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3:14-16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사랑을 말하지만 사랑의 주체와 사랑의 방식을 알지 못한다면
작성자김유미작성시간04.12.26조회수693 목록 댓글 0요3:14-16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많은 크리스챤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할 때
단지 요한복음 3:16 한 구절만을 집착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3장 전체의 문맥으로 우리가 들어가야만 합니다.
16 절 한 절만을 보고 문자적으로 성경을 바라보게 될 때
말씀이 그릇되게 해석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성경 해석은
16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과,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진리로부터
우리를 잘못 이끌기 때문에
우리는 16 절 말씀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만 합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면서도
사실은 가장 오해되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랑을 훨씬 관념론적으로 생각합니다.
"give and take의 원리"로 시작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합리적으로 give and take해서 완성시킬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말할 때 언제나 오늘날의 부부간 모습을 들고 나와
사랑은 만들어 나갈 뿐이라 말합니다.
물론 이러한 부분들이 신앙을 전제로 할 때 삶의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만들어 내는 사랑을, 사랑의 성경적 원리로 적용하게 될 경우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의도적인 유약함을 드러내는 불신앙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해서 만들어가는 과정이
하나님의 사랑을 잘못되게 만들 가능성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만들어 내는 작품이 아니고 미화될 것도 아닙니다.
그 아름다움을 예술적문학적 작품으로 다듬고 깎아서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우리는 종종 그런 오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오해가 요한복음 3:16말씀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먼저 제시하셨으니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사랑에 대한 바른 앎에 이르지 못한 생각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은
사건도 아니고 개념도 아닙니다.
바로 누가 그 일을 하며
누가 그 일을 설명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의 사랑이라는 단어가 이해되려면
언제나 "누가 사랑했느냐"로 연결을 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이 말씀을 잊어버리고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고 내리면
우리는 늘 똑같은 실수에 빠지게 됩니다.
16절의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는
16절의 "이 처럼"이 가리키는 14절의 내용
즉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의 내용을
연결시켜 해석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란 사랑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생략되고
사랑의 구체적인 방식이 독생자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우리의 죄악을 사해주셨다는 바른 이해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비록 하나님이름을 빌린다 하더라도,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빌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신앙으로서가 아니라
인간들의 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사랑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에서 가장 두드러진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집념을 누가 계획하시며
누가 지휘할 일인가에 그 초점이 가야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는 복음이 복음된 아름다움들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야기할 때마다 갖는 가장 큰 불안함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는데
나는 보답으로 무엇을 내어 놓을 것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구원을 은혜로 받지 못하고
거기에다 우리의 불완전한 자기의를 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에 철이 든 사람이
자기를 돌아보며 자기의 신앙을 더욱 하나님 앞에 바로잡으며 헌신하기 위한
자기 채찍질로서는 옳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구원의 근거로, 구원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아는 것은
전혀 틀린 이야기입니다.
다만 이것은 하시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요,
될 때까지 하고야 마신다는 하나님의 집념의 표현이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입니다.
16 절을 다시 보시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의 상반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말씀을
세 가지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하셨다'요,
또 하나는 '하나님'이요,
다른 하나는 '이처럼'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처럼 사랑했다'의 '이처럼'은 어느 말을 수식하는 것이겠습니까?
사랑도 되겠습니다만 조금 더 들어가서
사랑의 대표적인 사건인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볼 수가 있겠지만
이런 식은 성경을 16절만 놓고 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전체를 보면
16 절 하반절의 양식이 15절의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에서도 나오는데
"멸망치 않고"라는 말만 첨가된 것 외에는 문장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16절의 하반절인데
그러면 16절의 상반절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로 그 앞의 14절에 있습니다.
14 절과 15절에는 동일한 이야기를 해 놓고
16 절에는 그것을 다시 합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16절을 늘 동떨어지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에 말한 '이처럼'은
독생자를 보내신 일을 말합니다만
14 절 말씀처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보내셨다는 말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모습은
저주와 심판과 처참한 진노 아래 죽어 넘어진 모습이며
죄의 원흉, 죄값으로 달리신 처절한 심판의 모습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떤 희생이나 어떠한 대가를 치르시고라도,
다시 말해서
그의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의 나무에 달아매는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3:16이 의미하는 엄청난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역은 이미 끝이 났다는 말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했으니 너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조건을 건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줄 수도 있고 안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값을 대신하여 죽으셨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고
하나님의 소유로 삼는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3:16의 말씀입니다.
사랑을 선포 하십시오
회개를 선포하십시오
천국이 저들의 것입니다.
사랑이 하나님께로서 나왔음을 선포 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었음을 선포하십시 오
사랑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우리에게 미쳤음을 선포하십시오
바로 우리의 죄에 그 이유가 있었음을 깨달으십시오.
이러한 사랑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들이 죽이기까지 하면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못박은 그 독생자 예수는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