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택, 192 페이지
⊙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는 메시야의 모습 앞에서 그 어떤 인간도 자기의 의를 갖다 놓을 수가 없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책)
(마 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 이 본문이 보통 어려운 본문이 아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몰트만이 책을 3권이나 내었던 것이다.
아직도 해결이 안 되는 것이다. 몰트만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이것을 하나님의 상실로 보았던 것이다. 몰트만이 이 문제를 가지고 끙끙거리는 것은 십자가를 인간을 구원하는 십자가로 보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이 죽은 것이 되어서, 이것은 마치 중세시대의 니케아 회의에서 이단이 된 아리우스와 비슷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에게 무슨 어머니가 있는가? 자꾸만 구원론으로 문제를 풀어 가는 것이다.
◈ 구원론에 집착하는 위험성 - 예수님을 구원하시는 분으로만 생각을 해버리면, 예수님에게는 인성과 신성이 있는데,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주간매체로 해서 인성으로 들어갔다가 신성으로 나오면 신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는 우상이다. 예수님을 하나의 기계로 보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욕구가 이정도로 심각한 것이다.
* 그러나 정작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 과정에서 구원은 하나의 기능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에 대한 중보기도는 예수님에게만 해당이 되지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 부모를 위해서 기도해 보라. 구원을 받는가?
* 우리는 의인이 아니기에 중보기도를 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우리 어머니를 구원받게 해 달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 우리 어머니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기도를 하되, 내 이름이 아니고, 내 중심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차원에서 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만을 높이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가 되는 것이다.
* 주기도문을 아십니까?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영화롭게 하옵시며 ...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를 계시론적 차원에서 설명을 해 버리면, 모든 육에 대한 종착점이 되는 것이다. 육에 대한 단절이다.
* 육으로 구원받는 것은 없고, 이제는 오직 예수님만으로 이다. 예수님이 부활된 것은 성령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부활도 성령의 일하심이고, 아버지의 일하심이라는 것이다. 약속된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 하나님의 저주 앞에서 견딜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참 메시야는 그 안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갈 3:13). (책)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예수님이 이렇게 버림을 받았는데, 우리가 구원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이 어찌 욕심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우리도 버림받아야 하는 것이다.
⊙ 인간 세계는 메시야 없는 세상으로 남게 되었다. (책)
* 이 세상에 종교는 많지만 메시야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성령이 찾아온 사람은 메시야를 만나는 것이다. 육으로 난 사람은 육이고, 영으로 난 자라야만 메시야를 만난다는 것이다. 니고데모처럼 밤에 찾아와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오직 성령을 받아야 만 구원을 받는 것이다.
* 구원받고 안 받고 하는 것, 그것은 인간에게는 그러한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주님에게 물어보아야 하는 것이다.
* 그러면 교회는 무엇인가? 이미 말씀을 듣고 구원받은 자들이 모이는 것이다.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말이다. 말씀에 '예수를 믿어라' 라고 하는 것은 명령법이 아니라, '빛이 있어라' 라고 하는 창조하는 것처럼,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다. 믿어지는 것이다.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말씀이 우리의 가슴에 박혀서 우리가 믿게 된 것이지, 내가 순종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래서 우리는 에스겔처럼, 남이 듣기를 싫어해도 전해야 하는 것이다. 보내심을 받은 자가 전하지 아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 남자라서 병원에 흰 가운을 입고 있어서 의사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간호사였던 것이다. 그래서 사귀려는 여자 친구가 놀려도, 그런 자존심 상하는 것에 구애를 받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 줄 알고 감사한다면 얼마나 좋으냐는 것이다.
* 마찬가지로,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교인이 가족 두 명밖에 없다고 놀려도, 노아가 한 명도 전도를 못해도 약속대로 비가 왔듯이, 담대하게 주의 일을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메시야가 없는 세상에, 메시야를 전하는 자로서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 219 페이지
⊙ 그 어떤 인간도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존재가 못 된다는 사실을 더욱 더 절실하게 마드는 것이 선택의 사랑이다. "어, 우리들만 택하심으로 인해 남았네!" 라는 고백이 선택의 우대함을 말한다. (책)
* 노아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인간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노아가 심판 속에 있다는 것이다. 노아도 육이기 때문에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데, 노아 언약으로,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노아가 한 일은 없지 않는가? 그렇다. 없는 것이다.
◈ 하나님의 고정된 작업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 능력으로 노아를 구원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고정된 작업이라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가 설교를 하면서, 교인들이 이렇게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라는 마음으로 나오는데, 여기에 대해서,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냥 주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 주의 일임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자기를 바라보는데, 이러한 것을 잘라버려야 하는 것이다.
* 동식물에도 사자, 원숭이, 해바라기, 그리고 코스모스 등이 있듯이,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도 똑 같을 수는 없고, 같은 일을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무조건 위대한 일을 하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혹 내가 손가락이 4개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손가락 4개인 인간을 만드셨구나!' 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 이러한 설교를 하려고 한다면, 목사 자신부터 이러한 마음에 충만해야 하는 것이다. '아, 오늘도 비가 와서 교인들이 다 빠지겠네. 헌금도 줄어들고 이렇게 가다가 나는 뭐 먹고살지?' 라고 한다면, 교인들도 다 아는 것이다. 나에게 지금 맡겨진 일에만 충실히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 어제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 당신이 I.M.F를 터지게 해놓고, 이렇게 못살게 해놓고 지금 바라기는 무엇을 바랍니까?' 라는 마음으로 나와서 지금 앉아있지요? 라고 했다. 어떤 교인들은 쓴웃음으로 동의를 하고, 나머지는 고개를 떨구는 것이다.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얼굴을 붉혀야 하는 것이 아니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력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 영과 육 -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 라고 하는 것은 육이라고 하는 것이고, 여기에 반해 영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이다' 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 불교의 한계점이 바로, '인간에게 있는 육을 다독거려서 어떻게 하면 영으로 만들어볼까?' 라고 하는 것인데, 이렇게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몸부림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육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 그러면 오늘날 교회는 어떠한가? 과연 이러한 몸부림에서 벗어나 있는가? 아니라면 교회가 아니고 절간이라고 해야 함이 마땅하다. 자기가 어떤 기술을 발휘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 것이 바로 절간에서 하는 것이고, 육적이라는 것이다.
* 우리는 지금이 종말이기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감사하면서 임종을 맞이하는 심정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 "어, 우리들만 택하심으로 인해 남았네!"
(마 24: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마 24:31)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다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유혹이 심하고, 그런 유혹을 이길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택한 자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된 자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큰 표적과 기사를 하나님의 은혜로 물리칠 수가 있다는 것이다.
* 홍해, 요단강 사건은 믿는다고 하면서, 지나간 사건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앞으로 되어질 것은 잘 믿지를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다 모으신다는 것은 믿지를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일은 믿고, 앞으로 되어질 일은 믿지를 않는, 그런 믿음은 없다는 것이다.
* [ 하나님의 선택 ] 에 대해서 강의를 하면, 우리가 할 일이 없다고 한다고 해서, 불평 불만을 하는데, 그러면 우리의 손발을 풀어놓으면, 우리보고 무엇을 하라고 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선택한 자를 건지는 이 일을 과연 할 수가 있는가?
* 이것이 바로, 자기에게 주어진 현 상황을 주님의 창조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바로 육에 대한 애착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버리는 것은 십자가밖에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모습을 바라보고 회개를 해야 하는 것이다. 내 육체라고 하는 것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런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 라고 하는 것은 육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 칼 바르트의 고민 - 칼 바트트가 어려워하는 것은, '어떻게 십자가에서 선택으로 넘어오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모든 인간이 다 죽었다고 하는 것이고(고전 15장),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인간의 부활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만인 구원론자' 로 오해(?)를 받은 것이다.
* 그러면 왜 바르트가 이런 오해를 듣는 이야기를 해야만 했던가? 그것은 바르트가 십자가와 선택을 연관시키는 연결 고리로 '예수님은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다' 라는 것을 사용을 했는데, 몰트만도 [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 이라는 책에서 이런 주장을 했었던 것이다.
◈ 인자(人子) - 그러나 이근호는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인간도 하나님도 아니고, '인자' 라는 것이다. 인자가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신 것이다. 인자는 신과 인간으로 분리될 수가 없는 언약적 용어이다. 물론 문자적 의미의 사람의 아들도 아니고 말이다. 존재론적으로 이렇게 신과 인간을 분리하는 것을 인자가 용납하지를 않는 것이다.
* 그러면 왜 바르트와 몰트만은 이렇게 둘로 나눌 수밖에 없었던가? 그것은 신학자로서 사람들에게 설득과 납들을 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우리가 그 분과 동참함으로 말미암아 어떤 존재가 되는가?' 라는 의문점을 가지고,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분석을 하는 것은 성경의 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의 이루심에 관심을 두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 성경은 예수님의 존재가 문제가 아니고, 더 높은 단계(?)에서 말씀의 성취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버트 오툴의 [ 누가복음의 통일성 ] 을 하늘에서 떨어진 책이라고 칭찬하는 것은, 그 책이 바로 이렇게 예수님을 움직이시는 것을 말씀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말씀을 완성하시는 분으로서 예수님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 김이곤 교수는 유감스럽게도 신학을 전개하면서 말씀을 위에 두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신의 약속은 파기되지 않는다' 라고 하면서도,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모든 것을 조정하고 있음을 믿지를 않는 것이다. 이호식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라고 했을 때, 이것은 예수님을 존재론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발트 카스프가 [ 예수 그리스도 ] 라는 책에서 잘못 주장을 한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구약을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을 예수님이 종말 때에 완성을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은 메시야가 와서 다 이루신 것을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 그래서 존재론 적이 아니고, 주께서 오셔서 이런 이런 일을 하셨고, 우리는 그것을 전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언약적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것이 말씀이라는 것이다. 언약에 따라서 예수님이 움직이신 것이다. 이 언약을 쪼개어 보면 신성과 인성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고, 의인과 죄인만이 있다는 것이다. 오직 어린양의 피가 강조되는 것이다.
* 평소에는 상번제를 통해서 아침저녁에 한 마리씩 잡아서 제사를 드리다가, 안식일에는 일년 된 어린양에다가 소제에다 두 배나 더해서 하는 것이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이스라엘은 늘 어린양의 희생에서, 언약에서 벗어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