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羅馬書(로마서)

로마서5장 20절∼21절 - 구원의 확신 - 박영선 목사

작성자김유미|작성시간05.08.01|조회수794 목록 댓글 0

로마서 강해33 (구원의 확신 II)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롬 5:20-21)


본문에서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이 어떻게 확실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구원의 확신이라고 하는데 대부분의 신자들은 구원의 확신이라고 그러면 실존적인 차원에서의 확신을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은 것, 그래서 내가 구원을 받은 것, 그래서 내가 천국에 가고야 말 것이라는 자기 자신의 확고한 인식 감격, 흔들리지 않는 확인 이런 것들을 구원의 확신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이 구원에 대하여 확신을 주려고 하는 것은 ‘이 구원이 하나님 쪽에서 어떻게 확실한가’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은 우리의 자격 조건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와 능력에 근거한 것이니까 베푸신 쪽의 확고함, 베푸신 쪽의 성실함, 이것이 구원의 확신을 위해서 확인되어야지 그것이 나에게 어떻게 인식되느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 어린 자녀들이 부모님과 약속을 할 때 “이 번 생일 날 무슨, 무슨 선물을 주십시오” 라고 했을 때 부모님이 그것을 허락해서 “오냐, 주겠다” 그러면 이제 그 약속이 확실하냐 안 확실하냐 하는 것은 그것을 받아야될 자녀가 그것을 받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있는 것보다 주겠다고 약속한 부모가 얼마나 약속을 지키며 그 약속을 지킬 능력이 있는가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그 구원 확신에 대하여 특별한 감격과 자신감을 갖고 있는 자들이 꽤 많은데 이것은 대부분 그 근본부터 오해한 것입니다. 본인인 구원 확신을 갖고있는 것 자체에 잘못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확인해야 되는 것은 그것보다 더 우리에게 베풀어진 구원 그 자체, 그것을 베푸신 이, 여기에 확고함을 확인해야 되고 그것이 먼저 인식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교회에 크게 올무가 되고 있는 여러 사이비 기독교 중에 구원파 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구원파도 결국은 너무 실존적으로 넘어가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로마서 5장이 무엇으로 그 구원의 확실성, 즉 구원의 확신을 우리에게 주려고 했느냐 하면 8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것으로 구원 확신을 일차적으로 가져다줍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얻을 만 한 조건과 자격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준 것이기 때문에 내 조건이 가장 나쁠 때 허락된 선물이기 때문에 내가 이 구원을 방해 할 만큼의 실패를 할 수 가 없다.’ 이것이 구원 확신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근거입니다.  


신자들이 구원 문제에 대해서 당황하는 것은 그가 열심을 부리고 성경을 따라서 살고 있을 때는 괜찮지만 그가 실패를 하고 성경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저촉되었을 때 우리는 의심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이래도 아직도 내 구원이 내 것인가? 이래도 하나님이 내 편을 들어  주실 것인가? 첫 번째 구원 확신은 우리가 아무리 잘못해도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되어 있고 나의 조건과 자격에 근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가 확인하려는 본문에서의 구원확신은 이것입니다.


21절을 봅시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함이니라” 은혜가 왕 노릇  하는 이 법칙이 우리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구원이 취소 될 수 없는 것임을 우리에게 확인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혜가 왕 노릇 한다는 이 말씀을 우리는 분명히 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은혜라는 것이 죄를 없이 하는 것, 사망에서 우리를 꺼내 주는 것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지금 우리가 본문처럼 은혜는 그 이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느 만큼입니까? 은혜가 왕 노릇 한다고 합니다. 왕 노릇 한다는 것은 통치권을 갖고 있고 그 통치권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고야 마는 의지와 힘을 갖고 있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같이”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벌 필요가 있습니다.


18절을 보시면 “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이 ‘같이’에다 무슨 표시를 좀 해 놓으십시오.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은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도리라”(롬 5:18-19). 이 본문인 것입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쳐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함이라”(롬 5:20-21). 그래서 “같이”라는 것에 은혜가 왕 노릇  하는 것이 죄가 왕 노릇 하는 것과 같은 원리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가 왕 노릇 한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죄가 어떻게 우리에게 왕 노릇했는가를 확인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배소서 2:1로 갑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 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 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1-3). 이것이 우리가 구원을 얻기 전에 있었던 위치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고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존재입니다. 이때 우리가 어떤 존재였느냐를 2절에 있는 것과 같이 이야기하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른 불순종의 위치에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에서 세상이라는 표현은 자연계를 가리키는 거이 아닙니다. 자연계나 물질계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타락한 인간들, 즉 죄성이 주장하고 있는 원리의 영역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악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구원을 알지 못하고 죄악된 우리 속에 파묻혀 있을 때는 그 죄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 합니다. 선택권을 가지지 못합니다. 죄가 하자는 대로합니다. 그러나 여기 있었던 식으로 하면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 하는 영이라고도 하고 세상 풍속을 좇는다고 합니다. 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 것인데 우리가 어떻게 죄가 왕 노릇 하는 그 속에 끌려 다녔느냐 하는 것을 세상 풍속을 좇았다는 말   속에서 가장 현실 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죄가 우리에게 어떻게 왕 노릇했는가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져서 철저히 살만큼 자유권을 갖고 있거나 힘이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죄가 그에게 왕 노릇합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개인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여자 분들이 화장하는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여자들의 화장은 이쁘자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화장을 했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입니까? 화장은 화장을 했다는 것이 화장의 근본 목적입니까? 아니면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근본적인 목적입니까?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분명 화장은 아름다움을 만들려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눈썹을 그린 것을 보면 그것이 원래 눈썹보다 이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썹을 짓게 나타내려고 눈썹을 따라서 그린 사람은 별로 없고 원래 눈썹은 밀고 이상한 눈썹을 그립니다. 그래서 척 보면 깜짝 놀라게 그리고 나옵니다. 그 다음에 눈을 크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파란색도 칠하고 어떻게 칠을 하는데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목표로 했는지는 모르지만 처음 만났을 때는 무슨 아파치 추장 딸을 만난 것같이 놀라움을 준다 구요. 그래서 루즈도 입술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이런 느낌을 줍니다. 마치 눈알은 눈알대로 입은 입대로 따로 모아다 놓아서 피카소의 그림을 보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이렇게 말이 안 되는 화장에 대해서 뭐라고 공격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해서 화장은 이미 아름다웁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화장을 하는 그 자체가 중요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맨 얼굴로 밖을 나갈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화장을 했다는 것이 훨씬 중요한 목표가 됐다 구요. 너무 여자들만 갖고 못살게 군다고 그럴 것 같아 이번에는 남자들에게로 문제를 옮기겠습니다.


남자 분들이 가장 중요한 고급스러운 모임에 갈 때나 품위 있는 모임에 갈 때는 연미복이라는 것을 입습니다. 글자 그대로 제비 꼬리 옷입니다. 뒤를 길게 해서 뾰족하게 갈라놓은 제비 꼬리 같이 생긴 옷을 입는데 이 옷은 한국 남자의 경우 입어서 어울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키가 190cm 이상 되는 링컨이나 압둘 자바나 같은 사람들이 입을 때 비로소 어울리는 옷입니다. 옛날에 이 옷을 입었던 우리 나라의 유명한 분이 있습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어느 좌석인가 이 옷을 입고 나왔는데 그만 제비 꼬리가 땅을 쓸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연미복은 그 옷을 입은 것이 멋있는가 안 멋있는가 안 따집니다. 왜냐하면 최고의 정성을 기울인 예의와 자세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근본적인 질문으로 오는 것입니다. 옷이란 멋있고 편 하자고 만든 것인데 나중에 우리가 그 자체의 노예가 되고, 화장의 경우도 목적은 아름답자고 한 것인데 나중에는 거기에 노예가 됩니다. 그러면 이제는 우리가 이것보다도 훨씬 더 실제적으로 노예가 되어 있는 것으로 찾아가 보겠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대학에 보내는 일에서야말로 훨씬 더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대학을 나오지 않았지만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은 자녀를 대학에 보내지 말자는 이야기가 결단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녀를 대학에 보내는 가장 큰 이유는, 학문을 연마시킴도 아니고 훌륭함을 가르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가장 대표적인 예가 입시 시험을 치를 때 어느 학교냐가 문제이지 어느 과가 문제인 것을 보신 적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취미가 있고 관심이 있는 전공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과는 얼마든지 바꿀 수 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학에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됐느냐하면 그것 때문에 십 년씩 늙고 수명이 단축되는 일을 즐겨 합니다. 그리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렇게 여러분 자녀들을 꾸짖습니다. 대학도 못나오면 시집은 어떻게 가며 장가는 어떻게 가고, 하면서 사람 취급을 안 합니다. 그래서 선을 봐도 그렇고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너무나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저 자신도 대학에서 전기 공학을 했는데 지금은 쓸모가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중간에 신학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과를 교육학과로 바꾸겠다고 그러자 저희 어머니께서 전에게 그랬습니다. “야, 난 네가 일차 대학을 못 간 것도 마음이 섭섭한데 간신히 이차 대학을 와 가지고 이제 공대를 다닌다는 것으로 간신히 자존심을 세우고 있었는데 네가 이제 다른 과로 간다고 그러면 나는 그 꼴 못 본다. 너 졸업하고 전기과로 밥 안 벌어먹어도 좋으니까 효도하는 마음으로 졸업만은 해 다오.” 그러셨습니다.  저희 어머님은 지금 목사님의 어머니이실 뿐 아니라 목사님의 따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가장 좋은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햄버거 빵과 빵 사이에 고기가 안 들어있고 잡지책이 들어가 버린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까? ‘주변 사람들 때문에 난 창피해서 그 꼴 못 본다’ 이것이 우리 모두를 쥐고 흔드는 중요한 최고의 원리 아닙니까? 나는 그 꼴 못 본다, 옳으냐 ,그르냐,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냐, 안 기뻐하시느냐가 아닙니다. 남 앞에서 창피하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중요한 싸움입니까?


우리들이 가져야 하는 모든 것들이 정말 나에게 영적으로 필요하고 성실함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남들이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가에 더욱 힘을 쓰고 정신을 기울이고 꿋꿋하게 살아야 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풍속을 좇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세상의 풍속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거대한 힘이고 그것을 거스려서 살 힘이 별로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 세상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은혜는 커다란 힘입니다. 은혜가 우리를 놔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옛날에 죄를 거부할 수 없었듯이 이제 우리가 은혜를 거부할 수 없게 되고, 은혜는 우리안에 왕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의인화된 표현입니다마는 은혜는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런 투정을 합니다. “나는 늘 실패합니다. 나는 한번도 신자답게 살지 못했습니다”라고 많은 이들이 고백을 하지만 그것은 여러분들이 더 큰 것을 못 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을 보면 사소한 문제에서 모두 실패하는데 큰 문제에서는 꼭 성공을 합니다. 은혜가 왕 노릇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밖에 할 수 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도를 게을리 했다. 신자답게 말씀대로 살지 못했다.” 이런 모든 회개거리와 한숨거리와 자신에 대해서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의 신앙생활의 연약함과 실패를 고백하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신자들을 만날 때면 해마다 달라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해마다 분명히 주님 앞으로 가까이 와 있습니다. 참 놀랍습니다. 여러분은 계속 실패를 했는데 그 실패가 여러분을 절망과 멸망과 하나님 반대 편으로 끌고 가지 못하고 여러분을 하나님 쪽으로 밀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신비한 일 중에 하나입니다. 바로 은혜가 여러분을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우리 구원의 확신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을 실패케 하지 못합니다. 제일 악조건에서 받은 선물이기 때문에 그 이상 내가 그 은혜를 실패케 할 만큼 더 나쁜 경지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조건입니다.


두 번째 조건은 하나님이 이 구원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나에게 베푸신 이 은혜를 하나님쪽에서 시작하시고 우리 안에 심으신 것을 완성하는 것도 하나님 쪽에서 하시더란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2:12입니다.“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2-13).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마치 우리가 이것을 쉽게 생각을 해서 내가 이제 순종을 하면 이 구원이 완성되고 내가 불순종하면 이 구원이 취소되고 실패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를 구원을 이루라”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뒤에 있는 13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이 뜻은 우리 안에서 이 일을 시작하시고 이루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분에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일을 실패케할 수 없다면, 이 일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쪽에 편을 들란 말입니다. 순종하고 힘쓰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 말하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에 가장 중요한 핵심되는 내용입니다. 은혜가 우리를 다스립니다. 은혜가 우리의 왕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이 베푸신 구원과 결국 하나님 존전에 서야 하는 거룩한 완성의 길을 실패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이 은혜가 어떻게 우리에게 왕 노릇하는가’를 조금 더 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 5장으로 돌아가서 9절 말씀을 봅시다. 앞에서는 우리가 “같이”라는 말을 생각했는데 이제 부터는 “더욱 더”라는 말을 보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회복되었은즉 회복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9-10).” 성경이 우리에게 알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시고 간섭하시는 일이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 죄를 없이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대단한 은혜요, 대단한 복이요,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그렇게 시작했기 때문에 오니ㅏ성의 그날까지 우리 안에 간섭하시는 힘은 더 큰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완성시키고야 말 것이기 때문에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면 시작도 안했을 것입니다. 시작한 힘이 100이라면 그 시작한 것을 완성하는 것은 200, 300, 400의 힘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입니다.


15절에서 이것을 이제 이렇게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우리가 처음에 같이라고 할 때는 동일한 원리, 동일한 기본 개념에서 같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kx지 않다는 것이 나옵니다. 어떤 의미에서 같지 않습니까?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롬 5:15下). 사망이 왕 노릇했던 것같이, 죄가 왕 노릇했던 것같이, 은혜가 왕 노릇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에서는 다르냐 하면 죄가 왕 노릇한 것과 은혜가 왕 노릇하는 것의 힘의 차이는 은혜가 왕 노릇하는 것이 비교될 수 없이 더욱 클 것이라는 것입니다. 죄가 왕 노릇한 것도 얼마나 철저했습니까? 우리 모든 인류가 죄의 노예였고 죄 외에는 선택할 수가 없었습니다. 죄의 종이었고, 세상의 풍속을 좇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바람에 떠 다니는, 밀려 다니는, 바람에 나는 거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이 옛날과 같은 원리 상에서 은혜가 왕 노릇하여 우리를 이제 거룩한 곳으로 영광된 곳으로 몰고 갈 것입니다. 이 힘은 죄가 왕 노릇하는 것과 비교될 수 없이 크다는 말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이것이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들이 분명히 알아야 되는 믿음의 핵심 되는 것, 구원의 확신은 무엇이냐면 결국 나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그리고 나를 그의 자녀로 부르신 하나님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우리는 그 하나님이 얼마나 굉장한 분인지를 다 알 수가 없을지라도 최소한 이것은 압니다. 나 같은 것을 부르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제 유일하게 거룩한 도전을 받습니다. 죄의 유혹과 죄의 초대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거룩한 초대를 받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에 대해서 마음의 갈등을 겪습니까? 내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의 뿌리들, 그리고 아직도 실천하지 못하는 온전한 신자의 생활에 대한 갈등과 내 안에서 더러움을 몰아내려는 그 싸움이 우리를 괴롭힌다면 세상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더 소유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왜 그때 좀더 악질적으로 못했을까? 왜 좀더 지독스럽게 하지 못하고 멈췄을까? 그 정도로 만족했을까?“ 세상 사람들이 죄 아래서 갖는 갈등과 신자들이 이 빛과 구원 안에서 갖는 갈등은 어느 차원에서는 같을지 몰라도 내용과 방향은 얼마나 다른 것입니까? 이것이 신자들이 확인해야 되고 감사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중요한 하나의 실천적인 요청을 받습니다.


에베소서 2:20로 가 보십시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선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우리는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하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절대로 그의 부르심을 취소하시지 않는 거룩한 운명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부른 우리를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는 성전으로 함께 지어가는 대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옛날 세상을 살 때 세상의 풍속이라는 것은 굉장히 큰 힘을 우리에게 발휘했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가? 무엇을 목표로 삼는가’하는 것이 우리가 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거기에 맹위를 떨쳤던 것을 압니다. 이제는 은혜가 우리에게 왕 노릇합니다. 이 은혜가 왕 노릇하는 것을 우리가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어떤 분위기가 되고 격려가 되고 도전이 되는 그런 집단을 우리는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돈을 벌었는가? 어떻게 세상에서 성공했는가? 어떻게 세상에서 남들 위에 군림했는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듯이 그래서 그것이 많은 사람들을 휘어잡듯이, 교회는 이제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이 ‘은혜가 어떻게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밀고 가는가? 은혜가 어떻게 우리를 거룩과 영광으로 인도하는가’를 나누어야 되는 장소입니다. 은혜가 왕 노릇하도록 여러분은 그것을 증원하시고, 격려하시고, 함께 나누셔야 됩니다. 그 풍성함을 나누어야 됩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이냐 그럴 때 이 은혜가 왕 노릇한 이야기를 나눌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신 분들이 교회 안에서 교인끼리 친해지는 것을 별로 못 봅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세상 풍속을 좇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들이 여기서도 큰 힘을 발하고 여기서도 자랑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현대 교회의 병입니다. 여러분은 교회 안에 들어오셨으면 교회 안에서 어떤 일에 봉사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세상 일에 전심 전력하고 모든 힘을 기울인 것같이 거룩과 생명과 진리를 여러분이 사모하고 그것을 세우기 위하여 애쓰는 기쁨을 연습하시고 표현하셔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만나면 즐겨 자랑거리가 있듯이 교회 안에서 누구든지 붙들고 이 자랑거리를 나누셔야 됩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이야기이어야 됩니다. 그리고 누구에겐가도 여러분이 누린 바 은혜가 왕 노릇하여 여러분을 인도한 그 영원하고, 거룩하고, 그리고 기쁘고, 감격스럽고, 자랑스러운 일들을 남들도 나누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자가 되어야 됩니다. 이런 일들이 교회가 없으면 우리는 금방 세상에 함몰됩니다. 우리는 이 일을 마땅히 해야 됩니다. 은혜가 왕 노릇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패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 앞으로 인도되고 영광의 나라에 설 것입니다. 그 일들이 우리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고야 맙니다. 그리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나누고 자랑하고 풍성케 해야 할 것들을 감춰 놓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고 꺼내 놓을 필요가 없는 것을 언제나 꺼내 놓는 것입니다. 구역으로 모이십니까? 잘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바로 이것을 나누십시오.


은혜가 어떻게 여러분 인생 속에서 왕 노릇하고 있는지 어떻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거룩한 길로 인도하고 계신지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거룩한 것으로 계속 도전하며 깨어있게 하시는지 나누셔야 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이번에 어떻게 좋은 대학에 갔는가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지 마십시오. 절대 할 필요 없는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자끼리 만나서도 거룩한 이야기를 할 게 없다는 것처럼 가난하고 비참한 것은 없음을 아셔야 됩니다. 실제로 없어서가 아닙니다. 있으나 여러분이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분명히 보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크는 것을 봅니다. 말할 수 없이 신속하게 큽니다. 그런데 본인들은 잘 모르더라구요. 여러분들은 은혜가 왕 노릇하고 있는 구원의 반열에 섰으며 하나님 나라의 영광된 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백성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여러분의 인생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기로 이제 결심을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풍성하게 여러분 주변에서, 여러분 안에서 힘을 쓰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들을 나누시고, 격려하시고, 풍성한 신앙생활을 누리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권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