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 안
2003년 2월 26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6:28-33
16: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16: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
16: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16: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평안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제일 원하는 바입니다. 신년 초가 되면 나름대로 각자 초월자에게 비는데 절에 다니는 사람은 부처 앞에서 빌고 교회 다니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나아가서 빕니다. 아무 것도 안 믿는 사람은 떠오르는 보름달 보고도 빕니다.
빌고 또 비는 메뉴는 다름아닌 평안입니다. 제발 올 한해는 국가적으로, 가정적으로, 사업상, 그리고 교회에 있어 평안이 유지되기를 빕니다. 장래가 불확실하면 사람들은 허구적인 대상을 찾아서 심리적인 위안을 얻고자 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선호하는 '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그토록 평안을 원하지만 이상스럽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거나 예수님에게 관심두는 법은 없습니다. 즉 예수님은 당연히 자신들에게 평안을 주어야 하지만 자신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 대해서는 아예 귀를 막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으로는 결코 평안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확신 같은 것이 사람들의 마음마다 가득차 있습니다. 도리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평안은 커녕 시련과 고난과 역경과 괴로움을 줄지어 따라다닌다고 여깁니다. 이런 시련과 고생과 고난은 결코 평안이 아닐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겁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성도간의 관계는 피상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인척 관계나 부자지관이나 부부지관보다 그 심각하게 맺어져야 될 관계입니다. 가족을 위하여 환란을 당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에게 헌신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게 되는 그런 관계 속에 있는 자가 곧 구원되는 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 의해 주어지는 평안은 온 세상을 능히 이기는 평안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란 고요함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성에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는 이 진리성의 단단함을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으로 예수님은 비유하십니다. 큰 풍파가 밀려와도 무너지지 않을 진리 위에 살아가야 참된 평안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는 구약적으로 볼 때 윤리나 도덕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참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데에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만약 누구든지 여호와를 모르는 자는 그 사람의 윤리, 도덕성과 상관없이 저주입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저주 아래 놓인 자는 집에 있어도 저주, 밖에 나가도 저주, 밭에서도 저주이요 떡반죽에서도 저주, 죄없는 소우리 양우리까지 모두가 저주입니다.
저주를 아예 달고 다닙니다. 저주 안에 있는 자에게 있어 평안이란 그저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저주의 운명을 지고 가는 사람이라면 애초부터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근거조차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평안은 평안을 요구하고 원하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안에 찾아들어야 될 타당성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인간 세계에 저주가 덮친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수도 없이 되풀이해서 지적하는 바는, 다른 신을 네가 두지 말라는 겁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기독교를 윤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과는 전혀 딴판으로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신 관념에 대해서 시비걸고 나서시는 겁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신이라면 모두 똑같은 신이기에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에게만 계시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기존 인간들이 생각해 놓은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낯선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동시에 그 하나님은 기존의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그냥 두지 않고 진멸해 버리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진정 저주하고 싶은 바입니다. 이 우주에서 오직 참된 하나님만이 하나님답게 대접받아야 하고 인정받아야 합니다. 만약 엉터리 하나님을 신봉하는 자가 있다면 참된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그 신과 더불어 그 신을 신봉하는 자를 벌주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 차원에서의 저주입니다.
따라서 태어날 때부터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고 소식을 접해본 적도 없는 이들은 죽음 이후까지 자동적으로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들의 저주스러운 운명입니다.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기생 라합에게 있어 진정한 평안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생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이방인에게 퍼부어지는 무서운 저주에 대해서 알았고 그 저주는 다른 신을 신봉하고 따르는 것 때문에 퍼부어진다는 사실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신봉해야 될 신을 졸지에 바꾼 것입니다.
비록 그녀는 이방여인이지만 남의 민족, 즉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신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인 것을 받아드렸습니다. 과연 그녀 가족이 살던 여리고성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무너졌고 그 성 가운데 살았던 기생 라합의 식구들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 때 기생 라합이 느껴지는 평안이 무엇일까요? 바로 마땅히 저주의 사람인데서 벗어나 놀랍게도 이스라엘의 한 일원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 속으로 합류한 것일 것입니다. 자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봅시다.
오늘 본문 28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즉 지금 참된 하나님을 예수님께서 독점하고 계십니다. 마치 옛날 구약 때 다른 민족에 비해서 택함받은 이스라엘이 민족이 여호와에 대한 지식과 정보와 본질에 대해서 독점하고 있는 위치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예수님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모릅니다. 유대인들이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님만을 통해서 하나님의 참 하나님됨을 드러내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갈 수 있고 합류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 예수님의 말씀은 간결합니다. "내가 길이다!"
그리고 예수님 본인이 하는 말에 순복하지 아니하는 자는 참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주 아래 놓인 자가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에게만 평안이 주어집니다. 32절에 보면,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평안이란 인간이 신에게 요구한다고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제시한 자신에 뜻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의지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기에 결코 평안을 누릴 권리나 자격에 대해서 이미 박탈 당한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냥 저주를 퍼부어주셔도 충분히 하나님 다움을 드러내는데 있어 충분할텐데 무엇 때문에 구태어 평안을 허락하시려고 하는 겁니까?
이점에 대해서 로마서 3: 23-26에 잘나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 보면, '화목제물'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화목제물'을 동원시키시는 것은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시려고 하는 목적 때문입니다. 즉 심판만 하신다고 의로움이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화해의 사랑이 나타나서 그 결실이 맺어지므로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시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 모든 것은 결코 사전에 인간의 요구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실시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죄로 인해 고통받고 신음하고 저주스러움이 안스러워서 어쩔 수 없이 내린 조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조치로서 예수님의 화목제물을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므로서 예수님의 영광성은 하나님으로 인해 더욱 빛나시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화해의 능력은 과연 어느 정도의 평안인가요? 그저 고요함입니까? 아닙니다. 전 세계가 뒤집어질 정도의 환란과 시련이 온다 할지라도 끄덕이 없는 평안이 이 평안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 무슨 변고나 변화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들은 그런 것들로 인해 결코 잠식되거나 훼손되지 않을 위치에 있습니다.
로마서 8:35-39에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그 어떤 환란도 극복해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는 그 어떤 작은 환란도 제대로 감당못합니다. 그러나 단지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말씀 그대로 믿어지고 인정되어지는 놀라운 현상이 일어납니다.
바로 이 약속하신 말씀 때문에 그 어떤 환란 속에서 담대하고 평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참된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그대로 자기 성도 속에서 다 성취시키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