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제 7권 -로이드 존스

작성자bloomy|작성시간07.03.10|조회수124 목록 댓글 0

로이드 존스 로마서 강해 7권-이태환 전도사 요약

 

 


본서는 1955년 10월 7일부터 시작한 로마서 강해(1968년 은퇴 시까지 13년간을 매 금요일마다 설교)의 첫 부분으로서 로마서 1장에 대한 강해이다.

 


제1장 서론

 


 로이드 존스 목사는 매 주 금요일 저녁 로마서 강해를 시작함에 있어서 이 모임이 ‘예배’임을 강조하고 싶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 강좌가 아니라 예배이다.

 


     “무엇보다 먼저 이 모임이 ‘예배’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모임은 예배의 한

       경우입니다. 저는 예배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것을 인정치 않는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성경은 보통의 책이 아닙니다-하나님의 책이요, 하나님에 관한 책이

       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말하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할 때마다 반

       드시 예배를 드리고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이 위대한 로마서를 단순히 이

       성과 지식으로 분별하고 이해하거나 또는 학문적인 방식으로 오래 깊이 생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한 위대한 목회자에 의해서 편지로 쓰여진 책입니다.

       전문가들이나 교수들을 위해서 쓰여진 신학적 논문이 아닙니다. 로마서는 한 교회

       에 보내진 편지입니다. 다른 모든 신약 문헌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서도 매우 실제적

       인 도움과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사도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도와 그들

       을 세워주고, 참 거룩한 믿음으로 그들을 견고케 해주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 일을 원하셨습니다. 저도 할 수 있는 대로 분명히 바로 그 일을 하려고 애

       를 쓸 것입니다. 여기 이 로마서 연구를 위한 이 모임은 그러므로 예배의 한 경우

       이지 그저 단순한 한 강좌가 아닙니다.”

 

 

 

2. 하나의 프로그램을 공표하지 않겠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 모임이 강좌가 아닌 예배임을 먼저 밝히고 난 후 로마서 강해에 관한 진행 계획이나 순서, 또는 로마서 강해의 목록을 모든 사람이 알도록 발표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저는 하나의 프로그램을 공표하지 않겠습니다. 이유를 말씀드리지

       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 나갈 때 언제 그 일이 끝나게 될지 정확한 시기를 전

       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대로 성령의 권능과 임재를 믿고 나가면

       경우가 어떠할 것이라는 매우 깊은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성령께서 갑자기 임하심을 압니다-이성과 지식으로 사물을 분별하는 지혜를 밝혀주

       시고 마음을 감동하여 주십니다. 저는 성경을 파헤쳐 연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

       령의 감동을 받을 만반의 준비를 언제나 하고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

       문에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설교를 방송하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시

       간표에 딱 들어맞게 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갑자기 설교자를 사로잡

       으면 그 방송 예배에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모이는

       이 모임은 정확히 그와 같은 경우입니다. 저도 계획을 세워 어떤 분량으로 나누어

       놓을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몇 가지 요점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

       나의 일람표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리다시피, 성령께서 저와 제 아

       이디어들과, 제가 세울 수 있는 어떤 작은 프로그램을 위압적으로 지워버리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야 저는 매 주간마다 그 성령의 인도와 지도하심을 의뢰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 금요일마다 얼마만큼 강해해 나갈 것인지 약속하지 않

       겠습니다.”

 


 그런 후 로이드 존스 목사는 로마서를 살펴봄에 있어서 맨 처음에 나오는 서론적인 말부터 배울 것이 대단히 많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서와 같은 위대한 서신들의 서론을 대충 성급하게 다루는 것은 큰 실수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말하길 “서신들의 서론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몇 가지의 질문들을 던져 보면서 그 서신들을 살펴보면 대단히 많은 지식과 영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언급합니다.

 

 

 

3. 로마서를 연구하게 될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요점들

 


1) 예를 들어서 우리가 로마서를 연구할 때, 주목해야 하는 첫 번째 요점은 로마서가 신약성경에 포함된 여러 서신들 중 첫 번째 서신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사도행전 바로 뒤에 나옵니다. 그러나 바울이 쓴 첫 번째 서신은 로마서가 아닙니다. 데살로니가전서가 바울이 처음 쓴 서신서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가 연대적(年代的)인 순서로 첫번째이기 때문에 맨처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째서 로마서가 맨 처음에 놓여졌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가 가장 길기 때문에 그렇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말하길 “오히려 로마서가 맨 첫자리에 온 것은, 교회가 성령을 통해 얻은 지혜로 로마서가 가장 중요함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교회가 형성되어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형성되어진 교회가 사방으로 확산되어집니다. 그럴 때 교회는 교회의 근본이 되는 진리를 가지고 자리를 잡고 있어야 됩니다. 그 일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점이야말로 우리가 강조해야 되는 당연한 요점입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기독교회는 로마서가 다른 무엇보다 근본적인 진리들을 다루는 서신이라는 보편적인 견해를 취해왔습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시대마다 그 사실이 입증되어 왔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생각을 밝히고 있습니다.

 

 

 

4.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말하는 로마서의 가치와 중요성

 


 로이드 존스 목사는 로마서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로마서가 성경에 나오는 어떤 다른 책보다도 교회사에서 더 중요

       하고 중차대한 역할을 해왔다고 말해도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그 점은 매우 큰 의

       미를 지닌 것입니다. 우리는 전체 성경을 읽고 연구해야 합니다-그렇습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통해 보아, 어떤 특별한 책이 예외적으로 두드러지게 사용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명백하다면, 그 책에 대하여 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당연히 바른 일이겠지요.”

 


 그처럼 로마서가 굉장히 중요한 서신서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어 로마서의 가치와 중요성을 교회사를 통해 우리에게 증명해 보이고자 합니다.

 

 

 

5. 교회사를 통한 로마서의 가치와 중요성

 


1) 어거스틴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의 회심을 생각해 보십시다. 신약성경이 완성되고 나서부터 종교개혁에 이르는 기간 동안, 기독교회 내에 존재했던 인물 가운데 히포(Hippo)의 어거스틴 만한 큰 인물이 없었습니다. 그는 두뇌가 명석한 사람으로 교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심오한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부도덕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 사람이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지 기억하십니까? 그는 영혼의 고통과 고뇌를 안고 어느 날 오후 정원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톨레, 레게”(책을 들어 읽어라, 책을 들어 읽어라)라고 말하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어나 그의 숙소로 가 책을 펴서 읽었습니다. 그가 읽은 곳이 로마서 13장의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가 그를 강하게 비추었고, 그는 회심하여 구원받아 기독교회의 등대가 되었습니다.

 


 그가 회심한 직후에 교회는 싸움과 투쟁의 시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교회 안에 펠라기우스(Pelagius)라는 한 교사가 있었는데, 그는 거짓 가르침을 널리 퍼트리는 자였습니다. 영혼이 구원받는 데 있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닌 인간의 노력이 우선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교회가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면 교회는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펠라기우스 이단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은 것은 성 어거스틴이 로마서를 강해함으로써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을 논박하고 끝내 무산시켰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는 교회의 신앙을 지탱해 주고 건실케 하고 계속 존재케 한 기반과 초석이었습니다.

 


2)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또한 로마서는 마틴 루터가 회심하여 종교개혁의 실질적 선봉이 되는 데도 중차대한 역할을 했습니다. 1515년 마틴 루터는 아직 로마 가톨릭에 남아 있으면서 신학을 가르치는 교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는 학생들에게 로마서를 강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바로 이 로마서를 연구하는 중에 이신칭의 진리,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진리가 그의 이지와 마음과 전 존재를 사로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고, 그것은 실로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3) 존 번연(John Bunyan)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회심시키실 때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마틴 루터의 주석들을 사용하셨습니다.

 


4) 존 웨슬리(John Wesley)

 


 1738년 5월 24일, 런던의 알더스케이트 가에서 있었던 존 웨슬리의 회심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십시다. 모라비안 형제 단원들이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를 존 웨슬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가 그 교리를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그가 지친 가운데 알더스게이트 가에서 열리는 한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갔을 때, 그 영혼과 지성과 마음의 상태는 크게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집회에서 누군가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과 서론을 읽고 있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거기 앉아서 그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앉아서 그것을 듣고 있을 때 자기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발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알고 “나 같은 사람의 죄도”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그때 거기서 어떤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 확신은 그로 하여금 아무런 능력도 발하지 못하는 보잘 것 없는 설교자로부터 위대하고 능력있는 복음전도자로 바꾸어놓았습니다.

 


5) 19c 초 유럽 대륙에서의 복음운동

 


 19c 초 유럽 대륙에는 주목할 만한 한 복음운동이 있었습니다. 그 운동은 스위스에서 시작되어 프랑스로 번져나갔고, 화란에까지 확실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당시 유럽 대륙의 개신교는 매우 형식적이고 죽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곳에 부흥이 일어났고, 매우 주목할 만한 운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일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일어났습니다.

 


 할데인(Haldane)이라 이름하는 두 사람의 스코틀랜드 사람이 있었습니다. 로버트 할데인과 제임스 알렉산더 할데인입니다. 그들은 평신도들이었습니다.

 


 로버트 할데인은 스위스로 가서 제네바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노천 강단의 한 좌석에 앉아 있는데 자기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젊은 두 청년들이 대화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대화하는 두 청년들이 신학생임을 로버트 할데인이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를 엿듣다가 신학생인 두 청년이 복음적인 의미에서 진리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과 그 결과 두 사람 다 복음의 능력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로버트 할데인의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신학생이, 성도들을 가르쳐야 할 그들이 복음적인 의미에서 진리에 대해 무지하였으며 복음의 능력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로버트 할데인은 여러 번 그들을 만났고, 결국에는 그들을 돕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로버트 할데인은 이 학생들을 초청했습니다. 그 학생들은 다른 친구들도 데리고 그의 방으로 왔습니다. 그는 그 학생들과 함께 이 로마서를 가지고 한 절 한 절 연구하며 파헤쳐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로마서의 위엄에 차고 영광스러운 진리들을 접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단치 아니한 모임이 귀한 몇 사람의 회심을 불러왔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멀레 드와우비그네라는 사람인데, 여러 방면에서 표준적인 종교개혁자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또 고센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성경 영감에 대한 훌륭한 책을 쓴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 다 그 모임에서 회심했습니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능력있는 사람들이 되고 위대한 교사들이 된 것은 궁극적으로 따지고 보면 로버트 할데인이 로마서를 강해한 결과입니다.

 

 

 

6. 로마서의 가치와 위대성에 대해 증거한 몇 가지 간증들

 


 로이드 존스는 이처럼 교회사를 통한 로마서의 가치를 언급한 후 로마서의 가치에 대한 몇몇 간증을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1) 존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초대 기독교회의 위대한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별명은 “황금의 입”이었습니다. 교회가 알았던 가장 웅변적인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존 크리소스톰 입니다. 그는 “로마서가 너무나 놀라운 서신이라서 매 주마다 두번씩 읽었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로마서의 메시지를 얻기 위해서 로마서의 말씀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2) 마틴 루터

 


 위대한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로마서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 서신은 신약 가운데 최고의 부분이다. 또한 로마서는 가장 순전한 복음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마음으로 한 마디 한 마디 다 알아야 할 뿐 아니라 매일 영혼의 양식으로 삼고 섭취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로마서를 아무리 많이 읽는다 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아무리 깊이 생각한다 할지라도 결코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로마서를 다루면 다룰수록 그 로마서는 더 많은 기쁨을 가져다 주며 더 좋은 맛을 낸다.”

 


 루터는 로마서를 배우고 암송하고 마음으로 알고 부단히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 로마서는 더 많은 기쁨을 가져다 주며 더 좋은 맛을 내기”때문이라고 합니다.

 


3) 사무엘 테일러 콜레리지

 


 로이드 존스 목사는 영국 문학사에 있어서 가장 예리한 지성을 가진 사람 중 하나로 사무엘 테일러 콜레리지를 꼽습니다. 그는 영국 문학 뿐 아니라 독일 문학에도 정통하였으며 여러 고전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로마서를 가리켜 “존재하는 저작 중 가장 심오한 작품”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로이드 존스는 여러가지의 것들을 말하며 로마서의 중요성에 관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로마서의 가르침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나는 이 로마서에 대해 그 모든 요점들을 알고 있는가? 내가 성경을 통독해 나갈 때 로마서에서 멈춰서서 오랜 시간을 이 책에 드린적이 있는가? 또한 로마서의 깊은 심오성을 인식한 적이 있는가?

 


 여기까지가 로이드 존스가 언급한 서론적인 것들입니다. 그는 이어 로마서 자체를 생각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로마서의 첫 단어는 바울인데 로이드 존스는 ‘바울에 대해 다루어 나갑니다.’ 로마서는 바울이라 하는 사람에 의해서 쓰여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멈추어 서서 ‘바울’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7. 바울은 누구인가?

 


 바울은 로마서를 쓴 사람의 이름입니다. 그는 로마라는 큰 도시에 살고 있는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로마 시는 당시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던 도시였습니다. 로마서라는 편지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이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교회에 이같은 편지를 쓰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우리는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의 내력에 대한 간략적인 개요를 접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어떠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빌립보서의 3장 부분을 읽어야 합니다. 이 일이야말로 가장 기이한 일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로마서라고 하는 책보다 더 기이한 일은, 바울이 이 로마서를 로마에 살고 있는 이방 사람들에게 써보냈다는 사실입니다.

 


1) 바울의 회심에 관하여

 


 엄격하고 완고한 민족주의자 유대인,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다 미워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모독자로 간주했던 사람, 그래서 기독교회를 멸하려고 애썼던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메섹에 있는 작은 교회를 근절시켜 버리기 위해서 살기등등하고 위협적인 자세로 다메섹을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그 사람의 인생 전체는 바뀌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리를 보호하는 위대한 변호자가 되었으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처럼 바울의 회심에 대해 말하고 난 후 바울이라는 그 사람 자체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2) 바울이라는 그 사람 자체에 관하여

 


 그 사람은 천성적으로 비상하고 예외적인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의심할 여지없이 위대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교회 내에서 뿐 아니라 세상적으로도 그러하였습니다.

 


 거기다가 그의 출생과 그의 성장과정과 학문적 수련을 주목해 보십시다.

 


‚ 무엇보다 그는 먼저 한 사람의 유대인이었습니다.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였습니다.

 


ƒ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바리새인으로 수련받았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우는 특권도 얻었습니다. 가말리엘은 그때 당시 바리새인들 중에서 가장 큰 선생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유대 율법에 대해선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다른 모든 사람들을 능가했음을 말해 주기도 합니다. 즉 모든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을 정도로 지식과 정보를 쉽게 흡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그러나 그에게는 또 하나의 특기할 사항이 있었는데 로마 시민으로 태어났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가 잡힌 후에 자기를 변호해야 했을 때 “결코 작지 않은 도시”(로마)의 시민임을 밝히고 자기가 자유인으로 태어났음도 고백합니다. 그는 로마의 자유인이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로마의 시민이었던 것입니다. 다소에서 태어난 바울은 날 때부터 로마의 자유시민이었습니다.

 


…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또 다른 요점은 그가 다소라 불리우는 도시에서 자라났다는 것입니다. 다소는 그 당시 헬라 문화의 주요한 세 중심지 가운데 들어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는 문화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헬라 시를 알고 그것들을 인용할 수 있었습니다. 헬라 철학자들의 저작들을 알고 있었고 또한 인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일 뿐 아니라 혈통적인 의미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으며, 거기다가 이 놀라운 헬라 문화의 배경을 최고로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가 이 모든 것을 상세히 말씀드리고 있는 이유를 아십니까? 그는 이제껏 언급한 내용에 대한 이유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로마서는 하나님께서 두 가지 특별한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능한 사람을 일으키셨음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로이드 존스는 지금껏 길게 언급한 것입니다.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1) 첫째는 유대인들이나 유대교에 맞서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어떠한 사람들보다도 다른 사람들과 논쟁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으로 가보면, 신앙 문제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마저 면박해야 했음을 발견합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유대인들이 오자 그들을 두려워해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그만 두고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교가 무서웠던 것입니다. 그때 바울이 어떻게 합니까?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참된 이해를 갖도록 해줍니다.

 


 또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사람이 고안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구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바울은 바로 구약의 교훈과 신약의 교훈을 조화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에 그의 뛰어난 지성이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2) 바울이 소명받은 두 번째 큰 일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서 15장에서 그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점에 있어서 그가 로마 시민이었다는 것이 값으로 따질 수 없이 귀했음을 보여줍니다.

 


 헬라 문학과 문화에 대한 그의 지식이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음에 틀림없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전할 복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뿐 아니라, 자기의 전도를 받는 사람들을 이해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 그는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율법없는 자에게…율법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그는 유대인으로서 말할 수 있었습니다. 또 이방인으로서도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두 문화의 배경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나타낼까,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복음을 전할까를 압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바울의 경우야말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성취하시는 기이한 방식을 숙고할 때 참조할 놀라운 실례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질문1) 성령과 그의 사역이 인간의 천성적인 재능과 배경에 대해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즉 성령께서는 인간의 천성적인 재능과 배경은 아예 무시하며 역사하시는가 아니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배경을 사용하시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사람이 일단 회심하여 성령의 은사만 받으면 다른 것은 그 어느 것이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필요한 것은 회심과 성령의 은사이며, 천성적인 재능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이 성령 충만을 받으면 다른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령은 완전한 능력을 지니신 분이다. 그러니 바울이 유대인이며, 헬라 문화에 대해서 무언가 알 수 있으며,로마 시민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다. 사람이 거듭나서 회심하고 그 속에 성령을 모시고 있으면 그만이지 다른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바울의 글 속에 그러한 생각을 하도록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말씀을 기초하여 사람이 가진 천성적인 재능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영리하든 그렇지 못하든간에, 학식이 있든지 없든지간에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성령의 능력만이 문제일 뿐이다.’

 


 이 말의 의미는 복음의 일과 관련하여 천성적인 재능, 위대한 천성적인 능력도, 총명이나 지식이나 학문적 수련도 그렇게 많지 않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자격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8.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용한 사람들  

 


 로이드 존스는 그러한 것이 왜 우리를 속이는 것인지 성경을 통해 교회 역사를 통해 잘못된 논리를 배격하기 시작합니다.

 


1) 성경 자체가 그 논리를 배격합니다. 성경을 통독해 보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용한 사람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모든 직종마다 주목할 만한 사람들이었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비상한 방식으로 그 사람들을 예비하셨던 것입니다.

 


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천성적인 재능도 갖고 있었고 바로의 집에서 학문도 터득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그를 준비시켰습니다.

 


‚ 다윗 같은 사람도 보십시오. 그의 시편을 읽어보십시오. 그는 얼마나 놀라운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얼마나 걸출하게 유능한 사람이었습니까!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감동적인 그의 언어를 주목하십시오. 그는 무엇보다도 위대한 시인이었습니다.

 


ƒ 한 설교자로서 수련을 받았던 예레미야 같은 사람을 보십시오. 그의 논증방식을 주목해 보십시오.

 


 성경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을 그런 식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신약에 이르게 되면 바울이된 이 다소 사람 사울만이 그와 유사한 수련을 받았던 것이 아닙니다.

 


„ 사도 요한도 분명히 동일한 경우입니다. 요한이 그렇게 철저한 수련을 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분명히 상당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2) 교회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용한 사람들

 


 교회 역사에서도 그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 마틴 루터, 존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 존 웨슬레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은 천성적인 의미에서 비상한 재능들을 받은 걸출하고 유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고 교회를 발전케 하시려는 큰 뜻을 이루시는데 이 사람들을 가장 뛰어나게 사용하신 것 같다라고 로이드 존스 목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 점으로부터  몇 가지 원리들을 끌어냅니다.

 

 

 

9. 천성적인 재능과 능력으로부터의 몇 가지 원리

 


 1) 천성적인 은사는 그 자체로 나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천성적인 재능을 부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 스스로가 자신의 재능을 만들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자기의 재능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모든 재능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성적인 재능들을 깎아서 말하는 것은 비성경적이요, 비기독교적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무지나 우둔함을 편들어 올려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그러한 무지나 우둔함의 범주로 떨어지면 이(利)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2) 두번째로, 천성적인 재능은 의지할 것이나 자랑할 것은 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있어서 문제되는 것은 그들에게 은사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자랑하고 떠벌렸다는데 있었습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나 그러한 자세는 다 비난을 받습니다. 은사들(재능들) 자체에는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랑하고, 그런 것들을 가졌으니 내게는 성령이 필요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분명히 천성적인 재능들을 내버려두거나 제쳐놓지 아니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그것들을 조정하시고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나타난 그러한 사람들을 사용하신 방식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행하신 일은, 재능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들어서 사용하시고 채용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질서와 논리와 논증력과 힘을 가지고 이 서신을 써내려가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을 것입니다. 천성적으로 다소 사람 사울이 가졌던 이 모든 천성적인 특징과 속성들이 성령께 붙잡혀 이 로마서에서 그 대단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성령께서 바울에게 불러준 대로 받아적으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기계처럼 불러주시는 대로 적는 문서 기계가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그의 천성적인 재능을 사용하셨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천성적인 재능이 이 로마서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처럼 뛰어난 재능들을 어떻게 가질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조차도 그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의 천성적인 재능도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 것입니다. 바울이 다소에서 태어나도록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를 준비시켰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시킬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적시에 그를 부르셨습니다. 마틴 루터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이 사람은 종교개혁을 이룬 선봉장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수도사로서 수련을 받았고 로마 가톨릭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취하여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사용하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절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사람을 예비하셨습니다. 십 수 세기에 걸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어 이 모든 점들에 대해 우리가 받을 교훈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10. 교훈

 


 여러분이 최근에 회심하셨습니까? 좋습니다. 그렇다면 마귀가 여러분의 모든 천성적인 재능들은 무가치하며 소용없다고 생각하게 만들 것인데 그 시험에 빠지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회심하기 전의 삶 속에서는 여러분 자신의 개성을 여러분 마음대로 사용하였습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새로운 상황 속에서 사용하시길 원하십니다.

 


1) 당신의 재능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라.

 


 옛 삶과 사업과 죄악 가운데서 여러분은 자신들의 재능을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재능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 맡겨진 임무를 감당하는데 역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로이드 존스 목사가 여기서 발견하는 교훈입니다.

 


2) 각자의 재능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려라.

 


우리는 모두 다 재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그 재능들을 하나님께 돌려드리십시오. 여러분은 다른 어느 누구와 똑같이 행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도록 창조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방식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방식대로, 다른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다양한 방식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각 파트별로 나누어 힘찬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는 큰 성가대처럼, 모두 합하여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과 창조계를 통해서 역시 같은 일을 행하십니다. 같은 꽃이 하나도 없고 같은 새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마다 그 나름의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다양성과 매력을 통해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바울-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터를 닦고 유대교를 대항하여 진리를 파수하고, 진리의 모든 영광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앞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구별되었습니다.

 

 

 


제2장 로마서 분해 (롬 1:1~7)

 


 우리는 로마서의 가치와 중요성 그리고 사도 바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다음의 요점은, 이 서신을 받았던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1. 로마서를 받았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바울은 1장 7절에서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이 편지를 써보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가 다른 곳도 아닌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써보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로마! 그곳은 어떠한 곳입니까? 사람들이 생각해 왔던 대로, 도덕이 땅에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러한 환경 가운데 거한 자들이었습니다. 도덕이 땅에 떨어진 곳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 사람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도덕이 땅에 떨어진 로마에서 어떻게 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까? 오직 하나의 설명만이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16절에서 그 하나의 설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다른 어떤 것도 로마 제국과 로마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할 수 있었습니다.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복음은 도덕이 땅에 떨어진 로마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결과 사도 바울은 지금 그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2. 어떻게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는가

 


 그렇다면 로마의 교회는 어떻게 세워졌을까요? 사도 바울이 로마에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이 교회가 어떻게 하여 생겨나게 되었습니까?

 


1)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날에 예루살렘의 명절에 여러 제사장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 중에 로마에서 온 사람들도 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던 삼천 명 가운데 로마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아마 그들이 로마에 돌아가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메시지를 전하며 자기들의 삶을 통해서 그 메시지를 드러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로마 교회가 생기게 된 한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2) 그러나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로마는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곳이었습니다. 여러 지역의 군인들과 그 밖에 다른 보통 사람들이 그 로마를 왕래했습니다. 우리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 대해서 듣습니다. 그들이 로마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로마에 갔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로마를 향하여 여행갔다 오기도 하였습니다. 얼마간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로마에 갔었을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바울의 편지를 받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로 그 두 노선을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유대인도 있었고 이방인도 있었습니다.

 

 

 

3. 로마에 있는 교회의 성격

 


 이제 로마에 있는 교회에 대해 살펴보십시다. 16장은 이 부분에 대한 이해에 있어 중요한 장입니다. 일단 로마 교회의 구성원이 여러 부류의 사람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들 중에는 얼마 간의 유대인들-회심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된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마 그 교회를 차지하고 있는 대다수는 이방인들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 다른 매우 재미있는 일은, 16장에서 언급되는 이름들의 목록은 많은 노예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지시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네‘집의’사람들을 언급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그것은 그 어느 집의 노예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습니다. 

 

 

 

4.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쓰는 이유

 


 그렇다면 이제 어째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져 보십시다. 편지를 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1절에서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견고케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이란 구원받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끝이 아닌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도는 16장 17절과 18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즉 신자들은 기독교의 교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이유는 어떠한 자들이 매력있는 말로 기독교에 대해 가르쳐도 그것이 거짓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무식한 신자는 거짓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그러한 가르침이 성경적이냐 비성경적이냐를 분별할 수 있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처럼 이 같은 시급함이 절실한 때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복 받는 종교로만 간주합니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그저 주일에 한 번 교회 나오는 걸로 생각합니다. 어떠한 자들은 새벽예배를 복 받는 최고의 통로로 삼습니다. 헌금도 더 많은 물질을 받기 위해 합니다. 왜 그들이 그러합니까? 성경적 가르침과 비성경적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신자들은 구원받은 것이 끝이 아닌 것입니다. 구원받은 신자는 필히 견고해 져야 합니다. 거짓된 가르침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분별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견고해지기 위해서는 이 위대한 로마서를 연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는‘누구’를 믿는 가 뿐 아니라, ‘무엇’을 믿는가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죽고 사는 것’만큼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 때문에 죽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 교리를 좋아하지 않아, “만일 사람이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계속 주장한다면 너를 불태워 죽일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누구’를 믿는가만을 알았던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을 것인가라는 것도 알았기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교리를 저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화형대에 올라가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들은 기쁘게 타 죽어갔던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믿는지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신칭의의 교리가 너무나 사활적이고 중요하기 때문에 어떠한 댓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버릴 수는 없었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할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독교의 교리를 아는 것이 그처럼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단지 구원받으면 그만이지 내가 기독교의 가르침을 일일이 안들 무슨 상관인가? 나는 신학 박사가 직업이 아니다. 나는 설교자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으면 그만이지 기독교 교리를 알고자 내 시간과 돈을 허비할 수 없다라고 은연중 자신에게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교리보다 하나님께 잘 보여  이 땅에서 복 받는 비결을 알고 싶다. 십일조가 아닌 십의 이조를 해야 더 많은 복을 받을까? 예배 때 마다 감사헌금하면 남들보다 더 많은 복을 받을까? 나는그것을 알고 싶지 교리는 알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노예로 살고 있는 자들에게 로마서라는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견고케 하기 위해 편지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의 견고를 위해 거짓된 가르침으로부터 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선 기독교의 가르침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우리의 사활을 좌우하는 것도 없습니다.  

 

 

 

5. 로마서의 교훈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위대한 로마서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이 서신에 대해서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로마서가 항상 어려워서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자, 그러니 로마서를 전체로 살펴봅시다.

 


 1장에서 11장까지는 교리적인 부분이요, 나머지 12장부터 16장까지는 실천적인 부분-이미 설정된 교리를 적용하는 부분입니다.

 

 

 

 먼저 1장 1절로 15절에서는 우선적인 문안인사를 하고 있으며, 주제를 보편적인 입장에서 도입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즉각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와 같이 그 주제는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문안인사를 드리고,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런 다음에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쓰려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복음은 무엇입니까? 그는 1장 16절에서 4장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그의 대주제를 세밀화시켜 나가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 다는 교리의 차원에서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줄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구원할 길을 소개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그래서 우리가 가진 구원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어떤 인간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요, 바울이 감격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1장 16절에서 4장 마지막까지 바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 문제를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십시다.

 

 바울의 첫 번째 요점은 누구나 그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이 필요합니다. 18절에서 1장 마지막까지 이방인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보여줍니다.

 2장에서는 유대인들도 동등하게 그것이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2장의 논증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2장 끝에까지 이르렀을 때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 중 누군가가 “아주 좋습니다. 그럼 당신은 유대인이라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고 있군요. 또한 유대인들이 특별한 백성이 된 적도 없고 특별한 지위에 선 적도 없고 더 나아가 율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 있군요”라고 반문할 것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반문을 하는 사람에게 말합니다. “그 점에 대해 실수하지 말라.” 3장 1절로 20절까지 바울은 유대인의 중요성과 특권을 밝혀 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어떠한 일을 의도하셨는지 보여줍니다.

 


 3장 마지막 문단인 21절로 31절까지에서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를 힘있고 거대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품 때문에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일을 행하신 방식을 보여줍니다. 다른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신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에 부합하고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4장으로 넘어오면 바울이 또 다른 거대한 일을 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4장에서 그는,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3장에서 말한 방식대로 즉 인간의 행위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에 이르며 언제나 믿음의 차원에서 사람을 대하시고 복주셨음을 증거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시편을 들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 가르침에 대하여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을 살펴보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언제나 믿음의 원리에 입각해서 사람들을 대하고 계심을 발견할 것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4장은 바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구원의 방식이 새로운 원리를 전혀 도입하지 않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장입니다.

 


 그렇다면 5장 1절에서 8장 마지막까지 사도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사도는 다음과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곧 이 위대한 구원의 확실성과 온전성과 최종성을 밝히 드러내며 역설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한번 이루어진 신자의 구원은 그 누구도 그 구원으로부터 이탈시키지 못한다는 구원의 안정성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방식이 그리스도인의 미래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5장부터 8장까지 이렇게 분해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구원에 있어서 절대 안전한 자리에 있습니다. 어째서? 바울은 세 가지로 답합니다.

 


1) 먼저 그 구원이 하나님의 행사이기 때문에 안전합니다-구원은 불완전한 그리스도인 자신이 이루어 나가는 것이 아닌 완전하신 하나님의 일입니다.

 


2)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시는 방식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안전합니다. 그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켜 그리스도와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3) 세 번째 확실한 근거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내 안에 계셔서 힘있게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위의 세 가지 주제를 소개하고 있는 5장 1절로 10절까지 그 점이 어떻게 드러났는가를 지적해 보겠습니다.

 


 11절에서 5장 마지막까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를 특별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모두 그전에 아담 안에 있었기 때문에 다 죽은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어 생명을 가지게 되었는지 다루고 있습니다. 아담 안에 있을 때의 우리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의 우리를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6장과 7장으로 나아가 봅시다.

 


 그는 여기서 자신과  반대되는 하나의 주장과 처리하기 어려운 일을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 5장 끝까지 들은 다음에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을 상상해 보는 것입니다.

 


 “바울, 당신은 이제 갑자기 구원받았으면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거요? 당신은 지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는 더욱 넘쳤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 사람이 어떻게 살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바울은 7장에서 “그럴 수 없다”라는 말로 잘라 말하며 그 무서운 억측을 지적하고 공격합니다.

 


 6장에서 매우 실제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매일의 삶과 죄짓는 문제의 차원에서 다루어 나갑니다. 어떤 자가 바울에게 말하길 “사람들이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실정인데, 죄를 이기기 위해서 율법에 따라 살라고 말하지 않고 있소”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장사지낸 바 되었으며, 그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처음과 같이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그러한 자는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 죄를 짓는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아담과 상관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믿더라도 율법을 계속 순종해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

 


 그런 다음에 7장에서는 계속 율법의 차원에서 그 문제를 다루어 나갑니다. 바울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복음을 믿더라도 율법을 계속 순종해야만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7장에서 그 문제를 거론하며 “보세요, 당신은 율법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멈추어야 합니다. 당신은 율법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한 남자와 결혼했던 여자가 그 남편이 죽으면 자유롭게 되듯이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율법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와졌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율법을 그러한 차원에서 생각하지 마세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계속해서, 죄의 깊이와 능력 때문에 과거에 율법이 어느 사람도 구원할 수 없었으며, 장래에도 아무도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7장 하반부의 논증입니다. 전반부에서는 우리를 정죄할 수 있는 율법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주고, 후반부에서는 내가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율법지키는 일에 의지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의 노력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결할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그리고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말하며 끝을 맺습니다. 즉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들어보라 너희를 구원하고, 앞으로도 구원하여 끝내 영광에 이르게 할 것은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그 사실이다-그 밖에 다른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그리고 8장으로 이어지는데 7장과 8장 사이에는 조그마한 틈이나 이음새도 없습니다. 그저 줄곧 계속되어 나갈 뿐입니다.

 


 8장 처음 네 구절에서 자기가 도달한 결론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안전한 것입니다.

 


‘우리를 정죄할 자 누구입니까?’외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그럴 리가 만무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으니 그리스도도 그러실 수 없다. 그러면 어느 다른 곳에 누가 있는가? 아무도 없다! 사람이 정죄할 수 있는가? 환난이 그럴 수 있는가? 절대 아무것도 그럴 수 없다. 어떠한 것도 나로부터 이 구원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러분은, 5장에서 8장까지의 전체 주제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안정성,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내 종말은 안전하다’는 문제임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그 다음에 비약적으로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그런 다음 9, 10, 11장에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기만 하면 이 모든 일이 이전에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과 서로 모순되기는 커녕 사실상 일치함을 보여줍니다. 바울의 논증 중 중요한 진수가 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모순되게 행동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는 여전히 오늘도 같은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이 교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위대한 교리인 것입니다.

 

 


제3-4장 그리스도의 중심성, 바울의 사도적 자격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신약에 나오는 모든 서신의 서론 부분을 주의 깊게 주목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일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의 서신은 더욱 그러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서론적인 진술들을 무시함으로써 크고 중차대한 기쁨들을 놓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론적인 부분들을 신중히 생각하고 넘어갈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서론적인 부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를 방문한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로마에 있는 몇 사람의 그리스도인들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으며, 그 대다수의 사람들도 바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사도는 아무렇게나 서론적인 부분을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는 어떠한 의중을 가지고 서론적인 부분을 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왜 사도는 이러한 식으로 서론적인 부분을 시작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좋은 태도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말을 먼저 살펴봅시다. 바울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신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너희에게 편지를 쓰는 이 사람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은,‘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말로 해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에 관해서‘예수 그리스도의 종’ 이라는 것 외에 그 밖에 자신에 대해 다른 것을 알든지 모르든지간에,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한 관심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의 삶의 중심이 된 그리스도를 즉각적으로 생각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전존재는 이 분을 중심으로 두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자신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은 대번에 이 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교리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았던, 이른바 베들레헴의 어린 아이로, 소년과 성인 남자와 목수로 살았던 인간 예수-예수 그리스도의 그 모든 것을 빠뜨리지 않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닙니다.-예수님은“그리스도”이십니다.“그리스도”는 기름부음받은 자, 어떠한 특별한 일은 위해서 하나님께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란 의미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사도의 교훈의 핵심이었습니다.

 


1) 사도의 교훈의 핵심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사도행전으로 가서 그의 사역과 교훈에 대해서 쓰여 있는 기사를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바울이 정말 그런 식으로 설교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의 설교에는 언제나 두 가지 중요한 요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 했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예수, 또는“우리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세상의 구주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이 계십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 점을 즉시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 바울의 주제입니다. 고린도에 있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사람들 가운데서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바울의 오직 유일한 테마, 자기 가르침의 맨 앞에 언제나 내세워야 하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과 끝이었고,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을 테스트 해 볼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즉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과 생각과 일체의 삶속에서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는가? 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것을 이해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울처럼 그것이 우리에게도 해당되는가? 라는 것입니다. 서로간의 대화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신앙 체험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혹은 그리스도가 주신 선물들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말하며 그러한 것들만을 듣고 싶어하지 않느냐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행한 놀라운 일들과 신비로운 체험들에 대해 매우 길게 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에 있는 이 사람들에게 자신이 행한 놀라운 일들이나 기적적인 체험들에 대해 말하기 위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쓰길 원합니다. 그래서 즉각 그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칭호를 자랑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바울은“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어휘를 통해서 무엇을 뜻하고 있습니까? 먼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 말을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다고도 봅니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종’이기 때문입니다.

 


①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성경 구절 

 


 고린도전서 6장 19절~20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그것이 바로‘구속’이란 말의 의미입니다. 구속은 사단, 마귀의 지배를 받으며 노예 아래 있던 곳에서 해방됨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나 바울은 너희와 같은 사람이다. 나도 너희 중 하나가 되어 너희에게 속해 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죄인이다. 그것 외에는 나 자신을 위해서 할 말이 없다. 나는 핍박자였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였으며 해를 끼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긍휼을 얻었다.”

 


 그는 구출받고 구속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말해야 되는 첫 번째 요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우리 모두도 다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그리스도인 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는 원래 마귀의 노예로 태어났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배 피로써만 그 종노릇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정확히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유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팔려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고 종인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죄와 사단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주님이 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코 자유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무소속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전에 사단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들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주님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그러나 여기에 더 나아가서 바울은“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어휘를 통해 바울 자신은 주님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말하고 싶어합니다.

 


 ‘나는 그의 노예이다. 그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순종하는 노예이다. 그는 나를 샀을 뿐 아니라, 나도 다른 어떤 것도 원치 않는다. 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어느 누구도 내 주인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다른 어느 누구도 내 상전이 아니다.’바로 이러한 바울의 태도를 통하여 우리 역시 이렇게 말해야 되지 않을까요? 나는 마지못해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노예가 아니라 기꺼운 마음으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한다.

 


 세 번째로 그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바울은 자기가 관심을 둔 자들에게 개인적인 자격으로 서신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써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할당된 특별한 임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점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라는 한 사람의 개인적인 자격으로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자격으로 자신에게 할당된 특별한 임무로 편지를 쓰고 있음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2.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그런 다음에 우리는 두 번째 어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라는 어구입니다. 여러분이 신약성경을 읽을 때, 어떠한 자들은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여러 반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주님과 함께 다니지 아니하였고 주님의 가르침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주님이 가시고 난 다음에 온 사람은 결국 사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바울을 반대하는 자들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사도가 아닌 자가 스스로 전도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것은 교회를 잘못 인도할 수 있다 등. 여러가지로 바울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자기의 거의 모든 서신들에서 자기가 사도이며, 사도로서 편지를 쓰고 있으며, 열 두 사도 못지 않게 자기도 사도라는 것을 매우 강력하게 밝히는 것을 법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1) 사도란 칭호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도란 칭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직무적인 칭호요, 매우 특별한 칭호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과 2절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예수께서 그 열 두‘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마태는 처음에는 그들을‘제자들’이라 부르고, 그 다음 번에는‘사도’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바꾸었습니까? 모든 제자들이 사도가 아닙니까? 사도가 아닐 수 있습니다. 제자이면서 사도는 아닐 수 있습니다. 제자와 사도는 동의어가 아닙니다. 사도들이 된 것은 오직 몇몇의 제자들 뿐입니다.

 


 누가복음 6장 12절과 13절에 나와있습니다. 특히 13절에 나와있습니다.“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대단히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무리들 가운데 주님은 일부러 열둘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만을 향하여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란 어떤 매우 특별하고 고유한 직무를 지시하는 칭호란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 두 사람만이 그런 의미에서 선택을 받아 지명받았습니다.

 


2) 사도는 어떠한 자인가?

 


 그러면 “사도는 어떠한 사람입니까?”일차적으로 사도는 한 특별한 사명을 위하여 선택받아 파송된 자로서 자기를 보내는 자를 대표할 충분한 권위를 입은 자입니다.

 


3) 사도의 표지와 증표는 무엇인가?

 


 그러면 사도의 특징과 사도됨의 증거는 무엇일까요?

 


① 첫 째로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 못하면 어떤 사람도 사도가 될 수 없었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장으로 가보면 자살한 유다를 제외한 사도들이 다락방에 모여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뽑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21절과 22절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부활을 목격하지 아니하고는 사도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는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120명의 무리들 속에 있지 않았습니다. 사도는 고린도전서 9장 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바울은 고린도에서 자기의 이 사도 칭호를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변증해야 했습니다. 자기가 사도라 하는 사실을 증거해야 했다는 말입니다.“내가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나?”“나는 부활하심을 목격한 자이다. 나는 사도이다.”그것이 바로 사도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② 사도가 되기 위한 두 번째 요점은 특별히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되려면 스스로 사도가 되겠다라는 것이 아닌 주님 자신에 의하여 분명하고 특별하게 “부르심을 받아야”합니다.

 


③ 세 번째 요점은 사도는 어떠한 일들을 수행하기 위한 권위와 임무를 받은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이적을 행할 권위와 사명을 받은 것이 그 일들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사도의 증거됨은 이적과 기사와 능력행함이었습니다. 그것이 사도의 또 다른 특징입니다.

 


④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도는 영적인 은사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을 받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는 어떤 은사들을 안수함으로 줄 수 있는 권능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의 권위와 사명에 대한 또 다른 특징이었습니다.

 


⑤ 그러나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가르치고 교리를 정립하고 진리 안에서 사람들을 견고케 해주기 위해서 받은 권위입니다.

 


⑥ 그 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교회들의 질서를 세우는 권위도 받았습니다. 그들은 감독들을 세웠고 장로들을 지명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르침과 교리에 관하여 결정할 수 있는 권위있는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모든 것이 사도에게 해당됩니다.

 


4) 사도의 여러 특징에 관한 결과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의 결과는 어떠합니까? 이 사도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권위를 가지고 말하노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말하니 자기들의 말을 사람의 말로 듣지 말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로 들어야 한다고 진술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말합니다.“…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바울은 자신이 전한 말이 바울이라는 인간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바울의 말이 인간의 말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5~16).

 


 베드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이 사도 바울의 글이 성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른 성경과 같이 라고 말하는데, 그 성경은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구약성경과 바울의 서신에 동등한 권위를 부여합니다. 그러므로 이 점은 우리에게 대단히 의미있는 일입니다. 즉 사도들이 선포한 말이나 여러 서신서에 쓰여진 기록된 말들이 단순한 인간의 말이 아닌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하나님께 권위를 받아 그 말씀들을 기록하였습니다.

 


 초대교회가 어떠한 방식으로 신약 정경을 결정한지 아십니까? 그 당시 수많은 기독교 문헌들이 있었습니다. 그 많은 것들 중 어떠한 것들은 성경으로 받아들이고 어떠한 것들은 빼야 할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결정하도록 초대교회를 인도하셨습니다. 복음서나 서신서로 제출된 문헌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사도적 권위를 가진 사도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면 정경에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독특한 권위를 가진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도는 교리와 진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전했습니다. 전한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신약성경이 된 것입니다.

 

 

 

3.“부르심을 받아”

 


 왜냐하면 “바울”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1절의 말씀입니다.“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바울은 스스로 사도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자들은 자신이 사도라고 하며 다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선택된 사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적인 행위로 선택된 사람”입니다. 열 두 사도가 부르심을 받은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도 열 두 사도와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과 동등한 자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의 최고 원수였던 사람을 사도로 선택하셨습니다. 주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실 때 자기와 함께 하지 않았던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듣지고 않았고 예수께서 이적 행하는 것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또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열 두 사도들과 같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후 사도들이 다락방에 모였을 때 그 자리에 바울! 그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그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핍박하며 기독교를 잔멸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다른 사도들과 똑같이 사도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바울은 말합니다.“주께서 나를 부르셨다. 나를 선택하시고 다른 자들에게 권위를 주셨던 것과 똑같이 나에게도 권위를 주셨다”(고전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그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승천하시기 전 40일 동안에 본 것이 아니었지만 그로부터 한참 후, 오순절날로부터 한참 후, 주님께서 특별하게 선택하신 증인들에게 자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나타내주셨을 때로부터 한참 후에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핍박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던 바리새인, 혈기와 살기가 등등하여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내려가던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4. 사도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떠한 자들은 말합니다. 인간이 쓴 편지가 어째서 오류가 없는가?“그것을 무조건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버릴 것은 버려야지 인간이 쓴 단순한 편지를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성인다운 면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11절과 12절에“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에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음 것이라.”그는 다른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사도는 자기가 전하는 진리는 어떤 인간적 교사를 통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에 의해서 자기에게 전해진 것이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그렇기에 그가 쓰는 편지는 개인 편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부르심을 받아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 독특한 권위를 가지고 쓴 편지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기록해 두셨습니다. 그렇기에 신약성경은 인간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인 것입니다. 개인의 신앙 교리와 삶의 적용을 위한 유일한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반문1) 사도라는 말에 왜 그리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가?

 


 지금까지 이러한 말씀을 듣고 있던 가운데 어느 이가 저에게 이렇게 반문하고 싶어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별 중요하지도 않은 것 같은 것에 대해 왜 그리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사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한번 훑고 지나가면 되는 것이지 왜 그리 많은 시간을 허비하므로 듣는 이들이 별 흥미 없어 하는 것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습니까? 오히려 듣는 이들로 하여금 짜증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까?”

 


답변1) 사도적 계승은 전혀 없기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실수를 범할 수 있다.

 


 저는 오늘날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고 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문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왜 이처럼 오랜 시간동안“사도”라는 것에 대해 많은 시간을 허비 한 줄 아십니까?  더 이상 사도적 계승 같은 것은 없다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교황의 말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교황의 말은 틀린 것이 없다라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가톨릭에서 분리되어져 나온 개신교에서도 똑같은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목사가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임으로 의심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성경보다 더 권위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닌 목회자가 무엇을 말하느냐를 더 우선시 합니다.

 


 더 이상 사도적 계승은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척도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해석하고 전하는 설교자에 대해 무조건 비판적인 자세로 말씀을 듣는 것 역시 올바른 태도는 아닙니다. 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설교자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더 앞세우는 우(愚)를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서만 성경을 알아가서는 안됩니다. 내 자신이 적극적으로 성경을 읽고 그에 관련된 저서들을 읽으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더욱더 명료히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사도는 자신에 관하여 사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택정함을 받은”이라는 말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그 말은‘구별 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선(線)이 그어지고 사람들이 따로 구별됩니다. 그처럼 자기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따로 구별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따로 구별되었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회심 전에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바리새인’이라는 용어의 의미는‘구별된 자,’따로 떨어진 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분리시켰습니다. 그들은 거리에 나가서 길을 걸을 때도 다른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들의 옷자락이 다른 사람에게 닿아 부정해지지 않도록 조심하였습니다. 죄인들과 세리들과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바리새인입니다. 즉 사람이 구별한 사람의 구별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구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구별시킨 자입니다. 참된 구별! 과 거짓된 구별! 사람의 구별과 하나님의 구별인 것이다.

 갈라디아서 1장 13절로 14절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 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그런 다음에 15절과 16절에서“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았습니다. 언제 그러한 일이 일어났나요? 그 어머니의 태로부터-그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기 오래 전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경을 기록하기 위해 하나님께 택정함을 받았습니다. 지금 그는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씀으로써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1장 5절에“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가 모태에서 나오기 전에 그를 아셨고 그를 구별시켰고 세우셔서 열방의 선지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바울 역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낳기 전에 복음 전도자로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6. 하나님의 주권 교리

 


 이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힘있는 교리를 대면하게 됩니다. 바울의‘소명’은 한참 생각하다가 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연한 사건들과 환경들이 바울이 사도됨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미리 아심과 경륜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부활하신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모태로부터 택정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가 다소 사람으로 태어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또한 헬라 문화와 히브리 문화를 서로 같이 호기심있게 살펴보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로마 제국의 시민으로 태어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영원 전에 세우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의 일부입니다. 곧 바울이 태어나기 전만이 아니라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속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생각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언제 그것을 나타내셨습니까?“하나님의 때가 차게 될 때”-바로 그 순간에-하나님께서 행동하시고 자신의 방식대로 행하십니다.

 


 여러분 중 누군가는 바울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그 순간에 그 옆에 서서 지켜보며 그 발 앞에 자기 옷을 벗어 던질 때 회심할 만도 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하나님을 모독하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기등등하게 행하도록 내버려 두셨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과 위배되는 다른 많은 일도 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만 알려진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도저히 회심할 수 없을 때 회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그가 낳기 전 모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복음의 일을 위해서 그를 구별시키신 것은 바로 그 모태에서였습니다.

 

 

 

7. 우리의 구원은 창세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다.

 


 바로 이것이 여러분과 제 구원에도 해당됨을 바울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나의 구원이 결정된 것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입니다. 창세 전에 우리의 이름들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써 있었습니다.

 


 그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보다 더 놀랍고 엄청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여러분을 아시되 개인적으로 아셨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처럼 위대하시고 높으시고 영존하시고 영원하신 데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를 하나하나 아십니다. 그것은 큰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놀랍고 기이한 일입니다.

 


 영광스러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려다 보시며 하나하나 아신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향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친밀한 방식으로 우리를 아시고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사실을 확고히 믿으며 늘 자신의 삶에 있어서 이와 같은 위대한 진리를 인식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에게 어떠한 일들이 벌어집니까? 참으로 그리스도인다운 마땅한 사람이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벧후 3:11~12)자들이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제5장 “복음”이란 말의 의미

 


 …하나님의 복음은…(로마서 1:1).

 


 사도 바울은 1장 1절에서 말하길“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우리는 이‘복음’이라는 말과 너무 친숙한 나머지, 그 복음의 깊고 엄청난 그 의미를 인식하지 못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아니 대부분의 삶 가운데 복음의 깊고 엄청난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가져봅니다.

 


 우리는 성경을 연구할 때 말 자체만을 살펴보고 끝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어‘복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그것은‘좋은 소식’이다라는 것만을 언급하고 끝나는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복음이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고 말할 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좋은 소식이다라는 그 말 자체에 관한 정의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는 정말 우리에게 그 복음이 좋은 소식으로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어휘만 아는 것이 아닌 좋은 소식이라는 그 복음의 내용 자체에 대한 참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복음의 부정적 요소

 


 복음에는 부정적인 요점이 있습니다. 이 메시지는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것을 행하라고 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좋은 소식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복음, 기독교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선한 삶을 영위하며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라고 크게 호소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한 행실과 행동만을 호소하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것과 사람들에게 좋은 뉴스를 전하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더 선해지기 위해서 대단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좋은 뉴스가 아닙니다. 실로 그것은 오히려 그 정반대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아 그것을 전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좋은 소식을 전하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분명히 말해서 그것은 매우 특별한 것입니다.

 


2. 좋은 소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실로 그것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관한 무엇입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말해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행하라고 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선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것을 우리에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16절과 17절에“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노라”라고 말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사람들더러 스스로 구원하라는 권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입니다.“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그것은 새로운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무엇입니다. 구약에도 죄사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이 의가 완전히 드러난 것은 새로운 것입니다.

 


 바울은“내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곡언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그 말을 통해서 내가 자랑한다, 뽐낸다, 내게는 다른 것은 그 어느 것도 이보다 더 크지 못하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부정적으로 말하나 적극적인 진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실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절대적으로 감격한다. 나는 도저히 그것을 감내해내지 못할 정도이다”

 


 이것은 복음에 대해서 우리가 언제나 가장 먼저 인식해야 되는 요점입니다. 우리 역시 그 복음을 대할 때 기뻐해야 하고 자랑해야 하며 그 복음으로 인하여 감격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10절에“보라 내가 너희에게 좋은 소식을”전하노라고 말합니다. 좋은 소식-복음입니다. 목자들이 베들레헴에 가서 그 일들을 증거하고나서“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복음의 서론입니다.“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이것은 복음에 있어서 죽고 사는 것만큼 진수가 되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십시오.

 


 “복음이 나에게 그처럼 임했는가?”바로 이 순간에 내가 정직하게 말하여, 복음이 내가 들었던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좋은 소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게 말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복음은 우리가 들었던 것 중의 최대의 좋은 소식이든지 그렇지 않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복음이 최대의 좋은 소식이 아니라면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3. 복음이 최대의 좋은 소식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들

 


1. 적당한 죄의식을 갖지 못하고 있거나, 자신의 죄됨에 대한 바르지 못한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복음이 세상에 임한 것 중에서 최대의 좋은 소식이거나 사람이 받은 것 중에서 가장 좋은 소식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으면, 그것은 여러분이 적당한 죄의식을 갖지 못하고 있거나, 여러분 자신의 죄됨에 대한 바르지 못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데 기인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자들은 자기들의 현재 모습 그대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법정에서 살인자나 간음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교적 양호한 삶을 살고 있다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자들에게는 복음이 좋은 소식으로 들려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도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복음을 들어도 감격해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됨에 대한 바르지 못한 이해로 말미암아 우리가 언제나 주님을 즐거워하지 못하고, 이 메시지가 세상에 받았던 것 중에서 가장 좋은 소식임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복음이 기쁜 소식으로 들려오지 못하는 최대 원인입니다. 복음에 대한 기쁨이 부족하다면 성경, 율법으로 나아가 여러분 자신의 죄됨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기쁨에 이르는 적극적인 길은 죄의 깊이를 언제나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죄의 결과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기쁨이 부족한 또 다른 이유는 우리 편에서 죄의 결과들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라고 봅니다. 구원을 단순히 죄사함의 정도로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중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주로 죄의 형벌에서 피하는 것만 관심이 있어 죄사함을 원합니다. 죄를 용서받았다고 느끼기만 하면 만족해 합니다. 그러나 죄의 결과는 형벌받는다라는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결과는 하나님의 관계 파괴입니다. 죄로 인하여 더 이상 우리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내 인생의 시작점인 그분께로 인도하는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오직 복음만이 그 길을 제시해 줍니다. 복음으로서만이 그 길을 따라 걸어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복음! 우리는 이 용어를 얼마나 쉽게 사용합니까! 얼마나 쉽게 말하며 복음이라는 말을 아무런 감정없이 되풀이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복음’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찬양과 감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 아니한 일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좋은 소식,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께서 사람과 그 구원에 대해서 행하신 일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나는 너희에게 어떤 인간 철학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어떻게 삶을 영위하였느냐에 대한 내 자신의 개념들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셨는지에 대한 것을 너희에게 말하려 한다.’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좋은 소식입니다.

 


4. 사도 바울은 삼위일체 교리로 나아간다.

 신약성경에는 복음에 대해서 여러 다른 묘사들이 있습니다. 천국 복음, 구원의 복음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로마서 1장 1절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본문말씀에서 나타난“하나님의 복음”이라는 형태보다도 더 부단히 사용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1장 1절부터 4절의 말씀을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살펴보면 바울이 단순히 복음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라는 것을 알게 되어집니다. 사도는 대번에 기독교에만 있는 아주 특별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사도는 복음을 설명하되 삼위일체 교리와 함께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절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성부 하나님이 나오십니다. 2절과 3절을 살펴보면“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여기서는 성자 하나님이 나오십니다. 4절에서는“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여기서는 성령 하나님이 나오십니다.

 


 바로 복음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관계된 복음입니다. 그것은 삼위의 각 위가 참여하고 특별하고 영광스러운 삼위의 사역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과 영감 아래서 로마서라는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복음을 설명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로 나타내고 있는 것은 편지를 쓰다 보니 우연히 이렇게 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1. 성부만 강조하는 자들

 


 복음을 단지 성부의 차원에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하지 않고 하나님에 관해서만 대단히 많은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죄사함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하는 일들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그들의 하는 말을 다 들어보더라도 아들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2. 성자만 강조하는 자들

 


 그러나 성자만 강조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성부 하나님을 망각합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를 마지 못해 용서하신다는 인상을 끼칠 정도까지 나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탄원하고 있는 모습을 그려서 말합니다-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아가, 내가 그들을 위해서 죽었고 내가 그들을 샀노라고 아뢴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용서하도록 하나님을 설득하는 예수님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오직 성자와만 관계를 가진 것입니다.

 


3. 성령만을 강조하는 자들

 


 또한 성령만 강조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성령만 강조하는 사람들은 체험이나 능력을 원합니다.

 


 

 진리의 한 부분을 진리 전체로 과장시키는 것처럼 위험스런 것이 없습니다. 이 세 가지 오류가 말하는 바는, 그 자체로만 따지고 보면 매우 옳습니다. 그러나 동등하게 중요하고 진수가 되는 다른 부분들을 빼먹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성경은 구원이란 복되신 성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원은 일차적으로 성부의 구원입니다! 성부가 첫째 자리에 나옵니다! 그것은 성부의 계획입니다. 구원은 성부의 목적입니다. 또한 성부가 시작한 일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구원에 관하여 첫 번째 약속을 하신 분도 성부이십니다. 성경에서 누구나 알 수 있는 한 구절이 있다면 그것은 요한복음 3장 16절일 것입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순서를 주목해 보십시오. 독생자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모든 일을 시작하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말하자면 성부 하나님께서 그 일을 계획하시고 널리 알리시며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이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그 일은 아버지의 일입니다. 요한복음 17장으로 가보면“아버지여…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말합니다.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아 오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는 성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일을 미리 정해 주신 이도 아버지시요, 그를 백성들에게 주신 이도 아버지셨습니다. 그 일은 언제나 아버지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나이다.”아버지께서 자기에게 하라고 주신 일을 통해서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 그것이 바로 그의 삶의 전체 목적이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것입니다. 언제나 성부 하나님께 강조점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잊고 있는지요.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너무나 그리스도 중심적입니다. 모든 것이 성부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만 기도하고 성부께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생각은 오로지 성자만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중심이 아닙니다. 중심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합니다.“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무엇때문에?“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성자가 하신 일의 전체 목적은 우리를 성부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영생에 대한 주님의 정의를 들어보십시오.“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언제나 그러한 순서를 취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결코 그 순서를 바꾸지 아니하십니다. 그는 성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은 모든 일이 성부로부터 시작되며 나오므로 구원의 주는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구원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그러한가? 우리가 구원을 생각하게 될 때에 본능적으로 성부와 그 영광의 차원에서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 말입니다.

 


 복음은 아버지의 계획입니다. 복음은 영원한 하나님 자신의 운동입니다. 복음은 성자로 말미암아 성자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성자를 보내사 그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은“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하나님의 복음입니다.”그리스도를 보내사 그 일을 하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자께서 두 번째 위치에 옵니다. 또한 복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가 우리에게 적용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능하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서는“하나님께서 성령을 한없이 부어주셨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습니다. 성자께서는 그런 식으로 성령을 통해서 자기의 일을 행할 권능을 얻으셨습니다. 그처럼 삼위 하나님께서 필연적으로 함께 일하셨습니다. 사도가‘복음’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순간에 그는 복되신 성삼위 하나님의 각 위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복음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전능하신 행위입니다. 우리가 그 복음을 통해서 구원함을 받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복되신 삼위 하나님의 교리를 가르치는 방식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언제나 간접적으로 진술되어 있습니다.

 


 사도가 이 교리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독특한 교리입니다.“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의 심장”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는 기독교 외에도 여럿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되신 성삼위의 교리를 가르치고 전하는 것은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를 분명히 포착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절대로 중요한 일입니다. 즉,‘신격 안에 세 격위가 있어 동등하고 같이 영원하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러한 방식으로 나뉘어 일을 하셨다.’

 


5. 결론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복되신 성삼위 하나님을 믿습니다-삼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마호멧 교도들도 신을 믿습니다. 중생치 못한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밖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수는 삼위이면서도 한 하나님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입증해 나가고 있습니다-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경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그렇습니다. 그는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께 대하여 말하는 것도 동등하게 진리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주의자들이어야 합니다. 영원하시고 영광스러운 세 격위께서 우리 사람들과 그 구원을 위해서 사도 바울이 이 영광스러운 서신에서 밝혀나가는 이 위엄에 찬 일들을 행하셨다는 것-그것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이요, 우리의 입장의 진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성삼위일체의 교리의 우선성과 중추성과 중요성을 알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6장 예언된 그리스도 (롬 1:2)

 


 우리는 전 시간에 바울이 단순히 복음만을 말하고 있지 않음을 살펴보았습니다. 복음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관여하신 것이라고 했죠. 그런데 바울은 복음에 대해서 더 배울 것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복음은 전에“약속된” 것이라는 겁니다. 복음은 어떤 역사적인 사실들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에 일어난 사건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래 전에 약속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1. 바울의 복음 설교방식

 


사도행전 13장 23절에 보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다윗을 가리킴)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절과 3절에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과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바울은 삼 일 동안 성경을 강론하여 풀어주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바울이 언제나 그러한 일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우리는 10분 만에 복음을 설명할 수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5분이라도 충분하다 생각하죠.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좋은 소식은 예언되었던 것이고 약속된 것이었고, 하나님께서 수 세기 전부터 여러 번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기 그지없습니다.

 


 바울이 밤중까지 강론하니, 졸음에 겨운 어떤 사람이 창턱에 앉았다가 떨어져, 사람들이 그가 죽은 줄로 알았음을 사도행전에서 읽습니다(행 20장). 바울은 굉장히 많은 것을 말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서신은 그가 말한 것을 아주 짧게 요약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바울은 18개월 동안 한 곳에 머물러서 날마다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만일 서신들을 피상적으로 훑고 지나가기만 해도 되는 것이라면 바울은 일주일도 머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훨씬 짧은 기간 동안 설명하고 떠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길고 깊게 날마다 강론하였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16장으로 되있는 짧은 편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옮겨 적어놓은 것이 아니에요. 아마 오늘날 책으로 환산해 보자면 600페이지 책 30권 분량으로도 바울은 아마 모자랐을 것입니다.

 


2. 복음은 약속되어진 것이다.

 


 바울은 복음이 “미리 약속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 약속이 어디에서 발견될까요?

 


1) 물론 창세기 3장 15절에서 그 약속이 제일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서로 원수가 되며,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약속입니다.

 


2) 창세기 49장 10절에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3) 발람이 예언합니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날 것이라”(민 24:17).

 


4) 말라기 3장 1절에 주님보다 먼저 올 세례 요한에 대한 예고가 나타나 있습니다.

 


5) 이사야 7장에 그가 “동정녀에게서 나실 것”에 관한 예언이 나와 있습니다.

 


6) 미가 5장 2절에 보면 그가 태어나실 장소가 예언되어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 예언되어 있죠.

 


7) 신명기 18장 15절을 보면 그가 선지자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입니다.

 


8) 이사야 53장엔 그가 또한 제사장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9) 다니엘 9장 24절을 보면 그는 위대한 왕이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10) 다니엘 2장에 왕의 꿈을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 돌이 나타나 큰 산처럼 자라 온 땅을 채우고 다른 모든 나라를 멸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과 통치의 영광을 직접 말씀한 예언입니다.

 


 

 구약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지자, 제사장, 왕이실 것이 다 예언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 분은 “이방을 비추는” 빛이실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9, 50장이 다 그 예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위대한 왕이 되셔서 결코 파멸될 수 없는 제국과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예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53장에 보면 “멸시를 받고 사람들에게 버리운 바” 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그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실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채찍을 맞을 것입니다.

 

 


11) 스가랴 9장 9절에 보면 그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다시 스가랴서에서 “은 삼심에” 팔릴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12) 시편 22편에 보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의 옷이 제비뽑아 나누어 질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시편 22편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말하신 말씀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실로 그 시편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모습이 아주 특이하고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13) 다시 스가랴 12장 10절에 보면 그가 찔림을 받을 것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그의 옆구리가 창에 찔릴 것입니다.

 


14) 이사야 53장을 다시 보면 그의 무덤이 악인과 부자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5) 시편 22편, 16편에서는 그의 부활이 예언되어 있고, 다른 곳에서도 그 부활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의 영광이 예언되었고, 그의 최종적 나라 - 영원한 상태, 그에게 주어질 모든 영광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직접적인 예언들이었지만 간접적인 예언들도 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예표합니다. 번제와 희생제, 심지어 성막과 성전의 구조 자체, 이 모든 것들이 다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주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가 “전에 미리 약속한”것에 대한 요약에 불과합니다. 

 

 


제7장 복음의 계속성 -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인식하라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

 


 사도는 여기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일들을 하도록 한 일이 하나님께서 미리 성경에 약속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여기 서론에서 기독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을 말하고 싶어합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싶어하죠. 그러나 그는 먼저, 이 복음은 하나님의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성경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자들이 생각하길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이 새 교훈이 무엇이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복음이 과거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고, 구약성경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사도가 유대인들에게 설교하면서 다루어야 할 첫 번째 요점은, 유대인인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으로부터 메시야는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고, 구약성경은 언제나 메시야를 고난받는 종으로, 배척받아 죽음을 당하는 종으로 가르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고난받아 죽음을 당한 뒤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라는 것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성경 속으로 인도하여 그 성경이 메시야가 그런 방식으로 고난을 받아 심지어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임을 어떻게 예언하고 있는지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 논리적으로 우리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그 메시야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어떤 책인가?

 


 그렇다면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바울은 그 책이 보통 책이 아님을 알기를 원합니다. 사도는 구약이 거룩한 글들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들은 인간적이거나 보통의 책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또 거룩한 일들을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권능과 감화와, 성령의 통제를 받아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성경은 완전합니다. 그리고 권위가 있습니다. 성경만이 권위가 있습니다. 성경만이 우리의 오직 유일한 법칙이요, 표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방면에서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제 메시지도 언제나 성경에서 나와야지 다른 어느 곳에서 나와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의 책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성경이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것은 오직 하나의 책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고, 신약 세대라고 불리우는 세대 중에 살고 있다고 해서 구약성경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언제나처럼 오늘날도 구약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신약을 읽듯이 정기적으로 구약성경을 읽습니까? 1년에 한 번씩 구약을 통독합니까? 그래야 합니다. 여러분은 구약을 얼마나 읽습니까? 하나님의 진리가 구약성경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을 해석한 것이 구약의 가르침과 마찰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어째서 그분이 그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타락한 때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죄인을 구속하고 구원한 때 사이의 시간적인 간격이 그처럼 긴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즉각 단번에 이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셨음을 우리는 잘 아는데, 어째서 복잡한 구약의 역사가 필요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완전한 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 우리가 이해 할 수 있는 데까지 가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어찌 그리 오래 걸리는가, 어째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이스라엘이라는 한 족속에게만 국한되고 다른 모든 세상 사람들은 어둠과 적대감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등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에 대한 답변을 제시해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그처럼 오랜 시간 뒤에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

 


1. 죄의 본질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첫째는, 죄의 깊이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죄의 실상이 어떠하며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죄가 단순히 어떤 가벼운 불순종의 행동이나 실수가 아니라, 죄의 무섭고 끔찍한 내용들을 가져오는 실로 무서운 영혼의 질병임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즉 죄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

 


 죄에 대해 참으로 무서운 일은, 죄는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유대인들은 매 안식일마다 모세의 글을 읽으면서도 진리를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계시를 그들에게 다 기록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을 매 안식일뿐만 아니라 더 자주 그 말씀을 읽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결과로 인하여 그들이 진리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비극이었습니다.

 


2. 인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데 시간을 더디 하신 것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인간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무리 애쓴다 할지라도 소용없음을 인간들에게 최종적으로 입증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대로 자신을 구원하도록 모든 기회를 제공하셨습니다. 큰 문명의 부흥을 살펴보십시오. 성경 자체에서도 그러한 것들 중 몇 사례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난제 -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나 풀기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애쓰고 시도해 보았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어려운 문제들을 풀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기의 지성을 자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믿었던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을 신뢰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지나간 수 십 세기의 사실들을 통하여 이 모든 것을 되돌아 보시면서, 너희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바로 그 일을 해보아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이나 애굽, 로마 같은 위대한 문명국들이 차례로 일어났지만 결국 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증거를 정면으로 대하고 있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한 법을 주십시오. 어떻게 살까를 알려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그 법대로 살아 우리 자신들을 바로잡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계속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해 볼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바로잡고 인류 세계를 질서있게 하고 스스로를 해방시켜 볼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한 분을 예비해 두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분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이미 성경에 미리 약속되어 있는 분이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읽고 있는 구약성경에 이미 약속되어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의 결과로 그것을 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노력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풀고자 했습니다. 열심히 율법을 지켰지만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바로 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합니까? 필요를 느끼지 못하다면 이미 여러분들은 죽은 자들입니다. 여전히 자신의 문제를 자신의 노력으로 해결하려는 자들은 살아있는 것 같으나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그분이 필요함을 느끼십시오. 그리고 고백하십시오. 저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아니고서는 전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의 문제를 나 자신의 노력과 애씀으로 해결하려는 미련한 짓을 포기할 수 있도록 진리의 말씀을 통해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유대인들의 비극은 매 안식일 마다 율법을 읽으면서도 진리를 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 역시 그러하지 않습니까? 말씀을 읽고 듣지만 여전히 진리를 보지 못하며 듣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비극으로부터 속히 벗어나십시오. 여전히 나 자신의 노력과 행함으로 내 인생을 설계해 나아가려는 비극으로부터 벗어나십시오. 오직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 인생의 난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임을 인정하십시오. 그래서 그분을 찾으십시오. 그분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제8장 그리스도는 친히 복음의 중심 (롬 1:3~4)

 


“이 복음으로 말하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성경에서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러나 문제는 그의 아들에 관한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1.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관한 것이다

 


우리가 지적해낸 첫 번째 요점은,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 점은 복음의 중추신경이요, 핵심이요,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떠나서는 그 어느 것도 기독교 복음이나 기독교는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이 좋은 소식인 이유는 주님 자신이 좋은 조식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종교에는 어떤 특별한 인물이 절대적으로 진수가 된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불교를 예로 들어보십시다. 그러나 부처없는 불교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교를 예로 들어보십시오. 공자없이도 유교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특별한 사람의 교훈을 표방하는 일은 어쩌다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 자신이 그 교훈의 본질적인 진수가 되지는 못합니다. 이러한 모든 종교에 있어서 중추적인 것은 특별한 교훈입니다. 그러나 여기 기독교 신앙의 영향으로 올 때 전체 입장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떼어내 보십시오. 그러면 어떠한 메시지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가르침도 필요없게 됩니다.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첫 번째 요점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사렛 예수, 역사적인 그 인물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 1절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런 다음에 3절에서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와 변화산상에 계실 때에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이 들렸습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서는 예수님이 친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되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주님의 그러한 역설은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성모독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함께 모여서 모의하여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 없애버리라고 말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설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선포해야 하는 제일 위대한 진리는, 바로 이 분이 하나님의 영원하고 영존하시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듯이 신의 차원에 도달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셨고 아들이십니다. 어느 누구도 그러한 칭호를 받을 수 없는데,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습니다.

 

 

 

2. 어휘에 대하여 ‘육신’과 ‘다윗의 씨’

 


1) 육신에 대하여

 


 그 다음 우리는 어휘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육신’(육체)이라는 말부터 살펴보십시다. 그 말은 “인간의 모양으로”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에 관하여 어떠한 존재가 되셨는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여러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몸의 모습으로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 몸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우리 주님이 참사람이셨으며 인간 몸 뿐 아니라 인간 영혼도 가지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온전한 인성을 가지고, 완전한 인간 본성을 가지고 돌아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육신은 어린 아이가 모태에서 나올 때 가지는 모든 본성을 다 의미합니다. 그는 참 몸과 합당한 영혼을 가지셨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 주님을 그저 인간 몸만을 입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는 것은 실수라는 것입니다. 그는 역시 인간 영혼도 가지셨습니다. 그는 인간의 이지도 가지시고, 인간 이성도 가지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 52절에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진술합니다. 그는 키 뿐 아니라 지혜도 자랄 수 있었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사복음서에는 그가 자랄 뿐 아니라 주리고 목마르시고 슬퍼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어떤 일을 모른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는 세상의 끝이 올 때가 언제인지 모르셨습니다.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마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문자 그대로 죽으셨습니다.

 


2) 다윗의 씨에 관하여

 


 다음으로 다윗의 씨에 관하여 살펴보십시다. 다윗의 씨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다윗 왕에게 특별한 약속을 주셨다는 사실에 그 의미가 존재합니다. 그의 허리와 그의 씨에서 위대한 메시야, 위대한 영원한 임금이 나셔서 그의 영원한 나라를 건설하실 것이라고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구약을 통독하여 예언서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그의 약속을 어떻게 좁혀 가시는지 발견하게 됩니다.

 


 에덴 동산으로 가보면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약속을 합니다. “여자의 후손” - 그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전체 인류를 가리킵니다. 그는 인간 본성으로 오실 것입니다. 인류에게서 나실 것입니다.

 


 그러나 특히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히브리인으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 사이에 구별이 생겨났습니다.

 


 육신의 혈통으로는 이스라엘 중에서 나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범위를 더 좁혀나가십니다. 이스라엘의 특별한 지파를 통해서 나오실 것이며 그 지파는 유다 지파일 것이라고 야곱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창 49:1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더욱 더 좁혀 나가십니다. 한 특별한 가정, 다윗 왕가의 특별한 혈통으로 좁혀 국한시켜 주십니다. 메시야가 오실 때 그 메시야는 단지 한 사람으로서도 아니요, 한 유대인으로서만도 아니요, 유다 지파에 속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특별하고 유별나게 “다윗의 집의 혈통”에 속한 분으로 오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답을 여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영원한 임금으로서 끝도 없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시며 그 나라에서 영원토록 왕노릇하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다윗의 씨로 나실 이 메시야가 도래하기를 고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다윗의 씨로 보내실 것임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싶은 전체 요지는, 이 예수가 바로 그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다윗의 후손으로 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품속에 계셨던 그 아들 - 독생하시고 아버지와 동등되시고 영원히 함께 계시던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가 그 분을 이러한 방식, 이러한 모양, 이러한 비천한 모양으로 보내사 베들레헴에서 육체를 입고 사람으로, 사람의 모양으로,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아기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는 우리 사람들과 우리들의 구속을 위하여 그처럼 낮아지셨습니다.

 

 


제10장 예수의 주되심 (롬 1:3~5)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 칭호가 신약 기자들이 우리 주님에게 즐겨 쓰는 위대한 명칭이라는 것을 아실 거에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식으로 그 이름을 열 번이나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살펴보아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좀 더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그 명칭의 중요성이 다가오기 위해서는 초대교회 당시 시대상을 알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이 “예수가 주”라고 했기 때문에 계속 체포당하여야 했다는 거에요. 반면에 관원들은 “가이사가 주”라고 말하도록 하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렇기에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둘 중 어느 것을 취할지에 대해서 결정해야 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는 주”라고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투기장 안에 있는 사자들에게 던지워져 죽임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야말로 절대적으로 중추적이고 사활을 좌우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초기 3세기 동안 기독교회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큰 문제가 예수가 주냐 아니면 한 인간에 불과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단들이 들어와 어떤 자들은 우리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였고 어떤 자들은 우리 주님의 인성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생명을 걸고 싸워야했죠. 공회가 소집되고, 논쟁과 쟁론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이렇다라는 정의가 내려졌고, 이단으로 정죄받은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학적인 문제로 논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지식을 뽐내기 위해 한 논쟁이 아닌 것이죠.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분명하고 바르게, 예수의 주되심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문스러운 점이 있게 되면 그리스도인 지위 전체가 붕괴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마태복음 22장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 바로 그 일을 정확히 가르치고 강조하시느라 애를 쓰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거기 보면 유대인들이 믿는 것이 있었는데, 메시야가 올 때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른 관점입니다. 실제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물리적인 관념을 가지고 메시야를 사람으로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그들이 대답하기를 “다윗의 자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틀린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니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더 말씀하십니다. 만일 너희가 다윗의 자손을 말하는 데서만 끝마친다면, 성경에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는데 그것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시 110편) 만일 다윗이 그를 주라 불렀으면 어찌 다윗의 자손이 되겠는가? 만일 그가 인간적인 한 자손에 불과하다면, 다윗의 인간적인 후손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그를 보고 ‘주’라 말하며 그를 가리켜 ‘주’라 칭할 수 있겠는가? 그 일은 스스로 모순에 빠지고 맙니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주 -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바로 그것은 자신에 대해서 하신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언제나 두고 있어야 하는 일은 중요한 것이죠.

 


 그는 예수님이세요. 그는 참 사람이십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잉태된 것을 요셉에게 알리면서 천사는 그를 예수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바로 그 이름은 구원하시는 자라는 개념을 포함합니다. 구약성경의 여호수아는 약속된 땅으로 백성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물질적인 의미에서 백성들을 구원하는데 쓰여졌다는 말씀입니다 - 그와 같이 그 분도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라 불리워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만이 아닙니다. 그는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메시야’라는 말의 헬라어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기를 고대했죠. 메시야는 건져주시는 자요,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닙니다. 구원하고 건지시기 위해서 “기름부음 받은”분이라는 뜻을 특별히 함축합니다. 메시야 - 그리스도 -는 “기름부음 받은 자”입니다. 요점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 특별한 사역(건지시며 구원하시는)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으셨다는 겁니다. 메시야가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 중 왕이라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바입니다. 어떤 사람도 기름부음 받지 않고서는 선지자나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해석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가르치셨죠. 산상설교를 통하여 기름부음 받은 선지자로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러나 동등하게 그는 제사장이십니다. 그는 오셔서 제사를 드리시고 친히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는 지성소에 짐승의 피 대신 자신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입니다. 또한 그 분은 왕이십니다. 자연과 피조계를 다스리는 권위를 가지고 계시며, 질병을 치료할 수 있으셨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가 나에게 주어졌노라고 크게 외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이십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는 주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그 분께 쓰여지는 “주”라는 용어는 구약성경에서 여호와, 전능하신 주 하나님 자신에게 쓰여진 용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이 예수를 주라 할 때는 예수는 “여호와”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는 영존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를 주라고 우리가 말할 때,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사 하늘에 들어가시고, 지극히 높으신 곳에 오르사 그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는 주님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빌립보서 2장 9절부터 11절 말씀에 “이러므로(그가 행하신 모든 일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그는 우리의 최고 통치자이십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우주의 주가 되시며, 모든 권세와 권위에 높아지셨고 , 생각될 수 있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 계십니다. 하늘에서 그가 차지한 지위보다 더 큰 지위가 없습니다. 하늘이나 땅이나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그의 발 밑에 있습니다. 그 놀라운 이름이여! 얼마나 놀라운 칭호입니까! 예수, 베들레헴의 아기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요, 오랫 동안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말입니다. 그는 우주의 주이시며, 하나님의 영존하시는 아들이십니다.

 


 사도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제11장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로마서 1:3~5).

 

 

 

1. 좋은 소식이란

 

 5절 말씀을 계속하여 숙고하고자 합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입니다. 좋은 소식이란,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였으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롭다 함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행한 어떤 일을 기초로 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16절과 17절에서 특별히 그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라.” 어째서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로 그것이 복음의 독특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행위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2. 동시에 순종이라는 말을 강조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순종”이라는 말도 강조해야 합니다. 믿음과 순종이라는 말은 언제나 함께 취급되어야 합니다. 곧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단순히 지성적인 문제만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지성적인 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순종한다는 것은 단순히 이지적으로 인정한다거나 복음의 가르침을 지성적으로 승인하는 것보다 더한 무엇입니다. 그러므로 이 점은 본질적이고 사활을 좌우하는 요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일종의 “신앙주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주의가 흔히 교회를 황폐화시키곤 하였습니다. 이 점은 우리 마음 속에 언제나 고수하고 있어야 하는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200여년 전에 교회 안에 산데만주의(Sandemanism)라 불리우는 무서운 이단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그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끝난다는 것이죠. 그의 삶이 어떠하든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가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만’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들고 나오는 성경본문이 있습니다.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것은 일종의 “신앙주의”입니다. 그 이단이 교회를 무섭게 황폐화시켰습니다.

 


 믿음에는 전인이 수반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만 하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 인격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두 아들의 비유 가운데서 이 주제에 관하여 무어라고 가르치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가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이 바로 대답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순종이란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종이란 뉘우치고 실제로 마음을 아프게 생각하는 것만이 아니고 포도원에 가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는 회개하고 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바로 그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가 믿는다 하는 진술을 뜻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또한 지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나 지성으로 승인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복종시키고 우리 자신을 의탁시키며 우리의 전인격을 수반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면, 회개하여 죄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은 어느 누구라도 복음을 믿는 사람으로 여길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더도 덜도 아닌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믿는다고 말한다면, 나는 죄인이라고 믿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으며 또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며,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제공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믿는다.’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합니다.

 


 만일 내가 그렇게 믿는다면, 내가 전에 있었던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그 가공할 죽음을 필연케 한 내 죄를 부끄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죄를 서글프게 생각해야 합니다. 내 죄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 분께 나아가겠습니까? 그 모든 것을 의식했으니 나는 내 죄로부터 돌아섭니다. 나는 세상에 속하고 싶지 않으며 세상의 죄에 더 이상 속해 있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그에게 속하고 싶으며, 나를 위해서 그처럼 많은 일을 행하신 그 분을 즐겁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 분에게 나 자신을 드립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여러분이 그 분을 여러분의 구주 뿐만 아니라 주로 믿지 않는 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단순히 “복음을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순종”을 말합니다. 믿음은 언제나 순종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내가 그분을 믿자마자 나는 죄로부터 돌아서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서 행하신 일 때문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돌아섭니다.

 

 

 

 


3.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울

 


 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다음 요점은,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라고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그를 유대인에게 보내시고 “또 이방인에게도”보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바로 바울은 그것을 자랑합니다. 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더 이상 유대인에게만 해당되지 아니하고 이방인들도 가입합니다. 전체 인류는 복음을 필요로 합니다. 모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역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그들은 다 같은 방식의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3장 29절 말씀에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주라는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의 메시야만이 아닙니다. 이제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야만인이나 미개인이나 종이나 자유자”가 없습니다. 모든 차별이 다 사라졌습니다.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메시야일 뿐 아니라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모든 민족들의 구주이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메시지입니까! 바울은 자기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라고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제자이든 무식한 자든 어느 사람에게라도 전할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복음을 필요로 하고 받아들이는 어느 영혼을 향해서도 그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여기에 그 영혼의 구주가 계십니다.

 

 

 

4.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이제 우리는 절정의 순간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이것이 바로 클라이막스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사도다, 나는 전도자다, 나는 모든 민족들에 속한 사람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가지라고 촉구하고 있노라. 어째서 내가 그 일을 하고 있느냐? 그의 이름을 위해서다.’ 바로 그것이 사도의 활동의 동기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가 행하는 일의 이유입니다. 그러면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이 좋아할지 모르지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의 영광을 위하여.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그 일을 한다. 나는 그의 영광을 위해서,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그를 영화롭게 하고 그를 자랑하도록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한다. 사도의 진술은, 자기가 한 큰 목적을 위해서 말씀을 전하고 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최상의 동기입니다. 그로 하여금 충동을 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되고, 그의 영광이 사람들 가운데서 높아지고, 모든 사람들이 그의 영광을 찬미하도록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는 것, 바로 그것을 위해서 그는 일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그를 영화롭게 하기를 거절하는 것이다

 


 그는 사도로서 자기가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거대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그를 영화롭게 하기를 거절하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죄의 진수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그 점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오심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저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라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죄에 대해서 뭐라 말씀하시나요?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까? 내가 그를 믿음으로써 그를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는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믿는다고 말할 때 나는 그를 영화롭게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말로만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그 점을 어떻게 나타냈는지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참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의 탁월하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의 덕과 그의 위대하심과 그의 영광을 표방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신 그 분을 찬미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는 삶을 통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혼을 거르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육체에 빠져 있으면서도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불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영위할 때에야 그를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를 찬미하도록 하기를 바람으로써 그를 영화롭게 하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와 그를 찬미하기를 간절히 바람으로써 그를 영화롭게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친절을 베풀었다면, 모든 사람에게 그것에 관해서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질병에 걸려서 의사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의사가 여러분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다른 의사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여러분을 바로 고쳐준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만나는 사람마다 그 사람에 관해서 말할 것이고, 모든 사람이 그 사람에게 가기를 원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잘 생각해 주기를 간절히 원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사람이 얼마나 놀라운지 말하며, 누구나 그 사람에 대하여 말하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자기의 주님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분을 위해서, 그 이름을 위해서, 그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그처럼 영광스럽고 놀라우신 분이시기에 모든 사람이 와서 무릎을 꿇고 절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사도요, 나는 복음을 전한다.’ 어째서?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는 온 세상이 그의 발 아래 꿇어 엎드리기를 바란다. 모든 사람이 베들레헴의 아기, 성 안의 율법사들과 함께 있는 소년, 목수, 그 젊은 사람, 삼십 세인 청년, 말씀을 전하기 시작한 바로 그 분을 생각할 때 경건함과 기이함과 찬송함으로 그 분을 쳐다보기를 간절히 원한다. 오 세상에 그 분에게 와서 머리를 숙인다면! 그 이름을 위해서 나는 그 일을 행하노라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정말 그렇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그들을 붙잡고 있는 죄에서 구원받고, 행복과 평안과 기쁨을 얻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첫 번째 요점은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제일 되는 일은 이 복되신 분에게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앞에 머리를 숙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라고 고백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 바울이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은 바로 다음의 이유 때문입니다. “내가 사는 것도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영광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것만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에 취한 사람입니다. 그의 찬미와 그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우리도 그러합니까? 우리가 바로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복되신 구주께서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삶,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로 말미암아 주께 영광이 되고 있습니까?

 


 바울은 그의 이름을 위해서 살았고 일했고 수고하였습니다. 여러분도 그러합니까? 우리는 그 일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큰 특권입니다. 하늘로부터 땅에 오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시고 다시 부활하신 그 분을 위해서, 그 분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특권입니다. “그의 이름을 위하여.”

 

 

 

제12장 예수 그리스도께 속함 (롬 1:6~7)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사도는 이 본문 속에서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직접 관계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처음에 자신을 묘사하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어째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그들에게 말하며 설명했던 것이죠. 바울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부르심을 받은”사도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은”사람이라는 것을 말함으로써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그로 하여금 복음 자체의 기이한 개요와, 복음의 위대하고 놀라운 내용을 말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었습니다. 5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롬 1:5) 그런 다음에 사도는 로마 사람을 향하여 말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롬 1:6) 바로 이것이 앞에서 말했던 것과 이 본문이 가진 정확한 관계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 교리를 요약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자기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 대한 사도의 묘사를 대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가 되게 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 복음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깨우쳐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믿음의 순종”을 가지라고 촉구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 뿐 아니라 우리가 보았듯이 이방인들에게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말하기를, 너희가 바로 거기에 들어 있다. 너희가 이 ‘민족들’속에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이 시점에서 특히 이방인들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보았듯이 로마의 교회에 유대인들이 섞여 있기는 했지만 그 교회는 본질적으로 이방인의 교회였음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로마는 모든 이방 사람들의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1.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말하는 바울

 


 그는 즉시 그들에 관한 어떤 것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사도는 그저 자신을 묘사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그들에 관하여서도 말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위대한 목적들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그리스도인들로서 어떠한 사람들인지를 그들이 분명히 인식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사도는 먼저 그들을 일반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런 다음 특별하게 묘사하죠.

 


1) 일반적 묘사

 

 그들에 대한 사도의 일반적 묘사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있는 진술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자들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나 그리스도인들이 “부르심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일로 언급됩니다. 우리를 그 은혜로 부르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바울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그들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 2:1) 사람들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런 다음에 계속해서 그들이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3~5)라고 말합니다. 그 일을 행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부르신 이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이 말씀은 정확히 그 개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이끌려, 아버지께 부르심을 받아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 나오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또 다른 위대한 신약의 용어를 대하게 됩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용어입니다. 사도는 사실상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있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하도록 말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보편적인 묘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역과 범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무언가 구별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다른 모든 사람들과 구별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나라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몸의 지체들로 그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와 연합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이 상태와 조건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그 상태로 들어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일어나게 됩니다. 다행히도 사도는 우리에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로마에 있어…모든 자에게”(롬 1:7)사도는 로마에 있는 모든 각 시민들 전부를 향하여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여기서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습니까?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될 수 있는가

 


 - 첫 번째 요점 (하나님의 사랑) -

 


 첫 번째 요점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들

                    이라”

저 큰 대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 시를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떠한 류의 삶을 누렸는가를 생각해내는 것은 그리 많은 수고가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는 1장 하반부에서 그들의 삶에 대한 묘사를 대하게 됩니다. 그 도시는 가공스러운 죄악과 무서운 방탕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도시에 서로의 집에서 모이는 일단의 사람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사람들의 집에서 모였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이 작은 무리들은 그리스도인들로서 이 대이교 사회에서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 자리에 서게 했습니까?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절대로 다릅니다. 그들은 더 이상 가공스러운 죄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전적으로 다른 류의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사도는 오직 한 가지의 답변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바로 이것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 그것이 바로 그들로 그들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도가 그 점을 맨 먼저 지적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그것을 뒤에 놓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것이 그러한 선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든지, 그들이 언제나 선한 삶을 영위해 왔다든지, 아니면 그들이 행한 어떤 기이한 일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것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교리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에베소서 2장을 주목하십시오.  에베소서 2장에 묘사된 사람들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2~3) 그러면 그들이 지금도 그러한가요? 대답은 오직 하나 - “그러나 하나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4~5) 사도 바울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그 점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끌어낸 것, 마귀의 집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 요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게 된 것은 우리가 행한 어떤 일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된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가공할 곤경과 죄의 결과로 빠진 그 비참 속에서 건짐받게 한 일을 시작한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요점입니다. 로마에 있는 작은 부류의 사람들은 제가 묘사해 온 그 방식대로 함께 모였습니다. 어째서? 영원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설명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그 순서를 주목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첫 번째 단계입니다.

 


 변화산상에 계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 이것은 역시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지금 하나님께 같은 방식으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사랑하십니다. 요한복음 17장 23절 말씀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너희를 사랑함을 세상이 알기를 원하노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 이것이 바로 우리에 대한 진리입니다.

 


 우리가 이 순간에 살아 있는 것이 확실하듯이, 우리는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셨다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과 마귀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건진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엡 2:4) - 다른 설명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여기서 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엄청난 일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들을 유혹했습니다. 그리고 핍박했습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에 체포당할지 모릅니다. 또 황제가 된 잔인한 어떤 폭군이 선 자리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고 또는 우리에 있는 사자에게 던지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주 모든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이 점을 알도록 온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여!

 


 - 두 번째 요점 (하나님으로부터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다) -

 


 이제 두 번째 요점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체 인류를 내다보십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 자기의 애정을 쏟아 붓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십니까? 예,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시니 그들을 부르십니다.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부르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이 어휘를 사용하는 용도에 대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친히 들어보십시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 여러분도 알다시피 -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함이로다.” 다시 주님께서는 “청함을 입은 자들(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많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적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베드로가 오순절 날 행한 설교를 기억하십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고 회개한 어떤 사람들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시는 것이라.” (행 2:38~39)  바로 그 어휘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의 약속은 전세계에 보편적으로 주어진 약속이 아닙니다. 그것은 특별하게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역시 같은 것을 발견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그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부르심을 입은(또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그리스도인들은 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도 나타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말하기를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방식으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일반적/보편적 부르심)

 


 여기서 부르심은 “효과적인 부르심”을 뜻합니다. 부르심에는 두 가지 타입이 있습니다. 어느 때나 복음은 전파되며, 부르심은 발생합니다 - “하나님이…이제는 어디든지 다 사람을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모든 사람들을 부르는 일이 있습니다. 복음이 전파될 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것을 일반적인 부르심, 보편적인 부르심이라 합니다. 그러나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부르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효과적/특별한 부르심)

 


  바울이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할 때 그리스도된 사람들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서 우리는 보편적인 부르심과 특별하고 효력있는 부르심을 구별해야 합니다.

 두 사람이 같은 회중 속에 앉아 있다고 생각합시다. 그 두 사람은 같은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같은 복음 전도를 듣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믿고 다른 사람은 믿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차이입니까? 믿는 사람에게는 효력있는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 부르심은 두 사람에게 똑같이 비쳤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효력이 있었고, 그래서 그로 하여금 앞으로 나오게 하였고 자기를 복종시켜 믿고 그리스도인들과 합세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효과적인 부르심입니다.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의 백성들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들은 그 그리스도의 백성들 속에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그 영역과 범주 속에 들어 있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효과적인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말씀전도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의 결과로 그 부르심의 효력은 발생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 

 


말씀을 효력있게 만드는 것은 오직 성령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듣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듣지만 이 유효한 부르심을 듣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습니다. 말씀의 글자를 읽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능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 부르심이 효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그 말씀사역에 함께 하였고, 그들이 그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께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참으로 중요하기 짝이 없는 낱말입니다. 우리는 그 말의 위대한 의미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 세 번째 요점 (그들은 성도들이다) -

 


 이제 마지막 어휘를 살펴봅시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효력있는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모든 성원들에게 그 어휘를 사용합니다. 그는 그들 중 몇 사람만이 성도들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그 말은 거룩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그를 찬송키 위해 구별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도라는 말은 그러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가 ‘거룩한’ 산에 올라갔다는 말을 우리는 듣습니다. 성전과 휘장 안에 있던 기명들을 거룩한 기명들이라 부릅니다. 거룩한 책들이 또한 있었습니다. 그 말은 모두 다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 구별되어 하나님께 찬송하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드려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사용될 때 역시 같은 것을 뜻함이 틀림없습니다. 사도가 바로 여기서 그러한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의 일차적인 뜻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내는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을 반대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적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지 않습니다. 반면에 거룩의 본질적인 의미는,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그 말은, 우리가 세상을 나타내는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 그것이 바로 소극적인 측면에서 본 거룩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소극적인 측면에서만 머무르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실로 중요한 것은 적극적인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세상 정신으로부터 물러섰다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성도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거룩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도덕적인 사람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이 되는 것과 거룩하게 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룩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성도가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성도가 되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구별되는데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만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구별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자신을 드립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로 그것이 해당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 말씀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의롭다 하심’보다 ‘거룩함’을 먼저 놓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어째서 그렇게 해야합니까? 그것은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가 성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된 존재입니다. 그가 무가치한 삶을 살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죄에 떨어질 수도 있고, 그리스도 안의 어린 아이일 수도 있습니다. 또 매우 유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리스도인이면 성도입니다. 그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그 범주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이 새로운 본성 때문에, 이 유효한 부르심 때문에, 그는 다른 범주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따로 떼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 새로운 왕국으로 주입되는, 즉 어두움의 나라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행하는 일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또 다른 일, 더 주관적인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관적인 측면에 이르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별하신 다음에 우리 속에서 계속 일하신다는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어째서 그렇습니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계속 일하십니다. 그것이 거룩하게 되고 성도가 된다는 것의 주관적인 국면입니다. 나는 성도입니다. 나는 나아가면서 더 성도다워집니다. 그래서 난 성도가 되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성도로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내가 거룩해져감에 따라서 내가 성도라는 더 확실한 증거를 가지게 됩니다. 내 자신도 그 거룩하게 되어나가는 측면에서 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제가 방금 인용했던 그 구절은 그 점을 완벽하게 나타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같은 교훈을 가르치는 또 다른 성경 본문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벧전 2:11) - 너희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너희가 그리스도인이니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이다 - “사랑하는 자들아…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 더 이상 세상에 섞여 있지 않고 너희는 낯선 사람들이고 ‘이상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애정을 입은 특별한 대상들이다. 너희는 나그네들이며 낯선 자들이고 이 세상을 지나는 순례자들이다 - 너희는 이 세상에 정착해 있지 않고 단지 이 세상을 통과하는 자들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다른 말로 해서 너희가 나그네요, 행인이니 이 모든 일을 해야 된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셨으니 그렇게 해야 한다.

 


 어째서 하나님께서 그 기이한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셨습니까?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베드로는 계속합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1)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은 요한일서 3장 2,3절에서 그것을 다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런 다음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그것이 바로 성도다워지는 일의 일부입니다. 내 자신이 성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나는 구별되었습니다. 내가 성도라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나는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노예)입니다. 그는 구별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비상하거나 예외적이거나 어떤 괄목할 만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는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말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고 부르셨고 구별하셨고 성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성도들이 된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구별되고 따로 떼어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 18절 이하의 말씀을 계속 읽어내려가다 보면 이방인들의 삶에 대한 섬뜩한 묘사가 나옵니다. 로마 시민들의 삶, 사도 바울이 이 로마서를 쓸 당시의 로마 사람들이 어떠한 류의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묘사가 나타납니다. 거기에 보면 그들은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경배하였고, 사람들을 숭배하였고 사람들을 자랑하였고, 동물들을 경배하였고 네 발 달린 짐승이나 공중의 새를 하나님보다 더 섬겼습니다. 부도덕한 죄를 범할 뿐 아니라 가장 비열하고 가장 섬뜩한 패역을 저질렀습니다. 로마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 중 많은 자들이 전에는 바로 그러한 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들은 거기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지금 그들은 그리스도인들로 따로 떼어져,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미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이것이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현대 세계를 살펴보십시오! 오늘날의 사회를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을 우리는 인식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오직 우리 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요 하나님의 이 긍휼 때문이요, 하나님의 이 ‘부르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나게 하신 바로 이 구별됨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하십니까?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때만이, 우리는 십자가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진정으로 맛볼 수 있습니다.

 


 순교자들 중의 한 사람인 성도다운 존 브래드포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언젠가 자기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다가 어떠한 범죄 때문에 사형에 당하려고 끌려가는 한 불쌍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무엇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그 성도다운 존 브래드포드는 그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존 브래드포드도 바로 저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백과 자기 자신에 대한 느낌이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된 것은 우리의 선함이나, 우리의 삶이나,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에서 왔습니다 - 영원하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정말 우리는 모릅니다. 그것은 참 기이한 일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죄인되었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멀리 떨어져 있었는 데도 불구하고 바로 그때 하나님은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고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입니다. 바로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사람이니 그러므로 이제 그것을 보여주십시다. 우리는 복음의 요구를 거역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세상에 가까이 살려고 하는 그러한 헛수고를 이제 그만 두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도들이라면 그 사실을 선포하십시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자랑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타내십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들이여 - 우리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마땅히 그러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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