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이어바흐 Feuerbach, Ludwig (1804∼1872)

작성자xian|작성시간07.10.19|조회수141 목록 댓글 1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Feuerbach, 1804.7.28∼1872.9.13)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바이에른주(州) 란츠후트 출생. 하이델베르크대학·베를린대학에서 수학, 헤겔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1828년 에를랑겐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강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저서 《죽음과 불멸에 대한 고찰:Gedanken 웑er Tod Und unsterblichkeit》(1830)이 그리스도교를 비판한 것이라 하여 교직에서 추방당하였고, 그 후로는 재야(在野) 철학자로서 저술활동을 계속하였다.


주요저서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41) 《장래 철학의 근본문제:Grunds둻ze der Phi1osophie der Zukunft》(43) 《종교의 본질:Das Wesen der Religion》(45) 등이 있다.


    그의 철학의 공적은 그리스도교 및 관념적인 헤겔철학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유물론적인 인간중심의 철학을 제기한 데에 있다. 그의 철학은 후일, K.마르크스와 F.엥겔스에 의해 비판적으로 계승되었다.

 

-----------------------------------------------------


“인간이 초월적 존재 창조” 경건한 무신론자 포이어바흐
 
 
[한겨레 2004-03-01 18:42] 
 
 
[한겨레] 포이어바흐는 종교 비판가로서 당대의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해 격렬한 비판을 받아야 했다. 이미 26살에 익명으로 <죽음과 불멸에 대한 사유>라는 책을 펴낸 바 있는데, 여기서 포이어바흐는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을 공격했으며 경건한 신앙의 소유자를 조롱하기도 한다. 이 ‘불경스런’ 책은 기독교의 권위가 서슬 퍼렇게 엄존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곧바로 금서가 돼 압류 조처를 당했다. 이 책의 저자임이 밝혀지면서 포이어바흐는 발군의 학문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교수직을 단념한 채 재야학자로 평생을 보내야만 했다.


포이어바흐에 대한 당대 신학자들의 거친 거부의 몸부림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종교비판은 종교의 근간을 뒤흔들 만큼 근본적인 것이었다. 포이어바흐 이전의 종교비판은 종교를 단순히 사제들의 기만행위라든가 우민화, 또는 미신으로 간주했다. 포이어바흐는 이러한 시각을 벗어나 종교적 현상을 좀 더 심층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출발점과 귀결은 다름 아닌 인간이었다.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본질이 종교의 근거일 뿐만 아니라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종교는 무한한 것에 대한 의식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무한한 본질에 대해 갖는 의식이다.” 포이어바흐는 종교를 “인류의 유아적 본질”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자신의 외부에 설정한 신이라는 존재를 통해 간접적으로 인식하는 단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절대적 이성, 무한성, 사랑 등 신의 속성으로 여겨지는 것들은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실제로는 개인적 한계를 초월한 인류의 본질일 뿐이다. 성경의 설명과는 정반대로 “인간이 자신의 모습에 따라 신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비밀을 푸는 열쇠는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대상화한 후 다시 스스로를 이렇게 대상화된 본질의 객체로 만든다.” 포이어바흐가 추구했던 것은 그가 한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말했듯, 사람들을 “신의 벗으로부터 인간의 벗으로, 믿는 자로부터 사유하는 자로, 기도하는 자로부터 일하는 자로, 내세의 후보자로부터 현세를 공부하는 자로, 자신이 반은 짐승이고 반은 천사라 고백하는 기독교인으로부터 인간, 그러니까 전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일”이다.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은 종교와 신을 단순히 부정하고 파괴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는 초월적 존재의 속성이라 여겨진 것들을 인류와 자연에로 되돌려 주고자 했으며 그 속에 투영된 인간의 소망을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 인류사적 과제라고 확신했다. 이러한 믿음은 그에게 “경건한 무신론자”란 비아냥을 안겨주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 “신학의 육신에 박힌 말뚝”(칼 바르트)으로서 기독교의 자기반성 과정에 촉매역할을 한다.

 

주정립/호남대 연구교수, 정치학 ⓒ 한겨레(http://www.hani.co.kr),
 


---------------------------------------------


Feuerbach의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이 덕 휴

 

목 차

 

제1장 들어가는 글/ 2
  제1절 작품에 대하여/ 2
  제2절 저자의 생애와 사상/ 4
제2장 기독교의 본질/ 7
  제1절 서문/ 7
   1. 제1판의 서문/ 7
   2. 제2판의 서문/ 8
  제2절 서론/ 10
1. 인간의 본질/ 10
2. 종교의 본질/ 12
    (1) 제1부 종교의 진실한 본질/ 14
     1) 본질론/ 14
  2) 신 또는 종교의 비밀/ 17
  3) 소결/ 22
    (2) 제2부 종교의 허위의 본질/ 24
  1) 종교의 본질적 입장/ 24
  2) 신의 본질/ 26
  3) 사변적 신학비판/ 29
   4) 모순의 변증법/ 30
  5) 결론/ 32
제3장 나가는 글/ 34
  제1절 비판/ 34
  제2절 평가/ 38
  제3절 비판에 대한 반성/ 41
* 참고문헌/ 45
** 필자와 이 논문에 대하여/ 46

 


제1장 들어가는 글

 

 제1절 작품에 대하여

 

본서『기독교의 본질』은 포이에르바하(L.A. Feuerbach, 1804-1872)가 1841년에 출간한 책으로서, 서론(1-2장)과 본문, 즉 제1부(3-19장) 및 제2부(20-28장)로 구성되었다. 서론부 제1장에서는 "인간 일반의 본질"을 서술하고. 제2장은 "종교 일반의 본질"을 도출해 내고 있다. 여기서 그가 종교와 인간과의 관계를 설정하는데 있어서 소위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를 시도하는 데, 그 결정적 테제는 다음과 같다.  "종교는 무한성의 의식이다. 따라서 종교는 인간의 자기 의식, 다시 말해서 유한하고 제한된 존재로서가 아니라 무한한 존재로서의 자기 의식이며 그것 이외의 어떤 것일 수도 없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그는 이러한 인식론적 가치의 전도를 해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종교의 내용과 대상이 철저히 인간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했으며, 신학의 비밀이 인간학이고 신적 본질의 비밀이 인간적인 본질임을 증명했다." 여기서 포이에르바하가 '증명'이라고 한 것은 학문에 있어서 한 가지 주장을 각양각색의 문제에 대하여 일관되게 해석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적용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일관성 때문에 그의 저서가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이 계속되는 것이다.


서론부의 제1장과 제2장은 사실상 제1부와 제2부의 총론부 라고 할 수 있다. 제1부와 제2부의 관계는 저자 자신이 붙인 제2판의 서문에서 엿볼 수 있다. "확실히 나의 저서는 부정적이며 파괴적이다. 그러나 주의하라! 나의 저서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은 단지 종교의 비인간적인 본질에 대해서일 뿐, 종교의 인간적인 본질에 대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저서는 2부로 나누어진다. 그 중 제1부는 요점에 관해서는 긍정적이며, 부록을 포함한 제2부는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이 부정적이다. 그러나 양 부분에서는 동일한 것이 증명되고 있으며 단지 방법이 서로 다를 뿐이다. 즉 제1부는 종교를 종교의 본질, 즉 종교의 진리로 인도하며, 제2부는 논박이다. 따라서 제1부는 신학이 인간학이라는 것의 직접의 증명이며 제2부는 간접의 증명이 된다. 그러므로 제2부는 필연적으로 제1부로 환원된다. 제2부는 전혀 독립된 의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제2부는 단지 제1부에서 말하는 의미와 반대되는 의미의 종교는 무의미하기 때문에, 제1부에서 말하는 의미의 종교가 정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간단히 말하면, 나는 제1부에서는 주로 종교를 취급하고 제2부에서는 신학을 취급한다." 포이에르바하는 이 책을 칸트(Immanuel Kant, 1729-1804)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 구상했으며, 본서의 구성도 칸트의『순수이성비판』과 유사한 서문과 제1부, 제2부 등으로 집필하였다.   


1841년 3월 30일 에어랑겐 대학의 사강사 포이에르바하가 바이에른 내무성으로부터 파직통고를 받았을 때, 그를 결정적으로 유명하게 만든『기독교의 본질』제1판이 인쇄되고 있었다.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제목은 발행인 비간트(Otto Wigant)가 붙인 것이며, 이는 종종 있는 일로서 상업성을 위하여 적당하고 인기 있는 제목을 제공하는 경우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자신의 책을 모든 것을 압도하는 칸트의 저작『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1782)의 모델을 따르면서 그 대칭물이 되도록 구상했다. 이에 따라 그는 본서의 제목을『순수비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Unvernunft)이라 명명하려고 하였다. 우리는 이 책을 포이에르바하가 당초 제시했던 제목으로 불러도 좋다. 왜냐하면, 이념 정책적일 뿐만 아니라 순수이성비판과의 형식적 유사성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포이에르바하의 서론은 칸트의 서문처럼 본론을 두 개의 주요부분으로 구획짓고 있으며, 사고방식에 있어서도 코페르니쿠스처럼 회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선험적 미학과 분석론(순수이성비판의 제1부문)은 본서의 제1부인 "종교의 진실한 본질, 즉 종교의 인간학적 본질"(인간의 본질과 모순되는 종교)에 대응한다. 여기서는 신적인 제 가치의 형성에 작용하는 한편, 인간지성의 유한한 능력도 동시에 서술하고 있다. 선험적 변증론과 방법론(순수이성비판의  제2부문)은 본서의 제2부인 "종교의 허위의 본질"(인간의 본질과 모순되는 종교)에 대응한다. 여기서 교리의 체계는 이미 발전시켰던 방법에 따라 파괴되고 종교적 투사(投射)가 갖는 병적인 지적 성격이 폭로된다. 포이에르바하에 있어서 종교현상은 그 자체가 비판의 목적은 아니었다. 종교란 단지 그가 새로운 학문을 정초 시키는데 사용되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였다.

 


제2절 저자의 생애와 사상


포이에르바하(Feuer: 불, Bach: 시냇물)라는 문자적 의미는 양립할 수 없는 상극의 대립이다. 전통적으로 그의 가계는 알려진 바대로 유명한 신학자. 법률가. 예술사가. 수학자·화가 그리고 근대 형법학의 아버지이자 그의 부친 안젤름 포이에르바하(Paul Johan Anselm Ritter von Feuerbach, 1775-1833)를 배출한 '불의 강'의 집안이다.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을 확신한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는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신학자와 철학자에게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당신들 사변적인 신학자와 철학자들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만일 당신들이 있는 그대로의 사물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려고 한다면, 다시 말하여 진리에 접근하려 한다면 종래의 사변철학과 철학과 편견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당신들의 진리와 자유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불의 강'을 통과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불의 강은 현대의 연옥(purgkatoium)이다.


철학자인 동시에 법률가인 아버지 안젤름 포이에르바하(Paul Johann Anselm Ritter von Feuerbach, 1775-1833)는 원래 타당한 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법은 인간에 의해 입법되는 것이며, 법과 도덕은 분리되는 것이라는 소위 법률주의자였다. 또한 그는 재판관이란, 엄격한 결과를 자의나 주관적 가치의식으로 완화시키거나 변경시킬 수 없으며, 오직 법 아래에서만 존재한다는 법치주의자였다. 1808년 작위를 받은 안젤름 포이에르바하는 형법의 형벌기능에 대한 위하설(威 說)을 주장하여 이른바, 심리강제설에 의한 일반예방이론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여 상대적 형벌이론을 주장하였으며, 오늘날 형법학의 최고의 이념인 "법률 없으면 형벌도 없다"(nulla poena sine lege)라는 명제 하에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을 수립하는데 공헌하였다. 당시까지의 형법학계는 소위 칸트와 헤겔(G.W.F. Hegel, 1770-1831)이 주장한 형법의 자기목적성에만 의지하는 절대적 형벌이론에 근거한 응보형주의가  대세를 이루었다.


1798년에 트레스터(wi1helmine Tr ster)와 결혼하여 위로 세 아들을 낳고 이어서 1804년 7월 28일 란쯔후르트에서 네 번째로 태어난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는 카톨릭 의식에 따라 바이에른의 시 교구에서 Jodocus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아버지 안젤름과 어머니 트레스터는, 비록 아버지가 정부와 지냈을지라도 다섯 아들을 낳은 후에도 딸 을 셋이나 더 두었다. 포이에르바하는 스스로 쓴 익명의 사전에서 자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1804년 7월 28일생. 형제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저술가로서 가장 활동적임. 아버지의 학문을 계승할 것 같지만 전혀 다른 분야에서 즉 훈장도 작위도 얻을 수 없는 분야에서 활동함. 그는 먼저 하이델베르크와 베를린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에어랑겐에서 몇 년간 강의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한 학문 외에는 단지 경건한 양(羊)의 사육만이 번창하고 있는 대학'이 자신에게 적합한 곳이 아님을 깨닫고 '독자적이고 조용한 생활에서만 성숙될 수 있는 사상을 잉태하고 있음을 느끼고' 안스바하 부근의 시골로 내려갔다. 그는 자신의 저술활동을 1830년 아직 체계를 갖추지도 않았고 저자의 이름도 없는 저술인 -그러나 위대한 천재성과 풍부한 표현으로 가득찬- 『죽음과 불멸성에 대한 고찰』(Gedanken  ber Tod und unsterblichkeit, 1830)로 시작했다. 그는 용암의 흐름과 같은 이 저술에서 젊음의 불꽃을 태우고 자신의 후기의 철학적 발전을 선취하여 풍자시의 형태로 대담하게 표현하고는 이를 더욱 전진시켜 나가는 대신 자신의 주관성을 순수하게 객관적인 요소 안에서 극복하고 또 형성하기 위해 철학사로 후퇴한다. 이렇게 자신의 본질을 억제하고 포기했던 시절 때문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끝나지 않는 편견이 생기게 되었다. 그 편견이란 그가 이미 타인의 사상을 역사적으로 재생하고 발전시키는 사상가이기를 그치고 비판자의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헤겔 학파에 귀속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의 비판의 시기는 『기독교의 본질』이후 종막을 내린다. 왜냐하면 이 저술에서 비판의 과제는 단순히 대상을 분석하여 모순을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동시에 대상을 하나의 포괄적 원리로부터 발생적으로 산출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출의 근거는 '자연이라는 근거 위에서의 인간'이다. 이시기를 우리는 이전의 역사적 시기나 비판적 시기와 구별하여 실증적 또는 생산적 시기라고 명명할 수 있는 포이에르바하에 있어서의 세 번째 시기라고 한다. 포이에르바하의 의미 다시 말하여 그의 철학적 의미를 전개시킨다는 것은, 이는 이미 그가 애초부터 역사와 경험 일반을 그의 사상의 초석으로 삼았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제2장. 기독교의 본질

제1절 서문
 
 1. 제1판의 서문

저자는 지금까지 여러 저작에서 종교와 기독교, 신학과 사변적인 종교철학에 관하여 자신의 사상을 잠언(箴言)이나 논쟁의 형식으로 다루었다. 이 책의 특징은 한정된 주제에 대한 원리를 포함한다. 그것은 적극종교(positiven Religion)의 철학 또는 계시의 철학을 위한 원리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신화학(神話學)이 가지는 유치할 만큼 공상적인 의미에서의 종교철학 또는 사변철학을 위한 원리는 포함하고 있지 않다.


기독교 신화학은 이야기로서 전해지는 허황 된 이야기를 그럴싸한 사실로서 자신에게 이야기한다. 일찍이 스콜라 철학이 그랬던 것처럼, 사변적인 종교철학은 신앙개조(Articulus fidei)를 논리학적, 형이상학적 진리로서 논증한다. 사변적인 종교철학은 철학을 위해 종교를 희생하며, 기독교적 신화학은 종교를 위해 철학을 희생한다. 사변적인 종교철학은 종교를 제멋대로 사변적인 장난감으로 삼으며, 기독교적인 신화학은 이성을 공상적인 종교적 유물론의 장난감으로 삼는다. 확실히 철학과 종교가 일반적으로 양자의 種差를 제외하면 동일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사유하는 존재자와 신앙하는 존재자는 하나의 동일한 존재자이기 때문에 종교의 심상은 동시에 사상과 사실을 표현한다. 그러나 신앙과 이성사이의 본질적 구별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 책에서 종교의 형상은 사변적인 종교철학으로 고찰되지 않고 사실로서 고찰되지도 않으며 다만, 형상으로 고찰된다. 즉 신학은 기독교적 신화학에서 처럼 신비적 실용학으로서 취급되지 않고 사변적 종교철학에서처럼 본체론으로서 취급되지도 않으며 정신병리학으로으로 취급된다. 이 책의 목적은 정신적 수치료학(Pneumatishe Wasserheilkunde)을 촉진하고 자연적 이성이라는 冷水의 용법과 효용을 가르치며 고대 이오니아인의 단순한 수문학(hydrologie)을 사변적인 종교철학의 영역에서 부흥시키는 것이다.


탈레스(Thales, B.C. 640/24-546경)에 의하면, 물은 모든 사물 및 존재자의 근원이며 신들의 근원이기도 하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43)에 따르면. 만물이 탄생할 때에 특수한 존재자로서 물을 돕는 정신 또는 신은 명백히 훗날의 이교적인 유신론을 생각해낸 덤에 불과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물의 놀라운 치유능력이 있는 것이다. 수문학에서의 물은 단지 물질적인 생식수단이었지만, 포이에르바하의 물은 정신적 치료학으로서의 물이라는 것이다.

 


2. 제2판의 서문


나는 정신적인 자연과학자일뿐이다. 자연과학자는 물질적 수단이 없으면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다. 나는 정신적인 자연과학자로서 이 책을 썼다. 이 새로운 철학은 지금까지의 철학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원리로서 초인간적, 초자연적, 곧 반인간적, 반 자연적인 종교나 사변에 의해 부패하고 불구가 된 모든 인간에게 반항하는 철학이다. 단지 사유되었을 뿐인 추상적 존재자를 자신의 원리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존재자, 가장 실재적인 참된 실재원리를 자신의 원리로 가지고 있다. 또한 이 철학은 실재원리를 자신의 원리로 가지고 있다. 또한 이 철학은 사상을 그 반대물로부터, 곧 물질(Stoff)로부터, 실재(Wesen)로부터, 감각(Sinn)으로부터 산출하며, 자신의 대상을 사유에 의해 규정하기 전에 먼저 감각적으로 관계한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종교의 현존재를 폭로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적이다. 설사 종교 또는 오히려 신학이 그것을 거부하려고 할지라도 인간을 숭배한 것은 내가 아니라 종교이다. 나만 "신이 인간이며 인간이 신이다"라고 외친 것이 아니라, 종교 그 자체도 그렇게 외친다. 인간이 아니라 단지 합리적인 존재일 뿐인 그러한 신을 거부하고 부인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종교 자체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우선 신을 인간으로 만들고 그리고 다음 지금 비로소 인간적으로 형성되고, 느끼고, 생각하는 신을 자신의 숭배와 존경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나는 신학의 모순에 가득 찬 거짓덩어리와 속임수 덩어리를 제거했을 뿐이다. 확실히 나의 저서는 부정적이며 파괴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의 비인간적인 본질에 대해서일 뿐, 종교의 인간학적인 본질에 대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저서는 2부로 나누어진다. 그중 제1부는 요점에 관해서는 긍정적이며, 부록을 포함한 제2부는 종교를 종교의 모순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양 부분에서 동일한 것이 증명되고 있으며 단지 방법이 다를 뿐이다. 제1부는 종교를 종교의 본질로 인도하고 제2부는 종교를 종교의 모순으로 인도한다. 제1부는 발전이고 제2부는 논박이다. 따라서 나는 제1부에서 신학의 진정한 의미는 인간학이라는 것, 신학의 본질(신적 존재)의 술어와 인간의 본질(인간 존재)의 술어사이에는 아무런 구별이 없다는 것, 따라서 신적인 주어(주체) 또는 본질(존재자)과 인간적인 주어(주체) 또는 본질(존재자) 사이에도 아무 구별이 없이 양자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정신의 꿈이다. 그러나 우리는 꿈속에서도 무 또는 천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현실 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종교에 대해서 행하는 작업은 오직 종교에 눈을 뜨게 하는 것, 안쪽에 향하여 있는 종교의 눈을 바깥쪽으로 돌려주는 것, 바꿔 말하면 표상 또는 상상 속의 대상을 현실 속의 대상으로 전화시키는 것만이 내가 종교에 대해 행하는 작업의 전부이다.

 


제2절 서론

 1. 인간의 본질

 종교는 동물과 본질적인 차이점에 기초한다. 인간이 동물과 본질적으로 구별짓는 것은 의식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의식은 자기의 유(Gattung), 자기의 본질성(wesenheit)이 사고의 대상이 되는 본질(존재자, 있는 것)에게 있을 뿐이다. 의식이 개체와 관계하며, 학문에서는 유와 관계한다. 그러한 오직 자신의 유, 자신의 본질성이 사고의 대상이 되는 본질만이 다른 사물 또는 다른 본질을 그들의 본질적인 본성에 따라 사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은 종교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종교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종교한 무한자(Unendlich, infinite)의 의식이다. 따라서 종교란 인간이 자기의 본질, 즉 유한하고 제한되어 있는 본질이 아니라 무한한 본질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의식이다. 실제로 유한한 존재자는 무한한 존재자에 대해 극히 미미한 예감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물론이다. 무한자에 관한 의식에서는 주체가 그 자신의 본질의 무한성을 자신의 대상으로 가진다. 그러나 인간이 의식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성, 의지, 그리고 심성이 그것이다. 완전한 인간에게는 사유하는 힘, 의지하는 힘, 심정의 힘이 필요하다. 사유의 힘은 인식의 빛이고 의지의 힘은 성격의 에너지이며 심정의 힘은 사랑이다. 이성과 사랑과 의지의 힘이란 완전성이고 최고의 힘이며 인간 그 자체의 절대적 본질이며 인간의 현존재의 목적이다. 인간은 인식하고 사랑하고 의욕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참된 존재자는 사유하고 사랑하고 의욕하는 존재자이다. 인간 안에 있고 개개의 인간 위에 있는 신적인 삼위일체란 이성과 사랑과 의지의 통일이다. 이성, 의지, 사랑 그리고 심정이 없으면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며, 인간은 오직 그것들에 의해서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인간에게 혼을 불어넣어 주고 인간을 규정하며 인간을 지배하는 힘으로서, 그리고 신적이고 절대적인 힘이다. 인간은 그들 힘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다. 인간은 대상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대상에서 자기자신을 의식한다. 대상의 의식은 인간의 자기의식이다. 우리는 대상에 의해서 인간을 의식한다. 대상에서 인간의 본질이 나타난다. 이것은 정신을 물론이고 감성에서도 나타난다. 대상은 인간의 노출된 본질이며 인간의 진실하고 객관적인 자아이다.


의식이란 자기 확증이며 자기긍정이며 자기사랑이며 자기자신의 완전성에 대한 기쁨이다. 의식은 어떤 완전한 존재자를 특색 짓는 표징이다. 의식은 어떤 만족하고 완전한 존재자 속에만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한자를 사유한다면, 감정 능력의 무한성을 느끼고 또 확증하는 것이다. 또한 무한자를 느낀다면, 감정 능력의 무한성을 느끼고 또 확증하는 것이다. 이성의 대상이란 자기자신에게 대상적인 이성이며 감정의 대상이란 자기자신에게 대상적인 감정이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적, 초월적인 사변이나 종교의 견지에서는 단지 희생적인 것, 주관적인 것 또는 인간적인 것, 신적인 것, 본질, 대상, 그 자체라는 것이다. 감정이 지각하는 신적 본질은 감정의 본질이 자기자신에게 황홀해지고 도취된 것, 즉 환희에 취해 자기 안에서 행복에 잠기는 감정이다. 이것은 감정이 무한자의 기관, 종교의 주관적 본질로 될 때에는 종교의 외적 표현들이 그 객관적인 가치를 잃는다는 것을 보아도 이미 명백해진다. 인간은 확실히 공상의 힘에 의해 자기보다 더 높은 다른 종류의 개인을 표상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코 자기의 유, 즉 자기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2. 종교의 본질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대상, 즉 감성적 인간을 포함하여 인간의 관계에 관해 주장한 것은 특히 종교적 대상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적용된다. 감성적 대상에 대한 의식은 자기의식과 구별된다. 그런데 종교적 대상의 경우에는 의식은 자기의식과 직접적으로 일치한다. 종교적 대상은 인간 안에 있으며 그것 자체로서 내면적인 대상이다. 때문에 종교적 대상은 인간의 자기의식, 인간의 양심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끊을 라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종교, 적어도 기독교는 인간이 자기자신에 대해 취하는 태도, 또는 인간이 자기의 본질에 대해 취하는 태도이다. 신적 본질이란 인간적인 본질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즉 인간의 본질이 개개의 인간의 제한으로부터 분리되어 대상화 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신적 본질이란 인간의 본질이 개인으로부터 구별되어 다른 독자적 본질로서 직관되고 숭배된 것이다. 그 때문에 신적 본질의 모든 규정은 인간 본질의 규정이다. 이것은 신의 술어, 즉 특성 또는 규정에 대한 관계에서는 실제로 주저 없이 인정되지만 주어, 즉 그들 술어의 기체(근본, 본질)에 대한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주어를 부인하는 것은 무신앙, 무신론으로 간주되지만, 술어를 부인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신의 술어를 부인하는 방법도 있다. 사람들은 신적 본질의 술어가 유한한 인간적 규정임을 인정한다. 


인간은 자기가 진실한 것으로서 표상하는 것을 곧바로 현실적인 것으로서 표상 한다. 인간에게는 현실적인 것만이 진실한 것이며 상상된 것과는 대립되기 때문이다. 존재의 개념, 즉 실존의 개념은 진리의 첫째가는 개념이며 근원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신이란 인간의 본질이 최고의 진리로서 직관된 것이다. 그러나 신 또는 종교란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파악하여 최고의 본질로서 직관할 때의 규정성이 각양각색인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다양하다. 인간이 신을 사유할 때의 이러한 규정성은 인간에게는 진리성이며 동시에 최고의 실존 또는 실존자체이다. 따라서 신이 규정된 본질임과 같은 이유로 신은 실존하는 현실적 본질이다. 왜냐하면 신의 질 또는 규정성은 인간 자신의 본질적인 질 바로 그 자체이지만, 특정한 인간은 자기의 본성, 자기의 실존, 자기의 현실성을 오직 자기의 규정성 안에서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신의 술어와 인간의 술어의 동일성을 망각하고 그와 함께 신적 존재자와 인간적 존재자의 동일함을 망각하기 위해 신은 무한한 존재자로서 무한히 풍부하고 다양한 술어들이라는 표상에 구원을 청한다. 그 술어들 가운데서 우리가 현세에서 인식하는 것은 약간 닮았다는 것이다. 신이 인간적인 존재자와 약간 다른 것은 그것 이외의 술어, 즉 피안에서의 일이다. 무한히 풍부한 신의 술어들의 비밀은 다양하고 무한하게 규정될 수 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감성적인 존재자로서의 인간적인 존재자가 가지는 비밀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은 자기의 본질을 대상화하며 그런 다음에 다시 자기를 이와 같이 대상화되고 주체는 인격으로 전화된 본질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것이 종교의 비밀이다. 여기서의 인간은 신의 대상이다. 따라서 믿음이 깊은 인간은 지가의 심성과 행위를 신의 대상으로 삼으며 인간을 신의 목적, 즉 정신에서 대상인 것은 행동에서는 목적이므로 신의 활동을 인간의 구원수단으로 삼은 것에 의해서 인간의 활동의 허무성을 다시 취소한다. 인간이 선해지고 행복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활동한다. 따라서 인간은 신 안에서 그리고 신을 통해서 오로지 자기자신을 목적으로 한다. 분명히 인간은 신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신은 인간의 영원한 도덕적 구원 이외의 어떤 것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 안에서 인간은 단지 인간자신의 활동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나는 종교의 발전과정을 일반적으로 서술했다. 그러므로 종교의 발전과정은 인간이 점점 신을 거부하고 자기자신을 승인하는 일이 많아지다는 것 속에서 성립한다. 애초에 인간은 만물을 구별 없이 자기 외부에 두었다. 이것은 계시신앙에 나타난다. 이스라엘인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아직 극히 자연적인 충동도 적극적인 신적 명령으로 생각하였다. 이 예로부터 인간은 자기를 거부하면 할수록 신은 그만큼 저급해지고 또 그만큼 더 보통의 인간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기독교는 인간의 충동이나 격정을 그것의 특성이나 내용에 따라 구별지었다. 기독교는 오직 선한 격정, 선한 기질, 선한 사상만을 신의 계시, 신의 작용, 즉 신의 심성, 신의 격정, 신의 사상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신이 계시하는 것은 신 자신의 규정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내면적인 도덕적 깨끗함을 외면적인 육체적인 깨끗함과 구별하지만, 이스라엘의 종교는 양자를 동일시했다.기독교는 이스라엘의 종교와는 반대로 비판과 자유의 종교이다. 이스라엘은 외면적인 것조차 자기의 의지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외면적인 것은 자율에 두었다. 즉 기독교는 이스라엘이 자기 외부에, 신 안에 두었던 것을 인간 안에 두었던 것이다. 이 적극주의의 가장 완결된 발로가 바로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인에게 기독교도는 교의를 믿지 않는 사람(Esprit fort, 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며 자유사상가이다. 사물은 이와 같이 변한다. 어제의 종교는 오늘은 이미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오늘 무신론으로 인정되는 것이 내일은 종교로 인정된다.

 

 

  (1) 제1부 종교의 진실한 본질, 즉 종교의 인간적인 본질
 

 

   1) 본질론


종교는 인간이 자기자신과 분열한 것이다. 즉 인간은 종교에서 신을 자기와 대립한 존재자로서 설정한다. 신의 본성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며 인간의 본성은 신이 아니다. 신은 무한자이고  인간은 유한자이다. 신은 영원하고 인간은 일시적이다. 신은 완전하고 인간은 불완전하다. 신과 인간은 양극이다. 신은 단적으로 긍정적인 것이자 모든 실체성의 총체이며, 인간은 단적으로 부정적인 것이자 모든 허무성의 총체이다.


그러나 인간은 종교 안에서 자기자신의 감추어진 본질을 대상화한다. 따라서 종교는 신과 인간의 대립·갈등에서 시작되는 것이지만 그 갈등은 인간과 인간 자신의 본질과의 갈등이다. 만일 종교의 대상인 신적 본질(존재자)이 실제로 인간의 본질 이외의 본질이었다면 분열이라든가 같등은 일어날 수 없었다. 분열은 나누어져 있기는 하지만, 하나이어야 하고 또 하나일 수 있는 본질사이에서만 생기는 것이다. 이 본질은 지성과 이성 또는 오성(Verstant, understanding)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인간의 대극(對極)으로서의 신은 인간적인 본질, 즉 인격적으로 인간적인 본질이 아니라면 오성의 본질이 대상화된 것이다. 신의 본질은 오성의 자기의식이며 오성이 자기자신의 완전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식이다. 오성은 심장과는 달리 욕망이나 열정이나 욕구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바로 그 때문에 결함이나 약점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 순수한 오성인은 일면적이지만 특징적 규정성에서 오성의 본질을 상징화하고 인격화하는 인간이다. 이러한 순수한 오성인은 감정인이 갖는 고뇌나 열정이나 탐닉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오성은 본원적·원초적인 존재자이다. 오성은 만물을 제1원인인 신으로부터 끌어낸다, 오성은 오직 자기 안에서만 세계의 근거와 목적을 발견한다. 당신이 신 안에서 긍정하고 대상화하는 것은 당신 자신의 오성이다. 신이란 당신의 최고 개념인 오성이며 당신의 최고의 사유능력이다. 오성은 따라서 가장 실재적인 존재, 즉 옛날의 존재론적 신학(Ontotheologie)에서 말하는 어떤 것보다 더 실재적인 존재자이다. 또한 오성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자이며 절대적 주체이다. 오성의 통일성은 신의 통일성이다. 그 자체 절대적 통일성으로서의 자기자신(오성자신)을 의식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오성은 무한한 존재자이다. 따라서 오성은 통일성과 조정되며 유한성은 다수성과 함께 조정된다.


마지막으로 오성 또는 이성은 필연적인 존재자이다. 그것은 오직 이성의 실존만이 이성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이성도 어떤 의식도 존재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은 무이며, 존재는 비존재와 같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으로서의 신, 즉 오성의 무한한 본질, 일반적인 본질, 의인화하지 않은 본질이 종교에 대해 가지는 의의는 특수과학의 출발점인 일반적인 근본명제가 특수과학에 대해 가지는 의의 이상의 것은 아니다. 종교의 대상적인 본질이 인간과 다른 본질이라는 것은 그 본질의 본질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종교 안에서 자기를 만족시키기를 바란다. 종교는 인간의 최고의 선이다. 그러나 오성의 본질을 표현할 뿐인 신이 어떻게 종교를 만족시킬 것인가? 신은 종교를 만족시키지 못하며 종교는 신이 아니다. 오성은 단지 인간에 관해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인간 이외의 본질인 자연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 기독교도는 오직 자기만을 생각한다. 간단히 말하면 오성은 보편적이고 범신론적인 본질이며 우주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데 특히 기독교는 전적으로 인신론(anthropotheistisch)적인 본질, 즉 인간의 자기자신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 보다 정확히 말하면 주관적으로 인간적인 존재자의 배타적인 자기긍정이라는 것이다.


오성은 전적으로 율법의 엄격함에 따라 판단한다. 심정은 자신에 순응하며 공평, 관대하며 동정심이 많고 인간적이다. 율법은 인간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며 사랑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사랑은 율법과 심정,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매개한다. 사랑은 신 그 자체이며 사랑 이외에는 어떤 신도 없다. 사랑은 인간을 신으로 만들고 신은 인간을 만든다. 사랑은 신과 인간의 참된 통일이며 정신과 자연의 참된 통일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신의 눈 속에서 우리를 우리의 죄로부터 깨끗하게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피만이 신을 자비롭게 만들고 신의 분노를 가라앉힌다. 즉 우리의 가 용서받게 되는 것은 우리가 결코 추상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살과 피를 가진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랑의 의식을 통해서 신 또는 자기와 화해한다. 신의 사랑의 의식, 즉 신을 그 자체 인간적인 본질로서 직관하는 것은 신의 성육신, 육화 또는 인간화의 비밀이다. 성육신이란, 신의 인간적인 성질이 감정적인 사실로서 드러나는 것이고, 인간화된 신이란 단지 신격화된 인간의 현상에 불과하다. 신이 인간에게로 내려온다는 것은 반드시 인간이 신에게로 올라간다는 것이 선행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의 가르침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즉 신성의 제1인격이 성육신 하는 것이 아니라 신 안에서 인간을 대표하는 제2인격이 성육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2인격은 종교의 진실하고 전체적인 제1인격이다. 성육신이 신비적이고 불가해하고 사변적으로 보이는 것은 성육신의 출발점인 이 매개개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학이 사변철학과 어떻게 다른가는 다음에서 보면 알 수 있다.


즉 인간학은 신비적인 가상(假像)에 의해 속고있는 특수한 경탄할 만한 비밀로는 보지 않는 것이다. 인간학은 신의 인간화라는 교의들 사랑으로 환원한다.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 더욱이  신은 자기 안에 아들을 가지고 있다. 신은 아버지이다. 인간성의 모든 관계는 신으로부터 배제되지 않는다. 인간적인 것은 신과 소원하지 않으며 미지의 것도 아니다. 성육신에서 종교는 자기자신에 대해 반성함에 있어서 신학으로서 말하고 싶지 않은 것, 즉 신은 철두철미하게 인간적인 존재자라는 것을 고백 할 뿐이다. 인간은 종교에서 자기를 신적인 활동의 대상이나 신적인 목적으로서 직관한다.

 


2) 신 또는 종교의 비밀


인간화된 신, 즉 그리스도의 본질규정의 하나는 열정(Passion, 그리스도의 수난)이다. 사랑은 수난을 통해서 확실해 진다. 그리스도에 관련된 모든 사상과 감정은 수난이라는 개념에 집중한다. 사랑은 수난을 통해서 확실해 진다. 우선 그리스도에 관련되는 모든 사상과 감정은 수난이라는 개념에 집중된다. 신으로서의 신은 인간적인 완전성의 총체이며 그리스도로서의 신은 모든 인간적인 비참함의 총체이다.


고뇌(수난)는 기독교의 최고의 명령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그 자체가 수난사이다. 이교도에게는 감성적인 쾌락의 환상이 신들에 대한 예배 안에 혼합되어 있다면 기독교도 당연한 것이지만, 고대의 기독교도에게는 혼이나 심정의 눈물과 한숨이 신에 대한 봉사에 필요한 것이다. 신의 가장 내적인 혼, 즉 기독교에서는 신에 대한 내면적인 본질로부터 나오는 영적인 예배에서 나타나는 신이 참된 신이지 궤변적인 신학의 신이 인간의 참된 신은 아니다.


기독교는 수난의 종교이다. 우리가 오늘도 여전히 모든 교회 안에서 마주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초상은 우리에게 결코 구제자를 보여주지 않으며 단지 십자가에 못 박힌 자, 수난자를 보여 줄 뿐이다. 신이 고뇌하는 것은 그러나 실은 신은 심정이다 라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심정은 모든 고뇌의 원천이며 총체이다. 고뇌를 가지지 않은 존재자는 심정을 가지지 않은 존재자이다. 그러므로 수난의 신의 비밀은 감정의 비밀이다.


종교는 인간의 본질이 자기자신 안에 반성되고 반영된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기자신이 마음에 들고 자기자신에게 기쁨을 느끼며 자기를 사랑한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신은 인간의 거울이다. 인간에 대해 본질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 인간에 의해 완전한 것이나 우수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 오직 이것만이 인간에게 신이다. 감정이나 고뇌하는 능력을 가지지 않는 신은 느끼고 고뇌하는 존재자로서의 인간에 만족을 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단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뿐 오성과 의지를 가지지 않은 존재자 또한 인간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오직 전인을 자기 안에 포괄하는 존재자만이 전인을 만족시킬 수 있다. 인간이 자기의 전체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식이 삼위일체의 의식이다. 따라서 삼위일체는 오성의 일반적 본질, 즉 신으로서의 신을 하나의 특수한 본질, 하나의 특수한 본질, 하나의 특수한 능력으로 끌어내린다.


우리는 단지 신학에 의해 삼위일체의 복제, 형상, 비유로서 특색 지어지고 있는 것을 사물 그 자체, 본질, 원형, 원물로서 이해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수수께끼를 푼 셈이다. 사람들이 삼위일체를 구상화하여 알기 쉽게 하고자 사용한 공식적인 형상을 주로 정신(Geist, mens), 오성(Verstant, intellectus), 기억(Ged chtnis, memoria), 의지(Wille, voluntas), 사랑(Liebe, amor 또는 caritas)이었다. 신은 사유하고 사랑한다. 사유된 것, 인식된 것, 사랑 받는 것은 신 자신이다. 자기의식의 대상화는 우리가 삼위일체 안에서 마주치는 최초의 것이다. 신의 자기의식이란 절대적 본질성 또는 본질성으로서의 의식에 관한 의식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신 그 자체, 단순한 존재자로서의 신은 단적으로 단독으로 존재하는 고독한 존재자, 즉 절대적 고독과 독립성이다. 사람은 혼자서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것은 오직 두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사랑할 때, 우리는 타자에게 의존한다. 사랑이란 자기와는 다른 존재자를 욕구하기 때문이다. 신적 존재자의 고독 속에 인격성에서는 신과 구별되지만, 본질에서는 신과 일치하는 존재자가 조정(措定)됨으로써 충족된다. 다시 말하여 아버지 신과 구별되는 아들 신이 조정됨으로써 만족된다. 아버지인 신은 나이며, 아들 신은 너이다. 나는 오성이고 너는 사랑이다. 그런데 오성을 동반하는 사랑 및 사랑을 동반하는 오성이 비로소 정신, 즉 성령이며 전인이다. 삼위일체에서의 제3인격은 두 개의 신적 인격이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랑 이상의 것도 표현하고 있지 않다. 제3인격이란 아버지와 아들의 통일이며 연대성이 전혀 불합리하게 조정된 것이다. 우리는 성령을 분석의 특수한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 다만 성령이란 주관적 측면으로 보아서 종교적 심성의 자기 표현, 종교적 감정의 표현, 종교적 영감의 표현이며 종교 안에서의 종교의 인격화, 대상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가족, 아버지와 아들사이의 사랑의 유대를 보완하기 위해서 제3의 인격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여성적인 인격이 천국에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참으로 안성맞춤이다. 당초 마리아가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놓였던 것은 아버지가 마리아를 통해서 아들을 낳았다는 뜻이 아니었다. 모성적인 원리가 아버지와 아들을 결합시키는 것으로 충분했다. 마리아는 오히려 삼위일체라는 관계를 나타내는 범주에 적합하다. 아들, 즉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아들은 그 자체에서 아버지의 남성적인 본질과 어머니의 여성적인 본질사이에 있는 중간본질이다. 아들이 어머니에 대해서 가지는 사랑은 남성적인 본질이 여성적인 본질에 대해서 가지는 최초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신의 아들을 생각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신의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과 결부되어 왔다. 신의 어머니에 대한 신앙이 쇠퇴하는 곳에서는 신의 아들과 아버지인 신에 대한 신앙 또한 쇠퇴한다. 아버지가 진리인 것은 오직 어머니가 진리일 때뿐이다. 사랑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여성적이다. 신의 사랑에 대한 신앙은 신적 존재자로서의 여성적 존재자에 대한 신앙이다.


프로테스탄트교는 신의 어머니를 한쪽으로 밀쳐버렸다. 그러나 냉대 받은 여성은 그 대신 프로테스탄트교에 가혹하게 보복했다. 프로테스탄트교가 신의 어머니를 향해 삼위일체 전체에 향해졌다. 일단 신의 어머니를 오성을 위해 제물로 바치는 사람은 어느새 다시 신의 아들의 신비를 의인적(인격적) 표현으로서의 제물로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성적 존재자가 배제된다면 확실히 의인적 표현이 은폐된다. 삼위일체의 신은 카톨릭교의 신이다. 삼위일체의 신은 내용이 풍부한 신이다. 이 때문에 신은 실제생활의 내용이 사상(捨象)되는 곳에서 요구된다. 생활이 공허할수록 신은 그만큼 더 풍부해지고 더 구체적이 된다. 신은 결핍의 감정으로부터 발생한다. 인간이 상실한 것이야말로 신이다. 따라서 공허함이나 고독함과 같은 허전한 감정은 서로 열렬하게 사랑하는 존재자의 사회나 교제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신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삼위일체가 종교 속에서 차지하는 본질적인 의의는 항상 제2인격의 본질 안에 집중되어 있다.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 동질, 동일한 본질)와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          , 유질, 비슷한 본질)에 관한 격렬한 싸움은 비록 글자 한자의 차이에 불과 하였지만 공허한 싸움은 아니었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제2인격과 신의 동격성이었다. 교의학적 사변은 신의 형상인 신의 아들의 내적인 생성을 완전히 간과하면서 아들은 바로 신성의 형이상학적 관념으로부터 일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2인격의 또 하나의 규정이며 형상의 본질과 관련된 것은 제2인격은 신의 말(Wort, Logos)이라는 규정이다. 말은 추상적인 형상, 상상 속의 사물이다. 또는 모든 사물이 항상 최후에는 사유력의 대상인 한, 말은 상상된 사상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물의 말, 이름을 알면 사물 그 자체를 아는 것처럼 상상한다. 말은 구제하는 힘 행복하게 하는 힘, 해방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신의 말이란 종교의 내부에서 인간에게 대상이 되는 신성이며 말의 참된 본질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말의 참된 본질을 인간의 말과는 구별된 특수한 본질로서 표상 한다. 자기를 계시하고 발현하고 표현하는 신인 제2인격은 신 안에 있는 세계창조의 원리이다.


세계가 신은 아니다(기독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의 싹은 이미 도래하고 있었다). 세계는 신과는 별개의 것이며 신의 대립물이다. 이 표현은 지나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신은 아들을 확실히 아들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세계는 적어도 신과 구별된다. 세계 창조의 과정은 심리학적(정신논리학적, psychologisch) 과정의 신비적인 표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며 의식과 자기의식의 통일화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신은 자기를 사유한다. 따라서 신은 자기를 사유함으로써 또한 자신과는 다른 것을 사유한다. 따라서 자기를 의식한다. 신이란 자기의식이 대상이나 본질(존재자)로서 조정(措定)된 것이다. 그러나 자기를 사유함으로써 또한 자신과는 다른 것을 사유한다.


나는 너의 의식의 매개에 의해 세계의 의식을 획득한다. 이리하여 인간은 인간의 신이다. 인간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자연에 신세지고 있으며 타인이 없으면 물리적, 정신적인 모든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추상적인 논리학적 범주에 의하면 신 안에 있는 세계창조의 원리는, 다른 것은 오직 차이성의 원리로부터 나올 수 있을 뿐이며 단순한 본질 자체로부터는 나올 수 없다. 기독교적 철학자나 신학자가 애써 무로부터의 창조를 변호하려 하지만 무로부터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근본명제를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신적인 오성을 모든 사물을 자체 안에 총괄하는 정신적 물질로서 현실적인 물질의 근거로 삼았다. 사물(Ding)은 존재(existiren)하기 전에도 존재(sein)하고 있었다. 그 사물은 감관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정신의 대상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세계는 오직 세계 그 자체로부터 끌어낼 수 있을 뿐이다. 세계와 창조주로서의 신 사이의 구별은 단지 형식적인 구별에 지나지 않으며 전혀 본질적인 구별은 아니다. 따라서 신의 본질이란 세계의 본질이 추상화되고 분리되어 사유된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다만 신의 본질이란 세계의 본질이 현실화되고 구체화되고 감성적으로 직관된 것이다.


신 안에 있는 자연의 교리는 자연주의를 통해서 유신론, 특히 최고의 존재자를 인격적 존재자로서 고찰하는 유신론을 확립하고자 한다. 인격적 유신론은 신을 모든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된 인적적 존재자로 생각한다. 신이란 신의 존재이다. 신이란 신 자신의 본질이다. 이 점에서 유신론은 종교의 본질과 일치한다. 인격성은 신의 추상적인 신이다. 그러나 신이 인격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신의 개념 안에 들어 있다. 인간은 신의 인격성 안에서 자기자신의 인격성의 초자연성, 불사성, 독립성, 비제한성을 찬미한다. 인격신이 하나의 진리성, 유일한 진리성인 곳에서는 자연은 아무런 실재적인 의의를 가지지 않으며, 실재적인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 여기서는 본래의 무로부터의 창조가 단 하나의 설명 근거이다. 왜냐하면 무로부터의 창조는 자연은 무라는 것 이상의 어떤 것도 표현하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자연이 절대적 인격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의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오직 섭리나 기적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되고 설명되어질 뿐이다. 그러나 섭리는 인간에 관계한다. 섭리는 인간을 위해 사물을 마음대로 처리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전능한 법칙의 효력을 폐기한다. 자연의 섭리에 경탄하는 것은, 비록 그것이 종교적 자연주의일지라도 자연주의에 속한다. 종교적 섭리는 오직 기적 안에서만 계시된다. 섭리는 인간의 특권이다. 섭리는 다른 자연적인 존재자나 사물과는 다른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 섭리는 인간을 세계의 연관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러므로 오직 특수한 섭리만이 종교적 의미에서의 섭리이다. 섭리에 대한 신앙은 자기자신의 가치에 대한 신앙이다. 섭리가 믿어지는 곳에서는 신에 대한 신앙은 섭리에 대한 신앙에 의존한다. 섭리가 존재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신이 신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종교적 섭리에 대한 신앙은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신앙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자기를 자연과 구분한다. 자연과 인간의 구별이 인간의 신이다. 범신론과 인격신론의 구별은 다음의 질문으로 해소된다. 즉 인간의 본질은 세계의 밖에 있는 본질인가 아니면 세계의 안에 있는 본질인가, 초자연적인 본질인가 아니면 자연적인 본질인가 하는 질문이다. 범신론은 인간을 자연과 동일시한다. 인격신론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독립시키며, 인간을 부분에서 전체로 바꾸어 독립된 절대적 존재자로 만든다. 이것이 범신론과 인격신론의 구별이다. 따라서 세계의 창조자란 다음과 같은 인간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즉 세계는 창조된 것이며 의지의 산물, 다시 말하여 자기를 가지지 않는 실존, 위력이 없는 실존, 허무적인 실존이라는 증명 또는 의식에 의해서 자기자신의 중요성, 진리성, 무한성의 확실성을 자기에게 주는 인간이다. 따라서 세계는 무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무는 세계 자신의 무이다.


이상에서 말한 창조의 비밀을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오직 다음의 것을 명심하라. 즉 창조에서는 결코 흙, 풀, 짐승, 물 -이것들에게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창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자나 영혼의 창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은 그 자체가 인격으로서의 인격성의 개념 또는 이념이며 세계로부터 격리되어 자기 자신 안에 틀어박혀 있는 주관성이며 절대적 존재 및 본질로서 조정된 무욕구의 자기 충족태이며, 너를 가지지 않는 나이다.

 


   3) 소결
그리스도는 주관성의 전능이며 자연의 온갖 속박과 법칙으로부터 구출된 심정이며 세계를 배제하고 오로지 자기 혼자에만 집중된 심정이며, 심정의 모든 소망의 심정이며, 공상의 승천이며, 심정의 부활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와 이교의 구별이 필요하다.


인간은 기독교에서 자기를 오직 자기자신에게로 집중시켰고 자기를 세계 전체의 연관으로부터 떼어놓았으며 자기를 자기자신에게 만족하는 전체로 만들고 세계의 밖에 있고 또 세계를 초월하는 절대적 본질로 만들었다. 인간은 더 이상 자기를 세계에 속하는 존재자로 간주하지 않고 세계와의 연관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이교도는 단지 인간을 우주와 연관시켜 고찰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이교도는 인간을 오직 타인과 연관시켜, 공동체와 결합해서 고찰했다. 이교도는 적어도 철학자로서는 개체(인간 또는 개인)를 유와 엄밀히 구별했고 부분으로서의 개체를 인류라는 전체와 구별했으며 그리고 부분을 전체에 종속시켰다. 이에 대해 기독교는 유를 방치하고 개체만을 안중에, 심중에 새겨두었다.


기독교는 이교에 대한 직접의 대립물이다. 기독교는 이교의 대립물로서 이해될 때에만 진실로 이해되고 독단적인 사변적 억지에 의해 불구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기독교의 대립물이 허위인 한, 기독교는 진실하지만 기독교의 대립물이 진실인 한 기독교가 허위이다. 기독교는 개체를 위해 유를 희생시켰다. 이교는 개체를 유라는 전체와 구별해서 오로지 부분으로서 이해했으며 그에 반해 기독교는 개체를 유와 직접적이고 무차별한 통일성 안에서 이해하였다. 기독교에서 개체는 직접적인 섭리의 대상이다. 즉 신적 존재자의 직접적인 대상이었다. 이교도는 개인의 섭리를 유, 법칙 그리고 세계질서를 매개로 해서 믿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개별적 존재자를 일반적 존재자와 동일시했다. 신은 하나의 개체로서 유라는 개념이다. 신은 유라는 개념 또는 본질이다. 더구나 신으로서의 "유의 본질"은 유로서 일반적 본질로서, 모든 완전성의 총체로서, 실제의 제한이든 가공의 제한이든 개별적인 본질이다. "신의 본질과 실존은 동일하다"는 것은 신은 하나의 실존, 개별적 본질이며 동시에 유개념(Gattungsbegriff)또는 유의 본질(Gattungswesen)말고는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의 유와 개체성의 이러한 직접적인 통일성을 명확하게 상징하는 것은 기독교도의 실제의 신인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원상이며 인류의 실존하는 개념이며 신적인 완전성의 총체이며, 순수한 천상의 인간, 유적 인간이며 시조 아담(Adam Kadmon)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로서의 시조 아담은 하나의 인격으로서 직관된다. 그리스도, 즉 종교적인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간이 아니라 역사의 끝이다.


인간의 유로서의 개념 및 생활의 의미는 기독교가 지배함과 동시에 소멸해 버렸다. 거기서는 또한 인간은 신 안에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며 신은 그 자체 이 목표가 달성된 것이며 인류의 이 최고 목적이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신은 각 개인에게 따로따로 나타난다. 오직 신만이 기독교가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도는 반드시 타인이나 인류나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오늘날 기독교 특히 개신교들의 자기 편집에 가까울 정도의 편협한 신앙적 배타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즉 기독교도에게는 타인에 대한 내적 욕구가 결여되어 있다.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과제는 이것으로써 수행되었다. 우리는 신이 세계의 밖에 가지고 있는 자기의 본질, 신의 초자연적인 본질, 신의 초인간적인 본질을 인간적 본질의 성분으로 환원시켰다. 인간적 본질의 성분은 신의 본질의 근본성분이다. 우리는 결론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인간은 종교의 시작이자 중간이며 끝이다.

 


   (2) 제2부 종교의 허위의 본질, 즉 종교의 신학적 본질

 

 1) 종교의 본질적 입장


종교의 본질적 입장은 실천적(praktisch)인 입장이다. 즉 여기서는 주관적인 입장이다. 종교의 목적은 인간의 복지, 구원, 행복이며,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인간의 구원에 대한 인간의 관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즉 신이란, 영원의 구원이 실현된 것 또는 인간의 구원과 행복을 실현하는 무제한적인 위력이다. 기독교만큼 강하게 인간의 구원을 강조한 종교도 없다. 기독교는 특히 이점에서 다른 종교와 구별된다. 이 때문에 기독교는 스스로를 신의 교리라고 부르지 않고 구원의 교리라고 부른다.


신은 본질적으로 종교의 대상이지 철학의 대상이 아니며, 심정의 대상이지 이성의 대상이 아니며 심정의 필요의 대상이지 정신의 자유의 대상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신은 이론적 입장의 본질이 아니라 실천척 입장의 본질을 표현하는 대상이며 존재자 이다. 신과 인간사이에 세계라는 표상, 즉 제2원인이라는 표상이 끼어 드는 곳에는 일반적으로 종교는 폐기된다. 종교는 신과 인간사이에 있는 사물의 현존재에 관한 예감을 단순히 감성적 자연적인 직관으로부터 받을 뿐이다. 그리고 종교는 일반적으로 혼자서는 제2원인의 존재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 제2원인의 존재는 종교에서 보면 오히려 걸림돌이다. 왜냐하면, 게2원인은 인간을 신과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교의 본질로서 특색 지은 것을, 종교 자신이 확증하는 종교의 본질적인 작용은 기도이다. 기도는 전능하다. 경건한 사람이 기도할 때 간절히 바라는 것을 신은 충족시켜준다. 그는 자연의 위력을 다름 아닌 기도를 통해서 극복하고자 한다. 기도할 때 경건한 사람은 자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하나의 초자연적인 수단을 택한다. 신은 그에게서 동떨어진 제1원인이 아니라 모든 자연적인 결과의 가장 가까운 동력인 이다.


기도의 직접 작용은 기적이다. 그러므로 기적은 본질적으로 종교의 사고방식 안에 포함되어 있다. 종교는 모든 것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설명한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종교의 본질과 무관하며 단지 경험적인 또는 감성적인 사고방식에서만 그러할 뿐이다. 그러나 종교가 시작되는 곳에서는 기적이 시작된다. 참된 기도는 하나 하나가 기적이며 기적을 일으키는 힘의 작용이다. 종교적인 기적은 자연적인 기적과 절대로 다르다. 다만 사람들은  이성을 귀머거리로 만들거나 자연과학이라는 가상아래 종교적인 기적을 합리성과 현실성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기적과 자연적인 기적을 항상 혼동하는 것이다.

 


2) 신의 본질
종교란 인간이 자기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관계하는 것이다. 여기에 종교의 진실성과 도덕적 치유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종교 안에서 자기자신의 본질로 관계하는 것 아니라 자기와는 대립된 다른 존재자로서의 자기의 본질에 대해서 관계한다. 여기에 종교의 비진실성, 종교의 한계, 이성이나 도덕과 종교의 모순이 있으며 또한 여기에 종교적 광신의 유해한 원천이 있으며 나아가 피비린내 나는 인간 희생의 최상의 형이상학적 원리가 있다. 간단히 말해서 종교사라는 비극 속에 존재하는 모든 잔학과 소름끼치는 장면의 시원적 근거가 있다.


다시 말하여 종교가 신학이 된다면, 인간과 신의 통일 이외의 다른 어떤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종교의 근원에는 신과 인간사이의 질적인 구별 또는 본질적인 구별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고대 유대교에서 여호와는 실존 측면에서 보아 인간적인 개체와 구별된 본질에 불과했다. 그러나 질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여호와는 온전히 인간과 똑같았다. 후기 유대교에서 비로소 여호와는 인간으로부터 매우 날카롭게 분리되었으며 신인동감동정설(Anthropopathismus), 인간의 감정을 신에게 이입시키는 것에 본래의 의미와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비유 안으로 도피했다.


기독교에서도 사정은 같았다. 기독교의 가장 오래된 문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아직 나중처럼 그렇게 결정적으로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특히 바울에게는 그리스도는 아직도 하늘과 땅 사이, 신과 인간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불명확한 존재였다. 바울에게 그리스도는 천사 중에 첫 번째 천사였으며, 최초로 창조되기는 했지만 창조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신은 천사나 인간의 아버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명백하게 신과 동일시하고 그리스도를 신의 외아들로 만들고, 그리스도가 인간이나 천사와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에게 피조물이 아닌 영원한 존재자라는 독점권을 주었던 것이다.


종교에 대한 반성, 즉 신학은 신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과 다른 본질로 만들고 그것을 인간의 외부로 끌어낸다. 이러한 방식 중에서 개념상 최초의 것은 정식의 증명 대상이 되는 신의 실존이다. 신의 현존재에 관한 증명은 내적인 것을 이적인 것으로 전화시켜 인간에게서 배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신은 실존을 통해서 사물 그 자체가 된다. 내가 신에 대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은 나에 대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순의 필연적인 귀결의 하나가 무신론이다. 신의 실존은 경험적인 또는 감성적인 실존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


주지하듯이 칸트는 신의 현존재에 관한 증명을 비판하면서 신의 현존재는 이성으로부터 증명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칸트는 헤겔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오히려 칸트는 적절하다. 즉 개념에서 실존을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성은 자신의 객체를 자신의 감관의 대상으로 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경험론과 유물론이 성행한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신의 경험적 실존이라는 개념이 완전하게 발달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신의 실존에 대한 신앙은 인간의 실존, 자연의 실존과 구별된 하나의 특수한 실존에 대한 신앙이다.


 신의 실존에는 계시의 개념이 연관되어 있다. 신의 실존의 자기증명, 신이 실존한다는 것의 진실한 증언은 계시이다. 신의 현존재에 관한 단순히 주관적 증명은 이성의 증명이며, 신의 현존재에 관한 객관적인 증명은 신의 계시이다. 신은 인간에게 이야기한다. 계시는 신의 말이다. 계시에 대한 신앙은 종교적 심성이 신앙하는 것, 소망하는 것, 표상 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에 관해서 종교적 심성이 가지고 있는 직접적인 확실성이다. 또한 계시에 대한 신앙은 종교적 의식에 특징적인 환상을 가장 분명하게 폭로한다.


그런데 신은 초인간적 존재자이다. 신은 오직 신 자신에 의해서만 알려 진다. 따라서 우리는 신이 우리에게 계시한 것 이외에는 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 신이 계시하는 것은 신이 계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신이 인간을 위해서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신으로부터 인간으로 오는 것은, 단지 신 안에 있는 인간으로부터 인간으로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의 계시와 이른바 인간적 이성 또는 인간성 사이에는 환상적인 구별 이외의 어떤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신의 계시의 내용 또한 인간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라는 것이 가장 정확하게 확증된다.


기독교적인 궤변의 최상의 원리, 중심점은 신의 개념이다. 신은 인간적 본질(존재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인간적인 다른 본질의 이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인격적, 개체적 본질이어야 한다. 또는 신은 인격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본질로서 신이어야 한다. 즉 신은 결코 인격적인 본질이어서는 안 된다. 신은 존재한다. 즉 신의 존재는 특수한 존재로서는 지각되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정의의 한쪽 절반은 다른 한쪽 절반과 언제나 모순된다. 존재(Ist)에서 주장되는 것은 당위(Soll)에서 항상 거부된다.근본개념은 단지 궤변에 의해서 숨겨져 있을 뿐인 모순이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신은 결코 신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성은 신의 본질적인 술어가 된다. 그러나 동시에 다시 독립적으로 인간밖에, 인간 위에, 다른 존재자로 실존하지 않는 신은 환영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비인간성과 초인간성은 신성의 본질적인 술어가 된다. 종교의 성격은 인간의 본질을 다른 본질로서 직접적으로, 무심결에 무의식적으로 직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대상적으로 직관된 본질이 반성의 객체, 신학의 객체가 되면, 그것은 허언과 기만과 배반과 모순과 궤변의 무궁무진한 보고가 된다.


신의 본질은 공상의 본질이 대상화된 것이다. 신은 감성적 본질이지만 감성의 제한으로부터 분리된, 즉 제한되지 않은 감성적 본질이다. 그러나 공상이란 무엇인가? 공상이란 제한을 가지고 있지 않은 감성, 제한되지 않은 감성이다. 신은 사랑이지만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며, 오성이지만 인간적인 오성이 아니다. 그렇다! 오성은 본질적으로 다른 오성이다. 오직 신적 오성을 인간적 오성과 동일하게 만드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며, 오성이며 실제의 개념이다. 그런데 신적 오성을 인간의 오성과는 다른 오성으로 만드는 것은 객관적으로는 무이며 주관적으로는 단순한 상상이다. 그러나 신적 존재자의 다른 모든 규정에서 구별을 만들어내는 것은 숨겨진 무이다. 그에 반해 창조에서 구별을 만들어 내는 무는 공공연한 무이며 분명하게 언급된 무이며 대상적인 무이다. 그 때문에 창조에서 구별을 만들어내는 무는 인간학과는 구별된 신학이 가지고 있는 공공연하고 저명한 무이다.

 


 3) 사변적 신학비판


신의 인격성이란 인간이 자기자신이 본질의 규정과 표상을 다른 본질(존재자)의 규정과 표상으로 만들기 위하여 사용하는 수단이다. 신의 인격성은 그 자체 인간의 인격성이 소외되고 대상화된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이 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의식을 신의 자기의식으로 여기고 있는 헤겔의 사변철학은 자기소외 과정에 토대를 두고 있다. 신은 우리에 의해서 생각되고 인식된다.


사변철학에 따르면 신이 자기를 생각한다고 한다. 사변철학은 종교가 서로 분리시키는 양 측면을 결합시킨다. 사변철학은 이 점에서 종교보다도 더 심원하다. 신은 내적, 정신적인  존재자이며 사유나 의식은 내적, 정신적 작용이기에 신의 본성이 긍정되는 것이며 신의 본질이 작용으로서 확증된다는 것이다. 신은 우리에 의해서 사유되는 것과는 별도로 자기자신을 사유한다. 신이 실제의 인격성으로서 표상 된다면, 그것은 확실히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실제의 인간적인 인격에 대한 나의 사유는 그 인격에게는 무관한 외적 사유이다. 이것은 종교적인 신인동감동정설의 극점을 이룬다.


신은 자기를 계시하기 위해서 창조한다. 즉 창조는 신의 계시이다. 신은 오직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지만, 신은 인간 안에서 자기를 찬미한다. 즉 인간은 신의 긍지이다. 신이 없으면 인간은 무이다. 그러나 또한 인간이 없으면 신은 무이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서 비로소 신은 신으로서 대상이 되고 인간 안에서 비로소 신은 신이 되기 때문이 다.


인간은 드러난 신이다. 신적 존재자는 인간 안에서 비로소 자기를 신적 존재자로 실현하고 확증한다. 인간은 신의 질에 인간적 감정으로서 분절을 붙이고 억양을 붙인 신의 입이다. 신이 존경과 찬양을 받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이 신에 대해서 품고 있는 감정이 바로 신의 자기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의식은 인격성이라는 표상을 사용하여 신과 인간을 독립적인 실존으로 만듦으로써 분리할 수 없는 양 측면을 다시 분리시킨다.


그런데 헤겔적 사변은 이 양 측면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낡은 모순이 근저에 남아있다. 그러므로 헤겔적 사변은 단지 종교적 진리의 철저한 수행이며 완결에 불과하다. 학식 있는 대중은 헤겔에 대한 증오로 눈이 어지러워졌기 때문에 헤겔의 교리가 적어도 이 점에서는 종교와 모순될 뿐 근본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헤겔의 교리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신에 관한 인간의 의식이 신의 자기의식이라면 인간적 의식은 그 자체 이미 신적 의식이다. 신의 의식이 있는 곳에 신의 본질이 있다. 따라서 인간 안에 신의 본질이 있다. 신적 존재자의 규정이 인간적이면, 인간적 규정은 신적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오로지 신적 존재자와 인간적 존재자의 참된 통일을 획득한다. 이 통일은 우리 안에서 만족한다.

 


 4) 모순의 변증법

그러나 종교 또는 신학은 단지 인간적인 또는 신적인 존재자의 일반을 인격적인 존재자로서 대상화할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또는 신적인 존재자 일반의 근본규정 또는 근본구별을 다시 인격으로서 표상 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는 근원적으로는 인간이 인간의 본질 안에서 지각하는 본질적인 근본구별의 총체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삼위일체는 일신론과 다신론의 모순이며 공상과 이성의 모순이며, 공상과 현실의 모순이다. 신적 인격은 이성에서 보면 환각이며 상상에서 보면 본질이다. 삼위일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의 것을 생각하고 상상할 것을 인간에게 요구한다.


거기에는 세 개의 인격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인격은 세 개지만 본질은 하나이다(Ters person , una essentia). 여기까지는 당연하다. 우리는 본질에서는 동일한 세 개의 인격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신 안에 있는 세 인격은 서로의 외부에 어떤 실존도 가지고 있지 않다. 기독교에서의 신의 세 인격은 단지 표상되고 상상되고 꾸며진 인격에 지나지 않으며 확실히 실제의 인간과는 다른 인격이다.


기독교 신의 세 인격은 세 신이 아니라(tres Dii)이 아니라 하나의 신(unus Deus)이다. 세 개의 인격은 단지 동일한 것(Unum), 즉 같은 것(Eins)일 뿐만 아니라 오로지 하나의 신(Einer), 즉 하나의 것(unus)이다. 유일성이라든가 단일성은 여기서는 단지 본질이라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실존이라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단일성은 신의 실존 형태이다. 셋은 하나이면 복수형을 단수형이다. 신은 세 개의 인격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인격적 존대이다. 따라서 세 개의 인격은 이성의 눈에는 단지 환상일 뿐이다.


종교의 객관적인 본질, 즉 신의 본질이 순수한 모순으로 해소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의 주관적인 본질 또한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되는 근거에 의해서 순수한 모순으로 해소된다. 종교의 본질적 계기 중 주관적인 것은 한편으로는 믿음과 사랑이며, 다른 편으로는 종교가 제의를 통해 외면적으로 표현하는, 세례와 만찬의 성사(Sakramennt)이다. 믿음의 성사는 세례이고 사랑의 성사는 만찬이다. 세례의 자료는 물이다. 그것은 재생의 목욕이며 원죄의 부정으로부터 깨끗하게 하며,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따라 다니는 악마를 구축하고 인간을 신과 화해시킨다.


세례는 기적의 개념을 떠나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세례는 그 자체가 기적이다. 기적은 신앙을 담보로 한다. 그리스도라는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보다도 기적이다. 신앙은 현실적인 것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고 비현실적인 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상상력의 위력이며 감관의 진리성이나, 이성의 진리성과 직접적으로 모순된다. 신앙은 이성이 긍정하는 것을 부인하고 이성이 부인하는 것을 긍정한다.


만찬의 비밀은 신앙의 비밀이다. 만찬의 비밀에 대한 신앙이 전정한 진리로 인류를 지배하는 한, 인간성의 지배적인 원리 또한 상상력이었다. 프로테스탄트의 만찬론을 믿느냐 카톨릭의 만찬론을 믿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가 않다. 전자에서는 누림을 행하는 바로 그 순간에 혀 위에서 비로소 살과 피가 안전히 지적적인 방법으로 빵과 포도주와 결합한다. 그러나 카톨릭에서는 누리기 전에 이미 신부의 위력에 의해서 빵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전화된다. 전자의 만찬론과 후자의 만찬론의 구별은 단지 이것뿐이다. 일반적으로 만찬은 특정한 심정와 신앙을 수반하지 않는 만찬은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 무이다.

 

5) 결론
관념론과 유물론의 모순, 주관주위와 객관주의의 모순은 종교의 가장 내적인 본질을 구성한다. 그리고 성사는 이 모순을 감성화 한다. 그러나 성사는 신앙과 사랑이 없으면 무이다. 그러므로 성사의 모순은 우리를 신앙과 모순으로 인도한다.


종교의 숨은 본질은 신적 존재자와 인간적 존재자의 구별이다. 신은 인간적 존재자이다. 사랑은 인간을 신과 동일시하고, 신을 인간과 동일시하며 따라서 인간을 인간과 동일시한다. 신앙은 신을 인간과 분리시키고 그 결과 인간과 인간을 분리시킨다. 신앙은 신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율법으로 삼는다. 신앙은 이것은 참이고 저것은 거짓이라는 식으로 구분한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한정된 신앙이다. 오직 이 한정성에서의 신만이 참된 신이다. 내가 생각하는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진실하고 유일한 예언자이며 신의 외아들이다. 그리스도에게 찬성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반대하는 사람이며, 기독교적이지 않는 것은 반기독교적이다. 그러나 무엇이 기독교적인가? 신앙에서 보면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완고와 악의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적이다.


기독교는 비기독교적 민족의 신앙 안에서는 티끌도 찾아내지만, 자기자신의 신앙 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 이것은 단지 기독교도의 이기주의, 허영, 자만에 불과하다. 기독교도와 다른 민족은 단지 종교적 신앙의 표현 양식에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신앙은 사랑의 반대물이다. 사랑은 죄 안에서도 덕을 인식하고 오류 안에서도 진리를 인식한다. 따라서 사랑은 단지 이성과 일치할 뿐,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은 이성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고 보편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신앙은 편협하고 제한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이 지배하는 곳에서만 보편적인 사랑이 지배한다.


기독교가 단지 신앙만을 율법으로 삼았다면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의 비난은 무조건적으로 진실하며 무제한적으로 진실했을 것이다. 기독교는 사랑을 제멋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기독교는 이 자유를 가지지 못했으며, 또 가질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사랑을 신앙의 지배에 복종시킨다. 사랑은 단지 기독교의 공교적(esoterisch)인 가르침에 불과하며, 신앙은 기독교의 비교적(exoterisch)인 가르침이다. 즉 사랑은 단지 기독교의 도덕에 불과하지만, 신앙은 기독교의 종교이다.


신은 사랑이다. 이 명제는 기독교의 최고의 명제이다. 그리나 신앙과 사랑의 모순은 이미 이 명제 안에 포함되어 있다. 사랑은 단지 술어에 불과하며 신이 주어이다. 그러나 사랑과 구별되는 이 주어는 무엇인가? 신은 사랑이라는 명제에서 주어는 자신의 배후에 신앙을 숨기고 있는 어둠이며, 술어는 그 자체 어두운 주어를 비로소 밝게 하는 빛이다. 기독교적인 사랑은 그것이 기독교적이고 자기를 기독교적이라고 부름으로써 이미 하나의 특수한 사랑이다.


우리는 종교의 내용과 본질이 철두철미 인간적이라는 것을 증명했고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이며 신의 본질의 비밀은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종교는 자신의 내용이 인간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종교는 오히려 자신의 내용이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비판적인 관계다.

 


제3장 나가는 글


 제1절 비판


포이에르바하의 발전과정은 헤겔학파의 한 사람이 유물론에 이르는 과정이다. 이 발전과정은 일정단계에서 그가 헤겔의 관념론 체계와 완전히 결별하게 되는 과정이다. 포이에르바하는 마침내 불가항력적으로 다음과 같이 깨닫게된다, 즉 헤겔의 절대이념의 선세계적 세계가 존재하기 이전의 논리적 범주의 선존재란 초세계적인 창조자에 대한 신앙에서 나온 환상적인 산물에 불과할 뿐이다. 또한 우리자신이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물질적 세계만이 유일한 현실이며 우리의 의식과 사유는 그것이 아무리 초감각적으로 보일지라도 물질적·육체적인 기관인 두뇌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물질이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정신의 물질의 가장 높은 산물에 불과하다. 물론 이것은  순수한 유물론이다. 그가 사유하는 유물론의 한계는 여기까지이다.


포이에르바하가 진지하게 탐구한 유일한 종교는 일신론에 기초한 서방의 세계종교인 기독교이다. 그는 기독교의 신이란 단지 인간의 환상적 반영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가 바라본 종교는 사람의 의존성에 관한 감정에 그 근거를 갖는 것이어서 무력감으로서의 의존성에 바탕하면서 공상의 세계에서 생긴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종교는 가능과 소원의 모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용 가능한 수단과 주어진 목표를 망하는 것 사이의 모순, 현실과 상상, 존재와 의식사이의 모순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종교는 사랑이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 공상의 세계에서 자기의 소원을 만족시키는 수단이 된다.


그의 전 생애는 사실상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으로 마감하였다고 볼 수 있다. 포이에르바하는, 마르크스 종교비판에서 뿐만 아니라, 프로이드(Sigmund Freud)에 있어서도 아버지이다. 종교를 인간의 소원의 투사물로 해석하고자 했던 그는, 본시 깊은 종교적 인간이었으나 헤겔과 낭만적 자연철학을 통해서 철학자가 되었으며 평생을 종교의 핵심을 찾아내고자 하였다. 그러한 포이에르바하의 종교비판은 이중적이었다.


첫째, 역사적 발생의 관점에서 다루었다. 종교는 인류의 유아적 단계에서 생겨났다. 종교는 인류의 본질을 인간 자신의 밖에다, 즉 하나님 아버지 속에다 옮겨 놓았으나 급기야 인류는 그것을 자기자신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종교의 정상은 기독교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고난 당하고 신앙적 의식 속에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한다.


둘째, 인간학적 관점에서 포착한다. 인간의 결함과 제한성, 그리고 위협과 개별화에서 나오는 의존의 감정에서 종교적 소원이 생긴다. 여기에서 인간의 소원과 유의 목표를 성취시키는 절대적 인격이신 하나님이라는 관념이 생긴다. 포이에르바하에 있어서 성육신은 하나님이 자체상 인간적인 본질임을 직관하게 된다. 그의 의미 구성은 완전히 실현된 신적 종류의 유(Gattung)의 목표였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일치를 극단적으로 인간으로부터 이해하였다. 헤겔에 있어서의 인간이 하나님 속으로 지양되었다면, 그의 전도된 사유는 당연히 하나님이 인간의 본질로 지양되는 것이다. 그가 결코 종교적 현상에 대해서 폐쇄적인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현상 속에서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에 대하여 인간이 맺는 관계를 보지 못했다. 종교에 있어서 인간은 자기자신의 자아와 관계한다. 인간은 곤궁의 상황에서 그러한 자아를 하늘에 투사하게 된다.


그가 종교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심리학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인간정신의 빈궁하고 비참하며 지친 상태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이란 인간과 인간속성이 확대되어 투사된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소위 투사이론을 그의 기본 논제로 설정하였다. 즉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본질을 깊이 생각하는데, 하나님에 대해서는 하나의 소외된 존재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는 인간의 자기소외가 된다. 그의 관심은 신을 현실적이고 인간적으로 만드는데 주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심의 대상은 신이다. 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 다시 말하여 신의 존재는 한편으로 자연의 존재, 다른 편으로 인간의 존재를 표현할 뿐이라는 인식의 결과로서만 그는 신이 자연과 인간으로부터 구분된 추상적 존재라고 한다. 본서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도, 하나님의 속성을 인간의 자질로 낮추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는 이 방법을 다양한 기독교 교리의 모든 분야에 적용시킨다.사랑의 하나님, 삼위일체, 창조론, 섭리론, 예수의 신성과 성육신, 동정녀 탄생,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 이 모든 것을 기본적인 인간상황으로 전락시켜버렸다. 간단히 말해서 종교적인 선언에 적용해 볼 때, 이와 같은 종교적 비판은 "하나님은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창 1:27)라는 본문을 전도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신학은 인간학이 된다는 빌미를 기초하게 된다. 그는 기독교의 교리들을 차례로 단순한 인간학의 차원으로 끌어내렸다. 그러나 그의 저술 전체를 통하여 모든 역사적 진술을 회피한 것은 그가 그의 기독론의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여 그의 비판이론은 초시간적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리스도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고 가정하고 있다.


포이에르바하는 처음부터 행동과 사건의 역사를 담고 있는 성서적 진술들을 종교철학에서와 같이 존재의 상태에 대한 전체로 바꾸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또 그의 반전과정(process of reversal)에 종속시켜버렸다. 행위동사의 문장들을 "is"의 문장들로 대치시킴으로서 초시간적 성격들을 부여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했다'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로 되고 이것이 다시 반전되어 '하나님은 인간의 형상이다'가 되고  있다. 이와 똑 같은 반전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말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라는 본문은 문맥에 따라 파악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자주 잊혀지고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의 아들을 보내셨느니라"(요일 4:10), 하나님의 사랑이 행동이 되었다. 그러나 포이에르바하는 행위와 역사를 어떻게 다루어야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는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확립의 측면에 대해서는 결코 접근하지 못했던 것이다.

 

헤겔이 기독교를 역사화 하여 극단적으로 갱신한 결과 오늘날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종교비판이 일어났다. 헤겔 체계에서의 주관이던 하나님과 객관이던 인간을 전도시키면, 신학의 진술은 인간의 조작물과 허상이 되어버린다. 즉 양자택일의 문제를 동전의 앞과 뒷면에 따라서 신학이냐 인간학이냐 아니면, 사회철학이냐 하는 문제로 비화된 것이 오늘의 종교비판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하에 의하면 헤겔의 사변적 신학은 통상적인 신학을 철학적으로 확장시킨 것이고, 통상적인 신화의 감추어진 의미를 명확히 밝혀주는 것이다. 헤겔 철학은 인간의 자기신격화 현상으로서의 종교와, 이것에 기인하는 자기소외 현상에 대한 진리를 보여준다. 포이에르바하의 기독교 해석은 헤겔철학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소위 소외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인간이 지금까지 주로 종교적 생활을 영위해 왔으며 종교의 본질 또는 기독교의 본질은 인간의 자기자신으로부터의 소외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 소외화 된 정신에 대한 헤겔적인 형이상학에 은밀하게 나타나는 실제의 심리학적 사실은 인간이 스스로를 신이라고 종교적으로 의식하는 데 따르는 인간의 자기소외라고 말한다. 그에 있어서 헤겔철학은 변증법에 의하여 잘 다듬어진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이었다. 자기소외 된 신(self-alinated God)에 대한 헤겔의 묘사는 합리적 신비주의이며 상실된 기독교를 부흥시키는 최후의 웅대한 시도였다. 이로부터 "헤겔의 철학을 거부하지 않는 사람은 신학을 거부하지 않는다" 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일련의 헤겔 사유가 그의 급진적 제자들에 의하여 비판의 희생물 되었다.


본서『기독교의 본질』에서 제시된 포이에르바하의 종교철학의 공식은 철저히 '주어'와 '술어'를 바꾸는 것이었다. 헤겔철학의 신의 자기소외, 또는 절대정신의 자기소외는 포이에르바하에 있어서는 인간의 자기소외로 반전된다. 또한 신이 인간을 통해 완전한 자기의식에 도달하는 과정으로서의 역사는, 인간이 신을 통해 완전한 자기의식에 도달하는 과정으로서 의 역사가 된다. 포이에르바하에 있어서 역사적 구별이 부족했다는 점은 그의 비판에 관한 한, 그는 모든 종교와 종교철학들을 똑같이 다루었다는 점에서 볼 때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는 분명히 처음으로 그의 종교비판의 방법을 종교철학의 비판으로, 또한 분명히 쉘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 1775-1854)학파에서 가르치고 있는 대로, 하나님의 개념을 절대적 인격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는 그와 같은 방법을 전혀 다른 주제, 즉 기독교의 기원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적용했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처음부터 기독교를 종교철학의 일종으로 보고 기독교의 역사적 기반과 내용을 무시하였다.


마르크스로 하여금 포이에르바하의 방법을 발전시키려는 시도를 제공한 것도 바로 이러한 역사적 질문들의 회피였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해서 제기했던 문제들을 기독교인들에게 질문한다. 협동을 유발하기보다는 이론과 사색에 그치고 마는 종교가 가치가 있는가? 지배계층의 도구로 이용되는 이념적인 앞잡이이며 착취를 위한 위장이며 압제받는 자들의 눈을 가리워버리는 먼지 떼이고  비참한 민중을 마취시키는 아편인 종교가 과연 가치가 있는가? 라는 반론에 블로흐(Ernst Bloch)는 "종교가 민중의 아편이라면 파시즘은 그 '스트리키닌'이라고 다시 반론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한, 마르크스가 진정한 유물론의 창시자는 아니었다.


포이에르바하의 인간학적 해석에 따르면 역사에서 자기자신을 실현하는 존재는 인류(hmman species, Gattung)이며, 신으로서 자신을 객관화하는 최초의 인간행위는 현재의 종교비판에 이르기까지 줄곧 전개되는, 종교 속에서의 인간소외라는 단계를 이룬다고 한다. 그는 헤겔적 역사철학의 인간학적 변형에 있어서는 단지 그 윤곽만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포이에르바하의 체계적인 헤겔의 해석방법은 마르크스에게 전해졌고, 마르크스는 자신의 철학적 구조를 포이에르바하의 사상에서 구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포이에르바하가 그의 종교의 본질 또는 신의 본질을 이해함에 있어서 혼동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그는 신으로서의 자기에 대한 헤겔식의 종교를, 종교 일반의 원형으로서의 기독교의 의미를 파악하는 열쇠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의 실수였다. 그가『기독교의 본질』에서 다루고 있는 현상은 인간 체험의 현실이지 기독교 또는 종교로 묘사될 성질이 아니었다. 즉 포이에르바하의 인간은 자신을 신으로 인식하는 환상적 의식 속에서 살고  있는 한, 여전히 불완전한 인간으로 남게된다. 그에 있어서 인간의 자기신격화는 인간소외의 원인인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를 인간적인 존재로 실현하는 데 있어서 장애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제2절 평가

계몽사상의 등장 이후 기독교 사상은 독일관념론의 영향아래 윤리적 종교적 요소만을 간직한 채 합리적 또는 자유주의적으로 혹은 역사주의적으로 또는 실존주의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19세기에 이르러 기독교의 본질을 윤리적 측면에서만 인정하고자 하는 신학과 반대로 기독교를 윤리와 합리로부터 해방시켜 오직 종교적 본질로부터만 이해하고자 하는 신학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모두 종교를 현대의 세속화 과정 속에서 어떤 모양으로나 긍정하고자 시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종교가 역사적, 사회적 관점의 토대 위에서 발생되면, 오히려 종교가 해체되고 나아가서 극복될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종교비판이 발전되었다. 이들의 대표는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 그리고 니체를 들 수 있다.


임마누엘 칸트는 종교를 윤리화함으로써 기독교적 진리의 질을 모색하였다. 그는 계몽주의의 3대 이념인 하나님, 자유, 영혼불멸에 대하여 이론이성의 영역에서는 증명할 수 없고 논박할 수 없는 이율배반을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실천이성의 영역에서 그 이념을 회복시켰다. 사람이 이론적, 경험적으로 증명 불가능한 것이면서도 공리적으로 타당한 세 가지 원리들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면 선한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한 행위는 동기와 의도에 있어서  낯선 환경적 목적으로 말미암아 규정되지 않고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주관 자체로부터 나와서 최종목적인 최고선(summum bonum)을 향할 때 나타난다. 최고선을 향할 때 도덕법을 성취하고 주관적 충동이 사회전체의 보편성에 접근할 때 가능한 것이다. 칸트는 전래하는 기독교의 교리를 윤리학의 한계 안에서 해석하였다. 그는 초월의 경험을  철저하게 기독교적, 종교적 유산의 한계 안에서 세울 수 있었다. 종교는 선한 원리의 효율성의 운반수단이다. 칸트가 심지어 종교와 윤리를 동일시했다고 보기도 하지만, 그의 종교관은 정적인 요소로 감수하면서도 행동하는 윤리의 실체로 보았다.


헤겔은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으로 말미암은 규정된 현대의 세속화한 상황 속에서 종교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는 성서의 역사 속에서 종교의 본질을 사회철학 및 역사철학의 분석에다 전용하였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유일한 인간, 예수 안에서 자기소외화 되고 다시 성령의 삶 속에서 구체화되어 풍족해진다. 현대적 주관이 노동과 성과 법 그리고 소유와 헌법을 통해서 자기소외화 되었다가 가정, 신분, 사법, 국가 등 제도 속에서 그것이 화해된다. 이러한 현대인은 종교를 통해서 새롭게 역사적, 문화적 연관성 속에 들어간다. 헤겔은 종교 안에서 종교를 통하여 현대의 운명을 감내할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그는 기성교회를 별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그가 주장하는 자기실현의 공동체라는 것도 그리스도의 진리의 사변적 권유를 추구하는 자들을 의미하였다. 헤겔의 사유를 전혀 몰랐던 Kant나 Schleiermacher에서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된다. 즉 신학이냐, 인간학이냐 또는 사회철학이냐 하는 문제가 오늘날까지 꼬리를 물고 종교비판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포이에르바하가 등장한다. 신학의 신비를 인간학으로 전도시킨 그의 관심사는, 종교를 인간의 소원의 투사물로 관조하고, "종교는 환상이요, 신학은 인간학"이라는 명제를 도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종교는 인류의 본질을 인간 자신 밖에다가, 즉 하나님 아버지 속에다가 옮겨 놓았으나, 급기야 인류는 그것을 자기자신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종교는 구원과 사랑 등에 대한 인류의 갈망을 초자연적으로 채워주었으나, 인류는 드디어 그것을 자연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종교의 정상은 기독교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고난 당하고 신앙적 의식 속에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한다. 개체 속에서 유의 목표가 직관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포이에르바하가 기독교를 비판한 첫 번째 목표이다. 다음으로 비판한 것이 인간학적 관점에서 관조한 종교의 본질이다. 결함과 제한성과 위험과 개별화와 종교적 소원이 생긴다고 하였다. 즉 인간의 소원과 유의 목표를 성취시키는 절대적 인격이신 하나님이라는 관념이 생긴다. 그의 기독론은 쉽게 전개된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자체상 인간적인 본질임을 직관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누구든지 남을 위하여 고난 당하는 자는 신적으로 행동한다"는 뜻이 있다. 기도는 나의 고난과 곤궁에 하나님이 참여한다는 뜻이며, 신앙은 의식화되고 의욕 된 본질적인 삶의 목적이고, 천재의 눈길이라고 한다. 삼위일체는 나와 당신의 관계와 사귐의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구성은 완전히 실현된 신적 종류의 인간성이라는 유의 목표이다.


포이에르바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일치를 극단적으로 인간으로부터 이해하였고 이러한 일치의 명제 위에 오직 인간학적 의미만을 부여하였다. 종교에 있어서 인간은 자기자신의 자아와 관계한다. 인간은 곤궁한 상황에서 그러한 자아를 하늘에 투사(projection)한다. 즉 종교는 인류의 유아적인 미성숙한 의식의 잔재일 뿐이다. 이것을 의식하는 성숙한 인류는 전에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던 곳에서 단지 무한한 자연, 즉 인간적인 유를 볼뿐이라고 한다.


칼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의 종교비판을 더욱 극단화하여 종교를 허위의식으로 규정하였다. 포이에르바하에 있어서 종교의 본질은 인간의 본질 속에 해소되었으나, 이제 마르크스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은 각 개인 속에 내재하는 추상적인 실재가 아니라 사회적 제 관계의 총화라는 것이 그의 비판의 요지이다. 종교는 자본을 축적하고 잉여가치를 취득하고 노동자를 착취하는 부루주아 사회의 부차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사회를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한 민중의 아편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종교는 사회적 관계의 변혁을 통해서만이 사라지고 사멸하며 무용지물이 된다고 하였다. 마르크스는 종교 그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사회관계를 설명하는 수단으로서의 종교 현상을 이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철학적 종교비판의 완성은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에게서 이루어진다. 니체에 있어서 종교는 타락의 총화였다. 즉 종교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자기 창조적 자유 대신에 단지 도덕적으로 대치하여 해결을 도모하는 타락의 총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교는 언제나 이미 자기 자신을 강력하게 관철시키는 주인들에 대항하여 애초부터 희망 없는 헛된 반항을 하는 노예의 반란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자기의 구성적 약점을 견디어 낼 수 없어서 주님 한 분을  추구하였으며, 그 주님에게 노예로서 자신을 제공할 수 있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강한 점, 즉 초인에의 충동을 인정하는 데 불안을 느꼈다. 그래서 인간은 기독교와 함께 그 기독교에 적합한 노예도덕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노예도덕은 인간의 병적인 현상을 두둔해서 참된 삶을 억누른다는 것이다. 참된 삶에 대항하는 이 노예의 반란이 바로 종교라고 하였다. 니체는 결국 '하나님의 죽음' 또는 '하나님을 죽인 인간'을 말하는데 이것은 초인에의 충동을 인정하는 참된 삶을  실현시키고자 종교와 종교 신앙의 대상을 부정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제3절 후기

19세기 이후 근대철학의 연대기에서 차지하는 포이에르바하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를 관념론자로 부르지도 아니하고 신학과는 가장 거리가 먼 감각론자들(sensationists), 실증주의자들(positivsits), 심지어 유물론자(materialists)의 대열에 올려놓고 있다. 동시대인들이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뛰어난 정열을 가지고 그는 신학을 해체(displace)시키기 위한 목표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근대의 신학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포이에르바하 만큼 정확히 신학의 문제에 몰두하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모든 저술들은 엄격히 말해서 한 가지 주제, 즉 종교와 신학, 그리고 이것들과 연관된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었다. 현대 신학의 거장 바르트(Karl Barth)가 바르게 지적한대로 그의 저서에 나타난 신학적 이해력은 대부분의 근대 철학자들보다 뛰어난 것이다. 또한 그 시대의 어떠한 철학자도 당시의 신학적 상황을 포이에르바하만큼 충분히 꿰뚫어보지 못했으며, 자기의 신분은 물론 아버지의 신분마저 박탈시켜 가면서 그의 일관된 학문적 열정을 쏟아 낸 사람은 없었다. 반신학자인 포이에르바하 신학에 대한 자세는 많은 신학자들 보다 더욱 신학적이었다.


현대의 신학은 포이에르바하와 유사하게 비종교적 상호 인격성에 관해 말하고 있다. 또한 형이상학을 함축하는 전통적 종교와 신학에서 인간의 실체가 상실됨을 보고 있다. 신과 인간간의 수직관계를 비난하고 인간과 공동인간간의 수평적 교제의 지평을 옹호하고 있다. 그리고 이 경우 신은 전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고 있다. 현대의 인간학적, 대화적 신학은 바로 인의 상호 인격적 나와 너의 간계에서 신의 계시를 말하며, 나와 너의 관계에서 사회적 간계의 성취에 대한 은총, 또는 관계의 좌절이나 오해에 대한 형벌을 인식한다. 그리하여 "신은 죽었다"라는 슬로건에서 모든 초월적 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렇듯 현대의 신학은 자기 쇄신과 인간의 해방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적 피안에 대한 포이에르바하의 인간학적 파괴에 관해 당대의 신학적·철학적 비판이 없지 않지만, 19세기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종교비판과 형이상학 비판이 끼친 광범하고도 심대한 사상사적·문화적 영향은 감소되지 않고 있다. 본서의 영역판 머리말에 실린 리차드 니버(H. Richard Niebuhr)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이 말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종교사상에 있어서 포이에르바하와 바르트는 대립되어 있다. 하나님의 계시의 선차성(先次性)과 주권을 모든 기독교적 성찰의 출발점으로 보는 바르트의 관심은, 기독교의 본질을 인간의 영광을 찬미하는 데서 찾고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진술을 인간에 대한 진술로 바꾸어놓은 인간주의와 정면으로 대립한다. 그런데도 바르트는 포이에르바하와 동시대의 정통주의자들이 했던 것처럼 그를 단죄하지 않고 그의 의도에 찬사를 보이는 듯이 보이는가?


그 대답은 인간을 영혼으로서만이 아니라 가슴과 위를 가진 존재로 보는 포이에르바하의 인간이해와 함께 철학자로서의 열정과 함께 진지함, 정직성에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불신자들의 책을 불태우는 신앙은 그것이 정통주의에 대한 신앙이든, 아니면 민주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한 신앙이든, 아니면 바르트가 말하는 어떤 다른 실체에 대한 신앙이든 그것 자체가 불신앙의 고백이다. 이러한 점들은 우리를 신학의 구극적 핵심으로 인도한다. 바르트가 신학연구자들에게 포이에르바하를 추천하는 것은, 인간의 주관적 상태로부터 출발하는 모든 신학은 그것이 하나님의 의식으로부터 출발하든, 신성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출발하든, 인간의 주관적 상태에서 출발하는 모든 신학의 결과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는데 있다. 이와 같은 연구의 결과 나타나는 신학적 견해들은 포이에르바하의 견해와 의미가 다르다 할지라도 모두가 인간학적(anthropological) 견해일 수밖에 없다. 바르트와 포이에르바하 간의 근본적 일치점과 상이점은 우리를 현대인의 종교생활의 중심적 쟁점으로 이끌어 낸다. 양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치한다. 즉 종교를 믿는 것은 인간을 믿는 것이고, 종교가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희망은 인간이 자기자신을 구원할 것이라는 희망이며, 기독교를 믿는 것 자체는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간에 어떤 인간적인 것을 신뢰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포이에르바하는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존재냐 비존재냐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황제의 것을 황제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을 인간에게 돌려주는 것이 문제이다."라고 하여 인간을 한없이 믿는데 반해, 바르트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19세기와 20세기의 차이점이다.


에수님은 우리에게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여기서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이 말씀은 "빵도 필요하지만, 그러나"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 기독교 인간학이 가지는 가장 구체적이고 피할 수 없는 현실적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 현실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반성하여야 한다. 자고 초라한 교회가 문제가 아니다. 소위 잘 나간다는 대형교회, 부와 권세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바로 그 교회가 문제다. 신문지상에 소개되는 교회의 갖가지 문제를 이 글에서 논하고 싶지는 않다. 교인들이 성서는 들고 다니지만, 얼마나 하나님의 가르침에 합당한지, 아니면 한국의 재래 토속신앙의 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구원의 정복(淨福)과 기복(祈福)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성령이 그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지 아니면 마귀들의 역사가 한 판 굿을 치는 지도 모르면서 눈만 뜨면 수 천억의 대형교회가 숲을 이루도록 지어가면서 세 불림에만 혈안이 되고 있는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를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성서를 착실하게 가르쳐서 성도들의 신앙과 생활이 성서의 빛에 따라 꾸준히 형성된에 따라 교회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연예인을 동원하여 부흥회를 연다든가, 열광적인 산기도 등을 통하여 성도들의 감정을 뜨겁게 하여 열심을 내게함으로써 교회부흥을 시도하는 것은 일종의 최면술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신학적 빈곤 때문에 빵의 현실을 간과하는 것은 아닌가? 목회자의 형편없는 자질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 빛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미 150년 전에 이러한 갖가지 종교와 신앙의 모순을 뿌리깊게 파헤치면서 오직 인간을 위한 인간의 종교를 구가하고자 하였던 포이에르바하를 우리는 이쯤에서 다시 한번 오늘의 교회현상과 비견해 볼 수 있는 기회로 맞이하고자 한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로새서 1장 24절).     

                                             2000년 7월 26일 

 

* 참고문헌
 국내

김광식 편저.『기독교신학개론』,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84.
______ 편저. 『기독교 사상』, 서울: 종로서적, 1984.
김균진,『헤겔과 바르트』,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3.
송기득.『신학개론』, 서울: 종로서적, 1986.
정문길.『에피고넨의 시대-청년헤겔파와 칼 마르크스』,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87.
조석만.『현대신학』, 서울: 성광문화사, 1979.
편집부 편. "포이에르바하, 기독교의 본질,"『기독교명저 60선』, 서울: 종로서적, 1985.
황선명.『종교학개론』, 서울: 종로서적, 1982.

 

외국

Aqinas, Thomas. Summa Theolgica.
Bentley, James.  Between Marx and Christ, 김쾌상 옮김,『기독교와 마르크시즘』, 서울:          일월서각, 1986.
Berkhof, L, 고영민 역,『벌콥 조직신학-제2권, 신론』,서울: 기독교문사, 1978.
Bockrnuehl, K1aus. The Callenge of Marxism -A Christian Response, 이종윤 편역, 『마          르크스주의의 도전과 크리스챤의 응전』, 서울: 도서출판엠마오, 1983.
Engels, Friedrich. Ludiwig Feuerbach und Ausgung der klassischendeutshen Philosophie,          김기연 옮김, 『포이어바흐론』, 서울: 도서출판 새날, 1990.
Feuerbach, Ludwich Andreas. Das Wesen Des Christentum(1903), Georg Eliot. Edit, The          Essens of Christianity(1957), 김쾌상 역,『기독교의 본질』, 서울: 도서출판 까치,           1992.
Hick, John H. Philosophy of Religion, 황필호 역,『종교철학개론』.서울: 종로서적, 1980.
Ladd, George Eldon. 이남종 역,『신약의 중심사상』, 서울: 새순출판사, 1987.  
Kant, Immanuel, 윤성범 역,『순수이성비판』, 서울: 을유문화사, 1983.
Neve, J.L.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Vol.Ⅰ. 서남동 역,『기독교교리사』.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1965.
Range, Erhard. 신민우 역,『헤겔과 현대』, 서울: 도서출판 풀빛, 1985.
Sass, Hans Martin. Ludwich Feuerbach, 정문길 역,『포이에르바하』,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86.
Straus, David Friedrich. Das leven Jesu, kritisch bearbeitet, 1835.
Tucker, Robert. Philosophy and Myth in Karl Marx, 김학준·한명화 역,『칼 마르크스의
        철학과 신화』, 서울: 한길사, 1982.

 


** 필자와 이 논문에 대하여

   이 논문은 필자가 1998. 10.13 밤에 그리스도 신학대학원 제4차 학기의 신론 세미나에서 동 대학원 이오갑 교수(조직신학)의 지도를 받으면서 "유물론과 신"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글을 다시 금년 봄부터 약간씩 손질한 것이다. 또한 이 글은 필자가 법학석사학위를 취득한 인천대학교의  법학논문집(인천법학 제13집)에도 수록하였다.


   이 글을 집필한 동기는 필자가 법학수업을 하는 동안 "사회적 법치주의에 있어서의 정의"를 연구하였는데, 유물론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근대 관념론적 유물론의 창시자라고 일컬어지는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를 연구하던 차에 그의 유물론적 신학사상에 빠져들었던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면, 그 날 발표가 끝나고 질문 시간에 나를 유물론자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확신하느냐"라고 물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은 필자를 그리스도 신학대학원이라는 선지동산으로 불러 주셨고, 급기야 유물론적 신학사상에 쐐기를 박는 일에 종으로 쓰시고자 이 글을 쓰게 하셨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종의 길로 나를 인도하시기에 이르렀다. 나는 이 경험을 사도 바울의 다메색의 회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 필자는 신학석사학위를 취득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님의 말씀을 세상 끝까지 전파하는 일에 기도하고 있으며, 주님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에 바치고자 준비하고 있다.

  
   이 글의 구성은 제1장에서 저자(포이에르바하)의 사상과 생애, 작품의 성격, 그리고 본서가 나오게 된 배경을 간략하게 설명하였고, 제2장에서는 본서를 요약하면서 부언설명을 필자의 주석으로 곁들이고 또한 저자의 주석을 실었다. 끝으로 제3장은 본서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이 저서가 갖는 학문적 위치와 역사성을 평가하고, 나아가서 오늘날 조국강단의 현실을 150년 전 포이에르바하가 왜 종교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로 파악하였는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반성하였다.
   본 논문의 장절과 항목을 설정하는 데는 상당한 고심을 하였다. 왜냐하면 논문의 형식상 전체적인 구성을 통일적으로 서술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논문의 제2장에 본서의 방대한 500여 쪽을 진술하여야 하고, 나아가서 저자의 의도를 깨뜨리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제2장의 편별은 구조적으로 어지러운 느낌을 감출 수 없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


신과 무신론
 

     차  례

 

I.  서론
II. 포이에르바하
  1.종교발생기원에 대한 비판적 설명
  2.원의(Wansch)의 투사와 모상으로서의 신
  3.인간소외와 무신론
III.마르크스의 실천적 무신론
  1.종교비판
  2.종교적 소외와 극복
  3.인간해방과 종교
IV. 니체의 '허무주의적' 윤리학
  1.허무주의
  2.종교와 신의 부정
  3.삶의 긍정, 힘에의 의지, 초인
V.  무신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I. 서 론

 

 본 논문에서  필자는   서양근세의   무신론을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
1804-1872),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니체(Friedrich Nietzsche, 1884-1900)
의 사상을 중심으로 논구하고자 한다.


  신과 무신론에 관한  논의는 `신'개념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내용으로
전개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는 종교비판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된다.


 무신론(Atheismus)은 말그대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론을 그 내용으로 삼고있다.
우리는 무신론의 여러 양상을 다음과 같이 구별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실
천적 무신론자는 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으나 자신의 삶의 과정을 통하여 부정한다.


둘째, 이론적 무신자는 자신의 판단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셋째, 극단적인 무신
론은 모든 정신적이고 초감각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물질주의(Materialismus)와 실증주
의(Positivismus)이다. 넷째, 범신론(Pantheismus)은 세계를 초월하는 인격적 신을 믿
지 않는다. 경험적  세계와 일치하지 않는 절대적인 어떤  것(예; 도덕법, 아름다움의
이상등)을 인정함으로써 신에 대한 신앙의 싹을 지니고 있다. 다신론(Polytheismus)이
나 이신론(Deismus)은 무신론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이론적 무신론자를 좀 더 자세히 분류하면 이론적으로 부정적인 무신론자와 이론적으
로 긍정적인 무신론자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신에 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경우이
고, 후자는 신의 존재가 충분히 증명되지 않아 의심하는 경우이거나 신에 관한 명확한
진술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이론적으로 긍정적인 무신론자는 신에 관한
명확한 진술은 경험에 국한된 인간의 인식을 넘어선다거나 (불가지론의 경우) 혹은 주
관적으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요청적인 무신론자(니체, 니콜라이 하르
트만)는 신에 의해 인간적인 가치 혹은 윤리적 가치가 위험하게 된다고 생각하여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1)


 이 논문에서는 종교비판가들이 신의 부재와 종교의 근거없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제시
하는 근거들이 무엇인가를 추적해보고  그들의 논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일
반적으로 유신론자들, 특히 그리스도교신자들은 인간과 세계의 기원, 인생의 의미등이
신의 존재를 통해서만 해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종교비판 논자들은 초월적 경
험의 기본형태를 설명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인간 자신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
는다.


 따라서 이른바 신의 현재성은  인간적인 동경과 원의(원의)의 투사(Projektion)에 지
나지 않게 된다. 필자는 신의 존재여부에  대한 이와 같은 상반된 견해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논변에 있어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없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도 밝혀보고자 한
다.


 무신론자도 자신과 인간에게 이승의 삶과  사회현실에 철저한 책임을 지고 헌신할 것
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
서 논구의 대상으로 삼는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 니체는 종교없는 인도주의, 신없는
인도주의를 주장하면서 참다운 인간성의 회복,  새로운 사회질서의 확립, 새로운 도덕
체계로의 가치전환을 요구한다. 필자는 이들  사상가들의 사상에 대한 긍정적 및 부정
적 평가를 통하여 서양 근세의 대표적인 무신론의 의미를 조명하고자 한다.

 

  II. 포이에르바하

 

 포이에르바하는 근세 무신론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와 니체의
그것처럼 철저한 `세계성'(Weltlichkeit)의 정신을 구현한다. 그에게는 저승보다는 이
승의 삶이 중요하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모든 종교와 독일관념론에 대한 비판을 예시
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헤겔의 관념론에  비판을 가한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당시
헤겔학파는 헤겔사상의 해석을 둘러싸고  견해차이로 인하여 우파진영과 좌파진영으로
갈라져 있었다. 우파(예컨대, Rosenkranz,  Haym, Erdmann, Fischer등)는 현실적인 것
(das Wirkliche)만이 이성적인 것(das Vern nftige)이라고 주장했고, 좌파(Feuerbach,
Ruge, Bauer, Stirner, Marx,  Kierkegaard)는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라고 주장
했다.2)


 헤겔의 관념론적인  철학을 전복시키려는 포이에르바하의 시도는  그의 물질주의적인
인식론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그의 유물론적인 인식론은  일종의 유물론적 세계관,
즉 자연을 포함하여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 인간학적인 뮤룰론(Materialismus)에 의거
한다. 그는 이와같이 인간학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관념론 일반과 종교에 대한 비판을
가했던 것이다.3)


 이와 같은 의미에서 포이에르바하는 신학에  반대한다. 그는 신학을 철학에서 해소시
키려 한다. 결과적으로 사상가로서  포이에르바하는 신학에서 시작하여 사변적인 관념
론을 거쳐 감각주의적, 자연주의적인 인간학으로  귀착한 셈이다. 이러한 인간학의 특
징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드러난다.

 

  " `외적인' 사물만이 감각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감각을 통하여
    만 주어진다. - 인간은 스스로에게 감각의 객체(Sinnobjekt)로서 대상이다"4)


 또 그가 말하는 새로운 철학은 인간중심의 철학이다.


  " 새로운 철학은 자체만을 위한 이성진리인 신(Gottheit)에 의거하지 않고, 전체
    적 인간의 진리인 신에 의거한다. ... 인간적인 것만이 참된 것이고 현실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것만이 이성적인 것이고, 인간이 이성의 척도이기
    때문이다."5)


 그에게 새로운 철학은 인간의, 인간을 위한 것이고 종교를 대신하는 것이다.


  " 새로운 철학은 ... 인간의, 인간을 위한 것이고 종교를 대신하는 것이다. ...
    그것은 종교의 자리에 들어서고 자체로 종교의 본질이며 진실로 종교자체이다.
  "6)


  이렇게 해서 그의 인간학에서는 헤겔의 절대자(das Absolute)의 자리를 인간이 차지
하게 된다. 그의 종교비판,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교와 신학에 대한 비판은 이와
같은 기본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1. 종교발생기원에 대한 비판적 설명


 포이에르바하의  종교비판의  내용은   주로  [그리스도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 1841), [종교의 본질](das Wesen der Religion, 1845), 하이델베르크의
시청에서 학생들을 청중으로  하여 행한 [종교본질에 대한  강의](Vorlesung  ber das
Wesen der Religion, 1848/49 겨울학기)에 담겨있다.


 포이에르바하는 당시에  영향을 미쳤던 종교비판, 예컨대  프랑스 계몽주의(Holbach,
La Mettrie, Diderot)의 종교비판을 넘어  종교는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견해를
표명한다. 그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 종교가 인간의  첫째이며 간접적인 자기인식이며
개인과 인류역사에서  철학에 앞선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의존감정(das
Abh ngigkeitsgef hl)이 종교의 근거(토대)이다. 그런데 "인간이 의존해있고 의존해있
다고 느끼는 이러한  의존감정의 대상은 근원적으로는 자연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자연은 모든 종교의 역사가 충분히 증명하는 것처럼 종교의 첫째이며 근원적인 대상이
다."7)


 그는 종교가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기원하는가를  물음으로써 종교가 무엇인가를
밝히려고 한다. 먼저  종교는 동물과는 다른 인간의 본질에  의거한다. 동물은 종교를
갖고 있지않다. 인간은 특유의 의식(das Bewu tsein)을 갖고 있는 점에서도 동물과 구
별된다는 것이다.엄밀한 의미에서 의식은 어떤  본질(Wesen)에 그 유(Gattung), 그 본
성(Wesenheit)이 대상인 경우에만 있다고 한다.  그런데 동물은 개체로서 존재하지 유
로서 대상이 아니다. 때문에 동물에게는 의식이 없다고 한다.8)


 따라서 "동물과 달리 인간의 본질은 종교의 근거일 뿐만 아니라 대상이기도 하다. 그
런데 종교는 무한자에 대한 의식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 인간자신의 무한한 본질에
대한 인간의 의식이외에 어떤 다른 것일 수 없다."9)


 이러한 인간의 의식은 동물의 본능과는 달리  다른 사물들, 특히 자신의 본질을 대상
으로 삼는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는 의식의 무한성을  갖는 인간의 본성에
그 근거를 둔다는 것이다. 종교의 기원문제와 관련하여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인간자
신의 측면을 강조하는데 비해 [종교의 본질]은 자연의 측면을 부각시킨다. 물론 이 두
측면은 서로 보완하고 있다.


 포이에르바하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의 여러 대목에서 종교에 관한 여러 민족들의 민
속지학적인 예를 들고있다. 자연을 신앙대상으로  하는 여러 민족의 자연종교 뿐만 아
니라 이른바 고등종교등에 이르는 진리의 과정에서 인간은 비로소 종교가 깊은 자기인
식의 과정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
인 것의 반대관계가 착각(Illusion)이라는 것,  즉 그것은 인간본질과 개인 사이의 반
대관계일 뿐이라는 것,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대상과 내용은 전적으로 인간적이라는 것
을 증명하는 것이다."10)

 


  2. 원의(Wunsch)의 투사와 모상으로서의 신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의 내용을 인간학적 및 심리학적 유래에서 설명한다. 다시말하면
종교와 신관념은  인간의 원의(원의)와 인간의 본질이  투사됨으로써 성립한다는 것이
다. 그래서 신은 인간이 생각하는대로의 신이다. "원의는 원천이다. 즉 종교의 본질자
체이다. 신들의 본질은 원의의 본질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11) 이와같은 의미에서
"신에 대한 의식은 인간의 자기의식이고  신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자기인식이다. ...
신은 인간의 내면이 드러난 것이고  자신이 진술된 것(das ausgesprochene Selbst des
Menschen)이다." 또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자신  안에서 찾기 이전에 먼저 그것을 자
기 밖으로 옮겨 놓는다."12) 같은 의미로 "신은 인간의 다른 자아이며, 잃어버린 다른
반쪽이다. 인간은 신안에서 스스로를 보충하며 신안에서만이 완전한 인간이다. ... 신
은 인간에게 필요하며 자신의 본질에 속한다."13)


 그래서 "종교는 자체에서 인간적인 본질을  반사하는 것(die Spiegelung)" 이다. "신
은 인간의 거울'인 것이다.14) 그에 의하면 종교 뿐만 아니라 예술, 철학 혹은 학문도
진정한 인간본질이 나타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15)

 


  3. 인간소외와 무신론


 포이에르바하에 있어서 무신론적인 주장의 비판적인  화살은 모든 종교,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교를 겨냥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가 가장 세련된  교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간이 철저히 소외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신들과 신의 거짓된
정체를 폭로하고 비신화화 하고자 한다. 그의 무신론은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 신학이
인간에게서 빼앗아 간 것을 인간에게 다시 돌려 주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종교는 인간의 자기자신과의  분열이다. 인간은 신을 그에 대립된 본질
로 설정한다." "신과 인간의 이러한 반대관계, 분열은 ... 인간의 고유한 본질과의 분
열이다."16) 마찬가지로 그는 "신앙이 인간의  내면에서 , 즉 자기자신과 분열하게 하
여 마침내는 내면에서도 그렇게 만든다"17)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종교일반에 기인하
는 인간의 소외는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더욱 철저하게 된다.그에 의하면, 만일 종교가
신학이 된다면, 원래 자의적이 아니고  해롭지 않은 신의 인간으로부터의 분리가 고의
적이고 노련한 구별로 된다. 이러한 구별은 이미 의식안에 들어온 일치를 다시 의식에
서 치워버릴 목적만을 지닌다"18)고 주장한다.


 앞에서 거듭하여 언급했듯이  신의 존재는 인간의 원리와  본질이 투사되어 만들어진
상상의 산물이다. 여기서 신은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초월적' 대상이 될 수 없
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신론은 필연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포이에르바하는 신이 어떻
게 이 세계를 창조했을까 하는 질문의답을 통하여 무신론적인 자신의 확신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세계는 물리학의 대상이므로 규정되어 있지 않고, 비물질적인, 재료가 없는
활동이라는 상상에는 모순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모순은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기본적인 상상을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위와 같은 질문을 할 경우 인
간은 무신론, 유물론, 자연주의에 귀착하게 된다는 것이다.19)


 그에 있어서 무신론은 사유와  환상의 본질(das Gedanken- und Phantasiewesen)을 현
실적인 삶과 본질에 희생으로 바쳐야 하는 것이므로,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무신
론은 자연과  인류에게 의미를 주고 유신론이  빼앗아 간 존엄성을  되돌려 준다고 한
다.20) 무신론은 인간으로부터 추상된 신의 자리에 인간의 현실적이고 참된 본질을 대
치시키는 것이다. 되풀이하여 주장되듯이 인간의  본질이 인간의 가장 높은 본질이고,
인간이 인간에게 신(Homo homini Deus)21)이므로  인간 이외의 다른 경배의 대상은 없
기 때문이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강의의 끝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여러분을
신의 친구에서 인간의  친구로, 신자에서 사유하는 자로,  기도하는 자에서 노동자로,
저승의 후보에서 이승의  학생으로, 그리스도교 신자에서 ...  인간, 전적인 인간으로
만들 과제를 " 떠맡으라고22)

 

  III. 마르크스의 실천적 무신론

 

 마르크스는 독일 트리어(Trier)의 유대 가정에서 태어나서 중등학교 시절에는 프로테
스탄트 신자였다가 대학생으로서 베르린에서 공부하던 중 헤겔학파 사상가들과 교유하
면서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의 무신론적  사상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데모크리투스
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에서도  싹트고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포이에르바하
의 인간학의 영향을 받아 발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종교적 의식은 인간의  고유가치를 감소시키므로, 이러한 멍에을 떨쳐버
려야 한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그는  에피쿠로스가 "가장 위대한 그리스의 계몽가"23)
라고 주장한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그는  "진리와 자유에 이르기 위해 Feuer(불)-bach
(내) 이외에 어떤 다른 길이 없다. 포이에르바하는 현대의 연옥(Purgatorium)이다"24)
라고 주장한다.


 맑스의 종교비판은 그의 사회비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
든 속박과 예속으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이다. 그에게는 우선 인간을 자연의 속박으로부
터 해방시킬 수 있는 해방된 사회의  건설이 중요하다. 때문에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
배가 미래의 계급없는  사회, 해방된 인류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자연에 대한 지배,
기술(Technik)과 산업화에서 자연을 이용하는  것은 모든 공산사회에 필수적인 전제이
다. 이와 관련하여  종교는 불완전한 사회적 관계에서는  주관적으로는 필요한 것일지
모르나 경제적 및 사회적 관계들을  변혁하는데는 걸림돌이 된다. 그런데 기술의 진보
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독립하는 정도에 따라 종교는 점차로  필요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종교가 더 이상 어떤  기능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
으로부터 해방되자마자  자연에 의존하는 인간의 보호와  위안역할을 하는 종교기능은
사라진다. 또 마찬가지 의미에서 계몽된 인간은 이러한 위안을 필요로 하지 않게된다.
결국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적인 세계 사회를 설계함으로써 신의 부정(Negation Gottes)
으로서의 무신론을 성취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25)

 


   1. 종교비판


 마르크스는  종교비판의  주안점과  논거에서 대체로  헤겔좌파의  사상가들(Strau ,
Ruge, Edgar, Bauer, Stirner, 특히 Feuerbach)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에 있어서
종교는 비이성적인 세계의 산물이며 지성적인 계몽으로써만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아
니다. 중요한 선결문제는 세계자체의 변화이다. 이와 관련하여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
하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러므로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심정'(das  religi se Gem t)자체가 사회적 산물
이라는 것과 그가 분석하는 추상적 인간이  어떤 특정한 사회형태에 속한다는 것을 간
파하지 못한다."(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7)26) 여기서 그는 철학과 철학자들의 사회
변혁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만 상이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일일 것이다."(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11)


 포이에르바하는 인간해방의 문제와 관련하여 사회개조를 무엇보다도 계몽, 의식의 변
화, 종교적, 도덕적 강제로 부터의 자유를 통하여 성취하고자 한다. 그 방안으로 그는
인간애로써 이기주의를 극복하라고 요구한다.  이와 달리 마르크스는 인간해방은 사회
문제로서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여기서 해방은 단순히 이
기주의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경제적  억압과 사회계급의 문제이다. 그는 사회혁명을
통하여 철저한 사회개조를 이루고자 한다.27)


 마르크스에 있어서 "종교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이어야 한다. 그 이유는 종교가 인
간을 근본적으로 소외시키는 원인이며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종교가 인간을
만들지 않고, 인간이 종교를 만든다. 종교는 아직 자기성취를 못했거나 자기자신을 잃
어버린 인간의 자의식이며 자기감정이다. 이때  "인간은 세계밖에서 웅크리고 있는 존
재가 아니다. 인간, 그것은 인간의 세계,  국가, 사회(Soziet t)이다. 이 국가, 이 사
회가 거꾸로된  세계의식인 종교를 생산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거꾸로된 세계(eine
verkehrte Welt)이기 때문이다.28)


 또 그가 이해하는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심정이다. ...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종교적 비참은 ... 현실적인 비참의 표현이며 현실적인 비
참에 대한 항의이다."29)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종교비판은
시초에 그것의 후광(Heiligenschein)이 종교인  통곡의 계곡에 대한 비판이다."30) 또
그에게 철학의 과제는, 인간적  자기소외의 거룩한 형상(das Heiligengestalt)이 가면
벗겨진 후, 거룩하지 않은 모습으로 있는 자기소외들의 가면을 벗기는 일이다. 그래서
하늘에 대한 비판은 땅에 대한 비판으로 바뀌고, 종교비판은 법비판으로, 신학에 대한
비판은 정치비판으로 바뀐다는 것이다."31)


 포이에르바하에서처럼 마르크스에 있어서도 인간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한다. 그러므
로 "종교에 대한 비판은 인간이  최고존재라는 학설과 함께 끝난다." 마찬가지 의미에
서 "유일하게 실제적으로 가능한 독일의  해방은 인간을 최고의 존재로 선언하는 이론
의 입장에 선 해방이다."32)

 


   2. 종교적 소외와 극복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종교는  상부구조에 속하고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의존한다.
다시말하면 법률, 종교,  예술, 학문등과 같은 상부구조는  경제적 토대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념, 표상, 의식의 생산은  먼저 직접적으로 물질적인 활동과 인간의 물질
적 고통, 현실적인 삶의 언어와 얽혀  있다." "인간은 그의 표상과 이념등의 생산자이
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작용하는 인간은  그의 생산력의 특정한 발전을 통하여 조건지
워져 있다. ... 의식은 의식된 존재이외의  어떤 다른 것일 수 없고, 인간의 현실적인
생활과정이다."33) 마찬가지 의미에서 도덕,  종교, 형이상학, 그밖의 이데올로기들과
이들에 상응하는 의식형태들은 거짓된 자립성(Schein der Selbst ndigkeit)을 더 오래
보유하지 못한다."  그래서 "의식이 삶이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의식을 규정한
다."34)


 마르크스는 모든 형태의  소외(예컨대, 종교적, 철학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소
외) 중에서 경제적 소외가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경제영역과 관련되는 개
념중에서 중요한 것은 생산력, 생산관계, 생산수단의 사유재 등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다. 소외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사유재 문제이다. 사유재가  소외의 근원적 원인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삶의 점유
Aneignung)인 사유재의 적극적인 지양은 모든 소외를 적극적으로 지양하는 것이고, 종
교, 가정, 국가 등에서의 인간을 그의 인간적인, 즉 사회적인 존재로 복귀시키는 것이
다. 종교적 소외는 그 자체로  인간내면의 의식영역에서만 생기지만 경제적 소외는 현
실적인 삶의 소외이다. - 떠문에 소외의 지양은 양편을 포함한다."35)


 그에 의하면  경제적  소외가 상품물신주의(Waren-Fetischismus)에서 지속하는 한 종
교적 소외도 계속된다. 경제적,사회적 발전정도에  따라 여러가지 상이한 종교적 소외
의 형태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종교적 소외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마르크스에  의하면 오직 새로운
생산양식에 의거하여 인간관계가 이성적으로 될 경우에만 종교적 소외가 없어진다. 즉
"실제적인 일상적 삶의 관계들이 매일 투명하고 이성적인 인간상호관계와 자연과의 관
계를 나타내자 마자 일반적으로 현실적인 세계의 종교적 반사는 사라질 수 있다. 사회
적 생활과정, 즉 물질적 생산과정의  형태는 자유롭게 사회를 형성하는 인간들의 산물
로서 그들의 의식적이고 계획에 따르는 감독아래  있을 때만 그 신비적인 안개의 베일
을 벗는다."36)


 그에 의하면 맑고 이성적인 생산관계는 노동분업의 지양과 사유재의 포기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또 계속 늘어가는 자본이 소수의 자본가에게 축적되고 집중됨에 따라
프롤레타리아가 늘어나고 비참해진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부조리는 공산주의 혁명을
통하여 제거되어야 하고, 계급없는  사회라는 완성된 공산주의의 사회형태가 오기까지
과도단계로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실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완성된 공산주의 사
회에서는 노동분업과 경제적 소외가  없어지고, 지배계급의 억압기구인 국가, 민족(국
가)간의 갈등관계, 위안수단으로서의 종교도 소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종교에 대해
서는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폭력으로써 제거할 필요가 없게된다.  그 이유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종교에 대한 필요성이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적인 새로운 사회
질서가 도입되면서 종교의식은 저절로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37)

 


   3. 인간해방과 종교


 이 주제와  관련하여 필자는 마르크스의 [유대인  문제](Zur Judenfrage)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유대인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의 글은 청년 헤겔학파를 주도하던 바
우어(Bruno Bauer)의 두개의 논문에 관하여 언급하고 비판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이
논문에서 마르크스는 한편으로는 바우어의  비판에 동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대하
면서 유대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유대교에
대한 포이에르바하의 견해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가 종교비판에 사용한 방법을
국가와 정치비판에 적용시킨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가 헤겔의 사상을 유물론적으
로 전환시킨 것을 비판하지는 않으나  형이상학적인 취급방법과 절대정신의 자리에 영
원한 인간적 본성을 대치시킨 점을 비난한다.


 마르크스는 종교비판,  특히 유대인 비판에서 포이에르바하와  바우어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마르크스의 독일유대인에 대한  비판은 지금 다루려고 하는 [유대인 문제]
와 [신성가족](Die Heilige Familie,1844-45)에 실려있다.


 이글에서는   정치적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의   반대관계,   실제적인  국가시민
(Staatsb rger)이 되기 위해 필요한 해방의 문제도 일부 다루어지고, 헤겔의 국가법에
대한 비판](Kritik des  Hegelschen Staartsrecht, 1842-1844)에서도 다루어진다. [유
대인 문제]에서의 주된 종교비판적인 사상은 종교와 종교형태가 다양한 사회형태와 마
찬가지로 시대의 제약을 받는다는 주장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적인 해방'과 단순히 `
정치적인 해방'을 대립시킨다. 바우어에  의하면 "유대인, 그리도교 신자, 일반적으로
종교적 인간의  정치적 해방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일반적으로 종교로부터의 국가의
해방이다."38) 그러나 마르크스에 있어서  종교로부터의 국가의 해방은 현실적인 인간
의 종교로부터의 해방을 뜻하지 않는다. 그는 정치적 해방과 인간적 해방을 구별한다.


또 그는 국가를  종교로부터 분리시켜 생각한다. 바우어에  의하면 유대인은 철저하게
유대교로부터 해방되지 않고는  진정한 의미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반하여
마르크스는, 유대인은 완전하게, 모순없이  유대교로부터 절연하지 않고서는 정치적으
로 해방될 수 없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물론  정치적 해방은 큰 진보이나 인간적  해방의 마지막 형태가
아니고 이제까지 있어온 세계질서 안에서  인간적 해방의 마지막 형태가 아니다." "인
간은 종교를 공법으로부터 사법(das  Privatrecht)으로 추방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종교
에서 해방된다."  또 "종교는 이기주의 영역이며  만인적대관계(bellum omnium contra
omnes)의 영역인  시민사회의 정신으로 되어버렸다."39) 맑스가  비판적으로 지적하는
시민적인 민주사회(b rgerliche Demokratie)의 본질적인 성격을 우리는 대략 세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 사회에서의 정치적 해방은 계급사회의 성격을 띠고 있고 시민사회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정치적 해방은 발전하는 자본주의적  경제의 모든 이익과 자본주의적 계급관계
에서 결과하는 불평등을 존속하게 하므로  불충분하지만 봉건제에 비하면 중요한 발전
을 이룬 것이다.


 셋째, 정치적 해방은 역사적으로 볼 때 사회적 억압상태를 없애지 못한다. 그 이유는
부르죠아계급이 봉건제적 과거에 대해,  그리고 무소유자에 대해 자본주의적 계급관계
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부르죠아계급이 봉건제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실현한 정치적 해방은 모든 소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적 해방의 한 단계일뿐이다. 인간적 해방은 사회주의에서만 완전
히 실현될 수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바우어는 유대인의 해방문제를 순수히 종교적
인 문제로 바꾸어 버린다.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방식을 전
복시키려고 한다. 해방의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부정적인 사회적 요소가 극복되
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적인 해방만이 이기주의와 사유재를 폐기
할 수 있다. 이와같은 보편적인 인간해방은 철저한 혁명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IV. 니체의 '허무주의적' 윤리학

 

 철학사적으로   살펴보면   19세기말경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생철학'
(Lebensphilosophie)이라고 불리는 철학사조가 있었다. 이 철학적 전성기에 속하는 사
상가로서 우리는 니체를  포함하여 쇼펜하우어(Schopenhauer), 딜타이(Dilthey), 짐멜
(Simmel),  베르그송(Bergson),  클라게스(Klages),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set)를 들 수 있다. 이  사조에서는 소크라테스이래 서구철학사에서 부각되었던 이
성적인 인간상이  아니라 감정,열정,기분,충동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인간상이 강조된
다.


 쇼펜하우어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은  니체의 무신론은 포이에르바하와 마르크스의 그
것과는 다르다. 포이에르바하가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을 강조하고 마르크스가 인
류의 평등의 실현을 설파하는데 비하면  그의 무신론은 이기주의적이라고 할만큼 편협
한 데가  있다. 그는 사르트르(J.P.Sartre)와 까뮈(A.Camus)처럼  신이 인간의 자유와
개인적인 자기발전을 제약하고 방해한다고 생각하여 '신의 죽음'을 선포한 무신론자였
다.


 이제 필자는 그의 초기저술인 [즐거운 학문](1882),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이후), [힘에의 의지](그가 죽은후  1906년에 간행됨)를 중심으로 그의 무신론적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1. 허무주의(Nihilismus)


 '허무주의'라고 번역되는 독일어의 Nihilismus는  라틴어의 어원 'Nihilum'에서 유래
하며 '없음'(무)을 뜻한다. 허무주의는 존재를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무'로 해소시
킨다. 허무주의의 일반적인 특징은  회의주의적인 사유방식이 과격화하여 마침내는 절
대부정의 입장을 취하는데 있다. 즉  실재,신앙,도덕등을 부정하는 태도이다. 온갖 질
서, 이상이 부정되지만, 이것을 대신할만한  새로운 것이 생기지 않은 상태, 말하자면
무정부 상태이다.


 또 허무주의에서는  절대적인 존재나 진리, 어떤  가치자체도 부정된다고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허무주의를 다음과 같이 여러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존재론적인 허무주의는 실체적인 존재의 실재성을 부정한다.


 둘째, 인식론적인 허무주의는 객관적  진리의 인식가능성을 부정한다. 따라서 사물의
본질이나 실재의 근거는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다. 절대회의론(서양 고대
그리스의 Gorgias같은 사람이  회의론의 대표적 인물)이며 불가지론(Agnostizismus)이
다.


 셋째, 종교적 허무주의는 신과 신성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서양에서는 기독교
적으로 해석되는 초월적 신의 부정을 뜻한다.


 넷째, 윤리적 허무주의는 인간행위의 기준이  되는 도덕적 규범이나 의무등의 가치체
계가 합리적인 논쟁으로서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그 객관적인 타당성과 구속
력을 부정한다.40)


 니체자신은 허무주의의 의미를 "최고의  가치가 몰가치화한다는 것, 목적이 결여되어
있다. '왜'에 대한 대답이 없다"라고 규정한다.(Der Wille zur Macht,  2). 이와 관련
하여 비관주의(Pessimismus)는 허무주의 전형태(Vorform)이다.(위의 저술, 9) 또 허무
주의는 '영겁회귀'와  관련된다. "있는 그대로의 현존재(Dasein)는  의미와 목적이 없
이, 그러나 무로 향한 종점이 없이(ohne  Finale ins Nichts) 피할 수 없이 회귀한다.
즉 이것은 (필자첨자) '영겁회귀'(die ewige Wiederkehr)이다."41)


 이와 같은 맥락에서  니체는 전승된 서구의 철학 뿐만 아니라  도덕과 종교도 비판한
다. 그래서 그의 비판은 포괄적인 문화비판의 형태로서 등장한다. 그는 유럽적인 가치
를 뒤바꾸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자신 나름대로 미래를 위한 설계, 이상을 제시한다.
그는 미래에 대하여 암울한 예언을 한 유럽 허무주의의 예언자라고 볼 수 있다.42)
 그러나 그의 허무주의는  '나와 나의 세계', 저승보다는  이승, 초월적인 가치보다는
현실적인 가치와 삶을 긍정하는 운명애(amor fati)의 사상을 담고 있다.

 


    2. 종교와 신의 부정


 니체는 인간과 그의  자유를 위해 신의 부재(부재)를 요청한다.  여기서 그의 의도는
인간존재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데 있다. 그런데 종교는 인간의 자기부정을 초래하는
것이고, 신의 생(das Leben)에 반대되는 것이고 모순되는 것이다,


 니체의 '신'개념은 초현실적인, 초지상적인,  형이상학적인 관념이나 가치를 모두 포
함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삶에 적대적인 것(das  Lebensfeindliche)이다. 니체는 생에
우호적인 것(das Lebensfreundliche)을 생에 적대적인 것에 대립시킨다. 그는 생에 우
호적인 것의 전형을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적인 예술과 삶에서 찾아냈으며, 긴 인
간성 상실의 역사를  뒤로하고 등장한 르네상스의 문화와 인간상에서  그것의 또 다른
징후를 보았다. 즉 그는 그리스의 신화,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의 비극작품속에서
생의 순수한 힘을 보았으며, 르네상스인에게서  생에 우호적인 문화의 새로운 등장 가
능성을 보고, 기대하게 되었던 것이다.43)  그리스 고대신화와 예술, 그리고 르네상스
의 예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랑,  아름다움, 지혜, 생장등은 모두 생에 즐거움
을 주고 그 성장을 돕는 것들로서 생에 우호적인 것들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적인 철학의 등장과 함께 이와 같은 순수함과 인간다움
이 상실되고 생에 적대적인 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적 위선과 도
덕적 가식이 인간의  생을 안팎에서 제한하고 억누른 결과  인간이 병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이래의 주지주의가 형이상학을 유럽역사에서 적대적인 세력
이라고 낙인 찍는다. 특히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계승한 플라톤의 이원론적인 형이상학
과 온갖 도덕적 기준으로써 삶을  제한하는 내세적이고 목적론적인 그리스도교의 교의
(Dogma)가 적대세력 중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44)


 니체에 있어서 "종교의 기원은 낯선 것으로서  인간을 놀라게 하는 힘의 극단적인 감
정에 있다." 그리고 "종교는 '인간성을 왜곡하는'(alt ration de la personalit )경우
이다."45) 종교  뿐만 아니라  도덕과 철학도 인간이  퇴폐(d cadence)이다. 종교에서
'거룩한 속임수'(die heilige L ge)는 원리적으로 행위의 목적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
서 행위의 목적은 자연목적과  도덕목적으로 나뉘고, 전자에서는 이성(Vernunft)이 볼
수 없게(unsichtbar)되고 후자에서는 법의 실현, 신에 대한 섬김이 목적으로서 나타난
다. 행위의 결과에서는 자연적 결과가 초자연적인 것으로서 "유익한"(n tlich), "해로
운"(sch tlich), "생을 촉진하는"(lebensf rdernd), "생을 감소시키는"(lebensminde-
rnd)과 같은 자연개념으로부터 전적으로  분석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46) 이러한 '거
룩한 속임수'는 다음의 기능을 갖는다. 첫째, 이 속임수는 응징하고 보답하고 신을 만
들고, 이 신은 사제들의 법전을  면밀하게 인정하고 사제들을 그의 입부리(Mundst ck)
와 위임자로서 세상에 보낸다. 둘째, 생의 저편을 만든다. 이 안에서 벌을 주는 큰 기
계가 비로소 작동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이 목적을 위해 영혼의  불멸이 설정된다. 셋
째, 선과 악이  확고히 있다는 것에 대한 의식으로서의 인간  안에 있는 양심. 양심이
사제의 지침과 일치를 이룰 것을 권고할 때  신 자신이 여기서 말한다는 것. 넷째, 모
든 자연적인 경과의 부정, 모든 발생(사건)을 도덕적으로 제약된 발생으로서 환원시키
는 것으로서 도덕. 세계를 관통하고  유일한 권세이며 모든 변회의 창조자로서의 도덕
적 작용(즉 벌과 상이라는 이념). 다섯째, 계시된 것으로서 사제의 가르침과 일치하고
이승과 저승의 삶에서 모든 구원과 행복의 조건으로서 주어진 진리.47)


 이어서 니체는 이교적인 것과 그리스도교적인  것을 구별한다. 이교적인 것은 자연적
인  것의 긍정이며  자연적인 것  안에서 죄가  없다고 느끼는  감정,  즉 자연성(das
Nat rlichkeit)이고, 그리스도교적인 것은 이와 반대로 자연적인 것의 부정, 자연적인
것에서 가치없다고 느끼는 감정, 반자연성(die Widernat rlichkeit)이다.48)


 이제 신의 사망을 선고하는 그의 절규를 들어보기로 한다. 니체가 언급하는 19세기의
신은 그리스도교와 형이상학의 신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니체는 모든 종교와 신화에
서 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제조건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긍정과 초현실
의 부정이다. 예를들면 그리스신들이  등장하는 호메로스 작품에서의 신들은 그리스도
교의 신과는 다르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 고대의 종교는  의무나 금욕 혹은 정신성(Geistigkeit)의 종교가
아니라 삶의 종교이다. 이러한 종교에서는 현존(Dasein)이 강조되고 풍요한 삶의 감정
이 제의(Cultus)를 통해서 표현된다는 것이다. 삶은 호메로스의 세계에서는 자체로 추
구될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파악된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도교적인 신은 인간을
도덕적으로 속박하는 신이다. 이승의 가치,  이승에서의 인간의 삶, 즉 힘에의 의지를
고양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교적인 신은 죽어야  한다. 신의 죽음은 다음과 같이 선포된
다. "미치광이 - 너희는 해맑은 오전에  등불을 켜들고 시장으로 달려가 계속하여 '나
는 신을 찾는다! 나는 신을 찾는다'고 외친 미친 사람에 관하여 듣지 못했느냐 - 거기
에는 신을 믿지않는 대다수 사람들이  모여서 있었으므로 그는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신이 실종되었는가?라고 한  사람이 말했다. 신이 아이처럼  길을 잃었는가?라고 다른
사람이 말했다. 혹은 신이 숨었는가? 그가 우리를 두려워 하는가? 그는 배(선)에 올랐
는가? 이주했는가? - 그들은 요란스럽게 소리지르면서 웃어댔다. 미친 사람은 그들 가
운데로 뛰어들어 그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신은 어디로갔는가?', 우리-너희와 나
-는 그를 죽여버렸다는  것을 너희에게 말하고자 한다고 그는 웨쳤다.  ... 신은 죽었
다!(Gott ist todt!)" ... 우리는  그를 죽였다!(Wir haben ihn get dtet!)49) 니체에
있어서 신의 죽음은 인간이 초인으로 고양되기 위한 선결조건이다. "너희 지고한 인간
들이여, 신 앞에서! - 그러나 이제 이  신은 죽었다 - 이러한 신은 너희의 가장 큰 위
험이었다. 신이 무덤에 누은 이래, 너희는 비로소 다시 부활했다. 이제 비로소 위대한
정오가 도래하고 지고한 인간 -주(Herr)-이 된다."50)

 

   3. 삶의 긍정, 힘에의 의지. 초인


 이승의 삶, 인간적인  삶을 강조하는 니체의 의도는 그의  저술의 여러곳에서 나타난
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성자이기보다는 어릿광대이고 싶다. ... 아마도
나는 어릿광대일 것이다. 모든 가치의  전도(Umwerthung aller Werthe) 이것이 내안에
서 살(Fleisch)과 천재(Genie)인 인간성에 대한 가장 높은 자기규정의 행위를 위한 나
의 형식(Formel)이다."51) 마찬가지 의미에서 "모든 운동은 자발적인 운동이어야 하고
새롭고, 미래적인 더욱  강한 운동이어야 한다."52) 그가 강조하는  삶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소유함과 더 소유하고자 함,  한마디로 표현하여 성장(Wachstum) - 이것이
삶자체(das Leben Selber)이다."53)  그는 삶을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와
동일시한다. 즉 "삶은 힘에의 의지이다."54)


 그는 삶의 의지를 여러 표현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너희 가장 현명한 자들이여, 강(강)이 너희의  위험과 선과 악의 종말이 아니다. 그
것은 힘에의 의지인  의지자체, - 지칠줄 모르게 생산하는  삶의 의지이다."55) "희생
(Opferung)과 봉사가 있는 곳에 주인이고저하는 의지도 있다."56) "삶이 있는 곳에 의
지가 있다: 그러나 삶에의 의지가 아닌  ... 힘에의 의지이다."57) "의도에서 나온 모
든 발생(Geschehen)은 힘을 증대하려는  의도에 환원된다."58) "모든 '목적'(Zwecke),
`목표'(Ziele), '감각'(Sinne)은 모든 발생에 부착되어 있는 한 의지인 힘에의 의지의
표현방식이며 변화(Metamorphosen)일 뿐이다. 목적을  가짐, 목표를 가짐, 의지일반은
더 강하게 되기를 원함, 성장을 원함,  또 그것에 대한 수단을 원함과 마찬가지이다."
59) "힘에의 의지는 원초적인  정서-형태(Affekt-Form)이고, 다른 모든 정서는 원초적
정서의 형성물(Ausgestaltungen)이라는 것이 나의 이론일 것이다."60)


 니체에 의하면 힘에의 의지는 다음의 경우에 나타난다고 한다.
 첫째, 피억압자들에게서, 모든 종류의 노예에  있어서 '자유를 향한 의지'로서  해방
만이 목표인 것으로  보인다.(도덕적-종교적으로:'자기자신의 양심에만 책임지는 것';
'복음적 자유' 등)


 둘째, 더욱 강하고 힘이 증대한  경우에 초강대를 향한 의지(Wille f r  bermacht)로
서 먼저 성과가 없을 경우 '정의'를 향한 의지, 즉 권리의 동등한 정도를 향하는 의지
에 제한된다.


 세째, 가장 강한 자, 가장 부유한 자, 가장 독립적인 자, 가장 용감한 자들에 있어서
는 '인류에 대한 사랑', '백성에 대한 사랑', '복음에 대한 사랑', '신인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서 나타나고 동정(Mitleid), '자기희생' 등으로 나타난다.


 또 압도함( berw ltigen),감동함,  고용함(In-seinen-Dienst-nehmen), 우리가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대량의 힘과 본능적으로 하나인 것으로 생각함:  영웅, 예언자, 체사
르, 구세주, 목자 등에서 나타난다.61)


 니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간형은 초인( bermensch)이다. 그는 초인을 다음과 같
이 이해한다. 초인은 됨됨이가 가장 착한 유형의 인간을 가리키는 말로서 '근세적' 인
간, '선량한' 인간, 그리스도교  신자와 그밖의 허무주의자들과 반대된다. 짜라투스트
라의 말을 빌리면 도덕을 말살하는  자이다.62) "초인은 나(필자주:니체)의 마음에 잊
혀지지 않고,나의 첫째 것이며 유일한 것이다."63)


 니이체는 그리스도교가 내세우는 인간상을  반대하는 동시에 근세적 인간을 비판하려
한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교적 인도주의를 극복함으로써 '인간의 극복'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고 이 극복된 인간이 바로 초인이라고 생각한다.64) 초인은 대지(Erde)의 의
미이다. 니체는 대지를 창조하는 힘, 즉 Poiesis로 생각했다. 인간의 본질은 창조하는
자유에 있다. 대지는 모든 개별적인 존재자들에게 현존을 선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
든 존재자들은 대지에서 성장한 것으로서  대지의 형성물이다. 이러한 대지의 삶이 바
로 힘에의 의지이다.  초인은 모든 저승의 꿈을 거부하고 대지로  향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자이다.65)

 

    V. 무신론에 관한 비판적 고찰

 

 이제까지 필자는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  니체의 무신론적 사상에 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우리는 이들 사상가의 무신론에  관하여 19세기라는 한 시대 상황을 염두
에 두면서 긍정적 혹은 부정적 비판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들의 종교비판에서는 '종교'와 '신'문제가 중심되는 것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
도교와 그리스도교적 신이 비판의 과녁이다. 서양 근세의 무신론은 그리스도교 문화권
에서 생겨난 무신론이다.  그러므로 근세의 모든 무신론은  그리스도교의 배경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무신론은 영국의 경험론과 18세기의 프랑스 계몽주의에 근원을
두고, 19세기의 실증주의, 물질주의에서  지속되면서 포이에르바하와, 마르크스, 니체
에 와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무신론자들이 인간의 자유,  발전을 위하여 반대하는
신은 인간을 속박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빼앗고, 인간의 소외를 가져오는 신이
었다. 종교비판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성서가 제시하는 신 및 그리스도
교의 본질과 역사적으로 이해된 신과 제도화한 교회 및 그 도덕을 구별해야 한다는 점
이다.


 포이에르바하의 종교비판은 그 근거를  인간학에 두고 있다. 포이에르바하에 의하면,
신이 모든 것이라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신이 전부이기 위해서는 인간은 가능한
대로 아무것도 아니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이해는 특히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
본진술과 맞지 않는다. 신은 인간의 경쟁자와 적대자가 아니고,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또 그의 신관념에  대한 심리학적인 설명은 사태의 진정한 본질
을 인식한 것이 아니고 객관적 실재에  대한 확증을 제시한 것도 아니다. 같은 의미에
서 포이에르바하는 그의 종교비판의 방법이  경험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믿고 있으나 실
제적으로는 종교의 본질과 가치를 사변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종교비판을 반성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종교와  신학에 대한 비판에서 우리(그리스도교와  신자들)는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자아비판의 내용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첫째, 교회와 신학이 대체로
인간을 희생으로 삼아 신을 옹호하고,  이승을 희생하여 저승을 옹호하지는 않았는지?
둘째, 이원론적인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연과 이승, 신체를 경시하는 풍조가
전체 그리스도교적 전통을 통하여 있어오지  않았는지? 셋째, 마찬가지 의미에서 인간
의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측면을 경시하지 않았는지  하는 점이다. 넷째, 신과 그의 말
씀과 행적을 신의 본질보다는 인간의 현실에 더 맞게끔 형상화하고 형식화하지 않았는
가 하는 점이다.


 이와 같은 질문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스스로 던지면서 신과 인간의 문제를 신학적
으로 깊이 통찰하고 논구해야 할 것이다.66)


 포이에르바하는 무신론의 과제가 인간을  지고의 존재로 선언하는 것이라면 마르크스
의 종교비판은 이보다 훨신 극단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와 신에
대한 신앙은 이미 시대에 뒤진, 낡아빠진  것들이다. 그의 무신론은 단순히 신을 부정
하는 이론적인 무신론이 아니라 잘못된  사회 현실을 비판하는 실천적 무신론이다. 그
는 그리스도교가 거기에서 유래한다고 하는  잘못된 세계를 비판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종교를 있게끔  한 생산관계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저승에 대한 신앙을  갖게되는 인간소외가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
다. 이와 같은 극복의 과제는 물론 철저한 혁명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마
르크스의 믿음이다. 물론 마르크스가  인간과 사회현실이 경제적으로 제약되어 있다고
주장한 것은 지당한 것이나 세계관적인 경제주의로 까지 비약한 것은 옳지않다고 평가
해야 할 것이다. 그는 학문적으로 철저한 분석가이기 보다는 이상주의적인 혁명가라고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가 종교없는 미래를 사회발전의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상정한데서도 드러난다.


 또 그의 종교비판은 이것을 통하여 국가와 사회에 대한 비판을 중개하고 왜곡된 사회
관계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는 한에서  그의 관심사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
이다.67)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은 편파성을 면할  수 없다. 그는 성서적인 신과 인간에
관한 이해,  그리스도교의 복음서에 관하여 이론적으로  진지하게 논구하지 않았으며,
교회의 역사적인 업적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또 성직자, 신학, 교회의 특정한 형태
로부터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추론해내려고 했다.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있었
던 국교나 교회의 역기능에서 이들의 본질을 규정해 내려는 오류도 범하고 있다. 마르
크스의 종교비판을 계기로 교회와 신학이  짊어지게 된 과제는 종교(특히 그리스도교)
가 현세적 지배에 봉사하지도 않으며 불의에 무관심하지 않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증명
해 보이는 것이다.68)


 니체의 무신론적인 해석은 다양하다. 특히 '신의 죽음'의 선포를 둘러싼 해석이 그렇
다. 니체도 그의 무신론을 이론적으로 증명해낸 것은 아니고 다만 주어진 것으로 전제
한 것이다. "니체는 결코 ...  종교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태생(태생)의 비판자는 아니
다."69) 그러므로 그의 종교비판은 직접적으로 당시의 유럽문화를 염두에 두고 이해되
어야할 것이다. 그의  무신론은 우선 그리스도교 비판에  기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교
비판은 그의 문화비판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적 신개념에 대한 그의 비
판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체계를 겨냥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그 체계와 제도에 대한 비판을 견디어 낼 수 있으려면
인간의 삶에 가까운 가르침과 그 구조에 있어서 인간을 위한 소명에 충실해야 할 것이
다.


 니체의 '신의  죽음'이라는 사망선고는  현대의 사신신학(Gott-ist-tot-Theologie)을
비롯한 현대무신론에 자극을 주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이와같은 선언의 의미
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논의는 물론 분분하여 한가지로 정의내리기
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니체가 인간을 드높이기 위해 신의 죽음을 선포
한 것이고, 오히려 신에 대한 깊은 동경심을 가졌으며 신없이는 인간이 고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감지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70)


 또 프리스는 '신의 죽음'을 '신에  관한 특정한 이해로부터의 결별'을 의미한다고 이
해한다.71) 독일의  가톨릭 사상가로서 하이데거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뷔테
(Welte)는 니체의 '신의 죽음'의 문제가  그의 사상에서 중심을 차지한다고 주장한다.
그 역시 비저(Biser)처럼 신의 죽음의  문제를 문화사적인 현상에서 판독하고자 한다.
즉 그는 니체의 선언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자 한다. "니체의 무신론은 결국 인간의
본질자체에 깊숙히 놓여 있다. 특히 그의 의지에 깊숙히 놓여있다: '인간이 신이 되고
자 하므로, 신이 없기를 원한다.' "72)  이와같은 의미에서 니체는 인간적인 차원, 즉
무한한 삶의 차원, 신적인 공간의  차원으로 지향할 것을 인간에게 요구한다고 뷔테는
이해하고 있다.


 뢰비트에 의하면, 니체의  철학사상이 인정하는 유일한 신은  그리스 신화의 신이다.
'신'이라는  이름으로써   니체가  가리켜  보이려고  하는   것은  자기유지와  고양
(Steigerung)을 위한 현세적인 의지인 영원히  회귀하는 삶의 세계이다.73) 가톨릭 신
학자인 드 뤼박(de Lubac)에 의하면,  니체는 '무신론자와 반그리스도교 신자'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와 문화의 예언자이며 새로운 인간상을 요청하여 관철하려는, 포이
에르바하에 정향되고 소펜하우어를 통하여  중개된 종교비판의 대표자이다. 드 뤼박은
니체의 무신론을 그의 저서명처럼 '신 없는 인도주의의 비극'이란 범주에 넣어 비판한
다.74)


 이상에서 보았듯이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  니체의 종교비판에 대한 반비판이 가능
하고,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변신론적인 논지를 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들
사상가들에 대한 더욱 깊은 연구를 통하여  건설적인 대화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무신론자의 논변은 사회와 신에 대한  신앙사이의 역사적 및 사회적 관계와 연결되어
있다. 구체적인 종교형태, 특히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역사적인 형태는 역사적인 사회
상황 및 정치상황과 밀착되어 있다.  때문에 '왕좌와 제단' 사이의 동맹관계가 있었고
왕권신수설이나 절대주의적인 국가형태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75) 그렇다고 해서 그
리스도교나 교회의 본질이 특정시대에 나타났던  이들의 외형과 동일시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신론적인  사상의 이의와 문제제기에 대하여 새로운 질
문과 답변의 방법의 찾는 일이다.

 

 

각주)

 

1) Maximillian Rast, 항목 'Atheismus', in Walter Brugger편, Philosophisches W r-
   terbuch, 28-29쪽
2) Karl L with, Von Hegel zu Nietzsche, 83-84쪽 참조
3) Alfred Kosing, Ludwig Feuerbachs materialistische Erkenntnistheorie, 310쪽.in
   Erich Thies편, Ludwig Feuerbach, 310-341
4) Feuerbach, Grunds tze der Philosophie der Zukunft, 306쪽,  42(41) in Erich T-
   hies편, Ludwig Feuerbach in Sechs B nden, 3권, 247-322
5) Feuerbach, 앞의 논문, 315쪽,  51(50)
6) Feuerbach, 앞의 논문, 322족,  66(64)
7) Feuerbach, Das Wesen der Religion, 81쪽, in Erich Thies편, Ludwig Feuerbach,
   Werke in Sechs B nden, 81-153.  포이에르바하는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
   다. "'자연'은 내게는 '정신'처럼 본질,사물,대상들을 지칭하기 위한 일반적인 말
   일 뿐이며 ... 실제적 사물에서 추상되고, 분리되고, 의인화되며 신비적인 본질이
   아니다." '의존감정'은 Schleiermacher가 한 말이다.
8) Feuerbach, Das Wesen des Christentums, 37쪽, Einleitung, 1.Kapital
9) Feuerbach, 앞의 책, 38쪽
10) Feuerbach, 앞의 책, 53,54쪽 참조
11) Feuerbach, Das Wesen der Religion, 112쪽
12) Feuerbach, 앞의 책, 53쪽, 2.Kapitel
13) Feuerbach, 앞의 책, 298쪽, 20Kapitel
14) Feuerbach, 앞의 책, 120,121쪽, 6.Kapitel
15) Feuerbach, Grunds tze der Philosophie der Zukunft, 319쪽,  56(35)
16) Feuerbach, Das Wesen des Christentums, 50쪽, 3. Kapitel
17) Feuerbach, 앞의 책, 369, 27.Kapitel
18) Feuerbach, 앞의 책, 301쪽, 21.Kapitel
19) Feuerbach, 앞의 책, 330쪽, 23.Kapitel
20) Feuerbach, Aus den Heidelberger Vorlesungen  ber das >>Wesen der Religion<<
    (1840-1849), 147, 148쪽 참조.  in Alfred Schmidt편, Ludwig Feuerbach Anthro-
    pologischer Atheismus, Ausgew hlte Schriften II, 120-150
21) Feuerbach, Das Wesen des Christentums, 146, 250, 401쪽
22) Feuerbach, 앞의 강의, 150쪽
23) K.Marx, Die Doktordissertation, 1840/41, MEW Erg nzungsband I, 305쪽
24) K.Marx, Luther als Schiedsrichter zwischen Strau  und Feuerbach(1842), MEW 1
    27쪽
25) Karl L with, Gott,Mensch und Welt in der Metaphysik von Descartes bis zu Nie
    -tzsche, 150쪽, Vandenhoeck & Ruprecht G ttingen 1967
26) K.Marx, Thesen  ber Feuerbach, MEW 3, 7쪽
27) Hans K ng, Existiert Gott? 262쪽 dtv M nchen 1981
28) K.Marx, Zur Krit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378쪽, MEW 1, 378-391쪽
29) K.Marx, 위의 논문, 378쪽.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은 마르크스가 창안한
    것이 아니고, 일찌기 Heine와 B.Bauer가 사용했다. Karl-Heinz Weger편, Religio-
    nskritik von der Aufkl rung bis zur Gegenwart, 220쪽
30) K.Marx, 위의 논문,  379쪽
31) K.Marx, 위의 논문,  379쪽
32) K.Marx, 앞의 논문, 379, 391쪽
33) K.Marx, Deutsche Ideologie, 348쪽, Siegfried Landshut편, Die Fr h-Schriften
    ,339-485
34) K.Marx, Deutsche Ideologie, 349쪽.
35) K.Marx,  konomisch-philosopische Manuskripte(1844), MEW EB I, 537쪽
36) K.Marx, Das Kapital, 1권, 94쪽, MEW 23
37) Hans K ng, Existiert Gott? 270쪽
38) K.Marx,Zur Judenfrage, 353쪽, MEW 1(1839-1844), 347-377쪽
39) K.Marx, Zur Judenfrage, 356쪽
40) 최준성, 니이체에 있어서의 허무주의 문제, 25-26쪽, 철학17집(1982), 한국철학회
41) Eugen Fink, Nietzsches Philosophie, Kohlhammer, 8쪽 참조, Stuttgart Berlin
    Mainz 1973(제3쇄)
42) Nietzsche, Der Wille zur Macht, 44쪽
43) 차하순, 정동호 공저, 부르크하르트와 니이체, 110-111쪽,서강대학교 출판부,1986
44) 차하순, 정동호 공저, 앞의 책, 112-113쪽 참조.
    같은 의미에서 니이체는 그리스도교를 '백성을 위한 플라톤주의'(Platonismus f r
    -s, Volk)라고 부른다. Jenseits von Gut und B se, Vorrede, 12쪽. S mtliche We
    -rke, 5권
45) Nietzsche, Der Wille zur Macht, 100쪽, Verlag Kr ner Stuttgart 1964
46) Nietzsche, 앞의 책, 106쪽
47) Nietzsche, 앞의 책, 106-107쪽
48) Nietzsche, 앞의 책, 111쪽
49) Nietzsche, Die fr liche Wissenschaft(drittes Buch 123-125),480-481쪽,  125,
    3권, 573쪽,  343, S mtliche Werke, 3권
50) Nietzsche, Also Sprach Zarathustra IV, Vom h heren Menschen, 357쪽, S mtl-
    iche Werke 4권
51) Nietzsche, Ecce homo, Warum ich im Schicksal bin, 365쪽, S mtliche Werke 6권
52) Nietzsche, Der Wille zur Macht, Zucht und Z chtung, 661쪽,  1007
53) Nietzsche, 앞의 책, Der europ ische Nihilismus, 91쪽,  125
54) Nietzsche, 앞의 책, Kritik der bisherigen h chsten Werte, 155쪽,  254
55) Nietzsche, Also Sprach Zarathustra, Von der Selbst- berwindung, 147쪽
56) Nietzsche, 앞의 책, 148쪽
57) Nietzsche, 앞의 책, 149쪽
58) Nietzsche, Der Wille zur Macht, Prinzip einer neuen Wertsetzung, 443쪽
59) Nietzsche, 앞의 책, 451쪽
60) Nietzsche, 앞의 책, Prinzip einer neuen Wertsetzung, 465쪽,  688
61) Nietzsche, 앞의 책, 516-517쪽,  776
62) Nietzsche, Ecce homo, Warum ich so gute B cher schreibe 1-2, S mtliche Wer-
    ke, 6권, 300쪽
63) Nietzsche, Also sprach Zaratustra, Vom h heren Menschen 1-3, 357쪽
64) K.L with, Von Hegel zu Nietzsche, 348쪽
65) Eugen Fink, Nietzsches Philosophie, 68, 77, 78쪽 참조
66) Hans K ng, Existiert Gott? 247-249쪽 참조
67) Peter Ehlen, Marxismus als Weltanschauung, 169쪽, Verlag Olzog M nchen Wien
    1982
68) Hans K ng, 앞의 책, 295-297 참조
69) Eugen Biser, Gottsucher oder Antichrist? Nietzsches provokative Kritik des
    Christentums, 33쪽, Verlag Otto M ller, Salzburg 1982
70) Emerich Coreth/Peter Ehlen/Josef Schmidt, Philosophie des 19.Jahrhunderts,1-
    40쪽, Kohlhammer Stuttgart Berlin K ln Mainz 1984
71) Heinrich Fries, Abschied von Gott? 81쪽, Herder. Freiburg. Basel. Wien 1968
72) Klaus Kienzler, "Nietzsche im christlichen Denken - am Beispiel Bernhard We-
    ltes", 405쪽, Theologie und Philosophie, 66.Jahrgang, Heft 3, 398-410쪽,Her-
    der Freiburg.Basel.Wien 1991
73) Karl L with, Nietzsches Vollendung des Atheismus, 14쪽. in Hans Steffen편,N-
    ietzsche, Werke und Wirkungen, 7-18쪽, Vandenh ck & Ruprecht G ttingen 1974
74) Ulrich Willers, "Aut Zarathustra aut Christus"(1.Teil), 252-253쪽 참조,Theo-
    logie und Philosophie, 60 Jahrgang, Heft 2(1985), 239-256쪽
75) Emerich Coreth, Weltverst ndnis und Gottesfrage, 255쪽, E.Coreth, J.B.Lotz편
    Atheismus kritisch betrachtet, 244-268쪽, Erich Wewer Verlag M nchen 1971

 

 

                                참고문헌

 

 1. Biser,Eugen: Gottsucher oder Antichrist? Nietzsches provokative Kritik des
    Christentums, Verlag Otto M ller, Salzburg 1982
 2. Brugger,Walter편: Philosophisches W rterbuch, Verlag Herder Freiburg Basel
    Wien 1967 (제13쇄)
 3. Coreth,Emerich/Lotz,J.B.편: Atheismus kritisch betrachtet, Verlag Erich We-
    wer M nchen 1971
 4. Coreth,Emerich/Ehlen, Peter/Schmidt, Josef편: Philosophie des 19.Jahrhunde-
    rts, Verlag Kohlhammer Stuttgart Berlin K ln Mainz 1984
 5. Ehlen,Peter: Marxismus als Weltanschauung, Olzog M nchen Wien 1982
 6. Feurbach,Ludwig: Das Wesen des Christentums, Philipp Reclam Jun. Stuttgart
    1971
 7. Schmidt,Alfred편, Ludwig Feuerbach Anthropologischer Atheismus, Ausgew hlte
    Schriften II권. Ullstein Frankfurt a.M.Wien Berlin 1985
 8. Thies,Erich 편, Ludwig Feuerbach in Sechs B nden, Suhrkamp Frankfurt a.M.
    1975
 9. Fink,Eugen: Nietzsches Philosophie, Kohlhammer Stuttgart Berlin Mainz 1973
    (제 3쇄)
10. Fries,Heinrich: Abschied von Gott? dtv M nchen 1981
11. K ng,Hans: Existiert Gott? dtv M nchen 1981
12. Landschut,Siegfried편: Die Fr schriften, Stuttgart 1971
13. L with,Karl: Gott, Mensch und Welt in der Metaphysik von Descartes bis zu
    Nietzsche, Vandenhoeck & Ruprecht G ttingen 1967
14. L with,Karl: Von Hegel zu Nietzsche, S.Fischer Frankfurt a.M.1969
15. Karl Marx Friedrich Engels Werke(Institut f r Marxismus-Leninismus beim ZK
    der SED 편),Dietz Verlag Berlin
16. Nietzsche,Friedrich: Also sprach Zarathustra, Kr ner Stuttgart 1964
17. Friedrich Nietzsche S mtliche Werke, Kritische Studienausgabe(Giorgio Colli
    und Mazzino Montinari편). dtv/de Gruyter M nchen/Berlin/New York 1980
18. Steffen,Hans 편: Nietzsche, Werke und Wirkungen, Vandenhoeck & Ruprecht G -
    ttingen 1974
19. Weger,Karl-Heinz 편, Religionkritik von der Aufkl rung bis zur Gegenwart,
    Herder Freiburg i.Br. 1979
20. Theologie und Philosophie, 60.Jahrgang, Heft2, Herder Freiburg Basel Wien 19
    85
21. Theologie und Philosophie, 66.Jahrgang, Heft3, Herder Freiburg Basel Wien 19
    91
22. 차하순, 정동호 공저: 부르크하르트와 니이체, 서강대학교 출판부 1986
23. 한국철학회편, 철학 17집(1982)

 


----------------------------------------------

 

Bürgerlicher Realismus (시민적 사실주의)
Poetischer Realismus (시적 사실주의)
(1850-1890)
 

 1. 개념

  • "사실주의"라는 명칭에서 나타나듯 사실주의에서는 19세기에 "현실"이라고 이해한 "관찰가능하고, 감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인간과 자연의 현실 die beobachtbare, durch die Sinne wahrzunehmende Wirklichkeit des Menschen und der Natur"이 문제가 된다.
  • 현실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비현실이라고 간주되는 "종교"와 같은 모든 초자연적인 것을 의도적으로 배제시킨다.
  • 예:
Charles Darwin (1809-1882):
  • 다윈의 진화론에 의하면 자연이란 종(種)들의 투쟁에 의해 특징지워지며, 적자생존의 원칙에 의해 지배된다.
  •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으로서 자연사(진화)의 산물이다.
  • 이러한 관념은 자연과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라는 기독교 교리에 모순이 된다.

Ludwig Feuerbach (1804-1872):

  • 종교에는 현실적 내용이 없으며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Karl Marx (1818-1883):

  • 철학, 종교, 법, 기타 정신세계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적(사실적) 이해의 은폐적 표현이다.

물질주의 Materialismus:

  • 물질, 객관적이며 의식의 외부에 존재하는 현실을 원초적이며,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철학적 방향
  • 이러한 관념은 19세기의 역사적 사회적 발전과 부합하는 것으로 물질과 경제적인 것이 점차 중요시되었다.

    사회적 배경

    • 산업화와 자본주의(제국주의)의 진행
    • 지배계급으로서 시민계급의 부상, 노동자계급의 등장, 사회적 갈등, 노동자운동
    • 기술의 발전

     

    2. 문학사조로서의 사실주의

    • 사실주의는 고전주의 및 낭만주의와의 맥락하에서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KLASSIK

    ROMANTIK

    사실주의

    소재

    일상적인 소재는 저급장르만이 취급 (예: 희극)

    현실과 멀리 떨어진 세계

    일상 인간문제의 진지한 취급

    인물

    대부분 잘 알려지거나 유형적인 인물로서 장소나 시간처럼 전통에 의해 주어진다.

    특정 사회 역사적 맥락속에 있는 임의적인 개인

    묘사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통과 특정 문학형태, 특수한 언어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한다.

    이해하기 쉬운 묘사

    (예: 산문)

     

    3. 사실주의의 주된 장르는 소설이다

    • 소설은 문학적 사실주의에 가장 적합한 장르이다. 프랑스와 러시아 사실주의 작가들이 전형이 되었다.
    • Stendhal (Henri Beyle) (1783-1842) "Rot und Schwarz"
    • Honoré de Balzac (1799-1850) "La Comédie humaine" (Romanzyklus, u.a. "Vater Goriot")
    • Gustave Flaubert (1821-1880) "Madame Bovary", "Éducation sentimentale"
    • Fjodor Dostojewski (1821-1881) "Der Idiot", "Die Brüder Karamasow"
    • Leo Tolstoj (1828-1910) "Anna Karenina", "Krieg und Frieden"

     

    4. 독일의 시적 사실주의 (Der poetische Realismus)

    • 시적 사실주의는 유럽 사실주의의 독일적 변형이다.
    • 시적 "poetisch"이란 부가어는 사실주의의 특성과 모순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나 이는 독일의 사실주의가 프랑스의 사실주의에 비해 덜 "사실적"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수식어이다. 독일의 사실주의자들은 의식적으로 낭만주의 및 가차없는 사실주의와 거리를 두었다.
    • 독일 사실주의의 이와같은 독자적 발전은 19세기 독일의 특별한 상황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 고전주의의 전형 (Goethe, Schiller) 은 후대의 작가세대들에게 규범으로서의 영향을 미쳤다.
    • 1871년까지 독일은 작은 국가들로 분할되어 있었고 산업화가 뒤늦게 시작되었으며, 따라서
    • 지역적이고 농촌·전원적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사실주의의 대표적 작가

    • Theodor Storm (1817-1888) Novellen (z.B."Der Schimmelreiter")
    • Gottfried Keller (1819-1890) "Der grüne Heinrich" (Roman), Novellen (z.B. "Kleider machen Leute")
    • Theodor Fontane (1819-1898) "Effi Briest", "Der Stechlin", "Irrungen Wirrungen", "Frau Jenny Treibel"
    • Wilhelm Raabe (1831-1910) "Der Hungerpastor"

     

    5. 시적 사실주의의 희곡

    • 희곡은 자연주의에 들어서서 비로서 사회적 현실의 비참함을 소재로 발견하였다.
    • Friedrich Hebbel (1813-1863, "Maria Magdalena")에게 있어서, 사회적 문제의 묘사보다는 "비극 Tragödie"과 같은 전통적인 장르의 부활이 문제였다.
    • 사실주의 작가로 간주될 수 있는 Georg Büchner (1813-1837: "Dantons Tod", "Woyzeck")의 작품들은 여러면에서 예외적인 성격을 지닌다.

     

    6. 시적 사실주의의 시문학

    • 시문학은 문학의 세 기본 장르중에서 가장 주관적인 장르로서 사실주의의 미학적 원칙에 가장 부합하지 않는 장르이다. 따라서 시문학에서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형(Goethe, Schiller)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진다.
    • 19세기 후반 산업사회의 발전에 따라 자연과 자아의 조화는 사라지고 체험의 대상도 인간 내면의 영혼으로부터 외부 물질세계의 사물로 바뀌게 되었다.
    • 시적 사실주의의 시문학에서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기는 하지만 분위기시와 체험시는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 시인은 주관적 내면세계로부터 객관적 사물의 세계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 사물시 Dinggedicht)
    • 사물시는 비개인적 시선으로 대상을 냉철하게 관찰하고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묘사하였다.
    • 조각작품이나 일상생활의 사물 또는 동물을 대상으로 언어를 통하여 그 대상을 재창조하면서 그 사물의 본질과 내재하는 존재의 법칙 또는 상징적 의미를 추출하고자 하였다.
    • 시적 사실주의 문학에서 사물시의 등장은 객관화의 시도라는 점을 제외하면 자연주의의 대두와 같은 동시대의 문예사조와는 전혀 공통점이 없으며,
    • 오랜 전통의 분위기시, 체험시, 참여시, 관념시를 창조적으로 극복하였고, 정치적 참여시와도 달랐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학사적 의미를 지닌다.
    • 사실주의 시문학은 장르의 성격상 산문에서처럼 시대현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는 없었지만 현실적 시대감각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 주제면에서 사랑과 자연, 기쁨과 슬픔, 동경과 회상 등 종전보다 소박한 세속적 감정을 많이 노래하였고,
    • 물질문명의 발달에 의한 개인의 고독도 새로운 의미로 반추되고 있다.
    • 형식면에서 시의 행과 연의 구조, 모티브와 리듬이 단순해졌고, 일상어의 과감한 도입이 두드러진다.
    • 산문화 경향도 두드러져 시적 진술이 비교적 용이하게 전달되고 의미가 명료하다.
    • 시의 형태로는 가요풍의 서정시와 담시가 많으며, 정형시를 벗어나 자유시로 발전하는 과도기적 현상이 뚜렷하다.

     

    7. 대표적 시인

    • Conrad Ferdinand Meyer, Friedrich Hebbel, Theodor Storm, Gottfried Keller, Theodor Fontane, Wilhelm Raabe, Wilhelm Busch, Freidrich Nietzsche, Detlev von Liliencron

     

    <자료 2: 사실주의의 이해>

     

    "사실주의"라는 개념은 18세기말 처음 독일에 등장한 후 19세기 중엽에 문학 토론의 핵심어로 부각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문학과 현실의 관계"라는 문제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오늘날 "사실주의"라는 개념은 두가지 방향에서 사용되고 있다. 첫째는 영화, 회화, 사진, 문학 등과 같이 "사실에의 경도 Hinwendung zur Realität", "현실에의 충실 Wirklichkeitstreue"로 특징지워지는 직품들을 지칭하는 사실주의적 양식유형에 사용된다. 또한편으로는 독일에서 비더마이어와 3월전기에 뒤이은 문학사조, 즉 1848년의 좌절된 혁명에서 시작하여 19세기말 자연주의가 등장하기까지의 시기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19세기 중반 이후 사실주의자들에 의한 "사실(Realität)에 충실한 묘사"에의 요구는 문학에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져왔다. 그러나 예술에 있어서 "현실"의 묘사에 대한 요구 자체는 사실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자연의 모방 (Mimesis)"이라는 개념하에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이러한 요구가 있었고, 르네상스시대에 유럽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재발견한 이래 "자연의 모방"이라는 문제가 다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사실주의"라는 개념에서 새로운 것은 무엇이며, 전래의 Mimesis라는 개념과 구별되는 점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사실주의자들이 이해하는 새로운 현실개념은 인간사회에 연관된다는 것이며,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적 상황"이 묘사의 중심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테마로 다룬 사회적 현실이라는 것은 시민계급의 사회와 인간들이었으며, 소위 제4계급에 속하는 하층 서민계급은 자연주의에 의해서 비로서 문학의 테마로 다루어지게 된다.

     

    초기 사실주의자들에게서는 시민계급(Bürgertum)의 경제적 상황의 묘사가 주된 관심사였으며,

    독일 사실주의 소설들은 주로 시민계급의 근면성과 도덕성을 칭송하고 있다. 예를 들어 Gustav Freytag은 그의 소설 Soll und Haben (1855)에서 독일민족의 근면성을 Motto로 내세우고 있다.

    사실주의 문학의 수용자는 시민계급이며, 대부분의 작가들은 19세기에 중요성이 부각된 잡지(Zeitschriften) 에 글을 실었는데 문학의 중요한 매체 역할을 한 잡지는 다음과 같다.

    Blätter Deutsche Rundschau, Nord und Süd, Über Land und Meer, Westermanns Illustrierte Deutsche Monatshefte, Die Gartenlaube

    문학비평과 문학 강령 부문에서는 Die GrenzbotenDas Deutsche Museum이라는 두 개의 잡지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Gustav FreytagOtto Ludwig (Zwischen Himmel und Erde, 1856) 같은 작가들이 그들의 소설에서 보여준 시민계급의 경제적 상황에 대한 관심의 이유는 다양하다. 정치적으로 국가자유주의 운동성향을 지닌 작가들은 귀족계급에 저항하여 시민계급의 힘과 시민계급의 정치적 능력 및 역량을 기술하려고 하였다. 이들의 소설에서는 시민계급의 경제적 활동이 도덕적인 요구와 결부되어 착하고 도덕적이며, 능력있는 시민들은 잘살게 되고, 비도덕적인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파산한다. 즉 선은 항상 승리하고 악은 파멸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사실주의의 중요한  작가들에게서 Gottfried Keller를 제외하고는 도덕적 경제이데올로기는 커다란 역할을 하지 못한다. KellerDer grüne Heinrich (1854­55/1880)에서 Martin Salander (1886)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소설에서 이러한 도덕적 이데올로기를 유지하고 있으나 다른 작가들, 즉 Theodor Fontane, Theodor Storm, Wilhelm Raabe, Conrad Ferdinand Meyer 등에 있어서는 시민계급의 경제생활은 중요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시민계급의 경제생활이 사실주의 전체를 특징지우는 요소는 아닐지라도 문학이 사회적 현실을 묘사하게 되는 선도적 기능을 한 것은 사실이다.

     

    사실주의의 전원소설(Dorfgeschichte)은 축소판 사회적 현실의 묘사로서 마을이라는 작은 공간을 배경으로 사회적 갈등의 문제성을 묘사하는 장르이다. 그러나 전원소설은19세기의 현실에서 점차 의미가 퇴색되어가는 사회형태를 묘사하고 있다. 전원소설의 대표적 작가는 Gottfried Keller (Romeo und Julia auf dem Dorfe, Kleider machen Leute, Die Leute von Seldwyla, 1856/1874), Berthold Auerbach (Schwarzwälder Dorfgeschichten, 1843­1854), Jeremias Gotthelf (Uli der Knecht, 1840, Die schwarze Spinne, 1842), Ludwig Anzengruber (Der Sternsteinhof, 1883) 등이다.

     

    사실주의의 또 다른 중요한 문학 경향은 역사소설(das historische Erzählen)로서 이 장르에 속하는 소위 교수소설(Professorenroman)의 대표적 작가는 Felix Dahn, Josef Victor von Scheffel (Der Trompeter von Säckingen, 1854)과 Gustav Freytag (Die Ahnen, 1872­1880)을 들 수 있다.

    이들 소설은 역사적 지식과 문화사적 지식을 동원한 장르로서 역사기술과 소설을 혼합한 형태이다. 예를 들어 동로마의 멸망을 다룬 Felix DahnEin Kampf um Rom (1876)이 사실주의의 대표적인 역사소설이다.

     

    오늘날 사실주의 작가로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Theodor Fontane, Theodor Storm, Wilhelm Raabe, Conrad Ferdinand Meyer, 등은 위에서 언급한 사실주의의 경향에는 속하지 않는다. 즉 Conrad Ferdiand Meyer의 소설(u. a. Das Amulett, 1873, Jürg Jenatsch, 1874, Der Heilige, 1880, Die Versuchung des Pescara, 1887)은 모두 역사소설이지만 역사에의 접근이 교수소설과는 전혀 다르다.

     

    Meyer에게 있어서는 역사적 지식의 전개가 문제가 아니라 당시대의 정치적 상황, 권력을 잡기 위한 음모속에 개인이 어떻게 연루되고 있는가가 문제이며, 도덕적인 원칙 때문에 음모에 가담하거나 불의와 타협하지 못해 결국 파멸해야만 하는 세상물정에 어두운 주인공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Theodor Fontane의 소설들 (u. a. Schach von Wuthenow, 1883, Irrungen Wirrungen, 1888, Frau Jenny Treibel, 1892, Effi Briest, 1895)은 대부분 소위 베를린 사회소설(»Berliner Gesellschaftsroman«)이라는 개념으로 분류되는데 사회의 규범에서 일탈하는 인물들이 주인공이다. Fontane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의 갈등은 성(Erotik)적인 자기실현의 욕구와 이로 인한 (대부분 남성 주인공의) 인간적 존엄성의 상실이며, 대부분 자살로 이어진다.

     

    Wilhelm Raabe는 그의 소설(Der Hungerpastor, 1862, Abu Telfan oder die Heimkehr vom Mondgebirge, 1867, Horaker, 1876, Das Odfeld, 1889)에서 사회의 아웃사이더를 다루고 있다. 사회에 잘 적응하는 속물적인 인물을 화자로 등장하며 (Die Chronik der Sperlingsgasse, 1857, Stopfkuchen, 1891, Die Akten des Vogelsangs, 1893), 아웃사이더인 인물이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Theodor Storm은 초기 작품에서 (u. a. Immensee, 1849) 평온하며 조화로운 세상을 그리고 있으나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염세주의가 지배하며, 비극적으로 파멸하는 주인공을 묘사하고 있다. (Aquis submersus, 1875, Zur Chronik von Grieshuus, 1884, Der Schimmelreiter, 1888).

     

    Friedrich Hebbel 은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유일한 극작가로서 시민비극(das bürgerliche Trauerspiel) Maria Magdalene (1844)이 소시민적 환경의 사실주의적 특징들을 보여주나 그의 대부분 역사극은 독일 이상주의, 특히 헤겔의 철학에 대한 논쟁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즉 개인의 의지와 사회/역사의 상반된 힘 사이의 모순에서 결국 파멸하고마는 개인을 그리고 있다.

     

    Gottfried Keller를 제외한 사실주의의 대표적 작가들은 초기 사실주의에서 시민계급의 경제생활을 다루고 있는 것과는 달리, 주인공들의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가 사회의 인습과 주위 인간들의 음모에 의해 좌절되는 잔인한 세상을 그리고 있다.

     

    http://cafe.naver.com/modernth

    ---------------------------------------------

     

     

    종교와 철학
     

         차  례

    I.  서론
    II. 포이에르바하
      1.종교발생기원에 대한 비판적 설명
      2.원의(Wansch)의 투사와 모상으로서의 신
      3.인간소외와 무신론
    III.마르크스의 실천적 무신론
      1.종교비판
      2.종교적 소외와 극복
      3.인간해방과 종교
    IV. 니체의 '허무주의적' 윤리학
      1.허무주의
      2.종교와 신의 부정
      3.삶의 긍정, 힘에의 의지, 초인
    V.  무신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I. 서 론

     본 논문에서 필자는 서양근세의 무신론을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 1804-1872),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니체(Friedrich Nietzsche, 1884-1900)의 사상을 중심으로 논구하고자 한다.
      신과 무신론에 관한 논의는 `신'개념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내용으로 전개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는 종교비판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된다.


     무신론(Atheismus)은 말그대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론을 그 내용으로 삼고있다. 우리는 무신론의 여러 양상을 다음과 같이 구별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실천적 무신론자는 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으나 자신의 삶의 과정을 통하여 부정한다. 둘째, 이론적 무신자는 자신의 판단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셋째, 극단적인 무신론은 모든 정신적이고 초감각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물질주의(Materialismus)와 실증주의(Positivismus)이다. 넷째, 범신론(Pantheismus)은 세계를 초월하는 인격적 신을 믿지 않는다. 경험적 세계와 일치하지 않는 절대적인 어떤 것(예; 도덕법, 아름다움의 이상등)을 인정함으로써 신에 대한 신앙의 싹을 지니고 있다. 다신론(Polytheismus)이나 이신론(Deismus)은 무신론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이론적 무신론자를 좀 더 자세히 분류하면 이론적으로 부정적인 무신론자와 이론적으로 긍정적인 무신론자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신에 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경우이고, 후자는 신의 존재가 충분히 증명되지 않아 의심하는 경우이거나 신에 관한 명확한 진술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이론적으로 긍정적인 무신론자는 신에 관한 명확한 진술은 경험에 국한된 인간의 인식을 넘어선다거나 (불가지론의 경우) 혹은 주관적으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요청적인 무신론자(니체, 니콜라이 하르트만)는 신에 의해 인간적인 가치 혹은 윤리적 가치가 위험하게 된다고 생각하여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1)


     이 논문에서는 종교비판가들이 신의 부재와 종교의 근거없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제시하는 근거들이 무엇인가를 추적해보고 그들의 논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일반적으로 유신론자들, 특히 그리스도교신자들은 인간과 세계의 기원, 인생의 의미등이 신의 존재를 통해서만 해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종교비판 논자들은 초월적 경험의 기본형태를 설명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인간 자신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른바 신의 현재성은 인간적인 동경과 원의(願意)의 투사(Projektion)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필자는 신의 존재여부에 대한 이와 같은 상반된 견해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논변에 있어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없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도 밝혀보고자 한다.


     무신론자도 자신과 인간에게 이승의 삶과 사회현실에 철저한 책임을 지고 헌신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 논구의 대상으로 삼는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 니체는 종교없는 인도주의, 신없는 인도주의를 주장하면서 참다운 인간성의 회복, 새로운 사회질서의 확립, 새로운 도덕체계로의 가치전환을 요구한다. 필자는 이들 사상가들의 사상에 대한 긍정적 및 부정적 평가를 통하여 서양 근세의 대표적인 무신론의 의미를 조명하고자 한다.

     

     

      II. 포이에르바하

     

     포이에르바하는 근세 무신론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와 니체의 그것처럼 철저한 `세계성'(Weltlichkeit)의 정신을 구현한다. 그에게는 저승보다는 이승의 삶이 중요하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모든 종교와 독일관념론에 대한 비판을 예시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헤겔의 관념론에 비판을 가한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당시 헤겔학파는 헤겔사상의 해석을 둘러싸고 견해차이로 인하여 우파진영과 좌파진영으로 갈라져 있었다. 우파(예컨대, Rosenkranz, Haym, Erdmann, Fischer등)는 현실적인 것(das Wirkliche)만이 이성적인 것(das Vern nftige)이라고 주장했고, 좌파(Feuerbach, Ruge, Bauer, Stirner, Marx, Kierkegaard)는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2)


     헤겔의 관념론적인 철학을 전복시키려는 포이에르바하의 시도는 그의 물질주의적인 인식론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그의 유물론적인 인식론은 일종의 유물론적 세계관, 즉 자연을 포함하여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 인간학적인 뮤룰론(Materialismus)에 의거한다. 그는 이와같이 인간학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관념론 일반과 종교에 대한 비판을 가했던 것이다.3)


     이와 같은 의미에서 포이에르바하는 신학에 반대한다. 그는 신학을 철학에서 해소시키려 한다. 결과적으로 사상가로서 포이에르바하는 신학에서 시작하여 사변적인 관념론을 거쳐 감각주의적, 자연주의적인 인간학으로 귀착한 셈이다. 이러한 인간학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드러난다.

      " `외적인' 사물만이 감각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감각을 통하여
        만 주어진다. - 인간은 스스로에게 감각의 객체(Sinnobjekt)로서 대상이다"4)

    또 그가 말하는 새로운 철학은 인간중심의 철학이다.

     

      " 새로운 철학은 자체만을 위한 이성진리인 신(Gottheit)에 의거하지 않고, 전체
        적 인간의 진리인 신에 의거한다. ... 인간적인 것만이 참된 것이고 현실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것만이 이성적인 것이고, 인간이 이성의 척도이기
        때문이다."5)

     

     그에게 새로운 철학은 인간의, 인간을 위한 것이고 종교를 대신하는 것이다.

      " 새로운 철학은 ... 인간의, 인간을 위한 것이고 종교를 대신하는 것이다. ...
        그것은 종교의 자리에 들어서고 자체로 종교의 본질이며 진실로 종교자체이다.
      "6)

     

     이렇게 해서 그의 인간학에서는 헤겔의 절대자(das Absolute)의 자리를 인간이 차지하게 된다. 그의 종교비판,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교와 신학에 대한 비판은 이와 같은 기본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1. 종교발생기원에 대한 비판적 설명


     포이에르바하의 종교비판의 내용은 주로 [그리스도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 1841), [종교의 본질](das Wesen der Religion, 1845), 하이델베르크의 시청에서 학생들을 청중으로 하여 행한 [종교본질에 대한 강의](Vorlesung  ber das Wesen der Religion, 1848/49 겨울학기)에 담겨있다.


     포이에르바하는 당시에 영향을 미쳤던 종교비판, 예컨대 프랑스 계몽주의(Holbach, La Mettrie, Diderot)의 종교비판을 넘어 종교는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견해를 표명한다. 그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 종교가 인간의 첫째이며 간접적인 자기인식이며 개인과 인류역사에서 철학에 앞선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의존감정(das Abh ngigkeitsgef hl)이 종교의 근거(토대)이다. 그런데 "인간이 의존해있고 의존해있다고 느끼는 이러한 의존감정의 대상은 근원적으로는 자연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자연은 모든 종교의 역사가 충분히 증명하는 것처럼 종교의 첫째이며 근원적인 대상이다."7)


     그는 종교가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기원하는가를 물음으로써 종교가 무엇인가를 밝히려고 한다. 먼저 종교는 동물과는 다른 인간의 본질에 의거한다. 동물은 종교를 갖고 있지않다. 인간은 특유의 의식(das Bewu tsein)을 갖고 있는 점에서도 동물과 구별된다는 것이다.엄밀한 의미에서 의식은 어떤 본질(Wesen)에 그 유(Gattung), 그 본성(Wesenheit)이 대상인 경우에만 있다고 한다. 그런데 동물은 개체로서 존재하지 유로서 대상이 아니다. 때문에 동물에게는 의식이 없다고 한다.8)


     따라서 "동물과 달리 인간의 본질은 종교의 근거일 뿐만 아니라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종교는 무한자에 대한 의식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 인간자신의 무한한 본질에 대한 인간의 의식이외에 어떤 다른 것일 수 없다."9)


     이러한 인간의 의식은 동물의 본능과는 달리 다른 사물들, 특히 자신의 본질을 대상으로 삼는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는 의식의 무한성을 갖는 인간의 본성에 그 근거를 둔다는 것이다. 종교의 기원문제와 관련하여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인간자신의 측면을 강조하는데 비해 [종교의 본질]은 자연의 측면을 부각시킨다. 물론 이 두 측면은 서로 보완하고 있다.


     포이에르바하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의 여러 대목에서 종교에 관한 여러 민족들의 민속지학적인 예를 들고있다. 자연을 신앙대상으로 하는 여러 민족의 자연종교 뿐만 아니라 이른바 고등종교등에 이르는 진리의 과정에서 인간은 비로소 종교가 깊은 자기인식의 과정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반대관계가 착각(Illusion)이라는 것, 즉 그것은 인간본질과 개인 사이의 반대관계일 뿐이라는 것,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대상과 내용은 전적으로 인간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10)

     

     

     

      2. 원의(Wunsch)의 투사와 모상으로서의 신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의 내용을 인간학적 및 심리학적 유래에서 설명한다. 다시말하면 종교와 신관념은 인간의 원의(願意)와 인간의 본질이 투사됨으로써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인간이 생각하는대로의 신이다. "원의는 원천이다. 즉 종교의 본질자체이다. 신들의 본질은 원의의 본질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11)

     

    이와같은 의미에서 "신에 대한 의식은 인간의 자기의식이고 신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자기인식이다. ... 신은 인간의 내면이 드러난 것이고 자신이 진술된 것(das ausgesprochene Selbst des Menschen)이다." 또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자신 안에서 찾기 이전에 먼저 그것을 자기 밖으로 옮겨 놓는다."12)

     

    같은 의미로 "신은 인간의 다른 자아이며, 잃어버린 다른 반쪽이다. 인간은 신안에서 스스로를 보충하며 신안에서만이 완전한 인간이다. ... 신은 인간에게 필요하며 자신의 본질에 속한다."13)


     그래서 "종교는 자체에서 인간적인 본질을 반사하는 것(die Spiegelung)" 이다. "신은 인간의 거울'인 것이다.14)

     

    그에 의하면 종교 뿐만 아니라 예술, 철학 혹은 학문도 진정한 인간본질이 나타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15)

     

     

     

      3. 인간소외  와 무신론


    포이에르바하에 있어서 무신론적인 주장의 비판적인 화살은 모든 종교,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교를 겨냥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가 가장 세련된 교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간이 철저히 소외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신들과 신의 거짓된 정체를 폭로하고 비신화화 하고자 한다. 그의 무신론은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 신학이 인간에게서 빼앗아 간 것을 인간에게 다시 돌려 주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종교는 인간의 자기자신과의 분열이다. 인간은 신을 그에 대립된 본질로 설정한다." "신과 인간의 이러한 반대관계, 분열은 ... 인간의 고유한 본질과의 분열이다."16)

     

    마찬가지로 그는 "신앙이 인간의 내면에서 , 즉 자기자신과 분열하게 하여 마침내는 내면에서도 그렇게 만든다"17)

     

    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종교일반에 기인하는 인간의 소외는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더욱 철저하게 된다.그에 의하면, 만일 종교가 신학이 된다면, 원래 자의적이 아니고 해롭지 않은 신의 인간으로부터의 분리가 고의적이고 노련한 구별로 된다. 이러한 구별은 이미 의식안에 들어온 일치를 다시 의식에서 치워버릴 목적만을 지닌다"18)

    고 주장한다.

     


     앞에서 거듭하여 언급했듯이 신의 존재는 인간의 원리와 본질이 투사되어 만들어진 상상의 산물이다. 여기서 신은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초월적'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신론은 필연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포이에르바하는 신이 어떻게 이 세계를 창조했을까 하는 질문의답을 통하여 무신론적인 자신의 확신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세계는 물리학의 대상이므로 규정되어 있지 않고, 비물질적인, 재료가 없는활동이라는 상상에는 모순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모순은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기본적인 상상을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위와 같은 질문을 할 경우 인간은 무신론, 유물론, 자연주의에 귀착하게 된다는 것이다.19)


     그에 있어서 무신론은 사유와 환상의 본질(das Gedanken- und Phantasiewesen)을 현실적인 삶과 본질에 희생으로 바쳐야 하는 것이므로,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무신론은 자연과 인류에게 의미를 주고 유신론이 빼앗아 간 존엄성을 되돌려 준다고 한다.20)

     

    무신론은 인간으로부터 추상된 신의 자리에 인간의 현실적이고 참된 본질을 대치시키는 것이다. 되풀이하여 주장되듯이 인간의 본질이 인간의 가장 높은 본질이고, 인간이 인간에게 신(Homo homini Deus)21)

     

    이므로 인간 이외의 다른 경배의 대상은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강의의 끝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여러분을 신의 친구에서 인간의 친구로, 신자에서 사유하는 자로, 기도하는 자에서 노동자로, 저승의 후보에서 이승의 학생으로, 그리스도교 신자에서 ... 인간, 전적인 인간으로 만들 과제를 " 떠맡으라고22)

     

     

     

      III. 마르크스의 실천적 무신론

     

     마르크스는 독일 트리어(Trier)의 유대 가정에서 태어나서 중등학교 시절에는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다가 대학생으로서 베르린에서 공부하던 중 헤겔학파 사상가들과 교유하면서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의 무신론적 사상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데모크리투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에서도 싹트고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포이에르바하의 인간학의 영향을 받아 발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종교적 의식은 인간의 고유가치를 감소시키므로, 이러한 멍에을 떨쳐버려야 한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그는 에피쿠로스가 "가장 위대한 그리스의 계몽가"23)

     

    라고 주장한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그는 "진리와 자유에 이르기 위해 Feuer(불)-bach(내) 이외에 어떤 다른 길이 없다. 포이에르바하는 현대의 연옥(Purgatorium)이다"24)

    라고 주장한다.


     맑스의 종교비판은 그의 사회비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속박과 예속으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이다. 그에게는 우선 인간을 자연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해방된 사회의 건설이 중요하다. 때문에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가 미래의 계급없는 사회, 해방된 인류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자연에 대한 지배, 기술(Technik)과 산업화에서 자연을 이용하는 것은 모든 공산사회에 필수적인 전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종교는 불완전한 사회적 관계에서는 주관적으로는 필요한 것일지 모르나 경제적 및 사회적 관계들을 변혁하는데는 걸림돌이 된다. 그런데 기술의 진보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독립하는 정도에 따라 종교는 점차로 필요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종교가 더 이상 어떤 기능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해방되자마자 자연에 의존하는 인간의 보호와 위안역할을 하는 종교기능은 사라진다. 또 마찬가지 의미에서 계몽된 인간은 이러한 위안을 필요로 하지 않게된다. 결국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적인 세계 사회를 설계함으로써 신의 부정(Negation Gottes)으로서의 무신론을 성취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25)

     

     

     

       1. 종교비판


     마르크스는 종교비판의 주안점과 논거에서 대체로 헤겔좌파의 사상가들(Strau , Ruge, Edgar, Bauer, Stirner, 특히 Feuerbach)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에 있어서 종교는 비이성적인 세계의 산물이며 지성적인 계몽으로써만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선결문제는 세계자체의 변화이다. 이와 관련하여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러므로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심정'(das religi se Gem t)자체가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과 그가 분석하는 추상적 인간이 어떤 특정한 사회형태에 속한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한다."(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7)26)

     

    여기서 그는 철학과 철학자들의 사회변혁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만 상이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일일 것이다."(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11)


     포이에르바하는 인간해방의 문제와 관련하여 사회개조를 무엇보다도 계몽, 의식의 변화, 종교적, 도덕적 강제로 부터의 자유를 통하여 성취하고자 한다. 그 방안으로 그는 인간애로써 이기주의를 극복하라고 요구한다. 이와 달리 마르크스는 인간해방은 사회문제로서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여기서 해방은 단순히 이기주의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경제적 억압과 사회계급의 문제이다. 그는 사회혁명을 통하여 철저한 사회개조를 이루고자 한다.27)


     마르크스에 있어서 "종교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이어야 한다. 그 이유는 종교가 인간을 근본적으로 소외시키는 원인이며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종교가 인간을 만들지 않고, 인간이 종교를 만든다. 종교는 아직 자기성취를 못했거나 자기자신을 잃어버린 인간의 자의식이며 자기감정이다. 이때 "인간은 세계밖에서 웅크리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 그것은 인간의 세계, 국가, 사회(Soziet t)이다. 이 국가, 이 사회가 거꾸로된 세계의식인 종교를 생산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거꾸로된 세계(eine verkehrte Welt)이기 때문이다.28)


     또 그가 이해하는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심정이다. ...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종교적 비참은 ... 현실적인 비참의 표현이며 현실적인 비참에 대한 항의이다."29)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종교비판은 시초에 그것의 후광(Heiligenschein)이 종교인 통곡의 계곡에 대한 비판이다."30)

     

    또 그에게 철학의 과제는, 인간적 자기소외의 거룩한 형상(das Heiligengestalt)이 가면벗겨진 후, 거룩하지 않은 모습으로 있는 자기소외들의 가면을 벗기는 일이다. 그래서 하늘에 대한 비판은 땅에 대한 비판으로 바뀌고, 종교비판은 법비판으로, 신학에 대한 비판은 정치비판으로 바뀐다는 것이다."31)


     포이에르바하에서처럼 마르크스에 있어서도 인간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비판은 인간이 최고존재라는 학설과 함께 끝난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유일하게 실제적으로 가능한 독일의 해방은 인간을 최고의 존재로 선언하는 이론의 입장에 선 해방이다."32)

     

     

     

       2. 종교적 소외와 극복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종교는 상부구조에 속하고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의존한다. 다시말하면 법률, 종교, 예술, 학문등과 같은 상부구조는 경제적 토대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념, 표상, 의식의 생산은 먼저 직접적으로 물질적인 활동과 인간의 물질적 고통, 현실적인 삶의 언어와 얽혀 있다." "인간은 그의 표상과 이념등의 생산자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작용하는 인간은 그의 생산력의 특정한 발전을 통하여 조건지워져 있다. ... 의식은 의식된 존재이외의 어떤 다른 것일 수 없고, 인간의 현실적인 생활과정이다."33)

     

    마찬가지 의미에서 도덕, 종교, 형이상학, 그밖의 이데올로기들과 이들에 상응하는 의식형태들은 거짓된 자립성(Schein der Selbst ndigkeit)을 더 오래 보유하지 못한다." 그래서 "의식이 삶이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의식을 규정한다."34)


     마르크스는 모든 형태의 소외(예컨대, 종교적, 철학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소외) 중에서 경제적 소외가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경제영역과 관련되는 개념중에서 중요한 것은 생산력, 생산관계, 생산수단의 사유재 등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다. 소외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사유재 문제이다. 사유재가 소외의 근원적 원인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삶의 점유Aneignung)인 사유재의 적극적인 지양은 모든 소외를 적극적으로 지양하는 것이고, 종교, 가정, 국가 등에서의 인간을 그의 인간적인, 즉 사회적인 존재로 복귀시키는 것이다. 종교적 소외는 그 자체로 인간내면의 의식영역에서만 생기지만 경제적 소외는 현실적인 삶의 소외이다. - 떄문에 소외의 지양은 양편을 포함한다."35)


     그에 의하면  경제적 소외가 상품물신주의(Waren-Fetischismus)에서 지속하는 한 종교적 소외도 계속된다. 경제적,사회적 발전정도에 따라 여러가지 상이한 종교적 소외의 형태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종교적 소외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마르크스에 의하면 오직 새로운 생산양식에 의거하여 인간관계가 이성적으로 될 경우에만 종교적 소외가 없어진다. 즉 "실제적인 일상적 삶의 관계들이 매일 투명하고 이성적인 인간상호관계와 자연과의 관계를 나타내자 마자 일반적으로 현실적인 세계의 종교적 반사는 사라질 수 있다. 사회적 생활과정, 즉 물질적 생산과정의 형태는 자유롭게 사회를 형성하는 인간들의 산물로서 그들의 의식적이고 계획에 따르는 감독아래 있을 때만 그 신비적인 안개의 베일을 벗는다."36)


     그에 의하면 맑고 이성적인 생산관계는 노동분업의 지양과 사유재의 포기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또 계속 늘어가는 자본이 소수의 자본가에게 축적되고 집중됨에 따라 프롤레타리아가 늘어나고 비참해진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부조리는 공산주의 혁명을 통하여 제거되어야 하고, 계급없는 사회라는 완성된 공산주의의 사회형태가 오기까지 과도단계로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실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완성된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노동분업과 경제적 소외가 없어지고, 지배계급의 억압기구인 국가, 민족(국가)간의 갈등관계, 위안수단으로서의 종교도 소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종교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폭력으로써 제거할 필요가 없게된다. 그 이유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종교에 대한 필요성이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적인 새로운 사회질서가 도입되면서 종교의식은 저절로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37)

     

     

     

       3. 인간해방과 종교


     이 주제와 관련하여 필자는 마르크스의 [유대인 문제](Zur Judenfrage)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유대인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의 글은 청년 헤겔학파를 주도하던 바우어(Bruno Bauer)의 두개의 논문에 관하여 언급하고 비판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이 논문에서 마르크스는 한편으로는 바우어의 비판에 동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대하면서 유대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유대교에 대한 포이에르바하의 견해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가 종교비판에 사용한 방법을 국가와 정치비판에 적용시킨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가 헤겔의 사상을 유물론적으로 전환시킨 것을 비판하지는 않으나 형이상학적인 취급방법과 절대정신의 자리에 영원한 인간적 본성을 대치시킨 점을 비난한다.


     마르크스는 종교비판, 특히 유대인 비판에서 포이에르바하와 바우어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마르크스의 독일유대인에 대한 비판은 지금 다루려고 하는 [유대인 문제]와 [신성가족](Die Heilige Familie,1844-45)에 실려있다.


     이글에서는 정치적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의 반대관계, 실제적인 국가시민(Staatsb rger)이 되기 위해 필요한 해방의 문제도 일부 다루어지고, 헤겔의 국가법에 대한 비판](Kritik des Hegelschen Staartsrecht, 1842-1844)에서도 다루어진다. [유대인 문제]에서의 주된 종교비판적인 사상은 종교와 종교형태가 다양한 사회형태와 마찬가지로 시대의 제약을 받는다는 주장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적인 해방'과 단순히 `정치적인 해방'을 대립시킨다. 바우어에 의하면 "유대인, 그리도교 신자, 일반적으로 종교적 인간의 정치적 해방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일반적으로 종교로부터의 국가의 해방이다."38)

     

    그러나 마르크스에 있어서 종교로부터의 국가의 해방은 현실적인 인간의 종교로부터의 해방을 뜻하지 않는다. 그는 정치적 해방과 인간적 해방을 구별한다. 또 그는 국가를 종교로부터 분리시켜 생각한다. 바우어에 의하면 유대인은 철저하게 유대교로부터 해방되지 않고는 진정한 의미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반하여 마르크스는, 유대인은 완전하게, 모순없이 유대교로부터 절연하지 않고서는 정치적으로 해방될 수 없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물론 정치적 해방은 큰 진보이나 인간적 해방의 마지막 형태가 아니고 이제까지 있어온 세계질서 안에서 인간적 해방의 마지막 형태가 아니다." "인간은 종교를 공법으로부터 사법(das Privatrecht)으로 추방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종교에서 해방된다." 또 "종교는 이기주의 영역이며 만인적대관계(bellum omnium contra omnes)의 영역인 시민사회의 정신으로 되어 버렸다."39)

     

    맑스가 비판적으로 지적하는 시민적인 민주사회(b rgerliche Demokratie)의 본질적인 성격을 우리는 대략 세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 사회에서의 정치적 해방은 계급사회의 성격을 띠고 있고 시민사회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정치적 해방은 발전하는 자본주의적 경제의 모든 이익과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에서 결과하는 불평등을 존속하게 하므로 불충분하지만 봉건제에 비하면 중요한 발전을 이룬 것이다.


     셋째, 정치적 해방은 역사적으로 볼 때 사회적 억압상태를 없애지 못한다. 그 이유는 부르죠아계급이 봉건제적 과거에 대해, 그리고 무소유자에 대해 자본주의적 계급관계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부르죠아계급이 봉건제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실현한 정치적 해방은 모든 소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적 해방의 한 단계일뿐이다. 인간적 해방은 사회주의에서만 완전히 실현될 수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바우어는 유대인의 해방문제를 순수히 종교적인 문제로 바꾸어 버린다.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방식을 전복시키려고 한다. 해방의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부정적인 사회적 요소가 극복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적인 해방만이 이기주의와 사유재를 폐기할 수 있다. 이와같은 보편적인 인간해방은 철저한 혁명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IV. 니체의 '허무주의적' 윤리학

     

     철학사적으로 살펴보면 19세기말경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생철학'(Lebensphilosophie)이라고 불리는 철학사조가 있었다. 이 철학적 전성기에 속하는 사상가로서 우리는 니체를 포함하여 쇼펜하우어(Schopenhauer), 딜타이(Dilthey), 짐멜(Simmel), 베르그송(Bergson), 클라게스(Klages),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set)를 들 수 있다. 이 사조에서는 소크라테스이래 서구철학사에서 부각되었던 이성적인 인간상이 아니라 감정,열정,기분,충동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인간상이 강조된다.


     쇼펜하우어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은 니체의 무신론은 포이에르바하와 마르크스의 그것과는 다르다. 포이에르바하가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을 강조하고 마르크스가 인류의 평등의 실현을 설파하는데 비하면 그의 무신론은 이기주의적이라고 할만큼 편협한 데가 있다. 그는 사르트르(J.P.Sartre)와 까뮈(A.Camus)처럼 신이 인간의 자유와 개인적인 자기발전을 제약하고 방해한다고 생각하여 '신의 죽음'을 선포한 무신론자였다.


     이제 필자는 그의 초기저술인 [즐거운 학문](1882),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이후), [힘에의 의지](그가 죽은후 1906년에 간행됨)를 중심으로 그의 무신론적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1. 허무주의(Nihilismus)


     '허무주의'라고 번역되는 독일어의 Nihilismus는 라틴어의 어원 'Nihilum'에서 유래하며 '없음'(無)을 뜻한다. 허무주의는 존재를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무'로 해소시킨다. 허무주의의 일반적인 특징은 회의주의적인 사유방식이 과격화하여 마침내는 절대부정의 입장을 취하는데 있다. 즉 실재,신앙,도덕등을 부정하는 태도이다. 온갖 질서, 이상이 부정되지만, 이것을 대신할만한 새로운 것이 생기지 않은 상태, 말하자면 무정부 상태이다.


     또 허무주의에서는 절대적인 존재나 진리, 어떤 가치자체도 부정된다고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허무주의를 다음과 같이 여러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존재론적인 허무주의는 실체적인 존재의 실재성을 부정한다.


     둘째, 인식론적인 허무주의는 객관적 진리의 인식가능성을 부정한다. 따라서 사물의 본질이나 실재의 근거는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다. 절대회의론(서양 고대그리스의 Gorgias같은 사람이 회의론의 대표적 인물)이며 불가지론(Agnostizismus)이다.


     셋째, 종교적 허무주의는 신과 신성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서양에서는 기독교적으로 해석되는 초월적 신의 부정을 뜻한다.


     넷째, 윤리적 허무주의는 인간행위의 기준이 되는 도덕적 규범이나 의무등의 가치체계가 합리적인 논쟁으로서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그 객관적인 타당성과 구속력을 부정한다.40)


     니체자신은 허무주의의 의미를 "최고의 가치가 몰가치화한다는 것, 목적이 결여되어 있다. '왜'에 대한 대답이 없다"라고 규정한다.(Der Wille zur Macht,  2). 이와 관련하여 비관주의(Pessimismus)는 허무주의 전형태(Vorform)이다.(위의 저술, 9) 또 허무주의는 '영겁회귀'와 관련된다. "있는 그대로의 현존재(Dasein)는 의미와 목적이 없이, 그러나 무로 향한 종점이 없이(ohne Finale ins Nichts) 피할 수 없이 회귀한다. 즉 이것은 (필자첨자) '영겁회귀'(die ewige Wiederkehr)이다."41)


     이와 같은 맥락에서 니체는 전승된 서구의 철학 뿐만 아니라 도덕과 종교도 비판한다. 그래서 그의 비판은 포괄적인 문화비판의 형태로서 등장한다. 그는 유럽적인 가치를 뒤바꾸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자신 나름대로 미래를 위한 설계, 이상을 제시한다. 그는 미래에 대하여 암울한 예언을 한 유럽 허무주의의 예언자라고 볼 수 있다.42)


     그러나 그의 허무주의는 '나와 나의 세계', 저승보다는 이승, 초월적인 가치보다는 현실적인 가치와 삶을 긍정하는 운명애(amor fati)의 사상을 담고 있다.

     

     

     

        2. 종교와 신의 부정


     니체는 인간과 그의 자유를 위해 신의 부재(不在)를 요청한다. 여기서 그의 의도는 인간존재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데 있다. 그런데 종교는 인간의 자기부정을 초래하는 것이고, 신의 생(das Leben)에 반대되는 것이고 모순되는 것이다,


     니체의 '신'개념은 초현실적인, 초지상적인, 형이상학적인 관념이나 가치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삶에 적대적인 것(das Lebensfeindliche)이다. 니체는 생에 우호적인 것(das Lebensfreundliche)을 생에 적대적인 것에 대립시킨다. 그는 생에 우호적인 것의 전형을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적인 예술과 삶에서 찾아냈으며, 긴 인간성 상실의 역사를 뒤로하고 등장한 르네상스의 문화와 인간상에서 그것의 또 다른 징후를 보았다. 즉 그는 그리스의 신화,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의 비극작품속에서 생의 순수한 힘을 보았으며, 르네상스인에게서 생에 우호적인 문화의 새로운 등장 가능성을 보고, 기대하게 되었던 것이다.43) 그리스 고대신화와 예술, 그리고 르네상스의 예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랑, 아름다움, 지혜, 생장등은 모두 생에 즐거움을 주고 그 성장을 돕는 것들로서 생에 우호적인 것들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적인 철학의 등장과 함께 이와 같은 순수함과 인간다움이 상실되고 생에 적대적인 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적 위선과 도덕적 가식이 인간의 생을 안팎에서 제한하고 억누른 결과 인간이 병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이래의 주지주의가 형이상학을 유럽역사에서 적대적인 세력이라고 낙인 찍는다. 특히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계승한 플라톤의 이원론적인 형이상학과 온갖 도덕적 기준으로써 삶을 제한하는 내세적이고 목적론적인 그리스도교의 교의(Dogma)가 적대세력 중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44)


     니체에 있어서 "종교의 기원은 낯선 것으로서 인간을 놀라게 하는 힘의 극단적인 감정에 있다." 그리고 "종교는 '인간성을 왜곡하는'(alt ration de la personalit ) 경우이다."45)

     

    종교 뿐만 아니라 도덕과 철학도 인간이 퇴폐(d cadence)이다. 종교에서 '거룩한 속임수'(die heilige L ge)는 원리적으로 행위의 목적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 행위의 목적은 자연목적과 도덕목적으로 나뉘고, 전자에서는 이성(Vernunft)이 볼 수 없게(unsichtbar)되고 후자에서는 법의 실현, 신에 대한 섬김이 목적으로서 나타난다. 행위의 결과에서는 자연적 결과가 초자연적인 것으로서 "유익한"(n tlich), "해로운"(sch tlich), "생을 촉진하는"(lebensf rdernd), "생을 감소시키는"(lebensminde- rnd)과 같은 자연개념으로부터 전적으로 분석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46)

     

    이러한 '거룩한 속임수'는 다음의 기능을 갖는다. 첫째, 이 속임수는 응징하고 보답하고 신을 만들고, 이 신은 사제들의 법전을 면밀하게 인정하고 사제들을 그의 입부리(Mundst ck)와 위임자로서 세상에 보낸다. 둘째, 생의 저편을 만든다. 이 안에서 벌을 주는 큰 기계가 비로소 작동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이 목적을 위해 영혼의 불멸이 설정된다. 셋째, 선과 악이 확고히 있다는 것에 대한 의식으로서의 인간 안에 있는 양심. 양심이 사제의 지침과 일치를 이룰 것을 권고할 때 신 자신이 여기서 말한다는 것. 넷째, 모든 자연적인 경과의 부정, 모든 발생(사건)을 도덕적으로 제약된 발생으로서 환원시키는 것으로서 도덕. 세계를 관통하고 유일한 권세이며 모든 변회의 창조자로서의 도덕적 작용(즉 벌과 상이라는 이념). 다섯째, 계시된 것으로서 사제의 가르침과 일치하고 이승과 저승의 삶에서 모든 구원과 행복의 조건으로서 주어진 진리.47)


     이어서 니체는 이교적인 것과 그리스도교적인 것을 구별한다. 이교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의 긍정이며 자연적인 것 안에서 죄가 없다고 느끼는 감정, 즉 자연성(das Nat rlichkeit)이고, 그리스도교적인 것은 이와 반대로 자연적인 것의 부정, 자연적인 것에서 가치없다고 느끼는 감정, 반자연성(die Widernat rlichkeit)이다.48)


     이제 신의 사망을 선고하는 그의 절규를 들어보기로 한다. 니체가 언급하는 19세기의 신은 그리스도교와 형이상학의 신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니체는 모든 종교와 신화에서 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제조건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긍정과 초현실의 부정이다. 예를들면 그리스신들이 등장하는 호메로스 작품에서의 신들은 그리스도교의 신과는 다르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 고대의 종교는 의무나 금욕 혹은 정신성(Geistigkeit)의 종교가 아니라 삶의 종교이다. 이러한 종교에서는 현존(Dasein)이 강조되고 풍요한 삶의 감정이 제의(Cultus)를 통해서 표현된다는 것이다. 삶은 호메로스의 세계에서는 자체로 추구될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파악된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도교적인 신은 인간을 도덕적으로 속박하는 신이다. 이승의 가치, 이승에서의 인간의 삶, 즉 힘에의 의지를 고양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교적인 신은 죽어야 한다. 신의 죽음은 다음과 같이 선포된다.

     

    "미치광이 - 너희는 해맑은 오전에 등불을 켜들고 시장으로 달려가 계속하여 '나는 신을 찾는다! 나는 신을 찾는다'고 외친 미친 사람에 관하여 듣지 못했느냐 - 거기에는 신을 믿지않는 대다수 사람들이 모여서 있었으므로 그는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신이 실종되었는가?라고 한 사람이 말했다. 신이 아이처럼 길을 잃었는가?라고 다른 사람이 말했다. 혹은 신이 숨었는가? 그가 우리를 두려워 하는가? 그는 배(船)에 올랐는가? 이주했는가? - 그들은 요란스럽게 소리지르면서 웃어댔다. 미친 사람은 그들 가운데로 뛰어들어 그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신은 어디로갔는가?', 우리-너희와 나-는 그를 죽여버렸다는 것을 너희에게 말하고자 한다고 그는 웨쳤다. ... 신은 죽었다!(Gott ist todt!)" ... 우리는 그를 죽였다!(Wir haben ihn get dtet!)49)

     

    니체에 있어서 신의 죽음은 인간이 초인으로 고양되기 위한 선결조건이다. "너희 지고한 인간들이여, 신 앞에서! - 그러나 이제 이 신은 죽었다 - 이러한 신은 너희의 가장 큰 위험이었다. 신이 무덤에 누은 이래, 너희는 비로소 다시 부활했다. 이제 비로소 위대한  정오가 도래하고 지고한 인간 -주(Herr)-이 된다."50)

     

     

     

       3. 삶의 긍정, 힘에의 의지. 초인


     이승의 삶, 인간적인 삶을 강조하는 니체의 의도는 그의 저술의 여러곳에서 나타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성자이기보다는 어릿광대이고 싶다. ... 아마도 나는 어릿광대일 것이다. 모든 가치의 전도(Umwerthung aller Werthe) 이것이 내안에서 살(Fleisch)과 천재(Genie)인 인간성에 대한 가장 높은 자기규정의 행위를 위한 나의 형식(Formel)이다."51)

     

    마찬가지 의미에서 "모든 운동은 자발적인 운동이어야 하고 새롭고, 미래적인 더욱 강한 운동이어야 한다."52)

     

    그가 강조하는 삶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소유함과 더 소유하고자 함, 한마디로 표현하여 성장(Wachstum) - 이것이 삶자체(das Leben Selber)이다."53)

     

    그는 삶을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와 동일시한다. 즉 "삶은 힘에의 의지이다."54)


     그는 삶의 의지를 여러 표현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너희 가장 현명한 자들이여, 강(江)이 너희의 위험과 선과 악의 종말이 아니다. 그것은 힘에의 의지인 의지자체, - 지칠줄 모르게 생산하는 삶의 의지이다."55)

     

    "희생(Opferung)과 봉사가 있는 곳에 주인이고저하는 의지도 있다."56)

     

    "삶이 있는 곳에 의지가 있다: 그러나 삶에의 의지가 아닌  ... 힘에의 의지이다."57)

     

    "의도에서 나온 모든 발생(Geschehen)은 힘을 증대하려는 의도에 환원된다."58)

     

    "모든 '목적'(Zwecke), `목표'(Ziele), '감각'(Sinne)은 모든 발생에 부착되어 있는 한 의지인 힘에의 의지의 표현방식이며 변화(Metamorphosen)일 뿐이다. 목적을 가짐, 목표를 가짐, 의지일반은 더 강하게 되기를 원함, 성장을 원함, 또 그것에 대한 수단을 원함과 마찬가지이다."59)

     

    "힘에의 의지는 원초적인 정서-형태(Affekt-Form)이고, 다른 모든 정서는 원초적 정서의 형성물(Ausgestaltungen)이라는 것이 나의 이론일 것이다."60)


     니체에 의하면 힘에의 의지는 다음의 경우에 나타난다고 한다.
     첫째, 피억압자들에게서, 모든 종류의 노예에 있어서 '자유를 향한 의지'로서  해방만이 목표인 것으로 보인다.(도덕적-종교적으로:'자기자신의 양심에만 책임지는 것';'복음적 자유' 등)


     둘째, 더욱 강하고 힘이 증대한 경우에 초강대를 향한 의지(Wille f r  bermacht)로서 먼저 성과가 없을 경우 '정의'를 향한 의지, 즉 권리의 동등한 정도를 향하는 의지에 제한된다.


     세째, 가장 강한 자, 가장 부유한 자, 가장 독립적인 자, 가장 용감한 자들에 있어서는 '인류에 대한 사랑', '백성에 대한 사랑', '복음에 대한 사랑', '신인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서 나타나고 동정(Mitleid), '자기희생' 등으로 나타난다.


     또 압도함( berw ltigen),감동함, 고용함(In-seinen-Dienst-nehmen), 우리가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대량의 힘과 본능적으로 하나인 것으로 생각함: 영웅, 예언자, 체사르, 구세주, 목자 등에서 나타난다.61)
     니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간형은 초인( bermensch)이다. 그는 초인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초인은 됨됨이가 가장 착한 유형의 인간을 가리키는 말로서 '근세적' 인간, '선량한' 인간, 그리스도교 신자와 그밖의 허무주의자들과 반대된다. 짜라투스트라의 말을 빌리면 도덕을 말살하는 자이다.62)

     

    "초인은 나(필자주:니체)의 마음에 잊혀지지 않고,나의 첫째 것이며 유일한 것이다."63)


     니이체는 그리스도교가 내세우는 인간상을 반대하는 동시에 근세적 인간을 비판하려 한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교적 인도주의를 극복함으로써 '인간의 극복'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고 이 극복된 인간이 바로 초인이라고 생각한다.64)

     

    초인은 대지(Erde)의 의미이다. 니체는 대지를 창조하는 힘, 즉 Poiesis로 생각했다. 인간의 본질은 창조하는 자유에 있다. 대지는 모든 개별적인 존재자들에게 현존을 선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존재자들은 대지에서 성장한 것으로서 대지의 형성물이다. 이러한 대지의 삶이 바로 힘에의 의지이다. 초인은 모든 저승의 꿈을 거부하고 대지로 향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자이다.65)

     

     

     

        V. 무신론에 관한 비판적 고찰

     

     이제까지 필자는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 니체의 무신론적 사상에 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우리는 이들 사상가의 무신론에 관하여 19세기라는 한 시대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긍정적 혹은 부정적 비판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들의 종교비판에서는 '종교'와 '신'문제가 중심되는 것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적 신이 비판의 과녁이다. 서양 근세의 무신론은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 생겨난 무신론이다. 그러므로 근세의 모든 무신론은 그리스도교의 배경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무신론은 영국의 경험론과 18세기의 프랑스 계몽주의에 근원을 두고, 19세기의 실증주의, 물질주의에서 지속되면서 포이에르바하와, 마르크스, 니체에 와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무신론자들이 인간의 자유, 발전을 위하여 반대하는 신은 인간을 속박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빼앗고, 인간의 소외를 가져오는 신이었다. 종교비판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성서가 제시하는 신 및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역사적으로 이해된 신과 제도화한 교회 및 그 도덕을 구별해야 한다는 점이다.

     


     포이에르바하의 종교비판은 그 근거를 인간학에 두고 있다. 포이에르바하에 의하면, 신이 모든 것이라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신이 전부이기 위해서는 인간은 가능한대로 아무것도 아니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이해는 특히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진술과 맞지 않는다. 신은 인간의 경쟁자와 적대자가 아니고,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또 그의 신관념에 대한 심리학적인 설명은 사태의 진정한 본질을 인식한 것이 아니고 객관적 실재에 대한 확증을 제시한 것도 아니다. 같은 의미에서 포이에르바하는 그의 종교비판의 방법이 경험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믿고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종교의 본질과 가치를 사변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종교비판을 반성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종교와 신학에

    대한 비판에서 우리(그리스도교와 신자들)는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자아비판의 내용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첫째, 교회와 신학이 대체로 인간을 희생으로 삼아 신을 옹호하고, 이승을 희생하여 저승을 옹호하지는 않았는지? 둘째, 이원론적인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연과 이승, 신체를 경시하는 풍조가 전체 그리스도교적 전통을 통하여 있어오지 않았는지? 셋째, 마찬가지 의미에서 인간의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측면을 경시하지 않았는지 하는 점이다. 넷째, 신과 그의 말씀과 행적을 신의 본질보다는 인간의 현실에 더 맞게끔 형상화하고 형식화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이와 같은 질문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스스로 던지면서 신과 인간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깊이 통찰하고 논구해야 할 것이다.66)


     포이에르바하는 무신론의 과제가 인간을 지고의 존재로 선언하는 것이라면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은 이보다 훨신 극단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와 신에 대한 신앙은 이미 시대에 뒤진, 낡아빠진 것들이다. 그의 무신론은 단순히 신을 부정하는 이론적인 무신론이 아니라 잘못된 사회 현실을 비판하는 실천적 무신론이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거기에서 유래한다고 하는 잘못된 세계를 비판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종교를 있게끔 한 생산관계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저승에 대한 신앙을 갖게되는 인간소외가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극복의 과제는 물론 철저한 혁명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믿음이다. 물론 마르크스가 인간과 사회현실이 경제적으로 제약되어 있다고 주장한 것은 지당한 것이나 세계관적인 경제주의로 까지 비약한 것은 옳지않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는 학문적으로 철저한 분석가이기 보다는 이상주의적인 혁명가라고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가 종교없는 미래를 사회발전의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상정한데서도 드러난다.


     또 그의 종교비판은 이것을 통하여 국가와 사회에 대한 비판을 중개하고 왜곡된 사회관계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는 한에서 그의 관심사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67)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은 편파성을 면할 수 없다. 그는 성서적인 신과 인간에 관한 이해, 그리스도교의 복음서에 관하여 이론적으로 진지하게 논구하지 않았으며, 교회의 역사적인 업적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또 성직자, 신학, 교회의 특정한 형태로부터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추론해내려고 했다.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있었던 국교나 교회의 역기능에서 이들의 본질을 규정해 내려는 오류도 범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을 계기로 교회와 신학이 짊어지게 된 과제는 종교(특히 그리스도교)가 현세적 지배에 봉사하지도 않으며 불의에 무관심하지 않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68)


     니체의 무신론적인 해석은 다양하다. 특히 '신의 죽음'의 선포를 둘러싼 해석이 그렇다. 니체도 그의 무신론을 이론적으로 증명해낸 것은 아니고 다만 주어진 것으로 전제한 것이다. "니체는 결코 ... 종교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태생(胎生)의 비판자는 아니다."69)

     

    그러므로 그의 종교비판은 직접적으로 당시의 유럽문화를 염두에 두고 이해되어야할 것이다. 그의 무신론은 우선 그리스도교 비판에 기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교 비판은 그의 문화비판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적 신개념에 대한 그의 비판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체계를 겨냥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그 체계와 제도에 대한 비판을 견디어 낼 수 있으려면 인간의 삶에 가까운 가르침과 그 구조에 있어서 인간을 위한 소명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니체의 '신의 죽음'이라는 사망선고는 현대의 死神神學(Gott-ist-tot-Theologie)을 비롯한 현대무신론에 자극을 주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이와같은 선언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논의는 물론 분분하여 한가지로 정의내리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니체가 인간을 드높이기 위해 신의 죽음을 선포한 것이고, 오히려 신에 대한 깊은 동경심을 가졌으며 신없이는 인간이 고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감지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70)


     또 프리스는 '신의 죽음'을 '신에 관한 특정한 이해로부터의 결별'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71)

     

    독일의 가톨릭 사상가로서 하이데거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뷀테(Welte)는 니체의 '신의 죽음'의 문제가 그의 사상에서 중심을 차지한다고 주장한다. 그 역시 비저(Biser)처럼 신의 죽음의 문제를 문화사적인 현상에서 판독하고자 한다. 즉 그는 니체의 선언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자 한다. "니체의 무신론은 결국 인간의 본질자체에 깊숙히 놓여 있다. 특히 그의 의지에 깊숙히 놓여있다: '인간이 신이 되고자 하므로, 신이 없기를 원한다.' "72)

     

    이와같은 의미에서 니체는 인간적인 차원, 즉 무한한 삶의 차원, 신적인 공간의 차원으로 지향할 것을 인간에게 요구한다고 뷀테는 이해하고 있다.


     뢰비트에 의하면, 니체의 철학사상이 인정하는 유일한 신은 그리스 신화의 신이다. '신'이라는 이름으로써 니체가 가리켜 보이려고 하는 것은 자기유지와 고양(Steigerung)을 위한 현세적인 의지인 영원히 회귀하는 삶의 세계이다.73)

     

    가톨릭 신학자인 드 뤼박(de Lubac)에 의하면, 니체는 '무신론자와 반그리스도교 신자'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와 문화의 예언자이며 새로운 인간상을 요청하여 관철하려는, 포이에르바하에 정향되고 소펜하우어를 통하여 중개된 종교비판의 대표자이다. 드 뤼박은 니체의 무신론을 그의 저서명처럼 '신 없는 인도주의의 비극'이란 범주에 넣어 비판한다.74)


     이상에서 보았듯이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 니체의 종교비판에 대한 반비판이 가능하고,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변신론적인 논지를 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들 사상가들에 대한 더욱 깊은 연구를 통하여건설적인 대화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무신론자의 논변은 사회와 신에 대한 신앙사이의 역사적 및 사회적 관계와 연결되어 있다. 구체적인 종교형태, 특히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역사적인 형태는 역사적인 사회상황 및 정치상황과 밀착되어 있다. 때문에 '왕좌와 제단' 사이의 동맹관계가 있었고 왕권신수설이나 절대주의적인 국가형태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75)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나 교회의 본질이 특정시대에 나타났던 이들의 외형과 동일시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신론적인 사상의 이의와 문제제기에 대하여 새로운 질문과 답변의 방법의 찾는 일이다.

     

     

     

    각주)

    1) Maximillian Rast, 항목 'Atheismus', in Walter Brugger편, Philosophisches W r-
       terbuch, 28-29쪽
    2) Karl L with, Von Hegel zu Nietzsche, 83-84쪽 참조
    3) Alfred Kosing, Ludwig Feuerbachs materialistische Erkenntnistheorie, 310쪽.in
       Erich Thies편, Ludwig Feuerbach, 310-341
    4) Feuerbach, Grunds tze der Philosophie der Zukunft, 306쪽,  42(41) in Erich T-
       hies편, Ludwig Feuerbach in Sechs B nden, 3권, 247-322
    5) Feuerbach, 앞의 논문, 315쪽,  51(50)
    6) Feuerbach, 앞의 논문, 322족,  66(64)
    7) Feuerbach, Das Wesen der Religion, 81쪽, in Erich Thies편, Ludwig Feuerbach,
       Werke in Sechs B nden, 81-153.  포이에르바하는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
       다. "'자연'은 내게는 '정신'처럼 본질,사물,대상들을 지칭하기 위한 일반적인 말
       일 뿐이며 ... 실제적 사물에서 추상되고, 분리되고, 의인화되며 신비적인 본질이
       아니다." '의존감정'은 Schleiermacher가 한 말이다.
    8) Feuerbach, Das Wesen des Christentums, 37쪽, Einleitung, 1.Kapital


    9) Feuerbach, 앞의 책, 38쪽
    10) Feuerbach, 앞의 책, 53,54쪽 참조
    11) Feuerbach, Das Wesen der Religion, 112쪽
    12) Feuerbach, 앞의 책, 53쪽, 2.Kapitel
    13) Feuerbach, 앞의 책, 298쪽, 20Kapitel
    14) Feuerbach, 앞의 책, 120,121쪽, 6.Kapitel
    15) Feuerbach, Grunds tze der Philosophie der Zukunft, 319쪽,  56(35)
    16) Feuerbach, Das Wesen des Christentums, 50쪽, 3. Kapitel
    17) Feuerbach, 앞의 책, 369, 27.Kapitel
    18) Feuerbach, 앞의 책, 301쪽, 21.Kapitel
    19) Feuerbach, 앞의 책, 330쪽, 23.Kapitel
    20) Feuerbach, Aus den Heidelberger Vorlesungen  ber das >>Wesen der Religion<<
        (1840-1849), 147, 148쪽 참조.  in Alfred Schmidt편, Ludwig Feuerbach Anthro-
        pologischer Atheismus, Ausgew hlte Schriften II, 120-150
    21) Feuerbach, Das Wesen des Christentums, 146, 250, 401쪽
    22) Feuerbach, 앞의 강의, 150쪽
    23) K.Marx, Die Doktordissertation, 184

    0/41, MEW Erg nzungsband I, 305쪽
    24) K.Marx, Luther als Schiedsrichter zwischen Strau  und Feuerbach(1842), MEW 1
        27쪽
    25) Karl L with, Gott,Mensch und Welt in der Metaphysik von Descartes bis zu Nie
        -tzsche, 150쪽, Vandenhoeck & Ruprecht G ttingen 1967
    26) K.Marx, Thesen  ber Feuerbach, MEW 3, 7쪽
    27) Hans K ng, Existiert Gott? 262쪽 dtv M nchen 1981
    28) K.Marx, Zur Krit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378쪽, MEW 1, 378-391쪽
    29) K.Marx, 위의 논문, 378쪽.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은 마르크스가 창안한
        것이 아니고, 일찌기 Heine와 B.Bauer가 사용했다. Karl-Heinz Weger편, Religio-
        nskritik von der Aufkl rung bis zur Gegenwart, 220쪽
    30) K.Marx, 위의 논문,  379쪽
    31) K.Marx, 위의 논문,  379쪽
    32) K.Marx, 앞의 논문, 379, 391쪽
    33) K.Marx, Deutsche Ideologie, 348쪽, Siegfried Landshut편, Die Fr h-Schriften
        ,339-485
    34) K.Marx, D

    eutsche Ideologie, 349쪽.
    35) K.Marx,  konomisch-philosopische Manuskripte(1844), MEW EB I, 537쪽
    36) K.Marx, Das Kapital, 1권, 94쪽, MEW 23
    37) Hans K ng, Existiert Gott? 270쪽
    38) K.Marx,Zur Judenfrage, 353쪽, MEW 1(1839-1844), 347-377쪽
    39) K.Marx, Zur Judenfrage, 356쪽
    40) 최준성, 니이체에 있어서의 허무주의 문제, 25-26쪽, 철학17집(1982), 한국철학회
    41) Eugen Fink, Nietzsches Philosophie, Kohlhammer, 8쪽 참조, Stuttgart Berlin
        Mainz 1973(제3쇄)
    42) Nietzsche, Der Wille zur Macht, 44쪽
    43) 차하순, 정동호 공저, 부르크하르트와 니이체, 110-111쪽,서강대학교 출판부,1986
    44) 차하순, 정동호 공저, 앞의 책, 112-113쪽 참조.
        같은 의미에서 니이체는 그리스도교를 '백성을 위한 플라톤주의'(Platonismus f r
        -s, Volk)라고 부른다. Jenseits von Gut und B se, Vorrede, 12쪽. S mtliche We
        -rke, 5권
    45) Nietzsche, Der Wille zur Macht, 100쪽, Verlag Kr ner Stuttgart 1964
    46) Nietzsche, 앞의 책, 106쪽


    47) Nietzsche, 앞의 책, 106-107쪽
    48) Nietzsche, 앞의 책, 111쪽
    49) Nietzsche, Die fr liche Wissenschaft(drittes Buch 123-125),480-481쪽,  125,
        3권, 573쪽,  343, S mtliche Werke, 3권
    50) Nietzsche, Also Sprach Zarathustra IV, Vom h heren Menschen, 357쪽, S mtl-
        iche Werke 4권
    51) Nietzsche, Ecce homo, Warum ich im Schicksal bin, 365쪽, S mtliche Werke 6권
    52) Nietzsche, Der Wille zur Macht, Zucht und Z chtung, 661쪽,  1007
    53) Nietzsche, 앞의 책, Der europ ische Nihilismus, 91쪽,  125
    54) Nietzsche, 앞의 책, Kritik der bisherigen h chsten Werte, 155쪽,  254
    55) Nietzsche, Also Sprach Zarathustra, Von der Selbst- berwindung, 147쪽
    56) Nietzsche, 앞의 책, 148쪽
    57) Nietzsche, 앞의 책, 149쪽
    58) Nietzsche, Der Wille zur Macht, Prinzip einer neuen Wertsetzung, 443쪽
    59) Nietzsche, 앞의 책, 451쪽
    60) Nietzsche, 앞의 책, Prinzip einer ne

    uen Wertsetzung, 465쪽,  688
    61) Nietzsche, 앞의 책, 516-517쪽,  776
    62) Nietzsche, Ecce homo, Warum ich so gute B cher schreibe 1-2, S mtliche Wer-
        ke, 6권, 300쪽
    63) Nietzsche, Also sprach Zaratustra, Vom h heren Menschen 1-3, 357쪽
    64) K.L with, Von Hegel zu Nietzsche, 348쪽
    65) Eugen Fink, Nietzsches Philosophie, 68, 77, 78쪽 참조
    66) Hans K ng, Existiert Gott? 247-249쪽 참조
    67) Peter Ehlen, Marxismus als Weltanschauung, 169쪽, Verlag Olzog M nchen Wien
        1982
    68) Hans K ng, 앞의 책, 295-297 참조
    69) Eugen Biser, Gottsucher oder Antichrist? Nietzsches provokative Kritik des
        Christentums, 33쪽, Verlag Otto M ller, Salzburg 1982
    70) Emerich Coreth/Peter Ehlen/Josef Schmidt, Philosophie des 19.Jahrhunderts,1-
        40쪽, Kohlhammer Stuttgart Berlin K ln Mainz 1984
    71) Heinrich Fries, Abschied von Gott? 81쪽, Her

    der. Freiburg. Basel. Wien 1968
    72) Klaus Kienzler, "Nietzsche im christlichen Denken - am Beispiel Bernhard We-
        ltes", 405쪽, Theologie und Philosophie, 66.Jahrgang, Heft 3, 398-410쪽,Her-
        der Freiburg.Basel.Wien 1991
    73) Karl L with, Nietzsches Vollendung des Atheismus, 14쪽. in Hans Steffen편,N-
        ietzsche, Werke und Wirkungen, 7-18쪽, Vandenh ck & Ruprecht G ttingen 1974
    74) Ulrich Willers, "Aut Zarathustra aut Christus"(1.Teil), 252-253쪽 참조,Theo-
        logie und Philosophie, 60 Jahrgang, Heft 2(1985), 239-256쪽
    75) Emerich Coreth, Weltverst ndnis und Gottesfrage, 255쪽, E.Coreth, J.B.Lotz편
        Atheismus kritisch betrachtet, 244-268쪽, Erich Wewer Verlag M nchen 1971

                                    참고문헌

     1. Biser,Eugen: Gottsucher oder Antichrist? Nietzsches provokative Kritik des
        Christentums, Verlag Otto M ller, Salzburg 1982
     2. Brugger,Walter편: Philosophisches W rterbuch, Verlag Herder Freiburg Basel
        Wien 1967 (제13쇄)
     3. Coreth,Emerich/Lotz,J.B.편: Atheismus kritisch betrachtet, Verlag Erich We-
        wer M nchen 1971
     4. Coreth,Emerich/Ehlen, Peter/Schmidt, Josef편: Philosophie des 19.Jahrhunde-
        rts, Verlag Kohlhammer Stuttgart Berlin K ln Mainz 1984
     5. Ehlen,Peter: Marxismus als Weltanschauung, Olzog M nchen Wien 1982
     6. Feurbach,Ludwig: Das Wesen des Christentums, Philipp Reclam Jun. Stuttgart
        1971
     7. Schmidt,Alfred편, Ludwig Feuerbach Anthropologischer Atheismus, Ausgew hlte
        Schriften II권. Ullstein Frankfurt a.M.Wien Berlin 1985
     8. Thies,Erich 편, Ludwig Feuerbach in Sechs B nden, Suhrkamp Frankfu

    rt a.M.
        1975
     9. Fink,Eugen: Nietzsches Philosophie, Kohlhammer Stuttgart Berlin Mainz 1973
        (제 3쇄)
    10. Fries,Heinrich: Abschied von Gott? dtv M nchen 1981
    11. K ng,Hans: Existiert Gott? dtv M nchen 1981
    12. Landschut,Siegfried편: Die Fr schriften, Stuttgart 1971
    13. L with,Karl: Gott, Mensch und Welt in der Metaphysik von Descartes bis zu
        Nietzsche, Vandenhoeck & Ruprecht G ttingen 1967
    14. L with,Karl: Von Hegel zu Nietzsche, S.Fischer Frankfurt a.M.1969
    15. Karl Marx Friedrich Engels Werke(Institut f r Marxismus-Leninismus beim ZK
        der SED 편),Dietz Verlag Berlin
    16. Nietzsche,Friedrich: Also sprach Zarathustra, Kr ner Stuttgart 1964
    17. Friedrich Nietzsche S mtliche Werke, Kritische Studienausgabe(Giorgio Colli
        und Mazzino Montinari편). dtv/de Gruyter M nchen/Berlin/New York 1980


    18. Steffen,Hans 편: Nietzsche, Werke und Wirkungen, Vandenhoeck & Ruprecht G -
        ttingen 1974
    19. Weger,Karl-Heinz 편, Religionkritik von der Aufkl rung bis zur Gegenwart,
        Herder Freiburg i.Br. 1979
    20. Theologie und Philosophie, 60.Jahrgang, Heft2, Herder Freiburg Basel Wien 19
        85
    21. Theologie und Philosophie, 66.Jahrgang, Heft3, Herder Freiburg Basel Wien 19
        91
    22. 차하순, 정동호 공저: 부르크하르트와 니이체, 서강대학교 출판부 1986
    23. 한국철학회편, 철학 17집(1982)

     

    http://cafe.naver.com/modernth

    -------------------------------------------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 칼 맑스


                                                
                                     1.
                       
    지금까지의 모든 유물론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을 포함하여) 의 주요한 결함은 대상, 현실, 감성이 오직 객체의 혹은 관조의 형식 아래에서만 파악되고 있다는 것 ;   그리고 감성적 인간 활동으로서, 실천으로서 파악되지 않고, 주체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능동적 측면은 유물론에 대립해서 관념론에 의하여 --물론 관념론은 현실적 감성적 행위 자체를 알지 못한다 -- 추상적으로 발전한다.  포이에르바하는 감성적인 객체들 -- 사유 객체들과 현실적으로 구별되는 객체들 -- 을 추구한다 :  그러나 그는 인간의 활동 자체를 대상적 활동으로서 파악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의 본질) 에서 이론적 태도만을 진정으로 인간적인 태도라고 간주하며  반면에 실천은 오직 그 더러운 유태인적 현상 형태 속에서 파악되고 고정된다.  그러므로 그는 '혁명적','실천적','비판적' 활동의 의미를 개념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2.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 않는가의 문제는 --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실천속에서 인간은 진리를, 즉 현실성과 힘, 자신의 사유의 차안성을 증명해야 한다.  사유 -- 실천으로부터 고립된 -- 의 현실성이나 비현실성에 관한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주의적 문제이다.


          3.

    환경의 변화와 교육에 관한 유물론적 교의는 환경이 인간들에 의해 변화되며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그러므로 그 유물론적 교의는 필연적으로 사회를 두 부분 -- 그중의 하나는 사회를 초월해 있다 -- 으로 탐구되지 않을 수 없다.

    환경의 변화와 인간의 변화 혹은 자기 변화와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고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4.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자기 소외라는 사실, 종교적인 세계 및 세속적인 세계로의 세계의 이원화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의 직업은 종교적 세계를 그것의 세속적 기초로 해소한 데에 그 요체가 있다. 그러나 세속적 기초가 자기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위로 올라가 구름 속에 하나의 자립적인 영역으로 스스로를 고정시킨다는 사실은 이러한 세속적 기초의 자기분열과 자기 모순으로부터만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세속적 기초 자체가 자기자신안에서, 자신의 모순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 혁명화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세속적 가족이 신성가족의 비밀로서 폭로된 이후에 이제 전자 자체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파괴되어야 한다.


          5.
          
    추상적 사유에 만족하지 않는 포이에르바하는 직관을 추구한다 ; 그러나 그는 감성을 실천적, 인간적, 감성적 활동으로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6.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의 본질로 용해시킨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각각의 개체숙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다.

    이러한 현실적 본질의 비판속으로 파고들지 않는 포이에르바하는 따라서 :  

    1. 역사적 과정을 도외시하고 종교적 심성을 그 자체로 고정시키고 하나의 추상적 --고립된-- 인간 개체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2. 따라서 그 본질은 '유'로서만, 내적이고 침묵하는, 많은 개체들을 오직 자연적으로 묶고 있는 일반성으로서만 이해할 수 있다.


          7.  
          
    따라서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심성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산물임을, 그리고 그가 분석하고 있는 추상적 개체가 하나의 특정한 사회 형태에 속함을 알지 못한다.


          8.
          
    모든 사회적 생활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로 이끌고 가는 모든 신비들은 인간의 실천에서 그리고 이 실천의 개념적 파악에서 그 합리적인 해결을 얻는다.


          9.
          
    관조하는 유물론, 즉 감성을 실천적 활동으로서 개념 파악하지 않는 유물론이 도달하는 정점은 각각의 개체들 및 시민 사회의 관조이다.


        10.
        
    낡은 유물론의 입지점은 시민 사회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지점은 인간적 사회 혹은 사회적 인간이다.

        11.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http://cafe.naver.com/modernth

    -------------------------------------

     

    http://cafe.naver.com/modernth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xian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10.29 내용 소개)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Feuerbach, 1804.7.28∼1872.9.13)생애--->“인간이 초월적 존재 창조” 경건한 무신론자 포이어바흐 --->Feuerbach의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비판적 고찰 --->신과 무신론--->시민적 사실주의,시적 사실주의--->종교와 철학--->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 칼 맑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