄새가 나기 마련입니다.
마늘을 빻는 절구통은 언제나 마늘 냄새를 풍기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든 행동들은 어딘지 모르게 거듭나기 전의 옛 사람 냄새를 풍기게 되어 있습니다.
적용 2 : 행위가 약하다 하여 은혜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육체의 연약함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위가 연약하기 때문에 은혜가 소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그 영혼의 행동을 수행하는 도구인 그들의 정신이 쇠약해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속마음을 밖으로 표현하려고 갈망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여 한숨만 쉬는 사람들의 비밀스런 탄식을 돌아보신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돌보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포하신 분이시므로 몸소 가난한 사람들을 자비롭게 돌보실 것이 분명합니다.
적용 3 : 자연발생적 사악함으로 인해 낙심치 말라.
또 어떤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나타나는 환상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악하고 부정한 생각에 계속적으로 시달립니다. 이것은 윙윙대며 물려드는 파리처럼 그들의 평안을 깨뜨리고 그들을 괴롭힙니다. 이것들은 사탄에 의해 영혼 안에 순식간에 퍼뜨려집니다.
이것은 ① 부패한 본성도 이것들을 낯설게 여긴다는 것, ② 대단한 힘과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 ③ 부패한 본성도 이런 것을 불쾌히 여긴다는 점 등을 통해 식별할 수 있습니다.
1. 몇 가지 도움말
베냐민이 자기 부대(負袋)에 들어 있는 요셉의 은잔에 대해 책임이 없었던 것처럼 경건한 영혼도 이런 일들에 책임이 없습니다. 경건한 작가들이 내놓은 여러 가지 처방들, 즉, 우리 안에서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사악함들을 혐오하고 주의를 돌이켜 다른 일에 몰두하는 것 등의 여러 가지 대책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몇 가지 더 덧붙이자면,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그런 문제들에 대해 탄원하는 것과, 우리를 보호하시는 그의 날개 아래로 달려가 피하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우리의 공동의 적을 대항해 우리를 위해 싸워 주시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짓는 모든 죄와 신성 모독도 용서를 받는다고 하셨는데, 하물며 마귀가 우리 마음에 불어넣는 이러한 신성 모독적인 생각들이 용서받지 못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이런 종류의 시험을 다 받으신 것은 그와 같은 처지에 빠져 있는 가련한 영혼들을 돕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2. 그리스도와의 우리의 차이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우리는 서로 차이가 납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사탄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탄의 제안은 그의 거룩한 본성에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못했고, 마치 바다 한가운데 떨어진 불똥처럼 금방 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시험한 사탄은 그리스도에게 유혹을 제시했을 뿐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으며, 그리스도의 편에서는 그것들이 사악하다는 것을 파악하였을 뿐 조금도 범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제안한 것이 사악하다고 해서 우리가 죄를 지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악한 유혹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에게는 귀찮은 일이었고, 유혹한 사탄에게는 범죄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받으신 것은 갈등을 겪는 우리들을 동정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훈련시키셔서 자신이 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가진 영적인 무기를 사용하도록 만들기 위함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사탄을 이기실 수도 있었으나, 굳이 논쟁으로써 사탄을 이기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를 시험하려고 올 때, 사탄은 우리 안에서 자신과 연락하고, 정보를 주고받는 자신의 협력자를 발견합니다. 즉 우리의 본성 안에는 사탄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 선을 향한 어느 정도 동질의 적대감이 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생각은 행동의 씨앗, 사탄의 내통자가 우리 안에
이것 때문에 사탄의 시험은 거의 대부분 그 더러움으로 우리 영혼을 오염시킵니다. 그러나 시험하는 마귀가 따로 없더라도 우리 안에서는 사악한 생각들이 자생적으로 생겨납니다. 외부에서 아무런 자극이 없어도 우리 내부에는 죄를 생산해내는 공장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영혼이 이런 생각들을 품게 되어 그 안에서 어떤 사악한 즐거움을 얻는다면, 그것은 영혼에 더 무거운 죄책감을 남기고 하나님과의 달콤한 교제를 방해하며 우리의 평안을 깨뜨리고 영혼 속에 정반대의 기호를 심어 주어 마침내는 더 큰 죄에 빠지게 만듭니다.
부끄러운 모든 범죄들도 처음에는 생각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나쁜 생각들은 악한 도둑과 같아서 창문으로 슬그머니 들어와 우리 마음의 문을 더 활짝 열어 놓습니다. 생각은 행동의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런 악한 생각들이 사탄에 의해 힘을 얻으면, 선량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수난을 당하게 됩니다.
본성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해서 무죄한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에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생각들은 본성에서 자연적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괜찮다고 하는 어떤 복사들의 위로는 옳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 받은 우리의 본성 속에서 처음부터 그런 것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호흡을 불어넣어 주신 우리 영혼은 처음에는 그렇게 불쾌한 것을 내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로 그 정체를 드러낸 우리 영혼은 이제는 죄악 된 상상들을 뿜어내고 그런 불꽃을 용광로같이 피워내는 것이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본성에 너무 깊이 뿌리를 내렸고 전반적으로 퍼져 있다는 사실이 우리 본성의 부패를 더 뿌리 깊은 죄악으로,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3. 본성의 부패 때문에 지친 마음의 두 가지 반응
죄의 전체적인 넓이와 깊이를 알게 되면 우리는 더 겸손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겸손해져도 우리의 현재 본성이 새롭게 되지 않는 한, 우리의 본성은 악한 생각이라는 불행한 열매를 계속 맺어가며 다음과 같이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우리만 이런 게 아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시험에 들었을 때 생각하는 것처럼, 자기들의 형편은 다른 사람들의 형편과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고 거의 절망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 나처럼 더러운 본성을 가진 사람도 없을 거야!’
그러나 이는 원죄의 전파를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더러운 것에서 더러운 것 말고 무엇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물에 비취이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취느니라”(잠 27:19).
은혜가 이런 일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것은 아닙니다. 사탄이 우리를 괴롭힐 때 했던 것처럼, 이럴 때에도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스도께 나아가 우리의 어려움을 하나도 남김없이 털어놓는 것이며 사도 바울과 함께 이렇게 외치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곤고한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토로한 다음에 곧 위로를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25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감사의 찬양을 터뜨린 것입니다.
4.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 :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함
여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악취가 나는 사망의 몸을 더 많이 미워해야 한다는 것과, 저 거룩한 시인이 ‘우매 무지한 생각’(시 73:22) 후에 하나님을 다시 찾았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근본적 부족을 자각하는 마음이 기도의 무릎을 꿇게 한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하여 아침이면 천상의 묵상으로 단장하고, 좋은 것들을 마음에 축적하여 우리의 마음이 좋은 보물 창고가 되게 하며, 그리스도께 성령을 구하여 저주받은 생각들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고 우리 안에 좋은 생각을 솟구쳐 내는 살아 있는 샘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고자 하는 거룩한 사람들이 이 세상의 일반적인 오염을 피한 후에도 그들의 품위를 가장 미천하게 떨어뜨리는 것은 바로 영혼에서 흘러 나오는 이 더러운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순결한 영이신 하니님과 정반대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이런 것들을 지독하게 싫어한다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이것들 때문에 영혼은 모든 영적인 훈련과, 경계와, 하나님과 더 가깝게 동행하는 것과 한 차원 높은 성질의 것들을 생각하는 데 돌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사역, 성도의 교제, 경건의 신비, 주님의 위엄에 대한 생각, 그리스도인의 탁월한 상태에 대한 생각, 그리고 이런 것에 합당한 삶의 방식들이 그런 작업을 더욱더 풍성하게 해 줍니다.
우리 영혼에서 늘 더러운 것들이 흘러나온다는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매일매일 죄를 씻어 주고 용서해 주는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필요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여 가장 훌륭한 신자라 할지라도 자주 무릎을 꿇고 기도하도록 만듭니다.
5. 가장 큰 위로 : 주님께서 단 번에 물리쳐 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중요한 위로는 우리의 복된 구주께서 잠시 사탄의 무례함에 자신을 내어주신 후에 곧 사탄에게 물러가라 명령하신 것처럼(마 4:10)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때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향해 물러가라고 명령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 한 마디면 사탄은 바람처럼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때가 되면, 그는 우리 마음 속에 나오는 반항적이고 사치스런 감정의 풍랑도 엄히 꾸짖으실 것이고, 우리 속 사람의 모든 생각들을 자신에게 복종시키실 것입니다.
적용 4 : 전보다 부패한 모습을 더 많이 본다고 놀라지 말라
어떤 사람들은 이전의 모습보다 더 많은 부패의 연기가 자기 자신들을 괴롭히기 시작하면 자기들의 상태가 이전보다 더 악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부패의 모습이 이전보다 더 많이 나타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부패의 정도는 이전보다 훨씬 덜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죄를 더 많이 보면 볼수록 우리는 죄를 더 많이 혐오하게 되므로 결국 우리의 부패는 덜하게 됩니다. 태양이 빛나기 전에도 먼지는 방안에 있었습니다. 단지 햇빛이 비취면 그것이 눈에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먼지가 보인다고 해서 방이 이전보다 더 더러워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반대되는 것들은 서로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둘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해집니다. 그런데 서로 적이 되는 모든 것들 중에서 육체와 영혼은 서로 가장 가까이에 붙어 있습니다. 둘 다 중생한 사람의 혼(soul) 안에, 또 영혼의 기능 안에, 그리고 그런 기능들에서 파생되는 모든 행동 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의 좌소(坐所)인 영혼이 그 자체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이 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셋째로, 은혜가 더할수록 영적인 생명도 풍성해지고 영적인 생명이 풍성해질수록 반대되는 것에 대한 적대감도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패를 가장 잘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생기 있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사람이 육체적 방종에 자신을 방임할 경우, 그는 자신의 부패 때문에 고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무 것에도 매여있지 않고 아무 것에도 구속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단 은혜가 그들의 터무니없이 방탕하고 난폭한 행동을 억누르기 시작하면 육체는 구속을 받기 싫어서 노발대발 반항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나아진 것입니다.
연기의 불편보다 불의 편리함을 생각토록
횃불 속에서 연기를 내는 물질은 불을 붙이기 전부터 거기 있었습니다. 그러나 횃불이 점화되기까지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만약 연기가 나서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준다면 그것 자체가 불이 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는 것보다 차라리 연기가 날지라도 불의 혜택을 누리는 편이 훨씬 더 낫습니다. 연기가 제아무리 불쾌하다고 해도 연기 때문에 생기는 불편함은 불이 주는 편리함보다 크지 않습니다. 연기는 우리의 마음에 은혜의 진리가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비록 연기가 갈등의 상황 속에서는 거추장스러울지라도 우리에게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는 위로가 됩니다.
나중에 위로를 잃는다 하더라고 지금 당장 마음을 편하게 하겠다고 부패함에 굴복하는 것보다 지금 우리의 부패함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는 편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부패함 때문에 기분이 울적한 사람들은 이 본문을 양식 삼아 자신들을 위로하도록 하십시오. p.122-132
-우리에겐 늘 케케묵은 골동품 냄새가 나는 법
우리는 선한 행동에 붙어 있는 결점 때문에 선한 행동 자체를 꺼려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보실 때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소멸시키려고 하시는 악함보다는 자신이 간직하고 싶어하는 선함을 더 귀하게 보십니다.
또 몸이 아픈 사람은, 음식을 먹는 것이 자신의 병세를 조금 악화시킨다 해도 신체가 병에 대한 저항력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습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죄가 우리의 행하는 일에 달라붙을지라도 우리는 그 행동을 계속하도록 합시다. 우리 주님은 매우 선하신 분이시므로, 우리가 더 많이 싸우면 싸울수록 우리를 더 많이 용납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선한 열매들은 늘 케케묵은 골동품 냄새가 나는 법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그 선한 열매들을 맛보시기를 즐거워하십니다. p.133-134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약한 기도를 들어 주시는 이유
불안으로 가득 찬 마음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를 과연 들어 주실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기도도 들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것을 받아 주시고 우리의 것은 용서해 주십니다. 요나는 죄책감에 짓눌려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했고(욘 2:1),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낙심하지 말도록 합시다.
야고보 사도는 위와 같은 반론을 야고보서 5장 17절에서 해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만약 내가 엘리야처럼 거룩하지 않다면 내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라고 말합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바라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시 50:15)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
우리의 기도가 아무리 미약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고 우리의 기도가 양자의 영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②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 우리의 기도가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하나님께 드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거기에 자신의 향을 섞으십니다(계 8:3).
그러므로 우리가 흘리는 눈물 한 방울도, 우리 입에서 흘러나온 거룩한 한숨 한 마디도 그냥 버려지지 않습니다.
은혜는 사용할수록, 기도는 하면 할수록 풍성
모든 은혜는 그 은혜를 사용할수록 더 풍성해집니다. 기도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은혜로우신 구주가 계시므로 우리는 다른 모든 거룩한 의무들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우리를 낙심시키는 영을 참으로 주의해야 합니다.
받은 바 은혜에 따라, 할 수 있는 대로 기도하고, 할 수 있는 대로 듣고, 할 수 있는 대로 노력하고, 할 수 있는 대로 실천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의 소유를 은혜로운 눈으로 바라보실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못한다고(롬 7:19) 자신의 결점을 고백한 사도 바울이 두 손을 내려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까? 빌립보서 3장 14절을 보십시오. 그는 분명히 행동했습니다. 즉 그는 푯대를 향하여 좇아갔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무한히 은혜로우신데,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잔인해지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우리 안에서 발견되는 작은 은혜에 대해 감사하자
우리 안에 소원을 두시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즐거운 뜻을 따라 모든 일을 정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 안에서 비록 작은 능력을 발견하더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받은 바 은혜의 양에 아주 만족해하는 사람은 분명히 온유한 심령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모습에 마냥 만족해하며 더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실하게 노력해도 우리가 소망하는 만큼 성장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뒤떨어진다고 해도 우리의 위로를 위해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꺼져 가는 심지를 결코 끄지 아니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전에 말한 것처럼 성장을 향한 노력에 진실함과 성실함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완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왕기상 14장 13절에서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아비야가 하나님을 향해 품었던 얼마 안 되는 분량의 선한 뜻을 기억하시며)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서 저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막 4:24).
비록 연약한 믿음이지만
진실한 믿음으로 당신을 믿나이다.
가냘픈 사랑이지만
참된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연약한 노력이지만
참된 노력을 기울이나이다.
비록 연기가 날지라도
작은 불도 틀림없는 불이 아니옵니까?
원수이던 나를 당신의 소유물로 삼으시기 원해
나를 당신의 언약으로 이끌어오신 당신이신데,
내 연약함 때문에 나를 쫓아내시겠나이까?
그 연약함들은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만큼
나 자신에게도 깊은 슬픔이 되는데도 말입니다. p.135-139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와 낙담에 사로잡힐 때도 열심히 의무를 다하라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도 의무를 수행해야만 하는지를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가지 말한 것들에 몇 가지만 추가해서 언급하면 이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될 것입니다. 만족할 만한 해법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의무를 쉬면 만회하기 어려운 손해가 옴
본래 우리의 마음은 자유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좀처럼 의무의 멍에를 메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무가 영적이면 영적일수록, 우리 마음은 그것을 더 불편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의무를 게을리 하면 예외 없이 부패가 번성하게 됩니다. 우리가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마치 물결을 거슬러 노를 젓는 것과 같아서, 마음이 게을러져서 노 젓기를 한번이라도 쉬면 나중에 세 번 힘껏 저어도 한 번 쉰 것을 다 만회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의무에 바짝 매어 두고 우리 마음이 의무를 피하기 위해서 그럴듯하게 제시하는 핑계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2. 의무를 수행할 때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우리가 의무를 수행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당신 자신의 협력자에게 힘을 더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의무를 수행할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과, 힘이 강해지는 것과,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어 점차적으로 우리가 천국에 있는 것처럼 될 때까지 우리를 고양시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를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내시고, 그 역사의 모든 영광이 모든 능력의 소유자이신 당신에게 있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 가끔씩 우리의 내키지 않는 마음을 기쁘게 사용하십니다.
3. 내키지 않을 때 하는 순종이 참 순종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도 오직 순종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의무를 수행할 때 그것이 가장 분명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제사가 불완전할지라도 거기 담겨진 순종은 열납 되는 법입니다.
4. 의무를 수행할 때 회복되는 영혼의 감정과 자유로움
부패한 우리 본성에서 배설물처럼 생기는 이런 내키지 않는 마음이 지금 당장은 방해물이 되지만 나중에는 그만큼 매우 큰 위로를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영혼의 감정과 자유로움은 의무가 시행될 때까지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마치 업적이 있는 후에야 보상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의무를 수행하는 중에, 그리고 의무를 수행한 다음에 우리는 우리가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한없이 기다려야만 하고 그래도 얻지 못했을 하나님의 임재라는 놀라운 경험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요한복음 3장 8절에서 말씀하시는 바, 자신의 마음대로 영혼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자유를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단지 바람을 타지 못하고 사실상 물결을 거슬러 노를 저어 가야만 하는 그러한 영혼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항해할 때 선원의 손은 선미(船尾)에 있어야 하지만 눈은 별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처럼,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아주 작은 힘을 마땅한 의무에 쏟아부으면서, 자유롭게 역사하실 뿐 아니라 시의적절하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1>
이런 의무를 수행할 때는 영혼도 필요하지만 육체도 필요하기 때문에,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잠깐 의무를) 쉬는 것도 가능합니다. 칼을 가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아닙니다. 꼭 필요할 때 그 칼을 쓰기 위한 것입니다.
<주의 2>
갑작스런 격정을 느낄 때는 영혼을 안정시키고 영혼의 기능들을 조화시키기 위한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무엘상 16장 16,17절에 보면 사울은 번뇌하는 정신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수금 연주를 필요로 했습니다.
5. 대기만성(大器晩成)의 법칙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성급함 때문에 고난을 당할 때, ‘아! 나는 그러한 고난을 결코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낙담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 속에 두신다면 그 고난 속에서 반드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고 우리를 정금과 같이 연단하신 후에 반드시 우리를 그 고난에서 건져 내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고난 속에서 잃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더러운 찌꺼기일 뿐입니다(슥 13:9).
-우리의 짐이 무거울 때 어깨를 빌려 주시는 성령
물론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가장 작은 고난이라도 견뎌 낼 수 없으나 성령의 도움을 힘입으면 가장 큰 시련이라도 능히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우리 연약함을 싫어질 수 있도록 자신의 어깨를 우리에게 빌려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 37:24).
야고보는 야고보서 5장 11절에서 너희가 욥의 연대를 들었고“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우리는 욥의 성금함도 들어서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자비롭게 간과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그렇게 대우하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전염병의 유행 등과 같이 하나님의 진노의 손 아래 직접적으로 처해진 아주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그 때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침상 옆에 은혜의 보좌를 베푸시고 우리의 눈물과 한숨을 다 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6. 성찬을 받을 때 내키지 않는 마음이나 낙심이 드는 경우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내키지 않는 마음과 낙담이라는 측면에서 성찬을 살펴보자면, 성찬은 천사들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완전한 사람들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은 그리스도를 위해 주신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성찬은 죄악 되고 불신하는 마음으로 진리 자체를 의심하기 쉬운 우리들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에게 많은 귀중한 약속들을 남겨 주시는 것으로 만족해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강하게 해 주시겠다는 보장까지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만큼 성찬에 참여할 준비가 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히스기야가 그랬던 것처럼 다음과 같이 기도하도록 합시다.
선하신 여호와여! 사하옵소서!
결심하고 하나님,
곧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아무 사람이든지
비록 성소의 결례대로 스스로 깨끗케 못하였을지라도
사하옵소서!(대하 30:18,19)
그렇게 하면 우리는 편한 마음으로 이 성례에 참여하게 되고 많은 유익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의무들을 큰 즐거움 속에서 행하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부패를 혐오하고 그것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다면 우리들의 부패는 더 이상 우리들의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죄를 짓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7)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뻐하지 않는 것은 결단코 우리를 해롭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하고 소망하며 노력하는 바로 그것을 기준으로 우리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 소망은 소망하는 것들의 실상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대로 우리는 될 것이고 우리가 정복하고 싶어하는 것을 우리는 정복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시 145:19).
소망이란 소망하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이 세상 일에 있어서 누군가 우리를 조금만 격려해 주면 우리는 얼마나 큰 열심을 내는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도움을 베풀어 주시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마지못해 하는 본성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는 일이 거의 없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요!
7. 낙담의 진원지는 어디인가?
<질문>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을 그토록 낙담시키는 것은 무엇에서 비롯됩니까?”
<대답 1> 성부 하나님은 낙담의 진원지가 아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낙담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언약 안에서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시 103:13), 또 아버지로서 우리의 연약한 노력을 받아 주시기로 굳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부족한 것이 있으면 그의 은혜로운 관대함 속에서 얼마든지 얻어 가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그의 은혜를 영화롭게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의 더 완전한 의무 수행만큼이나 기뻐하십니다.
<대답 2> 성자 그리스도는 낙담의 진원지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낙담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의 직무는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상황과, 연약한 지체, 그리고 약점들, 아니 훨씬 추악하고 불쾌한 타락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랑의 가장 좋은 열매를 베풀어 주시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첫째로, 겉으로 나타나는 어떤 탁월함을 기준으로 삼아 하나님의 사랑을 측정하는 육체의 교만함을 부끄럽게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둘째로, 자신의 은혜의 자유와 군주적인 특권을 과시함으로써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도록’(고전 1:31) 하시는 것입니다.
-부족하고 흠 있는 사람들을 택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 11장에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을 기록하셨는데, 그 중에는 라합, 기드온, 그리고 삼손 등이 믿음의 조상이자 아버지인 아브라함과 함게 기록되어 있습니다(히 11:31).
우리의 복된 구주께서는 아버지의 형상이시기 때문에 이런 일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복음의 신비를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고 칭송받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타나내신 일에 대하서 하나님께 감사드리셨던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자기 시대 사람들 중에서 이성을 거의 전혀 사용할 수 없었던 어떤 어리석은 사람에 대해서 말한 것을 기억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해진 모든 모욕은 잘 참아 냈지만 종교를 경외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에 행해지는 모욕이라면 눈꼽만큼도 참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은 신성모독을 하던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려고까지 했는데, 이런 일이라면 자기의 총독이라도 봐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어떤 부류의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돌보심을 받을 자격이 없을 정도로 비천하지 않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을 선택하시고 자신의 은혜를 높이시기를 기뻐하실 때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리 천한 지혜라도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대답 3> 성령 하나님은 낙담의 진원지가 아니다
성령께서도 우리를 낙담시키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약점을 돕는 분이시고 직무상으로는 위로자이시기 때문입니다(롬 8:26). 성령님께서 죄를 깨닫게 해 주시고 그렇게 하여 우리를 낮추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우리를 위로하시는 자신의 직무를 보여 주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대답 4> 낙담의 진원지는 바로 사탄과 우리 자신이다
그렇다면 낙담이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의무를 싫어하도록 꾸준히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사탄과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p.140-148
-무지함으로 낙심된 사람들을 위한 처방전 세 가지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은혜 언약 아래서 누리고 있는 편안한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무지 때문에 그들은 지나치게 낙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1.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시키지 못함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시키지는 못합니다. 아내가 연약하다고 혼인 언약을 깨뜨리는 남편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를 버리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든 남편들에게 사랑의 모범이 되어 주신 그리스도보다 우리를 더 자비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2. 하나님께서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더욱 가까이 하심
우리의 연약함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가로막지 않으며, 오히려 그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가까이 하십니다(시 78:39 저희는 육체 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 자비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과부의 재산 중의 일부입니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호 2:19).
남편은 자기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벧전 3:7)으로 알아 귀하게 여겨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랑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세워 주신 이 규범을 스스로 어기시면서 자신의 연약한 배필을 참아 주지 않으실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심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지 않는다면 그를 섬길 민족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우 연약하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나 우리가 악의를 품고 하나님을 적대시하거나 진리를 훼손하는 사람들이 아닌 한, 우리를 낙심히키는 생각들에 굴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자비로운 구주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p.150-151
-연약함의 네 가지 종류와 연약을 발견할 때의 반응의 순서
1. 연약함의 네 가지 종류
우리가 아무런 근거 없이 자화자찬으로 우리 자신을 기만하지 않기 위해서, 연약함이 다음의 여러 가지 종류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① 우리의 가장 선한 행동들에 달라붙어 있는 불완전함.
②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을 때,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륜이 짧아서 하게 되는 그런 행동들.
③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전혀 몰라서 생기는
것들.
④ 갑작스런 시험이 먹구름처럼 밀려와 우리의 판단을 흐릴 때, 우리의 일반적인 경향이나 목적과는 반대로, 고의적이지 않지만 갑자기 돌발적으로 불거져 나오는 것들입니다.
2. 연약을 발견할 때의 반응의 순서
이런 연약함을 발견한 다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반응합니다.
① 제일 먼저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식하게 됩니다.
② 그 다음에 우리는 그것 때문에 슬퍼합니다. 그리고 나서
③ 슬픔이 불평으로 변합니다. 그런 다음에
④ 우리는 불평하면서 우리 자신을 개혁하기 위해 사력을 다 기울여 노력합니다. 그리고
⑤ 그렇게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의 부패함을 어느 정도 극복하게 됩니다.
연약함을 이와 같은 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그것들이 오히려 겸손의 이유가 되며, 그것이 비록 우리가 매일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설 수 있게 됩니다.
연약함이 있다고 해서 선행이 아예 사라지거나 하나님께 전혀 용납되지 못할 정도로 선행이 오염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허약함을 변명하며 정당화하는 것은 연약함보다 더 나쁜 것이며 연약함 속에 그냥 주저앉는 것은 연약함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악을 정당화시키면 입술은 봉해지게 되며, 그 결과 영혼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유로움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하고,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여 평안을 되찾을 때까지는 하나님과의 달콤한 교제를 즐길 수 없게 됩니다.
죄로 인해 상처를 받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넘어져도 곧 다시 일어섭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눈길 한 번에 회개하고 회복되었습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말을 듣고 자신을 즉시 돌이켰습니다.
그러나 도둑이나 부랑자에게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해보십시오. 그는 당신의 말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의 목표는 옳은 길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소욕에 도움이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p.151-153
-우리가 위로를 얻기 위하여 알아야 할 것
우리가 위로를 얻기 위하여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단지 사소한 죄악들만을 위해 중보자라는 위대한 사역에 임명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그를 붙들 만한 진정한 믿음이 한줄기 불꽃만큼이라도 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태산(泰山)같은 죄악을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 중보자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 상한 갈대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이런 은혜에서 제외시키지 않으시므로, 그 사람 자신도 자기 자신을 은혜를 받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
도대체 왜 우리는 이렇게 은혜로운 성향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가난한 까닭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우리의 부유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혹의 시기에 사탄을 믿지말고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대 눈에
그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진리, 그 자체를 믿으라!
거짓말하는 원수,
생명을 죽이는 마귀의 말에는
그대, 귀를 막으라! p.158
-그리스도의 탁월한 인자함
1.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탁월하게 존재하는 인자함
남편, 아버지, 형제, 통치자들에게 걸맞게 나누어져 있는 모든 인자함은 다만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한 줄기 광채일 뿐입니다. 완전한 인자함은 그리스도 안에 가장 탁월한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타락으로 우리의 형상은 일그러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자녀 속에서 결점보다는 자기와 닮은 점을 더 귀중하게 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안에서 자신의 형상을 볼 때마다 우리를 사랑할 이유를 발견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자신의 형상을 보십니다.
-비록 병들었을지라도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의 지체
우리는 병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몸의 지체가 병들고 약하다고 자기 몸의 지체를 무시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 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머리가 몸의 다른 지체들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잊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우리의 것이므로 우리는 곧 그의 충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산함을 더 자유롭게 전달하시기 위해 인간의 본성을 자기 자신에게 아주 가까이 연합시키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최상의 상태에 있을 때 우리의 본성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형상이 미천해져서 본성적이고 전체적인 약함에 꽁꽁 얽매여 있을 때 그러한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습니다.
2. 혐오해야 할 사탄의 상투적 무기 ; 의심
그러므로 의심하는 모든 생각들을,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마 4:6)라고 하며 질투심으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애썼던 그 저주받은 영이 우리 안에 던져 넣은 것이나 보존해 온 것으로 여기고 그것들을 혐오하도록 합시다.
사탄이 매일 연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베풀어 줄 매우 부드러운 사랑이 없는 것처럼, 우리 안에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우리와 성자 예수님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첫 조상 아담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들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태초부터 마귀의 일입니다. 그 때 성공해서 재미를 본 마귀는 지금도 같은 무기로 우리를 공격할 만반의 준비를 해 놓고 있습니다.
<반론> 그러나 꺼져 가는 심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그렇게 자비하시다고 느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나에게 그리스도는 나를 대적하는 원수처럼 보입니다. 나는 그분이 나를 정말로 불쾌히 여기신다는 증거들을 확실히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대답>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요셉이 자기 형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잠시 동안 우리에게 원수처럼 행동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좀 더 적당한 때가 오면 자비로운 분으로 행동하시기 위한 사전 준비일 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가장 깊은 속마음을 오랫동안 우리에게 숨기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치 야곱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와 씨름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감추어 두었던 힘을 공급해 주시고 마침내 이기도록 하십니다. 믿음은 그분의 얼굴에서 베일을 벗겨 내고 대적되는 얼굴 아래 숨어 있는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발견하게 합니다. p.160-162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죽자!
당신 자신을 그리스도의 품 안에 던져 버리십시오. 만약 당신이 죽는다면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죽도록 하십시오.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반드시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비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 곳은 바로 그리스도의 품이기 때문입니다. p.165
-우리의 고통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는 까닭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가 무엇이며 그의 아들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기 위해서는, 그의 아들이 받아 마셨던 그 잔을 우리도 맛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 잔의 찌끼까지 다 들이마셨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쾌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조금 맛보게 하실 때, 우리가 그것 때문에 완전히 실족하지 않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도와 주실 것이란 사실도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고 슬픔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스도께서 절망에 빠지셨습니다. p.167-168
-참 소망과 거짓 소망
모든 소망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이끌어 가기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은 소망은 모두 거짓된 위로일 뿐입니다. 그 소망 자체가 거짓이든지 아니면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이 거짓이든 둘 중의 한 가지입니다. p.170
-진정한 평화는...
진정한 평화는 굴복할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정복할 때 생기는 법입니다. 본문이 주는 위로는 더 나아지기 위해 기꺼이 노력하지만 자신들의 부패함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p.180
-은혜는 우리 본성을 묵살하지 않고 변화시킴
그리스도의 통치의 질서가 심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사람의 영혼에 알맞으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독특한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보존하고 싶어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심판을 통해서 행하시는 일들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은혜가, 본성이 은혜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전제하듯이 은혜의 구조도 사람 안에 있는 본성의 구조를 그대로 보존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심판을 통해서, 그것도 아주 달콤한 방식으로 영혼 속에 모든 선한 것을 가져오십니다. 이렇게 하시는 까닭은 많은 사람들이 엉뚱하게 착각하여 그들 속에 존재하거나 그들에게서 나오는 선(善)이 은혜의 강력한 역사로부터 나오지 않고 그들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악을 행할 때, 사탄은 우리의 본성의 흐름을 따라 우리를 아주 교묘하게 주도해 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탄이 자기들의 죄에 전혀 관계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실수는 별로 위험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래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탄이 하는 일이라고는 우리 안에서 그가 발견하게 되는 악을 조장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영적인 선의 씨앗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발견하시는 것이라고는 오직 적대감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본성 안에 영적인 선을 각인시켜 주시고, 그럼으로써 우리 마음이 우리가 선하다고 판단하는 것들로 기울어지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선한 것을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여 주시면, 우리는 그것으로 기울어집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악한 것의 악함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면, 우리는 이전에 그것을 거리낌없이 포용했던 것처럼 이제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것을 혐오하게 됩니다. p.210-211
-오늘의 작은 승리는 장차의 궁극적 승리의 징표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
우리가 어떤 유혹이나 부패를 이긴다는 것은 마지막 승리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 여호수아가 자신이 정복한 다섯 왕의 머리를 발로 짓밟으면서,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수 10:25)라고 말했듯이 천국은 이미 우리의 소유입니다. 다만 지금 우리는 그것을 완전하게 소유할 때까지 그 것을 얻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p.222
-결국에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승리
전체적인 교회에 대해서 말한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전한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산에서 나온 작은 돌’(단 2:35)인데, ‘태산을 이루어 온 세상에 가득할 때까지’ 모든 반대 세력인 ‘우상을 쳐서 부숴뜨린, 손대지 아니한 그 작은 돌’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대적하고도 살아 남으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모든 것은 그 앞에 평탄하고 낮아질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산들과 높아지고 교만해진 생각들을 낮추시고 모든 육체의 교만을 낮추실 것입니다.
겨가 바람에 날려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칠 때, 그루터기가 불과 싸울 때, 발뒤꿈치가 송곳을 찰 때, 토기가 토기장이와 다툴 때,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을 거스려 다툴 때, 승리가 어느 편으로 돌아갈 것인지는 명명백백한 일입니다.
폭풍이 그리스도께서 타고 계신 배를 흔들 수는 있지만 전복시킬 수는 없는 법입니다. 파도가 바위를 모질게 때려칠 수는 있지만 결국 산산이 부서지는 것은 파도일 뿐입니다.
<반론>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 하나님의 교회와 은혜가 넘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다지도 연약해 보입니까? 승리는 오히려 원수들에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대답1> 하나님의 자녀들은 대개 고난을 겪으면서 고통을 통해서 승리를 쟁취합니다. 고통을 통해서 양이 사자를 이기고 비둘기가 독수리를 이기는데,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가장 큰 고난 속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보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의 왕국은 인내하는 그리스도의 왕국과 함께 존재합니다.
<대답2> 이 승리는 점전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주먹을 날려 놓고 케이오 승을 바록, 경주에 첫발을 내딛고서 결승점에 드렁와 있기를 바르는 사람들은 너무 성급한 정신을 가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을 향해 전진하면서 자신들이 승리할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끝까지 싸운 다음에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잔인한 원수들과 싸워 승리하셨는지 금방 잊어버리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시편 기자는 “저희를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시 59:11)라고 말했습니다. 원수들이 어떻게 우리를 괴롭히는지를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의 권세 아래 빠져 들어가는 것을 계속해서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대답3> 하나님께서는 자주 반대되는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려고 하실 때, 우리로 먼저 좌절을 겪게 하십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려고 하실 때는, 먼저 우리를 두렵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려고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저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화롭게 만드시려는 사람을 먼저 낮추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정복될 때 오히려 정복자가 됩니다. 즉 그가 어떤 죄에 정복당할 때 그는 더 위험한 다른 죄들, 예를 들어 영적인 교만함이나 영적인 안전감 등에 대해 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답4>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역사는 앞으로 더 진보하기 위해 자주 뒤로 후퇴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씨앗이 겨울철에는 땅 속에서 숨을 죽이지만 나중에 봄이 오면 더 생기 있게 솟아나는 것처럼, 우리는 넘어짐을 통해서 일어서는 법을 배우게 되고, 드러난 약점을 통해 새로운 힘을 얻게 되며 흔들림을 통해 더 깊이 뿌리를 박게 됩니다.
횃불을 휘둘러 더 밝게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우리 안에 자신의 통치를 유지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열심히 사용하여 그리스도께서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대하시든지 그 방식에 응할 수 있도록 합시다. 우리가 좌절하게 될 때, 우리가 결국 승리할 것을 믿도록 합시다.
우리가 넘어졌을 때, 우리가 다시 일어설 것을 믿도록 합시다.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된 다음에도 씨름을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창 32:24)
그러므로 우리도 절대 포기하지 말고 오히려 우리의 시작과 과정과 결과를 함께 묶어 생각하도록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모든 적들이 미치지 않는 천국에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비록 불완전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최초의 완전한 상태에 있던 인간의 자유의지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확신하도록 합시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인 예수(히 11:2) 안에 서 있끼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첫 언약 보다 더 은혜로운 언약 아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굳은 믿음은 계속되지만 연약한 믿음은 결국 아무 것도 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과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가장 든든한 믿음도 흔들릴 수 있는 것처럼 가장 연약한 믿음도 그 곳에 진리가 있다면 뿌리를 깊이 내리고 결국 왕성해질 수 있습니다.
힘이 있어도 지나치게 확신하면 패배하게 되지만 연약해도 신중하기만 하면 끝까지 버티는 법입니다. 연약함이란, 우리가 그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완전하게 나타내시기에 가장 적당한 장소와 그릇입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서 벗어나 우리의 모든 힘의 근원이 되는 그분께로 달려가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p.225-229
-그리스도의 심판이 우리 안에 확고하게 세워진 증거들
그리스도의 심판이 우리 안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정도로 존재하는지를 알 수 있는 증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혈과 육이 그리스도의 모든 길을 비방할지라도, 만약 우리가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의 모든 길이 옳다고 인정할 수 있을 때,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그 모든 일에 우리가 기꺼이 동의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여전히 우리가 지금까지 도달한 것보다 더 많은 은혜를 인정하고, 그리고 그것을 계획하고 예측하고 있을 때, 바로 이런 경우에 그리스도의 심판은 승리를 거둘 수 있을 만큼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의 양심이 눈을 뜨게 될 때, 자신들의 삶이 의롭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2. (우리들이 어떤 일을 행하는 이유 중에서) 종교적인 이유가 우리들이 그런 일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고, 그것이 세속적인 정략(政略)에서 나오는 이유들보다 월등하게 우세할 때, 바로 이런 경우에 그리스도의 심판은 승리를 거둘 만큼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3. 우리가 우리의 목적에 충실하고 우리의 규칙에 철저한 나머지 어떠한 욕망이나 두려움도 우리를 다른 길로 동요시키지 못할 때, 그리고 설령 동요된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 규칙에 맞는 것과 어긋나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때, 바로 이런 경우에 그리스도의 심판은 승리를 거둘 만큼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4. 진라가 우리 생명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일’(고후 13:8) 때, 바로 이런 경우에 그리스도의 심판은 승리를 거둘 만큼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적인 사람의 마음 속에서는 진리가 전적인 통치권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5. 우리가 누구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살 것인가를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 때, 우리 속사람이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기뻐하기 때문에 다른 누구보다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스려 주시도록 그리스도를 선택할 때, 바로 이런 경우에 그리스도의 심판은 승리를 거둘 만큼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는 증거요, 기쁨으로 자원한 백성이라는 증거요, 또 우리가 억지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달콤하게 매료되어서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다스리시는 일을 너무 좋아하므로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 자신을 그분에게 기꺼이 포기할 때, 바로 그 때 우리의 뜻이 곧 그의 뜻이 되고 그리스도의 왕국은 우리 안에 임하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선하거나 악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의지의 성향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6. 변덕이나 충동에 의한 생활이 아니라, 잘 질서잡히고 한결 같은 생활은 그 사람의 마음이 잘 정돈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괘종 시계에서 타종이 잘 되고 시계 바늘이 정확한 시간을 가리키면 그것은 시계 속의 톱니바퀴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7. 그리스도의 뜻이 세속적인 손실이나 이익과 맞물려 우리가 양자 택일을 해야 하는 상황, 그런 특별한 상황 속에서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께 겸손히 순종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심판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참된 증거입니다.
은혜의 능력을 가장 진실하게 시험할 수 있는 거슨 우리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러한 특별한 상황에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의 부패가 가장 분명하게 정체를 드러내고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나오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젊은 관원을 거의 납득시키셨지만(막 10:21), 바로 그 때(즉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을 때) 새롭게 제자가 될 뻔했던 한 명의 제자를 잃으셨던 것입니다.
8.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일이 우리의 육신과 이 세상의 행보와 다를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실천할 수 있을 때, 또한 우리의 본성이 쉽게 기울어지고, 너무나 하고 싶어하는, 그리고 시대의 풍조에도 어울리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노예처럼 지배하는 그런 악들, 예를 들어 복수심, 적대심, 이기적인 목적 등을 우리 자신이 극복할 수 있을 때, 바로 이런 경우에 그리스도의 심판은 승리를 거둘 만큼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바로 이런 경우에 우리 안에서 은혜가 본성을 이기고 있는 것이며, 천국이 세상을 이기고 있는 것이며, 결국에는 은혜가 반드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p.233-236
-은혜가 승리하게 하는 방법(판단을 돕는 9가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지혜롭게 하셔서 사물들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그것들의 경중을 측정할 수 있게 하시며, 그럼으로써 우리가 사물들의 우선 순위를 매겨서 가장 좋은 것을 더 정확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우리의 판단을 도와 주는 몇 가지 규칙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규칙 1 - 사물들을 판단할 때 그것들이 중요한 일들을 돕는 지, 방해하는지에 관해 생각해야 합니다.
규칙 2 - 그것들이 우리가 나중에 받을 심판을 더 많게 할 것인지, 아니면 적게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규칙 3 - 그것들이 우리를 얼마나 영적으로 만들 것인지, 그래서 우리를 모든 선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이끌어갈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규칙 4 - 그것들이 이 세상이 심판받는 날에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올 것인지, 아니면 슬픔을 가져올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규칙 5 - 그것들이 얼마만큼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실 모습으로 만들 것인지를, 그리고 어떤 면에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가장 좋은 모습으로 나타나게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규칙 6 - 영혼이 가장 완벽하게 판단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내세에서 판단할 그대로 지금 사물들을 판단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어떤 사회적 재앙 아래 처해 있거나, 영혼이 다른 모든 것에서부터 자기 자신을 돌이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사망의 문턱에서 판단할 그대로 지금 판단해야 합니다.
규칙 7 - 이전 경험들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영혼에 가장 잘 어울렸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최선의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기억해 보십시오. 만약 은혜가 과거나 현재에 최선의 것이라면 지금도 그것이 최선입니다.
규칙 8 - 우리를 판단하시는 그분이 판단하시는 것처럼,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거룩한 사람들이 판단하는 것처럼 사물들을 판단하려고 애쓰도록 하십시오.
규칙 9 -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판단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어떤 혜택에 전혀 사심(私心)이 없는 사람들이 판단하는 것처럼 판단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현명하다는 사람들조차 현세적인 것들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우리는 교황주의자들이 그들의 명예, 안락함, 이윤이 관계된 일들에 있어서 가장 부패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는 교황주의자들도 아주 건전한 입장에 서 있습니다. p.238-240
-천상(天上)의 일을 사랑할 때 판단력은 향상됨
지식과 정서는 서로 협력하기 때문에, 감미로운 동기들과 신적인 격려들을 사용하여 우리 안에 존재하는 사랑과 기쁨의 정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지성은 마음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가장 많이 공부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을 이끌어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길을 거의 대부분 알게 됩니다.
지혜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진리를 가장 올바르게 환대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그렇게 아름다운데도 ‘진리의 사랑으로 환대 받지 못할 때’(살후 2: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그것은 마음에 더 이상 머물지 않고 떠나 버립니다.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사랑을 거두어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하는 대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일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반면에 천상(天上)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 우리들의 애정이 더욱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의 판단력은 더더욱 분명해지고 향상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서가 아무리 강력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사물들의 탁월함을 다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높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에게서 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리가 그들의 마음을 일단 사로잡자, 교활한 잔인함이 고안해 낼 수 있는 어떤 고문을 사용해도 다시는 그 교리를 그들의 마음 밖으로 쫓아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일단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애정을 소유하셨을 때,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다시 잃어버린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마음 안에 있는 불은 마음 밖에 있는 모든 불을 압도하는 법입니다. p.242-243
-장차 세상에는 오직 그리스도와 그 신부의 영광만이 있을 것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최고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나님께 택함받은 그리스도의 모습은 아직 희미하게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는 멀지 않아 성도들 가운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이고(살후 1:10) 그이 모든 속성들을 영원토록 분명하게 드러내실 것이며, 온 세상에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와 그 신부의 영광 외의 다른 영광은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들은 그 때 ‘정오의 빛같이’(시 37:6) 빛을 발할 것입니다.
아담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당당한 위엄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모든 피조물들은 아담을 경외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하게 회복되는 날, 그것이 모든 사람들 안에 존경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겠습니까?
심지어 지금도 가장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빛나는 은혜를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해 그같은 경외심을 마음 속 깊이 비밀스럽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헤롯은 세례 요한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롬 8:19) 날이라고 부르는 날,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완전히 열매를 맺는 그 날에 사람들이 느끼게 되는 그 경외심은 어떠하겠습니까?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계 11:15)가 되고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는 더 영광스러운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그 때 심판과 진리는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그 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대의를 변론하실 것입니다. p.256-258
-실패하는 우리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우리가 실패했을 때,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는 일을 우리에게 해 주시는 분도 역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들을
① 제거하심으로써, 또는
② 약하게 하심으로써,또는
③ 잠시 연기시킴으로써, 그리고
④ 우리 안에 자신의 은혜의 능력을 더 풍성하게 베풀어 주심으로써
우리가 넘어지기 전에 서 있던 곳보다 더 높은 곳으로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넘어질 때, 그리고 넘어져 상처를 입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시 싸매어 주시도록 그분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p.264
-풀 죽은 우리 영혼의 날개에 필요한 신적 능력
우리가 유혹의 급습을 받을 때, 또 여러 가지 고난에 에워싸일 때, 우리가 끝까지 버티고 승리하는 것은 이렇게 은밀한 능력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입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심히 미약한 은혜로 (우리 안에 있는) 지극히 큰 총체적인 부패를 승승장구 이길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 이상의 영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마치 강물 속에 불을 넣어 보존하는 것과 같고, 천국의 한 부분을 지옥에 보존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힘이 어디에 속하고 우리가 누구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하나님과 우리 모두에게 아주 가까우신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위해 숨겨져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타락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스스로를 구원하도록 맡기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확보되고 보호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고 있으며 같은 능력을 붙잡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9, 20절에서 그 능력에 대해 영광스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 그 능력은 큰 능력입니다.
② 그 능력은 지극히 큰 능력입니다.
③ 그 능력은 강력으로 역사하는 능력입니다.
④ 그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 능력입니다.
우리에게 설득력 있게 제안하기만 할 뿐 그것을 선택하거나 거절하는 일은 전적으로 우리 마음에 맡겨 버리는 그런 은혜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오히려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비참함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비워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 안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가 풀이 죽어 날개를 접고 있을 때는 우리를 강하게 하시며, 우리를 소생시키신 후에도 우리가 완전한 승리를 쟁취할 때까지 우리를 결코 떠나시는 법이 없습니다. p.270-272
출처: 개혁된 신앙;http://blog.naver.com/juwana?Redirect=Log&logNo=100018303172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마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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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한 후에도 필요한 우리의 상(傷)함
회심 후에도 우리는 상함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한 상함을 통해 갈대는 자신이 참나무가 아니라 갈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갈대조차도 상함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 본성 속에는 교만의 찌끼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비에 의해 산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 상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약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보다 강한 그리스도인들이 흔들리고 상하는 것을 볼 때 너무 심하게 낙심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75절에서 베드로는 심히 통곡할 때 그는 그처럼 상해 있었습니다. 이 갈대는 그가 그렇게 상함을 받기 전까지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과신하고 있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신앙 위인들의 영웅적인 행동보다는 그들의 실패와 상함이 교회에 더 큰 위로를 줍니다.
이와같이 다윗도 상함을 입었습니다. 시편 32편 3-5절에서 다윗은 마침내 거짓 없는 영으로 자유로운 고백에 이를 수 있을 때까지 종일 신음했다고 말합니다. 아니, 시편 51편 8절에 의하면, 그는 그 자신의 감정 안에서 뼈가 꺾이는 정도의 극한 고통을 느끼기까지 슬픔을 겪었다고 말했습니다.
히스기야도 이사야 38장 13절에서 하나님께서 사자처럼 ‘그의 뼈를 꺾으셨다’고 호소하였습니다. 택하신 그릇인 사도 바울도 너무 자고해지지 않도록 그를 괴롭히는 사탄의 사자를 필요로 하였습니다(고후 12:7). p.38-39
-우리의 상함의 유익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함 위에 상함을 역사시키실 때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 가혹한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상함을 받으신’(사 53:5)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상함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을 어떻게 천국으로 데려가시는지에 대해 무지한 불경건한 영혼들은 심령이 상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좌절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롭고도 선한 일을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너무나 강퍅하고 고집스럽기 때문에, 한 사람을 그의 본성으로부터 은혜로 데려가는 것과 은혜로부터 영광으로 데려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p.39-40
-은혜 가운데 섞여 있는 부패, 그것이 그을음을 낸다
은혜와 함께 있는 부패가 연기를 낸다.
은혜는 시작이 미미할 뿐만 아니라 부패와 함께 섞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연기 나는, 꺼져 가는 심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은혜는 죄의 부패를 단번에 완전히 척결하지 않는다는 것과, 은혜가 시작된 후에도 어느 정도의 부패가 남아있어서 그리스도인 안에 갈등을 일으킨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가장 순결한 행동조차 그리스도께서 정결케 해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직무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 기도의 결점을 그리스도께서 용서해 주시도록 다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꺼져 가는 심지의 예(例)
연기 나는, 그리하여 꺼져 가는 심지의 예를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홍해에서 모세는 사면초가의 상황에 빠져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고 어느 쪽으로 나아가야 할지도 몰라 하나님께 신음하듯 기도했습니다. 분명히 이 상황은 모세에게 극심한 갈등의 상황이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에 빠지면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롬 8:26). 상한 심령을 가진 사람이 드릴 수 있는 기도하는 것은 탄식과 신음으로 가득 찬 기도일 뿐입니다.
다윗이 일부러 미친 척 가장하고 가드 왕 앞에 섰을 때(삼상 21:13)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은 다윗 속에도 약간의 불꽃이 남아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경험을 토대로 탁월한 시편 34편을 지었는데, 그는 18절에서 자신의 경험을 기초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또한 다윗은 시편 31편 22절 상반절에서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꺼져 가는 심지의 연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반절에서 “내가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렸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는 불꽃이 있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 8:25)라고 제자들은 다급하게 외쳤습니다. 여기에는 불신앙의 연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기도하도록 그들을 격려한 그런 위대한 믿음의 불꽃도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여기에는 불꽃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믿음 없는 것을 도우소서.”(막 9:24)라는 대목에는 연기를 볼 수 있습니다.
요나서 2장 4절에서 요나는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나이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에는 연기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그러할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에는 불꽃이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고 사도 바울은 자신의 부패함을 느끼며 탄식합니다. 그러나 곧 이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리게 됩니다.
아가서 5장 2절에서 교회는 “나는 잠들었노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어서 “그러나 나의 마음은 깨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계시록 2, 3장을 보면 일곱 교회는 그들이 발하고 있는 빛 때문에 ‘일곱 금촛대’라고 불리지만 그 교회 중에는 거의 대부분은 빛을 발할 뿐만 아니라 연기도 함께 내고 있었습니다.
2. 우리는 왜 꺼져 가는 심지가 되는가
이렇게 그리스도인 안에 불꽃과 연기가 함께 섞여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은혜’와 ‘본성’이라는 두 가지 법이 늘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상황에 두시는 특별한 목적은 우리의 본성이 쉽게 부딪쳐 넘어지기 쉬운 두 가지 암초인 안일함과 교만에서 우리를 지켜 내시고, 우리로 하여금 성화(聖化)가 아니라 칭의(稱義)에서 우리의 안전을 구하도록 만드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화는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오점이 있기 때문입니다.1)
우리의 영적인 불은 우리가 이 땅에서 흔히 보는 보통 불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의불은 그 모든 요소들이 완벽하게 순수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모하는 그 곳, 즉 우리가 거하기에 아주 적당한 하늘 나라에 우리가 들어가게 될 그 때에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은혜도 흠 없고 티 없이 순수해질 것입니다.
<적용 : 은혜만을 보고 교만해서도 안 되고, 부패만을 보고 낙담해서도 안 된다.>
이렇게 은혜와 본성이 서로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판단할 때, 어떤 때는 은혜의 역사를 보게 되고 어떤 때는 부패의 잔재를 보게 되므로 자신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게 됩니다.
부패의 잔재를 보게 될 때 그들은 자신에게는 은혜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의 계명들을 지키고 형제들을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사랑하는데도 감히 자기가 그리스도의 소유라고, 그리스도와 자신의 친밀한 관계를 확신 있게 주장하지 못합니다.
촛대 위에 있는 촛불이 때로는 빛을 발하지만 때로는 빛을 잃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때때로 자기 자신을 잘 이해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스스로 혼란에 빠지기도 합니다. p.6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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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자주 - “칭의는 (신자가) 범죄할 때 위로를 준다. 슬프게도 경건한 자들에게도 얼마나 흠이 많은가! 그들은 의무를 다 준행하지 못한다. 그러나 신자들은 자신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겸손해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절망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들의 의무나 은총으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들의 의무는 죄로 섞여있지만, 그들을 의롭게 하는 의는 완전한 의이기 때문이다.” - 토마스 왓슨의 『신학의 체계』중에서
-사람에 대한 그리스도의 넘치는 자비
만약 그리스도께서 자비하지 않으시다면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시 130:4)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들 위에 펼쳐 놓으신 사랑의 깃발 아래로 기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시 65:2)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지으신 그 영과 혼이 자기 앞에서 곤비하지 않도록’(사 57:16) 관용과 자애로운 돌보심을 베풀어 주십니다. 성경은 기록하기를 그리스도의 마음이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 그들이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마 15:32) 동정으로 가득 찼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우리의 영적인 기갈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시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본성과 인간의 부정한 본성 사이에는 반대 성향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을음이 조금만 나도 그것 때문에 불을 꺼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보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아주 하찮은 시작까지도 소중히 여기시고 지켜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미련한 제자들의 여러 가지 불완전함을 얼마나 잘 참아 주셨던가요?
만약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통렬하게 책망하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하신 것이며, 또 그들이 더욱 밝게 빛을 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구주로 소망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모본 이외에 어디에서 우리가 따라야 할 더 좋은 모본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p.72-73
-여린 초신자들을 다루시는 그리스도의 방법
마태복음 12장, 13장에서 우리의 복되신 구주께서는 연약한 사람들이 실족치 않도록 얼마나 주의하셨던가요! 바리새인들의 악의에 찬 비난에서 자신의 제자들을 어떻게 보호하셨던가요! 새 술을 낡은 부대에 담지 않도록(마 9:17),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하는 것처럼) 종교의 엄격함으로 초신자들을 쫓아내지 않으시려고 얼마나 주의하셨던가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면 그들에게 금식할 때가 올 것이고, 성령께서 그들 위에 임하시면 금식할 능력도 주어질 것이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헛된 일 때문에 여린 초신자들 괴롭히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탁월한 길을 그들에게 보여 주고 적극적인 목표를 가지고 그들을 양육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이렇게 하면 얼마 있지 않아 초신자들도 헛된 일들을 분별해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초신자들의 결점을 감추어 주고 어떤 실패들은 눈감아 주며, 그들의 성취를 칭찬해 주고 그들의 진보를 소중히 여기며, 그들 앞에 놓인 장애물을 제거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종교의 멍에를 훨씬 더 쉽게 짊어지도록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도와주며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즐겁게 섬기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린 초신자들은 그런 일들의 소중함을 깨닫기도 전에 그 일들을 역겨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대부분의 경우 그리스도께서는 여린 초신자들이 더 큰 기쁨으로 신앙을 고백하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우리가 ‘첫사랑’(계 2:4)이라고 부르는 그런 사랑을 초신자들 안에 심어주시며, 그들이 감당할 능력을 얻기 전까지는 절대로 고난을 겪도록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어린 묘목을 기를 때, 그것들이 뿌리를 잘 내릴 때까지 거친 날씨로부터 주의를 기울여 보호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이들을 향한 우리의 자비심이 깊어져서, 우리가 정당하게 누려도 좋은 우리 자신의 자유마저 부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연약한 사람들을 실족시킬 만한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실족하는 사람들은 ‘소자’(마 18:6)들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약한 사람들은 자칫하면 자신들이 무시된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매우 신중해야만 합니다. p.74-75
-목회자들에게 드리는 몇 가지 당부
<목회자들에게 드리는 몇 가지 당부, 여린 초신자를 목회할 대 필요한 부드러움>
1. 근거 없는 까다로운 기준을 만들지 마십시오.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목회자들이 매사에 너무 까다로운 나머지, 많은 탁월한 그리스도인들이 경험에도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은혜의 일반적이고 필수적인 증거로 만듦으로써, 본래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을 구원과 저주의 기초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이렇게 하면 사람들은 별 까닭도 없이,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낙심에 빠지게 됩니다. p.81
2. 애매모호하게 설교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들이 또 주의해야 할 것은 구름 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호하게 말하여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숨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숨기는 것이요, 진리가 제일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자신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진리는 벌거벗은 것과 같이 분명할 때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력한 것입니다.1)
복된 구주께서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입으셨을 뿐 아니라 말씀하실 때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을 사용하셨으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취하신 겸비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식이 많은 사람이었으나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유모같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살전 2:7).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자비의 정신은 그의 종들을 감동시켜 그들 또한 비천한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스스로 겸비해지도록 만듭니다.
세례 요한 이후로 천국이 침노를 당하는 것은(마 11:22) 영혼을 위로하는 진리들이 그렇게 쉽고도 분명한 방식으로 전파되어 사람들이 그것에 깊은 감동을 받고 천국을 얻기 위하여 거룩한 침노를 감행하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3. 헛된 논쟁으로 사람들을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호기심으로 가득 채우거나, 혹은 ‘의심하는 논쟁’(롬 14:1)으로 사람들의 지혜를 괴롭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그들의 주의를 흩트러뜨리게 되고 그들을 지치게 할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아무 일에도 관심을 두지 않도록 만들 것입니다.
기발한 논쟁들이 가장 풍성했던 시대의 교회는 종교적으로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인즉 사람들이 종교를 단지 매듭을 묶고 푸는 식의 지혜의 문제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종교를 이해한 사람들은 대개 가슴보다는 머리가 뜨거워지게 되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중요한 사항들을 의심하는 시대와 장소에 살고 있다면, 우리들은 그런 시대와 장소 속에서 견고하게 서기 위해서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의 사랑을 시험하시고 우리의 지체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의심하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의심을 한 다음에 확신하게 된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논쟁의 시대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영혼들을 견고하게 세울 수 있는 기초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일입니다. 이 때 (천국을 향한 순례길에 놓여진)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천국으로 가는 여정을 순탄하게 해 주는 것은 바로 사랑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쟁을 피한다는 핑계를 내세우며 우리의 반대 세력이 진리를 해치는 것을 묵과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와 인간의 영혼, 두 가지를 다 손쉽게 배신하게 됩니다.
4. 지나친 엄격함은 영혼을 위로하지 못합니다.
지나친 엄격함 때문에 곤경에 빠진 영혼에게 위로를 주지 못하고 돌려보내는 목회자들도 마찬가지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이런 태도를 가지게 되면, 많은 영혼들은 자신들의 슬픔을 토로하고 자신의 영혼을 쉬게 할 만한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을 얻지 못하여 결국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혼자 속병을 앓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푸신 것을 묶으려고 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께서 묶어 놓은 것을 풀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열쇠를 바르게 사용해야 좋은 결과가 생기는 법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위에 임하여 계시지 않는다면 자비와 엄격함의 경계선을 바르게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소망해야 합니다. ‘명철로 주소를 삼는 지혜’(잠 8:2)는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미덕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고, 진리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닙니다.
규칙과 사례는 늘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세밀하게 살펴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한다면 겉으로 보이는 유사한 조건 때문에 우리는 틀림없이 오판을 하게 될 것입니다. p.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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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자주 - “훌륭한 목적을 널리 확산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능한 한 그것을 쉽고도 일반적이며 완전히 이해되도록 전하는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을 내키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빛이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평이하게 전달 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 내용을 제대로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리챠드 백스터의 『참된 목자』 중에서
-권세
권세는 하나님의 위엄의 광채이기 때문에 인간의 위엄을 가장 적게 섞을 때 가장 힘 있게 발휘됩니다. p.92
-그들의 멸망이 우리의 책임이 될 때
생명을 잃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잔인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의 영혼에게도 잔인한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결국에 멸망할 것들을 우리의 행동 자체로는 막을 수는 없지만, 만약 우리가 타인의 영혼을 파멸시키기 쉬운 그런 행위를 했다면 그들의 멸망은 곧 우리의 책임이 될 것입니다. p.94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특별히 선악을 가릴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성급한 비판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p.95
-타인에 대한 우리의 관용
1. 다른 사람들의 약점보다는 장점을 보도록 하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약점을 캐기 위해서 지나친 호기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 속에서 성령께서 언젠가 소멸시키실 약점들을 찾아내어 그 사람과 우리 사이를 이간시키는 것보다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원한 것들을 보려고 애써서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전혀 관대하지 않게 대하는 것을 은혜의 능력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인즉 가장 위대한 사람들은 연약한 사람들의 결점을 기꺼이 용납해 주려고 합니다.
2. 거룩함과 온유와 경건의 뿌리는 그리스도
거룩함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온유함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온유함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과 다른 사람들의 유익에 대한 편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는 완벽한 거룩의 기질과 함께 위대한 온유함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위엄만 나타내시고 우리의 형상을 입으시기까지 겸비해지지 않으셨다면,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보다 더 거룩해지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하신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처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는 불쾌하고 그을음이 나는 영혼 속에 거하시기를 만족해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영혼에도 그와 같이 자비로운 기질을 불어넣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쑥이 아무리 쓰고, 식물이나 약초가 아무리 맛이 없다고 해도, 그것들 속에 있는 몸에 좋은 성분의 효험을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잘 참고 먹습니다.
(몸의 건강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우리가 약간 불쾌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유용한 장점과 은혜를 많이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불쾌하게 생각하는 바로 그 기질 때문에 그 사람들도 슬퍼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3. 육체를 입고 사는 한 완전할 수는 없는 우리 모두들
우리가 이 땅에서 머무는 동안에 은혜는 우리 영혼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은 완전하게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닐뿐더러 여러 가지기질에 매여 있는 육체 속에 거하게 됩니다. 육체의 이 기질들은 영혼으로 하여금 어떤 때는 이런 감정에, 어떤 때는 저런 감정에 휩싸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부처(Martin Buccer ; 스위스의 종교 개혁자)는 깊이 있고 온유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오랜 경험을 토대로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거절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의 이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가장 탁월한 그리스도인조차 순금에 미달하는 조금 가벼운 금과 같기 때문에, 그것이 금으로 유통되기 위해서는 우리 편에서 약간 눈감아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최상의 상태라고 여겨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 속에 결핍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을 우리가 사랑과 자비로 공급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종합 병원과 흡사합니다. 교회에 오는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씩 이런저런 영적인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지혜와 온유의 정신을 발휘해야 합니다. p.96-98
-한 알의 포도만 맺혔어도 포도나무임을 알 수 있음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힘을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보배로운 믿음은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가지고 있으며(벧후 1:1),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붙잡고 입는 것입니다. 연약한 손으로 귀중한 보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나무가 가시나무가 아니요, 포도나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몇 개의 포도알만 있으면 됩니다.
<은혜 언약이 가장 자비롭고 온유한 이유>
은혜를 더 필요로 한다는 것과 은혜가 전혀 없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 것도 스스로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은혜로 거저 주신 것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먼저 주시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기꺼이 열납하십니다.
“그 여인의 힘이 어린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 ......”(레 12:8)
복음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의 것이 됩니다. 그럼으로써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시며 연약하고 결점 많은 우리의 순종을 모두 받아 주십니다.
그렇다면 복음이야말로 가장 자비롭고 온유한 언약이 아닙니까? 우리는 지금 은혜 언약 아래서 사랑과 자비의 방식으로 하늘나라로 이끌어진 것입니다. p.103-104
-거룩한 빛’이 조금만 있어도
어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빛은 마치 번개와 같아서 홀연히 한 번만 번쩍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후에 그 사람들은 더 큰 어둠 속에 남아 있게 됩니다. 그들은 빛이 반짝이면 그 빛을 사랑하지만 그것이 자신들의 실체를 들추어내거나 자신들을 지도하려고 하면 그 빛을 혐오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3장 8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이르신 것처럼 거룩한 빛이 조금만 있어도 말씀을 지킬 수 있고, 종교를 버리지 않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끄지 않으실 심지에는 미약하지만 분별력이 있다.
이 불은 성질이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을 분해하며, 금과 찌끼를 분류하는 것처럼 사물들의 차이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 불은 영과 육을 나누고 자연에서 나온 것과 은혜에서 나온 것을 분별해 냅니다.
악한 행동이라고 해서 그 속에 악한 것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선한 행동이라고 해서 그 속에 선한 것만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광석 속에서 금을 찾아내는 것처럼, 하나님과 그의 성령께서는 광석과도 같은 우리 안에서 금을 찾아내실 수 있습니다.
육적인 사람의 마음은 마치 깜깜한 지하 감옥과도 같아서 아무 것도 알아볼 수 없고 오직 혼돈과 두려움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빛이 우리에게 비취면 우리는 하나님의 순결함과 우리 자신의 부정함을 더욱더 분명하게 보게 되고, 그 결과 분별력을 얻게 되고 겸손하게 되며 다른 사람들 속에서 행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p.112-113
-병은 싫은 것이지만, 그것은 살아 있기에 나는 것
사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그런 불평 자체는 죄를 싫어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 안에 죄를 반대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불평할 수 있습니까?
연기 속에서도 약간의 불씨를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어떤 것들도 그 자체로는 나쁘지만 그 안에서도 약간의 선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몸에 병이 생기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것들은 약해보이지만 겉보기에 선한 것들보다 오히려 더 선합니다.
악을 반대하는 일에 있어서 지나치게 격정적인 것은 비록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마땅히 감정을 느껴야 하는데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냉냉함보다는 훨씬 더 나은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예 흐리지 않는 물보다는 흙탕물이라도 흐르는 시내가 더 나은 법입니다. 겉으로 현명한 체하는 욥의 친구들보다는 오히려 온 몸에 병든 욥이 더 많은 은혜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약간의 약점 때문에 흠집이 난 행동들이 보속행위(complemental preformances)보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더 많이 입습니다. p.116-117
-우리 죄가 제거될 때까지 손을 거두지 않으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성화시키실 때, 비록 그가 우리 안에 이루신 일을 사랑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사랑하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서 죄를 제거하실 때까지, 심지어는 우리의 본성에서 그 죄의 존재를 제거하실 때까지 결코 자신의 손을 우리에게서 거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그 복된 몸을 성결하게 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매우 거룩한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합당하도록 우리를 점진적으로 정화시키십니다. 또 우리의 본성에서 죄를 소멸시키는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자비를 받아 누리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판단력과 정서를 자기 자신의 것과 일치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p.121
-위로를 가로막는 양심의 가책들을 제거하라
연약한 영혼들로 하여금 더 풍성한 위로를 얻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이 스스로를 공격하여 마음을 사로잡고 자신들을 침체시킬 수 있는 몇 가지 평범한 반론들과 은밀스러운 생각들을 극복해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익들을 몇 가지 더 다루고자 합니다.
적용 1 : 완전한 확신이 없다 하여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100퍼센트의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자신들에게는 믿음이 전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이 아무리 흠이 없다고 해도 그것은 어느 정도 연기를 내뿜기 마련입니다. 이와 같이 가장 선한 행동이라도 거기에는 연기 냄새가 나기 마련입니다.
마늘을 빻는 절구통은 언제나 마늘 냄새를 풍기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든 행동들은 어딘지 모르게 거듭나기 전의 옛 사람 냄새를 풍기게 되어 있습니다.
적용 2 : 행위가 약하다 하여 은혜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육체의 연약함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위가 연약하기 때문에 은혜가 소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그 영혼의 행동을 수행하는 도구인 그들의 정신이 쇠약해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속마음을 밖으로 표현하려고 갈망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여 한숨만 쉬는 사람들의 비밀스런 탄식을 돌아보신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돌보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포하신 분이시므로 몸소 가난한 사람들을 자비롭게 돌보실 것이 분명합니다.
적용 3 : 자연발생적 사악함으로 인해 낙심치 말라.
또 어떤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나타나는 환상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악하고 부정한 생각에 계속적으로 시달립니다. 이것은 윙윙대며 물려드는 파리처럼 그들의 평안을 깨뜨리고 그들을 괴롭힙니다. 이것들은 사탄에 의해 영혼 안에 순식간에 퍼뜨려집니다.
이것은 ① 부패한 본성도 이것들을 낯설게 여긴다는 것, ② 대단한 힘과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 ③ 부패한 본성도 이런 것을 불쾌히 여긴다는 점 등을 통해 식별할 수 있습니다.
1. 몇 가지 도움말
베냐민이 자기 부대(負袋)에 들어 있는 요셉의 은잔에 대해 책임이 없었던 것처럼 경건한 영혼도 이런 일들에 책임이 없습니다. 경건한 작가들이 내놓은 여러 가지 처방들, 즉, 우리 안에서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사악함들을 혐오하고 주의를 돌이켜 다른 일에 몰두하는 것 등의 여러 가지 대책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몇 가지 더 덧붙이자면,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그런 문제들에 대해 탄원하는 것과, 우리를 보호하시는 그의 날개 아래로 달려가 피하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우리의 공동의 적을 대항해 우리를 위해 싸워 주시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짓는 모든 죄와 신성 모독도 용서를 받는다고 하셨는데, 하물며 마귀가 우리 마음에 불어넣는 이러한 신성 모독적인 생각들이 용서받지 못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이런 종류의 시험을 다 받으신 것은 그와 같은 처지에 빠져 있는 가련한 영혼들을 돕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2. 그리스도와의 우리의 차이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우리는 서로 차이가 납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사탄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탄의 제안은 그의 거룩한 본성에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못했고, 마치 바다 한가운데 떨어진 불똥처럼 금방 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시험한 사탄은 그리스도에게 유혹을 제시했을 뿐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으며, 그리스도의 편에서는 그것들이 사악하다는 것을 파악하였을 뿐 조금도 범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제안한 것이 사악하다고 해서 우리가 죄를 지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악한 유혹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에게는 귀찮은 일이었고, 유혹한 사탄에게는 범죄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받으신 것은 갈등을 겪는 우리들을 동정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훈련시키셔서 자신이 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가진 영적인 무기를 사용하도록 만들기 위함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사탄을 이기실 수도 있었으나, 굳이 논쟁으로써 사탄을 이기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를 시험하려고 올 때, 사탄은 우리 안에서 자신과 연락하고, 정보를 주고받는 자신의 협력자를 발견합니다. 즉 우리의 본성 안에는 사탄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 선을 향한 어느 정도 동질의 적대감이 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생각은 행동의 씨앗, 사탄의 내통자가 우리 안에
이것 때문에 사탄의 시험은 거의 대부분 그 더러움으로 우리 영혼을 오염시킵니다. 그러나 시험하는 마귀가 따로 없더라도 우리 안에서는 사악한 생각들이 자생적으로 생겨납니다. 외부에서 아무런 자극이 없어도 우리 내부에는 죄를 생산해내는 공장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영혼이 이런 생각들을 품게 되어 그 안에서 어떤 사악한 즐거움을 얻는다면, 그것은 영혼에 더 무거운 죄책감을 남기고 하나님과의 달콤한 교제를 방해하며 우리의 평안을 깨뜨리고 영혼 속에 정반대의 기호를 심어 주어 마침내는 더 큰 죄에 빠지게 만듭니다.
부끄러운 모든 범죄들도 처음에는 생각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나쁜 생각들은 악한 도둑과 같아서 창문으로 슬그머니 들어와 우리 마음의 문을 더 활짝 열어 놓습니다. 생각은 행동의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런 악한 생각들이 사탄에 의해 힘을 얻으면, 선량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수난을 당하게 됩니다.
본성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해서 무죄한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에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생각들은 본성에서 자연적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괜찮다고 하는 어떤 복사들의 위로는 옳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 받은 우리의 본성 속에서 처음부터 그런 것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호흡을 불어넣어 주신 우리 영혼은 처음에는 그렇게 불쾌한 것을 내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로 그 정체를 드러낸 우리 영혼은 이제는 죄악 된 상상들을 뿜어내고 그런 불꽃을 용광로같이 피워내는 것이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본성에 너무 깊이 뿌리를 내렸고 전반적으로 퍼져 있다는 사실이 우리 본성의 부패를 더 뿌리 깊은 죄악으로,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3. 본성의 부패 때문에 지친 마음의 두 가지 반응
죄의 전체적인 넓이와 깊이를 알게 되면 우리는 더 겸손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겸손해져도 우리의 현재 본성이 새롭게 되지 않는 한, 우리의 본성은 악한 생각이라는 불행한 열매를 계속 맺어가며 다음과 같이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우리만 이런 게 아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시험에 들었을 때 생각하는 것처럼, 자기들의 형편은 다른 사람들의 형편과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고 거의 절망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 나처럼 더러운 본성을 가진 사람도 없을 거야!’
그러나 이는 원죄의 전파를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더러운 것에서 더러운 것 말고 무엇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물에 비취이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취느니라”(잠 27:19).
은혜가 이런 일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것은 아닙니다. 사탄이 우리를 괴롭힐 때 했던 것처럼, 이럴 때에도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스도께 나아가 우리의 어려움을 하나도 남김없이 털어놓는 것이며 사도 바울과 함께 이렇게 외치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곤고한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토로한 다음에 곧 위로를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25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감사의 찬양을 터뜨린 것입니다.
4.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 :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함
여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악취가 나는 사망의 몸을 더 많이 미워해야 한다는 것과, 저 거룩한 시인이 ‘우매 무지한 생각’(시 73:22) 후에 하나님을 다시 찾았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근본적 부족을 자각하는 마음이 기도의 무릎을 꿇게 한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하여 아침이면 천상의 묵상으로 단장하고, 좋은 것들을 마음에 축적하여 우리의 마음이 좋은 보물 창고가 되게 하며, 그리스도께 성령을 구하여 저주받은 생각들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고 우리 안에 좋은 생각을 솟구쳐 내는 살아 있는 샘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고자 하는 거룩한 사람들이 이 세상의 일반적인 오염을 피한 후에도 그들의 품위를 가장 미천하게 떨어뜨리는 것은 바로 영혼에서 흘러 나오는 이 더러운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순결한 영이신 하니님과 정반대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이런 것들을 지독하게 싫어한다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이것들 때문에 영혼은 모든 영적인 훈련과, 경계와, 하나님과 더 가깝게 동행하는 것과 한 차원 높은 성질의 것들을 생각하는 데 돌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사역, 성도의 교제, 경건의 신비, 주님의 위엄에 대한 생각, 그리스도인의 탁월한 상태에 대한 생각, 그리고 이런 것에 합당한 삶의 방식들이 그런 작업을 더욱더 풍성하게 해 줍니다.
우리 영혼에서 늘 더러운 것들이 흘러나온다는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매일매일 죄를 씻어 주고 용서해 주는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필요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여 가장 훌륭한 신자라 할지라도 자주 무릎을 꿇고 기도하도록 만듭니다.
5. 가장 큰 위로 : 주님께서 단 번에 물리쳐 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중요한 위로는 우리의 복된 구주께서 잠시 사탄의 무례함에 자신을 내어주신 후에 곧 사탄에게 물러가라 명령하신 것처럼(마 4:10)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때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향해 물러가라고 명령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 한 마디면 사탄은 바람처럼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때가 되면, 그는 우리 마음 속에 나오는 반항적이고 사치스런 감정의 풍랑도 엄히 꾸짖으실 것이고, 우리 속 사람의 모든 생각들을 자신에게 복종시키실 것입니다.
적용 4 : 전보다 부패한 모습을 더 많이 본다고 놀라지 말라
어떤 사람들은 이전의 모습보다 더 많은 부패의 연기가 자기 자신들을 괴롭히기 시작하면 자기들의 상태가 이전보다 더 악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부패의 모습이 이전보다 더 많이 나타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부패의 정도는 이전보다 훨씬 덜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죄를 더 많이 보면 볼수록 우리는 죄를 더 많이 혐오하게 되므로 결국 우리의 부패는 덜하게 됩니다. 태양이 빛나기 전에도 먼지는 방안에 있었습니다. 단지 햇빛이 비취면 그것이 눈에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먼지가 보인다고 해서 방이 이전보다 더 더러워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반대되는 것들은 서로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둘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해집니다. 그런데 서로 적이 되는 모든 것들 중에서 육체와 영혼은 서로 가장 가까이에 붙어 있습니다. 둘 다 중생한 사람의 혼(soul) 안에, 또 영혼의 기능 안에, 그리고 그런 기능들에서 파생되는 모든 행동 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의 좌소(坐所)인 영혼이 그 자체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이 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셋째로, 은혜가 더할수록 영적인 생명도 풍성해지고 영적인 생명이 풍성해질수록 반대되는 것에 대한 적대감도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패를 가장 잘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생기 있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사람이 육체적 방종에 자신을 방임할 경우, 그는 자신의 부패 때문에 고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무 것에도 매여있지 않고 아무 것에도 구속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단 은혜가 그들의 터무니없이 방탕하고 난폭한 행동을 억누르기 시작하면 육체는 구속을 받기 싫어서 노발대발 반항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나아진 것입니다.
연기의 불편보다 불의 편리함을 생각토록
횃불 속에서 연기를 내는 물질은 불을 붙이기 전부터 거기 있었습니다. 그러나 횃불이 점화되기까지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만약 연기가 나서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준다면 그것 자체가 불이 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는 것보다 차라리 연기가 날지라도 불의 혜택을 누리는 편이 훨씬 더 낫습니다. 연기가 제아무리 불쾌하다고 해도 연기 때문에 생기는 불편함은 불이 주는 편리함보다 크지 않습니다. 연기는 우리의 마음에 은혜의 진리가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비록 연기가 갈등의 상황 속에서는 거추장스러울지라도 우리에게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는 위로가 됩니다.
나중에 위로를 잃는다 하더라고 지금 당장 마음을 편하게 하겠다고 부패함에 굴복하는 것보다 지금 우리의 부패함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는 편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부패함 때문에 기분이 울적한 사람들은 이 본문을 양식 삼아 자신들을 위로하도록 하십시오. p.122-132
-우리에겐 늘 케케묵은 골동품 냄새가 나는 법
우리는 선한 행동에 붙어 있는 결점 때문에 선한 행동 자체를 꺼려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보실 때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소멸시키려고 하시는 악함보다는 자신이 간직하고 싶어하는 선함을 더 귀하게 보십니다.
또 몸이 아픈 사람은, 음식을 먹는 것이 자신의 병세를 조금 악화시킨다 해도 신체가 병에 대한 저항력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습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죄가 우리의 행하는 일에 달라붙을지라도 우리는 그 행동을 계속하도록 합시다. 우리 주님은 매우 선하신 분이시므로, 우리가 더 많이 싸우면 싸울수록 우리를 더 많이 용납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선한 열매들은 늘 케케묵은 골동품 냄새가 나는 법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그 선한 열매들을 맛보시기를 즐거워하십니다. p.133-134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약한 기도를 들어 주시는 이유
불안으로 가득 찬 마음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를 과연 들어 주실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기도도 들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것을 받아 주시고 우리의 것은 용서해 주십니다. 요나는 죄책감에 짓눌려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했고(욘 2:1),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낙심하지 말도록 합시다.
야고보 사도는 위와 같은 반론을 야고보서 5장 17절에서 해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만약 내가 엘리야처럼 거룩하지 않다면 내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라고 말합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바라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시 50:15)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
우리의 기도가 아무리 미약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고 우리의 기도가 양자의 영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②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 우리의 기도가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하나님께 드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거기에 자신의 향을 섞으십니다(계 8:3).
그러므로 우리가 흘리는 눈물 한 방울도, 우리 입에서 흘러나온 거룩한 한숨 한 마디도 그냥 버려지지 않습니다.
은혜는 사용할수록, 기도는 하면 할수록 풍성
모든 은혜는 그 은혜를 사용할수록 더 풍성해집니다. 기도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은혜로우신 구주가 계시므로 우리는 다른 모든 거룩한 의무들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우리를 낙심시키는 영을 참으로 주의해야 합니다.
받은 바 은혜에 따라, 할 수 있는 대로 기도하고, 할 수 있는 대로 듣고, 할 수 있는 대로 노력하고, 할 수 있는 대로 실천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의 소유를 은혜로운 눈으로 바라보실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못한다고(롬 7:19) 자신의 결점을 고백한 사도 바울이 두 손을 내려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까? 빌립보서 3장 14절을 보십시오. 그는 분명히 행동했습니다. 즉 그는 푯대를 향하여 좇아갔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무한히 은혜로우신데,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잔인해지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우리 안에서 발견되는 작은 은혜에 대해 감사하자
우리 안에 소원을 두시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즐거운 뜻을 따라 모든 일을 정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 안에서 비록 작은 능력을 발견하더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받은 바 은혜의 양에 아주 만족해하는 사람은 분명히 온유한 심령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모습에 마냥 만족해하며 더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실하게 노력해도 우리가 소망하는 만큼 성장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뒤떨어진다고 해도 우리의 위로를 위해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꺼져 가는 심지를 결코 끄지 아니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전에 말한 것처럼 성장을 향한 노력에 진실함과 성실함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완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왕기상 14장 13절에서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아비야가 하나님을 향해 품었던 얼마 안 되는 분량의 선한 뜻을 기억하시며)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서 저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막 4:24).
비록 연약한 믿음이지만
진실한 믿음으로 당신을 믿나이다.
가냘픈 사랑이지만
참된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연약한 노력이지만
참된 노력을 기울이나이다.
비록 연기가 날지라도
작은 불도 틀림없는 불이 아니옵니까?
원수이던 나를 당신의 소유물로 삼으시기 원해
나를 당신의 언약으로 이끌어오신 당신이신데,
내 연약함 때문에 나를 쫓아내시겠나이까?
그 연약함들은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만큼
나 자신에게도 깊은 슬픔이 되는데도 말입니다. p.135-139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와 낙담에 사로잡힐 때도 열심히 의무를 다하라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도 의무를 수행해야만 하는지를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가지 말한 것들에 몇 가지만 추가해서 언급하면 이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될 것입니다. 만족할 만한 해법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의무를 쉬면 만회하기 어려운 손해가 옴
본래 우리의 마음은 자유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좀처럼 의무의 멍에를 메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무가 영적이면 영적일수록, 우리 마음은 그것을 더 불편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의무를 게을리 하면 예외 없이 부패가 번성하게 됩니다. 우리가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마치 물결을 거슬러 노를 젓는 것과 같아서, 마음이 게을러져서 노 젓기를 한번이라도 쉬면 나중에 세 번 힘껏 저어도 한 번 쉰 것을 다 만회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의무에 바짝 매어 두고 우리 마음이 의무를 피하기 위해서 그럴듯하게 제시하는 핑계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2. 의무를 수행할 때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우리가 의무를 수행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당신 자신의 협력자에게 힘을 더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의무를 수행할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과, 힘이 강해지는 것과,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어 점차적으로 우리가 천국에 있는 것처럼 될 때까지 우리를 고양시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를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내시고, 그 역사의 모든 영광이 모든 능력의 소유자이신 당신에게 있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 가끔씩 우리의 내키지 않는 마음을 기쁘게 사용하십니다.
3. 내키지 않을 때 하는 순종이 참 순종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도 오직 순종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의무를 수행할 때 그것이 가장 분명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제사가 불완전할지라도 거기 담겨진 순종은 열납 되는 법입니다.
4. 의무를 수행할 때 회복되는 영혼의 감정과 자유로움
부패한 우리 본성에서 배설물처럼 생기는 이런 내키지 않는 마음이 지금 당장은 방해물이 되지만 나중에는 그만큼 매우 큰 위로를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영혼의 감정과 자유로움은 의무가 시행될 때까지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마치 업적이 있는 후에야 보상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의무를 수행하는 중에, 그리고 의무를 수행한 다음에 우리는 우리가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한없이 기다려야만 하고 그래도 얻지 못했을 하나님의 임재라는 놀라운 경험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요한복음 3장 8절에서 말씀하시는 바, 자신의 마음대로 영혼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자유를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단지 바람을 타지 못하고 사실상 물결을 거슬러 노를 저어 가야만 하는 그러한 영혼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항해할 때 선원의 손은 선미(船尾)에 있어야 하지만 눈은 별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처럼,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아주 작은 힘을 마땅한 의무에 쏟아부으면서, 자유롭게 역사하실 뿐 아니라 시의적절하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1>
이런 의무를 수행할 때는 영혼도 필요하지만 육체도 필요하기 때문에,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잠깐 의무를) 쉬는 것도 가능합니다. 칼을 가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아닙니다. 꼭 필요할 때 그 칼을 쓰기 위한 것입니다.
<주의 2>
갑작스런 격정을 느낄 때는 영혼을 안정시키고 영혼의 기능들을 조화시키기 위한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무엘상 16장 16,17절에 보면 사울은 번뇌하는 정신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수금 연주를 필요로 했습니다.
5. 대기만성(大器晩成)의 법칙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성급함 때문에 고난을 당할 때, ‘아! 나는 그러한 고난을 결코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낙담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 속에 두신다면 그 고난 속에서 반드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고 우리를 정금과 같이 연단하신 후에 반드시 우리를 그 고난에서 건져 내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고난 속에서 잃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더러운 찌꺼기일 뿐입니다(슥 13:9).
-우리의 짐이 무거울 때 어깨를 빌려 주시는 성령
물론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가장 작은 고난이라도 견뎌 낼 수 없으나 성령의 도움을 힘입으면 가장 큰 시련이라도 능히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우리 연약함을 싫어질 수 있도록 자신의 어깨를 우리에게 빌려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 37:24).
야고보는 야고보서 5장 11절에서 너희가 욥의 연대를 들었고“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우리는 욥의 성금함도 들어서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자비롭게 간과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그렇게 대우하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전염병의 유행 등과 같이 하나님의 진노의 손 아래 직접적으로 처해진 아주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그 때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침상 옆에 은혜의 보좌를 베푸시고 우리의 눈물과 한숨을 다 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6. 성찬을 받을 때 내키지 않는 마음이나 낙심이 드는 경우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내키지 않는 마음과 낙담이라는 측면에서 성찬을 살펴보자면, 성찬은 천사들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완전한 사람들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은 그리스도를 위해 주신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성찬은 죄악 되고 불신하는 마음으로 진리 자체를 의심하기 쉬운 우리들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에게 많은 귀중한 약속들을 남겨 주시는 것으로 만족해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강하게 해 주시겠다는 보장까지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만큼 성찬에 참여할 준비가 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히스기야가 그랬던 것처럼 다음과 같이 기도하도록 합시다.
선하신 여호와여! 사하옵소서!
결심하고 하나님,
곧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아무 사람이든지
비록 성소의 결례대로 스스로 깨끗케 못하였을지라도
사하옵소서!(대하 30:18,19)
그렇게 하면 우리는 편한 마음으로 이 성례에 참여하게 되고 많은 유익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의무들을 큰 즐거움 속에서 행하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부패를 혐오하고 그것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다면 우리들의 부패는 더 이상 우리들의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죄를 짓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7)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뻐하지 않는 것은 결단코 우리를 해롭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하고 소망하며 노력하는 바로 그것을 기준으로 우리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 소망은 소망하는 것들의 실상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대로 우리는 될 것이고 우리가 정복하고 싶어하는 것을 우리는 정복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시 145:19).
소망이란 소망하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이 세상 일에 있어서 누군가 우리를 조금만 격려해 주면 우리는 얼마나 큰 열심을 내는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도움을 베풀어 주시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마지못해 하는 본성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는 일이 거의 없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요!
7. 낙담의 진원지는 어디인가?
<질문>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을 그토록 낙담시키는 것은 무엇에서 비롯됩니까?”
<대답 1> 성부 하나님은 낙담의 진원지가 아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낙담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언약 안에서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시 103:13), 또 아버지로서 우리의 연약한 노력을 받아 주시기로 굳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부족한 것이 있으면 그의 은혜로운 관대함 속에서 얼마든지 얻어 가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그의 은혜를 영화롭게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의 더 완전한 의무 수행만큼이나 기뻐하십니다.
<대답 2> 성자 그리스도는 낙담의 진원지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낙담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의 직무는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상황과, 연약한 지체, 그리고 약점들, 아니 훨씬 추악하고 불쾌한 타락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랑의 가장 좋은 열매를 베풀어 주시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첫째로, 겉으로 나타나는 어떤 탁월함을 기준으로 삼아 하나님의 사랑을 측정하는 육체의 교만함을 부끄럽게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둘째로, 자신의 은혜의 자유와 군주적인 특권을 과시함으로써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도록’(고전 1:31) 하시는 것입니다.
-부족하고 흠 있는 사람들을 택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 11장에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을 기록하셨는데, 그 중에는 라합, 기드온, 그리고 삼손 등이 믿음의 조상이자 아버지인 아브라함과 함게 기록되어 있습니다(히 11:31).
우리의 복된 구주께서는 아버지의 형상이시기 때문에 이런 일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복음의 신비를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고 칭송받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타나내신 일에 대하서 하나님께 감사드리셨던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자기 시대 사람들 중에서 이성을 거의 전혀 사용할 수 없었던 어떤 어리석은 사람에 대해서 말한 것을 기억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해진 모든 모욕은 잘 참아 냈지만 종교를 경외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에 행해지는 모욕이라면 눈꼽만큼도 참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은 신성모독을 하던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려고까지 했는데, 이런 일이라면 자기의 총독이라도 봐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어떤 부류의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돌보심을 받을 자격이 없을 정도로 비천하지 않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을 선택하시고 자신의 은혜를 높이시기를 기뻐하실 때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리 천한 지혜라도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대답 3> 성령 하나님은 낙담의 진원지가 아니다
성령께서도 우리를 낙담시키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약점을 돕는 분이시고 직무상으로는 위로자이시기 때문입니다(롬 8:26). 성령님께서 죄를 깨닫게 해 주시고 그렇게 하여 우리를 낮추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우리를 위로하시는 자신의 직무를 보여 주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대답 4> 낙담의 진원지는 바로 사탄과 우리 자신이다
그렇다면 낙담이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의무를 싫어하도록 꾸준히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사탄과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p.140-148
-무지함으로 낙심된 사람들을 위한 처방전 세 가지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은혜 언약 아래서 누리고 있는 편안한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무지 때문에 그들은 지나치게 낙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1.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시키지 못함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시키지는 못합니다. 아내가 연약하다고 혼인 언약을 깨뜨리는 남편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를 버리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든 남편들에게 사랑의 모범이 되어 주신 그리스도보다 우리를 더 자비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2. 하나님께서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더욱 가까이 하심
우리의 연약함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가로막지 않으며, 오히려 그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가까이 하십니다(시 78:39 저희는 육체 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 자비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과부의 재산 중의 일부입니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호 2:19).
남편은 자기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벧전 3:7)으로 알아 귀하게 여겨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랑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세워 주신 이 규범을 스스로 어기시면서 자신의 연약한 배필을 참아 주지 않으실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심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지 않는다면 그를 섬길 민족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우 연약하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나 우리가 악의를 품고 하나님을 적대시하거나 진리를 훼손하는 사람들이 아닌 한, 우리를 낙심히키는 생각들에 굴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자비로운 구주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p.150-151
-연약함의 네 가지 종류와 연약을 발견할 때의 반응의 순서
1. 연약함의 네 가지 종류
우리가 아무런 근거 없이 자화자찬으로 우리 자신을 기만하지 않기 위해서, 연약함이 다음의 여러 가지 종류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① 우리의 가장 선한 행동들에 달라붙어 있는 불완전함.
②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을 때,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륜이 짧아서 하게 되는 그런 행동들.
③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전혀 몰라서 생기는
것들.
④ 갑작스런 시험이 먹구름처럼 밀려와 우리의 판단을 흐릴 때, 우리의 일반적인 경향이나 목적과는 반대로, 고의적이지 않지만 갑자기 돌발적으로 불거져 나오는 것들입니다.
2. 연약을 발견할 때의 반응의 순서
이런 연약함을 발견한 다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반응합니다.
① 제일 먼저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식하게 됩니다.
② 그 다음에 우리는 그것 때문에 슬퍼합니다. 그리고 나서
③ 슬픔이 불평으로 변합니다. 그런 다음에
④ 우리는 불평하면서 우리 자신을 개혁하기 위해 사력을 다 기울여 노력합니다. 그리고
⑤ 그렇게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의 부패함을 어느 정도 극복하게 됩니다.
연약함을 이와 같은 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그것들이 오히려 겸손의 이유가 되며, 그것이 비록 우리가 매일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설 수 있게 됩니다.
연약함이 있다고 해서 선행이 아예 사라지거나 하나님께 전혀 용납되지 못할 정도로 선행이 오염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허약함을 변명하며 정당화하는 것은 연약함보다 더 나쁜 것이며 연약함 속에 그냥 주저앉는 것은 연약함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악을 정당화시키면 입술은 봉해지게 되며, 그 결과 영혼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유로움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하고,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여 평안을 되찾을 때까지는 하나님과의 달콤한 교제를 즐길 수 없게 됩니다.
죄로 인해 상처를 받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넘어져도 곧 다시 일어섭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눈길 한 번에 회개하고 회복되었습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말을 듣고 자신을 즉시 돌이켰습니다.
그러나 도둑이나 부랑자에게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해보십시오. 그는 당신의 말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의 목표는 옳은 길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소욕에 도움이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p.151-153
-우리가 위로를 얻기 위하여 알아야 할 것
우리가 위로를 얻기 위하여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단지 사소한 죄악들만을 위해 중보자라는 위대한 사역에 임명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그를 붙들 만한 진정한 믿음이 한줄기 불꽃만큼이라도 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태산(泰山)같은 죄악을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 중보자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 상한 갈대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이런 은혜에서 제외시키지 않으시므로, 그 사람 자신도 자기 자신을 은혜를 받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
도대체 왜 우리는 이렇게 은혜로운 성향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가난한 까닭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우리의 부유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혹의 시기에 사탄을 믿지말고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대 눈에
그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진리, 그 자체를 믿으라!
거짓말하는 원수,
생명을 죽이는 마귀의 말에는
그대, 귀를 막으라! p.158
-그리스도의 탁월한 인자함
1.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탁월하게 존재하는 인자함
남편, 아버지, 형제, 통치자들에게 걸맞게 나누어져 있는 모든 인자함은 다만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한 줄기 광채일 뿐입니다. 완전한 인자함은 그리스도 안에 가장 탁월한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타락으로 우리의 형상은 일그러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자녀 속에서 결점보다는 자기와 닮은 점을 더 귀중하게 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안에서 자신의 형상을 볼 때마다 우리를 사랑할 이유를 발견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자신의 형상을 보십니다.
-비록 병들었을지라도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의 지체
우리는 병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몸의 지체가 병들고 약하다고 자기 몸의 지체를 무시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 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머리가 몸의 다른 지체들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잊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우리의 것이므로 우리는 곧 그의 충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산함을 더 자유롭게 전달하시기 위해 인간의 본성을 자기 자신에게 아주 가까이 연합시키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최상의 상태에 있을 때 우리의 본성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형상이 미천해져서 본성적이고 전체적인 약함에 꽁꽁 얽매여 있을 때 그러한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습니다.
2. 혐오해야 할 사탄의 상투적 무기 ; 의심
그러므로 의심하는 모든 생각들을,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마 4:6)라고 하며 질투심으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애썼던 그 저주받은 영이 우리 안에 던져 넣은 것이나 보존해 온 것으로 여기고 그것들을 혐오하도록 합시다.
사탄이 매일 연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베풀어 줄 매우 부드러운 사랑이 없는 것처럼, 우리 안에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우리와 성자 예수님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첫 조상 아담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들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태초부터 마귀의 일입니다. 그 때 성공해서 재미를 본 마귀는 지금도 같은 무기로 우리를 공격할 만반의 준비를 해 놓고 있습니다.
<반론> 그러나 꺼져 가는 심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그렇게 자비하시다고 느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나에게 그리스도는 나를 대적하는 원수처럼 보입니다. 나는 그분이 나를 정말로 불쾌히 여기신다는 증거들을 확실히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대답>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요셉이 자기 형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잠시 동안 우리에게 원수처럼 행동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좀 더 적당한 때가 오면 자비로운 분으로 행동하시기 위한 사전 준비일 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가장 깊은 속마음을 오랫동안 우리에게 숨기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치 야곱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와 씨름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감추어 두었던 힘을 공급해 주시고 마침내 이기도록 하십니다. 믿음은 그분의 얼굴에서 베일을 벗겨 내고 대적되는 얼굴 아래 숨어 있는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발견하게 합니다. p.160-162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죽자!
당신 자신을 그리스도의 품 안에 던져 버리십시오. 만약 당신이 죽는다면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죽도록 하십시오.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반드시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비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 곳은 바로 그리스도의 품이기 때문입니다. p.165
-우리의 고통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는 까닭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가 무엇이며 그의 아들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기 위해서는, 그의 아들이 받아 마셨던 그 잔을 우리도 맛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 잔의 찌끼까지 다 들이마셨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쾌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조금 맛보게 하실 때, 우리가 그것 때문에 완전히 실족하지 않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도와 주실 것이란 사실도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고 슬픔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스도께서 절망에 빠지셨습니다. p.167-168
-참 소망과 거짓 소망
모든 소망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이끌어 가기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은 소망은 모두 거짓된 위로일 뿐입니다. 그 소망 자체가 거짓이든지 아니면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이 거짓이든 둘 중의 한 가지입니다. p.170
-진정한 평화는...
진정한 평화는 굴복할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정복할 때 생기는 법입니다. 본문이 주는 위로는 더 나아지기 위해 기꺼이 노력하지만 자신들의 부패함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p.180
-은혜는 우리 본성을 묵살하지 않고 변화시킴
그리스도의 통치의 질서가 심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사람의 영혼에 알맞으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독특한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보존하고 싶어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심판을 통해서 행하시는 일들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은혜가, 본성이 은혜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전제하듯이 은혜의 구조도 사람 안에 있는 본성의 구조를 그대로 보존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심판을 통해서, 그것도 아주 달콤한 방식으로 영혼 속에 모든 선한 것을 가져오십니다. 이렇게 하시는 까닭은 많은 사람들이 엉뚱하게 착각하여 그들 속에 존재하거나 그들에게서 나오는 선(善)이 은혜의 강력한 역사로부터 나오지 않고 그들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악을 행할 때, 사탄은 우리의 본성의 흐름을 따라 우리를 아주 교묘하게 주도해 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탄이 자기들의 죄에 전혀 관계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실수는 별로 위험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래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탄이 하는 일이라고는 우리 안에서 그가 발견하게 되는 악을 조장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영적인 선의 씨앗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발견하시는 것이라고는 오직 적대감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본성 안에 영적인 선을 각인시켜 주시고, 그럼으로써 우리 마음이 우리가 선하다고 판단하는 것들로 기울어지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선한 것을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여 주시면, 우리는 그것으로 기울어집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악한 것의 악함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면, 우리는 이전에 그것을 거리낌없이 포용했던 것처럼 이제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것을 혐오하게 됩니다. p.210-211
-오늘의 작은 승리는 장차의 궁극적 승리의 징표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
우리가 어떤 유혹이나 부패를 이긴다는 것은 마지막 승리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 여호수아가 자신이 정복한 다섯 왕의 머리를 발로 짓밟으면서,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수 10:25)라고 말했듯이 천국은 이미 우리의 소유입니다. 다만 지금 우리는 그것을 완전하게 소유할 때까지 그 것을 얻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p.222
-결국에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승리
전체적인 교회에 대해서 말한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전한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산에서 나온 작은 돌’(단 2:35)인데, ‘태산을 이루어 온 세상에 가득할 때까지’ 모든 반대 세력인 ‘우상을 쳐서 부숴뜨린, 손대지 아니한 그 작은 돌’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대적하고도 살아 남으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모든 것은 그 앞에 평탄하고 낮아질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산들과 높아지고 교만해진 생각들을 낮추시고 모든 육체의 교만을 낮추실 것입니다.
겨가 바람에 날려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칠 때, 그루터기가 불과 싸울 때, 발뒤꿈치가 송곳을 찰 때, 토기가 토기장이와 다툴 때,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을 거스려 다툴 때, 승리가 어느 편으로 돌아갈 것인지는 명명백백한 일입니다.
폭풍이 그리스도께서 타고 계신 배를 흔들 수는 있지만 전복시킬 수는 없는 법입니다. 파도가 바위를 모질게 때려칠 수는 있지만 결국 산산이 부서지는 것은 파도일 뿐입니다.
<반론>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 하나님의 교회와 은혜가 넘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다지도 연약해 보입니까? 승리는 오히려 원수들에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대답1> 하나님의 자녀들은 대개 고난을 겪으면서 고통을 통해서 승리를 쟁취합니다. 고통을 통해서 양이 사자를 이기고 비둘기가 독수리를 이기는데,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가장 큰 고난 속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보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의 왕국은 인내하는 그리스도의 왕국과 함께 존재합니다.
<대답2> 이 승리는 점전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주먹을 날려 놓고 케이오 승을 바록, 경주에 첫발을 내딛고서 결승점에 드렁와 있기를 바르는 사람들은 너무 성급한 정신을 가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을 향해 전진하면서 자신들이 승리할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끝까지 싸운 다음에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잔인한 원수들과 싸워 승리하셨는지 금방 잊어버리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시편 기자는 “저희를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시 59:11)라고 말했습니다. 원수들이 어떻게 우리를 괴롭히는지를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의 권세 아래 빠져 들어가는 것을 계속해서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대답3> 하나님께서는 자주 반대되는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려고 하실 때, 우리로 먼저 좌절을 겪게 하십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려고 하실 때는, 먼저 우리를 두렵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려고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저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화롭게 만드시려는 사람을 먼저 낮추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정복될 때 오히려 정복자가 됩니다. 즉 그가 어떤 죄에 정복당할 때 그는 더 위험한 다른 죄들, 예를 들어 영적인 교만함이나 영적인 안전감 등에 대해 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답4>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역사는 앞으로 더 진보하기 위해 자주 뒤로 후퇴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씨앗이 겨울철에는 땅 속에서 숨을 죽이지만 나중에 봄이 오면 더 생기 있게 솟아나는 것처럼, 우리는 넘어짐을 통해서 일어서는 법을 배우게 되고, 드러난 약점을 통해 새로운 힘을 얻게 되며 흔들림을 통해 더 깊이 뿌리를 박게 됩니다.
횃불을 휘둘러 더 밝게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우리 안에 자신의 통치를 유지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열심히 사용하여 그리스도께서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대하시든지 그 방식에 응할 수 있도록 합시다. 우리가 좌절하게 될 때, 우리가 결국 승리할 것을 믿도록 합시다.
우리가 넘어졌을 때, 우리가 다시 일어설 것을 믿도록 합시다.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된 다음에도 씨름을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창 32:24)
그러므로 우리도 절대 포기하지 말고 오히려 우리의 시작과 과정과 결과를 함께 묶어 생각하도록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모든 적들이 미치지 않는 천국에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비록 불완전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최초의 완전한 상태에 있던 인간의 자유의지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확신하도록 합시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인 예수(히 11:2) 안에 서 있끼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첫 언약 보다 더 은혜로운 언약 아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굳은 믿음은 계속되지만 연약한 믿음은 결국 아무 것도 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과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가장 든든한 믿음도 흔들릴 수 있는 것처럼 가장 연약한 믿음도 그 곳에 진리가 있다면 뿌리를 깊이 내리고 결국 왕성해질 수 있습니다.
힘이 있어도 지나치게 확신하면 패배하게 되지만 연약해도 신중하기만 하면 끝까지 버티는 법입니다. 연약함이란, 우리가 그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완전하게 나타내시기에 가장 적당한 장소와 그릇입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서 벗어나 우리의 모든 힘의 근원이 되는 그분께로 달려가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p.225-229
-그리스도의 심판이 우리 안에 확고하게 세워진 증거들
그리스도의 심판이 우리 안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정도로 존재하는지를 알 수 있는 증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혈과 육이 그리스도의 모든 길을 비방할지라도, 만약 우리가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의 모든 길이 옳다고 인정할 수 있을 때,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그 모든 일에 우리가 기꺼이 동의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여전히 우리가 지금까지 도달한 것보다 더 많은 은혜를 인정하고, 그리고 그것을 계획하고 예측하고 있을 때, 바로 이런 경우에 그리스도의 심판은 승리를 거둘 수 있을 만큼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의 양심이 눈을 뜨게 될 때, 자신들의 삶이 의롭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2. (우리들이 어떤 일을 행하는 이유 중에서) 종교적인 이유가 우리들이 그런 일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고, 그것이 세속적인 정략(政略)에서 나오는 이유들보다 월등하게 우세할 때, 바로 이런 경우에 그리스도의 심판은 승리를 거둘 만큼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3. 우리가 우리의 목적에 충실하고 우리의 규칙에 철저한 나머지 어떠한 욕망이나 두려움도 우리를 다른 길로 동요시키지 못할 때, 그리고 설령 동요된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 규칙에 맞는 것과 어긋나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때, 바로 이런 경우에 그리스도의 심판은 승리를 거둘 만큼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4. 진라가 우리 생명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일’(고후 13:8) 때, 바로 이런 경우에 그리스도의 심판은 승리를 거둘 만큼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적인 사람의 마음 속에서는 진리가 전적인 통치권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5. 우리가 누구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살 것인가를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 때, 우리 속사람이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기뻐하기 때문에 다른 누구보다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스려 주시도록 그리스도를 선택할 때, 바로 이런 경우에 그리스도의 심판은 승리를 거둘 만큼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는 증거요, 기쁨으로 자원한 백성이라는 증거요, 또 우리가 억지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달콤하게 매료되어서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다스리시는 일을 너무 좋아하므로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 자신을 그분에게 기꺼이 포기할 때, 바로 그 때 우리의 뜻이 곧 그의 뜻이 되고 그리스도의 왕국은 우리 안에 임하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선하거나 악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의지의 성향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6. 변덕이나 충동에 의한 생활이 아니라, 잘 질서잡히고 한결 같은 생활은 그 사람의 마음이 잘 정돈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괘종 시계에서 타종이 잘 되고 시계 바늘이 정확한 시간을 가리키면 그것은 시계 속의 톱니바퀴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7. 그리스도의 뜻이 세속적인 손실이나 이익과 맞물려 우리가 양자 택일을 해야 하는 상황, 그런 특별한 상황 속에서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께 겸손히 순종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심판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참된 증거입니다.
은혜의 능력을 가장 진실하게 시험할 수 있는 거슨 우리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러한 특별한 상황에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의 부패가 가장 분명하게 정체를 드러내고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나오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젊은 관원을 거의 납득시키셨지만(막 10:21), 바로 그 때(즉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을 때) 새롭게 제자가 될 뻔했던 한 명의 제자를 잃으셨던 것입니다.
8.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일이 우리의 육신과 이 세상의 행보와 다를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실천할 수 있을 때, 또한 우리의 본성이 쉽게 기울어지고, 너무나 하고 싶어하는, 그리고 시대의 풍조에도 어울리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노예처럼 지배하는 그런 악들, 예를 들어 복수심, 적대심, 이기적인 목적 등을 우리 자신이 극복할 수 있을 때, 바로 이런 경우에 그리스도의 심판은 승리를 거둘 만큼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바로 이런 경우에 우리 안에서 은혜가 본성을 이기고 있는 것이며, 천국이 세상을 이기고 있는 것이며, 결국에는 은혜가 반드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p.233-236
-은혜가 승리하게 하는 방법(판단을 돕는 9가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지혜롭게 하셔서 사물들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그것들의 경중을 측정할 수 있게 하시며, 그럼으로써 우리가 사물들의 우선 순위를 매겨서 가장 좋은 것을 더 정확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우리의 판단을 도와 주는 몇 가지 규칙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규칙 1 - 사물들을 판단할 때 그것들이 중요한 일들을 돕는 지, 방해하는지에 관해 생각해야 합니다.
규칙 2 - 그것들이 우리가 나중에 받을 심판을 더 많게 할 것인지, 아니면 적게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규칙 3 - 그것들이 우리를 얼마나 영적으로 만들 것인지, 그래서 우리를 모든 선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이끌어갈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규칙 4 - 그것들이 이 세상이 심판받는 날에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올 것인지, 아니면 슬픔을 가져올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규칙 5 - 그것들이 얼마만큼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실 모습으로 만들 것인지를, 그리고 어떤 면에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가장 좋은 모습으로 나타나게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규칙 6 - 영혼이 가장 완벽하게 판단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내세에서 판단할 그대로 지금 사물들을 판단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어떤 사회적 재앙 아래 처해 있거나, 영혼이 다른 모든 것에서부터 자기 자신을 돌이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사망의 문턱에서 판단할 그대로 지금 판단해야 합니다.
규칙 7 - 이전 경험들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영혼에 가장 잘 어울렸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최선의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기억해 보십시오. 만약 은혜가 과거나 현재에 최선의 것이라면 지금도 그것이 최선입니다.
규칙 8 - 우리를 판단하시는 그분이 판단하시는 것처럼,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거룩한 사람들이 판단하는 것처럼 사물들을 판단하려고 애쓰도록 하십시오.
규칙 9 -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판단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어떤 혜택에 전혀 사심(私心)이 없는 사람들이 판단하는 것처럼 판단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현명하다는 사람들조차 현세적인 것들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우리는 교황주의자들이 그들의 명예, 안락함, 이윤이 관계된 일들에 있어서 가장 부패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는 교황주의자들도 아주 건전한 입장에 서 있습니다. p.238-240
-천상(天上)의 일을 사랑할 때 판단력은 향상됨
지식과 정서는 서로 협력하기 때문에, 감미로운 동기들과 신적인 격려들을 사용하여 우리 안에 존재하는 사랑과 기쁨의 정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지성은 마음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가장 많이 공부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을 이끌어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길을 거의 대부분 알게 됩니다.
지혜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진리를 가장 올바르게 환대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그렇게 아름다운데도 ‘진리의 사랑으로 환대 받지 못할 때’(살후 2: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그것은 마음에 더 이상 머물지 않고 떠나 버립니다.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사랑을 거두어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하는 대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일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반면에 천상(天上)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 우리들의 애정이 더욱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의 판단력은 더더욱 분명해지고 향상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서가 아무리 강력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사물들의 탁월함을 다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높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에게서 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리가 그들의 마음을 일단 사로잡자, 교활한 잔인함이 고안해 낼 수 있는 어떤 고문을 사용해도 다시는 그 교리를 그들의 마음 밖으로 쫓아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일단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애정을 소유하셨을 때,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다시 잃어버린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마음 안에 있는 불은 마음 밖에 있는 모든 불을 압도하는 법입니다. p.242-243
-장차 세상에는 오직 그리스도와 그 신부의 영광만이 있을 것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최고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나님께 택함받은 그리스도의 모습은 아직 희미하게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는 멀지 않아 성도들 가운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이고(살후 1:10) 그이 모든 속성들을 영원토록 분명하게 드러내실 것이며, 온 세상에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와 그 신부의 영광 외의 다른 영광은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들은 그 때 ‘정오의 빛같이’(시 37:6) 빛을 발할 것입니다.
아담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당당한 위엄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모든 피조물들은 아담을 경외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하게 회복되는 날, 그것이 모든 사람들 안에 존경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겠습니까?
심지어 지금도 가장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빛나는 은혜를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해 그같은 경외심을 마음 속 깊이 비밀스럽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헤롯은 세례 요한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롬 8:19) 날이라고 부르는 날,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완전히 열매를 맺는 그 날에 사람들이 느끼게 되는 그 경외심은 어떠하겠습니까?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계 11:15)가 되고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는 더 영광스러운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그 때 심판과 진리는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그 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대의를 변론하실 것입니다. p.256-258
-실패하는 우리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우리가 실패했을 때,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는 일을 우리에게 해 주시는 분도 역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들을
① 제거하심으로써, 또는
② 약하게 하심으로써,또는
③ 잠시 연기시킴으로써, 그리고
④ 우리 안에 자신의 은혜의 능력을 더 풍성하게 베풀어 주심으로써
우리가 넘어지기 전에 서 있던 곳보다 더 높은 곳으로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넘어질 때, 그리고 넘어져 상처를 입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시 싸매어 주시도록 그분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p.264
-풀 죽은 우리 영혼의 날개에 필요한 신적 능력
우리가 유혹의 급습을 받을 때, 또 여러 가지 고난에 에워싸일 때, 우리가 끝까지 버티고 승리하는 것은 이렇게 은밀한 능력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입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심히 미약한 은혜로 (우리 안에 있는) 지극히 큰 총체적인 부패를 승승장구 이길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 이상의 영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마치 강물 속에 불을 넣어 보존하는 것과 같고, 천국의 한 부분을 지옥에 보존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힘이 어디에 속하고 우리가 누구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하나님과 우리 모두에게 아주 가까우신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위해 숨겨져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타락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스스로를 구원하도록 맡기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확보되고 보호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고 있으며 같은 능력을 붙잡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9, 20절에서 그 능력에 대해 영광스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 그 능력은 큰 능력입니다.
② 그 능력은 지극히 큰 능력입니다.
③ 그 능력은 강력으로 역사하는 능력입니다.
④ 그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 능력입니다.
우리에게 설득력 있게 제안하기만 할 뿐 그것을 선택하거나 거절하는 일은 전적으로 우리 마음에 맡겨 버리는 그런 은혜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오히려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비참함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비워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 안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가 풀이 죽어 날개를 접고 있을 때는 우리를 강하게 하시며, 우리를 소생시키신 후에도 우리가 완전한 승리를 쟁취할 때까지 우리를 결코 떠나시는 법이 없습니다. p.270-272
출처: 개혁된 신앙;http://blog.naver.com/juwana?Redirect=Log&logNo=100018303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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