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언약
사무엘하23:3-7
(삼하 23:3, 개역)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삼하 23:4, 개역) 『저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 23:5, 개역)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삼하 23:6, 개역)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어 버리울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삼하 23:7, 개역)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 불사르이리로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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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먼저 있고
주인공이 나중에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을 먼저 잡아놓고
그 주인공이 왜 주인공 될 수 밖에 없는 가를 보여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역사의 주인공의 등장을 놓고
인간과 하나님은 다툴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역사란
당연히 자신을 주인공을 상정해놓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집안의 역사, 자신의 역사,
자기 신앙의 역사, 자기 회사의 역사,
자기 교회의 역사, 자기 가정의 역사,
이 모든 역사에 있어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자신이라고 단정 짓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사악한 자’를 생각하기가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둘러싼 환경이란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장담하는
우리 자신을 보호해주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주변 인물이 없으면
우리는 외롭고 쓸쓸하고
또한 언젠가는 나를 도와줄 가능성이 농후한
힘들을 지녔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가 없고,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들의 집단에
편입될 수 있는 방안을 고대하게 됩니다.
즉 주변에 있는 자들을
‘사악한 자’들이라고 몰아 세울 정도로
우리가 넉넉하고 배부른 형편이 못된다는 겁니다.
모든 이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놓고 보면
언젠가 어디서인가 그들로부터
호의와 도움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회를 스스로 단절시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바보짓이 될 것이 뻔합니다.
집안의 가족이 아무리 애를 먹여도
그들을 내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우리 본인이 어려울 때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도움 줄 분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집단을 뭉쳐서
큰 힘이 얻게 됩니다.
이 큰 힘을 얻는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네들이 원하는 존재가 되어
당신네들의 집단의 일원이 되려면
내가 당신네들 눈에 어떤 존재로 변하면 되겠습니까?”라는 식으로 다가가는 겁니다.
그런데 반대로
“당신네들은 내가 보기에
사악한 자들입니다”고 규정한다면
어떻게 그들과 하나가 되고
위급할 때에 그들로부터
무슨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나아가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
그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관계는
다 끊쳐지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장사하면서
단골이 다 떨어져나가는 경우와 같습니다.
지금까지 길게 이야기한 것은
바로 우리 인간존재는
그 자체로서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역사’만을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의도적으로
바로 이 ‘인간 중심의 역사관’을 공격합니다.
사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역사가 우선이 아니라
말씀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15에 보면,
“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것이
역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역사란
이미 주인공이 따로 있습니다.
그 분은 ‘여자의 후손’입니다.
그 여자의 후손되시는 분에게는
‘사악한 자’가 필히 존재해야 합니다.
그것이 뱀의 후손이라는
약속에 준한 실체가 등장해야만 하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은 다윗은
‘사악한 자’들의 존재를 거론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사적인 적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이 주어지면
필히 등장해야 될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언약은
진정 ‘역사의 주인공’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의 주인공됨’을 싫어하고
반발하는 세력이
병행해서 드러나기 마련인데
그들이 바로 ‘사악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악한 자들의 본색들은
무엇일까요?
놀랍게 그들은 우리 자신들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역사의 주인됨’을
순순히 인정하고 즐거워하는 자는 아무도 없고
모두들 자기 자신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인생이 즐거워지겠다고 나옵니다.
우리들의 이 숨겨놓은 본성은
우리 자신도 미처 모릅니다.
하지만 역사가 진행되면서
외부로 젖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고 되어 있습니다.
‘복 있는 자’가 되라는 표현이 아닙니다.
이미 주인공은 우리의 유일한 의인되시는 예수, 한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있는 자란 현재 복을 누리시 못하는
우리, 우리가 복 있는 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복있는 자의 조건에
우리가 과연 관심이라도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 조건이 뭘까요?
바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즐거워한다’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더 즐거워한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인간이 얼마나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서
즐거운 것이 일체 없었으면
오로지 ‘여호와 율법’ 안에서만
몰두 하겠습니까.
‘즐거워한다’는 말은
다른 ‘즐거울 대안’이 없어서
임시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 세상의 그 어떤 즐거운 것들이 주어져도 전혀 즐겁지 않다는
최종적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이는 곧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미 실망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입니다.
즉 나는 결코 세상 것으로 즐거워할
위인이 못된다고 단정 짓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느 정도로 실망해야
실망의 끝을 봤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인간이 과연
자신의 존재 깊이를
다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인이 직접 본인을 만들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말은
오직 예수님만이
제대로 율법을 즐거워하며
묵상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언약의 등장은
그 안에서 왜 예수님만이
주인공일 수 밖에 없는가를 보입니다.
민수기 14장 31절에 보면,
“너희가 사로잡히겠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라고 되어 있습니다.
땅을 탐지하러 간 사람들이 절망합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사람들도
덩달아 원망이 늘어났습니다.
어른들도 못 들어간다면
아예 아이들은 어림도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생각들이
충분히 드러나기를 기다렸다가
주저 없이 그들의 생각과 반대로
반응을 하십니다.
‘그 유아들을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영역의 존재를
충분히 드러내시고
그 불가능한 영역으로 끌어들이셔서
인간의 불신앙을 폭로하시려는 의도를 갖고
인간들과 동행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언약에서
사악한 자가 필히 등장하는 겁니다.
자신이 예수님 없이는
사악한 자로 돌변함을 아는 자가
곧 복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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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01 19:10
055강-삼하23장3-7(영원한언약)-2sa101128
2010-11-29 14:33:31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23장 3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504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23:3-7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저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어 버리울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 불사르이리로다 하니라“
예언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우리보고 하라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할 생각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하나님은 이런 쪽으로 역사를 이끄신다는 겁니다. 역사라는 게 없어요. 역사라는 게 없고 말씀이 있는데,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역사가 생겨나는 것이 역사인 것입니다. 마치 드라이아이스처럼 무대 위에 드라이아이스가 없는데, 가수가 딱 나오면 뒤에 부연 연기를 만들어 낸다고 장치를 해서 드라이아이스를 뿌리잖아요. 주인공이 따로 있다 말이죠. 원래 극장은 캄캄한데 ‘동남아에서 위문공연하고 돌아온 가수’ 딱 등장하면 갑자기 무대가 훤하게 밝혀지잖아요? 무대가 훤하게 밝혀지는 조명발을 역사라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역사는 역사를 위해서 있는 게 아니에요. 주인공을 비추라고 역사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아이고, 살다보면 세월 지나겠지? 살다보면 시간 지나겠지? 되는대로 살면 되는 것 자체가 역사겠지?’ 라고 그냥 우리가 휩쓸려 가는 강물 같은 것을 역사라고 그렇게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이 먼저고 말씀을 드러내는 무대장치를 역사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공을 보여주지 아니하면, 그 역사 속에 함께 있으면서도 그것은 허황된 환상을 꿈꾸고 있는 거죠. 제가 말씀이 먼저고 다음이 역사라고 했는데, 이걸 성경적으로 이야기 하면,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약속이 먼저 있고 그담에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주께서 일하다 보니까 결과로 생겨난 게 역사죠. 3장 15절이 뭐냐 하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대결구조입니다. 대결구조니까 역사 속에서 우리는 뭘 뽑아내느냐 하면, 어떤 것이 여자의 후손이며 어떤 것이 뱀의 후손이냐를 뽑아내면, 세상 제대로 보신 거예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어 버리울 가시나무 같으니” 사악한 자가 나온다 이 말이죠. 우리는 자기 자신을 너무 좋은 사람이라고 간주해 가지고 남한테 욕을 안 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인간성이 너무 좋아서 나는 모든 사람과 함께 더불어서 원수도 안 맺고 좋게 지내겠다.’ 하니 이는 공자 말씀입니다. 제가 아침에 이야기 했죠. 인간은 인간을 모방한다 했죠? 우리는 같이 합치지 아니하면 외로워서 못 살 테니까, ‘내가 당신과 함께 하기 위해서 나는 당신에게 뭘 해주면 되겠어? 얼마면 돼?’ 하는 식으로 ‘내가 당신한테 뭘 어떻게 해주면 당신은 나하고 친구 삼겠어? 라는 그러한 마음 자세를 갖추고 우리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행여나 누가 나를 욕하고 삐질까봐 우리는 가슴이 조마조마 해요. 그저 좋은 사람 좋은 친구 많이 만나서 그렇게 만들어 낸 그 뭉텅이 속에서 왕따 안 당하려고 외롭지 않으려고 서로서로 모방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고등학교 때 그렇게 공부만 알던 애가 취직하고 난 뒤에 갑자기 술을 먹고 한다 말이죠. ‘그 술 어디서 배웠느냐?’ ’MT가서 친구들한테 배웠습니다.‘ ’누가 먹으라 하는데?‘ ’과 선배가 먹으라 했습니다.‘ ’그 거 왜 먹는데? ㅎ 그 답변이 뭐겠어요? 그걸 먹어야 입교식이 되거든요. 그걸 먹어야 그들의 모임에 한 일원으로서 넣어주는 거예요. 그 모임이 악 하냐 선 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외로우면 못 삽니다. 외로우면 못 살기 때문에 그쪽에서 원하는 것을 내가 채워주면 비로소 그들과 어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 속에서 나는 새롭게 자아는 정립이 되면서 그렇게 흘러가는 거예요.
무슨 사악한 자가 거기 있습니까? 모든 것이 동지인데. 친구고 동지고 언젠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사람이고, 내가 어려울 때 아는 사람 연줄로 깔아놓은 많은 사람인데, 동서남북 어느 쪽에서 나를 도와줄지 모르는데 가능성을 왜 미쳤다고 놓칩니까? 밑에 깔아놓아야죠. 정수기를 팔아도 한 대 팔 수 있으니까...ㅎ 거기에 왜 사악한 자가 등장하겠어요?
이것을 가지고 사람은 자기 역사를 만드는데, 역사가 자기를 주인공으로 해서 역사를 만드는 겁니다. 자기를 주인공으로 역사를 만들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성경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를 않는 겁니다.
그런데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라고 딱 나와요. “복 있는 사람은“ 이는 무슨 말이냐 하면, 오늘 쉽게 갑니다. ‘니 복 없다.’ 이 말입니다.ㅎ 성경 참 쉽죠? 복이 없다 이 말입니다. ‘복이 없는 인간아, 요런 조건 맞으면 복 있다 해 줄게.‘ 이런 이야기 예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좆지 아니하며“ 악인이 누군지 알아야 좇든지 안 좇든 할 거 아닙니까?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죄인이 어느 쪽인지 알아야 될 거 아닙니까? 그담에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만한 사람을 알아야 될 거 아닙니까? 자칫하면 자기 자신이 오만한 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있다 말이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하루에 석장씩, 다섯 장씩 읽으란 말이 아닙니다. 즐거워 한다는 것, 아,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죠. 성경 보더라도 박 주영 한 꼴 넣으면, 박 주영 꼴 넣는 걸 즐거워한다 말이죠.ㅎ 성경 보는 게 안 즐거워요. 기도하고 있는데 ‘엄마, 나 100점 받았어.’ 하고 들어오면, 그 100점이 더 즐겁다니까요. 남편이 ‘여보 나 승진 되었어.’ 하면 이게 성경 속에 있는 역사의 주인공 찾는 거 보다 내 남편이 승진되면, 나도 같이 사모님 되니까 이게 더 즐거운 일이라 말이죠.(성경 보기 미안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어떤 고백이 이런 간증을 했어요. 결혼을 해서 아침5시부터 아침8시까지 3시간동안인지 4시간 동안은 오직 성경과 묵상과 큐티만 하는 시간인데, 막 혼인한 여자는 그 시간에서는 타인이 되는 겁니다. 그 사람에게 말을 걸면 일체 말 못 걸게 만들어 버려요. 왜? 자기가 주님과 1:1로 대화하는 시간이고 말씀을 보는 시간이고 묵상을 하는 시간이거든요. 그 여자 돌아버렸습니다.ㅎ얼마나 그 이야기 듣고 재밌고 즐거워했는지...전 아주 즐거워했죠.ㅎ 분명히 둘 중에 하나 문제 있고, 둘 중에 둘 다가 문제 있죠.
성경 보는 시간에 이야기하지 말고 문 닫고 골방에 들어가는 것은 저는 마태복음 6장이 확 떠올라요. ‘니가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 그 말씀을 실천에 옮기면 그 도라이 입니다.ㅎ 쉽게 말해서 ‘자기 의’입니다. 쉽게 말해서 ‘사악한 자’에 해당돼요.
성경 모든 말씀은 우리가 ‘사악한 자요. 오만한 자요. 우리는 죄인의 길에 서 있으며, 우리는 악인의 꾀를 좇는 자’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근데 그걸 실천에 옮기겠다고 한다는 것은 자기는 지금 죄인의 자리에 서지 않았다는 착각 속에 있는 사람 이예요. 우리는 이러한 성경 말씀을 보면서 이러면 돼요. ‘딱 내 이야기네~~’ 죄인인 자, 오만 한 자,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는 복 있다 하는데, 전혀 율법을 즐거워하지 않으니, ‘나보고 하는 이야기네.’라고 받아들이시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목적을 이룬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날 때부터 역사의 주인공이 나거든요.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나란 말이죠. 역사의 주인공인 내가 성경 말씀을 실천에 옮기겠다는 이 말은 아주 건방지기 짝이 없는 사람 이예요.
역사의 주인공은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 역사의 주인공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밖에 없는 걸 가지고 왜 지가 주제넘게, 지는 마귀의 자리인데, 마귀의 자리에 있는 줄 알면 되는데, 우리가 마귀의 자리라는 것을 언제 아느냐 하면, 역사의 주인공이 내 앞에 자기 정체를 드러낼 때, 그때 우리는 그야말로 ‘와, 악 소리 하면서, ’역사의 주인공이 따로 있었구나.‘ 하면서, 감격으로 그 분을 영접하게 돼 있습니다. ’야, 드디어, 드디어 내 실상이 낱낱이 드러나는구나.~ 아~ 이 즐거운 분위기, 이 기쁜 감격!, 이건 돈 주고 살 수 없는 감격이잖아요.
그동안 내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가 따로 역사의 주인공이 등장할 때, 그 얼마나 기쁘겠어요? 지난, 그 지난 아시안게임에서 연이어 두 번이나 마라톤 우승한 사람이 있습니다. 케냐 사람인데 돈 보고 카타르란 사람이 와 있는데, 요번에도 우승하려고 마라톤 뛰다가 지보다 한국 선수가 앞에 가니까, 팔로 쳐버렸어요.ㅎ 사람이란 이런 거예요. ‘이 1등 자리는 내 자리야. 그리고 이 보이는 자리는 내 자리야. 의로운 자리는 내 자리야.’ 어디 감히 나 말고 의롭고 더 착한 사람 있으면요 존경스러운 게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게 돼 있습니다. 일어나는 것을 자연스럽게 그걸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아, 이래서 내가 더 이상 나 자신을 숨기고자 해도 말씀 앞에서는 숨길 수가 없구나.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을, 사악한 자를 어떻게 뽑아내는가? 그 중간 과정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중간과정으로 나와 있기 때문에 앞 과정, 뒷 과정 다 이야기해야 돼요. 앞 과정에서 그 여자의 후손을 뽑아내면서 여자의 후손이 개입하게 되면, 거기서 어떤 집안이 생깁니다. 그 집안을 아브라함 집안이라고 봅시다. 봅시다가 아니고 아브라함 이예요. 그 전에는 노아집안이 먼저 생길 때, 그 노아집안이 생길 때 찐빵 속에 앙꼬처럼 쏙 들어가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그걸 ‘언약’이라고 합니다.
언약이라는 요소에 의해서 언약에 합당한 집안이 생기는데, 그 언약의 집안의 특징이 뭐냐 하면, 다른 사람은 모르는 것을 그 집안은 알아요. 다른 사람은 뭘 모르느냐 하면, 죄인인 걸 모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의 집안 말고는 사람들이 유황불 맞아야 마땅함을 아는 집안이 없어요. 소돔과 고모라에.
지금 대구 땅에서 구원 받은 사람 있다면, 그 집안이 어떤 집안이겠습니까? 우리는 유황 불 받아야, 이 대구가 불바다 돼야 마땅합니다. 라고 유일하게 아는 집안 이예요. 그렇잖아요?ㅎ 하나님의 심판의 약속을 유일하게 믿는 사람 이예요. 그리고 거기서 구원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되지, 자기가 선해서, 착해서 구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말이 어려운데 쉽게 해봅시다. 롯이 평소에 꾸준하게 착할 것 같으면, 천사가 올 필요가 없어요. ‘니 원래 착하기 때문에, 착한대로 구원받아. 천사가 와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롯의 개인적인 선행으로 자체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 언약으로 말미암아 소돔과 고모라에서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롯의 부인 같은 경우에는 뒤돌아보지 말아야죠. 뒤돌아봐서 소금기둥 됐잖아요. 요새 소금 값 얼마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ㅎ 완전히 사람이 소금기둥 됐다 말이죠. 소금기둥 된 이유가 뭐냐 하면, ’뒤돌아보면 안 된다는 말씀이 이게 빈말이 아니고 진짜 그 말인 거예요.
그래서 결국 롯의 가정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가짜가 아니고, 허위가 아니고, 진짜 그렇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롯의 가정은 언약에 의해서 조성이 된 가정이 되는 겁니다. 그 가정 내에서 만큼은 언약이라 하는 것이 실제 현실이 되는 겁니다. 그처럼 롯의 가정을 통해서 할 때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저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새로움이라는 것은 우리가 날마다 개과천선해서 새로운 게 아니고, 새로운 지시, 새로운 언약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합니다. 아~~하나님의 언약이라 하는 것은, 역시 예수님 중심의 역사지, 내 중심의 역사가 아니구나.‘ 라는 날마다 새롭게 새록새록 알게 되면, 그것이 은혜요 그것이 신앙생활 하는 재미가 되는 겁니다. 내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인 것을 자질구레한 일 속에서 새롭게 그걸 접촉(발견)을 할 때, 그게 우리 마음도 그 순간만큼은 새롭게 달라져요. ’아~ 더 이상 나를 생각할 필요 없고, 내가 잘하든 못하든 나하고 하나님하고 상관없구나. 주님하고 상관있구나.~ 라는 걸 새롭게 알게 되면, 내가 실수를 하더라도 또는 내가 착한 일 했더라도 그 자체에 대해서 연연하지 않는 아주 가벼운 마음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뽑아 나오는데 노아 식구 이후에 나오는 게 이스라엘이거든요. 민수기 14장 31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어른들은 말하기를 ‘광야에서 우린 절대로 약속의 땅에 못 간다.’ 왜? ‘약속의 땅에 먼저 선점하고 있는 세력들은 우리보다 더 무기가 발달하고 우리보다 힘이 세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오도가도 못 하고 광야에서 죽게 되었다. 다 하나님 때문이다.’ 하고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대들고 했어요.
‘우리가 못 들어가는데 어린애들은 어떻게??...우리는 살만큼 살아서 죽어도 괜찮은데, 이 불쌍한 어린애들은 어찌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망쳤느냐?’ 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래? 너희 어린애들이 못 들어간다고? 그래? 그렇다면 내가 너희들은 못 들어가지만, 너희 집에 있는 어린애들은 들어가게 만들겠다. 그래서 너희들의 사고방식을 부끄럽게 만들겠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가게 되면, 상식 밖 이예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언약을 받게 되면, 뭐를 발휘하게 되느냐 하면, 우리의 속성을 발휘하게 되는데, 마귀의 속성, 거부하는 속성부터 발휘가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겠다.’ 하니까, 사라도 웃었고 아브라함도 웃었고, 둘 다 짝이 되어서 웃었어요. 껄껄 웃었습니다. ‘이 나이에 무슨 애를 낳느냐? 이 나이에? 이미 모든 것이 자궁이 죽었는데, 죽은 자궁에서 무슨 애가 나오느냐?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여러분! 하나님은 항상 말 같지도 않은 것 가지고 우리에게 믿느냐고 이야기 하십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말은 절대로 그걸 언약으로 하신 적이 없어요.ㅎ
‘내가 마귀다. ’내가 개 같은 인간이다.’ 라는 것을 자랑할 때 비로소 믿어지는 내용만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나는 훌륭합니다. 나는 착합니다. 나는 똑똑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더 착한 인간이 더 착해지는 그런 요소로서 우리에게 말씀 주신 적이 없습니다. 항상 먼저 우리를 ‘니는 착하지 않아. 니는 오만한 자야.’라고 깨닫는 식으로 주어질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포기하면, 그제야 동행해서 자기를 못 믿으니까 결국은 믿은 것은 주님의 약속밖에 없잖아요? 그런 식으로 믿게 하시는 거예요.
제가 어떤 글에서 그런 글을 써놨죠. 사람은 남을 못 믿겠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가 우리를 믿어선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나를 망치는 자가 남이 아니고 내가 나를 망쳐요. ‘나는 착해질 수 있다. 나는 행할 수 있다. 바르게 할 수 있다.’ 맨 날 자기를 역사 중심으로 삼으니까, 그런 안개 같은 존재에 의미를 두니까 그것이 우리를 망치는 거예요. 제발 자기 자신을 포기하세요. 포기하면 비로소 이세상의 주관자가 내가 아니고, 우리 가정의 주관자가 내가 아니라, 우리 가정의 주관자가 주님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이 만들어졌는데, 그 이스라엘이 나와서 12지파가 될 때, 그 중에서 뽑아낸 한 지파가 뭐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다지파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할 때, 자기가 괜히 하고 싶어서 했다면, 이것은 유다지파 뿐만 아니고, 다른 지파도 똑같은 권리가 있습니다. 베냐민지파도 이런 소리 하겠습니다. ‘우리 베냐민 지파가 하나님이 언약을 해서 하나님이 지켜주고.....,’ 그걸 누가 못해요? 다 할 수 있어요.
온 아파트 층수마다, 온 가정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다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만약 어떤 아파트에 20층 각 집이 전부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그 집마다 전부 다 앞에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윗집에 가면,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또 다른 집은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면 된다.’ 등을 걸어놓고 얼마나 그걸 좋은 걸로 하겠어요? 이렇게 어느 집이나 현판 같은 것이 걸려 있다는 말은, 누구나 사람은 자기를 자기역사의 중심으로 삼는 것은 할 수 있다 말이죠.
그러나 다윗은 그게 아니에요. 다윗이 이런 이야기 하는 것은, 그 나머지 12지파를 전부 다 제쳐두고, 오직 다윗지파에게만 특별히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라고 언약을 준 겁니다. 많이 피곤하신데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그런 언약을 주어지게 되면, 뭘 먼저 다윗은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나는 ‘하나님은 우리 가정 중심이야. 우리 가족중심이야. 우리 지파중심이야.’ 라는 생각부터 이것이 잘못이라는 걸 알아야 돼요. 아, 굉장히 어렵죠? 하나님께서 ‘야, 다윗가문, 유다가문은 특별히 택한 가문이야.’라고 이야기해서 느껴지는 것과, 평소에 인간의 본성으로서 ‘역시 하나님은 우리 가문 중심이야.’ 라는 평소에 내가 생각했던 ‘하나님은 내 중심이야, 우리 중심이야.’ 라고 생각했던 것과 둘을 뽑아 낼 수 있어야 돼요. 다 뽑아내야 돼요.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는 것과 ‘예수님이 날 구원할 거야.’ 라고 내가 평소에 본성적으로 하고 싶은 생각 이 2개를 뽑아 낼 수 있어야 됩니다. 그 차이점을 본인이 알고 있어야 돼요. 그걸 만약에 모르게 되면, 자기가 평소에 하는 생각이 성경 말씀인 줄 알고 자꾸 남한테 거짓말을 하게 돼요. 고 2개를 싹 뽑아내게 되면,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기 때문에 더 이상 나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하는 것은 내가 일방적으로 생각한 것이고, 주님께서 이제 우리 편이기 때문에 찬송가에 있는 제목처럼, ’주 예수 외에는 더 귀한 것이 없네.‘ 라는 고백으로 나와요. ’주님은 내 편이다.‘ 라고 양쪽 다 똑같은 말을 해놓고, 그담에 그래서 주 예수보다 더 귀한 분은 없네.’라는 고백이 즐겨 그게 나와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고,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사람은, ‘주님께서는 내 편이야. 그래서 이제는 내보다 귀한 나는 없네,’ 이래 나오거든요. 그러면 그것은 엉터리죠. 잘못된 겁니다. 그거는 지가 착각한 거죠.
왜 찬송가 가사 있잖아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주님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그럼 주님께서 놀라죠. ‘아이, 그걸 믿어?’ ‘믿습니다.’ ‘그럼 한 번 믿어봐.’ ‘그럼 이런 경우도 한 번 믿어봐라.’ 하고 픽, 픽, 가정에서 우환이 생기죠. 또 마이크 대고 ‘느낌이 어때?’ ‘주 예수보다 귀한 게 없습니다.’ ‘어? 아직도???ㅎㅎ 그럼 더 심한 거, 난이도 5, 줘버리죠.ㅎ 이래도 ’다시 한 번 소감이 어때?‘ ’주 예수보다 귀한 게 없습니다.‘ ’이거 고집 한번 세구나.’ ‘더 심한 거‘ ㅎㅎ 그제야 울게 되고, ’진짜로 주예수 보다 귀한 게 없습니다.‘ ’이제야 아는구나, 이제야 내가 너희를 택한 줄을 니가 알리라.‘
다윗이 그런 지경에서 비로소 여자의 후손과 악마의 후손이 어떻게 역사 속에 사악한 자와 진짜 사악했는데 구원 받은 자와 어떻게 갈라지는지, 그것은 진짜 동행하는 사람, 진짜 주님이 계신 분들은 모든 일에서 결국은 ‘주 예수보다 귀한 게 없습니다.' 라고 감격과 즐거움과 기쁨으로 그걸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