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9-11 그리스도의 사람 2004. 3. 21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2)산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는 말씀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육신의 일이 나오고 영의 생각으로 영의 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신의 생각과 일이 세상을 사랑하고 음란하고 방탕하여 누가 보아도 죄라고 하는 그런 것만이 육신의 생각과 일이 아니라 가장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숭고한 종교적인 모습에서도 얼마든지 육신의 생각과 일이 있다는 것을 니고데모와 베드로를 통하여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무엇으로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요일 날 교회를 간다. 좀더 열심인 사람은 수요일과 금요일 새벽기도도 간다는 것으로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연보도 하고 많은 봉사를 한다고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서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9절을 봅니다.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는지 영에 있는지의 기준이 무엇에 달린 것입니까?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이 그 사람에게 있으면 영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두 가지를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것과 이 영이 사람의 행위로 선택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을 왜 함께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같은 영입니까? 다른 영입니까? 사도행전 2:33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이 말씀은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사람들이 술에 취하였다고 하는 말에 대한 베드로의 변론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세에 부어주시기로 약속하신 영을 보내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요엘 선지자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여서 이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그 높아지신 자리에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이 아버지로부터 받아서 예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는 것이기에 같은 영입니다.
그러면 이 영, 그리스도의 영을 받는 것을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되는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보아온 요한복음과 사도행전 로마서를 통하여 결코 인간의 육신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그러나 그 영접이 혈통이나 육신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아니하는 것임을 보았습니다.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과 일이란 결국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육신에 속하여 사망을 선택한 결과 사망으로 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태어난 것이기에 내가 선택하지 아니하였는데 육신에 속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육신에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육이 영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성경에서 증거 하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여전히 인간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라고 부추깁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너도 스스로 신이 될 수가 있다고 합니다. 신의 능력이 인간 속에 잠재되어 있는데 그 능력을 개발만하면 얼마든지 위대한 신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그 최초의 유혹을 지금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여서 가장 하나님의 위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인간이 스스로 예수님을 모셔서 영을 소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육신에 속한 인간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기에 자신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영이 필요하다다는 그 인식조차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과 영 사이에서 하나는 버리고 하는 선택하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정하여 놓고서 그 사람을 본받으라고 해서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하고 금식한다고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창세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때가 되어 주의 영이 부어짐으로 인하여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영이 거하는지 아니하는지 정말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로마서 8:15절에서 보시면 양자의 영, 즉 영이 임하시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여기서 그냥 하나님 아버지하고서 부른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영이 임하여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부른 그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입니까?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매다시는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부를 때에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주시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아버지, 그 거룩히 여기심을 위한 아버지인 것입니다.
한 곳을 더 봅니다. 고린도전서 12:3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는 자는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것은 나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고 나는 종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주권은 없다는 것입니다. 살리고 죽이는 것이 나의 손에 있지 아니합니다. 일어서고 넘어짐이 나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이 나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주면 먹고 주지 않으면 굶고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무익한 종이라고 하는 자가 예수님을 주로 믿는 자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또다시 어떤 마음이 듭니까? 그래 이제부터 내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지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무익한 종이라고 해야지 그러면 영의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자기가 주체적으로 무엇을 행함으로 영의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육신에 속한 생각이며 사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영에 속한 사람이란 무엇입니까?
10절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몸은 장차 죽을 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시면 지금 몸이 죄로 인하여 죽은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자기의 육신에 선한 것이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자기의 행위가 죽은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향하여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너는 죽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는 그 생각이 사람의 일이고 마귀의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면 더 이상 자신의 행위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영을 인하여 산 것입니다. 그러면 영으로 산자는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성전 미문 입구에서 날 때부터 지체 장애가 있어 구걸하는 사람을 일으키는 사건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일어나리라는 생각을 하지도 못하고 그저 돈이나 한 푼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향하여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가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니 벌떡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한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여 봅니다. 그때 베드로의 말이 왜 우리를 주목하는가 하면서 자신들의 경건이나 권능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이 이 사람을 일어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은 죽은 자요 영이 임하여 산자의 모습입니다.
바울의 경우는 자기가 살았다고 여길 때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고 나니 자신은 죽고 주님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었다는 것은 자기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공식으로 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한 사람 안에 죽음과 삶이 공존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방금 죽었다고 하고서는 또 육체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성령이 임하고 난 이후의 인간의 모습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자기가 살아 있습니다. 믿는 것도 자기가 믿는다고 하고, 선택도 자기가 한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영이 임하고 나면 자기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 죽음의 일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는 죽은 자로 여기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4-6절을 봅니다. “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 로서 났느니라 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5절에서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떤 좋은 일이 생기면 그 만족스러운 결과의 원인을 사람에게서 찾습니다. 자신의 정성과 헌신으로 무엇이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이 임한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로 온 것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입니다. 율법은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은 살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리시는 것입니까?
11절을 봅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그 살리신분이 그 영으로 인하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부활도 우리의 육신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의 노력으로 부활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은 것에서는 죽은 것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야 그 영으로 죽을 몸도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며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입니다. 그것이 육신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영이 임함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영이 임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이미 죽은 자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기대하지 않기에 실망도 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에게 무슨 실망할 것이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은 자이기에 세상의 성공과 실패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성공하였다고 폼 잡을 일도 아니고 실패 하였다고 주눅들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만족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된 것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잘해서 복 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잘못해서 저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잘해서 복을 받고 예수님께서 대신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저주를 받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것은 이제 자기를 믿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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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2)산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는 말씀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육신의 일이 나오고 영의 생각으로 영의 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신의 생각과 일이 세상을 사랑하고 음란하고 방탕하여 누가 보아도 죄라고 하는 그런 것만이 육신의 생각과 일이 아니라 가장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숭고한 종교적인 모습에서도 얼마든지 육신의 생각과 일이 있다는 것을 니고데모와 베드로를 통하여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무엇으로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요일 날 교회를 간다. 좀더 열심인 사람은 수요일과 금요일 새벽기도도 간다는 것으로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연보도 하고 많은 봉사를 한다고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서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9절을 봅니다.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는지 영에 있는지의 기준이 무엇에 달린 것입니까?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이 그 사람에게 있으면 영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두 가지를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것과 이 영이 사람의 행위로 선택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을 왜 함께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같은 영입니까? 다른 영입니까? 사도행전 2:33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이 말씀은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사람들이 술에 취하였다고 하는 말에 대한 베드로의 변론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세에 부어주시기로 약속하신 영을 보내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요엘 선지자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여서 이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그 높아지신 자리에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이 아버지로부터 받아서 예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는 것이기에 같은 영입니다.
그러면 이 영, 그리스도의 영을 받는 것을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되는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보아온 요한복음과 사도행전 로마서를 통하여 결코 인간의 육신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그러나 그 영접이 혈통이나 육신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아니하는 것임을 보았습니다.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과 일이란 결국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육신에 속하여 사망을 선택한 결과 사망으로 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태어난 것이기에 내가 선택하지 아니하였는데 육신에 속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육신에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육이 영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성경에서 증거 하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여전히 인간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라고 부추깁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너도 스스로 신이 될 수가 있다고 합니다. 신의 능력이 인간 속에 잠재되어 있는데 그 능력을 개발만하면 얼마든지 위대한 신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그 최초의 유혹을 지금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여서 가장 하나님의 위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인간이 스스로 예수님을 모셔서 영을 소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육신에 속한 인간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기에 자신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영이 필요하다다는 그 인식조차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과 영 사이에서 하나는 버리고 하는 선택하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정하여 놓고서 그 사람을 본받으라고 해서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하고 금식한다고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창세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때가 되어 주의 영이 부어짐으로 인하여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영이 거하는지 아니하는지 정말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로마서 8:15절에서 보시면 양자의 영, 즉 영이 임하시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여기서 그냥 하나님 아버지하고서 부른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영이 임하여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부른 그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입니까?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매다시는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부를 때에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주시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아버지, 그 거룩히 여기심을 위한 아버지인 것입니다.
한 곳을 더 봅니다. 고린도전서 12:3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는 자는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것은 나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고 나는 종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주권은 없다는 것입니다. 살리고 죽이는 것이 나의 손에 있지 아니합니다. 일어서고 넘어짐이 나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이 나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주면 먹고 주지 않으면 굶고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무익한 종이라고 하는 자가 예수님을 주로 믿는 자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또다시 어떤 마음이 듭니까? 그래 이제부터 내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지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무익한 종이라고 해야지 그러면 영의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자기가 주체적으로 무엇을 행함으로 영의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육신에 속한 생각이며 사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영에 속한 사람이란 무엇입니까?
10절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몸은 장차 죽을 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시면 지금 몸이 죄로 인하여 죽은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자기의 육신에 선한 것이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자기의 행위가 죽은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향하여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너는 죽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는 그 생각이 사람의 일이고 마귀의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면 더 이상 자신의 행위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영을 인하여 산 것입니다. 그러면 영으로 산자는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성전 미문 입구에서 날 때부터 지체 장애가 있어 구걸하는 사람을 일으키는 사건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일어나리라는 생각을 하지도 못하고 그저 돈이나 한 푼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향하여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가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니 벌떡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한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여 봅니다. 그때 베드로의 말이 왜 우리를 주목하는가 하면서 자신들의 경건이나 권능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이 이 사람을 일어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은 죽은 자요 영이 임하여 산자의 모습입니다.
바울의 경우는 자기가 살았다고 여길 때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고 나니 자신은 죽고 주님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었다는 것은 자기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공식으로 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한 사람 안에 죽음과 삶이 공존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방금 죽었다고 하고서는 또 육체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성령이 임하고 난 이후의 인간의 모습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자기가 살아 있습니다. 믿는 것도 자기가 믿는다고 하고, 선택도 자기가 한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영이 임하고 나면 자기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 죽음의 일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는 죽은 자로 여기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4-6절을 봅니다. “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 로서 났느니라 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5절에서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떤 좋은 일이 생기면 그 만족스러운 결과의 원인을 사람에게서 찾습니다. 자신의 정성과 헌신으로 무엇이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이 임한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로 온 것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입니다. 율법은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은 살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리시는 것입니까?
11절을 봅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그 살리신분이 그 영으로 인하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부활도 우리의 육신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의 노력으로 부활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은 것에서는 죽은 것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야 그 영으로 죽을 몸도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며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입니다. 그것이 육신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영이 임함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영이 임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이미 죽은 자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기대하지 않기에 실망도 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에게 무슨 실망할 것이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은 자이기에 세상의 성공과 실패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성공하였다고 폼 잡을 일도 아니고 실패 하였다고 주눅들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만족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된 것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잘해서 복 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잘못해서 저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잘해서 복을 받고 예수님께서 대신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저주를 받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것은 이제 자기를 믿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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