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조사
삼하24:1
(삼하 24:1, 개역)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유다와 이스라엘에 인구조사를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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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인간조사를 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시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치셔야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사랑 자체가
날마다 돋아나야 합니다.
이 사랑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원인은
이스라엘 스스로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자기네 나라라고 우기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전쟁이라는 겁니다.
영적 전쟁이란 외계인들이 등장해서
레이저 광선쏘는 전쟁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우리 것으로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것으로 있는 것인지
사이의 싸움입니다.
만약 우리 것이라고 버티면
악마의 밥이 될 것이고,
만약에 하나님의 것으로 있다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며
그 결과에 대해서 성도는 대만족을 할 것입니다.
자신의 것으로서 다 날아가고
오로지 하나님의 것으로 바뀐 즐거움이 있게 됩니다.
이 싸움은 한 번으로 끝날 싸움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되풀이 됩니다.
평생을 걸쳐 일어나는 싸움입니다.
찬송가 100장 가사에 보면
이런 대목이 처음 나옵니다.
“죄인 괴수 날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
만약에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죄인 괴수’가 처음 믿을 때 한 번으로 끝났다면
두 번 다시 이 찬송가를 부를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는
이단, 정통할것없이 일회용 구원에 빠져
헤어나올줄 모릅니다.
즉 이제는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새 생명 가운데 사는데
무슨 ‘죄수 괴수’냐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언약의 말씀은 믿지 못하고
도리어 자기 정체성때문에
교회중심의 종교생활로 대체되고있는 실정입니다.
즉, 말씀에 대한 이해는 없이
문자풀이로 일관된 온갖 이단의 노리개역할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를 실시해서
하나님께 벌을 받는데,
만약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이런 다윗의 경우가
해당되지 않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러면 성경 전체가
소용없는 책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진노하시고 치신 것이
결과가 아니라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윗이 잘못해서 치시는 것이 아니라
치시기 위해서 다윗은
본의 아니게 인구 조사를 해야만 하는 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의도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이란 항상 원인을 과거에서 찾는
버릇 때문입니다.
만약에 원인이 미래에 있다면? 어떨까요?
이 때 우리들의 사고방식은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의 영적 전쟁에서의 전리품으로
나타난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일회용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의 성격에 대해서
새롭게 발췌되어야 합니다.
즉 영적 전쟁이라는 것이
무엇과 무엇의 싸움인가를
영적 전쟁물의 부산물인 이스라엘이
놓쳐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어 나가십니다.
무엇을 위하여?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하나님 자기영광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시험대 위에 놓여 있는
시료가 됩니다.
사람들의
과거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항상 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자기 것으로 여기지만
하나님께서 미래에 바탕을 둔 작업으로 인하여
그 모든 것은 모두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벌어져야만 하는 일들입니다.
여기서 ‘미래’라는 것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는
그 순간을 두고 말합니다.
십자가 사건에서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미래에 대해서
어두운 인간들의 현 모습을
다윗과 이스라엘을 통해서
드러내 보이겠다는 것이
이번 하나님께서 관여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일으킨 사건에
다윗 외에 두 사람이 등원됩니다.
한 사람은 요압장군이요
다른 한 사람은 갓 선지자입니다.
이들은 다윗의 경거망동에 대해서
다윗 자체에 원인이 있다고 여기고
충고합니다.
남의 잘못은 쉽게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더 깊이 들어갑니다.
자신의 본래의 자리가
무엇인지를 파악합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인구조사를 할 때에
그의 자리는
곧 세상적인 권력 행사가 가능한 자리입니다.
하지만 갓 선지자가 오기 전에
그는 이미 자신이 앉을 자리가 아닌
엉뚱한 자리를 차지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사무엘하 24:10에 보면,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종’이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동안 잠시 백성들과 자기 사이에서
군림하던 자신과,
인구조사가 끝난 후에
하나님의 백성인 종으로서 자신을 비쳐봅니다.
다윗은 종’의 자리가 더 적절한 자리였던 것을
알게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경우는
오늘날 성도들에게 .
늘 상 일어나는 일입니다.
세상과 비교할때면
자만하고 자기 것에 대해
애정을 듬뿍 쏟아붓다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자책하게 되면,
자기 자리란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 절차에 돌입하게 되는데
그것은 마땅히 벌 받아야 될 입장이
자기자신이라는 원래의 자리를
다시금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준비된 재앙을 골라 잡게 하십니다.
13절에 보면,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시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시 왕의 땅에 삼 일 동안 온역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하게 하소서
다윗은 세 번째 재앙을 선택합니다.
하나를 선택하면
둘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 포기한 두 개의 사항과
선택한 하나의 사항의 차이를
하나님께서는 주시하시겠다는 겁니다.
일종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상대로
심리검사를 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다윗이나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장차 드러낼 모습과
관련 있습니다. 이를 "하나님의 자기영광을 위해서"
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여기서 제일 짧은 기간을 택합니다.
백성들에게 고통을준 왕으로서
그 벌칙을 어떻게든 줄여주려는 책무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치시기 위해
다윗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무너져 내려야 될
팔자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저주로 둘러싸인 환경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힘든 환경 속에서
이런 재앙과 저주가
어디서 오며
왜 그것이 사랑의 이름으로
택한 자에게만 진행되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세 가지의 재앙은
장차 이 지구상에 내릴 유황불 재앙을 미리 앞당겨받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유황불 앞에서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본래의 자리는
진노받을 자리이며
그 자리를 파악하는 것이
곧 사랑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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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7강-삼하24장1(인구조사)-2sa101212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24장 1절입니다. 구약성경 506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24: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인구조사 하는 것, 인구센서스라 하죠. 인구조사 하는 이것이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여기에 1절에 보면, 용어가 나옵니다. ‘진노하사’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고담에 나온 용어가 ’치시려고‘ ’진노하사, 치시려고, 여기 이스라엘이라는 칸에다가 ‘우리교회’ 또는 ‘십자가마을’을 집어넣어 보세요. ‘하나님께서 십자가마을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그 다음 문장은 유보하세요.
유보하시고 하나님께서 특이한 점,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아직까지 떨어지지 않고 이스라엘을 내팽개치지 않고 이스라엘에 관심이 있다는 증거가, ‘진노하사 치시려고, 가 되는데, 그 뒤에 ’진노하사 치시려고, 때문에 새롭게 발생된 특이한 현상을 다음 문장 중에 몇 번에 해당되겠습니까? ① 우리교회가 술을 마셨다 ② 화투를 쳤다 ③ 놀러갔다 ④인구를 조사했다 ㅎ 교인수가 몇 명이냐? 라는 것을 조사케 한 겁니다. 그것을 거꾸로 바꿔보면, 인구조사를 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서 인구조사를 하는 사람, 여기서는 다윗이죠. 다윗에 의해서 지시되어 인구조사가 되게 되면, 그 밑에 인구조사를 당하는 백성들은 누구 소유가 되느냐, 누구에게 소속이 되느냐, 다윗에게 소속이 되게 돼 있습니다. 내꺼다 이 말입니다.
마치 집에 통장 몇 개, 세는 것처럼, 이 사람은 내꺼.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치시려고, 만들어낸 작업이 뭐냐, 다윗이 하는 말 ’하나님 고맙습니다. 요 백성, 내 것입니다.‘ 나오겠죠? 그러면 진노의 과정, 고걸 부수는 과정이 되겠습니다. 부수게 되면, ’하나님, 제 것은 하나도 없군요.‘ 라고 하면 그 진노로 치심의 효과를 톡톡히 본 겁니다.
그래서 평소에 ‘하나님, 이거는 내 것입니다.’ 하지 말고, ‘주여, 내 것은 없습니다.’ 한다면 아예 애시당초 진노와 치심은 해당이 안 되는 겁니다.ㅎ 참 쉽죠~ㅎ
애가 셋 있으면, ‘애 세 명 다 내 껍니다.’ 말 안했으면, 애 두 명이든 세 명이든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인생을 힘들게 안 살아도 되는데, 눈만 뜨면, ‘요 자식은 내가 알아서 책임지겠습니다. 내 자식입니다.’라고 하신다면 우리가 진노와 치심에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이스라엘 상을 제시한 거예요. 여기 이스라엘 있다. 컵이 있다. 종이 있다. 뭐가 있다. ~있다. 라고 하는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에요. ‘있다’ 하는 것은 ‘누구십니까?’ 의 문제를 놓고 과연 하나님의 것이냐, 아니면 내 것이냐를 두고 다툼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네 자로 ‘영적 전쟁’이라고 하는 겁니다. 영적 전쟁!! 에베소서에 나오는 영적 전쟁(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영적 전쟁이라 해서 CF 영화에 나오는 외계인이 등장하는 게 아니고, 간단한 거예요.
‘현재 너 있지? 옷 있지?’ ‘옷 있습니다.’ ’안경 있지? ’안경 있습니다. 단추 있지? ‘단추 있습니다.’ ‘근데 그게 누구 거지?’ 라는 두 가지 물음에 대한 두 가지 종류의 답변, 사이의 갈등, 이것이 ‘영적 전쟁‘ 이예요.
많이 있고 적게 있음이 상관없습니다. 현재 뭐든 적게 있어도 상관없어요. 가난한 자가 밥그릇 2개만 있어도 가난한 자에게도 영적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빈 밥그릇 2개가 ‘누구 거지?’ 라고 나오는 겁니다. 더 추구하게 되면, 불편해 하는 ‘너 몸은 누구의 몸이냐? 라고 지적하는 겁니다.
아까 불렀던 준비 찬송가 100장 가사 내용을 보게 되면, 무슨 이야기가 있느냐 하면,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십자가 마을에 있는 목사들의 설교는 ‘맨 날 우리는 죄인이다. 죄인이다 설교하는데, 아예 마귀하고 살지, 왜 자꾸 그런 소리 하느냐?’라는 소리가 설교 시간에 막 해대요. 그런데 찬송가 100장 1절 가사에 보면, ‘죄인 괴수 날 위하여’ ‘죄인 우두머리인 날 위하여 십자가 지신 주‘라고 돼 있거든요. 그러면 그 교회는 100장 찬송을 처음 초심자한테 한 번 부르고, 덮어 놔버려요. 그 담에는 부르면 안돼요. 왜냐하면, 펼쳤다 하면, ’죄인 괴수 날 위하여‘ 하면 그 교회 목사가 막 나무란다 말이죠. 이젠 죄인 괴수 아닌데 왜 죄인 괴수라 하느냐? 마귀하고 살려고 하느냐? 이래 나온다 말이죠.ㅎ
자, 본격적으로 설교에 들어갑니다. 다윗이 인구조사 해서 그래서 하나님께 진노 받아서 나중에 다윗이 ‘이 백성 저 백성 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겁니다.’라고 했다 말이죠. 했다면 이 성경 구절을 매직으로 지우든지 찢든지, 이거 알았으면, 찢어도 괜찮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알았습니다.’하고 딱 알고 몇 발짝 못 가서 돌아서면, ‘그렇게 알게 된 나는 역시 내 껍니다. 나의 것입니다.’ 라고 나올 수밖에 없기에 또 다시 사무엘하 24장을 또 봐야 되는 거예요. 언젠가!!
그것이 다윗과 하나님 관계라면, 그 관계가 ‘다윗 언약’ 이라고 합니다. 그 다윗 언약, 다른 말로 ‘새 언약’인데 다윗 언약의 완성이 새 언약인데, 새 언약 관계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면, 이 사무엘하 24장의 인구조사해서 벌 받고 하는 이 이야기가 우리가 다 지킨 걸로 제발 소유하지 말아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부탁해요~~! 제발 이것을 한 번 알았다고 해서 ‘이제는 나는 떨어질 일이 없어.‘하고 장담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자부하고 장담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사무엘하 24장의 이 경우는 죽을 때까지 계속 재현 될수록 주님의 간섭하심과 개입하심이 그럴 경우에만 우리에게 넉넉하게 온 몸으로 휩싸여져서 느껴지게 돼 있어요.
그래서 뭘 하나 지켰다고, 난 의로운 걸 하나 챙겼다고 그런 식으로 머리가 돌아가시면, 안되십니다. ‘아! 이렇구나.~! ’ 하고 다시 보면 돼요.‘죄인괴수 날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 이것이 평생토록 되풀이 돼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위선자가 되는데,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구조사를 하는데, 여기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보조 인물인데, 엑스트라인데, 한 사람은 요압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요압이 뭐라 하느냐 하면, 말립니다. ‘임금님, 하나님이 주신 건데, 그렇게 인구조사해서 내 것이라고 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것보다 더 많이 주실 수 있는 문젠데...’ 라고 충언을 하니까, 다윗 하는 말이 ‘ 내가 하겠다는데, 니가 왜 말이 많아? 내가 하겠다는데... ’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시실은 그것은 정답이 아니고요. 1절이 정답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 시킨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인구조사 한 것이, 다윗이 인간성이 더럽고 괴팍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려고 이스라엘의 대변자 다윗을 통해서 그 일을 시킨 겁니다. 이스라엘을 치시려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은 자기 백성인데 치실 이유가 없는데, 사랑하는 백성인데 왜 칩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치는 겁니다. 잊지 말라고. 수시로 ‘니 운명 니 팔자는 이스라엘에게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늘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수시로 잊어버리기 때문에 수시로 이렇게 이런 식으로 ’쳐서‘ 하나님이 함께 있음을 깨닫게 하시는 일을,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그 작업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가? 그것을 오늘 설교에서 찾아내야 될 숙제가 되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찾아내는가? 여기에 두 번째 엑스트라가 등장하는데, ‘갓’이라는 선지자입니다. 선지자가 나중에 등장해서 13절에 보면, “다윗에게 갓이 이르되, 왕이 하나님께서 10절에 보면, ”인구조사 후에 왕이 마음에 자책하고 내가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원래의 자리에 앉아야 되는데, 그 자리를 떠나서 교만한 자리에 앉아버리면, 죄가 되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데, 나올 때는 지 맘대로 나왔지만,(사실 지 맘대로 안 되지만) 돌아가는 것도 그냥 돌아가면 안 됩니다.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죄인대신 죽으신 십자가의 은혜를 밟고 돌아가야 돼요. 그래야 돌아가고 난 뒤에는 십자가의 은혜가 팍~~하고 터져 나오죠. 나올 때는 지 맘대로 가출했다가 그냥 지 알아서 헤~헤~거리며 돌아와 버리면, 들쑥날쑥 지 맘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이 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무슨 있으나 마나 하게 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이렇게 가출 시키고 다시 본 집으로 돌아가는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평소에 어떤 식으로 이끄시고 어떤 식으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있느냐를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다윗이 자책을 했죠. 하고 난 뒤에 그 담에 하나님께서 갓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12절에 보면,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이래 돼 있어요. 참 이상하죠.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치시려면, 자꾸 객관식으로 나오지 말고 치려면 ‘니 50대 맞을래? 석대 맞을래? 10대?’ 하지 마시고 그냥 열대 때리시면 되는데, 왜 세 가지를 제시하시느냐 말입니다. 세 가지 다 맞을래? 이건 아니잖아요. 내가 한 가지를 때리겠다. 해 놓고는 ‘어느 벌로 맞을래?’ 매 맞는 다윗보고 선택하게 했다는 의미는 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다윗이 제쳐놓는 2가지와 다윗이 채택하는 1가지의 고 차이성을 통해서, 다윗이 정말 자책하고 있는지, 정말 자기가 매 맞아 마땅하다는 것을 깨닫는 지를 보게 하는 겁니다. 이런 말이에요. 뭔 뜻이냐 하면, 쉬운 말로 엄마가 아들에게 ‘ 니 까불면 매매 한 대.’ 해놓고, 아들이 진짜 나쁜 짓을 했어요. 엄마가 매를 들려면, ‘엄마 잘못 했어요.’ 그 말이 ‘때려주세요.’라는 말로 잘 사용 안 해요. 잘못 한 거 아니까 때리겠다는 말을 철회하라는 식으로 엄마 손을 잡죠. ‘엄마 잘못 했어요. 잘못 했어요.’ ‘손 안 놓나?’ ‘잘못 했다고 하잖아?’ ‘잘못 했다 하잖아요?’ ‘잘못 했으면 맞아야지?’ 관심사가 뭐냐 하면, 잘못 했다는 거는 관심 없고, 맞는 것만 어떻게든 회피해 보려는 수법으로 ‘잘못 했어요’라는 식을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다윗 관계에서도 다윗의 그런 술책, 하나님께서는 그걸 봐 주는 법이 없죠. 왜냐 하면, 이스라엘이 매를 맞는가, 다윗이 매를 맞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고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어떤 하나님인가를 알게 하는 것이 고게 핵심이지, 매를 몇 대 맞고 하는 것은 안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다윗 보고 세 가지 중에서 하나 선택하라 할 때, 그래서 다윗은 여기서 뭘 아느냐 하면, 이것은 ‘때가 되매’ 맞아야 하는 매를 우리가 맞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 말은 다윗의 이런 선택은 뭐냐 하면, 안 맞기 위해서 건성으로 잘못했다는 소리가 과연 다윗의 입에서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를 하나님께서는 살피는 거예요. ‘하나님 잘못했어요. 때리지 마세요.’ 라고 뒤에 안 맞는다는 데에 치중하는지, ‘잘못 했으니까 때려주세요.’ 라는 데에 비중이 있는지 보는 겁니다.
이것이 참 신앙인과 가짜 신앙인의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죄인입니다. 때려주세요.’ 하고 ‘죄인이니까 때리지 마세요.’의 차이. 천국과 지옥입니다.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사람은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벌 받는 과정에 있다고 창세기3장에 나옵니다. 이미 아담의 자손의 자손이 되었으면, 태어나자마자 벌 받고 있습니다. 왜 벌 받아야 되는지 이유를 알기 위해서 오래 사는데, 중등부 설교 할 때 이야기 했죠. ‘학대받는 자가 있는데,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것이 세상이다.’ 그걸 알아야 지혜라는 겁니다. 억울하게 학대받는데 아무도 안도와 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애들한테 물었어요. 요번엔 많이 와가지고 물었는데,ㅎ ①학대받는 것이 억울하면 너도 힘을 키워야 돼 ② 이 세상을 포기하기 몇 번?? 애들이 ①번 하는 거예요. 얼마나 솔직합니까? ‘내가 미쳤나, 억울하게 당하게, 나도 힘 키워서 나도 한번 때려 보련다.’ 제가 이야기 했어요. 힘이라 하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발휘하게 되기 때문에, 권세 있는 너로 인하여 또 억울한 사람이 새롭게 발생된다. 이 말이죠. 니가 얻어맞을 때는 니가 굉장히 억울한 것 같지만, 니가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 맞을 때는 개구리 입장이 안 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거든요. 지가 사기당한 것만 생각하지, 자기가 사기 친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거든요. 이것이 본성이에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고 뒤에 해답이 나와 있어요. 차라리 학대 받다 일찍 죽는 것이 땡이고, 그보다 더 좋은 점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사람이 땡 중에 장땡이라는 거예요.ㅎㅎ 그걸 아는 게 지혜라는 겁니다. 그것은 결국 물러나란 뜻이 아니고, 우리가 사는 것에 대해서 이 세상에 대해서 그렇게 기대하거나 애착을 갖지 말라 말이죠. 니가 어느 자리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벌 받는 자리이기 때문에 미국이나 독일 이민 가도 그 자체가 벌 받는 자리이기 때문에, 어디 가도 어둠의 권세가 다 작용하기 때문에, 그대로 벌 받을 만해서 벌준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맘 편하다 말이죠.
그것을 줄여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그냥 무너지세요. 자, 오늘 좋은 거 하나 배웁니다.ㅎ 그냥 인생이 무겁습니까? 버티려고 하지 마시고 장 미란도 아니고, 역도 내릴 것 왜 올립니까? 내릴 거...ㅎ 그냥 무겁습니까? 오징어포, 쥐포 되세요. 그냥 무너지세요. 무너지면 비로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감사 안 할 게 없어요. 되도 안한 자존심 가지고 안 무너지려고 하니까, 그렇게 모든 것이 짜증스러운 거예요. 무너지면 되는데...
참, 옛날 젊을 때 미인 소리 들었어도 이제 나이 50이 넘어서는 그런 소리 못 듣죠. 옛날에는 미인이어도 이제는 아줌마로 통일 되잖아요. 결혼 안 했다고 ‘난 아줌마 아니야, 아가씨야,’ 해도 늙은 아줌마로 통일해 버립니다. 결혼 하든 안 하든 따질 필요 없으니까...
그냥 이 세상 자체 원리가 우리가 지어낸 원리가 아니고 하나님이 이미 지정된 자리입니다. 벌 받는 걸 통해서 ‘니 죄인인줄 알아라.’라는 창조의 원리를 우리에게 그냥 보여주는 세상입니다. 그냥 무너지면 되죠.
지금부터 5000년 전에 메소포타미아(현재 이라크)에 쉬메르란 도시국가가 있었어요. 쉬메르가 발굴이 되었어요.(100년이 더 됐는데) 그 발굴된 현장에 보니까 함무라비 법전도 나오고 거기에 최초 문자도 나왔는데, 그 5000년 전의 문명에 사람 사는 사고방식과 인생관과 법 조항들이 다 있어요.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 이라는 것도 들어있어요. 거기에 어떤 내용이 있느냐 하면, 결혼은 행복한 것이다. 하지만 이혼은 더욱 더 행복하다.ㅎㅎ 내세는 없는 거다, 현실을 즐겨라, 현실을 맘껏 즐기되 죽은 후에는 아무것도 아니므로 죽음이 당장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축하자. 이래 돼 있어요.
아!! 얼마나 실용적입니까? 사는 게. 그런데 그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바로 이렇게 기껏 버티는 것, 반항 하는 것, 순간적 쾌락으로 버티는 그것이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알 수 없는 공포, 두려움. ’도대체 인생이 어디로 끌려가는 거야? ‘아이 모르겠다. 모르겠다.’ 하면서 술 퍼먹고 퍼마시고 마약은 하지만 결국에는 무너지고 마감하는데 그걸 버티려고 버티지만 그 운명의 힘은 우리보다 더 셉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준 3가지의 벌칙을 한 번 봅시다. 벌칙은 새삼 잘못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준비된 벌칙 이예요. 요런 점이 어려운데, 다윗이 잘못해서, 이스라엘이 잘못해서 벌칙을 주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잘못이 아니고, 인생은 원래 걸음걸이가 그런 것 속에서 이스라엘에게만 이런 벌칙을 줬는데, 13절에 나옵니다. 첫 째는 7년 동안 기근, 두 번째는 왕이 석 달 동안 적에게 쫓겨 다니는 것, 세 번째는 3일 동안 온 천지에 전염병 퍼지는 것, 셌 중에 어느 벌을 받으시렵니까?
요것이 구약인데요. 요게 신약이라면 이렇습니다. 유황불 떨어지는데, 남녀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런 식입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하는 것이 유황불 폭우로 떨어지는 마당에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사고팔고’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로 바꿔지죠. 이걸 어렵게 이야기 하면 이렇습니다.
미래를 알지 못하는 인간들은, 미래가 첨부된 것을 앞당겨서 고 벌칙 조항에 포함돼 있다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특별히 성도에게, 이스라엘에게만 알려주는 팁입니다. 정보입니다. 사람은 과거에 잘못한 것 때문에 지금 벌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성경의 뜻이 아니고, 처음부터 잘못했기에 처음부터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지게 돼 있는 것을 유황불의 재앙을, 누구는 면제되고 누구는 예외 될 수 없는 유황불 속에서 미리 앞당겨서 3가지로 벌칙을 만들었고, 고 3가지 벌칙을 다윗으로 하여금 부추겨서 인구조사하게 해서 ‘이스라엘은 내 것’이라는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죄악 중에 죄를 끄집어내게 만들어서, 끄집어 낸 죄와 벌칙 3가지 조항을 결부시켜서 벌을 내리지만, 사실은 유황불 앞에 인간이 이런 인구조사 안 해도 유황불에서 멸망 받게 돼 있는 것이 애시당초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이 본문의 내용의 이야기입니다.(아따, 문장도 길다ㅎ)
그러면 다윗의 채택은 뭐냐, 하나밖에 없어요. ‘주여 나의 본래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이거만 찾으면 되는 거예요. 앞으로 자기가 한다고 하면 안 되어요. 이건 인간에게는 해당이 안 됩니다. 인간은 앞으로 잘 할 위인이 없습니다. 아무도 잘 할 위인이 없어요. 왜냐 하면 미래의 내가 어떤 모습이 될 지는 본인 손에 달려 있는 게 아니고, 주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지금 자기의 본래의 자리를 나와 버리면, 본래의 자리는 자기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운명의 미래상까지 안정되게 보장해주는 주님이 합세한 자리가 그 본래의 자립니다.
그래서 벌 받을 때, 벌 받는 것만 멈추지 마시고, 이 벌이 사랑의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사랑의 고리로 받아들이면서 벌 받으시면 그 사람은 본래의 자리에서 용서받는 입장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다시 한 번 새길 수 있는 멋진 기회가 되는 거죠.
제가 안산서 강의 할 때, 이제 안산 강의는 끝났습니다. 안산 강의가 글자 하나가 바뀌어 안양강의로 바뀝니다.ㅎ 안산서 강의했는지 어디서 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부동산 15만평이 있는 사람이 복음을 안다. 그런데 로마서 8장에 보면 ‘...환난이나 기근이나 핍박’이 왔을 때도 주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고 했을 때, 부동산 15만평 요지의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기근의 의미가 뭐냐? 그렇다면 다 날려야 주님의 사랑을 깨닫느냐? 아닙니다. 옆집에 부동산 500만평 있는 사람이 이사 오면, 졸지에 기근을 느낍니다. ‘주여, 왜 난 15만평밖에 안 됩니까?’ 고것이 본래의 자리예요. ‘아!! 난 이 세상 못 살겠어. 15만평 가지고 어떻게 살라고?? 적어도 500만평은 돼야 살 만하지.’ 이 세상에 대한 집착과 애착을 포기하게 만들죠.
이만하면 됐습니다. 라는 말은 인간에게 통하지 않는 성격. 인간에게 찾지 마세요. 그런 성격은 이 세상에 아무리 성격 좋아도 그런 성격 없어요. 이만하면 족하다는 사람 없습니다. 항상 우리는 숫자를 헤아리고 여기서 저기까지는 내 것이라고 확보하는, 매일같이 각 선지자가 와서 3가지가 아니라 33가지 조항의 벌칙을 매일같이 제시해도 마땅한 우리들이예요. 그러면 그 벌칙 조항 중에서 우리는 내 본래의 자리, 주님께서 괴수 된 자리, 죄인의 괴수 된 나 위해 십자가 지신, 십자가 보이는 곳, 죄인의 괴수 된 십자가 고 자리에 우리가 그냥 들어가면 돼요.
다윗은 3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했는데, 그것은 뭐냐, 왕은 나를 위함이 아니라 백성을 위해서 백성이 가장 짧게 벌 받는 조항이 3번째 조항이었습니다. 3일 동안이죠. 7년도 3달도 아니고 3일 동안, 왕의 입장에서 나는 내 입장이 아니라 나는 항상 백성의 입장에서 백성을 위해서 중보자로 서 있는 입장인 줄 알아서 제일 짧은 것을 원하죠. 백성들이 제발 고생을 덜 하도록 그렇게, 이것은 바로 왕의 본래의 자리로 찾아 간 거예요. ‘이스라엘은 내 것이 아니고, 나는 다만 이스라엘을 위해서 지켜줘야 될 봉사자의 입장에 서 있구나.’ 자기주장에서 벗어나서 본래의 자리, ‘나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해야 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거죠.
바로 하나님께서는 그 점을 본 겁니다. ‘다윗아, 다시 니 자리로.’ 그리고 그 자리로 가면서 뭘 이야기 하느냐, ‘나는 마땅히 태어날 때부터 벌 받아도 마땅한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를 깨닫는 고 하나 건졌으면, 다윗은 다 건진 거예요. 고 담에 하나님께서는 그 벌칙 조항과 더불어서 미래에 벌 받아야 되지 않는 너희들이 벌을 받았다. 미안하다. 하지만 영원한 벌은 너희에게 주지 않는다. 왜냐, 타작마당이 준비 돼 있었기 때문에. 그건 다음시간에 할 거예요. 하나님을 그 벌칙을 통해서 사람이 그 근본적으로 그 자리에서 용서가 영원히 샘솟듯이 솟아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런 기회를 다윗에게 허락하신 겁니다.
우리의 자리가 어딥니까? 죄인의 괴수의 자리죠. 세상이 무겁습니까? 무너지면 돼요. 왜? 태어날 때부터 원래 우리는 모든 것이 우리한테는 그냥 감사할 뿐이고 그 전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서 세상 것을 다시 보게 되면,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고 주의 은혜로 하나의 용서하신다는 증거로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이게 성도의 특이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