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605b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종말론(2)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인간적인 종말, 역사적인 종말에 있어서 사람들은, 제가 첫째 시간에는 깊이 안 들어갔습니다. 인간의 과거의 산물인데 과거가 자기의 종말이기 때문에 자기에 관한 운명에 관한 종말이기 때문에 미래를 어떻게 끌고 가느냐 하면, 과거 여기 있고 현재 여기 있고 미래 있다면, 과거의 산물과 인간이 현재가 되어서 과거를 이해할 때 과거에 이런데 지금 존재한다는 것은 여기에 대해서 의로움이 있기 때문에 존재했다.
따라서 내가 미래에 살아남으려면 여기서 뭘 해야 되느냐 하면, 추가적인 플러스, 추가적인 더하기, 알파, 의로움이 있을 때 우리는 종말에 예수님이 말하는 종말의 예언조차도 돌파할 수 있다. 라는 의식이 나오겠지요. 이것은 바로 메시아관입니다. 유대주의의 메시아관입니다.
예레미야 7장에 보면,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성전이, 성전이 아니었다 이 말이죠. 이사야에 보면 너희들이 안식일이나 뭐 할 때 제대로 안 지켰기 때문에 돼지 목 따는 그런 걸로 더러운 걸로 했기 때문에 손에 피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벨론 통해서 멸망케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게 과거 아닙니까, 과거 역사거든요. 그들은 과거를 역사로 보니까. 약속으로 보지 않고 역사로 보니까. 그러면 그 과거 역사 속에 자기가 남았다는 것은 해석을 두 가지로 할 수 있죠. 하나는 뭐냐 하면, 은혜로 남았다. 유대주의 이야기합니다. 은혜로 남았는데 이게 조건부 은혜지요. 다시는 그런 짓을 나쁜 짓을 안 한다는 조건 하에 은혜로 남은 거죠.
이 유대주의 신학은 이 두 개로 끝나 버립니다. 다시는 그런 과거 같은 죄를 되풀이해서는 안 되겠다. 세대주의. 세대주의도 그렇고 오늘날 한국교회 신학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좀 고상한 공부 많이 한 신학자들은 이래 생각 안 합니다. 이것이 오해라고 하지만.
일반 교인들 성경을 보고 구약부터 해서 차분하게 신약까지 돌파하면, 세상에, 세상에 구약 사람들 이렇게 나쁜 일 했구나. 하나님께서 다니엘 봐라. 주여, 우리가 죄 지어서 칠십 년 포로 되었구나. 이젠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안 하겠다.
이것이 단박 뭐 딴 거 목사님의 깊은 해석 다 때려치우고 단박 느낌으로 느낌 자체로 오는 게 그겁니다. 죄 지으면 나중에 내일 살아있단 보장 없다. 죄 지으면 살아있다는 보장 없다 이것뿐이거든요. 살아 있어도 저주스런 모습으로 살아있다. 그럼 지옥은 뭐냐? 과거의 죄 지은 거 결합한 것이 지옥이다. 거기서 완전히 심판, 작살나는 곳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뭐하냐? 바르게 살아야지. 바르게 살면 천당 간다. 천당 가는데 완벽하지 못할 땐 어떻게 하느냐? 패자부활전이 있다. 그게 뭐냐? 연옥이다. 천주교 연옥은 이게 호소력이 있지요. 설득력이 있다고. 인간의 감정의 두 단계를 원활하게 하나님은 얼마나 자비롭고 은혜로운지요.
그 [300]이란 영화에 나오지요. ‘나는 광대하다.’ 거기 나와요. 나는 광대하다. 광대하신 하나님께서 그 하찮은 인간들 죄 지은 것을 그냥 밟지 아니하시고 한 번 더 기회 주셔서 은혜줘서 그 다음에 진짜 말 안 듣는 놈, 조져버린다. 이게 연옥설이고, 개신교에서 말하는 천년왕국이죠. 전천년주의. 얼마나 광대하시고, 자비하시고.
그런데 세상에 이 자체, 이 시스템 자체가 죄인 줄 누가 알았겠어요. 이게 바로 죄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죄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죄를 고치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그 죄에서 빠져나오려야 빠져나올 수 없다. 왜? 너는 마귀 새끼니까. 네 본 모습을 들추어내고자 함이지 바꿀 능력이 없어요.
소경이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보고 하는 거예요. 니가 지금 본다고 하니 소경이다. 그럼 우리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보이는 걸 안 보인다고 할 수도 없고. 이 말은 뭐냐? 니 실체를 아는 방향으로 내가 다가갈게. 그러니까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너는 점점 더 실체가 드러난다는 겁니다.
지난주 주일날 오전에 제가 ‘주 안에서’ 설명하면서 뭐부터 설명했느냐 하면, 주 앞에서부터 먼저 설명했지요. 주 앞에서가 뭐냐 하면, 주 앞에 뭐가 있어요? 말씀이 있지요. 말씀 멀리서 보면 지키는 것 하지만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주 앞에 설 때는 죄인으로 범죄 함으로 서지요.
출애굽기에 보면 19장에 보면, 멀찍이 있을 때는 주님 원망하다가 막상 주님 계시는 시내산 밑에 오니까 겁나서 똥개처럼 얼어가지고 있지요. 이게 하나님 직접 만나본 사람은 이거는 뭐, 하나님 만나면 잘했다, 악했다. 나는 과거에 이건 잘했는데 이건 못했다. 라는 소리 자체가 의미 없어 전부다 비거룩이에요. 비거룩. 나는 더럽다. 화로다. 망한다. 그것뿐이에요.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말 한 번 잘못해서 뭐 됐습니까? 여자로선 아주 치욕스러운 제일 밑바닥 인생, 전형적인 저주받은 여인, 문둥병 됐잖아요. 이 문둥병이라 하는 것은, 이 문둥병 된 사람 또 있어요. 누구냐 하면, 손이 문둥병 됐죠. 모세가. 하나님 사명 받을 때. 자기 품속에 넣었다 빼보니까 무슨 손이에요? 문둥병이 걸렸어요.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구원될 자격이 있어서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너희들이 나한테 호소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 백성을 통해서 하나님 쪽에서 다가서는 것이지, 너희들이 나한테 다가와서 구원되는 건 아니란 말이죠. 다가서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알고 있었던 자기 나름대로 어떤 포부, 하나님 만나면 이거 기도 해야지, 하나님 만나면 이거 달라고 해야지, 그거는 점차점차 그거는 깨져야 되고, 그 깨진 자리에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주님이 본래 우리한테 원했던 사명이 우리한테 대신 차지해야 됩니다.
이거는 성화가 아니지요. 성화가 아니고 점령군에 의해서 점령당하는 거지요. 이게 무슨 성화입니까?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점점 나를 차지하는데 이게 무슨 성화에요. 성화가 되려면 누가 있어야 돼요? 자아가 수립돼야 돼요. 자아가 안 갉아 먹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점령군이 갉아 먹는데 이게 무슨 성화입니까.
결국 그렇게 되려면 [조직신학의 고속도로]에 보면 나오지요. 그래 하려면 성화라 하지 말고 누구 성화? 인간의 성화가 아니고, 성령님의 성화 돼야 맞다 이 말입니다. 성령님에 의해서 성화된다면 성령님의 성화이지, 왜 내 성화가 되어야 되느냐 말이죠. 그런데 성령님은 성화라는 게 성립 안돼요. 왜? 처음부터 거룩하기 때문에.
결국 내 말은 뭐냐? 주님의 거룩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평생 동안 내가 왜 죄인인가를 드러내게 합니다. 다가오심으로써 내가 미처 몰랐던 죄도 아담의 본성도 드러내는 작업이다 이 말이죠. 거기에 무슨 개인적인 성숙이란 성화론이 성립될 자리가 없어요. 그분이 갉아 먹는데 십자가 다 파먹어 버리는데. 쥐가 와서 감자 다 파먹는 데 남는 게 뭐가 있어요. 남아야 성화돼서 할 게 있는데 남은 게 없는데. 파먹다, 파먹다 다 파먹은 게 뭐냐? 죽었다 이 말입니다.
선과 악에 의해서 나는 과거에 이런 선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 가치를 인정해서 지금 현재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미래까지 내가 살아남을 보장하려면 지금 내가 뭘 축적해야 하는가? 내가 선한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이걸 미리 하나님이 모든 아주 무서운 장애물, 트랩을 어렵게 힘들게 통과해서 천국에 골인하다. 이런 마치 삼종 경기도 아니고. 철인삼종경기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이해해서 인내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이건 아닙니다.
인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내 것이라는 게 없다 말이죠. 끝까지 유지하는 거예요. 심지어 나에게 어떠한 허깨비 같은 놈들이 와서 공격하더라도 원래 내 것이라는 게 없고 주의 것이라고 계속해서 믿는 생활이 인내입니다. 믿음이 인내에요. 인내가 믿음이고, 인내가 믿음이에요.
롯의 인내를 본 받으라.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 그렇게 영혼이 상처 받았지만, 진짜 상처 받은 거예요. 하지만 끝까지 천사가 전해준 약속을 믿었지 않았습니까? 롯이 되돌아보지 말라 하는 것을 그걸 믿었다는 말은 앞서 뭐까지 다 믿었단 말입니까? 유황불이 온다는 것까지 믿은 거예요. 유황불 떨어진 걸 믿었으니까 그 다음에 부속적인 거 뒤돌아보면 안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런데 롯의 처는 남편따라, 한 자가 되서 헷갈린다.
다시, 다시. 롯은 끝까지 유황불을 믿었잖아요. 뒤돌아보면 안 된다는 걸 믿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롯의 처는 어떻게 됩니까? 그야말로 남편 믿음이 지 믿음인 줄 알고 바보 같이 따라 나서긴 따라 나섰지만 남편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너무 먼 당신. 남편 믿음이 내 믿음으로 전이가 안 돼요.
여러분 독서실에 가 보세요. 칸막이 쳐 있잖아요. 옆에서 아무리 공부 잘해도 내 공부 저절로 잘해지는 거 아닙니다. 명언 아닙니까. 옆 짝 공부 잘한다고 지 공부 잘하는 거 아니에요. 그는 그고, 나는 나란 말이죠. 아버지 목사라고 딸이 믿음 좋은 거 아닙니다. 다만 따라나서긴 따라나서겠지요. 하지만 뒤돌아보는 건 지 마음대로지 뭐. 목사가 모가지 깁스 할 수도 없고. 뒤돌아보겠다는데.
하지만 인간은 뱀의 후손의 능력에 못 벗어나요. 못 벗어남을 아는 사람이 이미 벗어난 사람이에요. 안 벗어난 자꾸 자기 벗어난다, 벗어난다. 기독교 힘으로 종교 힘으로 벗어난다. 이러 하고 있어요. 정말 벗어난 사람은 오히려 그 다음부터 십자가에서 어떤 죄가 해결 되었는가 그 아는 재미에 쏠쏠해요.
내가 어떤 내 선에서 해결 안 되는 죄들이 어떤 게 들어있는가 그 목록을 살피는 그 재미가 아주 쏠쏠합니다. 아이고, 내가 이런 죄도 짓는구나, 씨. 하면서. 이런 죄도 짓는. 이런 농땡이가 어디 있노? 이 농땡이 봐. 이런 위선이 다 어디 있어. 그거 아는 재미. 성화같은 소리 하고 있네. 성화, 날아가는 소리 하고 있네. 무슨 성화에요, 그게.
종말은 하나의 역시 종말 앞에 종말 말고 다른 앞에 있는 산상설교 마찬가지고, 그 전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쏟아집니다. 자, 한번 정리해 봅시다. 본격적으로 진도 나가야지요.
십자가에서 십자가로 쏟아집니다. 뭐가 쏟아집니까? 산상설교도 쏟아지고, 기적도 쏟아지고 병 고침, 물 위를 걷는 것 다 쏟아지고 그 다음에 뭐 쏟아집니까? 귀신 쫓아내는 것도 쏟아지고 그 다음에 장차 종말에 대한 파멸이죠. 파멸에 대한 말씀도 쏟아지겠지요.
감람산 설교라 해서 장차 마지막 때에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이런,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천지가 별이 떨어지고 어떻고, 민족들이 너를 배반할 것이고 나오고, 마귀가 기적적으로 역사하고 하지만 끝까지 이기는 자는 택한 자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서 택한다 하는 여러 가지 마지막에 양과 염소가 나오고, 염소와 양이 나오고 나오잖아요.
이게 어디서 쏟아져요? 십자가에서 쏟아져요. 십자가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제가 아까 강의 처음 할 때 여러분 이삭이 없다고 생각할 때 사람은 뭐만 붙들면 됩니까? 이스마엘만 붙들고 그 다음에 뭐 할 거예요? 최선을 다하리라. 구원받으려 하겠지요. 이스마엘 붙들고. 이삭은 없으니까. 거기서 하나님 말씀 지키고 착하게 살고 반듯하게 살고, 이래서 구원받으려 할 거 아닙니까? 다 말짱 소용없는 거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십자가 없고 말씀만 있다고 합시다. 그럼 그 사람 뭐 하겠습니까? 이런 말씀 조심하겠지요. 이런 말씀들 심하고 나쁜 짓 안 하겠지요. 산상설교 시키는 데로 다 하겠지요. 예수 믿고 난 뒤에 예수 믿을 때 은혜 구원받았으니까 믿고 난 뒤에는 산상설교 지키려고 애 쓰겠지요. 인자가 머리 둘 곳 없다고 하니까 전세금 해서 교회 바치고 지는 노숙자 할 수도 있겠지요. 목사 되면서 아버지한텐 이야기도 안하고 신학교 가겠지요. 왜? 니는 날 따르라 했으니까. 아버지한테 이야기도 안 하고 결정하겠지요.
모든 걸 한다 말이죠. 뭐가 없을 때는? 십자가 없을 때는 말씀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이 모든 말씀 지키는 게 어디 담기겠습니까? 이 말씀을 누가 지켜요? 내가 지키지요. 이 모든 지켰다는 그 업적과 실적, 차곡차곡 어디에 쌓이겠어요? 나라는 창고에 쌓이겠지요.
나라는 창고 쌓입니다. 창고에 한 10미터 쌓였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몇 미터 쌓였느냐? 5미터 쌓이겠지요. 그러면 마지막에 십자가 없다고 치고 마지막에 그 사람의 행함대로 심판을 행할 텐데 행함대로 믿음에 대한 행함 같은 말로 해도 괜찮아요. 행함대로 심판할 텐데 그 축적된 그걸 몇 미터로 잡겠어요? 몇 미터 잡아서 몇 미터 컷오프 당하고, 몇 미터는 3라운드, 4라운드 진출할 수 있습니까? 몇 미터에서 끊기겠습니까? 중요한 문제 아닙니까? 그렇지요.
지금 산상설교부터 다 해서 이게 70% 깎이는가? 30%는 봐줄게. 아니면 50% 깎이면 됩니까? 그러니까 이게 어느 정도 쌓여야 돼요? 얼마나 쌓여야 됩니까?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군데군데 인간이 행위도 소용없다는 말씀을 늘 해왔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 같은 경우에 분명히 기적이 쏟아지지요. 오병이어를 행해서 오천 명 먹였습니다. 따라왔습니다. 그들은 따라 올 때 그냥 떡만 먹겠다고 따라온 게 아니에요. 예수님을 인정한 그 공로가 드디어 예수님의 제자라고 간주해서 따라온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많은 제자가 따라왔어요. 그리고 살과 피 말씀하기 전까지는 많은 제자들이 왔다고 했어요. 그런데 살과 피 이야기하고 난 뒤에 갑자기 십자가 이야기하고 난 뒤에 다 떠나요. 다시는 따라다니지 않았다. 교회에서 십자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지요.
꼭 십자가 사건에 이르러서 십자가 효과가 아니라 이미 군데군데 말씀 주신 게 있어요. 또 예를 들면 요한복음 2장 같은 가운데서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포도주 없다고 이야기할 때 마리아가 예수님 안 듣습니까? 하나님 아들인 줄 인정 안 했습니까? 인정했으니까 기적 베풀어 달라고 했지. 인정했으니까.
인정했으니까 애들아, 우리 예수님 시키는 대로 해야 돼. 물 떠오라 하면 물 떠오고, 뭐 부으라 하면 붓고 마음대로 해야 돼. 저분은 보통 분이 아니다. 다 인정했으니까 포도주 떠다 달라고 예수님한테 이야기했지, 예수님이 어디 양조장하고 거래처 열어 놨습니까? 아니잖아요.
마리아는 이래 생각했을 거예요. 예수님께서 돈을 만들어서 돈 가지고 어디 포도주를 사오는 수도 있고. 하여튼 인간 쪽에서 이스마엘 쪽에서 생각할 수 있는 건 다 했겠지요. 이삭을 생각 안 하고. 이스마엘 쪽에서.
그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있느냐 했어요. 하면서도 또 포도주는 포도주대로 만들어줬잖아요. 이건 뭐냐 하면, 침투에요. 십자가 사건을 미리 앞당겨서 이야기했어요. 그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표적이 아니고 뭡니까? 표징이다. 다시 말해서 표시낸다.
무슨 표시? 십자가의 표시. 십자가는 뭐냐 하면, 너희들이 하는 게 아니고, 내가 해서 구원하는데 왜 너희들은 해선 안 되고 내가 하느냐 할 때 왜 너희들은 해선 안 되느냐를 지금 기적을 통해서 표적을 통해서 왜 인간은 아니냐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겁니다. 육에 속했고 어둠에 속했기 때문에 자기 자력으로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설명했으니까 그중에 뭐도 포함돼 있습니까? 종말에 관한 이야기도 포함돼 있지요. 종말에 관한 이야기도 포함되었다는 말은 이걸 좀 약간 어렵지만 잘 들어보세요. 구약에서 언제부터 종말을 논하였느냐? 구약 나름대로 종말을 논했느냐 하면, 정점이 있어요. 정점이 다윗 왕 때 정점을 이룹니다.
제가 일방적으로 지어낸 게 아니고, 마태복음 1장 족보에 나오지요. 가파르게 상승하지요. 어디까지? 아브라함부터 어디까지? 다윗까지 올라갑니다. 나머지 14대, 14대, 14대에서 이거는 앞에 있는 14대의 의미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앞에 있는 14대에 어떤 내용물이 들어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꼴아박는 14대, 회복되는 14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뒤에 14대가 있는 거예요. 사실은 뒤에는 14대, 14대가 아니지요. 그러면서도 14란 숫자를 맞추어야 될 이유가 앞에 14대란 의미를 알기 위해서 뒤에 14대가 있는 겁니다.
제가 대전해서 강의할 때 이삭과 이스마엘의 정실부인, 첩의 부인 설명하기 위해서 원래 8 대 4지요. 그래서 12 아닙니까? 8 대 4인데 이걸 뭐로 꺾어 버립니까? 3대 3대 3대 3으로 배치를 하는 이유가, 그거는 니가 누구 편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 그러니까 정실부인과 이스마엘 쪽과 이삭 쪽 정실부인과 첩의 부인. 이걸 두 언약이라 합니다.
오늘 성경 한번 찾아봅시다. 한번도 안 찾으니 거하다. 갈라디아서 한번 봅시다. 갈라디아서 3장에. 3장이 아니고, 4장에. 24절에 보면,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두 여자가 두 언약이에요. 언약을 설명할 때 뭐로 설명한다? 여자로 설명해요. 여자가 다르다는 거예요. 뒤에 태어난 자식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식부터 나오지 말자. 엄마 놓고 이야기하자. 아버지는 하나에 여자 둘이죠.
이걸 제가 울산서 강의할 때 바지 가랑이라 했죠. 몸체 하나인데 바지로 갈라지죠. 그 바지 가랑이 이야기 한 것은 어떤 인간도 이 바지 가랑이에서 둘 중 어느 한 곳에 소속되어 있지, 제 삼의 지대에 따로 돌아다니는 거 없어요. 반드시 둘 중에 하나에 속해요. 두 바지 가랑이. 그래서 두 언약이에요.
두 언약은 여자로 표현한 거예요. 하나는 하갈이고 하나는 사래고. 두 여자가 두 여자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원래 하나였었지요. 그 하갈이 누구 몸종입니까? 사래 몸종 아닙니까? 그러니까 사래 몸종이니까 원래 사래 한 몸이잖아요. 한 몸인 줄 알았더니만 둘로 갈라졌어요. 하나님은 뱀의 후손을 끄집어내서 뱀의 후손에서 두 가랑이에 여자의 후손이 튀어나게 만들었어요.
죽었다가 살아나야 그게 생명이에요. 그냥 살아있는 건 생명 아닙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야 돼요. 그래야 죽음조차도 손 못 대는 영원한 생명인 것이 보장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내가 이번 주일날 아침에 이런 이야기했지요. 죽었다가 살려주신 분이 아니면 아버지가 아니라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단 말은 이미 나는 살았어요. 그래서 아버지라고 부른다 했지요. 로마서 8장에 의해서. 로마서 8장에 보면 나와요.
구약에서 언제 종말이 나오느냐 하면, 다윗 왕 때 정점에 이르렀다가 그때부터 종말이 나옵니다. 그때 종말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선지자에요. 그러면 종말 되면 그 종말 남나? 천만의 말씀. 여러분 사울이 다윗이 골리앗 죽일 때 사울이 자기 정권 내놨습니까? 다윗아, 니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는구나. 내 왕 그만할게. 천만의 말씀. 나란히 가지요. 그게 하나님 작전이었습니다.
지금 사람들의 관심은 다음의 차기 왕이 누구냐? 여기에 관심 있었지, 그 왕이 될 수 없는 인간이 얼마나 끈질기게 왕 자리를 포기 못하느냐를 그렇게 끈질길 줄 몰랐지요. 근데 그 끈질김이 예수 믿는 우리의 끈질김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말 하면서도 절대로 우리의 자존심과 나의 존재가치를 우리는 포기 안 합니다. 포기하라면 자살해 버립니다.
그래서 결국은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예수님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사람은 자기 종말 위주로 자기 종말을 담보로 삼고 주님한테 시비 걸고 있습니다. 주여, 나 구원 안 하면 나 죽어버립니데이. 알아서 하이소.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의 종말을 듣습니다. 성경을 봅니다. 엉터리입니다. 엉터리에요. 주님은 뭐라 하느냐 하면, 죽어라. 죽어라 이캅니다. 날 구원 안 하면 주님의 예언도 아무 의미 없다고 보는 겁니다. 인간은. 주체가 그만큼 강렬해요.
다윗 후배 왕들이 왜 그들이 선지자를 그렇게 핍박합니까? 선지자가 다윗 이후에 왕 중심이 아니고 누구 중심? 선지자 중심,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성신이 임한 중심으로 나가니까 구약학자들은 그걸 카리스마라 하지요. 구약학자들은 신앙은 없어도 그런 걸 잘 알아내요.
왕 중심이 아니고 무슨 중심? 카리스마 중심, 다른 말로 하면 영 중심. 영 중심으로 빠져나가면서 이 두 개가 영이나 왕이라는 제도냐? 제도냐 아니면 바람 같은 선지자냐? 그 둘 사이의 갈등으로서 어디로 치닫는다? 종말로, 종말로 치닫는다. 이래 보는 거예요. 그거 하나 잘 봤지요. 그러니 공부를 해야 된다니까.
나중에 우리가 이래서 어디까지 공부 계속할지 모르겠지만 뒤에 보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사도 바울이 육과 영과 혼을 이야기할 때 이 책에 보면 잘 그게 설명됐는데 바살과 뭐 이렇게 루아흐, 참 잘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걸 공부를 해야 된다니까. 비록 이스마엘이지만 해야 된다니까.
목사님, 구약해석 어떻게 해야 됩니까? 라고 할 때, 넓게 이야기해서 십자가로 해석해야 됩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해 주세요. 예수님만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해 주세요. 예수님만이 홀로 실시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스스로 약속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다른 말로 더 쉽게 이야기해 주세요. 왜 인간은 안 되느냐를 겸비해서 병행해서 합니다.
더 쉽게 이야기해 주세요. 인간이 하나님의 종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종은 핍박당하면서 십자가의 리허설하지요. 십자가에 리허설하는 식으로 갑니다. 좀 더 쉽게 말해 주세요. 그것이 바로 여자의 후손 쪽에서 보여주는 뱀의 후손에 대한 종말, 심판, 종말 심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종말은 뭐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약속대로 구약에 한 약속대로 뱀의 후손 작살내려고 하는 거예요. 니가 머리를 쳤지 이젠 니 죽었다. 아니, 발꿈치를 물었지 이제 니 죽었다. 니 머리는 작살났다. 뱀의 머리를 작살내는 거예요. 그 뱀의 머리가 다니엘서에 보면 뭐로 나옵니까? 하나의 국가로서 금신상으로 나타나잖아요.
그러니까 다니엘의 세 친구가 절 안 하지요. 왜 절 안 하느냐 하면, 절 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고, 그걸 부수려고 태어난 맡은 배역이 여자의 후손 배역이기 때문에 지는 죽어도 절을 안 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 안 하실지라도 내 죽더라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래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방금 이야기한 것은 예수님이 해석할 때 어떻게 되느냐? 이건 말로 하면 복잡하기 때문에 쉽게 하겠습니다. 방금 제가 뭐라 했습니까? 다윗 시대 이후에 뭐가 침투한다? 선지자. 여기에 누가 반격한다? 왕. 그럼 왕은 어디 후손입니까? 뱀의 후손이고 선지자는 여자의 후손 계통이죠. 여자의 후손. 그런데 이게 역사 속에 하나로 결합되면서 이 역사는 핍박과 압제와 압제 하는 쪽과 압제 받는 쪽으로 이렇게 섞이면서 구약이 진행되지요. 그죠?
그렇다면 여기 재미있는 것이, 선지자는 참 재미있는 것이 선지자가 시비를 걸어요. 이게 중요해요. 가만있으며 월급 받아먹으면 되는데 괜히 시비를 건다고. 시비를 걸면 왕이 가만있습니까? 어딜 까불어. 또 공격을 하지요. 공격할 때 잘 들어보세요. 그때 첫 번째 왕한테 시비 걸 때 선지자 본인도 미처 몰랐던 예언이 하나님의 성신에 의해서 다른 말로 하면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해서 공격 받으면서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선지자는 공격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계속 공격하면 계속 핍박하면 뭐가 나와요? 지도 미처 몰랐던 장차 예언들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요 방식, 오늘날 성도가 가야 될 길입니다. 다 우리가 가야 될 길이에요. 신학 배워서 신학 증거한다고 예언되는 거 아닙니다. 마귀가 도와줘요. 우리 속에서 복음 나오도록. 가만있는 나 건드려서 튀나오게 하죠. 모든 성도가 다 그래요. 성도는 인간 아닙니까? 세상 조용하게 살고 싶은 게 이익이지. 시끄러워서 이익이 뭐 있습니까?
제가 이러면 실질적으로 이렇습니다. 교인들이 마음의 결정을 이렇게 해요. 아이고, 내가 나선다고 일되나. 개혁되나. 입 다물자. 나는 뭐 잘났다고. 난 그냥 숨어 지내자. 더러운 세상. 세상 더럽지 뭐. 그냥 숨는 쪽으로, 소극적으로 나와요. 근데 그 사람은 뭘 모르느냐 하면, 지금 자기 가오 세우고 자존심 세우라고 하나님께 그 이단들 있는 게 아니고, 밟지도 못할 인간을 밟음을 통해서 본인이 미처 몰랐던 새록새록 새로운 하나님의 깊은 복음이 본인이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걸 제가 꽈당 머리 박기라. 부부가 결혼하게 된 것은 주께서 둘이 아름답게 잘 살라고 하는 게 아니고 뒤에서 머리 박게 해서 둘 다 니가 잘났다, 니가 잘났다, 서로 싸우도록 하나님께서 뒤에서 장난치면서 꽈당 박아서 니가 먼저 때렸잖아. 니가 먼저 때렸잖아. 싸우도록 하기 위해서 그 가운데 새로운 복음이 나오게.
마찬가지로 이 선지자들 보게 되면, 이런 예상치 못한 예언들이 나옵니다. 그 예언들이 어디 배치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고걸 하나하나 다 끄집어내서 쫙 깔아버려요. 쫙 까니까 바리새인과 유대인들과 예수님 제자들도 마찬가지지만 저거 지키면 마지막 종말을 무사히 통과하겠구나. 이렇게 오해를 하는 겁니다. 오해.
오해를 하는 거예요. 지금은 종말이 아니지만 앞으로 종말 쯤 때 되서 이거 지키면 통과되겠다. 라고 오해를 하는 거예요. 제가 방금 ‘오해’란 말을 한 이유가, 다시 구약, 구약의 이 말씀 나오게 된 경유가 뭘 지키겠다는 것이 아니고, 씨 누가 나한테 간섭해, 누가 내 자존심 건드려. 해서 숨길 수 없는 아담의 속성을 노골적으로 폭발하는 대로 나온 게 예언이거든요.
그 말씀이 B.C. 7세기에 나왔다면 오늘날 A.D. 오늘날 서기 이천 년 때에 그 아담 속성 어디 갑니까? 우리 갖고 있잖아요. 그러면 그 말씀 가지고 치면 우리는 그 말씀 지키려고 덤벼들다가 성질나서 에이, 예수 안 믿어. 라고 치밀어 오르는 화에 대해서 폭발하겠지요. 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뭐냐? 하나님 말씀 통과 못한다가 증명이 되는 겁니다.
마지막 때에 먹는 것, 입는 것 족한 줄 알아라. 우리는 그 말씀을 기억조차 하기 싫어요. 기억나더라도 잠시 제쳐놓고 싶습니다. 하나님 잠시 눈 질금 감아 주세요. 이 대목에선 이 말씀 지금 하겠습니다. 잠시 제쳐놔 버리고 나중에 이것 지키려 하는데 그 말씀 다 끌고 오기를 원하지요.
그런데 자기가 만약에 어떤 큰 주식이나 펀드해서 큰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어느 도시에 가서 펀드해서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쫄닥 망해버렸어요. 그때 내가 스스로 치워놨던 말씀, 먹는 것, 입는 것 족한 줄 알 때 그 말씀이 이단들, 삼단들 보고 한 소리가 아니고, 바로 이미 구원받은 나보고 한 소리인 것을 새롭게 알게 되지요. 그때 우리는 뭘 느끼느냐? 이미 우리는 종말을 통과한 사람이라는 그 기쁨.
야, 전에까지는 내 힘으로 말씀 지켜서 통과했던 그것이 그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걸 깨닫는 기쁨. 주님께서 내가 멀리했던 그 말씀을 나한테 주시고 십자가에서 그 말씀이 쏟아지고 십자가의 용서가 겸해서 쏟아진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는데서 오는 용서의 의미를 다시 한번 아는,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다시 한번 아는 그 행복을 주시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무릎 꿇고 기도하죠. 주여, 전 세계에 떨어진 성도들이 제발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그 충만함을 더욱더 알게 해주옵소서. 사도 바울의 기도는 그것 밖에 없지요. 아무것도 없지요. 그게 기도 전부지요. 왜냐하면 말씀이 주께서 움직이니까. 뭘 가지고 말씀을 가지고 사적인, 개인적인 종말을 계속 강요하죠.
역사적 종말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지어낸 겁니다. 이건 우리가 조작해 낸 거니까. 사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무슨 뜻에서 말했는지 알지 못했지만 뭐냐? 지금이 종말이라고.
여러분이 많이 피곤해 하시니까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조금만 하고 몇 분 들어갈지 모르겠지만.
요한계시록 이야기 해봅시다. 이 이야기는 제가 설명 안 하겠습니다.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 신학교 때 다 아는 이야기기 때문에 지루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삼종 세트가 나오지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죠. 이 삼종 세트의 의미는 뭐냐 하면, 창세기 15장에 보면, 15장입니까, 14장입니까? 창세기 잠깐 봅시다. 15장 16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여기 보면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그 다음에 뭐라 되어 있어요?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했지요. 아, 이거 재밌지 않습니까? 삼대 만에 못 돌아와요. 왜 못 돌아옵니까? 아직 죄가 무르익질 않았어요. 숙성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개인적으로 구원받느냐 문제는 아무 상관없어요. 지금 아브라함 언약 체결 그 대목입니다.
죄가 관영이 되고 아브라함이 사대 만에 핍박받아 사대 만에 돌아와서 그걸 정복하는 시점 조종은 누가 합니까? 우리 주님이 해요. 우리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뜻에 의하면 뭐가? 죄가 커져야 돼요. 종기는 커져야 종기지 작으면 종기가.
죄가 관영 되어야 됩니다. 죄가 관영되어야 된다는 생각을 우리가 얼마나 평소에 기쁨으로 받습니까? 언제 기쁨으로 받은 적 있습니까? 온 천하가 온 천지가 이단 된 걸 언제 기쁨으로 받은 적 있습니까? 아니지요. 온 천하가 다 복음적인 걸 좋아한다는 말은, 이미 우리는 이런 관점이 아니고 내 위주로 내가 믿음 좋으니까 내 위주로 나가겠다는 말 아닙니까? 이건 충돌이죠. 이거는 왕과 선지자의 충돌하고 마찬가지입니다.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라는 요한계시록의 삼종 세트는 죄가 관영되지 아니하면 이게 여기서 심판이 안 주어질 것이고, 심판이 안 주어지면 성도는 핍박을 안 받게 됩니다.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가운데서 누가 신나게 핍박받고 억압을 당합니까? 이 과정 속에서 누가? 세상에 성도에요. 물론 불신자들도 당합니다. 당하지만 불신자들은 그 탓을 누구 탓으로 돌린다? 성도 탓으로 돌려요. 맞지요? 두 촛대, 두 ( ) 조지잖아요. 자슥아, 니가 재수 없어 이야기했다. 다 니 탓이다.
그러니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라 하는 삼종 세트는 뭐냐 하면, 현재 남아있는 인류의 역사의 질, 속성에 대해서 요 세 가지로 설명할 수밖에 다른 수는 없다 이 말이죠.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 뭐냐 하면, 성도도 간여 못하고, 불신자도 간여 못하고 이 일을 누가 수행합니까? 천사가 수행해요. 천사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심판자 되시는 주님이 있지요. 그 주님을 요한계시록은 뭐라고 합니까? 어린양이지요. 어린양은 무슨 뜻입니까? 나도 당했다 이 말입니다. 당한 거예요. 그러면 창 맞은 찔림 받은 거예요.
그렇다면 그분들은 자기가 당한 것을 밟지요. 밟는데 천사를 통해서 밟지요. 인간은 우리 성도는 아무 소리 못합니다. 그냥 같이 고난당하고 핍박당하면서 오히려 자연적으로 핍박 정도가 아니고 이런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때문에 도리어 더 성도의 삶은 힘들어지고 어려워지고 심지어 매매도 못하고 짐승 같은 나라에서 인간 대접도 못 받고 결국은 목 베인 영혼, 순교자들을 양산할 뿐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충성의 의미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소위 자기가 안 아프고 자기가 깨끗하다는 인간들은 너거들은 전부다 자신이 눈 먼 것이고 요한계시록 2장, 3장 일곱 교회 나오지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삼종 세트는 악을 숨어있는 점잖은 인간을 천사가 와서 팍 쑤셔버리면, 여러분 오징어 먹물통, 몸통 젓가락이나 칼 가지고 쑤시면 뭐가 터집니까? 시커먼 먹물이 팍 나오지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 점점 더 깊숙이 쑤십니다. 뭐가 나올 때까지? 마지막 놈 마귀 나와? 뱀 나와? 옛 뱀 나와? 마지막 뱀 나올 때까지 쑤시고, 쑤시고, 쑤시고. 돌리고, 돌리고 또 돌리고 하는 것같이. 쑤시고, 쑤시고 쑤셔서 결국 쑤시면 쑤실수록 누가 죽을 가능성이 많습니까? 성도는 죽을 가능성이 많고,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가까이 한 이놈들은 더욱더 하나님에 대해서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성경에 보면, 훼방하죠. 훼방이란 뭐냐? 모독. 다시 말해서 하나님 놀고 있네. 이거에요. 니가 간다고 내가 믿는 줄 아나. 지금은 점점 갈수록 그래요. 교회마다 하는 소리가 니가 그칸다고 당회장 목사가 십자가 복음 믿을 줄 아나? 이래 나와요. 교회마다 그 교인들 아주 좋아하고. 옛날에는 교회 바깥에서 그랬는데 이젠 교회라고 쳐도 스님이여 같이 우리 형제고, 무당도 형제고 그러잖아요.
그 [밀양]이란 영화를 누구하고 의논했는가? 이창동이가. 신부하고 의논했답니다. 기가차지요. 그래서 어린양 같은 거짓 선지자, 땅에서 온 짐승 있고 또 하늘에서 바다에서 온 짐승 있고. 기어이 그 뱀의 정체를 폭로할 때까지 쑤시고, 쑤시고, 쑤시고. 계속 하늘에서 저주가 떨어지고 그 강력하게 땅에서는 하나님께 반발하고 더욱더 대들어요.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주의 성도들은 아벨처럼 순교를 당하는 그러한 식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결국 이걸 통해서 뭐냐 하면, 성도의 모습은 본인이 나, 이제 성도되었으니까 주님이여 손대지 마세요. 라고 할 것이 아니고 죄악이 관영하려면 이미 구원받은 성도는 죄악 관영하는데 기여해야 됩니다. 계속해서 성도로서 삶으로 말미암아 니는 임마, 다 예수 안 믿는데 니 혼자 예수 믿어, 십자가 믿어. 하고 핍박당하는 양상으로 기여를 해야 돼요. 이 세상에 죄악을 오징어 먹물통이 터지도록 그런 쪽으로 기여, 도움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들이 핍박받을 때마다 성도는 누구한테 기도합니까? 기도하니까 기도가 뭐가 돼요? 제단 앞에 올려드리는 향이 되죠. 향이 뭡니까? 냄새 더러운 겁니까? 향수병 문 열어 놓으면 냄새 좋지요. 주님께선 냄새 댁길 좋은 거예요.
여러분 참고로 이야기합니다. 레위기의 주제가 뭐냐? 냄새 맡기에요. 하나님은 냄새를 좋아해요. 하나님의 취향입니다. 하나님은 번제의 향기를 흠향하시고. 이게 창세기 8장에 보면 나오지요. 노아의 존재를 흠향하시고. 하나님은 냄새만 맡아요. 그 냄새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디서 나옵니까? 성도가 지독하게 당하는 성도의 기도가 그게 향내 나는 기도가 되는 겁니다. 잘 당했다. 그러니까 성도는 죽든지 살든지 주의 것이로다.
예수 믿고 뭐 할 거냐? 예수 믿고 구원받았는데 뭐 할 거냐? 향기가 돼야 됩니다. 그 향기가 가만있으면 되지 않고 일곱 인, 일곱 나팔 이걸 통과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죄악이 관영해야 돼요. 관영 할수록 향기의 값은 더 진하지요.
아카시아가 참 진할 때 하나님은 그 아카시아 향기보다 더 좋은 향기를 우리를 받습니다. 우리가 고난 받는 향기, 복음을 인내로 갖고 있는 향기를 아카시아 향기, 라일락 향기보다 더 좋아하십니다. 뭐 주님 좋으시면 되지 우리는 힘든 건 관계없잖아요. 우리는 아까 이야기한 보성녹차니까 먹고 갖다 버려도 괜찮으니까.
날마다 우리가 사적인 종말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기쁨으로 하등의 짐 없이 통과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갈수록 이단들이 이렇게 풍성할 줄 몰랐어요. 이단들이 풍성합니다.
그 가운데서 십자가에서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새롭게 종말을 새롭게 따라가고 복음이란 종말로 우리를 가지고 따라갈 때 주께서 우리 손을 놓지 아니하시고 그 뜨거운 아스팔트길을 같이 걷게 하십니다. 우린 좀 뜨거워요. 뜨겁고 고난 받지만 그게 생명의 길로 좁은 길로 가고 있다는 증거가 바로 그 가운데서 주께서 십자가의 사랑, 속죄와 용서하심을 우리가 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 자신을 날마다 부수시는 그런 날마다의 개인적인 종말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현실을 어떤 안목으로 보는지 차가 움직이고 건물이 있어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고 프로축구, 프로야구가 열리고 북한이 핵개발하고 주식값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어떻게 어떤 안목으로 해석해야 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이고 우리가 이미 통과한 사람으로서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주님의 손에 이끌려서 지체로서 나의 것이 없이 주의 것으로 통과하고 있는 그 구경을 그 관람을 기쁨으로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