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동산을 흐르는 강물 이야기 - 정낙원 목사(십자가 마을)

작성자bloomy|작성시간07.03.23|조회수352 목록 댓글 0

에덴동산의 강 이야기

정낙원 목사

 

 

창세기 2장을 보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사방으로 흘러내리는 강 이야기가 나온다.

 


10-14절을 보면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14 세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눈여겨보면 에덴동산에선 강물이 하나였는데 동산 밖을 벗어나서부터는 네 줄기로 갈라짐을 보게 된다. 네 줄기로 흐른다 함은 온 세상으로 흐른다는 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흐를 때는 이름이 없었는데 에덴동산 밖으로 나와서는 각각의 이름을 갖고 흐른다는 것이다.

 

이를 이렇게 유추해 볼 수가 있다. 에덴동산에선 이름이 없었으므로 에덴동산은 무명의 세계이고 동산 밖으로 나와서 이름을 갖게 되었으니 동산 밖의 세계는 유명의 세계라고,,,

 

그냥 스쳐지나가듯 보면 아니 이름을 가질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 그게 무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말합니까?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름이 있는 것과 없는 것엔 엄연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무명과 유명의 차이는 무명은 뜻이 없는데, 유명은 뜻을 품고 있다.

 


사람이 자녀를 낳게되면 제일먼저 이름을 지어준다. 부모가 이름을 지을 때 아무런 의미가 없이 개똥이니 소똥이니 라고 짖지 않는다. 심사숙고하여 그 아이를 통하여 바라고자 하는 소원을 담고 이름을 짓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의 이름 속에는 부모님이 바라는 것이 들어가 있다. 이처럼 성경에 나타나는 이름이나 지명들은 모두가 영적인 의미가 들어가 있다.

 

그런데 이런 무명과 유명의 이야기가 성경에선 예수님의 이야기로 증거되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3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고 하여 두 하나님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사도 요한의 말을 빌리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말씀도 곧 하나님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나라에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하나님과, 말씀이라고 하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를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물론 본문에선 성령 하나님은 언급되지 않았으나 성령님도 분명히 하나님임을 알 수가 있다.

 

(참고로 요한계시록 5장을 보면 사도요한이 성령에 감동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보았는데 보좌에 앉으신 분이 오른 손에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을 들고 계시는데, 그 책을 취하시는 어린양이 있고, 그리고 어린양의 명령을 봉행 할 일곱 영이 함께 계시더라고 증거해 주고 잇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성부하나님이고, 어린양은 성자 하나님이고, 일곱 영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천국엔 성부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 이 세 분들은 모두가 하나님으로서 계신다.)

 

그런데 천국에선 말씀이신 하나님으로 계시던 분이 이 세상으로 파송을 받으시면서 예수라는 이름을 갖게 되셨다. 즉 이름 없이 무명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이름을 가진 유명의 하나님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왜? 무명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이름을 가지시고 오셨는가? 이는 곧 이름이 담고 있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함이다. 즉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이름 속에 담겨진 일을 시행하기 위해서 특사로 세상에 파견되신 것이다.

 

이처럼 이름 속에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신 하나님은 예수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일만 하셔야 되는 제한성을 갖고 오셨다. 


예수님이 비록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하여도 무소불위의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름 속에 담겨져 있는 일만 감당하여야 한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어! 가 아니라 나는 이름이 허락하는 玖?하여야 되는 신세야!" 라고 해야한다.


이는 곧 보내심을 받은 자가, 보내신 자에게 종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사셨던 것이다.

 

알다시피 예수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내용은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심이라" 는 것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라는 이름을 아버지로부터 받을 때부터 이미 예수님은 자기백성들의 죄 값을 위하여 죽어야 하는 운명을 안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들은 죄에 가두어져 있어서 죄의 삯인 사망을 피할 수 없는 올무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 죽음이라는 올무에 걸린 자기백성들은 죄값을 치르기 전에는 죽음에서 벗어 날 수가 없는 운명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면서 자기백성들의 죄값을 대신 치루라고 보내신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파송당하실 때 이미 죽임 당하기로 아버지와 약속을 하고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셨던 것이다. 인간적으로 예수님도 십자가는 피하고 싶으셨다.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쓴잔을 피하게 해 달라고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야하는 것이라면 담당하겠다고 하심을 보게 된다. 왜?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길을 피하지 않고 순종하셨는가? 이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성자 하나님이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셨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인 무명과 유명에 의미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瀏릿摸?당연히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무명의 강물이 동산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와서는 이름을 갖고 흐른다는 것은 그 이름이 갖고 있는 특성을 강물들이 하여야 할 일들이 있다.

 

(참고로 첫째 강의 이름은 비손이라는 이름으로 "풍성하다" 라는 뜻을 담고 있고, 둘째 강은 기혼이라는 이름으로 "터져 나간다" 는 뜻을 담고 있으며, 셋째 강은 힛데겔이라는 이름으로 "화살처럼 빠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고, 넷째 강은 유브라데 라는 이름으로 "달콤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이러한 이름 속에 담긴 강물들의 뜻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에덴에선 이름 없는 흐르던 강물이 동산을 벗어나면서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흐르니 상고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에덴이 무명의 세계인 하나님 나라라고 한다면 동산 밖은 유명의 세계인 이 세상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강물이 에덴동산을 벗어나면서 이름을 가지고 흐른다는 것은 세상에서 그 이름이 담고 있는 일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럼 먼저 도대체 그 에덴동산에서 흘러내리는 강물이 무엇이냐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냥 한강이나 낙동강과 같은 세상의 강 이야기는 아닐 테이니 말이다.

 

먼저 알 것은 모든 성경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기록된 말씀임을 잊지 말자. 이는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 얻을 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은 모두 나에게 대하여 기록한 것이다" 라고 하여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하여 있는 책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에서 흘러내리는 강 이야기도 당연히 예수님과 관련되어진 이야기로 풀어가야 올바른 성경 해석이 되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후대에 성도들이 이런 의문을 품게 될 것들을 하나님께선 미리 아시고 앞선 선지자들을 통하여서 미리 말씀해 주셨다는 것이다.

 

자! 이제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에게는 에덴동산의 강 이야기를 어떻게 보여 주셨는가 살펴보기로 하자.

 

에덴동산에 흐르던 그 강물을 에스겔 선지자가 성령에 감동으로 보았다.

 

에스겔 47장 1-12절에서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2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3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4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5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6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7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 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11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에스겔 선지자가 성령이 감동으로 한 강물을 보았다. 그런데 그 강물의 근원은 성령에 의하여 세워진 여호와 삼마라는 성전의 문지방 밑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물의 근원지가 성소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강물이 가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나고 치료가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요즈음식으로 에스겔이 본 강물은 말하면 한마디로 만병통치약과 같은 생명수 강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에덴동산에서 흘러내린 강물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 해주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이 강물을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성령에 감동으로 또 보았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을 보면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사도요한은 어린양의 보좌로 부터 흘러 내리는 생명수 강을 보았다. 역시 이 물도만국을 소성시키는 물이다. 발원지가 성전과 어린양의 보좌로 다르다. 즉 물의 근원이 창세기에선 에덴동산이었는데, 에스翎【?성전이었고, 요한계시록에선 어린양의 보좌인 것이다.

 

그런데 이 생명수 강 이야기를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요한복음 4장 5-14절에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수가라는 동네의 우물에서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자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를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러자 여인이 그 물을 좀 달라고 하니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주시는 그 물은 사람들 속에서 솟아나는 물이라고 하신다. 물론 예수님께서 주시겠다는 생명수는 다름 아닌 성령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강물의 실체는 곧 성령님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신 것이다.

 

이는 에덴동산과, 성전과, 어린양의 보좌와 성도의 심령이 동일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강물의 근원지로 본다면 에덴동산이나, 성전이나, 어린양의 보좌나 성도의 심령이나 다 동일한 것인데 시대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즉 에덴동산에서 발원하여 각 지역으로 흐르는 강물이 지역에 따라 힛데겔이나, 유브라데나, 기혼이나, 비손이라는 이름으로 흐른다 할지라도 다 같다는 말이다.

 

창세기에선 에덴동산이었는데 이제는 성도의 심령 속에서 성령으로 흘러 넘친다고 하신다. 이 성령이 치료하고 생명의 역사를 낳게 된다고 하신다. 에스겔 식으로 말하면 성도의 심령 속이 성전이고, 창세기 식으로 말하면 성도의 심령이 에덴동산이고, 요한계시록적으로 말하면 성도의 심령 속에 어린양의 보좌가 있다는 말이다. 즉 성령이 임한 성도의 심령 속이 바로 에덴동산이고, 어린양의 보좌이고, 성전이라는 말이다.

 

지금까지 막연하던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강물이 이제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성령으로 흐르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야기들이 먼 나라 이웃나라 동화 속의 이야기 같은 일들이 예수님에 의하여서 성도들의 심령 속에서 실제로 느껴지고 맛 볼 수 있는 일들로 일어난 것이다. 이 경천동지 할 사건이 성령의 임하심으로 성도들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도무지 헌 부대에다 담아 둘 수 없는 새 포도주 같이 성령이 성도의 심령 속에서 주체 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오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오! 놀라워라!
과거엔 에덴동산은 동화 속 이야기로만 들렸는데, 

이제는 성도들 심령 속에서 일어나고 잇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아닌가!


천국과 지옥이 누가 지어낸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이젠 믿어지는게 아닌가!,,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이 믿어진다.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이 도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이런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이 주체 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 이것을 어떻게 글로 표현할까?
그져 말할 수 잇는 것은 믿어지는 자만이 그 흥에 겨워보자는 것이다,,,,,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창세기에선 물이 에덴동산에서 흘러내렸고,
에스겔에선 성전에서 흘러내렸고,
요한계시록에선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내렸고,
예수님께서는 성도들 심령 속에서 흘러 넘친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개되는 강 이야기들이 모두가 성령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성령이 임한 사람은 그 속이 에덴동산이고, 성전이고, 어린양의 보좌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이 거하는 성도의 몸을 일컬어 성전이라고 한다.

 

자! 그러면 에덴동산을 벗어나 사방으로 흐르는 강물들이 가는 곳에서 어떤 일이 발생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강물이 네 곳으로 갈라져 흐른다는 말은 동서남북 온 세상으로 흐른다는 말이다. 즉 아프리카로도 흐르고, 유럽으로도 흐르고, 아시아로도 흐르고, 아메리카로도 흐른다는 말이다. 강원도로도 흐르고, 전라도로도 흐르고, 경상도로도 흐른다는 말이다.

 

이것을 한국교회에 적용하여 말하면 장로교로 흐르고, 감리교로 흐르고, 침례교로 흐르고, 성결교로도 흐Ⅴ募?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흑인에게도 흐르고, 백인에게도 흐르고, 황인종에게도 흐르고, 김 집사에게도 흐르고, 박 목사에게도 흐르고, 김 장로에게도 흐리고, 최 권사에게도 흐르고. 주일학생에게도 흐르고, 청년에게도 흐른다는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각기 이름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각각의 이름으로 흐른다는 것은 신약에선 성령의 특징을 말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신약에선 성령의 특징을 불같다느니, 비둘기 같다느니, 바람같다느니, 기름같다느니,,,여러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창세기의 표현대로라면 비손이라는 강가에 살던 사람은 그 강물을 비손이라고 부르고, 기혼이라는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그 강물을 기혼이라고 부르고, 힛데겔이라는 강가에 사는 사람은 그 강물을 힛데겔이라고 부르고, 유브라데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그 강물을 유브라데 라고 부를 것이다.

 

만약 비손이라는 강가에 살던 사람이 기혼이라는 곳에 마실을 갖다가 그 물을 비손이라고 하면 기혼이라는 강가에 살던 사람들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 이 물은 기혼이라고 반발을 할 것이다. 힛데겔이라는 강가에 살던 사람이 와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이 물은 당연히 힛데겔이야 라고 하고, 유브라데 사람이 또 와서 무슨 소리! 이 물은 유브라데야 라고 할 것이다.

 

한 물을 가지고 이름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이단이라고 할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그럼 이런 분쟁을 무마 할 수 잇는 길은 없는가? 해결책은 간단하다. 이름에 매일 것이 아니라 물의 근원을 찾아가면 된다. 그러나 물의 근원을 놓치고 자기 이름에 집착을 하면 자기와 다름을 배척하게 된다.

 

물을 먹은 자에게는 서로의 이름을 주장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물의 근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물의 근원을 놓치면 분쟁하게 된다.


그러니 장로교나 감리교나 침례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신앙의 중심 사상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를 따져야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을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유자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가 한 성령을 마셨다고 한다. 한 성령을 마셨다는 말은 한 사상을 가졌다는 말이다. 한 성령을 마셨다는 것은 한 뜻을 지향한다는 말이다.

 

성령은 각 사람에게 개개인에게 임하지만 특징은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것엔 모두가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신앙엔 장로교인이냐! 침례교인이냐! 는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다만 한 성령을 마셔서 한 뜻을 가지고 있느냐! 만이 중요하다.

 

이러한 사상을 교회 안에서 성도 개개인들의 신앙에 적용 할 수도 있다.

 

고린도전서 12장 3-11절에서 성령의 역사에 다양성을 말해주고 잇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靈)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主)시라 할 수 없느니라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主)는 같으며 6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강물이 각 지역마다 고유의 이름으로 흐르듯이 성도간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 또한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타 날 수가 잇다. 교회 안에서 쉽게 적용을 한다면 어떤 이는 말씀을 잘 전하고, 어떤 이는 잘 섬기고, 어떤 이는 청소를 잘하고, 어떤 이는 헌금을 잘하고, 어떤 이는 전도를 잘하고, 어떤 이는 찬양을 잘하고, 어떤 이는 음식을 잘하고,,,,,,,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하면 성령의 모습대로 때로는 불같이, 때로는 비둘기 같이, 때로는 바람처럼 사람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치 12제자의 성격이 다 다르듯이 성도 또한 어떤 이는 급하고, 어떤 이는 느리고, 어떤 이는 조용하고, 어떤 이는 열정적일 수가 있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성도들이 성령을 받게 되면 다양한 모습들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성령이 기름 같이 부드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어떤 이는 바람 같은 성령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고, 어떤 이는 불 같은 모습으로 뜨겁게 나타나고, 어떤 이는 비둘기 같이 온유하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자기를 드러내는 일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을 겨냥하고 잇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오직 그리스도의 한 몸을 겨냥하고 역사하게 된다.

 

그래서 성도 개개인을 그리스도의 몸에 각 지체들이라고 한다. 지체란? 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지체마다 다른 일을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몸을 위하여 한다.

 

고전 12장 12-31절에선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한 성령을 마셨다고 하는 것은 각 지체마다 사랑하는 방법이 조금씩은 달라도 공통점이 같다는 것이다.

 

로마서 12장 3-12절을 보면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권위 하는 자면 권위 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고 하면서 성도마다 각양 받은 은혜가 다르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그래서 로마서에선 성도가 교회 안에서 성도를 섬기는데 하나님이 주신 은혜대로 섬긴다고 한다. 그래서 성도가 섬기는 것을 봉사라 하지 않고 은사라고 한다.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받은 것이기에 은사인 것이다. 그렇다면 섬기는 자는 자기 자신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섬기도록 은사를 주신 분을 자랑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섬김을 자기 것으로 치부한다면 그는 하나님께 받은 것을 자기 것처럼 행세하기 때문에 도적놈이 된다.

 

목사가 말씀을 깨달았다고 자랑하고 우쭐해 하면 그 놈은 도적놈이다. 성도가 헌금을 하고 우쭐해 한다면 그 놈 또한 도적놈이다. 성도가 되어서 전도하고, 봉사하고, 구제한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난 도적놈입니다 라고 하는 것과 같다.

 

성도는 무엇을 해도 주님이 하셨다고 증거하여야 한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조차도 주께서 믿게 해 주셔서 믿습니다 라고 해야 한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자기가 개과천선을 하여서 더 착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많이 자랑하는 것이다. 성령에 충만이란?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이지 자기의 변화됨과 자기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신앙생활을 성화에 목적을 두게 되면 끊임없이 자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글자 그대로 믿어야 할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신앙생활이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한다면 오직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야 한다. 예수님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자는 한 성령을 마시지 않은 자이다.

 

이 땅에서 성도가 받아야 할 영광은 털끝만치도 없다. 왜냐하면! 성도는 예수님이 보내주신 성령으로 인하여 거듭나 살아난 자이고 치료가 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행하는 그 어떤 것도 모두가 주님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 2장 11-12절을 보면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라고 하여 에덴동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강가에 보석이 생산된다고 하였다.

 

이를 쉽게 말해서 에덴동산에서 발원된 물을 마시는 자는 보석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석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구약 성경의 증거를 보면 보석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대 제사장이 입는 옷을 만들라고 하면서 그 옷에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보석들을 매어 달으라고 하심을 보게 된다.

 

출애굽기 28장 1-14절을 보면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 곧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2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3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4 그들의 지을 옷은 이러하니 곧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라 그들이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아론으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할지며 5 그들의 쓸것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이니라 6 그들이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짜서 에봇을 짓되 7 그것에 견대 둘을 달아 그 두 끝을 연하게 하고 8 에봇 위에 매는 띠는 에봇 짜는 법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에봇에 공교히 붙여 짤지며 9 호마노 두개를 취하여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기되 10 그들의 연치대로 여섯 이름을 한 보석에 나머지 여섯 이름은 다른 보석에 11 보석을 새기는 자가 인에 새김 같이 너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그 두 보석에 새겨 금테에 물리고 12 그 두 보석을 에봇 두 견대에 붙여 이스라엘 아들들의 기념 보석을 삼되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그 두 어깨에 메어서 기념이 되게 할지며 13 너는 금으로 테를 만들고 14 정금으로 노끈처럼 두 사슬을 땋고 그 땋은 사슬을 그 테에 달지니라"

 

대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 갈 때 이 보석으로 치장된 옷을 입고 들어간다. 보석을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이스라엘을 업고 들어간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 제사장은 당연히 예수님을 표상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약에선 예수님에 의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도가 곧 보석인 것이다.

 

구약의 성막을 보면 성막의 널판들은 모두 아카시아 조각 목에 금을 입힌 것들이다. 아카시아 조각 목은 저주받은 죄인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정금으로 감싸서 하나님이 거할 성전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정금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을 상징한다. 죄인이 보석이 될 수 있는 길은 보석이신 예수님이 감싸주실 때이다. 예수님이 감싸주시면 세리나 창기도 보석이 된다. 이 일을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게 되면 무가치한 흙에서 존귀한 보석이 되는 것이다.

 

대 제사장이 보석이 달린 옷을 입고 지성소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늘나라 보석들을 찾아서 천국에 데리고 가는 모습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성도를 보석으로 만들어 천국으로 데려가시는지 궁금하다.

예수님께서 성도를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이유는 하늘에 성전을 만들기 위함이다.

 

요한계시록 21장 10-23절을 보면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15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17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 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 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 한 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21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하나님께서 사도요한에게 어린양의 신부를 보여 주시는데 그 신부를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묘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구원받은 성도가 예수님의 신부들인데, 신부를 하나님이 거할 예루살렘 성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성이 모두가 각종 귀한 보석으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성령이 성도를 하늘나라 성전에 사용되어질 보석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천국에 지어지는 성전에 보석의 종류들이 다양하다.

 

첫째 기초 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 한 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고 하여 즉 하나님께선 여러 가지 보석들로 어린양이 거할 성전을 지으신 것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여러 가지 보석들이 함께 어우러져 성전을 지어간다는 것이다.

성도를 일컬어 한 성령을 마신 자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서로가 다른 빛깔을 띄고 있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조금씩은 다를 수 잇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와 색깔이 조금 다르다고 배척하지 말아야 한다. 저 사람도 주께서 부르셨구나! 라고 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한가지의 보석을 원하지 않고 다양한 보석으로 성전을 짓는다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참고적으로 말하면 가을에 단풍이 물든 산에 가보라 형형색색막?어루러져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 내지 않던가! 우리는 그런 풍경을 볼 때 야! 장관이네! 라고 탄성을 자아낸다. 그 단풍이 만약 하나의 색깔로만 있다면 무미건조해서 볼 수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양한 것들을 하나의 조화로 만들어 멋진 작품을 만들어 내시고 있는 것이다.)

 

교회란 이와 같다. 각양의 인간들이 모여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 곳이다. 마치 오케스트리와 같이 각각의 파트로 노래를 하여 웅장한 하모니를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이는 곧 천국에서 천하 만물이 다 주를 찬양하는 것과 같다. 주의 성령이 다양함 속에서 일치를 만들어 내고 계신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서울에서 자란 사람이 경상도 문화를 처음 접하게 되면 오해를 할 수가 있다. 경상도에서는 친할수록 말을 놓는다. 서울 사람들이 들을 때 저 사람 참 버르장 머리가 없구나 라고 오해 할 수가 있다. 황산벌이라는 영화를 보면 김유신이 조카에게 경상도는 다 좋은데 위 아래가 없이 모두 맛 먹으려고 한다고 하니 조카가 하는 말이 무슨 소리 이 얼마나 살가운 소린데 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서울사람에겐 반말로 들리지만 경상도 사람들은 반말로 듣지 않는 것과 같다.)

 

이걸 교회 안에 성도에게 적용하면 어떤 성도는 살가운 성도가 있고 어떤 성도는 무뚝뚝한 성도가 있을 수가 있다. 그렇다고 무뚝뚝한 성도를 사랑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천성이 그래서 그렇지 그래도 속 정은 깊은 사람일 수 있다.

 

즉 교회 안에서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배척하지 말라는 말이다. 나와 다른 보석이라고 버리지 말라.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미워하지 말라. 그도 주께서 부르신 보석이니라!

 

중요한 것은 한 근원에서 파생되어진 다른 것은 용납을 해야 하지만 근원이 다른 것의 다름은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근원이 에덴동산에서 흐른 강물을 마신 자들은 힛데겔이라는 물을 마신 사람이든, 기혼이라는 물을 마신 사람이든, 유브라데 물을 마신 사람이든, 비손이라는 물을 마신 사람이든 이름 때문에 싸울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가 한 물의 근원으로부터 나누어진 형제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덴에서 발원한 물이 아닌 물을 마신 자들은 형제가 아니므로 용납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누가 한 물을 마신 형제들인가? 이는 물의 근원이 같은 자들이다. 같은 근원으로부터 갈라진 물을 마신 사람들은 한 근원을 말하게 되어 있다.

 

예수님이 보내 주신 한 성령을 마신 사람들은 그 성령이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만을 말하게 된다는 말이다. 장로교인이든 감리교인이든 침례교인이든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 보내어진 성령을 받은 자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을 증거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화목의 손을 내 미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을 받은 자들은 오로지 예수님의 피만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만을 이야기하는 자가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을 마신 자이다.

 

만약 자기 자랑이나 하고, 교회 자랑이나 하고, 돈 자랑이나 하고, 세상 권세나 명예를 자랑하거나, 땅에 것을 자랑하는 자는 예수님이 보낸 물을 마시지 않은 자이므로 형제가 아니므로 당연히 배척하여야 한다.

 

예수그리스도만 증거한다는 것은 오직 십자가 피만 말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에수님만 증거 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은 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만을 자랑하도록 역사를 하신다. 바울은 예수를 자랑하는 자가 곧 할례당이라고 하였다.

 

성도란? 예수만 말하게 되어 있는 자들이다. 자기 목소리를 내서는 안된다. 목적이 하나이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드러내는 것이다. 마치 천국에 간 24장로들이 면류관을 어린양에게 벗어 던지듯이 에덴에서 발원한 물을 마신 자들은 오직 그 물의 근원이 되는 어린양에게 모든 것을 돌려 드려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홀로 다 이루신 것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사는 자가 에덴에서 발원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의 물을 마신 자이다. 그 속에 성령이 임한 자이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자랑하는 자들이 보석이고 그 보석들이 모인 곳이 하늘 예루살렘의 성전이다.

 

 

예수님은 이런 성전에 신랑으로 거하신다.

내가 그 성전이어야 하리라.

내가 그 강가에서 생산되는 보석이어야 하리라.

내가 그 어린양의 신부여야 하리라.

성도여 그대 이름은 찬란한 하늘 예루살렘 성전에 박힌 보석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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