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가복음 14장27-28절
제목 : 흩어지고 모이는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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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지고 모이는 제자들
2009년 7월 26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14:27-28
(막 14:27, 개정)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막 14:28, 개정)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시편 142:7에 보면,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의 특징은, 자기 힘으로 지옥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던 그런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빠져나옴에서부터 세상 돌아가는 것을 다시 이해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들이 하는 일보다 하나님의 일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라고 인정하지도 않는데 인간들 자기네끼리 교회라고 우겨봐야 소용없는 겁니다. 교회는 옆의 교회 흉내내고 사람 모일만한 식으로 단체를 만든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대신 말씀이 스스로 어떻게 교회를 만들어 나가는지를 봐야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말씀이 어떻게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지를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기록 된 바’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세상 만사는 기록된 이 말씀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겁니다.
‘기록된 바’란 마치 기차 레일과 같아서 절대로 그 노선에서 이탈됨이 없이 예수님은 일하십니다. 그런데 이 ‘기록된 바’의 내용을 보면, 거기에 양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로서 양이 된 자의 운명이란 ‘기록된 바’된 그 레일 위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이 예수님이 이끄시는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된 말씀이 기록된 곳은 스가랴 13:7의 말씀입니다. 거기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짝된 자’란 하나님과 관련된 목자를 말하고, ‘작은 자들’이란 목자로 인하여 영향을 입은 가련한 양들을 뜻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생각하게 되면 건물이라는 부동산과 목사와 장로라는 실무자를 염두에 둡니다. 따라서 어디까지나 나와는 타인 관계에 있습니다. 마치 자신들은 관계자가 아닌 것처럼 생각합니다. 관계자 외의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이래서 교회라는 것이 천국을 가로막는 곳이 되는 겁니다.
차라리 그 부동산과 그 실문자라는 자를 사라질 때에 진정 그들이 모일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즉 본인들이 진정 섬기는 자가 진정 예수님 맞느냐 여부를 노출시키는 곳이 교회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는 오로지 ‘기록 된 바’에 준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목사나 장로는 ‘기록된 바’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도 ‘기록된 바’가 아닙니다. ‘기록 된 바’란 예수님에게 일단 중심점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현상들이 전부 ‘기록된 바’에 해당됩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을 안 믿고 교회를 믿는 자들은 교회를 졸지에 사라지게 하므로서 전혀 그들이 에수님을 믿은 적이 없음이 폭로당해야 하는 겁니다.
부동산과 목사, 장로라는 실무자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래도 모이고 또 모이는 이유와 근거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오늘 말씀대로 ‘목자가 치니 양들이 흩어지는’ ‘기록된 바’가 성립되려면 일단 ‘나는 나의 목자 때문에 산다’라는 관계가 수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자가 양이 되고 그래야 목자가 칠 때, 그 양된 자들이 훝어질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을 보면, 악마가 목자를 쳤는데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기록된 바’ 바깥에서 놀고 있다는 뜻입니다. 혼자 부동산과 실무자로 구성된 쓰레기 같은 교회라는 이름의 종교단체에 잠시 다녀간 셈이 됩니다. 본인 자체가 말씀 속의 본인이 안 되고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교인들이 섬기자 자가 없는 겁니다. 있기 있습니다. 자기 자식이지요. 목자를 쳐도 꿈쩍도 하지 않던 교인들이 자기 자식을 치면 호들갑을 떨고 같이 죽겠다고, 더 살 이유없다고 고함을 치고 몸부림을 치고 발악을 합니다. 마치 TV 침대 선전물에서, 포켓으로 된 스프링으로 만든 침대에 옆에 볼링 공이 떨어져도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편히 잠자는 식으로 오늘날 교인들은 예수님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하여 사전에 따 빼돌려놓았습니다.
예수님은 다치든 말던 나와 내 가정과 내 자식만 안 다치면 그곳이 만사 오케이랍니다. 자식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육’이라고 합니다. 자식사랑은 실은 ‘자기 사랑’입니다. 자식을 다른 사람은 하나의 인간으로 보지만 부모는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나와 관련된 ‘ 내 새끼’로 봅니다. 문제는 이 육으로서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 하나님의 ‘기록된 바’ 속에는 육이기에 천국 못가는 하나님의 백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조치도 거기에 들어있게 됩니다. 즉 육에서 영으로 뒤 바꿔어놓는 요소가 ‘기록된 바’ 속에도 함유되어 있어 그것이 선물이라는 형식으로 주어져야 합니다. 성경에서의 ‘믿음’이란 반드시 “네 자신의 가진 것 믿지 않는다”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자기 딴에 실천에 옮긴다고 주장하지만 아무리 실천해봤자 결국 자신의 육의 성과로 되돌아오게 마련입니다. 고무줄처럼 언제든지 놓기만 하면 다시 육된 원점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한 게 없게 됩니다. 마치 십자가에 예수님과 같이 매달린 그 강도와 같이 말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시험한다는 것은 “내 것이라는 것을 쳐보세요”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을 잡는 대목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고 싶은 바는 바로 ‘말씀’ 즉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침투성입니다. 과연 아브라함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여전히 담겨 있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란 곧 하나님 섬김, 또는 구원자 섬김, 또는 하나님이 보내신 목자 섬김입니다. 즉 “아브라함, 너는 네 스스로 구원받지 못함을 네가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진정 너를 구원한 근거를 섬기느냐?”고 물으시는 것이 아브라함에게 닥쳐진 믿음의 시험입니다.
왜냐하면 갈릴리에 다시 합류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3-8에 보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죄인의 괴수가 자진해서 하나님에게도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진해서 우리를 찾아와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노동으로, 우리 기대대로 되어진 것 말고 다른 은혜로운 요소를 우리 마음 깊숙이 집어넣고서는 그 ‘기록한 바’대로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고 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지옥에서 건짐받은 자의 고백입니다.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평생토록…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에 우리 본능과 전혀 다른 예수님의 본심이 어디 있는지 늘 찾아서 감사할 수 있는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