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23:8 - 다윗의 용사들

작성자지미박|작성시간26.06.06|조회수42 목록 댓글 0

다윗의 용사들
사무엘하 23:8


(삼하 23:8, 개역)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이 이러하니라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는 군장의 두목이라 저가 한 때에 팔백 인을 쳐 죽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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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용사란
다윗 하나 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용사들입니다.

이들은 다윗의 위상을 높이기 위함이지
결코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는 전쟁에
참여된 자들이 아닙니다.

비록 그들이 사적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데리시고
일을 벌리시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잠시 생각해 봐야 될 문제는
왜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곱게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을 곱게 통과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지나치는 모든 순간순간에
영적인 바탕들이 폭로되었습니다.

악령들이 떠났고,
마귀들의 종들은
예수님을 공격했고, 비난했고 모독했고,
물리적인 처벌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예수님이 벌리셨던
영적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영적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든지 실물적인 모습으로
늘 등장되는 겁니다.

영적 전쟁이라고 해서
실제적인 세상 움직임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늘 관련된 채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다윗의 용사들은
블레셋이라는 민족과 전투하게 됩니다.

이런 대목을 대하면
우리들은 자동적으로 자신들이
마치 다윗 편에 서서 사는 사람인양
여깁니다.

이런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우군노릇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점에 있어 블레셋 사람들이나 우리들이나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다 그러합니다.

원래 블레셋 사람들은 해적들이었습니다.
그리스 지방에서 놀다가
애굽 나라가 잘 살게 되니
그 무역로에 기생하면서
고급 물품을 노리던 해적단이었습니다.

애굽의 바로왕이 토벌이 나서자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와서
농사짓고 살게 되었는데
주로 해변가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시대적으로
이스라엘보다 먼저
가나안 땅에 터잡고 살던 민족이 되는 겁니다.

나중에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이
바로왕의 압제를 견디다 못해
모세를 지도자로 삼아
애굽에서의 탈출을 시도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들 히브리인들이 살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겁니다.

광야 40년을 지나서
그들은 가나안 땅에 입성하게 되는데
이미 거기에는
원주민들이 기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원주민 입장에서
자기 땅을 침범하는 이스라엘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엄연히 터잡고 살고 있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이주민들이
본래부터 자기 땅이라고 우기고 나오면
아마 기가 차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시대로 옮겨서 생각해보세요.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 지를 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다음과 같이 우깁니다.

“원래 이 땅은 아브라함이라는 조상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땅이라고 약속 받아
점 찍은 놓은 땅이니

그 후손들이 등장한 이상,
다른 신을 믿는 너희들은
이 땅에서 좀 나가줘야 되겠어”
라는 주장을 펼치게 됩니다.

참으로 이방민족의 입장에서 들으면
황당무계한 소리입니다.

바로 우리가 성경을 보거나
하나님을 대하게 되면
이런 입장에 설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소에 하나님편에 서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신의 생존이 우선인 채로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기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 앞서 십자가 지고 가신다는 말이요,
그 십자가는 우리의 악함 때문에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곧 우리는 죄와 적극적으로 한통속이 되어져서 살아가고 있음을 발각해 내시는 전쟁을
벌리겠다는 겁니다.

우리가 곧 블레셋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블레셋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태도는
어처구니없이 일방적 횡포인 것처럼

우리가 제대로 하나님 하시는 일을 보게 되면
전혀 우리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예수님 입장만 생각하기에
어처구니없는 조치로서 나타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시편 50:22에 보면,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시 50:22)
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 누구라도 하나님을 잊고서 사는 자는
기어이 찾아가서 찢어버리신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의 매일의 생활은
항상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고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자신이 가진 것만을
잊지 않고 사는 블레셋 주민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는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쟁은
우리를 비켜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 시편 50:22의 말씀대로
그대로 실행에 옮기고자 하는 전쟁이
지금도 우리에게 그대로 주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에 나오면서도
속히 하나님 곁에서 도망치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마치 설교가 기니 짧으니, 저녁예배를 가니마니
수요예배 가니 마니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전쟁의 묘미는 추적입니다.
우리가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놓치지 않고
따라오시면서
시편 50:22를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이 시도를
시편 2:7과 12절과 연결시켜 봅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무슨말이냐하면
그 어느 인간이든지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아니하면
길에 기어이 망하게 하고야 말겠다는 취지에서
전쟁을 벌리고 계시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전쟁을 벌리고 계시는 겁니다.

“저는 교회나갑니다”
변명해도
하나님께서 그 위선에 속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모두 자기편입니다.
자기 처지만 옹호하고
자기만 살겠다고 설쳐댑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모두를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어이 끝까지 따라붙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에게서 달아나고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추적하십니다.

“이것만큼은 손대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면서
자신이 제일 귀히 여기는 보물을 꼭 껴안고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나지만
하나님의 전쟁이 멈추는 곳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껴안는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실은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다 부수어 버리십니다.

요한계시록 6:12-17에 보면,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영광 앞에서
도망치기 바쁩니다.

그만큼 평소에
예수님의 영광이 싫다는 겁니다.

자신의 영광이 형편없이 깨어지는 것이
겁난다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로마서 5:10에
“우리가 하나님께 원수되었을 때”
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찾아주시는 이유는,
우리 안에 예수님의 구원의 DNA를
심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흘린 피를
되찾아 가시는 방식으로
구원의 전쟁, 영적 전쟁을 벌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피 앞에서
우리의 모든 걸쳐있는 인간적인 것들이
벗겨져야 합니다.

비로소 그 때 우리는
다윗의 용사, 주님의 용사가 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지키는 식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이근호
10-12-08 22:11
056강-삼하23장8(다윗의용사들)-2sa1012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23장 8절입니다. 구약성경 504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23:8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이 이러하니라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는 군장의 두목이라 저가 한때에 팔백인을 쳐죽였더라”




오늘 8절만 읽었습니다만, 사실은 오늘 내용은 23장 전체가 다 나올 겁니다. 여기에 보면 다윗의 용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용사가 하는 일이 있어요. 그것은 전쟁하는 일을 합니다. 다윗은 왕이고 그 밑에 용사가 있다는 말은, 이스라엘 전체가 농사나 짓고 밥이나 먹는 그것으로 유다가 아니라, 전쟁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전쟁을 하려면 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 적은 하나님께서 마주치게 하는 적들을 다윗과 그 나라는 전쟁을 벌려야 하는 겁니다.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사실은 피곤한 문젭니다. 전쟁을 안 하고 서로서로 사랑받고 살면 좋겠는데, 왜 자꾸 하나님께서 전쟁을 일으키는지, 적이 누군지, 여기선 우리 입장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산다면 전쟁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데,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이 땅을 곱게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영적 전쟁을 계속 해나가면서 가게 돼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 예수님이 그렇게 가셨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주를 바라보자 하는데 주님께서 이 세상을 통과하시면서 영적 전쟁을 일으키시면서, 쉽게 말해서 파장을 일으키면서 가셨거든요. 파장을 일으키다 보면 예수님 주변에 뭐가 비로소 보이느냐 하면, 악마가 보이고 악령이 보이고, 세상을 지배하는 진짜 권세 자, 그 본래의 바탕들이 뒤집어지고 다 보입니다. 근데 예수님하고 멀찍이 떨어져 버리면, 이 땅들은 조용하고 정상적이고 아무 일 없고, 그렇고 그런 겁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고 나이나 치면서 화초나 키우면서 그런 식으로 살면, 가장 행복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막상 예수님에 의해서 같이 일하게 되면,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질 때, 제가 오늘 설교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 하면, 전쟁이 벌어지면 우리는 마땅히 예수님 편에 서려는 경향들이 있어요. 아!! 그러면 안돼요. 우리가 예수님 편에 서 버리면, 나의 원수를 마치 예수님의 원수로 오해할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원수는 우리 사람들이 찾아낼 수 없는 원수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나름대로의 선과 악의 기준이 있기 때문에, 그 기준에 비추어서 밝혀지는 적들은 적이 아니에요.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적들이 과연 하나님 앞에 멸망당할 만한 적인지, 아니면 억울하게 당한 자들인지, 한번 보자는 겁니다. 여기 23장을 쭉 보게 되면, 용사들이 쳐부순 적군들 중에 11절에 보면 블레셋이 나와요. “......삼마라 블레셋 사람이 떼를 지어 녹두나무가 가득한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되 저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을 친지라....“ 이 블레셋 사람이 요새 현대 용어로 번역하면, 팔레스타인이란 뜻입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많이 보셨죠? 팔레스타인이 블레셋과 같은 용어입니다. 이 사람들이 뭐냐 하면, 해적들이었습니다. 어디서 노는 해적들이냐 하면,(동숭로에서 노는 해적이 아니고ㅎ) 지중해 근방에서 놀던 해적 떼들이었어요.




처음에는 그리이스, 터어키, 가나안 땅보다 북쪽에서 설치다가 애굽(이집트)나라가 번창한다는 소문을 듣고, 뭔가 거기에 먹을 게 있는가 싶어서 이집트 쪽으로 몰려와가지고, 다리를 들다가 이집트한테 혼쭐이 나서 완전히 지명수배를 당해야 돼요. 그래서 해적 떼들(요즘 소말리아 해적 떼 있잖아요)이 해적해서 먹고 살다가,(소말리아에서는 해적이 기간산업입니다. 해적이 있어야 자기들 달러를 얻을 수 있어서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는데) 블레셋은 소말리아보다 더해요. 배 위가 그냥 자기 땅이에요. 그래서 어느 나라가 잘 산다 하면, 잘 사는 이유가 뭐냐 하면, 무역해서 사는 겁니다. 오파상이라 하죠. 물건을 제조하지 않더라도 그쪽 나라 물건 갖다가 이윤 남겨 파는, 무역상의 큰 나라 잘 사는 나라 근처에 있어야 돈 푼이라도 뜯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잘 사는 나라에서 금이나 고급스런 물건을 무역하면, 잘 사는 나라 근처에 있다가 달려들어서 빼앗고 하는데, 여기에 이집트 나라가 화가 나서 왕이 싸그리 쳐버렸어요. 치니까 어디로 숨어들었느냐 하면, 갈데없으니까 급하니까, 가나안 땅에 전부 다 일종의 정착을 한 겁니다. 내륙까지 깊숙이 못 들어오고 해안가에 걸쳐 있는데 해안가에 걸쳐 있는 그 블레셋 본거지가 가사라는 곳입니다. 가사라는 곳에 본거지를 두면서 거기서 ‘아이고 나중에 형편 좋을 때 해적 떼 하고, 지금은 형편이 각박하니까 우리 땅이나 먹자.' 해서 겨우 그들이 해변 가에 모여 살면서, 저 내륙 안쪽에 보니까, 거기 이스라엘이 있으니까 거기 침범해서 뜯어먹을 거 있으면 뜯어 먹은 거예요.




근데 내륙의 안쪽에 가면 산들이 많은데, 그 산위에서 목축하고 살던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안의 내부 사람이나 산위 사람이나 중요한 것은 뭐냐, 물 나오는 오아시스를 누가 그걸 장악하느냐에 따라서 국가의 운명이 결정될 판이에요. 하도 사막화되고 건조한 지역이라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서로 물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벌어졌는데, 원래 블레셋(팔레스타인)이 먼저 그 땅을 차지했는가? 아니면 이스라엘이 먼저 차지했는가? 볼 때, 죄송합니다만 이스라엘보다도 블레셋이 먼저 그 땅을 차지했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디에 있었는가. 이스라엘은 아래 이집트에서 평안하게 살고 있었죠. 그런데 갑자기 도라이 같은 요셉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바로 왕이 등장해서 당장 노예를 삼아서 종 부리듯이 부리니까, 그때 이스라엘 백성이 못 살겠다고 하니까, 모세가 등장해서 ‘ 내가 구출해줄게.’ 하고 모세하고 바로가 맞장 떠서 바로가 져서 자기백성 몽땅 남자만 60만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서 간 거예요. 갔는데, 절도 없고 집도 없고, 땅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없으니까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무조건 남의 땅을 점령을 해야 되고, 침범을 해야 돼요.




그러면 본토의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은 어떡하라고?? 블레셋은 자기 땅인데, 어디서 날아온 돌멩이가 와가지고 ‘내놔라, 이것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땅이다.’라고 내놔라 하는데, 세상에~~ 깡패도 그런 깡패도 없지, 어디 그런 게 있습니까? 그런데 누가 못됐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못됐어요.




아래층에서 시끄럽다고 야구 방망이 들고 와서 협박 공갈하는 재벌 2세하고 비슷한 인간 이예요. 이거는 무조건 그 동네가 지 동네라고 침범해서 ‘꺼져, 나가’ 왜? ‘이건 옛날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약속한 거야. ’누가 이야기 한 건데?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했어.’ ㅎ 이건 말도 되지도 않는 소리고, 만약에 그게 성경적이라면, 우리도 성경말씀대로 살면 간단합니다. 저 갓 바위 올라가서 ‘어이, 갓 바위 우리가 접수한다.’ ‘왜?’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 갓 바위 없애래.’ 이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죠.




그래서 블레셋을 포함한 원주민들이 죽기 살기로 땅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서 이스라엘을 물리치려고 애썼습니다. 여러분! 누가 나쁜 놈입니까? 우리 인간적으로 생각해 봅시다.ㅎ 누가 나빠요? 이스라엘이 나빠요. 자기 인생이 힘들다고 그래 그 힘든 것을 남까지 그래 남은 멀쩡하게 행복하게 사는 그 동네에 들어가면 되겠습니까?




언젠가 그런 설교도 하고 글도 썼습니다만, 앗수르 군대가 왔을 때,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그때 군사가 18만5천명이었습니다. 대군이었습니다. 18만 5천명이 있었는데, 천사가 와서 쳐버리니까, 18만5천명이 한꺼번에 다 죽었어요. 18만5천명 젊은이들의 가정 사정이나 형편을 우리가 조사한다고 합시다. CNN에서 기자가 조사해 보세요. 전부 다 착한 아들이고, 고향 땅에서 착실했던 젊은이고, 나중에 꿈은 대학원 나오면 취직하려고 했던 나름대로 공부했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남의 땅에 와서 전쟁해서 18만5천명 죽었어요. 그 사람들이 어디 군에 오고 싶어 왔겠습니까? 나라에서 강제로 징병해서 왔고, 또 오게 되면 군대하면 시레이션 월급 더 주는지 알고 그거 먹으려고 왔다가 천사가 와서 쳐버렸으니까, 그 젊은 자식들 18만5천명이 다 죽었습니다. 그 고향에 있는 부모들의 마음은 찢어지겠죠. 여호와 얼마나 원망하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신이 그렇게 다 죽이냐 말이죠.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일방적으로 자기 좋으면 다 좋은 양 이렇게 돼 버리면, 그것이 성경의 내막을 모르고 일방적으로 우리 멋대로 ‘하나님은 우리 편입니다. 라고 우기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게 더 하나님의 원수예요.ㅎ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가 납득이 안 됩니다. 이걸 말하고 싶어요. 하나님의 구원하는 방식이나 이 모든 것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깡패라도 이런 깡패는 없어요.




우리가 기독교란 신자의 입장에서 썼지, 만약 성경 이야기를 불교 스님이나 불교 신자한테 해 보세요. 여호와 하나님은 깡패라 합니다. ‘대자대비한 줄 알았는데, 대자대비 같은 소리하고 있네.’ 여기 시편 보면요,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나라는 그 어린 자식까지 떼기를 쳐도 마땅하다.’ 이렇게 험악한 소리, 쌍소리를 해 놨어요. 성경 잘 안보니까 눈에 잘 안 띄겠지만...ㅎ 이건 저주도 세상에 그런 저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점을, 당하는 입장에서 여호와를 다시 보고 성경을 다시 보게 되면, 이거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용사는 무엇을 목표로 했는가? 우리가 그 해답은 성경에서 찾을 수가 있는데, 시편 50편22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반기는 예수님으로 생각하셨다면, 그건 애초부터 복음자체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신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내쫓아 버립니다. 추방시켜 버립니다. 찢어버려요. 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은 뒷전이고 내 영광부터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은 주께서는 찢는 작업을 멈출 수가 없어요. 아주 작살을 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성립 안 되는 상황 이예요. 구원할 이유가 없어요. 왜냐, 우리는 블레셋처럼 우리는 앗수르처럼 하나님 편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눈만 뜨면 오직 내편만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찢을만한 대상이지, 하나님께서 사랑할만한 대상이라는 것은 성경적 근거를 봐서라도 이것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추방을 시키는데, 이렇게 추방을 시키는 ‘블레셋 나가. 꺼져. 다 꺼져버려. 다 나가. 싫어.’ 이렇게 훌쳐내야 비로소 하나님이 이 땅에 가장 하나님다운 거예요. 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살 가치도 없고, 살 권리도 없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하는 겁니다. 천국은 예수님 모르고 예수님 뜻을 모르면 못 살게 돼 있어요. 그 천국을 그대로 천국의 그런 입지와 그런 취지를 그대로 이 땅에 펼치고자 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작전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지 않을 인간 어디 있어요? 다 쫓겨나야 돼요. 이거는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찢기 위해서 추적합니다. 전쟁의 묘미는 추적이에요. 계속 쫓아오는 거예요. 우리 인간은 도망치죠. 도망칠 때 그냥 도망치는 게 아닙니다. 보따리 싸들고 도망쳐요. ‘하나님, 이것만은 다치면 안 됩니다. 이거는 내 마지막 남은 자존심입니다. 이거 손대면 안 됩니다.’ 하고 도망쳐요. 우리는 도망치고 주님 운명은 쫓아오고,ㅎ우리는 ‘하나님,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이해해 주세요.’ 계속 도망치는 거예요. ‘제발 내 혼자 소박하게 살게 내버려 둬요.’ 돌아보며 도망치고 ‘안서나 거기!!’ 계속 따라오는 거예요. ‘니 찢어 버릴거야.’ ㅎ끊임없이 따라와요. 옷에 꿀 묻은 데 말벌 따라오듯이...ㅎ 계속해서 추적을 시도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여! 내가 찾아내서라도 기어이 찢어 버릴 테니까. 이겁니다.




제가 심한 말 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심한 말해도, 성경보다는 덜 합니다. 요한계시록 6장 끝에 보면, 마지막 때 주께서 7인 재앙이 떨어지게 되면, 그동안 우리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나사에서 새로운 생명체를 발견하고 어떻고, 로케트 올라가 달이 어떻게 생겼고, 소박하게 우리끼리 사는 세상에, 그 하늘과 달과 별들이 다 흔들리고 깨지고 하늘이 종이 축처럼 말리고, 산과 섬이 그 자리에서 옮기고, 그러면 우리가 가렸던 하나님의 진노를 가렸던 모든 자연세계가 깨지고 나면,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가려 달라.계속 추적해 오니까. 봐라 죽인다 하고 오니까.




그래서 현재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는 ‘노아프로젝트’ 마지막에 지구가 멸망할 때, 최후의 남은 자를 위해서 양식과 곡식의 알갱이들을 따로 모아가지고 노아 방주하듯이, 핵폭탄에서도 살아남을 사람들만 따로 뽑아서 이 시대가 다 죽고 난 뒤에, 그 사람이 하나의 씨앗이 되어서 새롭게 인류를 퍼뜨리자. 해서 나오는데 거기 비용이 40만불 줘야 가담할 수 있어요. 하여튼 돈 있는 사람만 살게 돼 있어요. 앞으로.ㅎ 돈 없는 사람은 미래에도 못 살게 돼 있어요. 구석에다 파가지고 반공 호 파서 우리들끼리 살자 말이죠. 남은 자끼리.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보면, 그것도 소용없어요. ‘니 죽인다.’ 하고 찾아오는데, 굴속이라도 지하 몇 천 미터라도 아래위로 샌드위치로 흔들어대는데, 숨을 곳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의 전쟁에서 누가 ‘예수님 편입니다’ 하고 나설 위인이 없어요. 왜냐하면 다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찢어 죽인다.’ 하는 대상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이라고 말해도 하나님이 안속아 넘어갑니다. 너는 너밖에 모르는데 무슨 말로 때우느냐 말이죠. 말로 때워도 소용없어요.




시편 2편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들 다 진노가운데 다 오기 깨듯이 다 철장으로 망치 가지고 다 깨버린다’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에게 입 맞춘다. 하나님 아들에게 입 맞출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건 자기를 부인해야 되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인간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어떤 인간도 하나나의 원수 아닌 자가 아무도 없는 겁니다. 로마서 5장에서는 그것을 분명히 이야기 했어요.




롬5: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원수 된 자, 경건치 않은 자, 죄인 된 자 뿐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할 말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우리를 추적해서 찢어 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내가 내 힘으로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 앞에 피하여 건질 재간이 없구나. 끝났네.‘ 이것이 제대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결국 블레셋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바로 블레셋이며, 우리는 이 땅도 벌써 추방 돼야 될 그러한 전쟁의 원수로서, 공격의 표적으로서 우리는 쫓겨 다니고 있는 그런 형편에 있는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요거만큼은 제발 손대지 말아주세요. 딴거 다 드릴게, 십일조 드리고, 십의 이조 드리고, 다 할게요. 그 대신 요거만큼은 손대면 안 됩니다. 내 몸은 죽여도 내 자식만큼은 손대면 안 됩니다.’ 자식 군대 보내놓고 엄마가 얼마나 기도합니까? 자식 군대 보내놓고 새벽기도 안 나오다가 새벽기도 나오고, 봉사도 열심히 해대는데, 가만히 보니까 군에 보낸 아들 돌보기를, 하나님께서 좋은데, 전방에 빠지지 말고 후방에 빠지기를, 좋은 선임자 만나 매 안 맞고 그냥 곱게 나오기를 얼마나 기도하는지 몰라요.




전에 얘기 했잖아요. 갓 바위 우상이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수능 앞두고 전국에서 몰려오잖아요. 기분 좋겠죠? 하지만 수능 끝나고 벌써 뜸하잖아요. 날이 춥다고. 이게 무슨 감히 갓 바위를 농락하잖아요. 수능이 뭔데?? 갓 바위를...ㅎ 그들이 바로 우리 형제며 친척이며 일가며 우리도 그들 속에 포함돼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용사는 무슨 역할을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면, 성도는 찢어버리며, 우리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구원의 칩’이 들어 있어요. 소매치기가 돈을 강탈하고 도망하는데, 어떤 할머니가 따라와서 계속 ‘내 돈 내놔라’ 하고 따라오는 거예요. 계속 돈 내놓으라 하고 따라오는 거예요. 그래서 ‘들켰구나’ 하고 ‘뭐요?’ 하니까, ‘ 고 바지 가랭이 내 돈 만원 바람에 날라 가니 내 돈 달라’ 하는 거예요. 그러니 따라오는 사람하고 쫒기는 사람하고 오해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를 따라오는 이유는 찢어버려야 우리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자기 것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의 자기 것이 들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자기 사랑, 자기 의예요. 그걸 구약에서 ‘언약, 약속 이라고 합니다. 창세전에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의 도장 새기는 각, 우리를 이름 없는 나무 막대기로 사용하는데, 우리는 계속 도망하는 거예요. ’주여 손대면 안 됩니다. 이거만큼은 놓치면 안 됩니다.‘ ’빨리 와. 빨리 와.‘ 도망가면 계속 따라오는 거예요. 드디어 꽉 잡아가지고 어린양의 인을 박아버려요. 훅, 훅,(새기고 나서 가루 불어내는 ) ’예수 그리스도의 것‘ 예수 그리스도의 인’ 새겨진 것을 보시고, ‘아이고, 내 백성, 어디까지 도망 가...’ 기어이 잡아서 자기 것으로 ‘니는 내 것이었어.’ 라고 새기는 그런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 따라오는 할머니하고 돈 훔쳐 도망가는 그 강도하고 사고가 안 맞은 거예요. 서로 딴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지는 지 생각하고 있었고, 따라오는 할머니는 할머니 생각하고 있었고,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우리의 전쟁은 교회 돈 바치고 봉사하는 이게 군사가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매가지 쳐서 우리를 본래의 십자가 있는 자리로 던져 넣어 버리면, 그 웅덩이에 있는 우리가 바로, 온 몸에 진흙으로 뒤범벅이 된 고 자체가 주님께 군복이 되는 거예요. 영적 전쟁의 군복이 되는 겁니다. ‘이제 군복 입혀놓으니 사람같이 보인다. 봐’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내가 이걸 했습니다. 봉사했습니다. 성경공부 했습니다.’ 자꾸 내 수치를 내가 내 인간적인 방법으로 덧대고 덧칠한 그것 가지고 전쟁하려고 하니까, 주님께서 ‘이리 와, 이리 와’ 그래서 그걸 다 벗겨버려요. 그제야 ‘내가 주의 원수입니다. 내가 죄인 맞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래 그게 바로 군사야’ ‘내가 의지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 피 밖에 없습니다.’ ’ 그거야, 그래야 니가 바로 내 용사가 되는 거야,‘




그래야 사람은 자기를 구원하신 주님만 증거 하게 돼요. ‘내가 이 꼬라지 돼도 내가 사는 이유는 주님 때문에 산다. 주님께서 구원 하셨어.’ 그 이야기가 나올 때가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스스로 이쁘게 포장하는 것들을 벗기는 작업을 위해서 지금도 추적해서 오고 있고, 우리는 무슨 뜻인지 모르고 도망치기만 하고 있어요. ‘지난주에 헌금 했잖아요?’ 하면서 도망가고, ‘그럼 우리 애는 목사 시킬까요?’ ‘누가 그런 것 하래? 그거 필요 없다니까.’ㅎ




그저 우리 안에 묻어 있는 피, 그 피의 효과를 위해서, 우리는 죄인 중의 괴수가 될 필요가 있어야 되는데, 우리는 죄인 중의 괴수가 되는 것을 마치 부끄럽게 여기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처럼 오해해서 종교적인 행위로 죄를 덮어서 마치 거룩한 사람처럼, 거듭나려고 애쓰는 헛짓들, 이거 주께서 잡아다가 확 벗겨버리고, 말씀 앞에 발가벗겨서 아무것도 없이 주님의 것으로만 살아가는 이 모습 그대로가 최고의 하나님의 용사가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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