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24:18:25 -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ㅡ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작성자지미박|작성시간26.06.06|조회수42 목록 댓글 0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사무엘하 24:18-25

삼하 24:18, 개역) 『이 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소서 하매』

(삼하 24:19, 개역) 『다윗이 여호와의 명하신 바 갓의 말대로 올라가니라』

(삼하 24:20, 개역) 『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 신복들이 자기를 향하여 옴을 보고 나가서 왕의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삼하 24:21, 개역) 『가로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다윗이 가로되 네게서 타작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로라』

(삼하 24:22, 개역)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고하되 원컨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하는 제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삼하 24:23, 개역)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고하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삼하 24:24, 개역)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삼하 24:25, 개역)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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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하나님의 재앙 앞에서
자신이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인 것을 압니다.

자신과 자신의 아비 집을 쳐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다윗이 인구 조사를 명할 때와
온역이
자신이 인구 조사한 땅에 임했을 때에는
완전히 바뀐 다윗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갓을 통해
다윗에게 행할 일을 알려 주십니다.

하지만 다윗의 존재란
단순히 자기 침으로 채워지거나
마감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천국 보내는 것도 목적이 아니듯이
지옥보내는 것, 혹 망하게 하는 것도
목적이 아닙니다.

사람이란 자신이 목적이 아닌 적이 없습니다.
늘 자기 자신을 기준 삼아
삶의 목적을 정합니다.

심지어 자기 뜻대로
목적 달성이 되지 않았을 경우에도
여전히 자신이 목적임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다윗을 상대로 하고자
언약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언약이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이러한 태도는
그저 언약을 위한
하나의 조치에 불과합니다.
연이어 다른 조치가 계속 주어져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자신을 부인하는 그것으로
성도의 목적을 다하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뜻은 따로 있는데,

그것으로 성도의 인생은 다루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성도가 망해야 되는 일을 능가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비우는 다윗의 마음에
하나님의 언약의 실제적인 주인공으로 채우려하십니다.

그 기능을 실시하는 것에 있어
여기에 아라우나가 동원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라우나를
다윗과 만나도록 주선합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보여주게 됩니다.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는
왕에게 다음과 같은 태도를 보여줍니다.

20-21절에 보면,
“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 신복들이 자기를 향하여 옴을 보고
나가서 왕의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가로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다윗이 가로되
네게서 타작 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로라”

즉 아라우나와 다윗의 만남에서
요점은 곧 번제에 관한 겁니다.

이것은 서로가 서로의 가치를
돋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만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만남이
하나님의 주선에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알고 있으며
그 와중에서 오로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드러내는 계기가 됨을 압니다.

여기서 아라우나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번제의 목적을 이루는데 집중합니다.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하는 제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라고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번제를 드리기 위한 목적으로
준비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고유의 가치를
별도로 마련해두고 있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다윗도
번제를 위해 갓 선지자의 지시를
따릅니다.

이 둘의 만남에 중요한 점이 밝혀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이라고 해서
인간의 것을 받아서
번제를 성사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은 사람의 것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것을 거저 받으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값을 치루시면서
하나님 자신의 번제를 완성시키시겠다는 것이
참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값을 치르는 기능은
여기서 다윗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다윗언약대로 움직일 따름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다윗은 ‘값을 치르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백성들에게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누가 천국가고 누가 지옥가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놓으신
‘값 치름’에 관심을 집중시키십니다.

따라서 성도도 필히
이 값에다 신경써야 되는 겁니다.

다른데 관심 두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신의 ‘가치를 챙기는’ 수법을
되풀이해서 시도하게 될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시면서 나오는 순간,
우리 인간들에게는 더 이상
치뤄야할 값도, 즉 어떤 가치도
허용될 수 없음이
분명해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인간들이
스스로 주장하는 ‘자기 가치 챙기기’를
오로지 예수님만 유일한 가치가 되게하시는데 주력하십니다.

로마서 3:25에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화목제물’이란
인간들이 내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미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불교계에서 주장하는 말을
들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보면
언약이 없는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주변에서
언약이 없는 이방인들의 인생관, 세계관을
찾아야 합니다.

즉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값’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지를 말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란
곧 인간이란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겁니다.
바르게 살고, 바르게 생각하면,
공덕이 자신의 쪽으로 모아진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인간이란
자신의 가치를 더 크게 키우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비언약적 태도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언약에 의하면
인간은 흙입니다. 후~불면 사라지는 한줌먼지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이 흙이라는 사실을 잊고
어느새 인간의 자기가치를 챙기고자 할때
본인만 계속 힘들어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자기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기껏 흙일 뿐으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면하고
인간다운 가치를 챙기려는 순간,
이런 행위와 태도 때문에
예수님의 가치를 모독할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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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우나는 그 어떠한 값도 받지 않고
번제를 성사시키려고 하지만
다윗은 기어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지불하시는
그 값이’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가치있게 보시며,
그 가치를 위해
다윗에게 언약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매일같이 우리가 우리 가치를
챙기려하는 시도때문에
예수님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십자가에 내몰았는지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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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강-삼하24장18-25(아라우나의타작마당)-2sa101219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24장 18절에서 2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507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24:18-25

“이 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소서 하매 다윗이 여호와의 명하신바 갓의 말대로 올라가니라 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 신복들이 자기를 향하여 옴을 보고 나가서 왕의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가로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다윗이 가로되 네게서 타작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로라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고하되 원컨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하는 제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고하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오늘 본문 보기 전에 17절 끝에 보면, 다윗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다윗이 처음에 인구조사 할 때 마음하고 이 마음하고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손으로 저를 치는 것이 하나님답습니다. 저 같은 인간은 맞아야 됩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죠. 여기서 우리가 놀라운 사실은, 인간이 자기가 목적이 되지 않은 적이 없어요. 항상 어떤 일에 자기 자신이 자기 인생에 목적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목적인데 자기가 스스로 망가질 수 없는 목적을 하나님의 손으로 쳐버리면, 그 친 그 흔적이 뭐냐, 내 목적은 사라지고 주의 목적만 여기에 도착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말이죠.




그러면 다윗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다윗의 생각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이 내가 이 땅에 살아가는 이유, 맞습니다. 나는 그 전까지는 내 욕심 때문에 그걸 가로막았지만, 이제 하나님의 재앙이 덮치고 난 뒤부터는 ’아, 내가, 내가 사는 목적이 될 수 없음을 이제 알았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왔다는 거예요. 그러면 문제 해결 된 겁니까? 남은 문제는 한가지예요. 뭐냐 하면, 다윗은 자기를 내드렸습니다. ’이제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내어 드렸다면, 자기 목적이 없고 자기 의지가 없다면, 그 빈자리를 뭐로 채우느냐 하면, 이제 하나님의 조치로서 채워줄 것인가?




그런데 다윗이 여기서 하나 모르는 게 있습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치는 것이 목적이냐 하는 겁니다. 그것이 다윗 언약을 주신 다윗의 갖고 있는 생각이다 말이죠. 아까 목사님 기도할 때, ‘우리를 치고 지옥에 보내 달라’ 하는데, 나를 지옥 보내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나를 치는 게 목적이 아니거든요. 목적이 아닌 줄 알고 충분히 그런 이야기 했겠지만..ㅎ 나를 쳐서 지옥 보내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그럼 목적이 뭐냐, 뒤에 오늘 본문에 나와요. 자기 자리를 하나님께 내놓았습니다. 빈자리로 나갔습니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누구의 몫이냐 하면, 하나님이 그 다음에 하나님이 채울 몫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나를 치소서.’ 라고 나왔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니 치는 것이 내 목적이 아니다.’ 라고 하시는 거예요. ‘니 지옥 보내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다.’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목적은 뭐냐, (졸기 전에 이야기해야 돼요. 중요한 이야기니까ㅎ) ‘하나님 자신’을 지상에 펼치는 겁니다. 내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펼치는 것이지, 니 지옥 보내는 게 노림수가 아니에요. 너의 빈자리에다 예수님을 채우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을 어떻게 채우는가? 그 뒤에 갓이라는 선지자가 등장해서 지시를 해주죠. ‘니 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니 빈자리에 예수님이 들이차야 되는 게 목적이다.’ 그 목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아라우나!! 아, 이름이 어려워요. ‘아라우나 타작마당을 니가 사서 번제를 드리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그 빈자리에 장차 오실 하나님이 어떤 모습인지를 채워야 되겠죠. 그러면 아라우나라는 이 사람하고 다윗이 인구조사 할 때 그 마음가짐하고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한번 보자 이 말입니다.




여기에 다윗이 말하기를 ‘ 내가 너희 집과 재물을 돈 주고 사겠다.’ 이렇게 나오니까 아라우나가 하는 말이 22절에 보면 “이것을 제가 돈을 받을 일이 아니고 원하시는 대로 다 드리겠습니다.” 23절에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전부를 기쁘시게 하나님께서 받기를 원합니다.” 다 드리는 마음 이예요. 그렇다면 다윗의 빈자리는 지금 다윗은 빠져 버리고, 아라우나라는 사람과 하나님의 지시하는 그 기능과 만나서, 장차 오실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기능만 남아있는 거예요.




다시 말씀 드립니다. 내 지옥 가는 게 목적이 아니고 내 치는 게 목적이 아니고 우리의 빈자리에다가 예수님이 어떤 일을 이 땅에 실시했는가를 듬뿍 담는 그릇이 바로 우리의 진짜 성도의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굉장히 난해하기 때문에 그것을 쉽게 하기 위해서, 미리 정답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서 3장2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화목제물로 오셔서 새로운 구원의 통로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게 되면, 그걸 믿는 자도 의롭고 그리고 그렇게 하시는 예수님도 의롭고, 이 작업이 로마서 3장 신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 다음에 4장에 보면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일하는 자에게는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해서 값을 대신 치루시는 일을 하는 거예요. 값을 대신 치워서 우리의 모든 죄(재앙)를 철회하고 모든 저주를 벗겨내는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 일을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 일이 다윗의 빈자리에다가 그것을 채우는 거예요. 여러분이 요리할 때, 호박에다 안에 뭐를 넣고 요리할 때, 호박 안을 파내고 고기 다진 것이나 재료를 그 안에다 집어넣는다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옥 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우리를 후벼내요. 후벼내서 값을 주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시키는 그 어떤 일을 하시는가? 주의 일이 우리의 빈자리를 채우게 하시는 겁니다. 채우게 하실 때, 아라우나가 우리를 대신해서 거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우리는 아까 이야기했지만, 우리밖에 몰라요. 우리 것만 챙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것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분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마치 아라우나처럼,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면 뭐든지 다 드리겠습니다.‘라는 방식으로 나오죠.




그럼 여기에서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다윗이 그 일을 대신합니다. 다윗이 말하기를 아라우나에게,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값없이는 번제를 드리지 않겠다고 나옵니다. 여기에서 값이 얼마냐 하면 은 오십 세겔을 드립니다. 다윗은 아라우나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아라우나가 그 값을 받고 재물과 땅을 바치면 그곳에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더니만 하나님께서 받으셨다 말이죠.




그러니 이 이야기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값’이라는 것이 흥정되지 아니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말이죠. 하나님이 그냥 용서하시고 그냥 징계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징벌을 내리시고 구원하시는 능력이 있지만 하나님의 관심사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값을 치뤘다’는 그 값에다가 모든 사람이 집중하기를 원하고 관심두기를 원하는 겁니다. 값을 치렀다는 거예요.




제가 오랫동안 불교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해 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왜 불교를 하느냐 하면, 구약에 나오는 이방종교, 이방 신, 그것이 간단 간단하게 나와 있거든요. 그런데 이방 신이 어떤 마음에서 우상을 섬겼고 이방 신을 섬겼는지를 우리 주변에서 공부를 할 수 기회는 바로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려고 하느냐, 애를 쓰고 있느냐를 살펴보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 주위에 불교 책이 많고 불자들이 많고 불교 목매는 아줌마들이 많으면, 그 사람들이 사고방식과 행동하는 것을 유심히 그걸 관찰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멋진 기회가 되는 거예요. 뭐냐, 내가 그들 입장이 돼 보는 겁니다. 그들을 만나 보는 거예요. 중을 만나보던지 불교에 심취된 사람을 만나 보는 겁니다. 대화를 해 보는 거예요.




‘당신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갑니까?’ 라고 물어보죠. 그들은 말합니다. ‘덕을 쌓아야 됩니다.’ 사람이 인덕을 쌓아야 되고 천 덕을 쌓아야 되고 덕을 쌓게 되면? 그 다음의 말은, 덕을 쌓게 되면 뭡니까? ‘복을 받습니다.’ 복을 받으면 부자 된다는 거예요.ㅎ 물었어요. '부자 된 그 돈은 어떻게 되죠? 나눠줘야 한다는 거예요. 나눠주면 덕 쌓아서 부자 되고 또 나눠주면 덕 쌓아서 부자 되고...., 이중으로 버는 거죠.ㅎ ‘돈을 모아서 모은 돈 가지고 나오지 말고 바로 가면 안 됩니까? 하나 거쳐서 가는 것보다 나한테 돈이 안 모아지는데, 바로 덕 쌓아서 지는 안 되도 남 좋게 하면 안 되겠습니까?’ 라고 물으니까 할 말이 없죠.







‘공덕을 왜 쌓아야 합니까?‘ 이 질문은 불교 신자만이 아니라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도 묻고 싶은 거예요. ’교회 왜 나오십니까?‘ ’덕을 쌓기 위해 나왔습니다.‘ ’그걸 왜 쌓으려 합니까?‘ ’금요 철야에 왜 커피 마셔가면서 왜 덕을 쌓으려 합니까?‘ ’부자 되려고 합니다.‘ ’왜 당신이 부자 되어야 됩니까? ‘나는 고귀하거든요. 나는 값어치 있는 값있는 존재거든요.’




아!! 우상이라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우상이라는 사실을 증언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흙으로서 사람 만들었다가 죄 짓고 난 뒤에 사람이 각자 흙으로 돌아가거든요. 그렇다면 흙은 흙의 행세를 하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언제부터 사람이 힘들었느냐 하면, 흙이 사람 행세를 할 때 힘들어요. 개가 개처럼 살면 되는데 개에다 옷 입히고 개에다가 침대 눕히고 개에다가 사람처럼 온갖 음악을 들려주고, 개 끌고 야구장에 가서 야구 같이 응원하게 만들고, 개한테 노래시키고 이러면 개는 자기가 인간이 아닌데 개는 죽을 지경 아닙니까?




하나님의 약속(언약)이 뭐냐 하면, ‘흙은 흙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네가 인간 되는 것은 네가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값은 값있는 분이 값을 치룰 때만 값이 주어지는 거예요. 우리의 값은 우리가 노력해서 채우는 것이 아니고, 진짜 사람 되시는 분이 우리의 값을 치룰 때, 그 값 자체가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 때문에 값있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값을 치룬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들아 너는 값어치가 없다.’는 말 이예요. 값어치가 없다는 말은 가치가 없다는 존재라는 거예요. 가치라는 것은 우리가 빈 그릇인데 그릇에 뭐를 채울 때 따라서 규정된다는 거예요.




다시 불교 이야기 해 봅시다. 불교 사람들에게 만약에 상상을 하는데, ‘공덕을 쌓을 때, 만약에 공덕이 잘 안 쌓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더 착한 일을 하죠.’ ‘왜?’ ‘착한 일을 해야 공덕이 쌓이니까. ’그런데 공덕이 자기 생각보다 예상보다 많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죠?’ 강제적으로라도 공덕을 쌓도록 해야죠. 왜냐, 그래야 공덕을 쌓아야 내가 값어치 있는 인생을 사니까 그 다음부터 내가 폭리를 취하고 이기주의로 변모하잖아요.




그렇다면 이러한 우상 숭배하는 인간이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자기밖에 모른 사람이라면, 그러한 사람이 어디에 필요한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디에 필요한가 보니까 바로 다윗 같은 역할을 하는데 필요해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일을 배제당한 재앙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로서 필요한 겁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이 있어줘야 뭐가 만들어지느냐 하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만들어지고, 하나님의 값어치라 하는 것은 세상이 생각하는 가치하고 전혀 유통이 안 된다는 것, 연결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적절한 거예요. 그렇게 되니까 우리 자신이 어떻게 존재해야 되느냐가 분명히 밝혀졌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얼마나 우리의 가지를 높이기 위해서 예수님의 가치를 무시하면서 살아왔는가, 내가 가치 있기 때문에, 내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너무 귀중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값으로 사셨다는 그 값에 대해서 우리는 배격하고 멀리한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을 살면서 나도 결국 쓸모짝 있는 데가 어디냐 하면, 예수님을 모독하는데, 예수님을 멸시하는데 우리를 충분하게 동원시켰다는 사실에 대해서 비로소 눈뜰 때, 그 사람은 다윗처럼 자진해서 예수그리스도가 이 안에서 일어나도록 모든 것을 비어놓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겁니다.




‘나는 나밖에 모르는데 제발 나밖에 모르는 이 자리에 우리 예수님 찾아오셔서 내가 얼마나 나밖에 모르며 못된 인간이라는 것을 늘 이렇게 지적해 주시옵소서. 그런데 지적할 때는 나의 값어치보다 주님의 가치가 더 높다는 것이 드러날 수 있도록 그런 조치가 늘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는 이야기가 되죠. 그렇게 되면 그 다음 과정은 뭐냐 하면, 우리는 성경을 보며 매사를 대할 때, 세상을 편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남들이 뭔가 나쁜 짓을 하면, ‘아! 저게 바로 내 모습, 내가 모르던 내 깊숙이 숨어있는 내 본 모습이다.’ 신문지를 말아서 애를 팰 때, ‘저게 바로 나도 어린이집 하면, 말 안 들으면 조진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너는 나보다 가치가 없어.’ 가 아니라 더 가치 없는 인간이 바로 내 본모습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그런 즐거움을 갖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웃집이나 불교 신자나 누구하고도 아주 사이좋게 지낼 수가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힘들어 못살죠. ‘하나님, 나는 착한데 왜 세상은 악합니까? 내가 이웃이기 때문에 사람과 세상과 소통이 되지 못하고 세상을 미워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성경을 보고 다윗을 보면서, ’아! 매 맞아야 될 사람이 나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누구한테도 온화하게 다가설 수가 있습니다. 저쪽에서 ‘나를 알아줘! ’ 이래 나오면, 나도 한때는 그랬지, 알아 드릴게요.‘ ’니는 인간도 아니야,‘ ’근데 나도 인간이 아니거든.‘ ’너 기독교 신자라고 술 안 마신다면서?‘ 속으로 ’니 술이나 처먹고 죽어라.‘ ’술 드세요. 드세요.‘ ’너도 한잔 먹지,;‘ ’나도 한잔 먹을게, 어차피 인간도 아닌데, ‘나는 안 먹는다.’ 이게 아니라 ‘그래 나도 한잔 먹을게,’ ‘니도 한잔 먹고 둘 다 취해서 우리 귀신 되자. 어차피 망하는 거.’ㅎ




둘 다 가치 없는데, 하나님의 웬 은혠지,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나는 가치 없음을 알고, 저들은 가치 없는데도 있는 척을 하는 거예요. 불교 신자들, 공덕을 쌓고, 덕을 쌓고. 덕 쌓아서 뭘 할 건데요? 방금 여기까지 했죠. 그럼 반대되는 이야기를 합시다.




반대되는 이야기를 할 테니까, 왜 반대되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가 하면, 오늘날 신학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합니다. 옛날에는 ‘전에는 우리가 죄인이었다. 하지만 예수 믿고 난 뒤에는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고귀한 사람이기 때문에 고귀한 사람답게 스스로 자기를 공경할 줄 알고 존중하면서 사랑하면서 우리는 자기를 사랑함같이 남을 사랑해야 된다. 따라서 우리는 행동에 반듯해야 되고, 조심해야 되며 하나님의 덕을 위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야 된다. 에베소서 5장처럼 그렇게 우리는 ’빛의 사람아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라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매사에 조심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된다.’란 것이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한 번도 소수가 아니고, 대세로 지배하는 신학으로 교회서 그렇게 이야기 됐었습니다.




자, 여러분! 속으로 한번 물어볼게요. 그렇게 되면 가치가 누가 올라갑니까? 예수님 가치가 올라갑니까? 우리 가치가 올라갑니까? 예수 믿는 가지가 올라가죠. 우리 가치가 올라가면, 이거는 주의 일이 누구 일이 되느냐 하면, 가치 있는 나의 일로 돌변해 버립니다. 만약에 누가 가치 있는 나의 일에 시비를 걸게 되면 우리는 숨어있는 것이 와락 달려들죠. ‘모든 걸 드리소서.’가 아니라 지금 내가 가진 것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곧 나의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손대지 마라.’ 고귀한 것이라고 버틴다 말이죠. 이게 과연 공덕을 쌓는 불교와 다른 점이 뭐가 있느냐 말이죠. 이걸 두 번째 이야기 합니다만 이런 사로방식이 사람들에게 오히려 잘 먹혀들어가죠. 왜? 다들 불교신자기 때문에.ㅎ




다들 불교 신자기 때문에 교회 나온다 하지만, ‘공덕을 쌓으면 나는 부자가 된다. 부자가 못 된 것은 공덕을 덜 쌓아서 그렇다. 남한테 착한 일하면 돌아오는 보상으로 복을 받아서 이 세상에서 보란 듯이 살게 된다.’ 라는 것이 늘 있기 때문에, ‘나는 가치 있다. 나는 고귀하다.’ 이런 것들이 늘 있다 보니까, 내 안에서 누가 편집 하냐 하면, 값있는 예수님, 하나님의 값있는 하나밖에 없는 예수님의 가치가 우리한테는 천시 받고 천대받는 그런 형편에 있는 겁니다. 제가 2개를 이야기 한 것은 둘 다를 가지고 생각해 보세요. 어느 것이 다윗의 마음이고, 어느 것이 사도의 마음이고 어느 것이 스데반 집사의 마음이고 어느 것이 거지 나사로의 마음이었던가.




사람이 예수님의 가치를 우리가 더 높이지 않는 한, 본인이 너무나 힘들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 남은 빈껍데기지만 이 껍데기마저도 내 가치가 아니라 주님의 가치를 위하여 주께서 껍데기인줄 아시고 귀한 분 들어오셔서 그 쓸데없는 껍데기를 귀하게 쓰시는 그 분의 공로로 우리가 성도가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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